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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후

last modified: 2015-03-24 23:31:20 by Contributors


왼쪽부터

이름생년악기
로저 달트리 (Roger Daltrey)1944년~보컬
키스 문 (Keith Moon)1946년~1978년드럼
존 엔트위슬 (John Entwistle)1944년~2002년베이스
피트 타운센드 (Pete Townshend)1945년~기타

Contents

1. 개요
2. 역사
2.1. 디투어스, 하이 넘버스 시절
2.2. 더 후 출범
2.3. My Generation (1965)
2.3.1. A Quick One부터 Tommy 까지
2.3.2. 1970년대
2.3.3. 키스 문의 죽음, 그리고 하락세
2.3.4. 해체 이후
3. 음악적 특징
4. 사건 사고 및 여담
5. 디스코그래피


1. 개요



비틀즈, 롤링 스톤즈 등과 더불어 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이끌었던 밴드 중 하나.

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밴드 중 하나로 손꼽히며, 하드 록/헤비 메탈 장르를 확립한 밴드 중 하나로 거론되며, 거친 무대매너와 연주실력,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가사로 많은 평론가들이 사실상 펑크 록의 창시그룹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모드 서브컬쳐를 적극 활용한 밴드로도 유명하다. 이들이 데뷔하기 전까지는 이렇게 대놓고 모드족임을 자처하는 밴드는 없었다.[1]

2. 역사


2.1. 디투어스, 하이 넘버스 시절


원래 피트 타운센드가 동네 친구인 존 엔트위슬과 의기투합하며 시작된 밴드가 모체이다. 이에 로저 달트리가 합류하면서 밴드의 베타버전인 '디투어스 (The Detours)'가 결성된다. 이 밴드는 앤비컨트리 음악에 영향을 받은 당시엔 그저 그런 인기의 밴드였다.

그러던 중, 최종적으로 키스 문이 합류하면서[2][3] 밴드명을 '하이 넘버스 (The High Numbers)'로 개명하게 되고, 매니저 피터 미든과 계약을 맺고서 당시 유행하던 모드족 컨셉을 받아들여 밴드의 방향을 전환한다.[4]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앤비 음악을 시끄럽고 강렬하게 연주하면서 점차 이름을 알려나갔지만, 전체적으로 구닥다리 블루스를 연주하는 느낌이라 음악적으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5]

위기를 느낀 멤버들은 밴드이름을 새롭게 바꾸고 활동하기로 결정했고, "The Who"독터?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거친 느낌의 알앤비를 연주했던 특성을 잘 살려서 "Maximum R&B"라는 슬로건을 매 공연마다 붙이게 된다.

개명 이후의 공연. 깨알같은 키스문의 미친듯한 드러밍

2.2. 더 후 출범


2.3. My Generation (1965)



첫 싱글인 "I Can't Explain" 발표 이후 첫 앨범 'My Generation'이 히트하게 되면서 유명해진다. 참고로 타이틀곡인 "My Generation"은 '늙기전에 죽고싶다. (I hope I die before get Old)'라는 가사 때문에 유명해졌다. 멤버들 중 가사를 실천한 사람은 키스 문 밖에 없다. 본인의 의지로 그렇게 된건 아니지만

사실 더 후는 모드족의 붐에 묻어간 면이 없지 않았으나,[6] 오히려 당시 모드족 붐을 적절히 반영하며 "시대를 반영한" 밴드가 된다. 단순히 묻어가는 차원이었다면 시대의 흐름에 쓸려 내려갔을텐데, 그만큼 당대 젊은이들의 분위기를 잘 반영했고, 이러한 점이 공감을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모드족의 대변자이자 스스로 모드족으로 칭한 밴드는 거의 없었다.

이들의 독특한 패션은 모드로부터 출발했지만, 모드에게 다시 영향을 미쳤다. 로저 달트리의 화려한 의상은 유행을 선도했고, 피트 타운젠트는 영국 국기유니언 잭으로 자켓을 만들어 입었다. 이는 록 역사에서 일종의 패션 코드가 되었고, 존 엔트위슬은 군복 셔츠나 자켓을 입고 나와 록 역사상 최초로 밀리터리 룩을 선보였다.

2.3.1. A Quick One부터 Tommy 까지



1966년 이 시기부터 더 후는 기존의 음악스타일에서 한층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키스 문의 드럼이 돋보이는 "Happy Jack"이나 존 엔트위슬의 베이스라인과 그로울링[7]이 일품인 "Boris The Spider"가 싱글로 발매된다. 당시에 수많은 비트 밴드들이 명멸하던 시기에, 이 2집 앨범 "A Quick One"으로 인해 더 후는 록스타의 지위를 굳히게 되고, 60년대 하드록의 기반을 다진 밴드로 평가되고 있다.

© from


이후 당시 기발한 시도를 하던 다른 밴드들의 영향을 받아 여러가지 시도를 한 끝에 1967년 3집 "The Who Sell Out" 앨범을 발표한다. 곡 중 광고 음향이나 토크쇼 멘트,[8] 기타 수많은 실험적인 음향의 삽입, 그리고 앨범 전체가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곡들을 구상하는 컨셉트 앨범개념을 최초로 도입한다. 수록곡 "I Can See For Miles"는 빌보드 싱글차트 9위를 기록하면서 더 후의 유일한 10위권 진입 히트곡이 된다.


"The Who Sell Out" 앨범의 성공에 고무받은 피트 타운센드는 이번엔 아예 앨범 하나를 통째로 스토리라인으로 구축해 하나의 연극처럼 만들 계획을 한다. 이에 구상해 낸 스토리가 "정신적 충격을 받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한 젊은이가 자신을 찾아가는 내용"의 드라마였다. 결국 이 내용에 맞춰 곡들이 쓰여지고, 1969년 록 역사상 최초의 오페라로 기록되는 4집 앨범 "Tommy"가 탄생하게 된다. 무려 두 장짜리 LP로 제작된 이 앨범은 록 역사상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알려져있다. [9] 이러한 록 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의 시도는 이후 , 핑크 플로이드, 예스 등등 수많은 다른 밴드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훗날 이 음반은 오페라로 상연이 되고,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연주되기도 하며, 1975년 켄 러셀 감독의 영화로도 제작이 된다. "Tommy"역으로 보컬 로저 달트리가 출연, 사이비 교주 역에 에릭 클랩튼, "Acid Queen"역에 나 터너, "Pinball Wizard"역에 엘튼 존이 출연하는 등 / 음악 팬들에게 상당히 익숙한 뮤지션들이 나온다. 영화 자체도 상당히 수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상당한 성공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이 때를 기점으로 더 후는 더 이상 젊은 층의 패기를 대변하는 밴드가 아니었고 이를 싫어한 과거의 팬들과 모드족들은 상당수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그걸 상쇄할 만큼 이후 더 후의 음악성은 진보해나간다.

2.3.2. 1970년대



어 시원하다

1971년 발매된 "Who's Next"는 디스코그래피 중 가장 최고로 손꼽히는 앨범으로, 빌보드 4위, 영국 앨범차트 1위에 랭크되는 기염을 토한다. 이 앨범에서는 녹음에 신디사이저를 도입하여 더욱 더 진보한 음악성을 보여주었다.


1973년 더블 앨범으로 기획된 록 오페라 앨범 "Quadrophenia"를 발매하여 빌보드 2위, 영국차트 2위의 기록을 남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멤버들 성깔이 죽은건 아니라서 1976년 5월 31일 찰튼 애슬래틱스의 홈 구장에서 공연했을 당시, 120데시벨의 소음을 내서 한동안 기네스북에서 '가장 시끄러운 공연'으로 남기도 했다.

2.3.3. 키스 문의 죽음, 그리고 하락세



성공도 잠시, 드러머 키스 문이 약물 과다복용으로 "Who Are You" 앨범을 발표한 뒤 1978년 9월 7일 사망하였고, 그 뒤 밴드는 새로운 드러머 케니 존스를 영입해 새로운 앨범을 냈지만 예전의 기량을 보이는데는 실패하였고, 결국 밴드는 해체하게 된다.

2.3.4. 해체 이후


이후 각자 솔로 활동을 펼치다가 다시 재결성했다. 하지만 2002년 존 엔트위슬이 심장마비사망하는 바람에 비틀즈처럼 현재 오리지널 멤버는 두 명 밖에 남지 않은 상황, 그 뒤에도 세션 멤버들을 대동하고 종종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다. 오아시스 세션으로 활동했던 링고 스타의 아들 잭 스타키가 드러머로 있으며, 2010년 슈퍼볼 하프타임쇼에 서기도 했다.

2012 런던 올림픽 폐회식에 마지막 무대를 멋지게 장식하였다. "Baba O'Riley", "See Me Feel Me", "My Generation" 세 곡을 연주했다.

2014년 올해 데뷔 50주년을 맞아 영국 투어에 돌입한다. 두 멤버에 따르면 "이번 투어는 긴 이별의 시작"이라 밝혔으며, 로저 달트리에 따르면 "이번 공연은 정말로 마지막이 될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공연을 할 수는 없다. 나는 내 목소리가 얼마나 오래갈지 모른다."라고 언급한바 있다. 미국 빌보드 등 외신에 따르면 밴드는 오는 11~12월 런던, 더블린, 벨파스트 등에서 9회에 걸쳐 공연을 펼친다. 영국 공연이 끝나면 미국에서 투어 공연이 이어질 전망이다. 출처는 이곳.

2014년 11월 3일 데뷔 50주년 기념 히트앨범인 "The Who Hits 50"이 발매될 예정이다.

3. 음악적 특징


밴드의 리더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센드는 아트 스쿨에서 그래픽을 공부할 때, 나치 독일에서 탈출해 영국에 정착한 그의 스승 구스타프 메츠거로 부터 해체주의와 파괴의 미학을 배웠고, 이후 그는 밴드에서 공격적이고 헤비한 사운드와 무대에서 기타를 부수는 등 과격한 무대매너를 보이게 된다.

그런 파괴의 미학 이외에도, 그는 인도힌두교 요기 사상가인, 메헤르 바바 (Meher Baba)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 폐쇄적인 상태에 놓인 한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의 록 오페라 "Tommy"를 만들었고, 이후 곡들에도 그런 영향이 나타나게 된다. 그들의 대표적인 명곡 "Baba O'Riley"의 Baba를 의미한다.[10]

밴드의 모든 멤버들은 연주력이 출중하며, 보컬인 로저 달트리는 록 오페라 스타일의 드라마틱한 보컬과 로큰롤에서의 정열적인 보컬 둘다 능수능란하게 소화하는 사람이라 많은 록 팬들에게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하나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드러머 키스 문의 드럼 연주는 그 자체로 정열이 넘쳐 흔히 천둥 소리로 비유되기도 한다. 키스 문은 라이브 도중 드럼 세트를 수도 없이 부숴 먹었다. 게다가 실제로 호르몬 과다분비 등의 질환으로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는 정신질환이 있었다고 한다. 이 필요없는 약쟁이 하지만 결국 약으로 갔다

키스 문은 슈퍼밴드 Cream의 드러머이자 '드럼의 마왕'이라 불리우던 진저 베이커와의 일화로도 유명하다. 진저 베이커가 훨씬 먼저 데뷔했으나, 하드 록 시대에 접어들자 두 사람 다 경쟁적으로 드럼 구성을 늘리기 시작한 것이다. "너님 플로어탐 두개 씀? 슈ㅣ바 그럼 나는 투베이스 씀." "투베이스라고? 그럼 나는 탐 숫자를 늘리겠음 ㄲㄲ" 등의 방식으로 정말 괴물같은 드럼세트 군비경쟁이 불을 뿜었다.(...) 게다가 이 때 앨리스 쿠퍼 밴드의 드러머이자 키스 문의 친구였던 닐 스미스도 '나도 질 수 없뜸 ㅇㅇ!'을 외치면서 둘보다 항상 드럼 개수를 하나 늘려서 연주했다고 한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이 답없는 경쟁은 당시 그저 병풍에 불과했던 드럼의 세계를 확장한 훌륭한 결과를 일구어 냈다.


베이시스트 존 엔트위슬은 다른 멤버들이 폭주(?)하는 와중에 얌전한 자세로 연주하긴 하지만, 그의 베이스 연주는 리드 기타의 역할을 대신 할 정도로 매우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리 쉬언, 러시의 게디 리 등 후대 베이시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노년기의 연주 영상을 보면 웬만한 후배들과는 격이 다른 노련한 정도가 아니라 후배들의 기량을 능욕하는 수준이라 입이 떡 벌어진다.

굳이 얘기하자면 리더인 피트 타운센드가 연주 테크닉만 놓고 보면 제일 후달린다. 이미 당대에 지미 헨드릭스, 에릭 클랩튼, 지미 페이지, 제프 벡같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망했어요 피트 타운센드가 런던의 일렉트릭 서커스 클럽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를 처음 듣고 됐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쉽게 평가절하할순 없다. 여하튼 더 후는 피트 타운센드의 밴드였고 피트 타운센드의 음악적 구상에 따라 곡들이 만들어지고 연주가 짜여졌으며 그 결과물인 앨범들이 위대하다고 평가받는 것이니 말이다. 비록 연주력은 좀 떨어질지 몰라도 록음악계에서 공격적이고 열정적인 여러 리프등 연주법을 최초로 창안해낸 사람중 하나이고 후대의 기타리스트들은 다 그의 빚을 지고있다. 또한 연주력만으로 판단될수 없는 그의 창의적인 새로운 음악적 구상들은 당시의 록음악에 혁명을 일으켰다. 무대에서 일명 풍차돌리기도 상당히 유명하다.

데뷔 당시와 전성기의 음악 스타일이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모두 성공을 거두었고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장르로는 펑크 록, 프로그레시브 록 등에 주로 영향을 주었으며, 레드 제플린, 더 클래시, U2, 러쉬, 펄 잼, 블러, 오아시스, 라몬즈, 그린데이 등의 밴드에게 영감을 준 록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밴드로 기록되었다.

4. 사건 사고 및 여담


  • 해체의 미학을 철저히 구현한 밴드이기도 하지만, 시작은 아주 사소했다. 천장이 낮은 클럽에서 공연하다가 피트 타운센드가 기타를 높이 들어올렸는데, 그만 천장에 기타 헤드가 닿아 넥이 부러져 버리는 바람에 순간 ㅅㅂ 됐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관객들이 오히려 환호하기 시작하고, 그때부터 기타를 부수기 시작했다고 한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그리고 키스 문도 덩달아 드럼을 부수기 시작한다.

  • 더 후는 가는 곳마다 호텔방을 몽땅 부숴놓기로 유명했다. 특히 키스 문의 주도하에 이런 일이 많았는데, 변기에 M60 폭죽을 넣어서 변기를 폭파시킨다거나, 호텔 수영장에 캐딜락을 처박아 버린다거나, 창밖으로 티비를 던져 박살을 낸다거나 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문제는 그 이후 수많은 악동 밴드들 (롤링 스톤즈, 레드 제플린부터 시작해서 그 후대까지 줄줄)이 이런 행동을 따라했다. 이로인해 키스 문은 홀리데이 인, 쉐라톤, 힐튼 호텔에서 영구 거부당했다. 결국 죽을때까지 그는 이러한 몇몇 호텔에 숙박할 수 없었다.

  • '레드 제플린(Led Zeppelin)'이라는 밴드명은 추락한 비행선의 이름인데, 절친한 친구였던 드러머 키스 문(혹은 로저 달트리)이 장난 반으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추락하기는 커녕 엄청 떠버렸다.

  • 미드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의 오프닝 노래는 모두 이 사람들의 곡을 편집한 것인데, 이는 CSI를 처음 기획한 총감독 앤서니 자이커가 이 밴드의 팬이기 때문이다. 각각 라스베가스는 'Who Are You', 마이애미는 'Won't Get Fooled Again', 뉴욕은 'Baba O'Riley'.

  • 어떤 공연에서 키스 문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언제나 공연이 끝나고 악기를 부수는데 키쓰 문 이놈이 숨겨뒀던 화약들을 일시에 폭발시키는 바람에 그는 무대 밖으로 날아가고, 존 엔트위슬은 머리가 타고, 피트 타운센트는 귀병신이 되고, 사회자는 기절하는 등의 소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신문에서 대서특필될 정도였다.

  • 키스 문은 약을 하도 많이해서 무대에서 기절한 적이 있다. 1973년 Quadrophenia 투어 도중 공연전에 말 진정제를 브랜디와 섞어 마신 탓에[11] 공연 중 무대위에서 기절한 것(...). 그 상황에서 피트 타운젠트는 즉석으로 "관객 중에 누구 드럼 칠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잘 치는 사람 으로."라고 말을 했고, 즉석으로 지원한 스콧 할핀이라는 젊은이가 드럼을 치게 된다. 그는 더 후의 심각한 였기 때문에 모든 노래를 줄줄 외우고 있었고,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난다.(...)

  • 키스 문은 이러한 괴팍한 행보와는 별개로, 성공적인 영화배우로서 활동하기도 한다. 데이빗 에섹스가 주연한 록 음악 영화 스타더스트에서 드러머 역으로 출연한 이래, 크고 작은 영화에서 발군의 연기력을 선보인다. 역시 정상이 아니야

  • 일본 애니메이션 케이온!!에서 히라사와 유이가 선보인 팔을 풍차처럼 돌려서 피킹하는 '필살기'는 원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센드의 시그내쳐 무브이다. 또한 2기 3화에서 밝혀진 바로는 타이나카 리츠 또한 키스 문의 열렬한 광팬이라고. 실제로 그들의 곡을 연주 한적이 있다 ! 물론 믿으면 골룸

5. 디스코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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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실 이들은 데뷔 전까지는 그저그런 컨셉이었으나. 하이 넘버스가 망하고 더 후로 개명하면서 적극적으로 모드족의 패션과 이미지를 도입했다. 모드 문화는 1960년대 초반부터 1966년까지가 피크였는데, 이후 모드족들 중 마약을 즐기고 보다 정교한 음악을 즐긴 부류는 사이키델릭 록히피로 이행했고, 머리를 짧게 깎고 노동계급적인 마인드와 훌리건 문화에 연관이 있던 부류는 하드 모드로 진화했다가 스킨헤드가 된다.
  • [2] 여담으로 그가 밴드에 들어온 계기가 참 골때리는데, 디투어스 시절 그들의 콘서트를 보던 키스 문은 "드럼이 무슨 그따위냐"며 콘서트에 난입했고, 열받은 멤버들이 이 초딩같은 놈 (키스 문은 멤버들 중 가장 어리다.)에게 니가 한번 해봐라라고 하자 본좌의 실력을 보여주고 그날 바로 계약했다고 한다(...).
  • [3] 존 엔트위슬은 "키스 문과의 첫 공연 때 이놈이 밧줄을 가지고 와서 드럼 세트를 꽁꽁 묶어 고정시키길래 왜 이러나 싶더니 공연이 시작되자 그 의문이 사라졌다. 키스 문이 드럼을 치자 드럼 세트가 앞뒤로 요동쳤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한다.
  • [4] 그 전까지는 딱히 방향성이라 할게 없었고, 패션도 신경쓰지 않았다. 당시 하이 패션이었던 모드 컨셉은 이들에게 있어서 신의 한수가 된다.
  • [5] 매니저 피터 미든이 써준 싱글 I'm The Face를 발매하지만 당시에 넘쳐나던 앤비 곡들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에 상업적으로 시망이었다.
  • [6] 모드족이 등장한 것이 1950년대 후반인데(50년대 트닉 문화가 계승, 발전되었다. 50년대 테디보이 문화가 계승, 발전된 것이 ), 1960년대 리듬 앤 블루스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함과 동시에 런던의 급진적 보헤미안 문화가 합쳐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모드족 붐이 절정에 도달한 것이 1964년이고 하이넘버스의 첫 싱글은 1964년에 발매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
  • [7] 록계 최초의 그로울링 창법.
  • [8] 이 앨범 자체가 페이크광고 컨셉이다. 앞커버와 뒷커버의 멤버들이 실제로는 없는 상품을 광고하고 있다.
  • [9] 물론 그 이전에 헤어같은 훌륭한 록 뮤지컬이 있기는 했으나, 정식 록 오페라는 더 후가 최초다.
  • [10] O'Riley는 이 곡의 원형이 되는 곡을 작곡한 예술가 테리 라일리를 의미한다.
  • [11] 상기했듯 호르몬 분비 및 혈기 관련 증상이 있어서 웬만큼 센 약이 아니면 안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찾다 찾다 도달한 마약이 말 진정제(...). 말 진정제는 대체로 야생마같이 날뛰는 짐승들에게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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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4 23: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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