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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 형제

last modified: 2015-09-05 21:41:48 by Contributors

(ɔ) from


Wright Brothers

(좌)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년 4월 16일 ~ 1912년 5월 30일)[1]
(우)오빌 라이트(Orville Wright, 1871년 8월 19일 ~ 1948년 1월 30일)

현실에 나타난 이카로스의 환생
중력에 묶인 인류에게 창공이라는 드넓은 무대를 선물해준 선구자들
비행의 아버지
항덕들의 조상이자 성인

1903년 모든 비행기들의 조상인 세계 최초의 력 비행기를 제작하여 성공시킨 미국인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 형제를 일컫는 말로, 계의 개척자로 통하기도 한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의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매우 거대하며,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타는 비행기는 지금과는 상당히 다를지도 모른다.

물론 라이트 형제가 없었어도 그 시절에 비행기를 연구하던 사람이 한 둘이 아니고, 몇 년뒤에 1906년 파리에서 "출발할 때 동력장치가 필요 없는 비행기"를 최초로 날린 브라질 태생의 발명가 아우베르투 산투스 두몽(Alberto Santos Dumont, 1873~1932)[2][3] 같은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비행기 그 자체는 발명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롬부스의 달걀처럼, 최초로 실제 해내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Contents

1. 가족사
2. 동력비행기 개발을 위한 노력
3. 알려지지 않은 수난
4. 미국을 떠나서
5. 그 뒤에
6. 그 밖에
7. 그들의 발자취 및 관련 항목

1. 가족사

아버지 밀턴 라이트(1827~1917)는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수전 캐서린 코너(1831~1889). 가계는 부계가 영국계 및 네덜란드계, 모계가 독일계 및 스위스계이다.

대체로 라이트 형제라고 하면 윌버와 오빌만 잘 알려져 있지만, 실은 로런스 필립 라이트(1861~1920), 토머스 라이트(1865~1938), 누이동생인 막내 캐서린 라이트(1874~1929)가 또 있으며 이 세 사람도 이들을 도왔음에도 실질적인 비행기 제조에 나선 이 두 사람만 알려졌다.

한 때 다섯 남매는 지역신문사를 경영하면서 호황을 누리기도 했으나 메이저 대기업 신문사의 진출로 파산하여 자전거 가게를 하면서 겨우 벌어먹곤 했다. 그 밖에도 기계완구가게도 같이 하면서 작은 글라이더 놀이를 즐기면서 이걸 크게 만들면 어떨까하는 호기심을 가졌고 독일의 오토 릴리엔탈(Otto Lilienthal, 1848~1896)이 글라이더로 하늘을 날았다는 소식에 자신들도 연구하면 할 수 있다고 믿고 독자적으로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초기 항덕. 그러던 도중, 릴리엔탈이 글라이더 시험비행중 돌풍에 의해 추락사한 것을 알고 글라이더 말고 다른 것은 안될까하여 비행기 연구를 시작했다.

2. 동력비행기 개발을 위한 노력

이들은 독자적인 연구만으로는 도저히 어렵다고 판단하여 미국 스미소니언 과학협회를 찾아가 전문적인 과학자들에게 여러 정보를 듣기도 하며 열심히 노력한다. 결국 두 형제가 주로 비행기 연구 및 개발, 시험비행에 나서기로 하고 로런스와 토머스가 자전거 가게와 기계완구 가게를 맡고 캐서린은 초등학교 선생으로 벌어먹으면서 연구자금을 도와준다.

수천년간 사람들이 바래온 꿈이 이뤄지는 순간. 1903년 12월 17일, 플라이어(Flyer) 1호 하늘을 날다.

여러 연구와 같이 바람의 크기 및 일정 속도의 바람이 부는 곳을 찾아헤맨 끝에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있던 인구 100명도 안되는 작은 마을 키티호크로 찾아간다. 그 곳을 연구거점으로 삼아 3년에 걸친 온갖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1903년 12월 17일 프랑스계 글라이더 조종사이자 비행기 연구가인 옥타브 샤뉘트(Octave Chanute, 1832~1910)를 포함한 5명이 보는 자리에서 라이트 형제를 태운 최초의 동력 비행기 플라이어 1호는 하늘로 날아올랐고 약 12초 동안의 짧은 비행에 성공했다. 바람이나 수소같은 기체(氣體)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난 인류 최초의 비행 성공기록이었다.

마침내 인류는 숙원과도 같았던 스스로 하늘을 난다는 꿈을 이루어 냈고 그 이후 모든게 바뀌었다.

3. 알려지지 않은 수난

보통 위인전에 잘 다루지 않은 게 이들의 고생담이다. 기술을 탐내는 도시의 수많은 인간 도적 무리들 동력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미국 과학계는 축하보다는 분노와 시샘을 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중 하나가 바로 라이트 형제가 찾아간 스미소니언 과학협회 간부인 새뮤얼 랭글리(Samuel Langley, 1834~1906) 박사였다.

글라이더 비행에 성공한 랭글리는 이미 1897년부터 동력 비행기 개발에 힘을 기울여왔는데 듣보잡인 아마추어 형제들이 자신을 제쳐두고 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하필이면 1899년 라이트 형제는 그를 찾아와서 동력 비행기에 대한 정보를 들었기에 랭글리 박사는 자신의 영광을 듣보잡 두 놈이 훔쳐갔다고 이를 갈았다. 게다가 1903년 12월 8일 겨우 아흐레 전, 랭글리 박사는 동력 비행기 시험비행에 나섰다가 추락했기에 자신이 실패하고 라이트 형제가 성공했다는 걸 믿지 못했다.

그리하여 1904년 7월. 랭글리 대 라이트 형제의 대결이 벌어진다. 둘이 동력비행기를 타고 2만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누가 잘 날아가나 시범을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결과는 라이트 형제 완승.

랭글리의 비행기는 힘없이 강물에 추락했지만, 라이트 형제가 탄 비행기는 잘만 날아갔다. 그것도 15분씩이나 400미터 위를 쌩쌩 날아갔기에 미국 언론은 이번이야말로 "라이트 형제 하늘을 날다!"라고 확인 보도를 해버렸다. 결국 랭글리는 패배에 충격을 먹고 좌절하여 모든 활동을 멈추고 폐인처럼 지내다가 오래가지 못해 죽게 된다.

하지만 랭글리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스미소니언 과학협회는 라이트 형제가 스승의 아이디어 및 여러가지를 도용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라이트 형제는 1년이 넘는 온갖 조사와 수사를 받아야 했다. 물론 결과는 무죄. 어떤 증거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똑같다면 왜 랭글리 비행기는 추락하고 저들이 만든 비행기는 잘 나는데? 라는 결과가 이를 입증했던 것.

이렇게 무죄가 입증되고 이들은 계속하여 여러 단점을 고쳐나가면서 개량된 비행기를 만든다. 1905년에 이들이 만들어낸 '플라이어 Ⅲ'은 선회·방향전환·원운동·8자비행이 가능했고, 30분 이상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럼에도 스미소니언 협회는 라이트 형제가 도용했다는 언플을 계속했고 이런 여파 때문인지 이들이 만든 비행기는 일절 팔리지 않았다. 하다못해 이들은 미군 측에 시험비행도 여러번 했지만 미군 측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이런 주제에 잘도 최강의 공군을 보유하다니, 되려 유럽이나 아르헨티나(당시에는 세계적인 경제부국이었다.), 심지어 일본에서까지 관심을 보이며 생산공장을 자국 안에 만들자고 온갖 조건을 제시하며 유혹했다.

그런 가운데, 라이트 형제를 꾸준히 지지하던 옥타브 샤뉘트가 조국이었던 프랑스에 열심히 이들을 알렸고 동력 비행기에 대한 걸 홍보한 끝에 결국 1908년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동력 비행기 공장을 만들게 되었고[4] 미군 측은 제시하는 시험비행을 성공시키면 구입하겠다는 조건을 제시하여 시험비행을 성공시켰지만 그럼에도 여러 조건이 안 맞는다면서 거부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생산에 주력하지만 결국 공짜는 없다는 듯이 제조기술이 유출되어버린다. 이 일로 프랑스는 독자적인 비행기 제작에 들어가고 더더욱 새로운 기술 등에 여러 모로 노력하면서 라이트 형제와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다. 게다가 이때 앞서 말한 두몽과의 최초 발명 여부가 논쟁거리가 되었으며,[5] 10여년 간 스승이자 친구였던 옥타브 샤뉘트가 기술 유출에 연루된 게 드러나서 라이트 형제와 샤뉘트는 엄청 다툰 후 결국 갈라섰다.[6]

이런 와중에 미국에선 글렌 커티스(Glenn Curtiss, 1877~1930)라는 이가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와 비슷한 걸로 특허를 내고 공장을 차렸고 되려 라이트 형제가 자신의 기술을 도용했다고 소송드립을 치며 라이트 형제를 괴롭혔다. 어처구니없게도 조국인 미국은 커티스의 주장에 동조하여 원조인 라이트 형제는 온갖 고생을 해야했으며, 기나긴 소송이 시작되었다.

소송을 맡았던 것은 형인 윌버였는데 잦은 여행과 재판으로 인해 건강이 쇠약해진 상태였다. 1912년 보스턴으로 사업차 여행을 다녀온 후에, 티푸스 열 진단을 받았고, 몇 주 동안 의식을 잃었다 회복했다를 반복하다가 끝내 45세 한창 나이로 윌버는 사망했다.

1914년에 미국 상급 법원에서는 라이트 형제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이번에는 세간에서 라이트 형제가 탐욕을 부린다는 식으로 비난을 퍼부게 된다.

4. 미국을 떠나서

조국에서의 푸대접과 윌버 형의 죽음으로 슬픔과 절망에 빠진 오빌은 다른 형인 로런스와 같이 미국을 떠난다. 슬픔을 떨치고자 그는 비행기 생산에 전력을 다했고 더 나은 발전을 위하여 연구했으며 프랑스 및 독일, 영국, 네덜란드와 멀리 아르헨티나를 오고가면서 비행기 홍보를 했다.

오빌은 1918년도에 1911년 모델B형을 마지막으로 조종하고는 비행기를 조종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여러 항공 위원회에서 우대받으며 위원으로 활동을 했었는데, 그 중에는 NASA의 전신인 NACA도 있었으며, 28년간 몸을 담았다.

1928년 오랫만에 미국으로 돌아온 오빌은 자신들을 괴롭혔던 커티스가 사업실패로 부도에 빠지자 그의 생산공장을 돈으로 사면서 복수에 성공했다. 그래서 이름이 커티스-라이트(마음같아서는 라이트-커티스로 고치고 싶겠지만 그동안 커티스 사로 워낙 알려졌기에 이게 더 낫다고 판단했다고 한다.)가 된 것이다. 이들을 고소하고 사기꾼으로 몰던 커티스는 자신이 역관광당하고 비참하게 살다가 오래못가 1930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비행기 공장의 성공 및 온갖 로열티를 인정받아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은 없었으나 오빌은 살아 생전에 미국이 외면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심지어 오빌은 1933년 키티호크에 세계 최초 동력비행 기념비를 세우고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도 주로 유럽 측 자금으로 지을 정도였으며 미국에선 무시했다. 세월이 지나 1943년에 비행 최초 4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를 미국에서 조촐하게 지냈다.(2차대전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같은 나라는 정신이 없었기 때문) 이젠 로런스와 토머스, 캐서린[7] 다른 형제들도 모두 죽었기에 홀로 자리에 참여한 오빌은 인터뷰로 한 말로 여전히 미국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 벨기에... 유럽 각지에서 나(오빌)와 세상에 없는 윌버 형에게 훈장과 표창장, 명예 시민, 명예 교수, 명예 학자로 인정했지만, 조국 미국은 그래본 적이 없다."

참고로 세계 최초 동력 비행기인 플라이어 1은 바로 영국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었는데 오빌이 스스로 영국에 임대 기증한 것이었다. 단, 조국인 미국에서 원한다면 언제라도 돌려준다는 조건을 달아서 언젠가 미국이 자신들을 알아줄 것이란 전망을 했다.

1944년 록히드 항공사가 만든 두번째 비행기가 캘리포니아 주의 버뱅크(Burbank)에서 워싱턴까지의 거리를 6시간 57분으로 주파했다. 이 비행기를 조종한 사람 중 한 명이 하워드 휴즈였었다. 돌아오는 도중 이 비행기는 라이트 비행장에 멈춰섰고, 오빌은 생애 마지막 비행을 했다. 잠깐이나마 조종간도 잡았는데, '비행기의 날개 길이가 내가 처음 날았던 때보다 길어졌군.'이라는 말을 남겼다.

1948년 1월 30일, 태어난 고향인 오하이오 주 데이턴 시에서 오빌도 눈을 감았다. 향년 77세. 첫 비행을 한지 만으로 44년 만이었다. 며칠전부터 혼수상태이던 그의 유언은

"바람은 높아......이제 날 수 있겠어."

마치 옛날 40여년 전을 회상하듯, 그 비행기를 띄울때 모든 걸 잊고 비행기 연구에 전념하고 드디어 하늘을 날때 벅차던 그 시절을 되새기며 눈을 감은 모양.

마차가 다니던 시대에 태어나 항공 시대를 열었던 오빌은 초음속 시대의[8] 태동기를 직접 목격한 산 증인이었다. 윌버와 오빌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아 [9] 자식은 없었다.

5. 그 뒤에

오빌이 죽고 10년도 안돼 미국에선 라이트 형제붐이 일어난다. 2차대전 승리와 대영제국으로 알아주던 영국의 약화, 영국을 대신한 미국의 강세 속에 위대한 미국붐이 일어나면서 미국이 자랑할 이야기들이 떠오르며 미국은 뒤늦게 라이트 형제를 찾아나선다.

라이트 형제의 라이트 플라이트는 조국의 푸대접과 각종 소송에 지치고 열받은 오빌이 영국으로 보내 런던 박물관의 전시물로 만들어버린다. 뒤늦게 미국에서는 돌려달라는 요구를 하지만 런던 박물관은 들어주지 않았고, 특히 2차 세계대전때 독일의 폭격으로 파손될지 모른다고 돌려달라는 요구에는 박물관에서 꺼내서 인근지역으로 대피시키는 것으로 대응. 그러다가 오빌이 사망한 해인 1948년 11월에나 미국으로 돌려보내진다.

6. 그 밖에

라이트 형제가 개발한 최초의 동력비행기인 '플라이어 1호'는 지금의 뒤쪽에 수평꼬리날개가 달린 일반적인 비행기와 달리 앞쪽에 카나드가 달린 비행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안전을 위해서였다. 그들이 비행하기 몇 해 전에 글라이더 및 비행기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오토 릴리엔탈이 자신의 글라이더를 타고 비행하던 중 추락하여 사망하였는데, 일단은 워낙 높이서 추락한 것도 문제지만[10] 오토 릴리엔탈의 글라이더는 앞쪽에 아무런 구조물이 없는 형태였기 때문에 추락하면 조종사가 직접 땅에 부딪히는 구조인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라이트 형제는 앞쪽에 승강타 역할을 하는 카나드를 달아서 설사 추락해도 앞쪽 구조물이 먼저 부서져 충격을 흡수하는 것을 노렸다. 또 한편으로는 조종사가 직접 승강타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으므로 아직 신뢰성이 부족했던 당시의 항공기를 조종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라이트 형제가 개발한 항공기는 지금의 항공기들 처럼 카나드 대신 수평꼬리날개가 있는 형태로 바뀌었다.

플라이어1호의 조종방식은 독특하였다. 지금의 항공기는 조종간과 페달로 움직이며 특히 조종간은 전후좌우로 움직였다. 그러나 플라이어1호는 조종간이 전후로만 움직인다. 조종간을 좌우로 움직이는 것에 해당하는 조작은 엎드린채로 타는 조종사가 직접 허리를 좌/우로 움직여야 했다. 이후 개발한 항공기들은 좀 더 편하게 앉아서 타는 형태로 바뀌었다.

조종사가 허리를 좌우로 움직이면 그에 맞춰 날개 왼쪽, 혹은 오른쪽이 비틀리면서 그쪽으로 기체가 기울어졌다. 이후에는 에일러론이라 하여 아예 날개 끝 부분이 위아래로 꺾이도록 경첩을 달았는데, 사실 이 부분이 바로 커티스와 특허 분쟁에 휘말렸던 부분이다.

라이트 형제는 자신들의 항공기에 붙어 있는 승강타 역할을 하는 카나드를 러더(rudder)라고 불렀는데, 이는 현재 항공기에서 방향타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라이트 형제의 플라이어1호는 사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매우 불안정한 항공기다. 조종사가 잠시라도 조종을 멈추면 항공기는 점차 방향이 틀어지거나 기수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는 잘못된 무게중심과 날개의 위치관계 때문. 그래서 조종이 매우 어려운 편이었음에도 라이트 형제가 자신들의 비행기를 제대로 날릴 수 있엇던 이유는 실제 동력 비행에 앞서 유사한 형태의 글라이더로 여러번 비행연습을 하였기 때문이다.

라이트 형제는 비행에 앞서 모형을 가지고 실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이들은 모형을 가지고 실험한 결과 종전의 학자들이 계산/실험한 내용이 틀렸다고 판단하였다. 그런데 사실은 라이트 형제의 실험결과가 틀렸다. 당시만 해도 아직 모형으로 실험할 때와, 실제 항공기에서 발생하는 차이를 정확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11] 덕분에 이들은 날개를 최대한 얇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자니 날개 구조강도가 약해질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단엽기 보다는 복엽기 형태의 항공기를 만들게 되었다.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한 사망자도 공교롭게 이들 형제가 냈다. 1909년 오빌 라이트가 조종하던 비행기가 추락하여 오빌은 늑골 4개와 왼쪽 다리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고, 공식 관측자로서 탑승하고 있던 육군의 토머스 셀프릿지 중위는 두개골 골절상을 입고 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부상이 너무 심해 그날 밤 사망했다.

쌍라이트 형제와는 관련없다

7. 그들의 발자취 및 관련 항목

  • B-29 - 1937년 5월에 처음으로 나온 라이트항공의 R-3350 듀플렉스-사이클론(Duplex-Cyclone) 엔진을 4기 장착하였다[12]. 참고로 그 엔진은 더글라스 A-1 스카이레이더, 록히드 컨스텔레이션, 록히드 넵튠 같은 항공기에도 사용되었으며, 특히 A-1의 경우 1985년까지 운용되었다.

  • 노스 아메리칸 항공(North American Aviation) - 1948년에 커티스-라이트의 항공사업부를 인수하였다. 이후 노스 아메리칸 항공은 록웰 인터내셔널로 재편되고, 그리고 록웰 인터내셔널은 분할매각되어 항공부문은 보잉으로 승계된다.

  • 록히드 마틴 - 오빌 라이트가 매각한 라이트사와 글렌 마틴(Glenn Martin)의 회사가 1916년에 합병한 이후 1917년에 해산했다. 이후 글렌 마틴의 회사는 마틴 마리에타로 재편되고, 이후 1995년에 록히드 마틴으로 합병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보잉 - 노스 아메리칸 항공, 록웰 인터내셔널을 거쳐 결과적으로 라이트 형제의 항공기사업을 이어받은 회사.

  • 커티스-라이트(Curtiss-Wright) - 오빌 라이트가 세운 회사를 전신으로 하는 항공, 원자력발전, 금속 방면의 대기업으로, 수차례의 인수합병을 거쳐 1929년 이래 현재의 형태로 존속해 있다. 인수합병의 역사 자체가 라이트 형제의 수난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 프랫&휘트니 - 1925년 당시 라이트항공의 대표이사에 있었던 프레더릭 렌트슐러(Frederick Rentschuler)가 사임하여 코네티컷주 이스트 하트포드시에서 세운 회사로 세계 3대 항공기 엔진 메이커이다.

  • CVL-49/CC-2 라이트 경항공모함/지휘함 - 사이판급 경항공모함의 2번함으로 1945년 9월 1일 취역해 실전엔 참여하지 못했다. 배수량 14,500톤급으로 에섹스급 항공모함보다는 소형이었으나 최고속도 33노트를 발휘할 수 있어 전투함대와 공동작전이 가능한, 에섹스급과 호위항공모함 사이의 능력을 가진 경항공모함이었다. 1962년에는 지휘함으로 개조돼 CC-2 라이트로 재지정됐으며 1970년까지 활동했다.

  • 키티호크급 항공모함 - 네임쉽 키티호크는 라이트 형제가 첫 동력비행실험을 성공했던 키티호크에서 따 왔다.


  • 아폴로 14호 - 사령선 모듈 이름을 키티호크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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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키도 커서 192cm에 달했다.
  • [2] 다만 생에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냈으며, 항공기 개발도 프랑스에서 시작
  • [3] 두몽은 그 외에도 손목시계를 발명하고 륙양용기비행선을 연구한 뛰어난 발명가였다. 하지만 그는 늘상 우울증에 시달렸고, 기껏 브라질로 돌아왔더니 브라질이 내전으로 피폐해졌으며, 심지어 비행기가 내전에서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결국 1932년 상파울루에서 자살로 삶을 마감하였다. 하여간, 아래에서 설명하듯이 최초의 비행기 공장도 프랑스에 들어섰고, 두몽 같은 선각자들이 있었기에 프랑스는 자신들도 항공산업의 선구자로서 자부심이 매우 높다.하지만 그 공장에서 만든게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라는게 함정
  • [4] Voisin 공장. 다만 이후 1918년에 자동차 공장으로 전환하며, Avions Voisin 라는 이름으로 명품 자동차 회사 취급을 받았으나 2차 세계대전 몇 년 뒤에 문을 닫는다.
  • [5] 유럽에서는 1903년의 첫 비행 등이 인정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 [6] 옥타브 샤뉘트와의 관계는 이미 라이트 형제의 성공에 대해 얼마만큼 그가 기여했는지를 두고 사이가 삐그덕거리던 상태였는데, 재판 후 옥타브가 라이트 형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완전히 끝장났다. 둘은 샤뉘트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않을 정도였다.
  • [7] 오빌은 캐서린과 사이가 나빠진 상태였다. 캐서린은 1926년에 결혼을 했는데, 오빌은 이에 크게 분노하고는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얘기조차도 하지 않으려 했다. 토머스가 고집을 부려 캐서린이 죽기 전에 겨우 만났다.
  • [8] 오빌이 사망하기 3개월 전인 1947년 10월 17일 척 예거벨 X-1 실험기를 타고 음속 장벽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 [9] 윌버는 '비행기와 아내 모두에게 쓸 시간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10] 글라이더가 제대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려면 절벽이 필요했고, 그래서 릴리엔탈은 절벽에서 글라이더를 타고 뛰어 내렸다가 곧 돌풍을 만났다.
  • [11] 공기의 끈적함, 즉 점성이란 특성 탓이다. 이것은 크기가 작은 물체에서는 그 영향이 더 크게 나타난다. 현재는 레이널즈 수(Reynolds Number)라는 정형화된 수치를 통해 이 점성효과를 보정한다.
  • [12] 1929년 이후에는 커티스-라이트의 한 사업부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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