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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

last modified: 2015-02-16 00:30:35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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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ermaatra-Setepenra Ramesesu-meryamun (라의 강력한 Ma'at, 라의 선택 / 아문의 사랑을 받는 라메세스)
Ramesses II


고대 이집트 문명의 마지막 명군

BCE 1303년 ~ BCE 1213년. 재위 BCE 1279년 ~ BCE 1213년. 무려 3천 2백~3천 3백년전 인물이다. ㅎㄷㄷ.

신왕국 시대 제 19왕조의 제3대 파라오로,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파라오 중 한명이다. 인생 무상을 상징하는 시로 유명한 오지만디아스가 바로 이 사람.[1] 소설 람세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흔히 알려진 람세스는 그리스식 명칭이고, 에로글리프의 특성상 모음을 표기하지 않기 때문에 당시 이집트 인들이 불렀던 정확한 발음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콥트어와의 연결 고리를 통해 '라메수'가 가장 가깝다고 추정할 뿐이다.

20(24세 추정)대에 왕위를 물려받았고, 그 후 60년 이상(66년 추정) 이집트를 통치했다. 영조, 건륭제 저리 가라네? 그러니까, 대강 아흔살에 죽었다. 그 세월만큼이나 위대한 지도자였으며, 신도시 피람세스[2] 부심벨 신전을 비롯한 대규모 건축물을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현재는 이집트 제 19왕조의 황금기 뿐 아니라 이집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

Contents

1. 즉위 이전
2. 군사적 업적
3. 히타이트와의 평화
4. 토목공사심시티
5. 출애굽기와 람세스
6. 가족과 역사적 평가
7. 대중문화에서의 그
8. 기타

1. 즉위 이전

신왕조를 연 제 18왕조에 의해 제 2 중간기의 침략자인 힉소스를 몰아낸 이집트는 다시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하지만 제 18왕조 말 아케나톤의 종교 개혁이 실패하면서 이집트 정치는 다시 혼란에 빠졌고, 혼란을 수습한 장군 출신 파라오 호렘헤브가 동료이자 람세스 2세의 할아버지인 람세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제 19왕조가 시작되었다. 람세스 2세의 아버지인 티 1세[3]는 가나안을 비롯한 소아시아[4]와 누비아 지역을 재정비하였다. 하지만 북쪽의 히타이트가 남진하면서,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시리아-팔레스타인의 지배권을 두고 오랜 다툼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람세스 2세는 어린 시절부터 그의 아버지와 함께 여러 차례 출정했다. 이는 람세스의 군사적 훈련이 아주 어린 나이에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며, 세티 1세는 치세 초반부터 람세스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누구랑은 많이 다른데? 기원전 1279년, 세티 1세가 죽자 24세에 유일한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다.

2. 군사적 업적

세티 1세의 원정으로 이집트는 다시금 북아프리카-소아시아 일대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였으나, 하트셉수트투트모세 3세의 황금기에 비교하면 상당히 많은 문제점을 남기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히타이트가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해상에서는 양 민족이라 불리는 이들이 지중해 동부부터 나일 강 하구에 이르기까지 노략질을 일삼고 있었다.

람세스의 첫 번째 타겟은 해양 민족이었다. 람세스는 재위 2년만에 해양 민족을 토벌했는데,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선호하는 작자들을 단 한 차례의 기습작전으로 소탕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람세스가 지상전뿐만 아니라 해상전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며, 해안선을 비롯한 당시 지형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자신감을 얻은 람세스는 북벌 준비에 착수했고, 재위 4년에 비블로스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5].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카데시 전투(B.C 1286)에서, 람세스군은 히타이트가 카데시를 포기했다는 거짓 정보에 낚여 카데시에 성급하게 진입했지만, 요새 뒤에 숨어있던 히타이트 전차병의 매복에 당했다. 히타이트의 기습작전으로 이집트는 2개 사단이 궤멸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람세스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람세스는 카데시를 함락하지 못 하고 이집트로 돌아와야 했으며, 이후 12년에 걸친 두 차례의 원정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 팔레스타인 지역의 점령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3. 히타이트와의 평화

람세스는 결국 더 이상의 전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고, 재위 21년에 히타이트와 평화협정을 맺었다. 이는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평화조약이다. 재미있게도 양측 기록이 모두 상대가 청해서 우리가 관대하게 화평을 받아들였다.라는 식이다. 굳이 따지자면, 히타이트 공주와 결혼하고 소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된 람세스가 좀더 열세였다. 이렇게 국경은 정리되었고, 이 지역에 드디어 평화가 찾아왔다.

비판적인 학자들은, 카르나크 신전의 부조를 비롯한 평화조약과 카데시 전투에 대한 윤색된 선전들이 군사개혁을 비롯한 각종 번영의 싹을 잘라버렸고, 이후 이집트가 쇠퇴하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평가한다. 나쁜 의미로 역사 최초의 언플거짓말은 자기 스스로가 제일 먼저 속는다.는 말. 다만 람세스는 누비아, 리비아 원정에 성공하여 북아프리카 일대에서의 지배력을 더욱 확고히 하였으므로 실패한 군사령관이라 속단할 수는 없다. 그리고 하단에 언급할 대규모 토목공사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람세스 치세의 번영을 상징하는 증거 또한 여럿 남아있으므로 섣부른 판단은 자제할 것.

4. 토목공사심시티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으레 그렇듯이, 람세스도 자신의 흔적을 이집트 전역에 남기는 데 열심이었다.

람세스는 즉위 초에 나일 강 삼각주 북쪽에 신도시인 Per-Ramesesu(페르라메수)를 조성하고 수도를 옮겼다. 페르라메수는 조상의 터전과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시리아 - 팔레스타인 지역에 진출하겠다는 람세스의 의지를 상징하기도 했다. 시골 촌동네였던 페르라메수는 이 때 엄청나게 성장하여 궁전과 사원, 많은 조각상과 장식물들로 꾸며졌고, '호루스의 길' 이라 불리우는 이집트 - 소아시아 교역로에서 들어오는 물산들로 인해 상당히 번영하였다. 람세스 이후에도 국경도시로서 중요시되었으나, 후대에 나일 강의 지류가 바뀌면서 페르라메수로 들어가는 수로가 말라붙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려졌다.[6]

천도는 물론이고, 람세스는 통치기간 중 이집트 전역에 많은 사업을 시행했다. 자기 자랑하기 좋아하는 파라오들의 연례 행사인 카르나크 신전에 탑문 기증하기 부터 그 유명한 부심벨 신전까지 수많은 신전을 세웠다. 신전뿐만 아니라 관공서 등 도시구획을 정비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여 당시 이집트의 생활을 개선하고 일자리까지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http://cfs5.tistory.com/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YmxvZzY0MEBmczUudGlzdG9yeS5jb206L2F0dGFjaC8wLzA0MDAwMDAwMDAwNi5qcGc=
람세스 2세의 상징이자 이집트의 상징인 아부심벨 대신전

특히 람세스는 자부심이 대단해서 그의 얼굴을 새긴 조각상을 이집트 전역에 세웠다. 때로는 이전 파라오의 조각상에 새겨진 이름을 지우고 거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도 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뽀샵질 그 대표적 희생양이 바로 투탕카멘인데, 호렘헤브가 시작한 '이단 파라오' 박해[7]는 람세스 시기에 그 끝장을 봤다고 한다. 어차피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름 좀 긁어내고 자기 이름 쓴다고 무슨 상관이리오...단종 돋네요 그러면서 람세스는 후대의 파라오가 자신의 이름을 파낼까 염려하여 석공들에게 그의 얼굴을 굉장히 깊이 새기도록 명령했는데, 이집트 곳곳에 퍼져있는 람세스 거상의 경우 약 15cm 깊이로 파내어진 이름도 있다. 하지만 그 결말은 오지만디아스지롱

5. 출애굽기와 람세스

이 항목을 읽기 전에, 먼저 출애굽기의 역사성은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출애굽기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종교적 상징에서 역사적 신빙성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뿐더러, 현존하는 수많은 기록들이 출애굽기의 사실성을 부정하고 있다.

설령 출애굽기가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람세스 2세를 대표로 하는 후기설 내에서도 그의 아들인 메르넵타라던가, 심지어 람세스 1세나 3세냐라는 의견도 있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아멘호테프 2세나 투트모세 3세를 대표로 하는 전기설이라는 강력한 라이벌(...)도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항목은 여태까지 이루어졌던 '성경의 과학적 해석'의 한 단편이라 보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라므셋, 국고성 비돔 등은 람세스 치세에 조성된 페르라메수를 비롯한 국경도시의 히브리 어 음차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치세 내내 토목사업을 벌였던 람세스 2세가 히브리인들을 노역에 동원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였다는 논리가 중심을 이룬다.[8]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는 아케나톤이 시작한 신앙을 믿던 잔당들이 모세라는 종교적 해석이 있다. 아케나톤, 투탕카멘 이래로 몰락한 유일신 사제들이 그 나름의 세력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인 모세를 중심으로 무력을 동반한 대 탈주극을 벌였다는 것. 모세의 이름이 이집트 문자 mese[9]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때 그가 이집트 출신임은 확실하며, 히브리 유일신교의 배타적 성향이 아케나톤의 급진적 종교개혁과 상당히 닮아있다는 것도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크리스티앙 자크의 소설 람세스에서 나오는 모세의 이미지는 이러한 이미지의 종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시기가 시기인지라. 아귀는 그럭저럭 맞는데 딱 거기까지다. 역사학을 통틀어 이러한 논리가 정설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그마저도 눈에 쌍심지를 켠 이집트학자들에 의해 전부 부정되고 폐기 처분 수순을 밟았다. 우선 성경이 문자로 기록된 것은 람세스가 죽고도 200년 가량 지난 이후로, 페르라메수나 비돔 따위의 지명은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었다. 또한 아케나톤와 모세의 연관점은 이집트인도, 히브리인도, 심지어 로마인도 아닌 훨씬 이후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제기한 학설이며, 명확한 역사적 근거에 바탕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몇몇 종교적 특이점에 주안점을 둔 호사가형 떡밥으로 분류된다.

특히 인구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출애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주된 명제로 손꼽힌다. 톨레미 왕조 이후의 이집트 인구 증가율을 상정해도, 제 19왕조 당시 이집트 인구는 약 150~ 2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여기에 이집트는 상/하로 나뉘어져 있으며, 상대적으로 후발주자인 하 이집트의 인구규모는 전체의 약 1/3 ~ 1/2로 추산된다.[10] 따라서 하 이집트의 전체 인구는 보통 60만, 많게는 100만 가량으로 추산된다. 그런데 60만에 달하는 히브리 인들이 빠져나갔다고?? 이건 노동력의 국외유출 수준을 벗어나 망테크다.

히브리 인들의 처우에 관해서도 말이 많은데, 우선 히브리 인들이 당시 이집트의 토목공사에 참여했던 것은 맞다. 다만 그들은 노예로서가 아니라 이집트 인들과 같은 노동자로 동원되었으며, 그에 상응하는 보수와 의식주를 제공받았다. 출애굽기에는 파라오가 '벽돌을 만들 때 쓰는 볏짚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해서 이를 상당히 천한 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당장 무덤 벽화 몇 개만 봐도 이집트 인들도 볏짚 써서 벽돌 만들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결론을 내리자면, 당시 이집트에 히브리 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 까진 분명한 사실이다. 다만 이들이 노예로서 학대 내지는 강탈의 대상이 되었다는 기록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재무관이나 서기관이 되어 공직에 진출하거나 간혹 파라오의 궁정 신하로 기용되는 등의 사례도 발견된다. 따라서 이집트에서 히브리 인들이 나치 치하의 유대인과 비슷한 대우에 홀로코스트 수준의 유아 학살 등을 겪었다는 건 어디까지나 성경 내부의 이야기일 뿐이다. 굳이 유대인들이 그들의 경전에 이집트 이야기를 쓴 이유는,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이집트를 대적자로 상정함으로써 그들 집단의 강대함을 강조하고자 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동계 유일신교는 현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성경 또한 경전뿐만이 아니라 문화 콘텐츠로서의 가치 또한 높게 평가받는다. 결과적으로 출애굽기의 바로 = 람세스설의 생명력은 그 역사성이 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유지되고 있으며, 이집트 왕자엑소더스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부당한 오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만큼이나 람세스의 상징성이 강하기 때문이니 뭐...

6. 가족과 역사적 평가

첫 번째 정비인 페르타리를 비롯해 여러명의 왕비을 두었다. 아버지인 세티 1세가 평생동안 튜야 한 사람을 정비로 둔 것과는 대조적. 그들과의 사이에서 엠와세트,[11] 형들이 모두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 바람에 다음 왕위를 물려받은 렌프타 등 매우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하도 오래 산 나머지 자기 큰딸이 자라자 큰딸도 후비로 맞아들여 그 사이에서 외손자 겸 아들인 자식도 얻었다... 이집트에서야 흔한 일이지만, 그야말로 족보근친상간의 극치. 이 때문인지 람세스의 자식들이 친자인가 양자인가에 대한 논란도 몇 차례 있었다.

가족 중에서도 첫 번째 왕비 네페르타리를 무척이나 사랑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녀를 위해 직접 신전을 지어 줄 정도로, 아부심벨 소신전이라 불리우는 부심벨 신전 근처의 신전이 바로 그 곳이다. 람세스가 조성한 건축물, 기념물에 이시스 여신과 함께 그려지거나 람세스 2세와 함께 조각된 모습 등으로 유명한데, 일반적으로는 '람세스 2세와 함께' 조각된 곳에서는 람세스 2세의 수십분의 일 크기로 람세스 2세의 발치에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아부심벨 소신전에서는 람세스와 같은 크기로 새겨지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곳곳에 새겨둔 네페르타리의 무덤은 왕비들의 계곡에서도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로 자리잡았다.

람세스 2세는 66년 동안 통치를 했고 아흔살에 죽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젊었을 때 낳은 자식들은 다 죽었고 그보다 먼저 죽은 손자, 손녀들도 많았다. 고대 이집트 전체 역사에서 두번째로 오래살고 두번째로 오래 재위했다.[12] 이게 왜 그렇게 중요하냐면, 람세스는 지금으로부터 약 3,300년 전 사람이다. 당시 의료나 위생 수준을 생각한다면[13] 이 사람이 얼마나 이례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오랜 치세동안 이집트 신왕조의 국경을 확립하였으며, 가장 훌륭한 파라오 중 한명으로 지금까지도 존경을 받고 있다. 그가 세운 유적, 유물도 매우 많고.. 어찌나 존경을 받았는지 혈족상으로 그와 전혀 관계 없는 후대의 파라오들이 람세스라는 이름을 사용할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사실상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명군인데, 한 세대 뒤 선대의 후광을 이어받은 제20왕조의 세스 3세(기원전 1183~1152)의 문화 번영기를 끝으로 이집트는 남북으로 분열되거나 람세스가 정복했던 리비아[14]누비아[15]출신 왕조가 계승을 주장하는 등 여러 모로 영락하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마지막 황제.

...후손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준비해두셨는데, 유네스코 등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된 엄청난 건축들도 많이 남겼다. 본문에서 계속해서 언급했던 아부심벨 신전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관광객으로 붐빈다. 막말로 의 대피라미드스핑크스, 20세기에 유명해진 투탕카멘의 묘 정도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웬만한 이집트 유적들은 모두 이 시대의 작품이다.[16]

7. 대중문화에서의 그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는 클레오파트라하트셉수트 같은 여왕들과 자주 경쟁한다. 문명 2에서는 남성 플레이어(여성은 클레오파트라), 문명 3에서는 클레오파트라만 단독으로 나오면서 팽당했고, 문명 4에서는 하트셉수트와 공동 출연.[17] 드디어 문명 5에서는 단독으로 나오게 된다. 평은 불가사의 짓는 기계. 원더에 욕심이 많다. 과연 추가로 문명 5 한글판 플레이중 람세스2세의 모든도시를 함락시킬때 하는 대사는 "바보! 신은 절대로 질 수 없어! 조만간 나의 신성한 힘으로 널 없애 버릴 것이다! 내 장담하지!"... 바,바카! 의외로 모에요소가 풍부하신 파라오님

출애굽기와의 관계 항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수의 학자들이 람세스가 성경에 있는 모세의 일화에 나온 파라오라고 생각했으며, 그에 따라 성경과 관련된 매체에 여러 번 등장했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 십계,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18]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나 소설 <람세스> 등이다.

Fate/Prototype 창은의 프래그먼츠에 라이더로 나왔다. 해당 항목 참고.

8.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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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세스 2세의 미이라 미이라를 바탕으로 복원한 모습

외모가 대단히 독특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빨간 머리매부리코를 지녔다고 한다.[19] 손.. 손권? 감히 쥐 따위와 비교하다니 무엄하다 람세스 2세는 자신의 적발과 매부리코를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는데, 빨간 머리는 자기 가문의 수호신이자 전쟁의 신인 세트의 자손[20], 매부리코는 주신인 호루스의 자손이라고 선전하는데 이용했다. 세트와 호루스의 관계를 보면 묘하긴 하지만 어찌나 매부리코에 애착이 강했는지 미이라로 만들때 통후추를 박아넣어서 모양의 유지시킬 정도였다. 미이라를 분석해본 결과 80~90세의 노인이며 관절염으로 심하게 고생을 했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람세스도 죽어서는 영화롭지 못했다. 일단 사후 미이라를 만들 때 목이 부러져서 널빤지로 목을 받쳐서 만든 흔적이 있다.[21] 다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으니... 이집트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부유한 파라오인데다가, 당시 전세계에 명성이 진동했기에 그의 무덤(KV7)은 19왕조가 끝나자마자 수천 년에 걸쳐 탈탈 털렸으며[22] 아주 제대로 털려서 미라의 속옷까지 벗겨갔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남은 것은 크게 가치가 없는[23] 샤브티[24], 카노푸스 항아리 조각 등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25], 도굴된 유물들의 흔적을 아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구나 그의 무덤은 지대가 낮아 일찍이 자주 침수되었고 지반 약화로 무너질 위기에 놓여 관람 금지 구역이 되었다.

다행히 그의 미라는 고대 사제들이 그의 무덤에서 꺼내 다른 비밀 무덤(DB320)에 다른 파라오들과 재매장한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다.[26] 그의 육신 자체가 보존된 것이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보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1976년, 람세스 2세의 미라 보존 상태가 나빠져 곰팡이를 제거하기 위해 프랑스로 잠시 이동시켰는데 이 때 프랑스 정부는 국가 원수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의장대를 동원하여 영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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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상기한 즉위명인 Wesermaatra(웨세르마트라)를 그리스 식으로 읽으면 오지만디아스가 된다.
  • [2] Per-Ramesesu. '람세스의 집' 이라는 뜻이다. 피람세스 내지는 라메시움으로 알려져있다.
  • [3] B.C 1358~1279, 재위기간은 B.C 1290~1279. 즉위할 때 68살이었다.(...) 이 사람의 장제전은 19왕조 이전의 파라오 카르투슈가 새겨진 아비도스 왕명표로 유명하다.
  • [4] 지금의 아시아가 아니고, 시나이 반도에서부터 흑해에 이르는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지역을 말한다.
  • [5] 현재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
  • [6] 여기서 아케나톤과의 차이점이 드러나는데, 아케나톤의 수도였던 Akhet-Iten(아케트아텐)은 아케나톤이 죽자마자 바로 버려졌지만 페르라메수는 그 후에도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 [7] 아케나톤의 종교개혁과 관련된 파라오에 대한 박해를 말한다.
  • [8] 이러한 학설을 후기설이라 부르는데, 엑소더스를 13세기 무렵, 즉 람세스의 치세 전후의 사건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다.
  • [9] 상단에 있는 람세스의 카르투슈에서도 이 문자를 찾을 수 있다. 좌측 카르투슈 우측 하단의 세 줄 문자.
  • [10] 대도시인 멤피스나 테베는 전부 상 이집트에 해당한다.
  • [11] 죽은 뒤에도 이집트 민담 속에 마법사 세트네-카엠와세트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재미있게도 대부분의 이야기에서 제 꾀에 제가 넘어가 망한다.
  • [12] 1위는 재위 94년, 100살의 나이로 죽은 페르카라 페피 2세(BC 2284~2184).(실제로 장수한 왕들 참조.)
  • [13] 물론 이집트는 고대 문명 중에서도 의학이나 위생에 크게 관심을 둔 편이었지만
  • [14] 제22,23왕조;기원전 10세기~8세기, 9세기~8세기
  • [15] 제25왕조. 기원전 8세기~7세기
  • [16] 여담으로 쿠푸왕이 있던 제4왕조는 람세스와 1200년 가까이 차이가 난다. 이미 이 시대에도 '천 년 넘은 고대 유적'이었단 이야기.
  • [17] 사실 여성 파라오가 드물었고, 더욱이 클레오파트라는 사실 고대 이집트와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인물이다.
  • [18] 다만 이쪽은 역사적, 시대적, 배경 고증이 막장이다.
  • [19] 다만 중동에서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넘쳐나고, 매부리코는 더 넘쳐난다. 충분히 있을만한 조합인 셈.
  • [20] 아버지의 이름 '세티'도 세트 신에게서 딴 이름이다.
  • [21]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메렌프타도 사후 미이라를 만들 때 비슷한 굴욕을 당했다. 미이라를 만들던 중 그의 성기가 훼손되어 고환이 빠져 나오자 다시 집어넣고 대충 때워놓은 흔적이 있다.
  • [22] 이미 20왕조 때 그의 무덤에서 금박을 벗기고 보물을 훔친 도굴꾼들이 체포된 기록이 있을 정도다.
  • [23] 물론 당시 기준이다.
  • [24] 돌, 나무, 석고 등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조각으로 무덤에 부장하여 사후에도 노예로 부릴 수 있도록 한 부장품이다. 야만적이었던 순장에서 발전한 풍습이었다.
  • [25] 존재감이 없던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들을 보면 그의 거대한 무덤에서는 얼마나 많은 유물들이 매장되어 있었을지 가히 짐작이 간다.
  • [26] 고대 이집트에서는 선대 파라오들의 무덤 도굴이 너무나 빈번해서 선대 파라오들의 무덤 유지보수가 큰 국무였다. 그리고 선대 파라오들의 무덤을 보수할 때, 다른 파라오들의 미이라도 재수습해서 재매장해줬다. 생뚱맞은 무덤에서 신왕조 시대의 파라오 미이라 다수가 발견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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