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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불가침조약

last modified: 2015-04-03 15:21:36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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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신혼생활은 얼마나 오래 갈까?

歐洲天地 複雜怪奇 (유럽 천지가 복잡하고 괴기하다.) - 히라누마 기이치로
 
"독-이-일 반공 협정은 사실 소련이 아니라 영미를 겨냥한 것입니다. 스탈린 수상 각하도 이 반공 협정에 가입하시는게 어떻습니까?"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의 농담, 협정 후 만찬장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오늘부로 나도 반공주의자요." - 스탈린의 농담, 몰로토프의 회상록에서.
 
1939년 8월 23일 체결된 독일소련 양국간의 불가침조약. 조약 체결자의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라고도 한다.

히틀러의 관광시리즈 2

Contents

1. 독일-소련 관계의 파국
2. 1938년 위기와 소련
3. 1939년 위기와 서방-소련의 접촉
4. 소련의 정책 변화와 독일의 접근, 그리고 조약 체결
5. 결과

1. 독일-소련 관계의 파국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만 해도 독일과 소련은 매우 사이좋은 우방국이었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서 군비를 제한받음과 동시에 국제연맹 가입을 거부받고 있었고,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이유로 역시 국제사회에서 왕따당하는 지경이었던 것이다. 비록 양국이 1차대전 때 피터지도록 싸웠다고는 하나, 소련에게 있어 그것은 로마노프 왕조러시아 제국의 일이었고, 독일 역시 제2제국의 문제였다.

소비에트 정권은 성립 초기부터 이미 독일에 도움을 받은 바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블라디미르 레닌을 비롯한 32명의 주요 혁명가들은 스위스에서 망명을 하고 있다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 때 봉인 열차를 타고 러시아로 돌아와 혁명에 성공하였는데, 이걸 지원한 것은 바로 독일 제국이었다. 그리고 레닌의 볼세비키 정권은 정국을 장악하자 즉시 독일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을 하여 혁명에 도움을 준 것을 톡톡히 보답해주었다.

때문에 독일은 소련에게 여러 선진 군사기술을 제공하고, 소련은 군비제한이 많은 독일에게 비밀리에 신기술 연구 및 군사훈련을 할 수 있는 시설을 자국 영토 내에 제공하는 등 서로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아울러 양국 모두 폴란드라는 가상적국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기도 했다. 독일은 국경 인정 문제로, 소련은 1920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이후로 폴란드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러나 이런 양국 관계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하면서 깨져버렸다. 히틀러는 때려잡자 공산당!을 외쳤으며 자연스레 소련과의 관계는 나빠졌다.

2. 1938년 위기와 소련

1938년, 독일이 주테텐란드를 요구하며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로 유럽에 전쟁이 터질 위기에 처하자 소련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군사동맹을 체결한 상태였으며, 유사시 동맹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참전하여 독일과 싸워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와 국경을 접하지 않아, 폴란드 혹은 루마니아 영토를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폴란드는 죽으면 죽었지 소련군에게 영토 통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기 때문에, 루마니아로부터 영토 통과 허용을 약속받았다.

이때 영국, 프랑스는 소련과 처음으로 접촉하였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소련을 크게 신뢰하지 않아 이들이 선택한 건 독일과의 화평이었고, 그 결과가 바로 뮌헨 협정.

3. 1939년 위기와 서방-소련의 접촉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를 강점하고 폴란드에게 단치히 회랑을 요구하면서 다시 유럽에 전운이 고조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동맹국이 사라진 이상,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에 직접적인 병력 지원이 가능한 새로운 동맹국이 절실히 필요했다. 바로 소련이었고, 여기서 소련과 서방국가는 다시 접촉했다.

1938년과 달리 이번엔 양측은 상당히 진지하게 접촉하며 의견을 주고 받았다. 최우선적으로 독일의 팽창 저지와 제압을 목표로 하는데에는 양측의 의견이 동일했다. 그러나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 당사자인 폴란드가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소련의 도움은 안 받겠다!'는 초강경 자세였다는 것이다. 폴란드는 오랜 기간 러시아의 가혹한 통치를 받았는데, 폴란드가 3국에게 분할 통치를 받는 동안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비교해서 러시아는 그야말로 엄청난 탄압을 가했다. 거기다 독립 과정에서 소련과 전쟁을 치른 앙금도 남아있었다.

이처럼 당사자가 소련의 지원을 거부하겠다니 소련이 폴란드를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 이 시점에서 소련이 서방을 의심하는 결정적인 일이 발생했다.

모스크바에 특사로 온 영국 대표단이, 대독일 전쟁 수행에서 영국이 투입 가능한 병력을 묻는 소련측의 질문에 4개 사단이라고 대답해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16개 사단이라고 대답했다가 소련이 기겁해서 세부사항을 묻자 우물쭈물하며 4개 사단만이 임전태세에 있다고 실토했다. 넋이 나간 소련이 다시 정확한 수치를 요구하자 영국은 마침내 "그 4개 사단 중에서도 2개 사단은 조금 더 뒤에 임전태세가 완료된다"고 대답했다. 이 샛키가?? 현대 기준에서 4개 사단이면 상당한 병력이지만 당시로선 님 지금 장난함? 소리가 나올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소련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고, 영국이 의도적으로 소련과 독일의 전쟁을 부추기려는 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에 자신들은 유사시 100개 사단을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1] 영국은 고작 4개 사단이라니 어이가 없어하는 건 당연하다.

소련의 이러한 의심에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었다. 러시아 혁명 직후 서방세계는 직접 군대를 파병하여 적백내전에 개입해 사회주의 정권을 붕괴시키려다가 실패한 전례가 있었다. 즉, 소련으로선 서방세계가 독일, 일본 제국 같은 전체주의 국가와 소련의 전쟁을 유발하여 양측을 모두 공멸시키려는거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에 충분했다.

당장 이 수치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첫 대륙원정군 규모인 4개 사단에도 못 미치는 소규모 병력만 즉시 투입 가능한 데 반해 전쟁은 바로 코 앞으로 다가와 있다고 보였으므로, 소련 입장에선 영국인들이 제대로 싸울 의지 자체가 없다고 볼 수 밖에 없었다.[2] 실제로 영국은 이미 1938년 후반부터 방위산업 생산 규모를 대폭 확장하기 시작한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인들은 실제로 영국군이 훨씬 많은 병력을 동원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아직 지상군보다는 공군, 그리고 공군보다는 동맹국들이 싸우는 데 필요한 금융 자본의 확보에 더 열심인 상황이었다.[3][4]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 당시의 영국은 이토록 상황을 안이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 문제로 전쟁이 시작되면, 군 동원이 오래 걸리는 자신들을 대신해서 소련과 폴란드가 힘을 합쳐 적어도 6개월에서 1년 쯤 독일군을 동부에 붙들어 주기를 기대했다. 그리고 소련은 그런 장기 지연전의 결과로 소련인들만 피를 흘리고 마는 게 아닌가 우려할 수 밖에 없었다. 최악의 경우, 독일과 소련이 다 같이 기진맥진해 있을 때 영불이 기습 공격으로 두 나라을 동시에 멸망시키는 것조차 가능해 보였다. 매사에 의심 많은 스탈린으로서는 그런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물론 러시아 제국 시절 때부터 영국이 지난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을 적대해 온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소련의 그런 의심은 충분히 타당했다. 적어도 스탈린에게는 타당해 보였다.

거기다가 영국과 프랑스는 회담에 추진력도 그다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 대표단이 타고 온 교통수단은 . 그것도 대표단은 레닌그라드에서 관광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정작 소련과의 협상에는 전권이 없어서 항목 하나하나에 본국의 훈령을 대기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그렇게 한가하게 돌아가지 않았는데도...

그리고 이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4. 소련의 정책 변화와 독일의 접근, 그리고 조약 체결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의 협상 태도를 보고는 소련과 군사동맹을 맺을 생각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렇게 되면 이들이 독일과 소련을 싸우게 하고 뒤로 빠지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9년 5월 영/프/미와 집단안보체제을 주장하던 막심 리트비노프 외무장관을 해임하고 심복인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외무장관에 앉혔다.

막심 리트비노프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이는 독일을 향한 화해 제스쳐였다. 이는 곧 독일측에 감지가 되었고, 소련의 의도를 바로 깨닫게 되었다.

독일은 지난 1차 세계대전에서 양면전쟁의 위험성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울러 소련과 서방세계가 접촉하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실제 참전할 것이라고 생각치는 않았으나, 만약에 대비하며 동부에서의 세력균형을 위해 소련을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독일 내에서 이러한 의견을 가장 적극적으로 개진한 것은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였다. 히틀러는 그의 입장을 받아들여 8월 20일 소련에 협상을 타진하는 전보를 쳤다. 그 당시 히틀러는 폴란드와의 전쟁을 하기로 이미 결정해 놓고 있었으며, 폴란드군 자체는 몰라도, 소련이 폴란드를 돕는다면 완전히 첫판부터 그르칠 여지가 있었다.

스탈린은 이를 받아들였고 리벤트로프는 히틀러로부터 전권을 부여받고 모스크바에 특사로 파견되어, 동유럽에서의 세력분할을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제의했다. 소련측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서방놈들과 함께 자기들 도움은 죽어도 싫다는 폴란드를 돕느니, 세력권을 나눠서 서로 맛있게 잘 먹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독일의 제안이 훨씬 당근이었던 셈.

결국 8월 23일, 스탈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리벤트로프와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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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렘린에서 독소 조약에 서명하는 몰로토프. 몰로토프 바로 뒤에 있는 사람이 리벤트로프이다. 그리고 그 오른쪽이 강철의 대원수. 리벤트로프의 왼쪽 군복입은 사람이 당시 소련군 총참모장이었던 보리스 샤포슈니코프 원수.

5. 결과

공개된 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독일과 소련은 10년 기한의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 그리고 양국은 경제협력을 통한 상호이익의 증진을 도모한다.

그러나 언론에 공개된 위의 내용은 껍데기에 불과했고, 공개되지 않은 아래 부분이 이 조약의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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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협정에 의한 국경선, 오른쪽은 실제로 분할된 국경선.

이 조약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과 소련은 공동작전으로 폴란드를 분할했으며, 이후 독일의 묵인 아래 소련의 압력을 받은 루마니아는 베사라비아를 소련에 할양했다. 발트 3국은 소련의 협박에 모조리 소련에게 넘어갔는데, 이때 독일은 약속받은 리투아니아를 포기하는 대신 폴란드에서 합의된 것 이상의 영토를 차지했다.

이 조약에서 합의된 분할 대상 중 핀란드는 통째로 소련에 넘어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겨울전쟁에서 침공해 온 소련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선전하였다. 결국에는 국력의 격차를 넘지 못하고 패배해서 영토의 11% 정도(산업능력의 30%)를 소련에게 넘겨주게 됐지만, 이웃하는 발트 3국과는 달리 소련에 흡수되는 운명은 면했다.

물자 지원도 이전에는 소련에서 일방적으로 퍼준 것으로 취급했지만 현재 연구로는 소련에서 독일로 간것 만큼 독일에서 난방용 석탄(연간 300만톤), 최신 기계류(엔지니어 파견 포함), 발전설비, 방산 기술(비스마르크급 전함 설계도 등)이 넘어가면서 일방적인 흑자는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이후 동부전선을 안정시킨 독일은 프랑스를 항복시켰고 최전성기를 달리게 되었다. 소련도 동유럽에서 확보한 지역을 발판으로 세력을 크게 키웠으며, 독일과 함께 세계구도 차원에서의 세력분할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은 마침내 동쪽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기습 공격한다. 독소전쟁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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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실제로 독소전쟁 때는 수백개의 사단을 동원했으니 이건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나치독일군은 독소전쟁을 개시할 당시 소련군이 유럽 전선에 동원 가능한 병력을 180개 사단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 [2] 뒷날 독소전쟁 당시 소련에는 하루에 민간인 1만 5천명, 군인 7,000명 이상으로 합계 2만 2000명 이상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전쟁 끝날 때까지 매일 매일. 즉 한두 사단 병력규모, 작은 도시 하나 정도의 사람들이 매일 증발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영국군 4개 사단 따위는 3~4일이면 소멸한다는 이야기니...
  • [3] 이는 대륙 전쟁에 말려들 때 영국의 관습적인 대응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때도, 1차 세계대전 때도 시작은 똑같았다. 대륙에서 전쟁이 악화되더라도 본진은 털릴 일이 없는(없다고 생각했던) 섬나라의 소극적이고 이기적인 관습이었다.
  • [4] 혹자는(영국 외교관들, 그리고 그들의 입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 이러한 행태를 영국의 전통이라고 옹호하기도 하는데, 전통이고 뭐고 그냥 이기적인 전략이 맞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더라도 프랑스선에서 어떻게 수습이 되겠지.. 그렇게 되면 경쟁자인 독일과 프랑스가 공멸하니까 영국 Win~!" 하는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영국처럼 한가한 입장이 아니었던 프랑스는 같은 회의 장소에서 110개 사단과 탱크 4,000대를 제시했다. 물론 프랑스는 또 프랑스 나름대로 "폴란드가 어느정도 버텨주면 뒤치기를 하자!"는 꼼수를 계산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프랑스 침공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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