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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드라이스데일

last modified: 2015-04-12 14:50:53 by Contributors

- 나는 타자들이 죽도록 미웠다. 나는 경기가 시작되면 미쳐 버렸고, 끝나고 나서야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 타석에서 몸쪽으로 가까이 붙는 사람이라면, 내 할머니라도 (머리를) 맞추어버릴 것이다.


이름 도널드 스콧 드라이스데일(Donald Scott Drysdale)
생년월일 1936년 7월 23일 ~ 1993년 7월 3일
국적 미국
출신지 리포니아 주 밴누이스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브루클린·로스앤젤레스 다저스 (1956-1969)

1962년 메이저리그 사이 영 상
화이티 포드
(뉴욕 양키스)
돈 드라이스데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샌디 쿠팩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영구결번
No.53


메이저리그 선수.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샌디 쿠팩스와 함께 1960년대 전성기를 이끈 우완 사이드암[1] 투수. 물론 본명은 도널드 드라이스데일이고, 돈 (Don)은 애칭이다.

현역 시절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태어나 고향팀 다저스에서 현역 시절을 보낸 프랜차이즈 스타. 1936년 로스앤젤레스 근교의 밴누이스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고교 시절에는 야구부에서, 나중에 배우가 되는 로버트 레드퍼드 (드라이스데일과 동갑이었다)와 한솥밥을 먹기도. 고등학교 졸업 후 브루클린 다저스와 계약하는데, 1만불팔 쿠팩스가 "1만 달러 이상의 입단 보너스를 받으면, 반드시 메이저리그에 직행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메이저리그에서 6년이나 고생을 한 반면, 드라이스데일은 입단 후 3년 동안 조용히 마이너리그를 오가며 수업을 받았다. 그 결과 쿠팩스가 5승밖에 못 거두며 고생하던 1957년에 드라이스데일은 21세의 나이로 17승을 거둔다.

드라이스데일은 1958년 다저스가 LA로 연고지를 옮긴 직후에 4년 동안 쓴 메모리얼 스타디움에선 좀 고생했지만, 다저 스타디움이 개장한 1962년부터 구장빨 같은 걸 끼얹었나? 미치기 시작한다. 1962년 25승 9패를 거두며 뉴컴 (1956년)에 이어 다저스 출신으로는 두번째로 사이 영 상을 받은 것.[2] 그리고 무엇보다 1963년부터는 쿠팩스까지 미치기 시작하면서 둘이서 44승을 합작하고, 1964년 37승, 1965년에는 49승을 거두며 콤비로서 절정의 시기를 보낸다. 그리고 그 보상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연봉 10만 달러 투수 타이틀[3].

1966년 쿠팩스는 사실상의 커리어하이인 27승을 기록했지만,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가 4연패로 박살나자 부상도 있고 해서 깨끗하게 은퇴를 선언했다. 거기다 드라이스데일은 1966년 13승밖에 거두지 못하면서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더니, 결국 1969년 부상의 누적을 견디지 못하고 32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이후

은퇴를 선언한 뒤로는 해설가로서 활동했다. 특히 1988년부터는 빈 스컬리와 함께 다저스 경기만을 전담하는 해설위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오렐 허샤이저가 자신의 58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넘어서자 중계 부스에서 뛰쳐나가 허샤이저를 부둥켜 안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는 10수만인 1984년에 헌액되었는데, 이것도 78%의 낮은 지지율로 턱걸이 수준으로 헌액된 것이다. 1960년대가 극심한 투고타저 시대였으며, 늦게 터져서 짧고 굵게 불사른 동료 샌디 쿠팩스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2인자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기에.

1993년 7월 4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몬트리올 엑스포스전 경기 중계를 앞두고,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 때 그의 나이 56세.

플레이 스타일

9이닝 당 볼넷 비율이 2.2로, 사이드암 투수로서는 정상급 제구력을 자랑했다. (같은 시기의 쿠팩스의 비율은 3.2였다) 또 인용구를 통해 짐작할 수도 있지만, 드라이스데일은 위협구와 빈볼을 자주 활용했던 투수이다. 3,000이닝을 던지면서 154번이나 타자를 맞춰, 이 분야에서는 내셔널 리그 최다 기록.[4]

대신 드라이스데일이 활약하던 시기는 극심한 투고타저 시즌이었기에 득점지원이 꽤 안습해서, 자신이 안타를 치고 홈런을 치고 다 해먹는 경기도 많았다. 이에 관한 일화로 1958년 8월 14일부터 8월 23일 경기까지, 자신이 등판한 3경기에서 투수로는 3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고, 특히 23일 밀워키 브레이브스전때는 4회말과 6회말에 홈런을 때려내, 3경기 4홈런이라는 스탯을 쌓게된다. ㅎㄷㄷ... 1965년에는 투수로서 혼자서 3할의 타율을 기록[5]했고, 한 시즌에 7개 이상의 홈런을 때리기도 해서,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는 내셔널 리그의 특성 상, 투수 대타로 기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드라이스데일은 무엇보다 선발로 엄청나게 많은 이닝을 소화했다. 전성기 때에는 매 시즌 40경기 이상을 선발로 출장했고, 300이닝 이상을 던졌다. 거기다 드라이스데일의 통산 166패 중 40%에 해당하는 67경기에서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하기도. 그러니까 문제는 한심하고 답답한 물타선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이닝을 던진 것이 결국 독이 되어, 쿠팩스와 드라이스데일의 조기 은퇴를 초래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모저모

결혼을 두번 했는데, 진저 두벌리와 결혼하여 딸을 낳고 살다가 1982년 이혼했고, 1986년 미국 여자농구의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선수였던 앤 마이어스(Ann Meyers)와 결혼하였는데 결혼 이후 앤이 본명 뒤에 드라이스데일이란 이름을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다. 둘 사이의 자녀는 아들 둘과 딸 하나. 돈은 재혼 전에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는데 앤도 남편과 사별한 뒤인 1999년 창립된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의 초대 헌액자로 뽑히면서 부부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진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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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하지만 그의 피칭을 보면 로우 쓰리쿼터에 가깝다.
  • [2] 당시에는 내셔널리그/아메리칸리그를 합쳐 사이 영 상을 한 명에게만 주었다. 나중엔 리그별로 나뉘었지만.
  • [3] 물론 쿠팩스의 성적이 더 좋았으니까 쿠팩스가 좀 더 받긴 했다.
  • [4] 뭐, 같은 시기에 활약한 놀란 라이언도 158번이나 타자를 맞추긴 했지만, 5,000이닝을 넘긴 투수이다 보니 드라이스데일에 비하면 비율이 낮을 뿐더러, 무엇보다 라이언의 사구는 드라이스데일처럼 몸쪽 승부를 하다 나왔다기보단 제구가 불안정해질 때 실투성으로 나오던 것이었다.
  • [5] 그리고 1965년 다저스의 타자들 중에서는 한 명도 3할을 치지 못했다! 와나 1점만 따라고 타막 거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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