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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last modified: 2015-03-28 09:46:10 by Contributors


사마씨가 세운 왕조로 서진의 멸망 이후에 세워진 국가.

© Ian Kiu (cc-by-3.0) from
노란색이 동진. 파란색은 전진이다.
우크라이나 국기

Contents

1. 개요
2. 건국
3. 존속
4. 군약신강
5. 멸망
6. 역대 황제

1. 개요

서진영가의 난으로 흉노족이 세운 전조에게 멸망당한 뒤 팔왕의 난에서 살아남은 사마씨 황족인 사마예(司馬睿)가 양쯔강 있는 곳까지 도주한 후, 같이 도망나온 중원 호족과 현지 호족이 사마예를 옹립해 세운 왕조.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 속에서 강남을 지킨 국가임과 동시에 화북과 중원에 있던 옛 서진의 피난귀족들과 예전부터 강남을 지키고 있었던 토착호족이 연합하여 세워진 국가이다.

화북에서는 전량, 서량, 북연, 염위가 한족 국가이었으므로 동진이 '유일한' 한족 국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동진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타 국가에 칭번을 할 정도로 영향력이 극히 한정된 약소국인데가, 국왕 일족만 한족이지 나머지는 타 민족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는 등 한족 국가로 보기에는 문제가 많다.

2. 건국

동진은 옛 (吳)나라 땅으로 옮겨서 건업(建業)을 건강(建康)으로 고쳐 도읍으로 삼았고, 오와 더불어 이후의 (宋), (濟), (梁), (陳) 4개국이 존속한 시기를 육조시대(六朝)라고도 부른다.

애초에 강남 지방이란 게 인구도 별로 없고, 땅이 습하고 더워서 열대성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 겉보기에 비해 별로 좋지도 않은 땅이었지만, 화북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기존에 갖고 있었던 우월한 고위 테크 농업 기술을 강남에 전파 혹은 사용함에 따라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하여 끝내 남송(南宋)시대 때 절정에 이른다. 이 때부터 강남의 경제력이 제대로 커지기 시작했다.

당장 땅에 물기를 어느 정도 빼니 벼농사를 짓기 최적화 된 땅에 거기다가 더워서 2모작, 3모작, 그러니까 1년에 벼농사를 2번, 3번할 수 있는 그런 좋은 점이 발견되어 이는 강남의 경제력을 크게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남북조 내내 남조는 열세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개간이 덜 됐으며, 벼의 품종이나 농법 등의 벼농사 기술도 덜 발달했기 때문. 훗날 수의 통일 직전 진나라의 인구는 8백만을 겨우 찍은 반면, 북주 혹은 수의 인구는 4천만을 넘겼다.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을 보면 장강 이북이 절반, 이남이 절반이었다가 송대에 들어 장강 이북에 비해 장강 이남의 행정구역 수가 두 배가 되었다. 실제로 당나라 때까지만 해도 강남과 강북의 경제력은 비슷했으나 안사의 난, 황소의 난, 오대십국시대를 거치면서 강북(정확히는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중 평야)은 전란으로 황폐화 되고, 장기간의 농사로 경파괴가 일어났으며 벼농사의 발달로 벼농사와 생산력이 역전되기 시작한다. 결국 송대에 들어 완전히 강남이 강북을 압도하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3. 존속

전대미문의 대혼란과 군벌의 난립으로 현실정치에서 유교는 크게 쇠퇴하고 상대적으로 도교, 불교가 주목되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문화예술의 발전이 눈부셔서 늘 북쪽의 북조 국가들을 오랑캐라고 무시했지만... 얘들도 막장. 당최 하루도 나라가 편할 날이 없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아웅다웅 열심히 했다.

하지만 어떻게 명줄은 길어서 비수대전 등 절대 이길 수 없을 것으로 보이는 전쟁에서도 이겼다. 비수대전에서도 전진(前秦)의 87만 대군을 고작 몇 만으로 격파하는 등의 기적이 발생했는데, 이건 동진 출신이라서 도움을 줬던 주서 덕이 크지만 전진 국왕인 부견의 결정적인 실수가 주 원인이었다. 문제는 이를 교훈삼아서 나라를 발전시킬 생각은 안하고 전쟁에 이긴 덕분에 안심하고 더욱 더 막장짓에 탐닉했다는 것이다.

비수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광의 업적을 남긴 황제인 효무제는 기분좋게 이기고 기분도 좋겠다 후궁 장귀인 끼고 너 한잔 나 두잔 하다가 '야 너도 이제 늙었구나. 내일부터는 영계끼고 잘 거다.'라고 했다가 열받은 장귀인이 황제가 자고 있는 동안 베개로 눌러서 질식사했다.(...) 많고 많은 중국 왕조들의 황제들 중에서도 후궁에게 살해당한 황제는 동진 왕조가 처음 배출하는 영예를 누렸다.

4. 군약신강


동진의 황제들은 원제 사마예가 강남에 내려왔을 때부터 상당히 위치가 불안했지만, 이유가 지방 호족들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동진은 그래도 지방 호족과 북방에서 내려온 귀족이 꽤 협력해서 통치한 양상인 손오 정권과는 달리, 애초부터 북방에서 내려온 호족 군사 집단들이 지방 호족 집단들을 찍어누르는 형태였고, 역시 서진 출신의 귀족들이 거의 그대로 귀족 사회를 형성해서 압박했다. 물론 토착 귀족들은 이런 현상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서진 출신 귀족들과 역시 화북에서 내려온 유민 군사 집단들은 이해 관계가 많은 부분에서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토착 귀족들에겐 이런 틈을 파고들 역량이 없고, 그럴 사정이 아니어서 내내 눌려 지내야 했다.

한편 서진의 귀족 집단은 유민 군사 집단을 천하다 여겨 무시했지만 그 군사적 실력을 두려워했으며, 후자는 전자를 전통과 학식 외엔 아무 것도 아닌 집단이라고 내심 비웃었지만 자기네에게 통솔에 있어 필수인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건 바로 그들이었기에, 전자에게 함부로 정면도전하진 못했다.

사마예의 경우 황제로 즉위할 때 즉위식에서 승상 왕도에게 같이 용상에 올라달라는 말을 할 정도로 황권이 취약했고, "임금(王)과 말(馬)[1]이 천하를 공유한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긴 했지만, 감히 지방 호족 따위에게 무시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스스로 주도적으로 나라를 세운 게 아니라, 위에서 언급되는 화북 출신 귀족 집단, 화북 정예 군단 출신이 상당수 섞인 유민 군사 집단, 토착 호족 집단[2], 일종의 편한 최대공약수로서 옹립된 한계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런걸 감안해도 사마예가 상당히 심하게 현실안주적이었던 데다 군주로서의 역량도 그닥이라, 애초부터도 션찮아보였던 나머지 형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왕도의 동생 왕돈이 반란을 일으켜서 사마예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이어서 즉위한 명제 사마소가 왕돈의 반란을 진압 하고, 그동안에 이런 사회 갈등도 북방으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역설적으로 일시 봉합된다. 명제 자체는 꽤 괜찮은 군주여서 어떻게든 뭔가 일을 많이 해보려 했지만, 27세로 요절하고 만다. 이런 요절은 대대로 이어져서, 아들 성제 사마연은 5세로 즉위해서 22세로 사망. 사마연의 동생 강제 사마악은 역시 23세로 사망. 사마악의 아들 목제 사마담은 2세로 즉위해서 19세로 사망. 사마담의 사촌 애제 사마비는 21세로 즉위해서 25세로 사망.....

이렇게 되는데, 때문에 왕조가 상당히 불안정해져서 중앙이 허약해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게다가 처음에 북쪽에서 내려왔을 때는 강남의 풍토병에 걸려서 그렇게 일찍 죽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미 토착세력이 된 몇십년 뒤에도 나름대로 건강관리를 가장 많이 받는 황제와 황족이 이렇게 일찍 죽는 일이 많다는 것은 역사서에는 병사했다고 써놓고 실제로는 암살당했을 확률이 높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문서 하단의 연대표를 보면 심각한 지체장애가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위협적이지 않은 허수아비이자 꼭두각시 신세인 안제 사마덕종은 20년 이상 황제자리를 유지했다. [3] 간문제 사마욱처럼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오래 살던 인물이 막상 황제자리에 오르니 몇 년 살지도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구나 폐제 사마혁처럼 황제 자리에서 폐위된 사람은 또 오래 살았다.

이렇게 왕실이 부실해서 통제를 제대로 못하는 사이, 귀족들인 왕씨(王氏)·환씨(桓氏)·사씨(謝氏) 등이 각 지방의 하층민 군사 집단 및 호족 집단과 서로 각축을 벌이고 합종연횡하는 상황이 진행된다.

한편 국가적 대사업인 북쪽 영토 수복을, 황제가 모은 관군은 실패하는데 유력자나 장군이었던 , 환온, 유유가 사비로 모은 군대는 일격에 성공하는 상황이 3번이나 일어난다. 다만, 황제가 모은 관군은 실패하는데 각 장군이 사비로 모은 군대가 성공하는 상황은 놀라워도, 그렇다고 화북을 차지한 오호들에게 동진의 체제를 앞서는 어떤 뚜렷한 장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동진이 환온이나 유유를 통해 옛 수도이자 중심지인 낙양과 장안을 탈환한 것 자체는 그렇게 이상한 일까진 못된다. 문제는 조정이 점차 유명무실해지고, 귀족 집단은 실무 능력을 잃고 점점 형해화되어 가는데 조정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각 지방 군단들은 저마다 수장을 내세워서 부귀영달을 누리는 국가 해체 현상의 단초가 이때부터 보인다는 것.

그래서였는지 동진은 고토 수복이란 괜찮은 명분이 있었음에도, 촉한은 고사하고 손오만도 못한 현실 안주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해서 동진의 황혼기에 이르면 나라는 막장으로 가서 중앙정부는 말 그대로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는데 동진의 영토는 계속 넓어지고 국력도 꽤나 강해지지만, 그렇게 강해진 국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는 유유가 낙양과 장안 모두 회복했을 당시, 고위 귀족 가운데 아무도 거기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없어서 약간의 수비병만 남긴 채 그냥 버리고 돌아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다만 또 다른 문제인, 동진이 갓 건국했었던 시기에 하북에서 피난을 온 귀족들이 강남의 토착호족들과 연합을 하였음에도 오히려 피난귀족들이 권력의 중심이 되고 토착호족들은 시선에서 Out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꽤 쉽게 해결되어가는 편이다.

양상은 다음과 같다. 아예 호적에서부터 하북 출신 귀족들은 하얀색 호적인 백적을, 강남 출신 호족들은 노란색 호적인 황적을 써서 차별화시켰고, 또한 강남 지역과 피난 온 강북 사람들은 서로 다른 말을 써, 강북 사람들이 강남 사람들을 "에휴... 저 촌것들... 니네는 세련된 표준어도 몰라?"라고 무시하기 일쑤였다.[4] 게다가 같은 하북 출신이라도 동진이 갓 건국할 당시에 사마예와 같이 강남으로 내려온 귀족들은 권력의 중심이 되었지만 동진 건국 이후에 내려온 귀족들은... 그런 거 없었다... 결국 강남 토착 호족들이었던 소준, 환현 등이 몇 차례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고 동진 내부의 파벌 싸움이 결국 동진의 멸망을 가속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환온과 유유 같은 실력자들이 토단령을 내려 백적 철폐를 단행하여 국가 재정 확충 및 군사력 확보에서 대단히 큰 이득을 발견하게 되고, 이와 같은 문제는 송제양진의 왕조를 거치면서 서서히 해결된다.[5]

5. 멸망


결국 망하기를 환온의 아들 환현(桓玄, 369~404)에게 망했는데 이게 또 페이크라 군공을 세웠던 장군 유유(劉裕)가 누군가 모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환현은 난을 일으켜 사마덕문을 제껴버리고 스스로 (礎)나라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미리 유유가 키워놓은 사설 부대에게 3개월만에 관광타고 사망, 그 뒤론 스무스하게 유유에게 제위가 넘어가 동진은 망해버렸다. 게다가 좀 더 따지고 보면 환현의 아비 환온(312~373)도 제위를 찬탈하려고 사마혁을 몰아내고 낭야왕이었던 사마욱을 앉혔다. 하지만 환온은 나이가 많았고 신하들은 시간을 끌었으며 다행히 찬탈 전에 늙어 죽어서 미수에 그쳤다. 하지만 그 전에 왕돈의 반란과 소준이 사마연을 감금하고 일으킨 내란을 포함해 이것만 봐도 동진이란 국가가 몇 번씩이나 자체적으로 내부에서 멸망이나 왕조 교체직전까지 갔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또한 이미 효무제가 살아있을 때 나라는 사실상 분열된지 오래된 상태였다. 이미 동진의 건국시부터 건강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권과 장강 이북의 북부군, 장강 중류의 강릉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군에 각각 유력자와 황족들이 중심이 돼서 서로 견제를 하는 형식으로 간신히 국가가 유지되었다.

이 전통을 따라서 후에 안제의 섭정이 되는 효무제의 아우 회계왕 사마도자와 경구의 북부군을 통솔하는 왕공, 형주의 은중감으로 나뉘어있었다. 사마도자는 호족 타도를 계획했지만 환현이 왕공, 은중감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왕공은 섭정편에 붙은 부하 유뢰지에 의해 죽고 은중감 등은 환현에게 병합당했지만 결국 유뢰지가 토사구팽을 염려하여 중립을 지켜 환현이 건강에 입성한다. 이리저리 간보던 환현은 결국 환현에게 팽당했다. 그 와중에 유뢰지의 부하였던 유유가 다시 환현에게 붙었고 환현은 402년 초(楚)를 세웠으나 404년 유유의 반란으로 잡혀 죽었다.

실권을 잡은 유유는 우선 사실상 분열된 동진의 할거세력을 처없애고 후진에게 형북의 12군을 외교로 얻어냈다. 이 후 북위를 쳐부수고 낙양에 입성한 뒤 남연, 후진의 장안을 차례로 병합하는 수차의 북벌을 단행했다. 하지만 새로 얻은 영토를 관리하기에는 유유의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고 언제든지 타국에게 잃을 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자기 대신 내정을 맡긴 유목지가 사망하자 조정에서 영향력이 떨어져 실권을 잃을 것을 두려워했던 유유는 결국 동진으로 회군하여 단숨에 찬탈 직전까지 직행했다.

그리고 유유는 마지막 황제였던 공제에게 선양받은 다음 공제를 죽이고 사마씨를 멸문했다. 그래서 구사일생으로 북조로 도망간 소수를 제외한 사마씨는 확실하게 처단되었다. 유유의 며느리라서 살아남은 공제의 딸 해염공주는 유유가 을 세운 다음 무제의 장남이자 소제가 되는 유의부의 황후가 되었지만, 폭군이었던 그가 폐위되자 그도 폐위되었고 자손 없이 살며 천수를 누렸다. 이 때부터 선양받은 임금을 죽이는 살벌한 전통이 생겨났고 이것은 나중에 송나라의 조광윤 때 가서야 사라진다.

문화의 발전은 눈부셨지만, 강남의 민중들은 허리가 끊어졌다 붙었다 난리였다(…). 비록 북방과 중원의 백성들처럼 살육과 약탈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중과세에 시달렸으며, 북방에서 내려온 귀족이 아닌 이상 현지 호족이더라도 한미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차별을 받는 등 그리 좋지 못한 대접을 받았다.

다만 "일관되게"북조에게 밀렸던 건 아니다. 석륵과 석호의 후조는 가장 강성할 때도 회수 일대를 지키는 옛 서진 군단의 후예라고 볼 수 있는 유민 군사 집단에게 막혀서 회수 이남으론 손을 뻗지 못했으며, 적어도 석륵 이상은 될 부견의 전진에게 한참 밀릴 때도 영토들을 그렇게 호락호락 내줬던 건 아니었다. 또한 훗날의 송위 전쟁기에도 북위가 자만하고 함부로 너무 이남으로 대군을 밀어넣었다가 제대로 개털리는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던 만큼 늘상 북조에게 열위에 있었다는 생각은 사실과 동떨어진 틀린 얘기다.

어찌되었든 정통은 동진 정권에게 있었고, 오호십육국 시대의 여러 정권들도 동진의 이런 우위권 정도는 인정했다. 전연이 상당히 눈치보면서 괜히 동진에게 먼저 사신 파견해가며 황제를 칭하고, 또 전진에서도 동진 정통론을 주장하며 부견의 남벌이 때이르다고 한 이들이 괜히 있었던 게 아니다.

남조를 정면에서 깔아뭉개는 이들이 등장하는 건 이들을 아예 吳의 무리로 비하하기 시작하는 북위 때부터지만, 그런 주장에 모두가 동의했던 건 아니었다. 서양에서는 남조 정권을 비잔티움 제국과 동일시해서 보는 시각이 아주 예전부터 있었고, 조르주 뒤비에의 세계 지도에서 나타나는 이 시기의 중국사 지도에선 대놓고 남조만 China라고 본다.

황족 다툼이나 파벌 다툼으로 남조를 한심하게 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좀만 기분이 나쁘면 관료 목을 막 치거나 걸핏하면 배신을 밥먹듯 하며 이합집산이 잦았던 화북 왕조들의 형편이 남조보다 늘상 나았던 건 아니다.

물론 통일은 북위의 바통을 이어받은 북주 그리고 수나라가 이루게 되지만, 수나라가 정작 많이 참고한 관료제는 북위나 북주보다는 남조의 그것이었다.[6]

때문에 남조의 의의를 적게 볼 순 없다. 남중국을 적극 개발해서 중국의 범위를 확장시킨 점과 함께 과거의 한나라 문화를 보존해서 이후의 통일왕조에게 전수한 점. 다만 한나라의 문화를 전수하면서 동시에 문벌귀족이 좌지우지하는 정치나 청담사상, 구품중정제같은 안좋은 것도 같이 전수한 건 약간...이지만 예교 따위 X짓는 소리로 알아듣는 문화가 너무 심했던 북조가, 남조를 초월할 정도의 시대 정신이 있었다고 볼 순 없다.

6. 역대 황제

총 11대 103년이다. 앞서 말했듯이 군약신강체제라 종(宗)같은 묘호가 붙지 않은 황제는 그냥 이름만 황제인 꼭두각시내지 허수아비며며 애제(哀帝)나 간문제(簡文帝)는 그 뜻 자체가 그냥 무늬만 황제라는 이야기다. 물론 해서공(海西公)같이 공(公)자가 붙은 황제는 폐위된 황제다. 그래서 역대 황제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아래의 표에서 대수가 1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5에서 시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서진과 동진은 동일한 국가이기 때문이다. 원래 서진이나 동진이나 국호는 진(晉)이며, 황족도 변동이 없으나 주변정세와 국가의 영토변화가 너무 심해서 북송과 남송처럼 구분해서 부르는 것 뿐이다. 따라서 5대 이전을 알고 싶다면 서진/역대 황제 항목을 참고하라.

대수 재위기간 묘호 시호 성명 약력 능호
5대 317-322년 중종(中宗)원황제(元皇帝)사마예(睿)사마업의 재종숙, 사마근(覲)의 아들.
276년 출생, 322년 사망. 향년 47세.
건평릉(建平陵)
6대 322-325년 숙종(肅宗)명황제(明皇帝)사마소(紹)사마예의 아들.
299년 출생, 325년 사망. 향년 27세.
무평릉(武平陵)
7대 325-342년 현종(顯宗)성황제(成皇帝)사마연(衍)사마소의 아들.
321년 출생, 342년 사망. 향년 22세.
흥평릉(興平陵)
8대 342-344년  강황제(康皇帝)사마악(岳)사마연의 동생.
322년 출생, 344년 사망. 향년 23세.
숭평릉(崇平陵)
9대 344-361년 효종(孝宗)목황제(穆皇帝)사마담(聃)사마악의 아들.
343년 출생, 361년 사망. 향년 19세.
영평릉(永平陵)
10대 361-365년  애황제(哀皇帝)사마비(丕)사마악의 종형, 사마연의 아들.
341년 출생, 365년 사망. 향년 25세.
안평릉(安平陵)
11대 365-371년  해서공(海西公)사마혁(奕)사마비의 동생.
342년 출생, 386년 사망. 향년 45세.
-
12대 371-372년 태종(太宗)간문황제(簡文皇帝)사마욱(昱)사마혁의 숙조부, 사마예의 아들.
320년 출생, 372년 사망. 향년 53세.
고평릉(高平陵)
13대 372-396년 열종(烈宗)효무황제(孝武皇帝)사마요(曜)사마욱의 아들.
362년 출생, 396년 사망. 향년 35세.
융평릉(隆平陵)
14대 396-418년  안황제(安皇帝)사마덕종(德宗)사마요의 아들.
382년 출생, 418년 사망. 향년 37세.
휴평릉(休平陵)
15대 418-420년  공황제(恭皇帝)사마덕문(德文)사마덕종의 동생.
386년 출생, 422년 사망. 향년 37세.
충평릉(冲平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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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또는 왕씨와 마씨(사마씨)
  • [2] 앞서 말했듯 화북 출신 떨거지들이 대단히 맘에 들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걸핏하면 사람 목을 날려대는 오호들의 노예가 될 순 없었다.
  • [3] 일부에선 유유가 사마덕종을 죽인 것을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하나 유유가 아닌 누가 되더라도 결과는 대동소이한 것이 사마덕종이란 인물이 똑같은 바보황제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지능은 가지고 있었던 사마충보다도 덜떨어지는 지능을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골치아픈 존재였다. 선양이 아무리 정치적 쇼였지만 그래도 기본 지적 능력은 있는 황제가 해야 자연스러운데 사마덕종처럼 자기 몸도 간수 못하는 1급 지적 장애자가 갑자기 선양한다고 하면 너무 부자연스럽다.
  • [4] 하지만 더 웃긴 것은 그로부터 굉장히 오랜 시간 뒤, 국공내전 이후의 대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는데, 대만의 원주민인 본성인들은 그들만의 사투리를 쓰고 있었는데 국민당군이 대만을 점령한 이후, 표준어를 모른다고 멸시당한다.
  • [5] 다만 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다음 왕조 항목들을 참조할 것.
  • [6]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구품관인법 연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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