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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약진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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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후진 운동

대약진_운동.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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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농업대약진의 포스터.
뭔가 정신줄을 안드로메다로 보내는 것 같은 느낌
버섯 모양 비슷한데 농업에 핵폭탄을 떨어뜨렸단 의미라든지 수확물이 송두리째 저 멀리 승천해버리는 느낌을 주는 게 왠지 적절하다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전말
3.1. 실제 집행된 정책
3.1.1. 농업집단화
3.1.2. 토법고로
3.1.3. 제사해 운동
3.1.4. 벼를 빽빽하게 심기
4. 비참한 결말
5. 먹을 것이 없으면 끼니를 줄여라
6. 비난을 피한 첸쉐썬
7. 마오쩌둥의 성격, 사상과 대약진 운동
8. 대약진 운동, 그 후

1. 개요

超美赶英 - 毛澤東 미국을 넘고 영국을 따라잡는다... 마오쩌둥
천조국의 기상을 넘어 영국의 기행을 따라잡나 보다.

문화대혁명과 자웅을 겨루는 마오쩌둥의 희대의 병크짓. 정식 명칭은 제2차 5개년 계획. 그 유명한 토법고로제사해 운동은 대약진 운동의 일부분이다.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을 옥수수로 도배하며 미국의 경제력을 능가하겠다고 도발하자, 수확해서 수출한 것을 다이아몬드로 바꾸었으면 가능했었을지도? "나도 질 수 없음!"을 외치며 마오쩌둥이 시작했다.

2. 배경

중국은 건국 이후 여러 부문에서 소련벤치마킹하는 정책을 폈고, 마오쩌둥도 짧은 기간에 후진농업국에서 선진공업국으로 탈바꿈한 소련의 발전 경로를 따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소련에서 많은 원조를 받고, 소련의 기술자들을 고용해서 개발계획을 실시했다.

그러나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집권한 흐루쇼프가 서방과의 화해를 추진하자 마오쩌둥은 이에 반발하게 된다. 물론 영향을 받긴 했는지 백화제방으로 일시적으로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마오쩌둥의 성격에 영 맞지 않았는지 얼마가지 않아 때려치웠다. 게다가 아래도 나오겠지만 소련은 기술 원조의 명목으로 중국에 거의 '사기'를 쳤으며, 중국-인도 국경분쟁에서도 인도 편을 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마오쩌둥과 중국은 우리식대로 살자를 추진했다. 잠깐 이건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긴데

중국은 당시 북으로는 소련, 서로는 인도, 남으로는 미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던 데다가, 소련과 관계가 나빠지자 동유럽과도 틀어지고, 인도와 관계가 나빠지자 제3세계에서도 우방국이 사라지는 등, 외교적으로도 북한이나 베트남을 제외하면 우방도 거의 없었다. 이런 위기감에 마오쩌둥은 자신도 70대 나이에 접어들어서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 사회주의 강국을 건설할 수 없다는 조급증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중국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속도로 최대한 빨리 발전"시키려고 했다. 미국이나 소련의 경제발전 속도를 뛰어넘어 10년안에 이들과 맞장 뜰 강국을 건설한다는 것. 그것을 위해 농업생산과 공업생산을 폭발적으로 늘려 지상낙원 사회주의 국가를 완성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유토피아를 향한 조급성이 이 운동을 지배했고, 국가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실험도 안 해 보고 검증도 안 된 여러 가지 사이비 이론에 따른 엉터리 정책이 마구잡이로 실시되었다.

3. 전말

한국에서는 공상적 계획의 산물로서 일방적인 병크로 흔히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좀 다르다.

국가가 주도하여 농업을 희생시키고 대신 급속한 공업화를 밀어붙이는 이런 경제개발은 사실 1930년대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실시한 5개년 계획이 원조다. 그 이전까지 서유럽미국의 공업화는 수십~수백년에 걸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역사상 국가권력의 힘으로 단기간에 계획을 세워서 밀어붙인 사례는 보통 소련을 최초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소련이 인력, 물자, 금융 모든 것을 국가가 통제하는 초강력한 독재+전면적 계획경제 국가라서 가능했던 일이었고 나름 성공적이었다. 이걸 보고 중국이 따라했는데 문젠 중국은 소련에 비해서 농업인구의 비중이 훨씬 높았고, 거기다 소련에 비해서 기술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공업드라이브는 매우 모험적인 것이었다.

거기다 당시 중국은 서방과는 물론 소련이나 다른 동구권 공산국가들과도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 기술원조를 받을 수도 없었고, 식량자급을 이루었다는 선전을 한 그놈의 체면 때문에 공업드라이브로 감산한 식량도 수입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상황이 좋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타국의 사례를 그대로 적용한 것도 모자라서 체면 차리려고 뒷수습도 못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남의 나라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도 안 하고 타국의 도움없이 계획을 추진하려니 무리수가 작렬했다. 일단 모든 인민들을 생산 단위로 묶어 취식을 함께 하도록 했다. 덤으로 각 마을마다 할당량을 부과하여 생산하게 했으며, 모든 마을에 소형 용광로 즉, 토법고로를 배치하여 대형 공장을 대체하고 강철을 생산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여담으로 저런 소련식 공업화 계획은 1930년대 후반 만주국의 일본인 관료들이 복사해서 그대로 시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위 만주인맥이라고 해서 일제강점기 시기 관동군과 만주국을 경험한 관료, 전문가 그룹이 이후 한일 양국 정권에 상당부분 포진해 있었던 것이 20세기 중후반 양국 경제정책을 수행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북한의 김일성도 당연히 소련의 영향을 받아서 정부가 주도하는 급진적 공업화를 추진했는데 북한도 초기에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1970년대 초반까진 3세계 국가들 중에선 경제발전이나 생활 수준으로도 선두권이었다. 다만 그 이후에 '계획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에 '국방/경제 병진 노선'을 택하면서 군사비 부담으로 주저앉게 된다. 물론 북한은 소련과 중국에서 받은 '막대한 원조'도 한몫했다.지들 먹고살기도 힘든 중국이 북한 돕는 안습 처지 실제 계획경제 특유의 비효율성이 부각되기 시작하고 소련과 동유럽의 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한 1960년대 말부터 독립채산제 등 경제개혁에 관한 논의가 북한 내에서 있었으나 곧바로 김일성의 확고한 1인숭배체제가 확립되면서 그냥 묻혔다. 결국 1980년대의 대삽질과 소련붕괴의 영향으로 경제가 붕괴되면서 북한의 경제정책도 실패로 돌아간다.

다만 최근엔 1972년 역전론을 반박하는 주장도 나오고있다. 남한에 유리한 쪽으로. 사회주의의 통계라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비해 과장이 훨씬 심각하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고 보면 이미 1960년대에 북한의 경제력은 남한과 최소한 대등, 심하면 추월당했다는 것이다. 이 과장의 사례를 들자면, '빨랫줄 공장에서 빨랫줄을 만든 뒤 빨랫줄을 풀어 밧줄을 만든 뒤 밧줄을 풀어 다시 빨랫줄을 만들면 분명 빨랫줄도 밧줄도 통계상으로는 생산되었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련 유학파인 모 대학 교수가 주로 드는 예시. 주제는 대약진 운동인데 남북얘기가 왜케 많냐

3.1. 실제 집행된 정책

크게 농업집단화와 토법고로로 나누어지며, 함께 진행된 제사해운동도 워낙 영향이 커서 대약진 운동을 설명할 때 들어간다. 이외에 여러 가지 정책이 있었다.

3.1.1. 농업집단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나서 지주계급은 숙청되었고, 중국농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게 되었다. 이렇게 생산량이 점점 늘어나자, 마오쩌둥은 소련식 집단화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인민공사, 영어로는 commune(코뮌)을 설립해서 협동농장으로 개편했다. 소련의 예에서 보듯이 이는 농업생산량을 극도로 떨어뜨리는 조치였다.

이를 위해 인구이동을 법적으로 금지해버렸고, 집에 재산을 쌓아두거나 음식을 저장하는것은 반동분자로 몰아 강력하게 처벌했다. 농업 생산량에 맞춰 인구를 재배치하고, 저축/보관을 통해 대비하는 게 불가능해져 결과적으로는 재앙을 더 키워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이 당시의 폭력은 훗날 문화대혁명 때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덤으로 인구 이동을 제한하는 제도는 느슨해졌지만 21세기가 된 현재도 시행되고 있다. 호구제(戶口制)라고 하며, 자기가 소속된 호구를 벗어나 다른 지역에 가서 일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는다.

3.1.2. 토법고로

마오쩌둥은 제딴엔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매집마다 뒤뜰에 토법고로를 지어서 대규모의 용광로 없이도 강철 생산량을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각 지자체마다 증산 경쟁이 벌어졌고, 국민당시절부터 관료주의로 찌든 지방관료들은 허위보고와 임시변통, 예를 들면 멀쩡한 물건을 고철로 만들어 녹인 것으로 엉터리 생산량을 중앙에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토법고로에 쓸 연료를 구한답시고, 주변 삼림을 모두 벌목해 버렸으나 정작 만든 건 기술부족으로 인한 조악한 품질의, 우리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똥철이었다(…). 덕분에 농기구들은 모두 잡철이 되었고, 이는 다시 농업생산량을 반감시켰다. 당연히 이런 똥철은 등 유용한 재료로 사용할 수 없으며, 제대로 사용하려면 다시 녹여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연료비와 시설투자가 필요할뿐더러, 이렇게 해도 애초에 제대로 철강을 생산한 것보다 품질이 떨어지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똥철을 만들기 위해 멀쩡한 농기구와 각종 도구를 토법고로에 넣어서 녹이는 아스트랄한 상황이 연출되었는데, 애초에 토법고로의 목적이 강철을 생산해서 각종 도구와 장비를 만드는 것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본말전도된 사태였다.

3.1.3. 제사해 운동

대약진 운동과는 별개로 "제사해운동"이 실시되어 전반적인 위생개선운동을 벌였는데, 문제는 위생과 별로 상관없는 참새를 대대적으로 사냥하는 개판을 벌였으니… 여름에 병해충이 들끓게 되었다. 사해란 참새, 쥐, 모기, 파리를 의미한다.


3.1.4. 벼를 빽빽하게 심기

논에다 벼를 아주 빽빽하게 심었는데, 이는 칼텍에서 항공공학과 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칼텍 교수를 역임한 쉐썬 박사의 아이디어였다. 첸박사는 생산량 증분을 수학적으로 증명해서 마오쩌둥에게 보고서를 냈고, 이를 본 마오쩌둥이 "신묘한 계책"이라고 하면서 실험도 안 해 보고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현실과 이론의 차이

문제는 농업분야에서는 문외한인 첸쉐썬 박사가 내놓은 계산은 전혀 농학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첸박사가 제시한 모와 모의 간격은 10cm × 15cm이다. 이게 얼마나 병신짓인지 부연설명을 곁들이면, 모와 모의 간격은 최소한 12cm × 20cm은 유지해줘야 한다. 이것도 계단식 논에서나 어쩔 수 없이 쓰는 최소한의 간격이다. 그 이하로 간격을 좁혀 심으면 벼와 벼끼리 생장을 방해하면서 병충해가 발생하기 쉬운 조건이 된다.
그런데 참새까지 전멸시켰잖아? 해충 : 야! 신난다~

그리고 수확도 크게 줄어드는데, 생장을 방해하는 가까운 벼보다 더 크게 자라기 위해 낟알을 줄이고 잎을 늘려 광합성을 하는 것이다. 결국 모 20개 심어서 나올 수확보다 정상적으로 모 10개 심어 나오는 수확이 더 많게 된다. 당연하게도 생산성 하락 등의 농업 재앙의 조짐을 보였다.

4. 비참한 결말

결국 1960~1961년에 홍수가뭄의 자연 재해가 발생했는데, 이는 토법고로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캐서 숲을 모두 민둥산으로 만들어서 생겨난 인재였다. 결국 이 자연재해는 운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결국 대기근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사망자와 비슷한 3,000~5,000만 명의 사람들이 순식간에 증발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한방으로 죽은 사람들의 수가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의 수와 독소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수를 능가한다. 히틀러가 학살한 유대인이 600만명 정도, 독소전쟁 사망자가 소련인만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900만명[1] 정도로 추산되는데 그 합계만큼을 한방에(…)

사실 중국이었으니까 이런 대참사에도 인구손실을 딛고 일어날 수준의 회복을 보였지, 타국 같았으면 그냥 국가가 절단나고도 남았다. 숫자가 실감이 안 난다면 대한민국 5,000만 인구가 모조리 사라졌다고 생각해보자.[2]

참고로 중국의 인구는 1955년 606,736,000명에서 1965년 715,546,000명까지 늘어났다.(!) 대약진 운동 이후론 인구가 더욱 빠르게 증가해 1975년 917,899,000명까지 늘어난 이후 덩샤오핑의 한 자녀 정책으로 인구 증가는 주춤하고 있다. 같은 기간 동안 인도는 404,268,000명(1955)에서 494,960,000명(1965), 618,923,000명(1975)까지 증가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다만 70년대 이후에 출산율이 크게 떨어진 편.

이때 정부는 대약진 운동이 잘되고 비축 식량이 있다는 걸 선전하기 위해 식량을 무상으로 원조한다든가 외국 인사들을 초청해 파티를 벌였지만(…) 식량이 가득 차 있다던 창고 문은 굶주리는 인민들을 위해 열리지는 않았으며, 마오에게 편지를 보내 문제점이 있다고 항의한 당시 국방부장 펑더화이(팽덕회)는 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인민 해방군 서열 2위의 원수 중 하나이자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총사령관으로 맹활약했던 그 펑더화이이다.

이후 펑더화이는 문화대혁명 당시 류사오치와 함께 가장 혹독하게 박해를 받게 된다. 그나마 다행히 펑더화이는 당적을 모두 빼앗기고 시골로 낙향해서 농부로 살다가 1974년에 사망. 덩샤오핑때 다시 당적이 복구되었다.

5. 먹을 것이 없으면 끼니를 줄여라

당시 중국은 6.25때 참전을 하기 위해 소련으로부터 소총부터 MiG-15와 같은 최신식 무기까지 대량으로 사들이고 이후 MiG-17에 대한 라이센스권을 구매하는 등, 소련제 무기를 적극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탄도 미사일 기술과 핵무기 기술을 이전해준다는 조건으로 1956년 <중소합작>이라는 이름으로 소련에 거액의 계약을 하였다. 물론 소련은 중국을 호구로 알고 돈은 받아쳐먹으면서도 기술을 이전해 줄 생각이 없었다.

사실 소련 뿐만 아니라 이건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다. 기술이전의 범위가 계약상에 모호하기 때문이다. 한국도 외국 군수업체에 휘둘린 바 있고, 나로호를 보면 전략무기의 기술이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지 답이 나온다. 애초에 러시아한테 기술을 이전받을 기회가 있었던 것도 러시아의 경제가 말 그대로 개판 5분전이어서 가능했던거다. 경제가 정말 개판이 아닌 이상 다른 나라에 전략무기 기술을 이전해주겠다고 하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것.

그러나 당시 중국은 외화가 부족했고, 소련에게 대가로 지불할 만한 것은 식량 밖에 없었다. 마침 소련도 식량자급을 못해 상당량의 곡물을 외국에서 수입하던 처지였던지라 중국이 식량으로 이를 갚는다는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소련은 중국을 호구로 보고 우방국 혜택을 전혀 주지 않았으며, 계속 중국에게 무기대금을 독촉하는가 하면, 탄도미사일핵무기 기술 이전을 해준다고 모셔온 소련의 고문들은 핵심기술은 감추고 구식기술이나 잔기술만 이전해주었다. 그나마 이런 용접이나 기계공작법 같은 기초적인 잔기술도 나중에 중국이 독자개발 할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유일한 이득일 정도였다. 어찌되었든 중국은 이런 소련의 행동에 배신감을 느끼고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다. 더구나 1959년 흐루쇼프는 이렇게 중국과 사이가 벌어지자 1956년에 맺은 중소합작을 파기하고 소련인 기술 고문들을 모조리 데려가버렸다. 이 때문에 중소 사이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이 벌어졌고, 중국은 독자적으로 핵무기와 유도탄을 개발하게 된다.

참고로 흐루쇼프는 마오가 서방과 핵전쟁을 불사해야한다고 주장하는걸 듣고, "이런 미친놈 봤나!"고 생각해서 핵무기 기술 전수를 중지시켰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소련은 중국에 핵무기 기술을 전수시켜줄 마음이 없었다. 아무리 우방이라도 로켓이나 핵무기같은 전략무기에 관한 핵심기술을 이전해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보유국들은 다 독자개발한 것이다.

어찌되었든 문제는 중국의 지도부가 벌인 여러 삽질과 자연재해가 합쳐지면서 곡물 생산량이 반감했는데도, 소련에게 "상환좀 늦춰주면 안 되나?"고 말하다가는 자국의 기아가 들통날 지경. 그러면 체제경쟁에서 이런 기아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리면 소련에 체면이 안서므로 어떻게든 곡물 수출을 계속하여야 했다.

이런 마오쩌둥에게는 연일 중국 각지에서 수천만 명의 국민들이 굶어 죽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대인배스럽게 대꾸했다.


사실 국민당 시절에는 이런 큰 기근은 없었으나 기근이 일반적이었던데 반해 공산정권이 들어선 다음에는 이렇다할 기근이 없었던 것도 마오가 저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근데 기근은 그의 예상보다 훨씬 심각했다.

결과, 수천만 명의 중국인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도 "우리는 풍년이 들었다!"허세를 부리며 이전의 무기대금+기술 라이센스비로 소련에 수많은 농축산물을 상환했다. 잠깐, 이거 누구랑 비슷한데?

결국 사람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인육을 먹거나 그냥 굶주림 속에서 얼어죽어야 했다.

6. 비난을 피한 첸쉐썬


첸쉐썬 (1911-2009)

한국에서는 저 새는 해로운 새다로 대표되는 마오쩌둥의 똘끼가 저런 참사를 야기한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이후에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이 대약진 운동의 기본 논리는 쉐썬 박사가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첸쉐썬 박사는 항저우에서 태어나 상하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칼텍에서 수학과 항공공학의 박사학위를 취득, 이후 MIT 교수를 역임하고 칼텍 교수로 있던 세계적 과학자로서, 매카시즘 시절에 미국에서 중공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한국전에서 잡힌 미국 포로와 교환되어 1955년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결국 미국은 스스로 중국에 미사일 개발 1급 인재를 넘긴 셈이었다. 첸쉐썬의 업적에 관해서는 중화인민공화국/경제 부분을 참조바람. 근데 대약진 운동만 놓고 보면 미국 스파이같다

중국은 이렇게 미국에서 쫓겨난 첸쉐썬 박사를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첸 박사는 중국의 미사일 개발을 담당하며 마오쩌둥을 자주 만났다. 세계적인 학자였던 첸쉐썬은 마오를 만난 자리에서 "주석 동지, 이리저리 해서 이렇게 하면 중국을 금방 미국만한 선진국으로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설레발말했고, 이런 자신의 논리를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첸쉐썬의 기본 논리는 단위 면적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곡물을 빽빽하게 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작물은 태양 에너지에 의해 자라는데, 태양 에너지는 충분하므로 물과 비료만 계속 공급하면 작물 생산을 20배 늘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이런 것을 그냥 예상만 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로 계산해서 정말로 그럴듯하게 보였다는 점. 전직 MIT 교수가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하는데 넘어가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은 이 말을 듣고 솔깃해서, "오호 정말 그렇단 말이지?"라고 하며 대약진 운동을 추진했고, 결과는 파멸(...). 미국: "첸 박사가 해냈어"

흔히 마오쩌둥의 환상적 병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뒤에는 마오쩌둥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MIT와 칼텍의 교수 역임이라는 어마어마한 권위를 가진 첸 박사가 있었던 것이다. 톡깨놓고 말해서 어떤 집단에 박사 학위자가 하버드 교수 한 명밖에 없는데하버드 교수가 무엇을 권유한다면 흘려들을 수 없지 않겠는가? 원래 이런 수준의 권위를 가진 사람은 스스로의 말이 가진 파급력을 조심해야 하지만 첸 박사는 그걸 간과했던 것이다.

게다가 첸 박사는 일급 과학자였지만 농학은 전공한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순전히 책상머리 계산만 가지고 '비료 증원 + 파종 밀집도 증가 = 식량증가'라는 방정식을 만들어서 검증도 없이 게시한 셈. 애초에 자신의 전문분야도 아닌데 실험조차 안 한 아이디어를 제안이랍시고 내놓은 것부터 첸 박사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허나 첸 박사의 잘못도 크긴 하지만 이렇게 검증도 안 된 설을 실험도 거치지 않고 전국적으로 밀어붙인 건 마오쩌둥의 책임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마오쩌둥의 삽질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첸 박사의 잘못된 아이디어로 빚어진 참극으로 마오가 오명을 뒤집어쓰는 동안 그 논리를 제공한 첸 박사는 비판의 화살을 피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첸 박사는 중국의 우주개발을 이끌었고 핵무기 제조까지 감독했다. 중국의 1세대 미사일과 인공위성, 핵무기는 모두 그가 이끈 연구팀이 만들어냈다. 한국에서 알려진 이휘소 신화의 상당부분은 전직 MIT-칼텍 교수였던 첸쉐썬이 중국에서 실제로 이뤄낸 일이다. 중국이 문화대혁명이라는 국가 멸망에 가까운 크리를 맞는 와중에도 항공 공학이나 미사일 면에서 기술축적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마오가 비판의 화살을 맞는 동안 무사했던 그의 덕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첸 박사를 대체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전공분야에서의 실적은 너무나도 뛰어났기 때문에 마오와 저우언라이는 대약진 운동 참극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첸 박사를 끝까지 보호했으며, 첸 박사는 이런 신임을 바탕으로 중국의 우주개발을 이끌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7. 마오쩌둥의 성격, 사상과 대약진 운동

대약진 운동의 참극은 마오쩌둥의 성격이나 사상과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가 없다. 이런 급격한 성장이 가능하다고 믿은 것은 마오쩌둥 특유의 정신력 드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정신력드립은 그가 살아온 경로나 이룬 업적으로 볼 때, 필연적으로 빠져들게 되어 있었다.

마오쩌둥은 수십명의 게릴라 부대로부터 출발해서 끝내 500만을 거느린 장제스를 패퇴시키고 중일전쟁때는 400만의 일본군을 애먹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때 출병한 중공군은 마오쩌둥 특유의 전법으로 장제스일본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기술적으로 우월한 미군과 호각을 다투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마오쩌둥은 사상적으로 각성한 병사들의 자발성과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군대는 기술적으로 우월한 적들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마오쩌둥도 정신력의 과신의 함정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이것이 경제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생각했고, 사상성, 즉 다른말로 말하면 정신력만 있으면 객관적인 조건을 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논리로 경제면에서 도저히 객관적으로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중공군이 군사적으로 성과를 이루었던 것은 단순히 정신력으로 이룬 것이 아닌, 적절한 전략, 전술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화력을 보완했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은 인해전술 참조.

반대로 대약진 운동은 아예 방식부터 잘못 되었고 그 것을 그냥 밀어 붙였으니, 정신력 운운하는 꼴 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중국인민 2-3천만이 굶어죽는 참극으로 끝났을 뿐만 아니라 그 후의 문화대혁명이 겹쳐지면서 성장이 20년 지체되는 결과를 낳았다.

마오쩌둥은 농민 출신이었지만, 어린 시절 집을 떠나서 오랜 세월 동안 혁명에만 몰두하느라 농사에는 매우 무지했다. 그래서 같은 넓이의 논에 쌀을 수북하게 쌓아놓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의 단위 생산량이 보고되는 등,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생산량이 보고 되고 있는데도 어리석게도 통계 날조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마오쩌둥 한 사람뿐 아니라 총체적 원인은 일당독재정권에서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권위가 만들어낸 병크일 것이다.

8. 대약진 운동, 그 후

대기근으로 대약진 운동은 철회되고,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중국 공산당 내부가 분열하기 시작했다. 이 실패 때문에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덩샤오핑류사오치가 부상하게 된다. 서서히 당 내에서 권력을 잃어가고 있었던 데다가 가뜩이나 자신의 멋진 계획(…)을 비판하던 지식인들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 시작한 마오쩌둥은 결국 문화대혁명이라는 세계 역사에 길이 길이 남을 병크를 터뜨리게 된다. 대삽질 운동

대약진 운동을 다룬 영화로는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이 있다. 공리와 갈우 주연. 이쪽은 일제시대부터 문혁까지를 폭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 역사병크를 조금이나마 알고 싶다면 꼭 볼만한 작품. 토법고로, 집단농장으로 대표되는 대약진 운동아쉽게도 저 새는 해로운 새다는 안 나온다홍위병으로 대표되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거대한 사건병크들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토법고로와 협동농장 부분은 꽤나 자세하게 나오니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당시 시대상을 참고하기에 좋은 편.

이렇게 대약진 운동은 1960년대 들어 진정되었으나, 중국은 마오쩌둥이 사망하는 1976년까지 식량부족을 간당간당 넘기며 겨우 기근을 피해 갔다.[3] 덩샤오핑 이후 대대적인 개혁, 개방이 이뤄진 후에야 식량 부족 사태는 근절되었으며, 덩샤오핑은 중국에서 최초로 기근을 없앤 지도자로 칭송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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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중 군인 전사자는 약 1,000만명. 참고로 총 사망자 수는 4,000만 이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 [2] 이건 좀 과장된 비유로 인구의 100%가 절단나기 전에 뭔가 다른 게 절단이 났을 터이다. 중국의 스케일이 워낙 거대해서 한 번의 치명적인 병크에도 피해가 어이없을 정도로 거대한데 타격은 수치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적게 받았다고 봐야 된다. 즉 중국이니까 이런 초현실적 재난이 발생했고, 또 놀랍게도 극복할 만한 수치였다. 실제로 19세기 중국에서는 평범한 기근으로 천만명이 훌쩍 넘는 인구가 아작났고 이는 동시기 조선이었으면 국가 멸망에 가까운 수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중국 인구는 성장세였다.
  • [3] 1959년 이후로는 중국에 큰 기근은 없었고, 식량배급이 적어질지언정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절처럼 대규모로 굶어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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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06 00: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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