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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

last modified: 2015-02-14 21:09:30 by Contributors

Contents

1. 정의
2. 한국의 독립군
2.1. 개요
2.2. 약사(略史)
2.3. 해방 직전과 직후
2.4. 무장
2.5. 독립군의 의의
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 대전사의 병사


1. 정의

말 그대로 특정 집단에게 지배당한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서 싸우는 군대. 일반적으로 식민지로 지배당한 나라의 독립 투사들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한 한국 광복군이 유명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일본군과 항전하였던 의병 활동이 시초였으며 1910년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제에 맞서며 항전하는 군대로 진화하게 되었다.

2. 한국의 독립군

2.1. 개요

한국의 독립군은 하나의 단체라기보다는 일제에 저항하거나 교전한 여러 준군사조직의 통칭이다. 익히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단체들도 있으나 사실 사료상에 남지 않았거나 제대로 조직되어 있지 않았던 독립군 단체들도 상당수였다. 이들의 투쟁은 구한말 을사조약으로부터 시작하여 국권을 빼앗긴 1910년을 전후하여 그 투쟁의 근거지가 만주로 옮아갔으며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사실상 그 활동의 전성기는 1910년대였고 1920년 청산리 대첩을 거치면서 절정기를 맞았으나,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주력이 괴멸되었고 1931년 일제의 만주사변으로 근거지마저 위협받게 되면서 차츰 둔화되어갔다.

해외, 특히 미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이주민들의 독립군 단체들도 있었으나 여기에서는 국내와 만주 일대에서 실제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단체를 기준으로 서술하도록 한다.

2.2. 약사(略史)

한국에서 독립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각 지방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항일(抗日)의병이 기원이다. 그 의기(義氣)는 장하였으나 그 출신들이 민중, 혹은 구식 군대(대표적으로 훈련도감 출신) 출신자임에 따라 제대로 훈련되어 있지 않았고 장비 또한 열악했다. 하지만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국군이 일제에 의해 해산되고 시위 1연대 1대대원, 시위 2연대 1대대원 합계 1200명이 이에 반하여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각 지방 진위대들이 봉기하였으나 실패함에 따라 구(舊) 대한제국 군인 출신들이 의병에 합류하게 되면서 체계화되었다.
물론 많은 수의 시위대원과 진위대원들이 일제의 은사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적지 않은 구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함에 따라 본격적으로 일본군과 교전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 결성으로 인하여 그 군세가 전성을 맞이하였으나 여러 사정에 의해 실패한 뼈아픈 사실도 있다. 이때까지는 의병(義兵)이라 하여 임진왜란 당시부터의 근왕(勤王)의 기치를 내세웠었다. 대표적인 단체로 안중근 의사께서 몸담고 있던 대한의군(大韓義軍)을 들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의 투쟁도 헛되이 1910년 한일병합조약에 의하여 국권이 피탈되자 이 의병들은 차츰 그 본거지를 만주로 옮겨갔다. 그 이유로는 첫째로, 국내에서는 일제의 단속이 심화되어 병합 직전인 1909년에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 같은 재앙이 닥쳤지만 만주는 당시 중국의 치안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둘째로, 만주는 외국 영토여서 일제의 단속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였다. 셋째로, 국내와 가장 가깝고 동포들이 가장 많이 이주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 만주를 근거지로 삼아 독립군은 신흥무관학교로 대표되는 장교육성기관을 설치하여 독립군 간부를 육성하였고, 일본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후 격화된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은 1920년 홍범도봉오동 전투, 김좌진청산리 대첩 등을 통해서 꾸준한 성과를 이루었다.

하지만 청산리 대첩 직후 일본군이 보복으로 독립군의 기초인 만주의 한인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며 독립군의 기반을 박살내기 시작하자 어쩔 수 없이 근거지를 러시아 연해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여기까지라면 더 투쟁할 수도 있었으려니와 당시 적백내전을 한창 정리중이던 소련 적군(赤軍)은 그동안 어느 정도 지원해주던 독립군이 상대편인 백군(白軍)의 하수인이라는 허위밀고에 독립군 단체 연합인 대한독립군단을 자유시에 몰아넣고 무장해제를 시키려다가 교전 후 전멸시키고 만다. 이들은 4000여 명 정도 되는 독립군의 주력이었으며 따라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따라서 이후의 독립군 활동은 위축되고 만다. 이를 자유시 참변이라 한다.

그래도 1923년 임정에 의하여 임시정부 주만 참의부가 독립군 단체 연합체로 창설되었으며 이외에 통의부, 정의부 등이 각각 설치되어 만주에서의 투쟁은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룩하며 계속 이어진다.

한편으로 임정 산하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1932년 일왕 폭살 미수사건을 일으킨 이봉창 의사, 훙커우 공원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 등도 역시 독립군 활동에 포함시킨다면 30년대의 투쟁 횟수와 성과 역시도 그다지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없었다면 한국의 광복은 참으로 지난(至難)하였을 것이다.

2.3. 해방 직전과 직후

1940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직할부대인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고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이었던 일본, 독일 등에 미국 등 연합국과 함께 선전포고를 하기도 하면서 일본군과 교전할 준비를 하기도 하였으나 1945년 해방이 되고 일제가 패망하게 되면서 한때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기도 하였다.

이들 광복군은 해방 후 귀국하면서 미군정청에 의해서 '군대'로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자격으로 귀환해야 했다. 이에 대하여는 해당 항목을 참조할 것.

한편으로 좌익 계열인 조선독립동맹의 당군(黨軍)인 조선의용군이 1942년에 결성되어 초대 김원봉, 이후 무정의 지휘 아래 활동하였다. 그 규모는 전성기에 5만 명으로 여타의 독립군 단체와는 그 규모가 달랐다. 다만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에 북한군에 흡수되어 한국전쟁시에 남한 침략의 선봉에 선 터라 한국 학계에서는 흑역사로 치부되는 아픈 과거가 있기도 했다. 한편으로 실제 조선의용군이 독립군 활동을 하긴 하였으나 일제시대에는 그 활동인원이 500명을 넘기 힘들었고 관동군이 항복하면서 소속 한인(韓人) 병사들을 그대로 인수하여 그 수가 그렇게 불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1943년 광복 직전에 초대 지휘관 김원봉이 주력인원이라 할 만한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광복군에 입대한 사실이 있기도 하다. 또한 조선의용군은 독립군으로서 일본군과 교전했던 것도 사실이나 1945년 이후에는 국공내전에 중국 공산당 세력으로 참전하기도 하여, 그 정체성이 독립군이기보다는 공산군으로 봐야한다는 의견도 있다.

아무튼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게 되면서 그동안의 독립군은 지금의 대한민국 국군으로 진화하였다. 최소한 국군은 그 법통을 항일 독립군에 두고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국군의 기간병력 대부분이 일본군 및 만주군으로 구성되었으니 국군은 '황군의 적자' 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창군 당시 국군에는 청산리 대첩 당시의 북로군정서 1중대장 강근호 장군, 광복군 출신으로 중국 국민당군 소장을 역임한 김홍일 장군 등 독립군을 법통으로 명시할 만한 상징적인 인물들이 대다수 존재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1]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국방장관은 청산리 대첩의 영웅 철기 이범석장군이었으며, 초대 국방차관은 광복군 참모처장이자 중국 국민당 공군 참모장이었던 최용덕[2] 장군이었다. 광복군과 대한민국 국군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2.4. 무장

관련 기록의 부실로 인해 독립군의 무장에 관해서는 대다수의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일부 사실등을 통해 유추해볼수는 있다.
한국 광복군의 경우 일본군 무장 이외에도 소련, 체코 슬로바키아나 독일제 총기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적백내전당시 사용되던 구식 무장들을 헐값에 사들였거나, 국민당군[3]에게서 다수의 독일, 체코-슬로바키아제 병기를 보급받았기에 가능한것이였다.

2.5. 독립군의 의의

이분들이 이국에서 흘린 피눈물이 씨앗이 되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음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을 갖자. 설령 이들의 투쟁이 조국의 광복을 이룩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들의 전투와 순국은 "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다른 나라들에 확실히 심어주었다. 비록 일본이 연합국의 적국으로서 패망하였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다행히 식민지에서 풀려났으나, 이마저도 없었다면 한 번이라도 돌아볼 나라들조차 없었을 테니까.[4]

3.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 대전사의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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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nialMiliti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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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nial Militia. 혁명을 성공시키면(식량 1000, 목재 1000, 금 1000을 지불하면 된다) 사용할 수 있는 유닛. 본진인 마을 회관기습받을때 임시방편으로 뽑던 미니트맨(민병대)와 의용군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위의 유닛들처럼 체력이 줄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머스킷총병의 강화버전으로 식량은 100밖에 먹지 않는다. 체력은 200, 공격력 24, 저항력 30% 등 완벽한 상위호환. 또한 머스킷 총병과 달리 원거리 공격도 기병 보너스가 들어가는 매우 좋은 유닛.

하지만 혁명 성공시 모든 주민이 독립군으로 바뀌면서 더이상 주민을 생산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공장, 은행 등 자원 자동생산시설이나 어선, 원주민 크리족 쿠뤼어 등이 없다면 배수진인 셈. 카드집 또한 혁명 카드집으로 바뀌면서 장갑함이나 개틀링 기관총과 같은 신무기들을 받아올 수 있도록 설계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한방러시용 테크. 특히 멀티가 빠르게 늘어나는 포르투갈과 매우 상성이 잘 맞는다. 최상위 랭커도 포르투갈의 독립러쉬는 막기가 결코 쉽지 않다.

전작인 쏠로지에서도 노르웨이의 신의 힘으로 라그나뢰크의 영웅들이라는 모든 주민, 드워프가 보병 영웅으로 변하는 비슷한 신의 힘이 있었는데, 거기서 따온 걸로 보인다. 다만 라그나뢰크의 영웅은 신의 힘을 써도 주민은 계속 생산할 수 있었지만 혁명을 하면 마을회관에서 독립군밖에 못 뽑는다!

이 독립군 또한 카드로 계속 받아올 수 있다. 마을회관에서 주민 대신 독립군을 계속 생산할 수 있다.

대전사 캠페인에서는 나다니엘 블랙의 전사 양성소에서 뽑을 수 있는데, 금을 좀 먹으며 혁명 독립군과 달리 체력이 적고 사거리가 긴 척후병 대타유닛으로 나온다. 하지만 미션 중에 지원군으로 위에서 말한 기병에 강한 독립군도 조종할 수 있으므로 같은 이름의 독립군 유닛이 캠페인에서는 둘이 된다. 이외에도 밸리포지 전투 미션에선 나무를 캐는 주민 버전 독립군도 등장하는데, 이 유닛으로 막사를 지어야한다

팀원 중 한 명이 혁명을 연구하면, 다른 팀원들은 혁명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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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외에도 군 출신 독립운동가 대부분이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관여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초대 해군참모총장손원일 제독이 있다.
  • [2]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 이른바 공군 창설 7인의 한 사람이다. 초대 국방차관과 2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하였다. 중국 국민당 공군(중화민국군 공군) 창설의 주역이기도 하다. 당시 국만당 공군 대령의 신분으로서, 대한광복군 참모처장을 겸임하였다.
  • [3] 광복군과 국민당군은 공공의 적을 두고 있었기에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협력관계였다.
  • [4] 무장투쟁이든 외교노선이든 둘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연합군은 한반도를 일본영토로 인식하고 점령군으로서 들어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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