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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방송

last modified: 2015-03-13 01:12:31 by Contributors

  • 같이 보기 : JTBC


동양방송의 깃발. 사진은 언론통폐합 직후 쓸모없어진 깃발을 내리는 모습이다. JTBC가 개국할 때 깃발을 올리는 것에 큰 의미를 둔 게 이것 때문이다.

Contents

1. 개요
2. 그래서 누가 후신이냐
3. 동양방송 출신의 인물들
4. 방송국 리스트
5. 프로그램
6. 트리비아

1. 개요

1960년대 중반~1970년대 후반을 주름잡았던 대표적인 민영방송사. 약칭은 TBC(Tongyang Broadcast Company).

중앙일보와 같이 삼성그룹 계열사였다.이상하게 같은 이름의 동양그룹과는 관련 없다 그래서 그런지 그 당시 라디오 시보 협찬사가 다 삼성그룹 계열사의 광고였다.

당시 창업주인 이병철 씨가 뭔가 국가정복에 기여를 하고 싶은데, 정치를 한번 해 볼려고 했는데 이건 좀 아니다는 판단으로 인해 이에 대한 대책으로 선택한 게 언론사업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만들어진 것이 중앙일보와 TBC라고.

지금 와서 보면, 편파방송을 할 듯해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삼성이 크게 비리를 저질렀거나[1] 불법 승계 논란을 일으켰던 시절은 아니었고, 당시 민영방송에 대한 인식은 그래도 긍정적이었기 때문에, 삼성이 방송을 차린다는 소리는 당시 상황에서 보면 상당히 개념적이었다고 보면 된다. 당시 정부에 비해서는(…).

그 외 다른 민영 방송사는 MBC[2] DBS(동아방송)와 CBS(기독교방송)가 있었다. DBS의 경우, 1980년 12월 언론통폐합 당시 KBS에 통합되었고, 1990년 KBS 조직 축소 당시 SBS로 채널이 넘어갔다. CBS의 경우 박정희 시대에 기독교 세력과 미국의 영향력을 믿고 정부에 쓴소리 좀 했는데, 이로 인해 1980년 언론통폐합 때 보도방송과 광고방송을 금지당했다가 1987년 6월 항쟁이후 해금되었다.

사실 흑역사가 있어서, 삼성에서 사카린 밀수를 할 때, 다른 언론은 다 삼성을 까고 있는데 TBC 혼자서 옹호하는 뉴스를 틀어 주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창업주가 창업주인지라 어쩔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SBS마냥 주로 쇼·연예 등 예능 프로그램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시청률은 거의 그쪽으로 몰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물론 덕분에 타 신문사들에게 드라마에 막장 장면(혼외정사, 통속적 애정행각, 고증오류 등등)을 넣고, 중복편성을 한다는 식으로 신나게 비난를 받았다. 물론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일부러 까일 건더기를 만든것도 사실이긴 하다. 시청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지금보다 성 관념이 훨씬 엄격했던 시절인 만큼 막장도는 지금보다 훨씬 덜하긴 하지만) 연속극에 자극적인 장면을 넣거나 일일연속극을 매일 3회씩 편성했으며 중간광고가 폐지된 다음에 1시간짜리 주간극을 광고수입(토막광고, 자막광고)의 감소를 막기 위해 두 번에 나누어서 편성하는 짓도 했다. [3][4]

하지만 경쟁사인 MBC도 딱히 다를 바는 없었고, 심지어 광고가 폐지된 KBS에서도 이런 식의 편성을 하기도 했다(…).[5] 물론 이면에는 광고쟁탈전이 숨어있다는건 공공연한 비밀. 어쨋거나 정부에서도 공익성 강화를 명목으로 1973년에 (스포츠 중계, 문화예술 실황프로그램을 제외한)중간광고가 금지되었고 1978년에 프로그램 광고 편성비율을 기존 10%에서 8%로 줄이기도 했다.[6]

채널이 1개 뿐이었고 관변보도와 교양, 시사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던 KBS와 후발주자 격인 MBC를 누르고 시청률 1위를 달렸던 방송사였다.

관영방송의 성격상 유연성이 떨어지는 KBS와 후발민방으로서 자금력이 다소 떨어졌던 MBC와 달리 자금력이 탄탄했고 정부의 통제[7]에서 상당히 자유로웠던 TBC가 프로그램의 질, 실험성 면에서 타 방송사를 압도했기 때문에 시청률이 높았던 것이다.

드라마에선 60년대 후반부터 '아씨'같은 히트작을 터뜨려 주도권을 잡고, 70년대 중반엔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던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와 남자배우 노주현, 한진희 등을 내세워 타 방송사를 압도했다. 이순재, 이낙훈, 강부자, 여운계, 미자 같은 든든한 연기파들이 뒤를 받쳤고 이병철 회장은 특히 조연배우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주어 이들을 방송사의 기둥으로 만들어두는 것이 드라마 제작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전투(Combat), 도망자, 600만불의 사나이, 뿌리, 원더우먼, 헐크 등 화제의 외화들(지금으로 말하면 미드)도 TBC를 통해 방영되었다. 배한성, 양지운 같은 성우들이 TBC를 통해 스타성우가 되었다.

보도에서도 인기 앵커맨 봉두완 등을 앞세워 관영방송인 KBS와 MBC를 눌렀다. TBC 석간이라는 9시 메인뉴스가 방송3사 중에서 시청률 1위를 달렸었다.

오락프로그램의 대명사 격이었던 쇼쇼도 TBC의 간판이었다.

스포츠 중계에서도 한국 최초로 해외경기 위성중계(그 당시에는 우주중계라고 불렀다.)를 하거나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를 녹화중계하거나, 프로레슬링 중계를 통해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켰다거나 고교야구 중계를 통해 고교야구 붐을 일으키는 등 선구적인 노력을 많이 했고 나중에 KBS의 간판 스포츠캐스터가 되는 아나운서들 중에선 TBC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짱가, 그레이트 마징가, 그렌다이저, 독수리 오형제, 딱따구리 등 화제의 애니메이션도 TBC의 전파를 탔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1980년에는 건담의 국내방송을 추진중이었다는 것!!! 다만 이런 애니메이션은 당연하지만 대부분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한 작품이었다.[8] 사실 동양방송에서 애니메이션이 인기를 끌자 국산 애니메이션 제작을 계획했는데 수지타산이 안 맞아 접어야 했다(…). 후일 1990년대 이후에 들어와서 수지타산이 맞았다면 대한민국의 TV도쿄가 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언론통폐합 때문에 방송국이 없어지면서 당연히 모든것이 물거품. 전두환을 죽입시다 전두환은 오덕들의 원수[9]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신문사인 중앙일보와 방송사인 TBC를 합친 언론사업을 그룹의 주력사업으로 보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계열사인 제일제당의 식료품, 제일모직의 의류, 신세계백화점, 삼성전자, 동방생명 등의 광고를 계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에서 만들어서 중앙일보와 TBC를 통해 내보내고, 중앙일보와 TBC는 안정적인 광고수입을 얻는다는 식으로 시너지 효과를 내며 삼성의 언론사업은 순항했다. 그러고 보니 이건 CJ E&M에서도 하고 있잖아 이렇게 집안내력 인증하고야 마는 무서운 사람들같으니

하지만 전두환이 집권하자마자 시행된 언론통폐합에 의해 KBS로 흡수통합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고별방송 때 가수든 직원이든 많이들 울었다고. 이 때 고별방송 'TBC 가족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에서 가수 은하가 눈물을 보였다는 이유로 신군부는 3개월 방송출연금지를 때려버린다.[10]


이 'TBC 가족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를 끝으로 'TBC는 영원하리'라는 글의 종파자막을 띄우며 TV방송을 마감했다.

TV에 비해 가려진 게 없지않아 있지만, 동양라디오 진행자들도 정말 안타까운 상황에서 고별방송을 맞이했다. 이날 동양라디오에서 내보낸 마지막 뉴스 프로그램이었던 '뉴스 기상도'의 맹관영 아나운서가 중간에 울먹거리며 진행하는가 하면, 을 잊은 그대에게의 DJ였던 황인용 아나운서의 애절한 최후의 콜은 인구에 회자가 될 정도였다.[11]

참고로 이건희 회장도 동양방송을 통해서 입사했다. 이병철은 후에 이건희에게 TBC와 중앙일보를 맡길 계획이었다고 한다. 전두환언론통폐합이 없었다면 삼성그룹에서 언론과 금융을 키우느라 전자분야를 키우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삼성전자의 영광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삼성이 반도체 사업을 본격 시작하게 된 것은 TBC를 잃은 이병철의 허탈함을 해소하기 위한 성격도 있었을거라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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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SB 라디오서울(TBC 라디오의 전신)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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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TV 동양텔레비전이 있던 신세계 백화점.
TBC의 사옥은 개국 초기에는 종각과 신세계백화점 5층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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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 중앙일보와 함께 합쳐저 서소문동으로 이사하게 된다.[12]


1980년 7월 여의도에 완공해 다시 이사했는데, 5개월이 지나서 언론통폐합으로 사옥까지 통째로 KBS에 넘어가버리는 비운을 맞게 된다. 그 결과 현재 KBS 별관으로 불리고 있다. 현재의 모습은 이미 인터넷에서 지도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13] KBS 본관, 신관이랑 별관의 거리가 먼 이유중 하나다. KBS 본관 뒤에 붙어있는 IBC라고 써있는 신관[14]과는 다르다. KBS에서 운영하는 방송국 중에서 제2TV, 제3라디오(사랑의 소리 방송), 제2FM(쿨FM)이 언론통폐합 이전 동양방송의 채널이었다. 이 안에 있던 스튜디오와 공개홀은 당시 동아시아 최대의 방송 시설이었지만 KBS에 넘어간 현실이 아쉬울 따름.

1991년, 중앙일보는 KBS에 TBC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신군부의 강요으로 방송사를 강제로 빼앗겼다'는 이유였지만 민법상 취소권 행사기간은 '그 원인이 종료한 것으로 추인할 수 있는 날'로부터 3년인데 당시 사법부에서는 이 원인이 종료된 것을 1987년 6월로 추인하였고 따라서 1991년 시점에선 이 기간이 훨씬 도과되었다고 판단하여 기각하였다.

2000년대 초반에 TBC 출신 직원분께서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어 TBC의 방송과 관련 자료를 모아 인터넷 박물관으로 꾸미셨다. 처음에는 희귀 자료들이 올라오는 개념찬 홈페이지로 방송덕후들이 한두번은 다녀갔을 정도였지만,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전후로 우파를 비판하는 내용을 게시판에 올리면 ID가 삭제되거나 활동중지를 먹여버리는 등 홈페이지가 극도로 흑화가 되어버렸다(…). 이후 열람제한까지 걸 정도로 폐쇄적으로 운영되었다가 JTBC가 개국된 직후 공식적으로 문을 닫았다.

2. 그래서 누가 후신이냐

31년 동안 폐국되어 있었으나, 2011년 미디어법 개정에 의한 종합편성채널로 중앙일보를 통해 2011년 12월 1일에 재개국하였다. 그런데 재개국 약칭이 TBC가 아니고 JTBC다. 제2TBC 동양방송의 후신인데 TBC를 TBC라 부르지 못하는 이유는 중간에 개국한 대구방송 때문이다(…). 대구방송을 죽입시다 대구방송은 우리의 원수
JTBC는 개국하자마자 TBC 방송자료를 쏟아내고 일해거사와 KBS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31년간의 원한 TBC의 문을 닫은 그 사람이 몇십년 만에 축하를 해 주었지만(JTBC 링크) 그래도 사람들에게 계속 씹히는 중. 실제로 당시 TBC의 마지막 사장이던 홍두표홍두깨가 현 JTBC 회장인 것을 생각해도 어느 정도 맞는 노릇이다.

그러나 인적, 물적 자원을 가져가버린 KBS2 역시 후신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TBC에서 간판만 바꿔 단게 KBS2니까 맞는 말이다. 거기에다가 KBS는 TBC의 방송자료를 갖고 있고 저작권까지 갖고 있다(…). 다만 강압적으로 얻어온 것이니만큼 껄끄러운 것은 사실. 그리고 TBC 시절 중요한 방송자료는 모두 카피를 떠서 중앙일보 사옥 통제구역에 고이 모셨다가 공개했다. 오오오! 선견지명. 게다가 홍두표 현 JTBC 회장이 문민정부 때 KBS 사장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한편 중앙일보와는 상관없이 옛 삼성 계열사인 CJ가 미디어 산업에 진출했고, 2011년 3월 CJ E&M을 만들어 대박쳤다. 사실 CJ의 설립주체를 봐서는 동양방송이라고 볼 수 있긴 하다. 중앙일보가 멀쩡히 살아 있어서 그렇지(…).

어쨌든 치토스의 후신이 "돌아온 치토스"이냐 "니스"냐와 같은 문제(…) 축구계에도 비슷한 관계인 팀들이 있다. 야구 쪽에선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이전으로 말미암은 SK 와이번스넥센 히어로즈의 인천야구 계승팀 논쟁이 있다, 삼청태현참고여기에쌍방울얘기까지 나오면 그야말로 난장판이 벌어진다

3. 동양방송 출신의 인물들

이순재, 강부자, 故 여운계, 미자,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노주현, 한진희, 허참, 김민희 등이 대표적인 동양방송 출신 인물이다.

또한 성우극회 역시 인수 후 합쳐졌기에 KBS 성우극회 일부 인물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배한성이나 양지운, 유강진, 김종성, 지금은 고인이 되신 장정진이나 2012년에 작고하신 나수란 같은 성우분들이 대표적. 또한 작고한 배우 故 김무생도 이곳에서 성우로 처음 방송 활동을 시작했었다.

최근에는 활동이 뜸하시긴 하지만 을 잊은 그대에게의 진행자로 명DJ였던 황인용 아나운서도 TBC의 간판 아나운서였다. 스포츠중계의 레전드로 꼽히는 유수호 아나운서도 이곳 출신.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리랜서 방송인인 왕종근 씨도 방송인 커리어는 여기에서 시작했다.[15]

전 KBS 사장인 홍두표 현 JTBC 회장은 1964년 12월부터 동양방송의 창립요원으로 활동해왔던 동양방송의 산증인이다.[16]

4. 방송국 리스트

  • 동양텔레비젼 (HLKC-TV, CH 7/10kW)
    현재 KBS 2TV
  • 동양라디오 (HLKC, 639kHz/20kW)
    현재 KBS 제3라디오
    • 전일방송 (VOC, HLAA, 1224kHz/20kW)
      동양라디오 광주지역국. 현재 KBS광주방송총국 제3라디오.[17]
    • 서해방송 (SBC, HLAS, 675kHz/10kW)
      동양라디오 군산지역국. 언론통폐합 이후 KBS군산방송국이 되었다가 2004년에 KBS전주방송총국에 흡수되었고 예전 사옥은 현재 군산문화원 건물로 사용중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제2라디오를 송출하였으나, 2002년 10월 10일부터 KBS 제3라디오를 송출중에 있다.

  • 동양FM (HLKC-FM, 89.1MHz/10kW)
    현재 KBS 2FM
    • 대구 한국FM (BBC-FM, HLCB, 89.7MHz/1kW)
      전국 유일의 동양FM 지역국이자 국내 최초로 지방에서 설립된 FM방송국이었으며, 언론통폐합 이후 KBS대구방송총국 음악FM으로 바뀌어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18]

5. 프로그램

6. 트리비아

  • 1977년 동양방송에서 권투선수 수환의 타이틀전을 중계하던 당시, 대구 앞산 기슭의 동네와 김천 산간지역에서 동양방송이 잡혀 시청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이 때 마을 주민들이 당시 500원씩 거두어 모아서 산꼭대기에 안테나와 부스터 동축 케이블 1km를 가설하고 사설중계소를 몇 달 간 운용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이 현상은 스포라딕 E층 반사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19]
  • 영화 쎄시봉에서 민자영이 오근태에게 동양방송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말했는데, 당시 고향에 내려가 있었던 오근태는 "우리 동네에 TBC 안 나오는데"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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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물론 사카린 밀수사선 같은 비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당시 대한민국의 상황이 거의 웬만한 기업들은 그정도 비리는 다 저지르고 있었고 오죽하면 세무조사 해서 한껀도 안 걸리는 것이 특이한상황이겠냐? 정치권의 비리는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았던 시절. 물론 일반 서민들도 짜잘한 부정 정도는 스스로도 다 저지르고 있었으므로 그러려니 했던 시대이다. 재래시장에 단속 한번 나가면 저울 눈금 속인 가게와 노점이 수두룩하게 적발되었던 시기다. 달리 털어서 먼지 안 나는놈 없다라는 말이 유행했었겠는가?
  • [2] 일단 형식상으로 민영방송사지만, 실질적으로 국영에 가까웠다. 참고로 지금과 같이 반(半)공영방송이 된 건 1980년 12월. 즉 언론통폐합 이후. 물론 땡전뉴스항목에서 보듯이 운영상으로 여전히 국영에 가까웠고 실질적으로 준공영방송이 된 건 1987년 6.10 항쟁 이후이다. 이후 MBC 노조측에서 공정언론 확립을 위한 노사분쟁을 벌인 노력 끝에 국영방송사의 이미지를 탈피했다.그러나 23년 후에 다시 제자리로(...)
  • [3] 후술할 정부의 제재 역시 일견 납득이 갈 수도 있는 것이, 당시 방송 환경 기준으로 1시간짜리 드라마 편성은 정말 엄청나게 긴 것이다. 보통 이 시기의 드라마 편성은 20분, 심한 경우 15분 정도로 짧았다.
  • [4] 동양방송이 한창 잘나가다가 외압에 의해 간판을 내리기까지의 10년간은 전세계적으로 터진 오일 쇼크로 인해 국가적 차원에서 에너지절약을 부르짖던 때이고, 이를 구실로 텔레비전의 아침 방송이 무기한 중단되었던 시기이다. 지금같은 다채널 시대에 종일방송이 예삿일이 되어버린 것과 다르게, 텔레비전 채널에 국한해서 보자면 오로지 지상파 3사만 있고 그조차도 하루에 방송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봤자 하루 중 저녁~밤시간 6시간에 불과한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광고가 늘어가니 윗분들 입장에서도 이래가지곤 버틸 수가 없다고 느꼈을 듯.
  • [5] 다만 중복편성의 경우는 얘기가 다른데 1976년 정부 당국에서 공익성 강화를 목적으로 평일 오후 6시에 어린이 프로그램 오후 7시대에 가족프로그램 오후 8시에 드라마와 캠페인 오후 9시에 보도프로그램을 (의무적으로)편성할것을 지시했고 당연히 때가 때인만큼 방송국에서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이런 지시를 받아들였다. 다만 그 이전에도 맞불편성을 하는일은 꽤나 있었다.
  • [6] 참고로 이 규정은 1994년 KBS-1TV의 상업광고 폐지에 따라 복구되었다.
  • [7] 물론 완전히 자유로웠다는 얘기는 아니다. 연예인 이름을 한글화하는 조치에 동참하기도 했고, 중간광고를 폐지했으며 TV프로그램에 외래어가 너무 많아 순화해야 한다는 박정희의 지시에 따르기도 했고 1976년도에 시간대별 편성지시에 동참하기도 했다. 물론 프로그램 제작면에서 KBS보다 상당히 자유로웠던건 사실.
  • [8] 국산 작품도 방영하긴 했는데 자체제작은 당연히 아니고 극장판 애니메이션 재방이었다.
  • [9] 다만 이후의 KBS에서도 1, 2TV 모두 광고함+고가의 TV 시청료 버프로 재정이 TBC보다 넉넉한 상태였음에도 1987년이 되어서야 국산 TV애니메이션을 방영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초반까지도 대다수 애니메이션이 미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해온걸 감안한다면(...)
  • [10] 동양방송 고별방송이 있기 며칠 전, 보도방송 중지를 당한 기독교방송의 마지막 뉴스를 진행하던 여자 아나운서가 울면서 방송한 게 신군부에게 찍혀서 이후 대부분 방송사의 거의 웬만한 고별방송은 사전녹화로 방송을 했다. 쇼든 드라마든 뭐든, 심지어 뉴스까지도 얄짤없었다.
  • [11] TBC가 KBS로 넘어가기 직전 TBC가 최후로 방송했던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밤을 잊은 그대에게는 23시부터 익일 1시까지 진행됐지만, 이날은 자정을 기점으로 TBC의 전파송출을 중단해야 하기 때문에 자정에 끝내야 했다. 황인용 아나운서가 울먹이면서 말했던 최후의 콜은 다음과 같다. "끝으로 동양방송의 호출번호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는 육백 삼십 구 킬로헤르츠… HLKC… 동양방송입니다…" 여기서 들을 수 있다.
  • [12] 앞쪽의 조금 낮은 빌딩. 당시 중앙 매스컴 센터라 불렸다. 현재의 중앙일보 사옥에서 시청역 쪽으로 조금만 가면 있다. 현재는 삼성그룹 연수원을 비롯해 일부 중앙일보 관계사가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과 달리 지금은 리모델링이 되어 외관이 많이 다르다.
  • [13] http://me2.do/xZq1Ej 참고. 붉은 벽돌의 건물이 지금은 흰색 대리석으로 뒤덮여버렸고, 그나마 그 크기도 KBS 본관보다 훨씬 작다(…). 참고로 사진에 보이는 화단이나 보도블럭 등의 앞길은 전부 차도로 변했다.
  • [14] 1988 서울 올림픽 국제방송센터(IBC)로서 건설됨.
  • [15] 정확히 말하면 TBC 부산방송국 소속이었다. 언론통폐합으로 KBS 부산방송총국 아나운서로 옮겼다가 1994년 본사로 올라가게 된다.
  • [16] 단 홍두표 회장은 처음에 KBS의 창립위원으로 시작했었다.
  • [17] 2001년까지 제2라디오였으나 2002년부터는 제3라디오를 송출하고 있다.
  • [18] 현재는 KBS 1FM 중계 및 로컬방송만 하고 있지만, 2001년 2FM에서 광고방송이 실시되기 전까지는 2FM도 중계하기도 했었다.
  • [19] 비슷한 예로 1991년 일본에서 KBS청주방송총국의 화면조정 영상을 잡은 사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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