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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last modified: 2015-04-15 17:07:22 by Contributors

한국의 역사
조선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제국
大韓帝國
(ɔ) Daniil Ivanov from
(ɔ) from
국기 국장
© Gringer (cc0) from
존속기간 1897년(1392년) ~ 1910년
표어 광명천지
(光明天地/모든 땅에 밝은 빛을 내리리다.)
국가 애국가
위치 한반도
수도 한성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
언어 한국어
민족 한민족
주요사건 (1392년 조선왕조 건국)
1897년 칭제건원,광무개혁
1896년 독립협회 설립
1899년 대한국 국제 선포
1904년 러일전쟁,중립국 선언,
한일의정서 체결
1905년 을사조약 체결
1907년 헤이그 밀사,고종 강제퇴위,
순종 즉위,대한제국 군대해산
1910년 한일강제병합
통화 원(圓)
성립 이전 고려/조선
멸망 이후 일제강점기/대한민국 임시정부


Contents

1. 개요
1.1. 대한국 국제
2. 허울좋은 제국일 뿐이었나?
3. 성립
3.1. 멍석만 깔아준 독립협회
3.2. 고종, 제국을 선포하다
3.3. 상제는 황제를 도우소서
4. 광무개혁
5. 러일전쟁 발발
6. 대한제국의 영향
7. 군사
8. 대한제국의 국가
9. 대한제국과 수교한 국가
10. 행정 기관 및 기타 관청

1. 개요


국기는 태극기, 국가는 대한제국 애국가, 황실 상징은 이화문(李花紋). 여기서 태극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승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사용 중. 황실 상징인 이화문은 전주 이씨 종친회가 계승하여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국가는 국권 침탈 이후 금지곡이 되었다가 광복하면서 으로 갈라지고 양쪽이 서로 다른 국가(하지만 제목은 둘 다 애국가)를 채택하면서 사실상 소멸.

영어명 Empire of Dai Han은 대한제국 정부의 공식 명칭이고 일반적으로는 Korean Empire나 Empire of Korea가 주로 통용되었다. 일본어 잔재론에서 Corea 떡밥 관련 부분 참조.


11분 50초에 배경이 1897년인데 독일 제국의 국기대신 독일연방공화국의 국기를 올려놓고, 성조기에 별이 50개인 고증오류는 넘어가도록 하자 참고로 첨언하자면 아시아 최초의 철도 부설은 동영상에서 나오는 것과는 달리 조선(대한제국)이 아닌 일본이다. [1] 사실 저 동영상에는 오류가 상당히 많다. 고종과 민씨일가는 부정부패와 매관매직이 성행했고, 군대라는 것도 규격화되지 않은 데다가 보급을 고려하지 않고 총만 잔뜩 사들이고밀덕질? 군사훈련도 여러나라로 갈아타면서 제대로 된게 없었다. 그리고 공장이 늘어나는건 당연한 일이고, 철도부설과 자원개발 등은 거의 열강에게 빌린돈으로 한 거였다. 오히려 개혁의 성과는 양무운동이 훨씬 넘사벽이다.

1897년 10월 12일 ~ 1910년 8월 29일까지의 12년 10개월 18일 동안 존속했던 한반도의 나라. 조선 왕조 까지 합치면 당연히 1392년부터다. 동화약품의 부채표 활명수가 생긴게 바로 직전인 1897년 9월 25일이다. 한국은행도 그렇고, 서울의 많은 대학도 그렇고. 대부분의 "백년 역사"는 이때 비롯된게 많다.

대한제국은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일본 제국국권을 강탈하면서 사라진 국가로서, 한반도에 존재했던 제국(당연히 전제군주제)이다. 대한민국과 구별하기 위해 구 한국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침탈당하기 전이라고 하여 구한말이라고도 한다. 엄밀히 말하면 '구한말'이라는 용어 자체는 대한제국 시기를 가리킨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 시점부터 경술국치까지의 시기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사실상 1905년을사조약 이후론 망국과 다름 없어서 실질적 황제는 고종 황제밖에 없다. 1907년 강제로 퇴위된 후 순종 황제가 뒤를 이었으나 별 의미는 없었다. 비공식적으로 광무제, 융희제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는 대한제국 당시의 공식 의전 명칭이 아니다. 흥했으면 모르겠지만, 10년만에 멸망했기에 조선사의 연장선상으로서 다뤄지고 순종도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여겨진다.

또한 국호가 바뀌기는 했지만 역성혁명으로 왕조가 갈아엎힌 것도 아니고 있는 왕조가 이름을 바꾼 것일뿐더러, 어차피 대한제국으로 바뀌어 봤자 왕의 호칭이 황제로 바뀐 것을 제외하면 그 전의 조선이랑 별로 다를 것도 없었기 때문에 (...) 일반인들 머리 속에서의 역사상의 비중은 '그런 게 있었지' 수준이다. 이 시대를 구한말이라고 부르면서도 "조선 언제 망했어?" 물어보면 1910년의 경술국치를 대는 상황이니. 이런 시각은 당대에도 널리 퍼져 있던 모양인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새 나라의 국호를 정하자는 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이란 이름이 '조선'이란 이름과 경쟁을 했었고, 아래의 항목 이름부터가 '대한제국 황실 복원'이 아니라 '조선 황실 복원'이니...

1.1. 대한국 국제

1899년 8월 17일 발표된 국제. 두산백과에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으로 정의하고 있다.

대한국 국제(大韓國國制)

제일조(第一條) : 대한국(大韓國)은 세계 만국(世界萬國)의 공인(公認)되온 바 자주독립(自主獨立)하온 제국(帝國)이니라.

제이조(第二條) : 대한국(大韓國)의 정치(政治)는 유전즉 오백년 전래(由前則五百年傳來)하시고 유후 항만세 불변(由後恒萬歲不變)하오실 전제 정치(專制政治)이니라.

제삼조(第三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무한(無限)하온 군권(君權)을 향유(享有)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謂)한 바 자립 정체(自立政體)이니라.

제사조(第四條) : 대한국 신민(大韓國臣民)이 대황제(大皇帝)의 향유(享有)하옵시는 군권(君權)을 침손(侵損)할 행위(行爲)가 유(有)하면 기이행 미행(其已行未行)을 무론(勿論)하고 신민(臣民)의 도리(道理)를 실(失)한 자(者)로 인(認)할지니라.

제오조(第五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국내(國內) 육해군(陸海軍)을 통솔(統率)하옵시어 편제(編制)를 정하옵시고 계엄(戒嚴), 해엄(解嚴)을 명(命)하옵시나니라.

제육조(第六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법률(法律)을 제정(制定)하옵시어 그 반포(頒布)와 집행(執行)을 명(命)하옵시고 만국(萬國)의 공공(公共)한 법률(法律)을 효방(效倣)하사 국내 법률(國內法律)도 개정(改定)하옵시고 대사(大赦)특사(特赦)감형(減刑)복권(復權)을 명(命)하시옵나니 공법(公法)에 위(謂)한 바 자정 율례(自定律例)이니라.

제칠조(第七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행정(行政)각 부부(各府部)의 관제(官制)와 문무관(文武官)의 봉급(俸給)을 제정(制定) 혹(或) 개정(改定)하옵시고 행정(行政)상(上) 필요(必要)한 각항(各項) 칙령(勅令)을 발(發)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謂)한 바 자행 치리(自行治理)이니라.

제팔조(第八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문무관(文武官)의 출척(黜陟)임면(任免)을 행(行)하옵시고 작위(爵位) 훈장(勳章) 급(及) 기타(其他) 영전(榮轉)을 수여(授與) 혹(或) 체탈(遞奪)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謂)한 바 자선 신공(自選臣工)이니라.

제구조(第九條) : 대한국(大韓國) 대황제(大皇帝)께옵서는 각 유약국(各有約國)에 사신(使臣)을 파송, 주찰(派送駐紮)케 하옵시고 선전(宣戰), 강화(講和) 급(及) 제반 약조(諸般約條)를 체결(締結)하옵시나니 공법(公法)에 위(謂)한 바 자견 사신(自遣使臣)이니라.


출처는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1822년 8월 22일자 「대한국 국제 관보」. 원 출처의 강제개행 역시 똑같이 적용하였다. 참고로 여기서 강제 개행을 한 이유는 전통적으로 높으신 분을 쓸 때에는 무조건 행갈이를 하는 관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강제개행 문서에도 나와 있으니 그쪽도 참고하자.

2. 허울좋은 제국일 뿐이었나?

일단 제국이라고는 하지만 국력이나 영토가 크게 신장된 것이 아니라 뻘짓으로 보기도 하는데, 동아시아에서 제국의 의미는 단순히 강대한 세력을 가진 국가라기 보다는 타국에 복속되거나 조공을 바치거나 간섭을 받지 않는 완전한 독립 국가임을 의미하기도 하는만큼, 이를 천명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를 제국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일본과 국내의 소수 학설이다.

어쨌든 제국 선포후 대한제국의 행보는 단순히 대외적인 자주국임을 선포한 것 이외에도, 의외로 국가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국가주의적 면모는 독립협회를 위시로한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같은 지식인 계층들도 가담했고, 위에 언급한 왕권의 강화 외에도 청일전쟁 이후 청의 세력이 약화된 것을 기회로 보고 본격적인 간도 흡수를 노리기까지 했다. 거기다 청나라와 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을 맺어서 한반도국가로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화제국과 대등한 황제국 관계로 외교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3. 성립

3.1. 멍석만 깔아준 독립협회

칭제 드립은 근본적으로 갑신정변에서 비롯되었다. 3일 천하에 그쳤으나 김옥균 등은 왕의 공식 칭호를 군주(君主)에서 대군주(大君主)로, 전하폐하(陛下)로, 왕 자신의 호칭을 (朕)으로 부르도록 하였고 이 대군주가 내리는 명령을 칙(勅)으로 하는 등 사실상의 칭제 계획을 올린다. 여기서 보듯, 제국의 선포는 곧 자주국의 선포였다. 물론 이런 꿈도 결국 사흘만에 청나라위안스카이가 들어오고 명성황후 민씨의 복귀로 실질적 독립조차도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아관파천이 독립협회의 요청으로 중단되고, 고종은 덕수궁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황제 드립이 시작된다. 독립협회는 대한제국이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기를 주장하였고 고종도 동의한 상태였다. 하급 관료와 황실종친이 주축인 독립협회영국입헌군주제를 줄기차게 주장해왔고, 고위 관료가 추축인 근왕파는 독일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그런데 독립협회도 엄연히 종친이 관여하고 이완용등 관료의 상당수가 참가했기에 단순하 입만 살은 운동권 집단으로 이해하는 것 또한 올바른 이해는 아니다. 이름만 빌려 줬다는 말도 있지만, 왕세자 이름으로 당시로는 적지 않은 지원금이 나간 것을 봐서는 초기에는 정부에서 만든 단체로 이해하기도 한다. 독립협회가 엇나가기 시작하는 것은 역시 초기 인사였던 필립 제이슨의 문제, 그리고 당시 정부의 영원한 역적인 박영효와의 관계가 계기였다. 이후의 삽질들도 볼만하고.

독일식과 영국식을 단순하게 설명하면, 영국식이 지금 널리 알려진 바로 그 형태라면, 독일식은 의회가 국왕권의 영역과 약간의 특수성은 인정하는 형태로 공존하는 체계로 군주정과 민주정의 중간정도 되는 시스템이다.

사실 이 주장은 독립협회와 정부간의 협상 과정에서 성립된 것에 가깝다. 고종은 당연히 전제 군주정 하고 싶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독일 모델은 고위 관료라기 보다는 홍종우를 중심으로 하는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중심으로 나왔다. 황국협회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단체의 성격 자체가 황권 강화에 방해되는 단체(즉 독립협회)에 대항하는 성격을 띄고 있으며, 조직 건설에 고위 관료들이 대거 관여 되어 있고, 정부의 계속된 지원을 받았다. 흥미로운 건 서울과 중추원(상원)으로 제한을 두려고 한 독립협회에 대항해서, 황국협회는 전국적인 선거를 통한 하원 설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는 독립협회의 영향력 범위가 서울 일부로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사실상 근왕 세력- 힘을 빌려 독립협회를 견제하려고 들었든가, 아니면 지키지도 않을 사기를 치려고 했든가. 여하간 이런 면모에선 차라리 홍종우가 진보적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의 프랑스 유학 경력이 독일 모델이나 하원 등의 아이디어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황국협회는 단순한 독립협회의 안티테제만은 아니었고, 이런 지점이 대표적이다.

여하간 그래도 대강 절충이 되어서, 영국식 입헌 군주국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립협회가 주축되었던 중추원(상원) 설립이 우여곡절 끝에 성공으로 끝나는가 싶더니... 독립협회 출신 위원들의 자승자박으로 말아먹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책에서는 실패라고만 기록되어 있지만, 중추원은 초단명했지만 설립이 된건 사실이다.

당시 법제상으로 중추원에서는 내각 추천 권한이 없었는데, 바로 1회의 첫번째 의제로 내각 구성을 들고 나온 것이 첫번째 병크였다. 월권인 동시에 협정 위반. 내각 구성권을 의회가 가지면 실질적으로 영국식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그 내각 구성원으로 당시 정부에서 1급 반역자로 취급하던 박영효나 국외로 튀었던 미국인 필립 제이슨 등의 이름이 나온 것이 두번째이자 결정적 병크였다. 이 사실을 듣고 분노한 고종은 무기명으로 행해진 투표지를 하나하나 필적 대조로 다 잡아내었고, 고찰청 중추원은 바로 해산. 이전과는 달리 독립협회에도 유래없이 강하게 나서서 바로 박살내었다. 실제로 독립협회 붕괴의 가장 큰 원인이 중추원 병크였다.

이 시기 독립협회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강성화되어서 공화주의에 대한 논의 까지 나오고 있었던 상황이기도 했다. 박영효 국왕설은 반대파의 모략이라고 해도, 박영효 대통령 주장은 입헌 군주정과 공존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독립 협회 지도부도 이를 인식하고 정부와 협상 과정에서는 공화정 언급을 특별히 단속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결국 들통났다. 이렇게 중추원이 성립되었다가 말아먹는 과정을 보면 독립협회의 몰락은 사실상 자업자득에 가깝다. 단지 독립협회의 민주주의, 정확히는 국민주의, 민권주의적 측면에 대해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잘 언급되지 않는 것 뿐이다. 이미 마지막 상황에 독립협회는 관료건 종친이건 다 빠져나가고 전 급진 개화파를 비롯하여 과격 단체에 가까웠다.

3.2. 고종, 제국을 선포하다

고종은 이 상황에서 외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했다. 무력으로는 답이 안 나온다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시 외교적 인식의 한계이기도 하다. 사실 이 문제는 중립화론, 3.1 운동의 독립청원, 상해임시정부국제연맹을 이용(?)한 외교독립론 등 끝이 없이 이어진다. 처음엔 제국 선포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시기가 러일전쟁으로 나아가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관파천 이후부터는 언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기록을 보면 고종은 계속해서 신하들에게 '이게 무슨 소용이야? 이런거 안 하면 안 될까?'하는 말을 계속하고는 있었다.

황제 선포 괜히 했다가 휘말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인데 본심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종은 환구단을 이미 짓고 있었다. 환구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이전에는 사직단이었다. 사대부 중에서는 환구단을 짓고 제국을 선포하게 되면 나라 예산만 축날 뿐이니 하지 말자고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원구단의 경우는 세조가 실제로 지었고, 광해군이 하려다 못한 것이긴 했다. 이것만으로 고종이 제국이 되는걸 반겼다는 걸 증명하기엔 조금은 부족하다..만 심증은 된다.

고종은 몇 번이고 사양하면서도 비등한 여론에 못 이기는 척하며 급하게 제국을 선포하게 된다. 중국인들은 고대부터 자기들 나라 이름은 외자로 쓰고 인근 민족과 나라 이름은 두 자로 써왔다. 근세에 서양 열강과 접촉하면서부터는 이들 나라의 이름을 굳이 세 글자에 맞추어 미리견, 영길리, 불란서, 노서아 등으로 썼다. 서양 열강의 침탈로 중화주의가 패퇴한 뒤에야 이들 나라 이름을 한 글자로 고쳐 불렀다.

주자학적 화이론(華夷論)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제국은 당연히 외자 이름을 가져야 했다. 그래서 정한 '한(韓)'은 고종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를 옛부터 중국 등에서 불렀으며, 삼한을 이었기 때문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大)'는 대청제국, 대명국 등 당시 중국왕조들이 관용적으로 쓰던 접사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곧 삼한의 땅인데, 국초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의 제문과 반조문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고종실록 1897년 10월 11일

3.3. 상제는 황제를 도우소서

앞서 보듯이 정치적으로는 입헌 군주정 운운하던 세력이 전멸한 상황. 이제 길은 하나 뿐이다. 결국 대한제국은 헌법격인 대한국 국제를 통해서 만세무궁한 전제 군주국으로 태어난다. 이런 전제 군주화는 실제로 미국인과 영국인이었던 당시 법률 고문들이 전제 군주정이 아니라면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을 정도의 막장 상황이긴 했다. 고종의 경우는 반대파도 많았다. 박영효 등의 야심가는 국내와 연락해서 꾸준히 반란 시도를 이었고, 부친인 흥선 대원군과 고종의 형제들은 수시로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란과 연루되었다. 거기에 자기 아버지에게 그렇게 배웠고 자기 목숨이 오락가락한 상황을 꾸준히 겪은 고종의 불안감이 더해진 결과였다. 결정타는 앞서 언급한 독립협회의 입헌 군주국 헛발질이었다.

그렇게 대한제국은 1. 언제 러일전쟁이 터져서 열강에 의해 하던 것이 리셋될지 모르는 시대적 상황에서, 2. 그나마 배웠다는 인물들은 독립협회 사건 등으로 병크짓 벌리다가 밀려나가는 인적풀의 고갈이 더해지는 절망적 상황이 더해지는 전개를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결국 대한제국은 고종이 그나마 자기 측근이나 믿을 만해 보이는 외국인 고문들 몇명 데리고 좌충우돌 하는 형태로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엽기적 상황으로 흘러갔다. 이른바 광무개혁의 시작이다

4. 광무개혁

항목 참조.

5. 러일전쟁 발발

국제 정세나 외교에는 큰 힘을 기울였지만 감각은 부족했던 고종의 노선은 제국 선포 8년 후인 러일전쟁 때 제대로 깨지게 된다. 그 당시 현실적으로 대한제국이 살아남는 길은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고종이 러시아 황제와 같은 황제의 입장에서 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에 부동항을 할양하고 친러 세력으로 뛰어들면 국가가 망하지는 않을 가능성은 존재했다. 러시아의 공산화, 즉 러시아 혁명피의 일요일 등 러일전쟁의 패배가 미친 영향을 고려하면,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으면 대한제국은 공산화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은 그렇게 높지만도 않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자기 땅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 중립국을 선언한다. 물론 일본은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을 가볍게 씹고 고종을 협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고는 뒤이어 전쟁에 승리하여 을사조약을 맺는다.

여기에 미국과 영국 역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명확하게 인정하게 된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한 포츠머스 조약을 주선한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그가 고종을 한마디로 물먹인 이야기는 항목 참조. 고종은 빌헬름 2세에게 붙어서 애걸복걸해 보았고, 빌헬름 2세는 "카이저 폰 코리아"(한국의 황제께)라고 쓴 답장까지 써주면서 나름대로 관심을 표명했으며, 황제의 내탕금 백만냥(500억 상당)을 독일은행에 입금까지 시켜주었지만 결과적으로 국제정세 하에서 독일 황제가 직접적으로 힘을 쓰지는 못하게 되었다. 일만 잘 돌아갔으면, 자신이 싫어하는 영국과 그 동맹 파트너라고 쓰고 시다바리인 일본을 견제할 좋은 찬스로서 독일이 한국에 적극 개입했을지도 모르기에 나름대로는 고종이 머리를 잘 쓴 거긴 했다. 삼국간섭의 선례도 있고 말이지. 하지만 망했어요. 그리고 삼국간섭의 결말이 을미사변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결국 대한제국이 이런 막장 상황에서 탈출할 마지막 실날같은 희망은 결국 러일전쟁에서의 러시아의 승리 밖에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여하간. 망했어요

이에 고종은 최후의 한방으로 만국 평화 회의에 헤이그 특사를 보내게 되지만 정식 초대장을 지참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던 일본은 이를 빌미로 고종을 몰아내고 순종을 옹립했으며 결국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맞이하게 된다. 아무리 외교를 잘해도 자기 밑천이 없으면 허사라는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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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한제국의 영향

사실 임시정부 설립하면서 국호를 정할 때 여운형등은 대한제국을 엄청 깠고 황실 우대를 반대하면서 명칭을 대한이 아닌 조선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건준조선인민공화국을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구 를 비롯한 임정 주류의 의견이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였기 때문에 국호는 대한이 되었다. 이후 1948년 제헌의회에서 7월 1일자로 대한민국이 국호로 정해졌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대한이란 국명은 남아 후에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대한제국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대한제국이 없었다면, 아마 대한민국이란 국호도 없을 것이고, 북한과 우리는 북조선, 남조선하면서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막을 따지자면 한민당은 고려공화국을 지지했다. 맨땅에서 아이디어를 파올리지 않는 한,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용된 자신들이 스스로를 부르기 위해서 쓰인 정식 국호는 조선(단군조선, 위만조선, 이씨조선), 고려(고씨고려, 궁예고려, 왕씨고려), 백제(부여씨백제, 견훤백제), 신라, 발해 뿐이었다. , 부여, 옥저, 동예, 가야, 탐라는 아예 고려 대상이 아닐 뿐이고

그런데 한(韓)은 고대부터 이 지역을 통칭하는 명칭으로 꾸준하게 사용되었다. 마한, 진한, 변한을 가리키는 삼한으로 시작해서, 삼국 통일을 대신하여 일통 삼한이라는 말이 과거에는 더 광범위하게 통용되었다. 그런데 마한, 진한, 변한을 이르는 원삼국시대삼한으로서의 정의는 근대 이후에 생기기 시작한 개념이다. 그 전까지는 때 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를 아우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지금도 '삼한'이라 하면 원삼국시대의 세 나라 보다는 삼국시대의 세 나라를 지칭하는 의미로서 많이 사용된다[2].

성리학적 개념에서도 위만 조선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이 삼한으로 내려와서 한왕이 되었다는 구절 때문에 '한정통론'이라는 것이 조선 시대 역사 학계를 주름잡았다. 하지만 한(韓)이라는 명칭에는 전반적으로 남부 지역의 이미지가 강해서, 임시정부시기에서도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한 세력에서 더 선호했던 것도 특징적이다. 단적으로 한반도 자체가 대한민국 기준에서는 '한반도', 북조선이나 중, 일 기준에서는 '조선반도'다. 결국 이름이 대한제국-상해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법통 계승 측면에서 대한의 명칭 자체에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삼한 항목 참고.

7. 군사

8. 대한제국의 국가

9. 대한제국과 수교한 국가

다음 국가들은 대한제국이 수교한 순서대로 나열되었다.

10. 행정 기관 및 기타 관청

일반적으로 내각을 포함한 산하 관청 및 궁내부, 사법 기관 등의 관청들로 칭제건원 후부터 1905년 을사조약이 있기 이전의 관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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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기사 참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00714
  • [2] 왜냐하면, '''조선중기까지는 삼한이 변해서 삼국이 되었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게 깨지는 것이 이익과 그 제자 안정복에 의한 것인데, 이 사람들 남인이라서 조선의 역사적 인식을 주도하지 못했다. 애초에 삼국지 위지 동이전만 봐도 고구려와 삼한이 별개 항목을 존재하는데도 도대체 왜 삼한=삼국이라고 믿었는지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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