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더글러스 맥아더

last modified: 2015-04-08 16:57:53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이력
2.1. 1차 대전까지
2.2. 제2차 세계대전
2.3. 일본 점령군 사령관 시절과 인천상륙작전
2.4. 몰락 - 파면과 은퇴
2.4.1. 미국의 맥아더 비판
2.4.2. 중국의 맥아더 비판
3. 말년
4. 그의 인간성
5. 그의 명언들
6. 뒷이야기들
7. 대중매체 등

1. 개요

노병은 죽지 않습니다, 다만 사라질 뿐입니다.

통칭 '맥아더 원수'. 미국장군. 그리고 일본 (최초이자) 최후의 외국인 '쇼군'.[1]

Douglas MacArthur. 통칭은 맥아더로 표기하며 현행 외래어 표기법을 적용한다면 '매카서'가 되어야 맞다[2]. 하지만 관용 존중 차원에서 '맥아더'로 인정되었다.외국 가선 '맥아더'로 읽지 말자.[3] 한국에서는 그를 맥장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4]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찬사와 비난을 함께 받는 군인. 국내에서는 인천 상륙작전의 주역으로 유명하며, 아래에서 곧 이야기하듯이 미국군 역사에서 전설적인 군인 중 하나. 하지만 군인은 명하복이 기본임에도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명령도 무시하는 독선적인 면이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이 가졌던 대통령의 야망의 실패는 물론 역사적 평가조차 떨어뜨렸다.그래도 아버지처럼 국립묘지 매장에 거부당하지는 않았다.


옷차림새도 특이해서 리핀 육군 원수 정모에 짙은 선글라스, 수제 콘파이프(옥수수 자루로 만든 담배 파이프)가[5] 트레이드 마크. 탈모가 있어서 전쟁 중 사진에는 모자를 벗은 것이 없다.

2. 이력

2.1. 1차 대전까지


할아버지는 위스콘신 주지사, 아버지는 남북전쟁,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필리핀 전쟁에 참전한 소년 영웅이자 장군겸 3대 필리핀 총독이었고 어릴 때 같이 놀던 필리핀 꼬마는 후에 필리핀 2대 대통령이 된 마누엘 L. 케손(Manuel L. Quezon)…. 게다가 2차대전 중 미국 대통령이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과는 먼 친척 관계. 여러 의미에서 진정한 엄친아[6]. 어릴 때 어머니 때문에 여장했다고 한다. 오오 여장남자. 정확하게는 어머니는 더글러스가 여자아이처럼 머리를 기른 모습을 좋아했다고 한다. 거바람 검색하면 2차세계대전만화밖에 안나옴[7]

특히 어머니 핑키 맥아더는 중류층 이상의 아가씨가 맥아더의 아버지와 결혼하면서 인프라 따위는 없는 서부에서 십수년간 모진 고생을 한 바람에 억척스런 의지를 보이며 여러모로 맛바람의 궁극이라 할 만한 인물인데, 웨스트포인트에 입학시키는 것도 연줄을 동원해서 밀어넣은 것은 연방 의원의 추천서가 있어야 입학이 가능하기 때문, 그 의원에게 신청자가 너무 많아서 시험으로 결정하려 하자 시험 대비를 위해 고등학교 교장을 고용해 개인교습을 시켰다.(…) 흠좀무.

하지만 이 정도는 기본인 것이 재학 내내 가까운 지역의 특급호텔에서 아예 살면서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했다고 한다. 엄마가 너 잘 되라고 이러는 거야. 임관 이후에는 맥아더의 상관들에게 반복적으로 진급시켜 달라고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아들을 미국 역사상 가장 빨리 별을 달게 해 주었다(심지어 준장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달라고 엄마가 편지를!). 첫 며느리감을 차고 남편을 떠받들어줄 며느리감을 직접 골라 붙여줄 정도로 철저했다. 맥아더는 첫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난생 처음 어머니와 대판 싸우기까지 했다. 이때 핑키는 꾀병까지 부려가며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첫 아내와 뒤에 이혼했으니 핑키 의도대로 된 것.

그러나 이 부분은 약간의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맥아더의 첫 아내는 '루이즈 크롬웰 브룩스'라는 엄청난 명문가 부잣집 출신의 사회운동가인 여자였다. 지금도 사회운동 하는 여자들에 대해서 좋은 일 하는 사람들이지만 자기 주장이 강할 거라는 편견이 있는 상황인데 맥아더가 결혼한 1920년대에야...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이 여자에게 맥아더가 두 번째 남편이었단 것이다. 아들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핑키의 입장에선 이건 말도 안되는 결혼이었다는것이 전혀 이해 안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정작 크롬웰 집안에서도 반대했다. 사유는 맥아더 집안의 레벨이 자신의 집안에 비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이 여자는 맥아더와 7년뒤(1922년)에 이혼하고 1930년에 배우인 라이어널 앳윌과 결혼, 13년 뒤(1943년)에 이혼한다. 그리고 또 1년 뒤 (1944년) 알프 하인버그와 결혼 그러나 이 남자와도 결국 이혼한다. 재미있는 얘기는 밑에 나오는 맥아더의 상관인 퍼싱이 이 여자에게 관심이 많아서 맥아더를 필리핀으로 보내버렸다는 설이 있다. (남편인 맥아더를 루이즈로부터 떨어트리고 자신이 접근하려고) 이는 맥아더 전기의 작가 윌리엄 맨체스터가 맥아더 전기 '미국의 카이사르: 더글러스 맥아더(American Caesar: Douglas MacArthur)에서 언급한 내용이고, 루이즈 본인 스스로도 4성장군인 퍼싱이 만약 루이즈가 맥아더와 결혼한다면 별하나 짜리였던 그를 필리핀으로 보내버리겠다고 위협했다고 발언했고, 실제로 이를 실천했다(…). 두 번째 부인인 진 맥아더는 핑키가 데리고 온 여자(이 부분은 출처가 필요하다). 맥아더보다 18살 연하였는데 맥아더가 죽을 때까지 해로했다.

물론 이런 것들도 한국에서 출판된 맥아더 위인전에선 전부 위대한 어머니로 포장되었다…. 심지어 학생들이 선배에게 복싱의 형태로 구타를 당하던 이른바 '전통'을 고발한 사태에 대해서 미국군의 명예를 위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라고 시킨 것이 당당하게 위인전에 실렸다. 대체 뭘 잘한걸까? 아들아 출세를 위해 입을 다물어라?

하지만 육군사관학교를 연줄로 밀어넣었다고 해도, 입학 이후 맥아더의 성적은 연줄 따위 언급도 못할 정도로 넘사벽이긴 했다. 미 육군사관학교를 거의 언제나 줄수석을 차지하며 연대장 생도까지 겸한다. 연대장 생도 겸 졸업수석으로서 졸업, 한동안 그의 졸업성적 기록을 깬 생도가 없었다고 한다. 당장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맥아더 이상의 성적이 나온 사람이 두 명 뿐이다. 그 중 한 명이 남북전쟁 영웅이자 남군의 먼치킨중에 하나인 로버트 리 장군이다. 여기에 더해서 연대장 생도 겸 졸업 수석이 힘들다는 것은 사관학교 출신만 알 수 있는 공공연한 비밀인데, 연대장 생도같은 경우에는 다른 생도가 잘못을 저질러도 연대책임이 들어가는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렇게 군 생활을 시작부터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시작했고, 그 이후 진급 과정도 초절정이다.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30대 나이에 사단장을 맡아(42보병사단)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군 사단장에서 가장 많은 15번의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출중한 능력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의외로 당시 미국 유럽원정군의 사령관이였던 퍼싱에게 낮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이건 벨로 숲에서 퍼싱이 "군인은 모름지기 당당하게 서서 총을 쏴야 한다."며 미국군 수천명을 순식간에 죽게 만든 거에 대해 맥아더가 미친짓거리 그만하라고 일갈했던 것의 영향이 크다. 이 일을 계기로 퍼싱은 맥아더와 사이가 매우 안 좋아졌는데, 문제는 퍼싱이 미국군 내에 최대 파벌을 이끌고 있었던데다 1940년대까지 살아남아 사사건건 맥아더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참고로 2차 세계대전에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조지 C. 마셜이 퍼싱 파벌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자 본국으로 귀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계급강등을 당하지 않고 육군사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미국의 군사교육은 19세기에 머물러 있어 군사학만을 다루고 있었는데, 여기서 손을 대서 군사학만이 아닌 다른 전공과 함께 군사학을 가르치는 오늘날 사관학교제도의 기틀을 잡았다.

이 시기 앞서 말한 첫 번째 아내와 결혼, 퍼싱은 위협했던 대로 그를 필리핀으로 보내버렸다(..) 망했어요 이렇게 필리핀에서 3년을 세월을 보낸뒤 미국군 내 최연소 소장으로 승진, 본국으로 귀환해 3군단장을 맡게된다. 1928년에는 암스테르담 올림픽에 단장으로 참가하기도 했고, 1930년에는 나이 50에 소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하며 최연소 진급기록을 갈아치우며 육군참모총장(Chief of Staff)에 임명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안정된 국가에서 평시에 군의 실력자의 눈밖에 나면서도 이런 폭풍 진급을 보여준 군인은 세계적으로 거의 없다. 당시 강대국중 그를 능가할 만한 폭풍 진급을 보여준 사람은 30대에 해군 장관이 된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소련 해군 원수 정도다.

그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을때는 대공황 시기라 그는 예산을 깍으려고만 하는 대통령과 의회와 대립했고, 32년에는 보너스 군대(Bonus Army)에게 회유책을 쓰려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지시를 무시하고 보너스 군대를 강경진압해서 1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 이로 인해서 후버의 평판은 치명상을 입었다.

한편 이 시기에 맥아더는 병력의 감축. 그중에서도 특히 단시간에 양성이 불가능한 장교단의 감축을 줄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며 기동전을 시험해 보기위해 소규모의 차량화 부대, 전차 부대를 창설, 알보병 일색이던 미국군에게 기동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물러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취임하자 더더욱 강하게 쥐어오는 예산삭감 압력에 대통령 및 의회와도 대판 싸우는 바람에 결국에는 군 주류파에서 밀려버리는 결과를 만든다. 예산 삭감을 종용하는 루스벨트 앞에서 분노하며 대놓고 "다음 번 전쟁에서는 우리 병사들이 맥아더의 이름이 아니라 루스벨트의 이름을 저주하면서 죽어가게 될거요!"라고 외치고 사임하겠다고 외쳤다. 루스벨트는 "당신, 대통령에게 그런 방식으로 말해선 안돼!"라고 받아쳤지만, 사임을 받아들여주진 않았다. 맥아더는 발길 채이는 걸음으로 백악관을 나갔지만 1935년까지 임기를 연장받을 수 있었고, 자성훈장 두개를 받았다.

나중에 대통령이 되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참모총장이던 시절, 부관을 맡고 있었고 당시에 너무나 데인 바람에 이후로도 맥아더를 경계했다고 한다. 사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참모총장을 맡고 있던 시절 워싱턴에서 5년간 부관을 맡았고, 이후 참모총장에서 물러나고 필리핀에 군사고문으로 파견되자 그때도 맥아더가 끌고가(...) 필리핀에서 4년 모두 합쳐 총 9년(...) 동안 부관으로 맥아더 옆에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소령 ~ 중령기간동안 다른거 못해보고 맥아더의 부관만 했다. 대대장 한번 못해보고 맥아더의 뒤치닥거리만 했다는 소리다.[8] 이 모든 걸 상징하는 맥아더의 말, 아이젠하워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중 최고의 사무원clerk이다.

여러 사건중에서도 아이젠하워가 가장 큰 학을 뗀 사건은 위에 적힌 보너스 군대 사건. 당시 수석부관이었던 아이젠하워는 맥아더가 이 시위진압을 적극적으로 개입하는걸 막았고 무력진압에 반대했지만 결국 그는 듣지 않고 직접 진압과정에 나가 강력하게 진압했다.

2.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단 현역에선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 영웅이었던 아버지에 못지 않는 공적을 세웠기 때문에 이제 막 미국에서 독립한 신생 필리핀군 군사 고문이자 최고사령관에다가 당시 대통령 케손에 의해 필리핀 육군 원수 계급에 임명되었다. 흔히 맥아더라고 하면 생각하는 선글라스, 담배에 이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모자는 사실 필리핀 육군의 원수 정모다. 미국군 장군이 자기나라 군 피복을 안 입는다는 건 이것만 봐도 그의 독불장군 기질이 잘 드러난다. 군단장도 안 입는데 자기도 규정대로 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필리핀군 원수 직함만 가지던 시절에는 필리핀의 방어를 위해 미국에 줄기차게 장비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이미 앞서의 사건으로 인해 미운털이 박혀 있는데다가, 미국 자체도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기 전 상황이라 주고 싶어도 줄 장비가 없었다. 그래서 미국은 필리핀에게 드럼 요새 같은 중장갑 요새시설을 이미 10여년 전에 구축하였으니 안심해도 좋다고 말로만 위로하였는데, 그 정도로는 방어에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맥아더는 상당히 분노했다고 한다.

이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에 복귀했으며, 이후 미국군 극동 사령관, 남서태평양 사령관 등에 부임하며 제2차 세계대전말 태평양 전선의 절반을 총 지휘했고, 이후 일본점령군 총사령관을 맡게 된다.

일본군의 침공 초기에 필리핀 방면 사령관으로 있었으나, 초반 잘못된 대응과 함께 일단 일본군이 쳐들어오더라도 요격이 가능하다는 지나친 낙관론으로 개발살났다고도 이야기를 하지만, 개전 초반 전수방어를 고집하고 항공기를 허무하게 잃은 실수를 제외하면 개발살이라고도 말하기가 힘들다고 볼 수 있다. 필리핀을 수비하던 병력중 미국군 1개 사단과 필리핀 스카우트 사단 이외 수적주력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필리핀 사단들은 사단내 포병대가 없는것은 물론이고, 박격포, 기관총조차 없는 부대가 많았고, 이를 지휘하는 미국군 장교는 영어를 하는데 필리핀 사병들은 따갈로그어를 해 의사소통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전력을 가지고 잘 훈련된 정예 병력을 가지고 쳐들어온 홈마 중장의 일본군에게 장기간 버텼으며, 홈마 중장은 상당수가 민병대 수준인 미국군 & 필리핀군 연합군에게 지연전에 휘말려 본국에게 증원군을 파병해달라는 요청까지하고 증원군이 오고도 상당한 기간이 지나서야 미국군과 필리핀군의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장시간에 걸쳐 저항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보급선이 끝을 갔으며 이는 이후 펼쳐진 바탄 죽음의 행진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가 한동안 반신불수가 되는 바람에 7만여 명의 미국군과 필리핀군을 작전계획대로 어쩔 수 없이 바탄 반도로 후퇴시켜 방어전을 펼친 맥아더는 휘하 군대와 함께 적중에 고립되었다. 작전계획상 온다던 증원군은 올기미가 안보이고 해군마저 떠나버려 잠수함이 몇번 온 것을 빼고는 물자공급을 전혀 받을 수가 없었는데다가, 포위된 병력의 구출마저 포기했다. 결국 맥아더는 물자부족으로 인해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된다.

결국 바탄 반도로 후퇴한지 3개월 후 루즈벨트의 명령으로 그 유명한 '언젠간 다시 돌아오겠다'(I shall return)라는 말을 남기며 사실상 단신으로 오스트레일리아로 도망쳤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맥아더를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낼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죽을 겁니다. 그를 바탄 반도에서 빼내려면 강경한 어조로 명령을 해야 합니다." 이때 연합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연전연패에 순식간에 싱가포르까지 넘어간 상황이라 바탄에서 힘겹게 버티는 맥아더는 미국인의 영웅이었다. 때문에 정치적으로 맥아더의 전사가 부담스러운 루스벨트는 사이가 나빴던 맥아더에게 강경하게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명예 훈장을 수여했다.

이렇게 초반에 필리핀에서 신나게 깨진 맥아더는 항공기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앞서 설명했듯이 정부의 명령에 따랐지만 도망친 것은 사실이므로 자신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도망간 호주에서 동부해안을 방어선으로 삼자는 대다수의 의견을 묵살, 오히려 뉴기니 제도를 방어선으로 삼아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에게 붙잡혀 있는 호주 정규군 사단 대신 호주 민병대를 주축으로(…) 공세에 나섰다. 그리고 요새화된 지역을 회피하고 보급로를 끊는 현란한 우회전술로 일본군을 말려죽여 적은 희생으로 일본군에게 궤멸에 가까운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그 결과 뉴기니 전역에서 동원된 일본군 20만 명 중 18만 5천여 명이 살아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미국군과 호주군 연합군의 피해 정도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으나 고작 1만~2만여 명 수준에 불과하다.

덕분에 일본군 쪽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자와낙원, 버마지옥, 죽어서도 돌아올 수 없는 뉴기니."

그러나 전쟁 후반 자신의 정치적 입장 때문에 대만에 비해 상대적으로 군사, 지리적 가치가 떨어지는 필리핀에 해군의 반대[9]를 무릅쓰고 상륙 계획을 감행하였다. 맥아더가 이렇게 한 이유는 자신의 개인적 야심인 필리핀 탈환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데, 맥아더의 아버지가 필리핀 총독이었고 본인도 필리핀에서 성장해 많은 연줄이 있으며, 필리핀인에게 다시 돌아온다고 멋지게 선언하고 혼자 보트타고 도망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맥아더 입장에선 명예회복을 위한 필리핀 탈환이 필수적이었다.

다만 미국군 전체로도 그랬는지는 의문이며, 고작 개인의 명성을 위해 수많은 미국군을 희생시켰다는 말이 해군, 특히 체스터 니미츠 지지자들 사이에서 나오기도 했다. 이를테면 큰 의미가 없는 펠레리우 전투같은 것을 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니미츠 지지자들의 생각에는 문제가 있다. 당장 일본을 공격하는 주공인 주제에 시작인 타라와 전투부터 대량손실을 불러왔다는 것은 쏙 빼놓았다. 게다가 니미츠의 해군은 사실상 미해군의 주축인 태평양 함대의 대부분을 상시 사용 가능했다. 덤으로 해병대와 육군을 동시에 충분히 사용가능했다. 이런 조건에서도 오키나와 전투이오지마 전투를 보면 투입한 군대에 비해 손실이 너무 크다.

물론 B-29 폭격기와 호위 전투기를 위해서는 충분한 발판이 필요하며, 1945년 4월부터 종전시까지 얼마 안 되는 기간동안에 무려 2,251대의 B-29 폭격기가 비상착륙하여 도움을 받았고 만약 이오지마를 점령안했다면 승무원의 희생이 2만명은 넘었을거란 추산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오지마 전투 하나만으로도 사상자가 2만 3천명 이상[10]을 기록하며 전투를 한달간 끈 것을 생각하면 거기서 거기다. 덤으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을 최대 10만(그나마 절반은 현지민 강제동원)을 상대한 것을 빼고는[11] 수천명에서 만명 수준의 병력을 상대로 전함까지 동원한 함포사격에다가 항공모함 전대의 폭격 및 해병대의 적극적인 대량동원까지 더해졌는데도 그렇게 시간과 희생이 걸린다면 효율성이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위 의견에 반론하자면 처음부터 해병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릴줄 몰랐다는것이다. 그냥 펠렐리우섬 전투를 제외하면 일본군은 해안방어에만 집중하는 전통적인 방법에 의존해 큰 문제없이 점령이 가능했지만 이오자마나 오키나와는 요새화가 아주 잘되었었다는걸 감안해야한다. 만약 필리핀 섬 전체가 이오지마나 오키나와섬같은 요새화가 되어있다면 필리핀 탈환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탈환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즉,공격하다보니 의외로 저항이 강력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사상자가 많았던 것이지 시간이 오래걸리고 사상자가 많아도 공격을 감행한 것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맥아더의 공격은 조공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부차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당장 맥아더 소속의 미 제7함대중순양함이 그나마 가장 큰 함선이었고 몇 척 있지도 않은데다가[12] 구축함급도 안되는 어뢰정들이 함대구성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항공모함 지원도 거의 없어서 얼마 안되는 육상기로 주요 작전을 시행했다. 해병대의 지원도 미약해서 상당수의 상륙은 육군이 담당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맥아더의 공격을 조공으로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효과가 엄청났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필리핀 탈환전에서 미국군 40만 vs 일본군 40만 드림매치를 펼쳐 1만여 명의 전사자 피해를 입고 일본군에게 자그마치 그 40배에 달하는 전사자를 발생시켜 종전때 일본군은 만여명이 겨우 넘는 병력만이 항복할 수 있었다.[13] 이정도의 성과라면 어디 내놔도 죄다 명장 소리를 듣는다. 독일 국방군도 초기의 소련군 상대로 교환비로 이렇게 큰 전과를 낸 경우는 몇 건 없다. 그리고 맥아더는 이렇게 엄청난 교환비를 자주 이끌어냈다. 무의미한 전투였다고 욕먹는 펠레리우 전투에서도 교환비는 미국군 1명당 일본군 9명이였다.

미국군과 일본군 간의 어마어마한 전력차를 근거로 맥아더의 이러한 성과를 별 특출날 것도 없는 당연한 결과라고 폄하하는 사람이 있지만 좁아터진 조그마한 섬이라서 우회할 공간이 손톱만큼도 없는, 그리고 그 자체가 섬 크기에 비해 대규모 병력이 주둔 중이고 요새화까지 잘 되어있는 오키나와, 이오지마와 비록 엄청 큰 섬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회 기동이 충분히 가능하고 40만에 달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지만 모든 섬을 포함할 시 면적이 대한민국의 세 배에 달하는 필리핀은 작전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방자 입장에서 가용 병력에 비해 방어해야할 지역이 늘어날 경우 선제권을 가지는 공자에게 허를 찔릴 가능성이 높아지는데, 이를 공자의 이점이라고 한다. 게다가 필리핀 주둔 일본군은 레이테 방어전에 정예 병력을 다수 동원하고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방어진지보다 비행장 삽질에 전념하는 바람에 험준한 필리핀의 지형과 미국군에게서 탈취한 방어진지(드럼 요새라든가)말고는 그 어떤 요새나 방어시설의 혜택도 보지 못했다. 실제로 당시 주필리핀 일본군 총사령관이었던 야마시타는 40만 대군과 전역 직전 필사적으로 긁어모은 보급품을 끌어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병력과 보급이 부족하여 드넓은 루손 섬을 방어하기 위해 대부분의 지역을 포기하고 예하 부대를 3개 조직으로 나누어(쇼부, 켐부, 심부) 산악 지역 중심으로 방어해야 했다. 그나마도 해군이 출구를 확보해야한답시고 마닐라 방어전을 강요하는 바람에 애꿎은 병력마저 날려먹었은 점도 그렇고. 물론 그렇다고 맥아더의 군사적 재능이 폄하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넓은 기동 공간도 결국 사용하는 사람 나름이니까. 넓은 공간은 대개는 공자에게 많이 유리하지만(소련처럼 극단적으로 넓은 경우는 제외.) 방자가 능수능란한 기동방어를 구사할 경우 오히려 공자가 탈탈 털릴 수도 있다. 게다가 상대는 일본 육군에서 손꼽히는 명장 야마시타인데 그런 일본군을 상대로 1대 39라는 어마어마한 교환비율을 창출해낸 것은 분명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단한 업적임이 맞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면, 대만은 일단 중화민국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영역이었다. 일본이 패망한다면 대만은 중화민국의 한 지방으로서 귀속될 가능성이 높은데, 꼭 필요하지 않고 그럴 병력의 여유도 없다면 굳이 미국군이 상륙해서 접수하는 것은 그리 쓸모없는 일이다. 남의 영토를 일부러 고생해서 되찾아줄 까닭이 없는 것이다. 필리핀은 미국의 세력권으로 볼 수 있었으며, 전후에는 독립국으로서 친미국가가 될 것이므로 미국군이 일본군을 몰아내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대만의 경우 원래부터 중국 본토와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데다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거의 유일하게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통치를 한 지역이라서 주민 전체가 미국의 적이었다. 식민지배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일본에 대한 악감정이 거의 없는 편이다. 지형적으로 보면 게다가 최고봉이 3천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맥까지 있다. 공격군의 입장에서는 욕이 나오기 딱 좋은 곳이다. 그리고 중국군의 전투력은 바닥이나 마찬가지란 평가가 나온지 오래라 대만이나 필리핀이나 전략적 가치는 거기서 거기다. 그렇다면 그나마 주민이 미국에 우호적이며[14], 지형지물이 익숙한 필리핀을 탈환하는 편이 더 좋다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레이테 만 해전는 전쟁의 개념을 조금만 알아도 알 수 있듯이 대규모 결전에 가까운 전투지 확인사살이 아니다. 애초에 확인사살이었다면 윌리엄 홀시가 오자와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전함이 다수 있는 일본군 주력함대를 무시하고 함재기도 거의 없는 미끼 항공모함을 쫒지도 않았을 것이다. 덤으로 사미르 해전에서 일본 함대의 지휘관이 오판만 안했어도 필리핀 상륙군과 맥아더는 큰 피해를 입을 상황이었다. 종합하자면 필리핀 상륙으로 해군이 원하던 대규모 해전을 이끌어 낸 것은 맥아더지만, 다 잡은 고기를 놓치는 실수를 해군이 하는 바람에 위험에 빠질 뻔 한 것도 맥아더였다.

결정적으로 그렇게 해군 및 미국 정부에 적이란 적을 다 만들어놓은 맥아더가 해임당하지 않은 것도 실적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조공에 지원도 주공에 비해 변변찮은 상황에서 교환비가 주공보다 압도적이라면 어디가서나 인정받는다. 따라서 니미츠와 맥아더는 똑같이 유능한 장군/제독이지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능가하지 않는다고 말 할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군 뿐만 아닌 해병대에게서도 상당히 미움을 받았는데 이는 맥아더가 적전 상륙은 해병대에게 맡겨 온갖 고생 다 시키고는 잔적 소탕과 점령 임무는 휘하 육군에게 맡겨 언론의 주목을 받게하는 수법을 종종 써먹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해병대를 맥아더가 태평양 전쟁에서 대규모로 써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달라서 태평양 전쟁에서 맥아더가 해병대를 사용하지 못 한 것은 가용 가능한 해병대를 니미츠의 해군이 다 가져간 탓이지 그와 해병대와의 불화탓이 아니다. 맥아더도 상륙전에서 해병대의 유용성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맥아더 휘하에 배치가 안 되는 걸 어떡할 것인가. 때문에 맥아더는 미 육군과 호주 육군만 거느리고 싸워야 했다. 맥아더의 구역에서 해병대가 전투를 한 것은 카트휠 작전의 후반부인 뉴브리튼 섬 전투가 유일한 사례이며 나머진 니미츠 제독의 구역에서 전투를 해왔다. 다만 뉴브리튼 섬 작전 막바지에 맥아더장군이 해병대를 돌려주기 싫어서 일정지연을 시킨 기록은 있다. 참고로 맥아더와 해병대의 관계는 인천 상륙작전 직전에 최악이었다가 작전의 성공으로 회복되었다가 장진호 전투로 완전히 파탄나버렸는데, 해병대를 중공군 사이에 고립시킨 장본인이 맥아더였고, 해병대의 상급 부대 지휘관이었던 알몬드가 맥아더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알몬드는 장진호 전투에서 수준 이하의 지휘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전선에서도 호화 생활을 하여 장병들의 빈축을 샀다.

이후 핵폭탄 두 발 맞고 항복한 일본과의 항복협상에 대표로 참석해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조인서에 직접 사인하고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참고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일본에 핵을 투하하고서도 일본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한 몰락 작전이라는 상륙 계획이 있었는데 이 작전에서 더글라스 맥아더가 최고 사령관을 맡는것으로 되어 있었다.[15] 이 계획은 일단 70만 명 이상의 병력과 100척 이상의 항공모함을 포함하는 규모이며 영국군 역시 지원세력을 보낼 예정이었고 상륙시 수발의 핵폭탄과 독가스를 투하하여 일본의 병력밀집지역을 초토화시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게 실행됐으면 그야말로 아마겟돈, 아포칼립스... 다행스럽게도(?) 일본이 핵폭탄 두 발에 항복한 덕에 실행되진 않았다.

종합하자면 거만하고 독불장군이며 아전인수적인 면이 있으나,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결과를 가져왔고, 개인의 명성을 추구하면서도 실적이 좋았기 때문에 과거 전쟁에서의 공적까지 감안하여 1944년에는 미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 계급이 되었다.[16]

2.3. 일본 점령군 사령관 시절과 인천상륙작전

(ɔ) U.S. Army photographer Lt. Gaetano Faillace from


ジー-エッチ-キュー幕府 初代 征夷大将軍 マッカーサー[17]
참고로 맥아더의 키가 182cm이다. 쇼와 덴노는 키가 아주 작다.

일본의 쇼와 덴노GHQ에 불러서 덴노의 시종들을 모두 물리치고 둘이서 함께 찍은 유명한 사진. 이 사진 한장은 패전 후의 일본인들 마음에 남아 있던 자존심과 저항의식을 완전히 상실시켰다. 이때의 일화 맥아더 장군과 미국군이 일본에 들어온지 한달이 넘었는데도 덴노쪽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연락을 취할까 했는데 덴노 스스로 직접 맥아더를 찿아왔다고 한다.덴노 스스로 궁밖으로 나간게 2000년만의 일이라고.그렇게 맥아더를 만나러 왔으나 맥아더의 비서도 아닌 군의관이 맞이를 했다고 한다.[18] 최대급의 모욕을 받은 셈이었으나, 대화 자체는 화기애애하게 진행되었고, 어느 안전이라고 화를 내겠나 목숨 앞에 왕도 천왕도 없다 금방 감정을 풀어버렸다고 한다. 이 사진말고 덴노가 맥아더에게 인사를 하며 고개 숙인 사진이 있었는데, 일본정부의 공작이 엄청났고 미국측에서도 덴노의 체면을 생각하여 관련 사진을 쓰지않게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신처럼 모시던 덴노가 직접 최고급 양복까지 차려입고 불려간데다가 당시 맥아더는 정복도 아닌 (당시에는 규정상 전투복을 겸할 수도 있던)허름한 육군 열대용 근무복 차림에 시큰둥한 표정과 모양새로 찍힌 사진을 봤으니 진정한 멘탈붕괴의 현장이었다. # 라이프지 사진은 더하다

종전후 일본 점령군 사령관으로 GHQ 꼭대기에서 군림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그를 가리켜 일본 최후의 쇼군이라 말할 정도이고 이후 미국 대통령직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은 것도 이때 정치적 허영을 충족시켰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19]. 사실 미국 정부에서는 황실을 비롯한 전범들을 박살내고 싶어했지만 일본인들이 들고 일어날 것을 우려해서 그걸 막았다는 견해도 있다.

이 시절 일본의 어업 권역을 규정한 맥아더 라인은 후일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평화선(이승만 라인)"으로 규정되는데 이는 한국의 배타적 경제수역은 물론이고 독도 영유권에 있어서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

1945년 9월, 미국군이 한반도에 입성했을 때 이른바 맥아더 포고령 혹은 맥아더 포고령 제1호가 발표되었다. 이 포고문을 통해 미국군이 직접 한반도를 통치하는 미군정을 선포하였으며, 건국준비위원회는 물론, 심지어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도 불인정하여 한국인의 자주적 통치활동을 부정하였다. 또한 이를 통해 친일파들을 대거 미군정이 고용, 편입하였고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세력(재미있게도 한민당은 현대에는 새누리당이 아니라 새민련으로 이어진다.)을 지원하였다.

이 맥아더 포고령 제1조 내용을 통해서 미국군이 직접 한반도 통치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미국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또한 미군정 기간 동안 공식 공용어는 '영어'였다. 이어서 국내에서 자주적 치안권 및 행정권을 담당했던 건준을 비롯한 인민위원회,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은 부정되었고, 심지어 중국 충칭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도 불인정되어 한국인들의 자주적인 통치활동 및 권한이 부정되었다.

포고령 제2조를 통해 일제강점기시절 때 일제에 부역행위를 한 친일 관료, 경찰, 군인 출신등 반민족인사들이 대거 미군정에 고용되어 편입되었다. 당시 미국군은 한반도에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었고 구체적인 통치계획도 없었다. 따라서 미국군 입장에선 기존 관료기구를 활용하는게 가장 효율적이었던 것이다. 이와 별도로 미국군과 대화가 되고 미국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인물들, 즉 미국유학파 한국인 박사들을 찾아서 미군정 고문에 임명한다. 대체로 개신교회 미국선교사의 후원으로 미국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 미군정 치하에서 강력한 실세로 부상한다.

하지만 포고령과는 달리 맥아더의 권한은 일본에 국한되었으며, 한국은 미국 국무부의 직접 통치하에 놓였다. 맥아더 자신도 일본의 통치에 집중하여 한국까지 손대려고 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한국에 관심을 보인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의 이야기다. 따라서 맥아더가 해방에서 한국전쟁전까지의 혼란한 한국 정계에 영향을 준 것은 저 포고령 2개 밖에 없다고 보면 된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의 급박한 상황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재량권으로 최대한 많은 전투력을 투입하여 한국군의 급격한 붕괴를 막기도 했다. 이후 UN군 총사령관으로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상륙작전으로 평가받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군인으로서 아직 녹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 워싱턴의 미국방부와 합참은 조수간만의 차이로 인천 상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군산 상륙을 강력하게 권고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원수 계급과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서 독단적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서 워싱턴을 데꿀멍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맥아더의 마지막 영광이었다.

당시 채병덕을 육참총장에서 잘라버리라고 이승만에게 요구했다. 한국전쟁 초기에 한강방어선이 무너지게 생기자 맥아더는 채병덕이 지휘관으로서 능력이 어떤가를 알아내기 위해 이승만이 보는 앞에서 채병덕에게 어떻게 지휘해서 방어해낼 것인지를 물었다. 채병덕은 여기서 200만 한국 장정 훈련을 언급했다. 맥아더 코앞에서 맥아더의 생사대적(?)이었던 퍼싱의 사고방식대로 대답한 셈이다. 여기서 채병덕이 정치감각과 군사감각 둘 모두에 무식, 무지했다는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결국 한강 방어선이 무너졌다.

맥아더는 채병덕이 똥별이라는 것을 바로 간파해 냈지만 채병덕이 병림픽을 벌일까봐 이 자리에서는 크게 칭찬한 반면 그날 저녁 이승만과 독대를 요구한 뒤 이승만과 단 둘이 독대면을 하는 자리에서는 불같이 화를 내며 채병덕을 경질시키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이승만은 그 다음날 아침에 기상하자마자 자신의 업무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를 칼같이 이행했다. 후임 육참총장으로는 정일권을 임명했다.

2.4. 몰락 - 파면과 은퇴

인천 상륙작전으로 맥아더의 명예는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후부터 오판을 남발하며 1950년 겨울의 대참패에 일조했다. 마오쩌둥저우언라이는 미국군이 38선을 넘으면 중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거듭 경고했지만 맥아더는 그것을 허풍으로 치부했고, 중국이 설령 참전한다 해도 미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당장 맥아더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면 "역사상 최대의 참사"가 벌어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결국 이 말은 맥아더가 바란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로 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중공군이 남진하고 있다는 첩보는 맥아더와 그 휘하 참모들에 의해 보기좋게 무시당했고,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의 10월 15일 웨이크 섬 회담에서도 맥아더는 중국은 문제가 못된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덕분에 중공군의 참전 이후 트루먼은 맥아더에게 속았다며 길길이 뛰었다. 11월까지도 맥아더는 중공군의 침투는 공군력으로 간단하게 저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무려 30만 명의 중공 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건너 매복을 완료한 상태였다.

전선의 장교들은 중공군이 이미 압록강을 넘은 것이 확실하다며 진격속도를 늦출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진격을 늦추기는커녕 크리스마스까지는 전쟁을 끝내겠다며 마지막 총공격을 개시할 것을 명령했다. 결국 미국군은 중공군 30개 사단의 거대한 포위망 한가운데로 병력을 흩어 놓은 채 걸어들어가는 미국군 역사상 최대의 실수를 범하게 된다.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압록강 진격을 승인해줄 것을 요구했고, 11월 21일에 트루먼은 중공군은 별 위협이 못된다는 맥아더의 보고를 토대로 "중공군의 실질적인 저항이 없을 것(no effective resistance)"을 조건으로 하여 맥아더의 압록강 진격을 승인했다. 그러나 고작 1주일 뒤인 11월 28일, 중공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11월 말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포위 대공세로 미국군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대참패를 당했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미 8군과 10군단의 선봉대는 단숨에 궤멸되었고, 일선 사령관들조차 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대혼란에 빠져 허우적댔다.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은 군단이 파멸 직전까지 몰렸다는 것도 모른 채 공격을 강요했으나 현장 장교들의 항명에 가까운 저항에 직면한 다음에야 후퇴를 허락했다. 결국 미국군은 청천강에서 평안남도 순천시에서 수십 km나 후퇴한 후에야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이후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청천강에서의 대패가 "미국군 역사상 최대의 참패"였다고 회상했다. 맥아더가 중공군이 건너오면 "역사상 최대의 학살"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중공군의 개입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완전승리를 자신하던 맥아더는 11월 28일에는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상황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났다."라고 선언, 주위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사실 중공군의 참전 당시 계획은 참전 이후 6개월간, 연합군이 청천강-원산 선에서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공산측도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내내 공산군은 중공이라는 무한대의 병력공급원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총병력을 넘지 못했고, 심지어 청천강에서의 패배 이후 평양을 사수하며 제대로 된 방어선을 펼쳤다면 중공군의 보병 기동전을 차단하며 전세를 유리하게 펼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맥아더의 도쿄 사령부는 별다른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 미국군이 지휘체계도 회복하지 못한 채 대공황 속에서 속수무책으로 밀리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20] 맥아더는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가 한국에 머문 시간은 다 합쳐봐야 몇 주일에 불과하다.)

맥아더는 중국군의 증원을 차단하기 위해 만주폭격을 주장했지만, 확전을 우려한 워싱턴 수뇌부는 미국군의 압록강 월경을 금지한다. 이에 따라 통칭 "Yalu River Restriction"이라 불리는 <공군기의 중국 영공 침범 금지령>이 내려졌지만, 상당수의 파일럿들이 그 명령을 무시하고 중국 영공으로 쳐들어갔다.[21]

맥아더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제한전이 아닌 중국과의 전면전쟁이 필요하다고 주장,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세계멸망확전을 우려한 트루먼 행정부와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트루먼 행정부는 38선을 회복하는 수준에서 평화조약을 체결할 방침이었지만, 맥아더는 만주에 대한 핵공격러시아도 참전하것소 대만에 있는 국민당군의 동원까지 주장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대전략 수립은 행정부의 몫이라며 맥아더에게 함구령을 내린다. 그러나 맥아더는 트루먼의 함구령을 무려 6차례나 무시하며 독자행동을 계속했다.

맥아더는 자신에게 대전략을 수립할 권한이 있다면 핵무기를 떨어뜨리고 만주를 침공하며 타이완의 중화민국군을 활용해서라도 중국군을 섬멸할 것을 공언했다. 다만 그렇게 해서 벌어질 세계적인 확전과 사상자 수의 급증은 정치가들의 문제이지 야전사령관인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맥아더가 기자회견에서 대만군의 참전을 역설하자 마침내 트루먼의 분노가 폭발했고. 결국 맥아더는 전쟁 지휘 중 파면당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의 동료 장군들조차 맥아더의 파면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일부에서는 그의 인기를 두려워한 트루먼의 계략이라고 하지만 당시 맥아더 자신의 나이가 많은데다 오랜 외국 생활로 국내정치 기반이 전무했기 때문에 의미없는 이야기였다. 맥아더는 44년과 48년 모두 공화당 대통령후보 선출 경선에 도전했지만 참패당한 바 있었다. 심지어 맥아더가 최고의 영웅이 된 44년에도! 맥아더도 별 관심은 없었는지 44년에는 자기 스스로 아무 선거 운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쪽 사람들은 장군은 너무 바쁘셔서 선거운동할 시간도 없으십니다라는 유세를 했다.

1951년 퇴역식 당시 남긴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라는 명언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22]

2.4.1. 미국의 맥아더 비판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의 행보에 대해서는 수많은 현장 증인들과 학계의 권위자들이 가혹한 비판을 가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미국 정부와 군에서 맥아더를 쉽사리 거론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맥아더의 38도선 돌파는 미국 국제정치학계의 거두 로버트 저비스(Robert Jervis)와 스티븐 반 에베라(Stephen Van Evera)에게 "전략적 오판의 대표적 케이스"로 평가받았다. 반 에베라는 38도선 돌파가 "미국의 군사력이 중국에게 가할 수 있는 위협을 과소평가했고, 중국이 한반도에게 가진 이해관계도 과소평가했다. 그 결정은 중국의 이익도 관점도 고려하지 않았다."고 냉정한 비판을 가했다.

대통령 트루먼은 자신의 회고록 "Memoirs"에서 맥아더가 워싱턴의 수뇌부를 기만했다고 분노했으며, (맥아더는 트루먼과의 웨이크 섬 회담에서 중공군의 참전가능성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참전하더라도 역사상 최대의 참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자신한 바 있었다.)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맥아더의 폭주가 미국과 동맹국들과의 관계를 파국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확전가능성이 언급되지마자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 수상이 황급히 미국을 직접방문, 확전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애틀리는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NATO를 약화시킬 것이다"고 트루먼에게 호소했다.

미국 군부의 대부이자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이었던 조지 마셜 원수도 중공군 참전 이후 한국에서의 전쟁은 전전 현상유지(status quo ante)의 선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 상태였으며 트루먼, 애치슨, 마셜 등 당시 미국의 수뇌부 전원은 전쟁의 지속과 확대는 소련을 유리하게 할 뿐, 자유진영의 불안정을 불러올 것이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하고 있었다.[23]

특히 마셜과 애치슨이 수립한 냉전기 대전략은 동맹국들을 전세계적 단위에서 결속, 소련을 전방위 압박하는 봉쇄정책(Containment)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리 헤스(Gary Hess)에 의하면 맥아더의 독자행동은 NATO와 UN 내부에서 미국의 폭주가 소련을 자극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있었고, 이는 고작 장군 한명이 국가의 세계전략을 손상시킬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24]

이렇게 수뇌부가 전쟁중단으로 결론을 내린 상태에서 맥아더의 명령불복종은 민주주의체제의 근간인 군의 민간인통제주의(civilian control of the military)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고, 미국 정치학계의 권위자 리처드 노이스타트(Richard Neustadt)는 맥아더의 지휘기간은 미국의 민군관계(civil-military relations)가 역대 최악으로 전락한 시기였다고 평가했다.

이 모든 면에서 맥아더는 강유최영을 닮았다. (그러나 세세한 면은 차이점도 더러 있다.)

2.4.2. 중국의 맥아더 비판

중국 학계에서는 당연히 비판이 거세다. 우선 한국전쟁 때 중공군과 전쟁을 한 사실이 있다. 그 와중에 중국의 초대 국가주석인 마오쩌둥의 아들인 마오안잉을 전쟁터에서 전사하게 만든 것이 가장 크며, 기타 수많은 중공군 장병들을 전장에서 죽게 한 점이 크다. 당장 마오쩌둥이 맥아더를 "일본의 전쟁범죄를 묵인하는 악마"(日本的戰爭罪予以默認惡魔)라고 강하게 비난한 것만 봐도.

그리고 당시 일본의 천왕이자 2차 세계대전의 명백한 주범이자 반 인륜 범죄를 적극 지시한 히로히토를 엄중하게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를 해 줬다는 점에서도 엄청난 비난을 받기도 한다. 베이징대학의 영어영문학과 왕모우(王謀) 교수는 맥아더는 아시아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고 강하게 비판했으며 같은 2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중국이 일본 전역을 통치하게 했더라면 지금의 중미관계(中美關係)가 지금보다 우호적으로 개선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이 그렇게 원하는 상임이사국 자리를 우리 중국이 그렇게 결사반대를 하고 있는데,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권 국가들은 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중국을 나쁜 나라로 몰아세우고 있다며 정말로 전 세계에서 나쁜 나라는 일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난징대학의 영어영문학과 리쥔청(李駿成) 교수는 차라리 동시대에 맥아더 대신 중국군을 위시한 저우언라이가 GHQ를 통치하였더라면 지금의 중국은 더욱 번영하였을 것이며, 일본이 중국의 식민 지배를 받는다면 일본이 무차별적으로 역사 왜곡을 하지 못하게 되어 난징 대학살 문제 및 댜오위다오 문제 등도 어느 정도 해결되어 중일관계(中日關係)가 지금처럼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중국의 혐일 감정도 어느 정도 사그라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3. 말년

맥아더가 퇴임 직후 뉴욕에서 벌인 시가행진에 모인 사람의 수는 700만 명에 달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이다. 이 기록적인 환영 인파에 정치인들이 무지 당황했음은 물론이고 차기 대권을 노리고 후보 지명을 기다리던 있던 아이젠하워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세간의 우려(혹은 기대)와는 달리 맥아더는 출마하지 않았다. 그는 전당대회에서 아이젠하워가 아닌 후보(로버트 태프트)를 지지했으나 595:500으로 아이젠하워가 지명되었고, 그 해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결국 한국전쟁 관련 문제로 아이젠하워와 화해하고, 회고록을 출판하는 등 남은 12년간 조용히 여생을 마친다. 향년 만 84세.

1962년 10월부터 11월까지 미국을 방문중이던 김종필을 만났다. "한국이 하루빨리 통일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한국이 통일될 때까지 죽을 수 없다."라고 말했으나... 140살 살아보실려고 하셨습니까

존 F. 케네디 대통령 재임시 민간인 자격으로 자문을 했던 적이 있는데 바로 피그스만 사건과 베트남 전쟁이다. 그는 피그스만 사건 실패에 오리발 내밀기에 급급한 펜타곤을 강도 높게 비판했고 강력한 직접 개입을 주장했다. 또한 베트남에서도 더 이상의 개입을 중지하고 조속히 손을 떼야 한다고 역설했다. 후일 베트남에 대한 지적은 미국군의 패배로 맥아더의 시각이 옳았음이 증명된다.

사실 맥아더는 일본이나 필리핀을 제외하고는 아시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 피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는 베트남은 듣보잡 수준의 무가치한 부동산일 뿐이었고 차라리 주변국의 연합체로서 수비하거나 잃거나 해도 좋은 나라였다. 문제는 미국 정계와 군계의 유력한 사람중에 맥아더 정도의 인식수준을 가진 이조차 거의 없었다는 것. 대부분이 맥아더 수준 이하였다는 것이 안습. 게다가 베트남을 정말로 잃어버려도 아무 일도 없었다. 물론 미국의 지도자층이 다 바보는 아니라서 전략적, 전술적으로 베트남전을 비판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매튜 B. 리지웨이였다. 그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비추어 제한전 상황에서의 공군력의 우위는 허상이라는 이론으로 북폭을 비판했는데 그게 정확한 지적이었다.

사실 맥아더가 베트남전을 대한 인식이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베트남전쟁의 무가치성을 인식한 것은 잘한 것이지만, 결국 전쟁의 수행에 있어서 맥아더의 조언은 소모전과 초토화작전이었다. 폭탄을 때려붇고 적을 물량으로 공격하고, 민간인이건 뭐건 가리지 않고 공격하라는 것. 이 조언을 듣고 그대로 실행한 것이 바로 파월미국군 사령관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이다. 그 결과 벌어진 미국군의 행적이 비효율의 극한, FFZ 설정과 전략촌 개념들이 바보짓의 상징 취급 받는 것을 보면 맥아더를 베트남에 집어넣었어도 똑같거나 더 심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중국이나 캄보디아, 라오스를 대놓고 폭격이나 안했으면 다행.[25]

4. 그의 인간성


천성적인 카리스마와 쇼맨십, 언론 플레이로 자신을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있게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부하들이 자신을 제치고 유명세를 타는 것을 원치 않았고, 자기 관할의 모든 보도 자료에 '맥아더 사령부'라는 표시를 했다. 허나 그 탓에 대통령과 참모본부는 물론이고 해군과 해병대까지 들러리로 만드는 바람에 적들을 떼거리로 양산해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특히 트루먼 대통령은 특유의 패션(빳빳하게 각을 세운 바지와 썬글라스, 담배 파이프)을 두고 "70대의 원수가 20대 소위처럼 하고 다닌다."며 못마땅해 했다고 한다. 또한 "저 인간이 대통령이야, 내가 대통령이야? 자기가 마치 대통령이나 되는 듯이 행세하고 다니잖아!"라는 말도 남겼다고 한다. 사실 맥아더는 대통령이 아니고 일본의 백인 쇼군이었다.

장군이 된 이후에도 언제나 최전선에 섰던 인물이라는 말도 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사단장 시절부터 포격이 떨어지고 기관포가 난무하는 전장으로 선두에 서다시피 하며 달려나갔고, 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 전역 사령관[26]이었음에도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고. 때문에 아래에서 일하는 장교들이 식겁한 적이 한두번이 아닌데, 장군님의 위치를 생각해서 후방에 계시는게 안전하지 않냐고 조심스레 조언해도 주님이 날 지켜주시는데 내가 죽을 리가 없다라며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맥아더식 반자이 돌격

부하들과 동락을 같이하는 용감한 장군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현대전이 한니발 바르카가 이끌던 칸나이 전투도 아니고, 당장 고대 세계의 영웅들을 비교한 플루타크 영웅전에서도 장군의 주요 임무를 망각하고 일반 병사처럼 최전선에서 싸우는건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까고 있다. 비교할 수 없는 화력과 위험도, 엄청난 규모의 병력과 광활한 면적의 전장 등 고대의 장군들과 비교가 안 되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장군이 함부로, 그것도 개인적인 감상에 따라 난 죽지 않아! 맥아더를 쓰러뜨릴 수가 없어 를 믿고 뛰어드는 자체가 책임감 있는 장수라 볼 수 없으며, 용기도 아니다. 아이젠하워가 괜히 과장이 심하다고 비난한 게 아니다[27]. 패튼이나 롬멜도 이런 종류의 일화는 종종 있지만 그들은 기껏해야 군단장이고 이쪽은 전역 사령관이다. 누군가 심리학자에게 이런 행동의 근원에는 어떤 감정이 있냐고 묻자. 자살이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가 진짜 최전선에서 돌격 따위를 했다고 믿으면 곤란하다. 그가 최전선 시찰을 자주했고 이런 곳 중에서는 조금 전까지 포탄이 떨어지곤 했던 지역도 있었기 때문에 부하들이 최고 사령관의 안전을 우려했던 것일 뿐이다. 실제 오키나와 전투의 총사령관이었던 버크너 중장이 이런 전선 시찰 중에 전사했으니 부하들의 우려가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맥아더를 죽일 총알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말은 이런 부하들의 우려에 대한 농담 섞인 대답이었다. 이런 걸 감안하지 않고 진짜 그렇게 믿어다고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이다.

그리고 어쨌거나 결국 "그에게 적중될 탄환은 아직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는 말대로 되었으며, 전략적 안목이 탁월한 용감한 장군으로 남았다.

이런 '쇼맨쉽'을 정말 필요한 곳에선 써먹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했을 때, 그가 기지 밖으로 안 나온다는 이유로 병사들이 그를 '덕아웃 더그'라고 조롱한 바 있다. 조롱할 만한 것이 이 당시 미국군 병사들은 바탄 반도에 갖혀 전염병 및 식량부족으로 온갓 생고생을 하면서 전투하고 있었는데 이놈의 원수란 작자가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후방을 돌아다니면서 병사의 사기를 복돋아주어야 하는데 하지를 않고 참호에 몸을 숨긴 채 도망갈 궁리나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렇게 욕했지만... 거만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에게는 대단한 굴욕이었을 것이다. 사실 방공호 안이 지휘통제에 더 유리한데다가 개전 전 세워진 작계에 따라 오지도 않을 구원군을 기다리며 내키지 않는 방어전을 해서 그랬을 것이다. 통신기도 거기 있었다. 그리고 맥아더도 할말이 있는 게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할 가능성을 설파하면서 몇 번이나 본국에다 증원과 장비 보급을 요청했지만 이걸 씹은 건 미국 정부였다. 결국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했을 때 맥아더 수중에 있던 병사는 식민지 경비대 수준에 불과한 약간의 미국군과 훈련과 장비가 턱없이 부족한 오합지졸 필리핀군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절대 도망칠 생각이 없었지만 최고위 장성을 포로로 만들 수 없다는 미정부의 판단에 의해 호주로 탈출할 것을 명령받게 된다. 이때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은 맥아더가 절대 도망칠 위인이 아니니까 루즈벨트에게 탈출권고 따위가 아닌 미국군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단호하게 명령할 것을 요구했고 맥아더는 이런 루즈벨트 대통령의 강경한 명령에 어쩔 수 없이 호주로 탈출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대통령을 명령을 안 씹고 잘 들었다. ~~아무래도 루즈벨트가 트루먼보다는 좀 무서웠을지도 모른다.[28] ~~

모든 국가의 모델은 미국이라고 믿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참모장이[29] 파시즘을 찬양하자 민주주의의 장점과 파시즘의 한계에 대한 일장연설을 쏟아냈다. 한국전쟁에서 항명사건을 일으켜서 문민통제에 대해 반하는 모습을 보여서 잘 믿어지지 않을 지도 모르지만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 잘 알고 깊게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걸 잘 실천을 안 해서 그렇지. 여담이지만 맥아더의 참모 중에는 유럽 최후의 파시스트 소리를 들은 스페인의 프랑코 지지자도 있었다고 한다.

전사연구가 마이클 샬러 교수는 자신의 저서《더글러스 맥아더》를 통해 맥아더의 인간됨과 그로 인한 마찰, 불합리한 작전 입안 및 실행, 사령관으로서 부적절했던 점을 신랄히 지적하였다. 뛰어난 재능 이상으로 자기 중심적인 탓에 너무도 쉽게 비합리적인 방향을 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샬러의 평가이다. 또한 근간된 데이비드 핼버스탬의《콜디스트 윈터》에서도 작정하고 맥아더를 깐다고 느껴질 정도로 맥아더의 인간적 단점과 판단 오류에 대해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 따르면 맥아더는 일본 진공 시점에서 이미 너무나 전설화된 상태라 아무도 감히 비난하지 못하고 이후 인천 상륙작전이라는 잭팟 때문에 거의 불가침 영역으로 승화했다는 것. 설상가상으로 주위에 예스맨들이 모여 바탄갱과 같은 세력이 구축되었다. 그중 맥아더의 참모장을 지낸 리처드 서덜랜드와 같은 장군은 중간에서 정보를 가로막고 독단적 전횡을 많이 저질러 맥아더 휘하의 육군항공대, 해군뿐만 아니라 육군에게도 공분을 샀다. 결국은 파병나간 호주군 장교의 부인을 꼬셔 그녀를 위해 호화스러운 막사를 만들어주는 일까지 벌어지자 맥아더에 찍혀 버렸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예스맨만을 남겨두는 나이먹은 사람 특유의 좋은 말만 가려듣기 신공으로 전장에서 싸우는 부대들의 정보나 요구에 완전히 귀를 막고 있었다고 한다. 모든 보도기사와 사진을 일일히 검사하여 위엄이 드러나는 문구와 각도만을 허용하고, 회의에서도 일방적으로 자신의 연설만을 전달하는 전형적인 제왕적 지휘를 고수했다 한다. 인천 상륙작전을 봐도 잘 알 수 있는데 다른 장군들이 반대를 하건 말건 간에 "내 생각이 옳다!"를 밀어붙이는 독불장군의 모습을 아주 제대로 보여주며 자기가 깠던 전체주의의 한계인 경직된 의사결정을 몸소 보여주었다.

더불어 6.25 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을 지키는 수하들에게 "버티지 못하면 죽어라!"라는 명령을 내려 "무슨 일본의 군국주의자냐"라는 미국 여론과 언론의 비난에 시달리던 부하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을 두둔하면서 "전쟁에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다가 워커가 맥아더와 친하기 때문에 그를 옹호했다며 그도 논란이 된 적이 있다.[30] 참고로 워커 중장은 한국전쟁 당시 미 8군 사령관으로 복무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사후에 공적을 기려 그가 사망한 지역에 그의 이름이 붙여 워커힐이라 부르게 되었다. 워커힐 호텔이 있는 그 자리로 이는 한국 지명에 서양인의 이름이 붙은 최초의 사례다.

여담으로 그의 외아들은 아버지의 소망과 달리 군인이 되지 않았고 맥아더라는 성마저 버렸다. 맥아더가 지은 시인 "아들을 위한 기도" 는 한국에서 꽤 유명한데, 이 시의 주인공인 그의 외아들 아서 맥아더 4세는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자신의 성을 바꾸고 잠적했으며, 친한 친척들하고만 연락이 되고 있고 다른 행방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에 의해 뉴욕시에 거주한다는 것만 알려진 상태다. 2000년에 어머니인 진이 사망했을 때도 언론에는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들이 햄버가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지만 완전 허구다. 오죽했으면 2000년대 중반쯤에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그와 연락이 되는 친척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솔직히 이름 바꾸고 숨어버릴만 한게 그는 어릴 때부터 너무나 유명한 아버지로 인해 세간의 관심을 지나치게 받았다. 아버지가 원수 계급장을 달 정도가 되면 대개의 경우 그 아들은 이미 장성해서 사회의 중견이 되어 있지만[31] 아서 맥아더 4세의 경우 맥아더가 58세가 되어서야 본 늦둥이라 그가 태어났을 때 이미 맥아더는 미국군 최고위 장성이었다. 그리고 2차대전을 겪으며 맥아더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자 그에 대한 세간의 관심도 비상해져서 어렸을 때 이미 라이프지의 표지모델이 될 정도였다. 또 맥아더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을 때도 그는 고작 7살 꼬마에 불과했다. 이 정도면 유럽 어느 나라의 왕자나 다름없는 위치였고 세간의 관심 또한 평범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몰라도 장성하면서 그는 이런 세간의 관심을 점점 견디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가 죽자 이름을 바꾸고 은거하게 된다. 그의 친척들도 이런 그의 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절대 그에 대해서 노출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더글러스 맥아더는 형인 아서 맥아더 3세와는 사이가 좋았는지, 서로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자신의 형제 이름을 붙여 줬다. 그래서 미국의 외교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2세는 실제로 더글러스 맥아더의 조카이고 더글러스 맥아더의 아들 이름은 아서 맥아더 4세다.

트루먼이 한국전 도중 맥아더에게 브리핑을 받기 위해 웨이크 아일랜드에서 잠깐 만난 적이 있었는데, 누가 먼저 내려야할지 몰라 서로 공중에서 3시간(!!)동안 섬 위를 빙빙 돌았다고 한다. 결국 트루먼이 먼저 내리고 후에 맥아더가 내렸는데, 간단한 인사 후 트루먼이 맥아더를 구석으로 끌고 가

"I don't care who you think I am, you son of a bitch, but NO ONE makes th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wait for 3 hours. You understand me?" (그쪽이 날 뭐라 생각하든 상관없어 이 개자식아, 하지만 아무도 미국 대통령을 3시간동안 기다리게 하지 않아. 알아들어?)

라고 말해 천하의 맥아더를 지리게 한 적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 또한 지나치게 왜곡된 이야기다. 당장 위의 대사를 구글에서 검색해 봐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웨이크 섬의 회담에서 맥아더는 트루먼 대통령을 마중하기 위해 몇 시간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시간 동안 잠시 눈을 붙인다고 한 게[32]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수하들이 감히 그의 잠을 깨우지 못한 건지 모르지만 트루먼이 도착해서 비행기 문이 열릴 때까지 미처 마중나가지 못하고 트루먼은 비행기 문에 서서 마중나오는 그를 한참이나 기다려야만 했다. 그 뒤에 저 위의 사진에 나오는 모습대로 상견례를 하고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트루먼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지만 미국 대통령을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라고 말하며 무안을 주었고 맥아더는 이때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33]
그리고 너무 무안했던 맥아더 자신은 나머지 중공군이 위협이 안된다는 뻘브리핑을 시전하고 말았다

5. 그의 명언들

  •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 퇴역식에서 한 말.
  • "우리는 이제 실업자가 되겠군." - 핵무기의 위력을 보고 한 말이다.
  • "I shall return." - 일본군의 침공으로 필리핀을 탈출하면서 한 말로, 그는 결국 이 약속을 지켰다.
  • "일본은 12살의 소년이다." - 일본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 한 말이다.
  • " 일본인은 쇼군에게 칼을 대지 않습니다 " [34]
  •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혹은 전쟁에는 민주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6. 뒷이야기들

  • 한국에서의 임팩트는 정말 커서 일부 무속신앙에서 신앙의 주체로도 나타나기도 했다. 옛날 옛적 양담배가 금지되었던 시기 그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양담배를 불법으로 입수하여 제물로 써서 신문지면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지금도 그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남아 있다. 이 때문인지 다음 만화속세상 '도사랜드'에서 무당인 주인공의 어머니가 섬기는 제네럴보살이라는 이름으로 3화부터 등장하기도 한다. 현대판 관운장

  • 인천 자유공원에는 시민들의 성금으로 세워진 그의 동상도 서 있는데, 한때 이 동상의 철거를 둘러싸고 분란이 일기도 했다. 서울 자하문 터널 옆에도 동상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자하문터널 옆 정확히는 자하문 고개에 있는 동상은 김신조 외 20여명이 박정희를 암살하러 왔던 1.24 사태 당시 현장에서 사망한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 경무관이다.

  • 2차 세계대전 때 자신이 미국의 대본영으로 하여금 호주까지 가서 일본군과 싸울 장병을 끌어모아 태평양 전선에 보낸 적도 있다. 이전 서술에는 일본군이 호주를 일부 점령한 것으로 적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일부 병사들이 북부 사막에 상륙했다는 떡밥은 당시부터 돌았다.

    호주의 3/4지역의 시설을 자진 파괴하고 주요 도시를 방어하려던 호주의 전략을 비판하고 주요 전선을 뉴기니로 이동시켜서 위에서 막는다는 것이 전략. 그런 이유로 코코다 트랙 전투나 부나-고나의 격전을 겪게 되지만 호주는 안전하게 지켜졌다(…). 그 때부터인지 아닌지 아니면 우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드니의 외곽 동네 중 매카서라는 동네가 존재한다.(스펠링이 Mcarthur로 거의 비슷하다. 어차피 a는 있으나 마나.)

    사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일본의 대본영도 호주의 완전점령은 바라지도 않았다. 단순히 호주의 중립화가 전략목표, 호주의 전략은 일본의 목표와 부합되기도 한데다가 부나 고나의 격전 이후 호주군의 주 업무는 전략적으로 가치가 떨어져 미국군이 지나친 섬들에 대한 토벌전이었다. 이것은 호주 정부를 분노케 한 일이었고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심지어 굶주린 군대와 싸우는 덕분에 이 작전에 참가한 호주군 중 일부는 문자 그대로 일본군에게 식사로 먹혔다.!

  • 3인칭화로 자신을 지칭하는 버릇이 있었다. 부하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대통령 특사나 장차관들 앞에서도 종종 이런 말투를 썼다고 한다(…). 이는 스스로를 인류 역사에 남을 역사적 위인으로 생각한 맥아더의 자기인식이었겠지만, 처음 접한 사람들은 다들 기겁했다고…. 이전 문서에는 영어에서 자신을 3인칭으로 일컫는 것은 극존칭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거 바람 영어에서 자신에 대한 극존칭으로 사용하는 것은 3인칭이 아니고 1인칭 복수형이다. 이는 장엄 복수형이라고 하려 인도유럽어계통 언어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다. 다만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하는 것은 영어에서 흔한 표현은 아니고 카이사르의 글에서도 보이는데 아마 이런 점도 맥아더의 별명이 "아메리칸 시저"가 되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자기가 붙인 별명이라는 설도 있지만 딱히 근거는 없다.

  • 1차 대전이 끝난 후 어느 날, 밤중에 워싱턴 거리를 차로 달리다가 강도가 차에 권총과 손전등을 들이대고 돈을 요구했다. 수도 치안이 왜 이 모양이지? 그러자 맥아더는 자신의 신원과 주소를 밝히고 정정당당하게 대화하자고 하자 강도가 자신은 1차 대전 때 맥아더 밑에서 싸웠다면서 데꿀멍 사과하고 보내줬다. 맥아더는 이 병사를 경찰에 절대 신고하지 않았다. 오오 그거슨 장군님의 자비로움!

  • 일본 점령당시 일본인 비서애인으로 두었는데 그 사실이 본국 언론과 부인에게 알려진 것은 둘째치고 그 일본인 비서가 뇌물을 먹고 사면 대상에 전범들을 올려버렸다. 결국 뇌물을 줬는데도 미처 사면받지 못한 전범 가족들이 항의하면서 뇌물 수수가 알려져버렸다. 맥아더는 격분하여 비서를 총살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출처가 불분명하고 영어나 일본어로 검색해도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진짜 이런 일이 있었다면 한국보다 일본에서 훨씬 유명할 것이고 맥아더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은 미국에서도 퍼지지 않았을리가 없다. 또 아무리 맥아더가 외국인 쇼군으로 불릴 정도로 권력을 누렸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미국 정부의 명령을 받는 그가 재판없이 누군가를 처형하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또 하나 당시 미국의 고위 장성들은 상당히 많은 수가 정부를 가지고 있었고 그게 특별히 흠이 되지도 않았지만 그런 경우는 대개 가족을 본국에 두고 단신 부임한 경우에 한해서였다. 그러나 맥아더의 경우 아내와 아들이 전부 도쿄에서 같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공연히 정부를 둘 처지가 아니었다. 만약 이 에피소드가 사실이라면 거바람.

  • 맥아더는 군생활을 공병장교로 시작했다. 당시 미국군에서는 엘리트 코스가 공병이었다고 한다. 이는 이종찬 장군과 비교되는 점이라는 말이 있다.

7. 대중매체 등

  • 닐 스티븐슨의 소설 <크립토노미콘>에 보면 강력한 포스를 뿜어내는 동시에 은근 웃기게 나온다.

  • 일본 우익 만화나 가공전기에선 포로로 잡혀 참수당하기도 한다(…)[35]. 꼴에 무사의 자비랍시고 담배 파이프를 물게 해줬다. 감히 이 맥아더 쇼군을 참수하려고 하다니! 참고로 그 우익 만화의 작가는 마루오 스에히로로서, 해당작품의 이름은 "일본인의 혹성".

  • 일본식 발음으로는 막카-사-(マッカーサー). 일본어로 진적좌眞赤左와 발음이 같다. 그래서 재벌 해체와 노조 허용, 토지 개혁 등의 조치로 일본에서는 '진짜 좌익 빨갱이'라는 뜻으로 비꼬기도 했다.

  • 한국에서도 한수 등이 '매카서'라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긴 한다. 그래서인지 몇몇 번역본에선 매카서라고 쓰기도 하는데, 그래서 대체 이 인물은 누구냐 하는 독자들의 불편함을 자아낸 경우도 많다. 하지만 현행 외래어 표기법상 매카서라고 표기하는 게 맞다. 다만 위에도 기술되어 있듯이 관용 존중 차원에서 맥아더라 쓰고 있다.

  • 당연히 영화로도 나왔다! 1977년 영화 맥아더에서는 그레고리 펙이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그레고리 펙을 캐스팅한 이유는 실제 맥아더와 닮아서라고[36]. 영화 자체는 2차대전 때에는 적절한 고증을 보여 주지만...한국전쟁 컷에서 패튼 전차가 나온다, 근데 2차대전 때에는 멀쩡하게 셔먼이 나온다. 그리고 F-4도 나온다. 맥아더 미화 때문에 트루먼이나 루즈벨트가 약간 찌질이로 나오지만 의외로 맥아더에 대한 연대기 서술이나 보통은 잘 잊어버리는 일본 군정 시기도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KBS 방영판에서 맥아더 성우는 유강진.

  • 전설의 망작 오! 인천에도 당연히(?) 나온다. 당연히 그레고리 펙을 캐스팅하려고 했지만 통일교 문제로 시끄러워서 본인이 거부하고 로렌스 올리비에가 캐스팅되었다. 상당히 망작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변명하자면 이 영화 촬영 전에 그가 사경을 해맬 정도로 힘든 수술을 했다는 점이다. 사실 그런 점에서 나름 싸게 먹혔고 본인도 돈이 궁했다는 게 정설. 그 자신도 이 영화를 흑역사로 생각해서 언급을 안한다.

  • 한국 드라마에서는 대부분 주한미군을 불법으로 섭외해서 나오는 지나가는 역이나 공기의 비중이다. KBS에서 80년대 방영한 세미 다큐드라마 <전쟁 6.25>와 <휴전 6.25> 연작에서는 당시 유명한 외국인 배우 데니스 크리스틴이 열연했다. 이 배우는 80년대 거의 유일한 외국인 전문 연기자였다. 망작인 <죄 없는 병사들>의 주연 및 제작 감독이기도 했고 가장 최근작인 여명의 눈동자에서 장하림의 상관으로 나왔다.

  • 당연히 북한영화에서는 악의 축 그 자체로 묘사된다. 대전 전투를 다룬 북한 영화에서는 남조선군을 선발에 세우고 부상병을 대포밥으로 만들어라라고 킬킬대는 천하의 개쌍놈 기믹으로 나온다. 물론 따까리는 윌리엄 딘 소장, 결국 영화에서 맥아더는 발리고 딘은 찌질하게 손을 들고 투항한다. 외국인 연기자를 구하기 어려운 나라인지라 딘이나 맥아더 모두 북한 배우들이 연기했고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 미국군은 지금까지 그 어떤 무기에도 맥아더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있다.[37] 같이 윗사람에게 대든 알레이 버크 제독의 이름이 알레이버크급 이지스구축함에 붙어있는 걸 보면 맥아더가 얼마나 정치가들에게 미움을 받는지 알 수 있다. 다만 일반 시민들의 지지는 높아 맥아더의 이름을 딴 공공건물이나 도로, 거리 이름은 어지간한 대통령보다도 많다. 그 중 하나는 로스앤젤레스의 맥아더 공원. 간헐천으로 유명하고 덕분에 영화 볼케이노에서는 화산 폭발이 일어난다.

  • 해리 터틀도브의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북부의 명장이자 맥클레런을 존경하는 다니엘 맥아더로 나온다. 웃긴 것은 실제의 맥아더는 스톤월 잭슨을 존경했다. 다만 이 작품의 시대는 남과 북이 갈려 있으니 이야기가 다르다. 1차 대전 당시 최연소 사단장으로 출연해서 그때까지 살아 있는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장군과 경쟁자 겸 수제자로 나온다. 둘이 최초로 조우하는 부분은 명장면. 이후 2차 세계대전에는 필요하다면 남부연합을 독가스로 선제공격하는 전략을 수립하고 남부연합 후방지역에 대한 기습상륙을 입안하는데... 뒤의 비중은 거의 공기 수준. 다만 등장 인물의 언급으로 2차 대전 내내 리치먼드 북방에서 남부연합의 방어망에 걸려서 고전하는 것으로 나오긴 한다.

  • 만화 보스의 두얼굴에서는 성기컴플렉스를 가진 FBI 수사관 맥더아로 패러디된다. 일본의 맥아더에 대한 열폭때문인지 온갖 찌질한 짓을 하다가 결국 미쳐서 본국에 소환당했다가 나중에 총맞고 죽는다.

  • Steele에서는 1942년 필리핀에서 탈출할 무렵에 강철의 대통령에 의해서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숙청당했다. 애초에 강철의 대원수 동무가 미국의 대통령인 이상 대통령을 무시하고 안하무인적인 행동을 하는 맥아더가 멀쩡히 살아있는게 더 이상하지... 실제 역사에서의 맥아더의 행적을 감안하면 위대한 스탈린께서 맥아더를 가만히 냅둘리가 없지..


  • 묘하게 그럴듯한 느낌의 모에화. 사실 커티스 르메이, 조지 S. 패튼 등에 비하면 이건 귀여운 이미지다(...)
  • 미일 합작 영화 EMPEROR에선 토미 리 존스가 분했다. 한국에는 맥아더: 일본 침몰에 대한 불편한 해석이란 괴이한 제목으로 개봉했다.

* 월드 오브 탱크 역사웹툰에도 비중있게 등장한다. 트루먼 대통령과 일본 핵폭격 배틀
http://worldoftanks.kr/ko/content/history/wolfhound/
----
  • [1] 일본에서 부르는 별칭. 구글에다가 gaijin shogun(외국인 쇼군)이라고 치면 거의 다 맥아더가 나온다.
  • [2] 일본어에서는 이 발음을 따른 '맛카사'(マッカーサー)라고 부른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것과 거꾸로 쳐박혔다는 뜻의 '맛사카사마'(真っ逆さま)를 이용해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 [3] 당시 한국에서도 이 발음을 몰랐을 리는 없지만 스코틀랜드계(MacArthur 성씨 자체가 스코틀랜드에서 유래하였다.) MacArthur를 분리한 상태에서 읽고 그 원형에 맞춰 아더로 표기하게 되었다. 사실 '맥', '아더'하는 식으로 끊어 읽으면 /k/ 발음이 나겠지만, 뒤에 바로 모음 '아'가 이어지는 바람에 유성음화되어 /매가더/와 같이 /ɡ/로 실현된다는 게 좀 에러다... 받침을 ㅋ로 해서 '맼아더'로 쓰면 어떨까 또한, Arthur의 'th'발음은 과거에는 유성음과 무성음에 관계없이 'ㄷ'으로 옮겼다. 노홍철이 잘 발음하는 무성 치 마찰음 /θ/가 맞다. 마가렛 대처도 비슷하게 잘못 옮겨진 경우로, '마거릿 새처'가 옳은 표기다. 항목 참조.
  • [4] 비슷한 예시로 히틀러히총통이라고 부르기도.
  • [5] 필리핀 원수 정모, 선글라스와 함께 맥아더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콘파이프지만 사실 그는 싸구려 콘파이프를 그다지 애용하지 않았고 실제로는 브뤼에르 나무로 만든 고급 수제품을 애용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검소한 이미지로 보일려고 콘파이프를 사용한 건 아니고 일본 비행장에 처음 내릴 때 가지고 있던게 하필 콘파이프였는데 이때의 사진이 대단히 유명해져서 콘파이프가 그의 아이콘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또 맥아더 자신이 이런 이미지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 그 뒤로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대중 앞에 나설 때는 항상 콘파이프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식의 이미지 관리에는 정말 타고난 사람이었다.
  • [6] 다만 루스벨트와는 매우 사이가 나빴다. 루머에 의하면 루스벨트가 몸만 성했더라도 결투 신청이라도 보내려 했을 정도라고.
  • [7] 맥아더의 어린 시절에 인기를 끌었던 소공자의 영향으로 당시 많은 엄마들이 아들내미들을 소공자 주인공 세드릭처럼 꾸미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근데 내용이나 삽화보면 세드릭이 상당히 여성스러운 패션인지라(...)프린스 메이커
  • [8] 그래도 아이젠하워가 필리핀을 떠났을때 맥아더가 워싱턴에 아이젠하워의 대령 진급을 요청해 주었다고 한다.
  • [9] 윌리엄 홀시는 맥아더의 계획에 찬성해서 해군 장성임에도 불구하고 육군인 맥아더와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 [10] 미국군의 전사자는 9천명을 기록.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지난 모든 전투를 압도하는 전사자 교환비를 보여주었다(...)
  • [11] 게다가 오키나와 전투에서는 18만의 연합군 병력 가운데 6만여 명의 사상자, 그 중에서도 12,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 [12] 이때문에 7함대 지휘관인 킨 케이드 제독은 필리핀 상륙전에 화력지원용으로 태평양 함대에서 잠시 빌린 구형 전함들을 끝까지 반납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카미카제에 당해 반납크리(...)
  • [13] 보급로가 두절되었다고 감안을 해도, 이미 일본군은 필리핀 상륙에 대비해 병력 증원과 물자 지원을 많이 받은 상태였다.
  • [14] 그이전부터 반일 게릴라가 활동하고 있었고, 실제 소수의 미국군 부대와 이들의 지원을 받은 호전적인 모로족 전사들로 구성된 연합군이 섬에 고립된 일본군 1개 보병여단을 시키는 일도 발생하였다. 이 용맹한 모로족 전사들은 오늘날까지 분리독립을 주장. 필리핀 남부에서 반군수준의 무장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 [15] 주 전장이 일본 본토이니 해군보다 육군이 맡는것이 당연한 것. 맥아더는 일본과 오래 싸워왔고, 또 성과도 좋았기 때문에 최고 사령관의 자리는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 [16] 니미츠와 동시에 원수 계급을 달았는데, 니미츠와 직접 만났을 때 니미츠만 원수 계급장을 달고 있는 걸 보고(본토로부터 계급장이 도착하기 전이라 둘 다 대장 계급장을 달고 있었는데, 니미츠는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제독들이 자신들의 여분 계급장의 별을 하나씩 떼서 원수 계급장을 만들어 선물해 줘서 맥아더보다 먼저 달고 나타났다.) 빡쳐서 휘하 장군들의 계급장에서 별 하나씩 차출해(...) 자기도 원수 계급장을 만들어 달았다는 일화가 있다고 하지만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계급장의 별이 하나씩 따로 떨어지는 물건도 아니고 당시 미국군 장성들은 장성 진급시 바로 그 자리에서 솜씨 좋은 병사가 은화 따위를 두들겨서 계급장을 만들곤 했다. 장성 계급장 같은 건 만들기 쉬운 물건이라 손재주만 조금 있으면 초보자도 만들 수 있다.
  • [17] GHQ 막부 초대 쇼군 맥아더(...).
  • [18] 덴노가의 예법에 따르면 아랫사람이 덴노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시종에게 말한 다음 그 시종이 시종장에게 전달해서 최종적으로 시종장이 덴노에게 말한다(반대의 경우엔 역순).
  • [19] 맥아더는 1948년1952년 대통령 출마를 고려했다. 특히 해임된 직후인 1952년에는 정치가로 제대로 전업할 적기이기도 했다. 다만 (후에 아이젠하워가 그랬듯) 추대를 받아 나서고 싶어했기에 선거운동에 나서지 않았고, 결국 일부의 의미없는 득표만을 남기고 고사되었다. 더구나 1948년에는 그가 일본에서 현직 연합군 사령관을 하고 있어서... 여하간 트루먼이 그를 우려해서 재선도 하지 않고 아이젠하워에게 후보직을 넘기려고 했을 정도. #
  • [20] 심지어는 지평리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연합군은 한국에서의 철수도 고려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멸망.
  • [21] 정확하게 말하자면 압록강의 절반 부분만 비행영역이기 때문에 그걸 FM대로 지키려면 비스듬한 상태에서 비행해야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최대한 강까지 간 후 급커브를 돌리게 된다. 이런 경우 당연히 중국영공으로 월경하는 것 만주에 대한 미국군의 세균공격 의혹이 이런 비행에서 초래되었다고 한다.
  • [22] 사실 그의 오리지널 명언은 아니고, 웨스트포인트의 훈련가 중 하나를 연설 서두에 인용한 것.
  • [23] Stephen Ambrose, The Cold War: A Military History
  • [24] Gary Hess, Presidential Decisions for War: Korea, Vietnam, the Persian Gulf, and Iraq
  • [25] 이 지역의 공격을 막은 것은 결과적으로 미국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치고나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지만, 동시에 확전을 막는 기본적 조건이었다. 전장을 제약한 것이 미중소의 합의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
  • [26] 이 직책의 위엄(?)을 설명하면 현재 한국 육군의 최상위보직인 야전군 사령관과 2차대전 당시 존재했던 집단군사령관보다도 높은 직책이다.. 저 둘은 육군에 존재한 최상급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는 자리이지만 이 직책은 아예 하나의 전쟁구역을 총괄하는 보직으로 그 구역내에 있는 모든 육,해,공군의 세력에 대한 지휘통제가 가능하다. 현재 존재하는 미국군의 권역별 통합군사령관 보직의 시조격이다. 2차대전에서 원수로 진급된 미국군 장성을 보면 본국의 군 수뇌부를 빼면 전역 사령관들(아이젠하워,니미츠,맥아더)뿐이었다.
  • [27] 이전 문서에는 과대망상증이라고 욕했다지만 연기하듯이 과장이 너무 심하다는 거였지 과대망상증이라고 한 건 아니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에 대해서 "나는 7년동안 그의 아래에서 연극적 과장을 배웠소(I studied dramatics under for seven years!"라고 말했다.
  • [28] 트루먼쪽이 좀 더 만만했던 이유는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마셜이나 아놀드같이 그나마 자기와 짬이 그닥 차이 안나는 이들이 상관이었고 계급도 같았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자기의 부하의 부하였던 브래들리 정도가 합참의장이었으며 원수 계급장 역시 맥아더가 먼저 달았다는 점, 즉, 연공서열 차이가 더 심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는 자기가 직접 워싱턴으로 날아간 게 아니라 미 육군 수뇌부를 한국으로 불러오기도 했다.
  • [29] 이 말을 했던 사람이 후일 맥아더의 참모장을 맡게되는 리처드 서덜랜드였다고 한다.
  • [30] 이전 문서에는 2차대전 당시 일본과 싸우던 당시의 일화라고 되어 있었지만 워커 장군은 2차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서 싸웠다. 위의 일화는 6.25 전쟁 당시의 일화다.
  • [31] 체스터 니미츠 원수의 아들인 체스터 니미츠 주니어는 일찍이 아버지와 같은 전장에서 잠수함 함장으로 활약했으며, 1957년에 해군 소장으로 예편한 뒤 Texas Instruments에 입사하였다. 물론 니미츠 원수는 아들이 해군을 떠나는 것을 달가워하지는 않았으나, 따뜻한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 [32] 여기서도 맥아더는 잠시 눈을 붙였다고 하고 트루먼 회고록에서는 쿨쿨 잤다고 깠다.
  • [33] 트루먼이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이 회고록은 맥아더를 사정없이 까는 걸로 꽤 유명하다.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트루먼이 맥아더를 철저하게 미워하게 된 이후의 증언이라 좀 가려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70대의 원수가 19살 소위처럼 군다. 운운하는 이야기도 여기서 나온다.
  • [34]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에 주둔한 미국군이 한국으로 가면 일본군이 반란을 하지 않겠냐는 미국 기자의 질문에 껄껄 웃으면서 대답했다고 한다. 과연 실제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종전 후 맥아더가 본국으로 돌아갈때 수많은 일본인들이 울면서 환송식을 했다고 한다. ㅎㄷㄷ 미국의 재조지은
  • [35] 맥아더가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침략이 아니라 자신들의 안전보장이었다'라고 주장하거나 천왕을 전범재판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등 가장 일본을 감싸고 도는데 열성적인 인물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짓이다(…).
  • [36] 하지만 연기자체는 별로였는지 그레고리 팩은 이 영화로 골든 라즈베리상에서 남우주연상을 탔다는 루머까지 돌고 있다. 하지만 실제 골든라즈베리는 1980년부터 시상을 시작했기 때문에 불가능한 이야기. 아래의 오 인천의 로렌스 올리비에와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37] 육군 원수 아이젠하워의 이름은 니미츠급 항공모함에 붙어있다. 위대한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08 16:57:53
Processing time 0.2858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