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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하르트 트리스탄 오이겐 하이드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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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개요
2. 개인사
3. 트라비아
4. 창작물에서
5. 진급 내역


1. 개요

라인하르트 트리스탄 오이겐 하이드리히(Reinhard Tristan Eugen Heydrich, 1904~1942).

유태인 학살(홀로코스트)로 악명높은 나치 독일의 제국보안성(Reichssicherheitshauptamt 약칭 RHSA) 장관. 그 유명한 게슈타포의 악명을 만든 장본인.

2. 개인사

1904년 3월 7일 독일 동부의 할레안데어잘레(Halle an der Saal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곡가이자 오페라 가수(테너)인 리하르트 브루노 하이드리히(Richard Bruno Heydrich), 어머니는 작센 왕국의 드레스덴의 궁정에서 궁정 고문관을 하고 있던 음악 연구자 게오르크 오이겐 크란츠 교수(Georg Eugen Krantz)의 딸 엘리자베트 아나 마리아 아말리아 크란츠(Elisabeth Anna Maria Amalia Krantz)다.

하이드리히는 학창시절 때부터 유대인이라면서 왕따를 당해왔는데,[1] 아버지가 유대인들과 절친했고 집으로 랍비들까지 데려와 사이좋게 이야기도 나누고 술자리를 가진 점때문에 이런 소문은 신빙성을 얻었다고 한다. 물론 본인이나 아버지는 극구 부인했고 사업이나 여러 인맥 때문에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밝혔음에도[2] 그 소문은 하이드리히가 죽을때까지 끈질기게 거론됐다. 친위대 소속 가계학자의 조사로는 유대인이 아니라고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인리히 힘러가 하이드리히를 통제하는 수단으로서 소문의 유포를 막지 않았다고 한다.[3]

1922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중위까지 진급했으나 1931년에 모종의 이유로 쫒겨났다. 일설에 의하면 한 처녀를 강간했기 때문이라고 하나, 하이드리히가 훗날 이 사건을 은폐했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는데, 일부에서는 약혼녀가 있음에도 다른 처녀와 내연관계를 가진 것이 발각되어 "여성의 명예와 장교의 품위를 훼손했다."는 명목으로 퇴역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의 기준으로는 퇴역처분이 내려지지 않을 사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처녀의 아버지가 당시 해군총사령관이던 에리히 레더 상급대장과 막역한 친구였기 때문에 강제로 퇴역되었다 한다[4].

당시 하이드리히의 직속상관은 독일 국방군 정보부서인 아프베어(Abwehr)를 이끌던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 소장이었다. 훗날 대장까지 진급한 아프베어의 지휘관 카나리스 제독과 나치당 소속 SD(보안국)를 이끌던 하이드리히는 정보기관 특유의 충성경쟁 때문에 라이벌이 된다. 나치당에 대한 충성심이 의심스럽고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5] 카나리스가 히틀러 집권 후에도 계속 아프베어를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카나리스가 위에도 언급된 하이드리히의 석연찮은 전역에 관련된 진상을 아는 몇 안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는 유대인 가계라는 것을 카나리스가 알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국방군-나치당 할 것 없이 모든 정보부서를 자기 휘하에 두고싶어했던 하이드리히가 그래서 카나리스에게는 꼼짝 못했다고 한다. 힘러와의 암투에서 보듯이 하이드리히는 상관이라고 공손해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신빙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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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약혼녀 리나 폰 오스텐은 그녀의 약혼자에게 SS에 입대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제안을 했다.[6] 당시 SS는 히틀러의 친위 경호대로써 약 1만명의 대원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1931년, 27세의 하이드리히는 나치스 당에 가입하고 SS의 대원이 되었다. 당시 SS의 첩보 부서를 창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SS장관 하인리히 힘러에게 발탁되어, 친위대에 입대한다[7]. 그후 쾌속 진급해 SS 대위로서 보안방첩국(Sicherheitsdienst, SD)의 초대 부장이 된다. 하이드리히의 보안국은 나치가 벌인 숙청과 정치공작을 진두지휘하며 은폐공작을 벌였다. 나치 당내 온건파(좌파)와 돌격대를 싸잡아 숙청한 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나 폴란드 침공을 위한 증거조작(통조림:Konserve 작전), 정의 밤(Kristallnacht) 등이 대표적인 하이드리히의 작품이다. 전쟁전 소련의 손발을 자르는 삽질이었던 대숙청국방군 방첩부(Abwehr)와 SD가 보기드문 공동공작으로 촉발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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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냉철한 성격에 무자비한 일처리 방식, 타고난 근면성과 예리한 정치수완에 해군에 있을때부터 익힌 정보능력(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해 해군시절 정보부에 적을 두기도 했다.) 등 출중한 능력으로 히틀러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권력서열로는 뒤쳐졌으나 정보/경찰권을 장악한만큼, 나치 당내에서조차 히틀러 유고시 권력을 장악할 제1순위라는 예측이 떠돌 정도였다. 이쯤 되니 하이드리히를 처음 발탁한 힘러 또한 하이드리히를 경계하여 죽을 때까지 냉각관계를 유지했다. 하이드리히도 힘러를 무능하다고 경멸하여 힘러의 의견에 반대되는 보고서를 제출해 물먹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고 이에 힘러는 쪼잔하게 하이드리히의 째진 눈을 트집잡아 "몽골리안"이라 욕하곤 했다.풉. 누가 누구보고 몽골리안이란거야? 하이드리히가 키가 작았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하이드리히의 키는 191cm으로 오히려 매우 큰 편이었으며, 밑의 사진에서도 그의 키가 제일 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오히려 전형적인 아시아인에 가까운 외모를 지녔던 사람은 힘러였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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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줄의 세 명 중 가운데가 하이드리히.

1936년에 게슈타포는 사법경찰(Kriminalpolizei)까지 흡수하여 공안경찰(SiPo)으로 거대해졌다. 하이드리히는 상급대장 직위의 게슈타포의 초대 국장이 되었으며, 1941년엔 37살의 나이에 노이라트의 뒤를 이어 체코 총독[9]이 되었다. 잔인한 철권통치를 펼쳐 저항조직을 분쇄하고 체코인들의 저항을 찍어누른다. 이때 얻은 별명이 '프라하의 학살자' 혹은 '교수인 하이드리히'다. 헌데 강경책만 쓴 것이 아니라 체코인 노동자들에게 배급량을 대폭 늘려주거나, 체코인 대표단을 정기적으로 접견하거나, 휴양시설을 개방하는 등등의 온건책도 병행하여 체코 지역의 민심이 '안정'되어가는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야말로 '채찍과 당근'의 교과서적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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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나치스 경력의 정점에서 인생의 아이러니를 맞이한다. 독일의 체코 지배를 정착시킨 원흉으로써 1942년 5월 27일, 체코 망명정부와 영국군 SOE가 공모한 암살계획 '유인원 작전'(Operation Anthropoid)의 목표가 된 것이다.[10] 다만 하이드리히는 치명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서 사건 직후 공작원들에게 총질을 할 정도로 멀쩡했으나, 체코인 의사들을 믿지 못해 치료가 지체되었고, 뒤늦게 도착한 독일인 의사들도 시간을 낭비하다가 결국 2차감염에 의한 합병증[11]으로 6월 4일 사망했다.[12]

3. 트라비아

하이드리히의 업적 중 하나는 별볼일없는 부내 조직에 불과했던 보안국을 군 방첩부를 본떠 독일 최대의 정보기관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보안부장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하이드리히는 1934년 게슈타포와 보안국 양쪽을 이끌면서 악명높은 비밀경찰의 수장으로서 활약한다. 게슈타포를 창설한 것은 괴링이지만, 게슈타포의 악명을 만들어낸 인물은 사실상 하이드리히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SD는 조직적으로는 매우 정비되어 있었으나 자신들의 수장의 암살계획을 눈치채지 못하는 등, 실제 정보 수집 능력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였다.

빌헬름 카나리스는 하이드리히 암살 계획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방조한다. 하이드리히가 카나리스와 영국과의 관계를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음을 알고있었기 때문이었다. SD는 이후 아프베어와 권력다툼을 지속하였으며 결국 방첩부 수장이던 카나리스 제독이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자 방첩부를 흡수시키면서 제국의 최고 정보부서로 등극한다.[13]

하이드리히가 유명한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하이드리히가 1942년 반제 회의에서 총통의 지시를 받아 유태인 최종해결계획(홀로코스트)을 수립, 추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러가지 면에서 나치 독일의 엄친아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바이올린 연주에 능했다. 또한 만능 스포츠맨으로 수영, 스키, 승마는 선수급이었고 특히 펜싱 실력은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때 독일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될 정도였다. 공군 예비역으로 JG-1에 소속되어 bf109E-3, bf109E-4형을 몰고 폴란드 전선에서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동부전선에서 소련 파일럿에 의해 격추된 후로 히틀러가 하마터면 소중한 인재를 잃을 뻔했다고 버럭해서(…) 비행금지명령이 떨어졌다고 한다.

체코의 총독으로 있을 당시에는 자신의 지배력을 과시하기 위해 경호차량 없이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오픈카로 종종 다녔다고 한다. 이는 암살이후 히틀러가 사석에서 그가 방탄설비를 갖추지 않은 오픈카를 타고 이동하다가 암살당한것을 두고, 멍청한 짓이라고 놀리는 등 나치당 최상층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히틀러는 이후 점령지역의 고위관료들에 대한 경비수준을 상향시킨다.

중국쪽 자료에 따르면 하이드리히는 대단한 나르시스트로, 히틀러없는 독일은 존재해도 자신이 없는 독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얼마후에 펜싱클럽의 친구와 이야기하면서 "그(히틀러)는 독일에게 해가 되는 존재"라고 험담하였다고 한다. 하이드리히의 지인들은 만약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1944년의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하거나 아니면 직접 히틀러 암살계획을 작성하고 실행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그리고 피아노 갈고리에 매달려 교수형 받았겠지

사실 이런 풍문 수준의 자료가 아닌 서방쪽 자료에서도 뚱뚱보, 난쟁이, 샌님등 코미디 무대를 방불케하던 추물투성이인 나치 당내에서, 전형적인 게르만인의 외모를 하고 능력도 있었기에 히틀러를 제외한 나치 최고간부들을 꽤나 깔보았다는 자료가 남아있다. 지독히 의심이 많고 까다로운 자기중심적 성격으로, 하이드리히의 아내조차 친구를 사귀는걸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증언한다. 동생 지크프리트 하이드리히[14]는 형이 자행한 일들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몰랐으나, 암살 후 그 행적을 알게되자 충격을 받고 괴로워하다 유태인 탈출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하지만 게슈타포가 자기를 조사하고 있단 풍문이 돌자 권총자살하고 만다.

당연히 부하들에게도 냉혹한 상사로 하이드리히의 암살을 도리어 기뻐한 부하들도 적지 않았다. 히틀러에게만은 충성했지만, 괴벨스같은 맹목적 충성이 아니라 퍽 타산적인 충성이었다고 한다.

나치 독일은 하이드리히가 죽자 하이드리히가 죽은 체코의 리디체(Lidice)라는 마을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16세 이상 남자 196명을 모두 처형한뒤에, 여자와 아이들은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그렇게 수용소로 끌려간 105명의 아이 중 88명이 죽고 17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학살 사실을 전세계에 공표했다.(…) 위키피디아 링크 또한 레자키에서는 SOE의 라디오장비가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50명의 마을주민이 학살되고, 마찬가지로 마을전체가 파괴하였다. 암살이후, 여름까지 지속된 독일의 보복행위로 1,500명가량의 민족주의자들, 전직장교., 지식인, 공산주의자등 저항조직원들이 살해당핬고, 3천명의 체코 유대인들이 테레지엔슈타트의 절멸수용소에 수감시키는 한편. 베를린에서는 정의 밤때처럼, "분노한 독일인들의 자연스러운 봉기"로 150명가량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다. 이때문에 연합군의 첩보작전에 큰 차질이 생겼다. 실제로 본래 에드발트 베네스(Edvard Beneš), 체코 망명정부 대통령은 하이드리히 이후에도 나치점령정부에서 교육및 국민계몽 장관을 맡고 있는 전직 체코군 장교 엠마누엘 모라벡(Emanuel Moravec)과 하이드리히의 후임자, 칼 헤르만 프랑크(Karl Hermann Frank)를 암살할 생각이었지만, 하이드리히 암살로 촉발된 독일의 보복으로 인해, 더이상의 암살은 감히 기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 첩보부는 방침을 암살에서 납치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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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리히 사후 국가보안본부장에는 힘러에 충직한 른스트 칼텐브루너가 임명되었고, 1943년 1월 말에 정식 취임했다.

4. 창작물에서

나치의 승리를 다루는 여러 대체역사소설에서 히틀러의 뒤를 이을 후계자, 또는 아예 2대 총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당신들의 조국에서 하이드리히는 괴링, 힘러 등 자기 윗자리의 거물들을 소련 잔당의 테러로 위장하여 암살해버리고 총통의 후계자로 공인받고있다. 겁스 무한세계에서는 나치가 승리한 평행계[15]라이히-5[16], 라이히-2에서 2대 총통으로 등극한다고 언급한다. 해리 터틀도브의 철 심장의 사나이에서는 멸망한 독일에서 베오울프를 이끌고 연합군에 대한 테러 공격을 감행하여[17] 최종적으로는 연합군의 독일 철수를[18] 실행시킨다.


5. 진급 내역

• 1922. 4. 1 : 해군 사관 후보생(Fähnrich Zur See)
• 1924. 4. 1 : 준위(Oberfähnrich Zur See)
• 1926. 7. 1 : 소위(Leutnant Zur See)
• 1928. 7. 1 : 중위(Oberleutnant zur See)
• 1931. 7.14 : SS 이병(Mann)
• 1931. 8.10 : SS 소위(Sturmführer)
• 1931.12. 1 : SS 대위(Sturmhauptführer)
• 1931.12.25 : SS 소령(Sturmbannführer)
• 1932. 7.29 : SS 대령(Standartenführer)
• 1933. 3.21 : SS 준장(Oberführer)
• 1933.11. 9 : SS 소장(Brigadeführer)
• 1934. 6.30 : SS 중장(Gruppenführer)
• 1941. 9.27 : SS 대장(Obergruppenfüh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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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내성적인 성격과 톤이 높았던 목소리도 한 몫 했다.해군사관학교에서의 별명은 모세 헨델이었다.
  • [2] 당시 독일 음악계에 유대인들 비중이 높았기에 음악가들이 유대인들과 친한 경우는 허다했다.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히틀러의 나치 찬양곡 지휘요구를 묵살하자, 히틀러가 수용소로 보낸다고 협박함에도 거리낌없이 "그거 잘됐네요. 수용소로 가면 음악가 친구들이 많을테니 저는 반갑게 가겠습니다."라고 대꾸할 정도로 음악가들에 유대인들이 많았다. 결국은 푸르트벵글러가 유대인 음악가들에 한하여 자비를 베풀어주는 조건으로 지휘를 수락했지만…
  • [3] 다만 이 소문에 대해 하인리히 힘러는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라 일갈했고 이후 소문은 잠잠해진다.
  • [4] 참고로 레더 제독은 1928년 10월 1일 한스 젠커 상급대장에 이어 총사령관에 취임했으므로, 이 일은 최소한 그 이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 [5] U-보트 지휘관으로 유명하며 훗날 해군 총사령관, 제국 대통령을 역임한 칼 되니츠 원수는 자신의 전쟁 회고록에서 카나리스를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로 묘사했다.
  • [6] 이후 그녀는 하이드리히와 결혼하여 실케, 마르테, 클라우스, 하이더를 낳는다.
  • [7] 당시 하이드리히는 통신전문가(하이드리히가 해군에 있었을때의 직무가 통신분야였다.)를 모집하는줄 알고 친위대에 입대했는데, 정작 힘러는 보안전문가를 찾다가 하이드리히를 고용하게 된 것이었다.
  • [8] 하이드리히는 힘러를 상당히 무시하였으며 업무상으로도 여러번 그를 물먹이는 보고를 상부에 하였다.
  • [9] 당시 나치 독일의 명칭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보호령. 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를 수반으로 하는 괴뢰 정부가 있긴 했으나 사실상 나치 독일의 점령지였다.
  • [10] 영화 벽의 7인은 이 사건에 대해 다루고 있다.
  • [11] 지금이야 정말 이렇게 사람이 죽느냐며 황당하겠지만 페니실린 등의 항생제가 널리 보급되고 감염 예방이란 개념이 확립되기 전에는 이런 경우가 제법 많았다.
  • [12] 이 때문에 힘러가 의사들을 매수해 하이드리히를 암살했다는 음모론을 제시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이는 당시 힘러가 파견한 의사가 그의 주치의 카를 게브하르트인 점에서 신빙성이 있다. 이 드라마틱한 사건은 여러차례 영화로 만들어졌으나 특히 유명한 것은 거장감독 프리츠 랑의 1943년작 '교수인 또한 죽는다(Hangmen Also Die)'이다. 다만 국내 한정으로 1975년작 '새벽의 7인(Operation Daybreak)'이 더 인지도가 있다.
  • [13] 하이드리히는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전에 죽었지만 하이드리히의 심복인 발터 쉘렌베르크와 인리히 뮐러가 계속 방첩부를 약화시키고 결국 카나리스도 체포해 처형했다.
  • [14] 이 사람도 형처럼 SS장교였다.
  • [15] 라이히-n이라고 명명된다.
  • [16] 홈라인/센트럼과 더불어 무한세계의 3대 세계중 하나.
  • [17] 패튼을 비롯한 주요 군 지휘관 암살. 연합군 장병 납치참수, 방사능 오염, 친연합군 인사 발트하임 살해, 수송기 납치해서 자폭공격 등등
  • [18] 그 전에 사살되지만 스코르체니가 뒤를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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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8 17:2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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