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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헤이하치로

last modified: 2015-03-23 22:05:57 by Contributors




1933년 사진 (86세)

東郷平八郎 / Tōgō Heihachirō
1848.01.27~1934.05.30

Contents

1. 업적
2. 인품과 일화
3. 이순신에 대한 존경
4. 오해
5. 트리비아

1. 업적

일본 제국해군 제독. 러일전쟁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다.

규슈 가고시마 현에서 태어났으며[1] 원래 어렸을 때 이름은 '쥬고로(仲五郎)'였으나, 성인이 되면서 '헤이하치로'로 이름을 바꿨다. 젊은 시절에는 사쓰마번의 사무라이로서 대포 다루는 기술을 배워 군인 생활을 했고 사쓰에이 전쟁에도 참전했었던 전력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해군 사관으로 임관해 1871년부터 1878년까지 동료 11명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 8년간의 유학 생활에서 돌아온 1878년 7월에 중위, 12월에 대위, 그 다음해 12월에 소좌가 되는 등 빠르게 승진을 계속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순양함 '나니와'의 함장을 맡아 풍도 해전, 황해 해전, 웨이하이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그 후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에 올라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제국이 자랑하는 발틱 함대를 함선의 성능과 진형, 그리고 러시아 함대의 약점을 정확히 찔러서 완전히 박살냄으로써 그때까지 육군이 삽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기 측면에서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 가던 전세를 완전히 굳혔다. 반면 당시 육군은 203고지에서…. 시간이 흐른 2차대전 때에도 일본 해군이 막장의 극치를 달렸던 일본 육군에 비교해서 나름 개념이 있었던 것은 도고가 남긴 영향력 때문이라는 카더라도.

비록 영국을 비롯한 반러시아 성향의 서구 열강들의 지원으로 득을 본 측면이 있었다지만, 어쨌든 당시 해전의 승리 덕분에 일본은 세계에서 그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는데 성공하며, 명실상부한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경제불황을 겪고, 제국주의의 광풍에 휩쓸린 나머지 군국주의 노선을 걸으며 멸망의 길로 달려가 버렸다.

2. 인품과 일화

20세기 초반 열강의 군인들 대부분이 인종차별주의나 선민사상 등 그릇된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도고는 몇 안되는 진짜 군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뤼순 요새를 봉쇄하다가 전함 2척이 기뢰에 접촉하는 바람에 침몰되는 대참사 후에 함장들이 보고하러 와서 눈치만 살피자 오히려 따스하게 격려를 했다거나, 발트 함대 격파 이후에는 부상당하고 포로가 된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게 직접 문병을 가는 등, 부하나 패자에게 너그러웠다. 이런 고매한 인품과 행동으로 생전에 전 일본 국민으로부터 추앙받았다.

군인으로서의 빛나는 업적 외에도 무사도(그냥 멋내려고 갖다붙인 게 아니라)를 숭상하는 사람으로서 절도를 지켰다고 한다. 혹자는 영국이 정립한 근대 해군 정신의 정수라고도 하며, 그 두 가지 모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퇴역 이후에는 지나치게 주변에서 추앙한 탓인지 여러 가지로 독선적인 인물이 되었고, 결국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불황기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체결 시기에 이르러서는 일본 해군의 체질 개선을 가로막은 원흉이 되고 말았다. 당장 12인치 포를 12문 탑재한 카와치급이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되지 못한 것은 적어도 주포 중 일부는 적함보다 강력한 것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한 도고 헤이하치로의 실책이 컸다. 덕분에 카와치급은 12인치 45구경과 12인치 50구경을 혼용하는 바람에 일제사격협차같은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사용하는 함포사격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영국에서 기술을 수입할 목적으로 공고급 순양전함을 도입하게 된다. 문제는 쓰시마 해전에서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낸 제독이 도고 헤이하치로라는 것이며, 따라서 동일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실책이었다.

게다가 본인이 의도한 결과야 아니었겠지만. 덤으로 복장개선을 막음으로서 일본 해군 장교들이 열대의 바다에서도 목을 꽉 조이는 군복을 입고 싸우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1920년대에 해군 장교복을 당시의 영국 및 미국처럼 목이 트인 것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도고에게 의견을 묻자 도고는 딱 잘라서 "이 옷은 쓰시마 해전 승리의 정수다."라는 말로 반대 의견을 밝혀 결국 1943년까지 새로운 복장이 제정되지 못하게 막았다.

그의 큰아들은 군대에 가지 않고 관료로 살다가 1969년에 사망, 둘째 아들은 해군 소장으로 태평양 전쟁에서 싸우고 1962년에 죽었다.

3. 이순신에 대한 존경

그가 가장 존경하는 장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충무공 이순신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일본인들은 러일전쟁은 동아시아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동아시아의 명장인 이순신 장군에게 가호를 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도고가 이순신 장군을 존경했다는 것은 사실이었을 가능성은 높다. 당시 사학자였던 후지이 노부오(藤居信雄)의 책 '이순신각서'(李舜臣覚書)에는 도고가 한국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당신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나의 스승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구절이 있다. 그의 부하들 역시 이순신 장군에 대해 상당한 경의를 품고 있어서, 실제로 쓰시마 해전 당시 출격하던 일본 해군 어뢰정 정장 중 여럿은 충무공의 신위를 자기 배에 모시고 박수치며 기원하는 어이없는 짓도 했다. 대형함에 있는 신사들이야 모시는 신이 정해져 있어서 함부로 못 하지만, 소형함인 어뢰정은 그런 문제에선 별로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분위기는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도고의 영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공공장소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흠모하는 말을 서슴없이 했기에 정부 인사들이 크게 당황했다는 회고가 구 일본 해군 제독 출신자와 자주 만난 재일한국인의 회고에서 나온 바 있다. 다만 이는 구 일본 해군 전체가 이순신 장군이 몇 년이나 지켰던 견내량 일대에 해군기지를 설치하면서 옛 명장에 대한 예우를 계속 지켰던[2] 것의 배경에 도고 헤이하치로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나온 추정에 가깝긴 하다. 이러한 예우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진실은 모호하다.

다만 이러한 일본군의 충무공 숭배는 내선일체 정책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도 있다. 거기다가 이러한 개인적인 존경과는 정 반대로, 러일전쟁의 결정적인 승리였던 쓰시마 해전으로 인해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파워 밸런스가 무너져 조선이 일본에 넘어간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씁쓸한 점이다.

일단 흔히 퍼져 있는 도고의 어록은 확실한 근거가 없다. 도고가 직접 이순신에 대해 언급한 기록은 별로 중요치 않은 자리의 사담이었거나 신빙성이 옅은 넷상의 사료가 많다. 사실 도고나 일본 해군이 이순신을 롤모델로 삼거나 숭배하기까지 한 것은 다양한 정황 증거나 물증이 있는 기정사실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지 않은 '도고의 어록' 같은 것을 굳이 인용할 이유는 없다.

이종락이란 사람이 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란 책에서 도고가 이순신에 대해 언급했다는 내용이 나오긴 한다. 이 책에는 1905년 일본 연합함대 해산식 파티에서 도고의 말을 직접 들은 노부인의 회고담을 소개한다고 나와 있다. 전문을 옮긴다.

"내(도고)가 이순신 제독과 동렬에 서려 한다면 그건 잘못이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우리 연합함대는 발틱함대보다 규모가 크므로 일본 해군의 승리는 되려 당연하다. 허나 이순신 제독은 언제나 열세에 놓인 함선으로 전승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게 내가 그를 못 따라가는 첫째 이유다. 둘째는 일러전쟁에서 일본육군은 연전연승했으므로 우리 해군 기지가 적군에게 위협된 적이 없다. 반대로, 조선의 육군은 연전연패해서 이순신의 수군은 언제나 기지가 위협되고 보급이 끊겼다. 이런 어려움을 이긴 자가 이순신 제독이다. 셋째 이유는 나 도고는 황공하게도 위로는 천황, 아래로는 병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단결된 성원을 받고 나섰다. 이순신 제독은 그를 시기하는 무리의 모함에 시달리고 죄인이 돼 고문까지 받았다. 겨우 왕명으로 목숨을 건진 채 풀려나서 그 궁지에도 굴하지 않고 명량,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그리고 최후의 해전에서 전사했다."[3]

그러나 이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이라는 책은 왜성을 직접 탐방했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높지만 아마추어 연구가 한계상 사료 해석에 한계도 있고 학술논문도 아닌지라 출처표기나 사료비평적인 면에서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도고가 노부인께 했다는 이순신 관련 발언의 경우 해당 책에는 저 문단 하나만 있고 인용 출처나 참고문헌 목록같은 믿을만한 근거는 적혀있지 않다.

4. 오해

쓰시마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전법을 연구하면서 만들어낸 전술로 러시아 함대를 격파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일본의 역사잡지인 역사연구 02년 5월호에서 T자전법이 학익진에서 비롯되었으며 그것은 이순신이 와키자카를 섬멸할 때 사용한 그 진법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의외로 널리 퍼진 이야기인듯 하나 학익진에서 '따온' 것은 어쨌든 아니다. 그보다는 참고삼아 도고나 그 참모진이 이순신에 대해서 연구했을 가능성이 크다. 해당 동영상 8분 20초대에 나온다. 학익진보다는 전통적인 영국 해군의 포위 섬멸 방식에 가깝다. 튼튼한 전열함을 보내고 기동함으로 포위하는 방식인데, 일본 해군이 근대화 과정에서 영국 해군을 참조한 영향이라 볼 수 있다.

일본 정부의 군국주의 흐름에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는 설이 있지만 이것도 사실과 다르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구 일본 해군 안에서도 강경 우파에 속해 있었으며 구 일본 해군의 체질 개선 반대 및 대미 결전 사상의 적극적인 옹호자로서의 입장을 죽을 때까지 지켰다. 그리고 해군 체질 개선 문제는 해군에 의한 군국주의 제창과 별로 다를 게 없었고 이 문제로 청년장교에 의한 총리 암살사태까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도 도고 생전에. 그러나 본인은 폭거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백히 밝혔으며 이런 사태에 대한 우려를 밝힌 바 있으므로 극우분자와 도고를 연결시키는 것 자체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대하여 크게 반대하여 일본은 군함을 계속 건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5. 트리비아

  • 젊었을 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보면 지금 관점에서도 미남. 위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늙기도 훌륭히 늙은 듯. 키는 작다 허나 성격은 좀 예민했는지 저 시기에 어느 신문기자가 가족 인터뷰를 할 때 부인이 "내가 부업을 좀 해서 살림에 보태야 했다"라고 웃으며 농담을 하자 난 내 가족 굶긴 적 없어!라면서 버럭 화를 내서 기자를 겁먹게 한 일화도 있다. 의외로 소심한 남자. 젊을 적 치기어림 때문일 가능성이 높지만.


  • 무려 89세까지 장수를 누린[4] 어머니 도고 마사코 東郷益子.

  • 일반적으로 과묵하고 위엄있는 인상이지만 한없이 가벼운 모습도 종종 보였다. 만년에 가쿠슈인에 초대되었을 때 강연 중에 학생들에게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고 한 질문에 "군인이 되고 싶다."고 대답한 학생에 "군인이 되면 죽는거야.", "정 되고 싶다면 육군 말고 해군에 넣어. 해군에 들어오면 죽지 않는다." 라고 발언하여 육군 대장이자 철혈장군으로 명성이 높았던 노기 마레스케[5]를 격노케 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나이로도 기수로도 한참 선배인 도고를 깔 수 있을 리가… 노기 : ㅂㄷㅂㄷ

  • 쓰시마 해전 당시 도고 제독의 함대에서는 그의 전술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한명의 사관후보생이 있었다. 그가 바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당시 야마모토는 대포를 조작하던 도중 두 손가락을 잃었다고 한다. 사실 야마모토가 받은 감명은 어쩌면 전술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도고의 사후, 그의 이름을 딴 신사가 지어지자 "성가신 일(군축조약)을 해준 대가로 신이 되었으니, 가서 절을 해주면 뭔가 얻을 일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며 비웃었다는 말이 있다. 야마모토는 그의 동료가 추방당한 일도 있고, 군축조약체결의 책임자가 도고였던 까닭에 감정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야마모토 사후 신사가 지어지려는 움직임을 지인들이 막아선 것도 그래서였다.

  • 쓰시마 해전 당시 한 대사인 皇国の興廃この一戦にあり。各員一層奮励努力せよ(황국의 흥망은 이 전투에 달려있다. 각 인원은 한층 더 분발 노력하라)는 그를 대표하는 명언이다.

  • 쓰시마 해전이 벌어진 1904년에 창업한 어느 사케 양조회사는 이 승리를 기념해 회사 이름을 아예 도고 주조로 지었다.

  • 쓰시마 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가 황거에서 열렸을 때 일본에는 미 해군의 전함 오하이오가 정박 중이었다. 일본 측에서는 이 미 해군 장교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는데, 당시 선임 장교들은 자기들끼리 노느라 제의를 거절하고 미국해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장교후보생[6] 몇명을 보냈다. 도고는 이들을 환대했고 이들 중 한 장교후보생은 도고에 대한 빠심을 갖게 되어 평생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된다. 그 인물은 바로 체스터 니미츠였다.


  • 핀란드에서는 도고 맥주가 판매되고 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식민 치하에 있던 핀란드 입장에서 러시아를 작살내 독립유공자가 된 도고를 기념하기 위해 출시했다고 알고 있는 일본인들이 많다고 하지만...사실은 "Amiraali[7]맥주"라는 전 세계 명제독들의 초상이 레이블 된 맥주 중의 하나다. 어찌됐든 그 덕분에 일본에서 많이 수입해 간다고 한다.

  • 영국 유학 당시 먹었던 비프 스튜의 맛을 못 잊어서 함선 요리사에게 비슷한 요리를 만든게 한 것이 전후 민간에 퍼져 니쿠쟈가[8]로 변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국 요리를 못 잊다니... 사실 영국 요리라고 전부 맛없는 건 아니긴 하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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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래서 가고시마시 기온노스에 기념 공원이 있다.
  • [2] 진해항에 입출항하는 일본 해군 군함은 진해 근처에 있는 충무공 사당에 대함경례를 하는 관습을 일본 해군 해산 때까지 지켰다. 이런 전통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나, 진해항을 일본 해군기지로 만든 자가 바로 도고 헤이하치로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3] 출처: 성웅 이순신 그리고 일본성, 이종락 지음, 선인 출판, 2010년, pp.27~28
  • [4] 1812~1901년으로 지금 시각으로 봐도 꽤나 장수한 편이다.
  • [5] 러일전쟁 중 203고지의 삽질로 잘 알려진 인물. 이 전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비난을 퍼부었으나, 그 역시 아들을 전투에서 잃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유가족들은 그만 노기와 함께 얼싸안고 통곡했다고 한다. 노기는 두 아들 모두 뤼순 공방전에서 잃어서 가문의 대가 끊겼다. 책임지고 할복하려 했으나 메이지 덴노가 허락하지 않아서 메이지 덴노 사후에 겨우 아내와 함께 자결했다.
  • [6] 이 신분은 준사관 계급에 상당하는 위치인데,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준사관으로 2년쯤 복무하다가 소위 임관시험을 통과해야 정식 장교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했다.
  • [7] 핀란드어로 '제독'
  • [8] 한국에서 번역할 때는 주로 고기감자조림으로 표기된다.
  • [9] 우리가 즐겨먹는 샌드위치도 영국 요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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