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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last modified: 2015-04-09 23:34:20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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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대종교에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단군 진영은 왼쪽 것이며,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1949년, 초대 문광부장관 안호상 박사[1]의 청원을 받아들여 대종교 진영을 단군의 공식적인 진영으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1977년에 사단법인 현정회(現正會)에서 오른쪽 단군 진영을 승인해달라고 정부에 요청, 승인받았다. 둘 다 국가공인 단군 진영이지만, 대종교에서는 당연히 현정회 측 단군 진영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종교 측 설명에 따르면 왼쪽 단군 진영은 나철 선생에게 어떤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신라 시대 솔거가 그렸던 단군 진영이라면서 그림 한 장을 넘겨준 바, 다른 화가를 시켜 모사한 것이라고 한다.

Contents

1. 개요
2. 역사
2.1. 대한제국
2.2. 일제강점기
2.3. 미군정 ~ 대한민국
3. 환빠 문제
4. 기타

1. 개요

단군을 교조로 하는 한국 고유의 종교. 1909년에 홍암 나철이 창교했다. 대종교에서는 창교가 아니라 중광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대종교측의 입장은 나철이 대종교를 만든 게 아니라, 오랫동안 묻혀 있던 민족의 고유 신앙을 나철이 다시 복구했다는 것. 천부경과 삼일신고를 경전으로, 삼진귀일을 교리로 하고 있다.

흔히 단군을 '숭배'하는 종교라 오해받는데, 물론 100% 틀린 것은 아니지만 주신은 천제, 즉 하느님이다(하나님이 아니다!). 단군을 '한얼(한군의 정신)님'이라 부른다. 즉, 민족의 뿌리에 위치. 따지고 보면 이 종교에서의 단군은 기독교예수와 비슷한 위상이라고 할 수 있다.

2. 역사

2.1. 대한제국

'대종교(大倧敎)'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대한제국 시기. 여기서 대종은 곧 주신인 천제를 나타낸다. 1대 교주인 나철에 의해 1909년 서울 종로구에서 오기호 등 발기인 10명을 모아 모아 단군교라는 이름으로 개창한 것을 시초로 본다. 한국사에서 단군이 부각되었던 이유가 흔히 그렇듯이, 실제로는 단군 숭배보다도 외세인 일본에 대한 저항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분석이다.

2.2. 일제강점기

1910년 교세가 2만명으로 크게 늘자 이름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명했고, 결국 경술국치로 인해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탄압의 대상이 된다. 1911년 서일이 만주 북간도에 대종교 산하 지부인 중광단을 설립했으며,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한 교단 지도부는 1914년 아예 북간도로 거점을 옮겼다. 1916년엔 교주 나철이 사망하고 김교헌이 2대 교주가 되었다. 이 김교헌 시기에 대종교는 종교의 체계가 갖춰지기 시작한다.

1919년 3.1 운동동학의 후신인 천도교 세력이 주축이긴 했지만 대종교 또한 기독교, 불교 등과 함께 운동을 지원했다. 대종교 산하의 중광단은 이미 1918년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바 있고, 1919년 4월에는 중광단을 조직했던 서일이 다른 종교계 인사들과 함께 한정의단을 발족했으며, 이 대한정의단과 신민회 계열이 합작하여 한군정회를 조직, 다시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가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보이듯이 대종교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항일 무장투쟁으로, 1920년 청산리 대첩에 가담했던 북로군정서군이 바로 대종교가 양성한 조직. 위에 언급한 대한군정부의 이명이 바로 북로군정서다.[2] 가담한 주요 인물로는 서일, 현천묵, 김좌진, 이범석 등이 있다. 특히 서일은 대종교 3대 교주(당시 호칭은 도사교)가 될 사람으로 공인받았다.

이 북로군정서는 훗날 대한독립군 등 10여개의 다른 무장투쟁세력과 연대하여 연해주로 건너가 대한독립군단으로 재편성되지만, 적백내전에서 편을 들어준 소련에 의해 토사구팽, 1921년 자유시 참변을 당해 사실상 해체되었다. 또한 서일은 자유시 참변에 책임감을 느껴 대종교 도사교 직위를 계승하기 전에 자결하였다. 후에 대종교 교단에서는 서일을 추존하여 도사교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투쟁과 함께 대종교는 만주 곳곳으로 세를 뻗어나가기도 했는데, 심지어 멀리 중국 대륙 본토에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나 3대 교주[3] 윤세복 시기에 대종교 사상 최악의 위기가 닥쳤는데, 1932년 본거지인 만주에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성립되어 버린 것이다. 이 시기 수많은 대종교인이 살해, 구금당했고 대종교 자체도 비밀결사화했다. 만주국 성립에서 일본 패망에 이르기까지 만주의 대종교는 마치 카타콤 시절의 초기 기독교처럼 수난과 박해의 대상이었다.

2.3. 미군정 ~ 대한민국

8.15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북한 정권은 자신들의 정통성 확립에 유용하다고 여기는지 다른 종교들에 비해 비교적 호의적으로 취급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근근이 명맥을 잇고는 있으나 불교, 천주교, 개신교 등에 밀려 현재는 굉장히 마이너한 군소종교가 되었다. 원불교, 천도교는 물론이고 통일교(20만명), 증산도(…) 보다도 교세가 약하다. 원불교는 무려 13만에 천도교도 10만은 되는데, 대종교는 4천명이 안 되는 3,766명. 이슬람교 보다도 적다(...)

2000년대에 모종의 큰 갈등을 겪고 총전교가 둘로 나뉘는 등의 위기가 닥쳤으나 무사히 해결되었고, 현재는 선도사 출신의 인물이 총전교 자리에 오르면서 서서히 안정되어가고 있다. 사이트 관리가 다시 정상화 되면서 자료도 올라오고 있다.

다음에 개설된 대종교 카페 한 곳은 일부 신도의 정성어린 관리 덕인지 총본사 사이트보다 자료가 더 많으며 이 카페를 통해 대종교에 나오게 되는 경우도 꽤 늘고 있다.

2012년도부터 총본사 주차장을 거주자 우선 주차장으로 운영 중이라고 하며 현수막도 걸려있다. 참고로 총본사로 향하는 골목길이 굉장히 좁은데다 불법주차가 심해서 이동에 상당한 불편이 있었으며 결국 대대적인 단속이 시작되었다.

3. 환빠 문제

환빠들이 좋아할만한 요소가 정말 한가득이다. 만약 환빠들에게도 외면당한다면 이 종교의 존재 의의는 정말이지 시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대종교가 환빠의 기원적인 위치에 있기는 했다. 당시 이미 철저하게 조직화된 다른 종교에 이념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단군신앙도 조직화할 필요가 있었지만, 워낙 자료가 적었기 때문에 지금의 환빠들처럼 뭐든지 닥치는 대로 자료를 수집했기 때문.

1대 교주였던 나철이 독립투쟁의 방안으로 단군교라는 형태를 빌렸다면, 2대 교주가 된 김교헌[4]의 경우는 방향성이 전혀 달랐던 것이 큰 원인이 되었다.

김교헌이 저술한 '신단실기'와 '신단민사'와 같은 경우 모두 대종교 입교 후에 저술된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역사서라고 하기 보다는 종교교리 서적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책을 쓰는 과정에서 사료로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국이상국집과 같은 일반적 물건 외에도 근거 없이 포함된 자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5]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시 대종교(라기보다는 나철)와 인연이 있던 신채호와는 사이가 틀어지게 되면서, 더더욱 역사서보다는 종교교리 서적에 가까워졌다.

여기서 종교적 교리를 조금 약하게 하면 북방사를 중심으로 하는 이상룡의 사학이 된다. 그리고 김교헌-이상룡의 방법론에 (그렇지 않아도 민족 개념을 지나치게 확대한 바람에 큰 차이가 없던) 일본의 만선사관+내선일체를 포함해버리면,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이 등장해서 대동아공영권을 돕는 논리가 되어 버린다. 환빠의 구심점이 되는 인물이 친일을 했네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야기도 이 논리속에 포함된다. 양 극단은 통한다라는 씁쓸한 이야기의 좋은 일례이다.

극렬 환빠이며 초대 문교부 장관이기도 한 안호상(安浩相) 박사[6], 80년대에 단전호흡 등이 유행하는 계기가 되었던 소설 단(丹)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봉우 권태훈[7] 등이 대종교 교주이기도 했다.

4. 기타

일제시대 독립투사로서 유명한 분들을 보면 상당수가 대종교도였다. 일제 말기에 거의 모든 종교들이(유.불.기독교,천도교 etc)가 친일을 할때도 대종교는 단군교 등 환빠 빼고 친일을 하지 않았다.

국내에 있는 단군/민간신앙 광련 유적이나 문헌에 종종 '한배검'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은 다 대종교와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후대에 대종교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것들이다. 대표적인 게 태백산 천제단(천왕단)으로, 1950년 이후에 일부 흐트러진 것을 정비하면서 석단 위 제단 앞면 축대에 천제단 대종교태백지사근제(天祭壇 大倧敎太白支司謹製)라 씌여 있고, 제단 위에는 '한배검'이라 씌어진 작은 비석이 고정되어 있다.

대종교는 개천절 국경일 지정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의외로 대종교도 미션스쿨이 있었다. 다름아닌 홍익인간 이념(…)의 홍익대학교단국대학교였는데 일반 사립이 되면서 대종교와 멀어졌다.

기도문은 따로 없으나 깨닫는 말씀[8]->천부경->삼일신고 순으로 독송하는 것을 천진참알이라 한다. 참고로 깨닫는 말씀은 세번 독송하나 천부경과 삼일신고(천경신고)는 한 번씩만 독송하며 경배시간에는 정해진 사람이 큰 북을 치는 동시에 독송하는 편이다.

창시자인 나철이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출신인데, 정작 벌교에서는 "대종교? 그게 뭐죠?" 하나로 설명 끝. 또한 창교한 연도가 1909년인데, 이는 벌교가 원래 소속되었던 고을인 낙안군이 일제에 의해 분해되고 현재의 벌교읍 지역이 보성군으로 넘어간 1908년의 바로 이듬해이다. 아무래도 나철은 자기 고향을 멋대로 뒤흔들고 짓밟는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대종교를 만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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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안호상 박사는 1996년에 대종교 16대 교주, 정확히는 14대 총전교를 맡기도 한 고참 대종교 신자기도 하였다.
  • [2] 당시 이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인정하는 서로군정서군이 서간도에 존재했기 때문에, 그에 상대되는 의미로 북간도의 북로군정서라는 명칭이 붙었다.
  • [3] 엄밀하게 대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도사교(都司敎).
  • [4] 이후 적은 내용을 보면 역사가로 포함시키기 어려운 인물이지만, 단순히 번역만한 김택영, 현채, 장지연 같은 인물도 역사가로 포함시켜 버리는 얇디얇은 한국 사학사에서는 그냥 역사가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전 시기의 역사가의 역사책이라고 생각없이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 [5] 그런데 이 책들에서 배달족이라는 단일민족을 설정하고 여기에 여진족, 거란족 등을 포함시키는 설명이 등장한다. 즉 이 책의 근거로 출처불명의 고기(古記)가 등장하면 그것이 바로 지금의 환단고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환단고기에 괜히 신선술 이야기가 많은 것이 아니다. 실제로 한단고기에 근거가 되는 고사서가 존재했다고 가정을 해도 이 정도까지 종교교리 서적과 일체화되어 버리면 원류를 파악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지므로 사서로서의 가치가 극도로 낮아진다.
  • [6] 1902~1999. 호는 한뫼. 1948년 정부수립 당시부터 1950년까지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다. 92년부터 97년까지 대종교 16대 교주(14대 총전교)이기도 했다. 대종교 교주이던 95년에 북한단군릉을 개건했다며 초청장을 보내자 냉큼 월북하여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와 수사를 받기도 하였다.
  • [7] 1900~1994. 호는 봉우(鳳宇), 여해(如海) 등을 사용하였다. 단전호흡 등을 비롯한 이른바 단학수련을 유행케 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적 감정을 고취시키는 '백두산족에게 고함'(83년 출간) 등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1980년부터 92년까지 대종교 14~5대 교주(12~3대 총전교)이기도 했다. 대종교 총전교로서는 안호상 박사의 바로 윗 선임자가 된다.
  • [8] 세검 한몸이신 우리 한배검이시여,가마히 우에 계시사 한으로 듣고 보시며 나아 살리시고 늘 나려주소서라는 내용의 짧은 기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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