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드레스덴 폭격

last modified: 2015-02-05 20:38:06 by Contributors


폐허가 된 드레스덴을 내려다보는 동상. '천사'가 아니라 ''을 의인화한 동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영 연합군 폭격기대의 대규모 폭격작전. 직전인 1945년 2월 13일~2월 15일에 걸쳐 행해졌으며 유럽 전선의 폭격 작전 중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작전이자 가장 크게 논란을 일으키는 작전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Contents

1. 폭격 작전의 배경
2. 폭격의 진행 사항
3. 폭격의 결과
4. 결론
5. 여담

1. 폭격 작전의 배경

Dresden 1945 "ALLIED" judeo-anglo-american unpunished WAR CRIMES ww2-The Real Holocaust 감상시 주의를 요구한다. 제목이나 유튜브 등록자의 성향이나, 전쟁, 군사와 전혀 상관 없는 도시였다는 사실과 거리가 먼 주장까지 담겨있다. 연합군 폭격기들의 폭격으로 독일 전역이 쑥밭이 되고 있었지만 드레스덴의 경우 용케도 폭격을 면하고 있었다. 전쟁 초반기에는 다른 도시들과 비교해 공업 시설이 많지는 않았으나, 1944년 당시에는 폭격을 당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가장 공업 시설이 많았던 상황이었다. 이미 독일군에 물자를 공급하는 공장이 당시 127개가 되었다. 다만, 미군의 리포트(78년에 해금되었음)에 따르면 대략 110의 공장이 가동되고 있었고, 여기에는 항공기 부품 생산공장 및 독가스 생산 공장, 대공포, 야포 등을 생산하는 공장 및, 광학기기 등 군수산업의 복합체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독일군 막사 및 탄약 저장고가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이 위치는 체코슬로바키아쪽으로 향하는 요충지였으며, 이 곳의 철도 또한 베를린-프라하-비엔나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실제로 드레스덴에 잡혀 있었던 미군 포로의 증언조차 그 당시 드레스덴은 동부 전선에 투입하는 물자를 생산 및 군사를 훈련시키는 군사 도시의 모습이었다.

폭격 작전이 계획될 당시 폭격 지휘부는 드레스덴을 목표로 지정하면서 근거로 "독일군의 저항 능력을 분쇄하고 이를 통해 소련군의 진격을 돕는 것"임을 내세웠다. 실제로 이 도시가 동부 전선으로 가는 물자를 생산하는 곳이었으므로 정확한 분석이었으며, 소련 또한 동부에 위치한 독일의 도시들을 전략 폭격하는 것에 대해 요청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주로 폭격을 맞은 지역이 공장들이 위치한 주변부가 아니라 도심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도 틀린 것은 아닌게, 당시 전략 폭격은 공장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도 목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총력전이 무서운 거다. 일부에서는 계속 서진하고 있는 소련에게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연합군이 위력과시를 위해서 크게 폭격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럴만큼 엄청난 폭격이 이뤄졌으니(...)

2. 폭격의 진행 사항

2월 13일 최초 폭격은 미 육군 항공대가 실시했으며, 이 때는 이미 도심 근처의 철도 시설을 두 번이나 폭격한 뒤였다. 이 당시 미군의 폭격 목적은 또 다시 이 철도 시설을 폭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4일의 주간 날씨가 좋지 않자 대부분의 폭격 작전이 취소되고 영국군에게 턴이 넘어간다.

좋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영국 공군의 폭격은 이루어졌는데, 날씨 때문에 적어도 두 번은 때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3시간차를 두고 두 번의 폭격이 행해졌고 이 덕분에 도시에서 첫 번째 폭격을 맞은 피해를 복구하는 구조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 또다시 맞게 되어 피해가 가중되었다. 이외에도 주변의 공장 지대를 폭격하는 작전이 그 날 야간에 이루어져 독일 공군의 혼란을 일으키는 효과를 기대했다. 첫 번째 폭격시 주로 피격당한 곳은 오스트라게헤게 운동장이었는데, 이 곳은 구도심과 근접한 곳이었고, 이 구도심은 런던의 도심이 그랬듯이 나무 판자 건물이 많았던지라 엄청난 화재로 피해를 입게 된다. 폭탄 탑재량의 60%에 달했던 소이탄이 큰 피해를 준 것이다. 이들을 '쿠키' 홍차 한 잔과 쿠키의 여유나 '블록버스터'[1]로 불렸다. 폭격의 시작은 22:00시 밤중이었다.

이후 14일 아침, 미군의 8공군에서 주간 폭격을 위해 출발했다. 이들은 도시 이외에도 주변의 소도시들(주로 공업 지역)을 목표로 출발했다. 일단 도시를 폭격하는 그룹의 경우, 도심의 철도 시설을 폭격하기로 했으나, 날씨가 흐리면 도시는 놔두고 공업 지역을 폭격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만일, 둘 다 여의치 않으면 에라이 그냥 도심에 폭탄을 쏟아넣자로 되어 있었다. 미군의 폭격 또한 영국군과 비슷하게 총 폭격량의 40%가 소이탄이었다. 철도 시설에 대한 폭격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나, 공장 지역에 대한 폭격은 기상 악화로 도심에 대충 폭탄을 버리고 오게 된다. 이 당시 H2X레이더를 사용해 적절한 지상물을 찾기는 했으나, 걸음마 단계 기술이었으니만큼 정확도는 거의 무시할 정도였다. 이 당시,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호위 전투기들에게 도심 근처의 도로에 무차별 기총소사가 명령되기도 했다[2]. 다만, 독일측의 목격자들은 이런 공격은 없었다고 전한다.

15일에는 비로소 가장 주된 목적이었던 뵐렌(Böhlen) 합성유 공장을 폭격하려 했으나, 이 또한 구름 때문에 막혀 드레스덴을 공격한다!!!가 되어버렸다. 다만, 이 때도 구름이 짙게 끼어버려, 제대로 맞추지 못 하고 근교에 대충 떨구고 귀환했다. 그러니까 미군은 철도 시설 폭격한 거 빼면 아무데나 폭탄 던지고 돌아온 거 밖에 없다.

날짜 목표물 군세 항공기 수 고폭탄(톤) 소이탄(톤) 총 톤수
1944년 10월 7일 철도 미8공군 30 72.5 없음 72.5
1945년 1월 16일 철도 미8공군 133 279.8 41.6 321.4
1945년 2월 14일 도심 영국공군 772 1477.7 1181.6 2659.3
1945년 2월 14일 철도 미8공군 316 487.7 294.3 782.0
1945년 2월 15일 철도 미8공군 211 465.6 없음 465.6
1945년 3월 2일 철도 미8공군 406 940.3 140.5 1080.8
1945년 4월 17일 철도 미8공군 572 1526.4 164.5 1690.9
1945년 4월 17일 산업지역 미8공군 8 28.0 없음 28.0
드레스덴에 떨어진 폭탄 통계

즉, 폭탄을 떨군 양을 따지면 미군의 폭격만으로도 가공할 만한 위력이라 할 수 있으나 기상 문제로 제대로 맞지를 않았고, 드레스덴을 결정적으로 파괴시킨 건 영국 공군의 야간폭격때 떨어진 소이탄이었다. 대량의 소이탄 폭격으로 드레스덴 전체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하였으며 장소에 따라 고온에 따른 화염 폭풍까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방공호 등지에 대피했던 민간인들 중 상당수가 희생당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방공호 자체가 몇 개 있지도 않았고, 관리도 허술했다는 데에 있다. 이러면서 나치 독일이 홀로코스트시설은 철저하게 만들었다는 아이러니 이 때문에 제대로 방호가 될 리 없는 지하실에 숨어든 게 보통이었다. 이 지하실들은 건물마다 얇은 벽으로 막혀 있어 한 건물이 무너질 것 같으면 벽을 뚫고 다른 건물로 옮기는 방식이었는데, 이 덕분에 훗날 희생자들의 시체가 한 곳에 우르르 쌓여 있게 된 것이다.



3. 폭격의 결과

© Unknownwikidata:Q4233718 (cc-by-sa-3.0-de) from

"베 강피렌체"라던 고도(古都) 드레스덴은 그야말로 잿더미가 되었다. 드레스덴 시가지 중 6.5제곱킬로미터가 파괴되었으며 15만 채 이상의 집들이 파괴되었다.

인명 피해의 경우 꽤 논란이 많다. 독일의 공식 보고서인 "Tagesbefehl no. 47" ("지시의 날, TB47")에 따르면, 3월 22일 집계된 사망자 수는 알트마르크트에서 소각된 6,865명을 포함하여 총 20,204명이며, 전체 사망자 수는 약 25,000명으로 추정되었다. 다른 보고서에는 4월 3일 집계된 시체 수는 22,096명이라 기록되어있다. 시립 공동묘지에서는 21,271명의 희생자가 공습으로 시립묘지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 17,295구은 헤이데프리에드호프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3] 1966년동독치하에서 재건을 위한 공사 도중에 1,858구의 희생자가 한꺼번에 발견되기도 했다. 더 이상 시체가 발견되지 않을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통일 직전인 1989년에는 새로운 을 건설하기 위해 기초 공사를 하던 중 또다시 폭격으로 희생된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뒤늦게 발견된 10,000구의 시체를 포함해서 당국의 권한에 의해 제외됐던 희생자의 수를 합하면 모두 35,000명 정도 된다.

공식적으로는 3만 5~8천 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 실제 사망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일단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드레스덴으로 서류상의 거주지를 옮기지는 않았는데 드레스덴에 있었던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4], 건물이 붕괴되거나 고온으로 인해 시신 자체가 소멸되면서 사망자를 집계하는데 어려움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사망자의 수를 10만명 이상 잡기도 한다. 죽은 사람들에 의한 노동력 부족으로 매장과 화장을 할 인력의 부족으로 인해, 시체들은 한꺼번에 화염방사기로 화장되기도 했다. 다만, 당시 폭격 직후에 독일은 드레스덴에는 군수 산업 시설이 없었다.

4. 결론

폭격의 목표 지역 및 의도가 명확했던 다른 피해 도시와는 달리 드레스덴의 경우 군수시설 보다는 민간인 거주지가 더 피해를 많이 보았던지라 때로는 아서 해리스등 지휘 수뇌부의 감정적인 보복 행위라는 의견이 나올 정도로 매우 논란이 큰 작전이다. AP 통신이 2월 19일에 '연합군 공군 수뇌부가 독일의 인구밀집지역에 의도적으로 테러 폭격을 가하기로 했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그리고 이 폭격을 지휘한 아서 해리스는 지금도 까이고 있다. 사실 친독 성향이 아니더라도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운 사건이다.


5. 여담

도심 한가운데의 `성모성당(프라우엔키르헤)'은 폭격 마지막 날 무너져 내리면서 개발살이 났다. 종전 뒤 공산정부는 이 폐허를 허물고 주차장을 건설해 종교적인 상징을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대로 철회되었으며 기어이는 1989년 동독 붕괴의 신호탄이 된 시위가 이프치히에 이어 성모성당 앞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성당은 동독 치하에서 복구되지 않고 있다가 2005년 파괴 60년만에 잔해 하나하나까지 살리며 꼼꼼히 복구되었다.

이 드레스덴에는 놀랍게도 미군 포로들도 있었다. 그중의 한명이 나중에 살아남고, 귀국해 미국으로 돌아가 이 끔찍한 기억을 배경으로 소설을 쓰게 되니 바로 5도살장의 저자 커트 보네거트였다.

정말 뱀발로 텝스 시험 문제 중 저 드레스덴 폭격에 대해서 그것을 승인한 처칠에 대한 비인간성을 비판한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정확한 회차는 텝스 저작권 문제로 생략.
----
  • [1] 한 블럭을 날려버릴만한 위력이 되었으므로.
  • [2] 독일 공군의 제공권 상실을 보여주는 예다. 더 이상 위협적인 독일 공군의 요격이 없게 되자(특히 아르덴 대공세이후) 호위기들까지 지상공격에 나서게 된 것. 이런 명령은 드레스덴 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들에도 마찬가지였다.
  • [3] 집계는 알트마르크에서 화장한 재도 포함. 또한 이 집계는 다른 지역에서 매장된 희생자들도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이 수는 분명치 않다.
  • [4]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소련군을 피해 연합군에 항복한 지역으로 가려는 중이었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2-05 20:38:06
Processing time 0.1695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