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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트 브레즈네프

last modified: 2015-09-02 06:40:10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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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호감이 가는 인상은 아닌듯
눈썹에만 눈이간다
마트료시카 아저씨[1]
왼쪽은 소련 원수 복장의 브레즈네프. 독소전쟁 말기에 그는 영관급 정치장교에 불과했으나 절대권력을 확립할 즈음인 1976년 스스로 소련 원수에 취임했다. 젊었을 적부터 유지된 송승헌도 부럽지 않은 송충이 눈썹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 Gahlbeck, Friedrich (cc-by-sa-3.0-de) from

호네커 : 형 야사 보실래여?
브레즈네프 : 오오 거 좋지
안드로포프 : ㅋㅋㅋ 난 저거 묶음으로 다 있는데 크하하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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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하게 인자해 보인다 송해 선생님?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
(1953.09~1964.10)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64.10~1982.11)
유리 안드로포프
(1982.11~1984.2)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독소전쟁 시절
2.3. 권력의 길에 오르다
2.4. 최고지도자 시절
2.4.1. 회색의 시대, 붕괴의 징조
2.4.2. 아직은 멀쩡하다고?
2.4.3. 자뻑의 세계로
2.5. 말년
3. 여담


1. 개요

레오니트 일리치 브레즈네프(Леони́д Ильи́ч Бре́жнев)


소비에트 연방의 제5대[3] 서기장. 1964년에 전임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를 축출하고 자리를 차지하여 1982년까지 18년(!)간 권좌를 유지했다.

흐루쇼프 시대의 개방정책을 포기하고 다시 보수주의로 회귀한 서기장으로, 소련의 군비 증강 등은 전부 이 사람 때문. 꽤나 오래 집권했으며 그의 사망 직후 취임한 유리 안드로포프콘스탄틴 체르넨코도 1년 간격으로 연달아 사망(…)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그 이후 서기장이 된 사람이 미하일 고르바초프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이오시프 스탈린의 그림자를 밟은 인물로, 그만큼의 카리스마나 지도력은 없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재밌는 것은 냉전 + 핵전쟁 발발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고 여겨졌던 1980년대를 용케 비켜나간 인물이란 점? 그저 독재자 킬러 지미 카터의 저주를 받은 것이다.

2. 생애

2.1. 초기

브레즈네프는 1906년 12월 19일 러시아 제국 카멘스코에(현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제르진시크)에서 금속공장 노동자였던 일리야 야코블레비치 브레즈네프와 어머니 나탈리야 데니소브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브레즈네프는 1921년 가족과 함께 쿠르스크로 이사해 15세 때부터 그곳의 제철소에서 근무하였다.

1923년에는 공산당 청년 조직인 콤소몰에 참가하였고, 1930년 카멘스코에로 돌아와 다음 해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그는 드니프로제르진스크 금속 공대에서 금속공학을 배워 1935년 졸업한 뒤에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제철소 기사가 되었다. 1935년에는 소련군 육군정치장교입대하였으며, 1936년 말에는 드니프로제르진스크 야금 대학의 교장이 되었다. 193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간부, 몰다비아 당 위원회 제1서기, 1939년에는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주 당위원회 서기에 올라 방위산업을 조직하였다.

그는 러시아 혁명 전에 성인이 아니었던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원의 첫 세대였고,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 사후의 공산당 주도권 싸움에는 너무 젊었기 때문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 브레즈네프가 공산당에 입당했을 때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절대적인 지도자였으며, 브레즈네프를 포함한 많은 젊은 공산당원이 순수한 스탈린주의자로서 성장하였다. 스탈린의 대숙청을 면한 사람들은 당 및 주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ɔ) Unknown from

1920년대 후반의 브레즈네프 부부. 젊었을 때는 꽤 미남

2.2. 독소전쟁 시절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일어났다.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는 독일군에 점령당했지만, 브레즈네프는 시의 산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군의 정치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그 해 10월 브레즈네프는 여단 인민위원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남부 방면 군정치지도부 차장이 되었다.

1942년 우크라이나가 나치 독일에 점령당하자, 브레즈네프는 캅카스 방면의 정치 지도부 차장으로서 캅카스에 파견되었다. 1943년 4월 그는 제18군의 정치부장이 되었고, 같은 해 말에 소련군은 주도권을 회복하였다. 이로 인해 제18군은 제1 우크라이나 방면군의 일부가 되어 우크라이나를 다시 되찾고 서방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방면군의 상급정치위원은 후에 브레즈네프의 중요 후원자가 되는 니키타 흐루쇼프였다. 브레즈네프는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제4 우크라이나 방면 군정치지도부 부장으로서 프라하에 들어갔다.

1946년 8월 브레즈네프는 소장 계급을 단 것을 마지막으로 소련군에서 전역했다. 후에는 재건 계획 종사에 힘썼고,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주 위원회의 제1서기가 되었다. 1950년에는 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이 되었으며, 그 해 말에는 몰도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취임하였다. 1952년에는 공산당 중앙위원회 및 최고 회의 간부 회의의 일원이 되었다.

브레즈네프는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주나 몰도바, 그리고 카자흐스탄 등에서의 인맥을 후의 권력 강화에 많이 이용하였는데, 그들 중에선 콘스탄틴 체르넨코, 딘무하메드 코나예프, 니콜라이 티호노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2.3. 권력의 길에 오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사망하자 최고회의 간부회가 폐지되고, 보다 작은 정치국이 재구성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의 일원이 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중장 승진과 함께 소련군 총정치국장 제1대리로 임명되었다. 이것은 그 후원자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한 것이었으며, 1955년에는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가 되어 소비에트 연방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개척 사업을 지도했다.

1956년 2월,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로 귀환하여 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 회원 후보 겸 서기로서 방위산업, 우주계획, 중공업 및 수도 건설 지휘의 임무를 맡았다. 1957년 6월에는 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이끄는 반당 그룹의 게오르기 말렌코프, 라자르 카가노비치 등이 흐루쇼프와 대치한 당 지도권 싸움에서 흐루쇼프를 지지하였다. 반당 그룹을 배제한 후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의 정식 일원이 되었다.

1959년 브레즈네프는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간부회 부의장이 되었고, 1960년 의장에 취임해 명목상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원수가 되었다. 실제 권력은 당의 제1서기인 흐루쇼프에게 있었지만, 의장의 지위는 외국으로의 여행을 가능케 하였다. 그는 이때 서방 국가의 비싼 의복이나 자동차에 대해 흥미를 느꼈는데, 이런 취향은 뒤에 유명해지게 되었다.

1962년까지 흐루쇼프의 당 지도자로서의 지위는 튼튼했지만, 그가 연로함과 동시에 지도력 저하가 다른 지도진의 신뢰를 무너뜨려 그의 정치 기반이 흔들렸고,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 문제가 한층 더 심화돼 흐루쇼프의 지도력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표면상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에 충실했지만 렉세이 코시긴,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알렉산드르 셸레핀의 권유로 1963년 흐루쇼프의 추방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결국 흐루쇼프는 1964년 10월 13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정으로 실각하였고, 브레즈네프는 소비에트 공산당 제1서기, 코시긴은 수상에 올랐다.

2.4. 최고지도자 시절

2.4.1. 회색의 시대, 붕괴의 징조

서구 역사가들은 그의 집권기를 회색의 시대라고 부른다. 스탈린 시절과 같은 로 점철된 전쟁대숙청도 없었고, 전체적으로 사회가 안정되면서 사람들의 삶도 편안해졌지만, 전체적으로 천천히 무너져가는 거대한 관료주의 체제의 모습 때문이라고 한다.

러시아에서는 소련 초기처럼 사람 목숨이 파리처럼 죽어나가는 대혼란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소련 말기와 붕괴 이후의 혼란도 없고 경제도 그럭저럭 좋았던, 혹자의 말에 따르면 "이 가혹한 땅에 문명이 들어선 이후로" 가장 평화롭고 살기 좋았던 시대의 지도자로서 평이 좋은 편이다.(사실 소련에 TV와 세탁기, 라디오(...)[4]같은 가전제품이 널리 보급된 것도 이 시기였고...비록 품질은 낮았지만) 사실은 무난하게 현상 유지를 했다고 보는 것이 좋다. 체제를 뒤흔든 '튀는' 인물이였던 흐루쇼프를 축출하고 당내 보수파들이 대표로 내세운 게 브레즈네프였으니. 이때 당의 의사결정 구조도 당내 여러 세력간의 합의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로 귀결되었고 과거 같은 1인 독재를 허용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당내에 팽배했었는데, 브레즈네프는 조금씩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 1977년에는 드디어 절대권력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처럼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하지 않아 미국과의 갈등은 과거 흐루쇼프 시대보다 완화되었으며, 비록 군사력의 증강으로 국방비가 GNP의 12%를 넘었으나, 그렇다고 미국과의 심한 갈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서방 국가와의 무역 또한 늘어났다.[5] 생산성 향상을 위해 경제 개혁을 하지도 않았고,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가 심각해졌지만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을 딱히 세우지 않았다. 관료제가 고착화되면서 이전에 고성장을 기록했던 경제는 점차 정체되기 시작하고, 관료들의 부패도 심해졌다.[6] 왕으로 따지면 시대를 잘 탄 암군 정도 될라나...

또한 스탈린 시절에 파벌 싸움에서 지면 암살당하든 사형당하든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지만, 흐루쇼프 때 이것이 점차 순화되어 브레즈네프 시대에 이르러서는 파벌 싸움에서 진다고 해도 그냥 시베리아 구석의 수력발전소장으로 좌천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만큼 온건해졌다. 한 역사가는 이를 "정치가들의 파벌 싸움이 피비린내 자욱한, 목숨을 건 치열한 결투에서 신사들끼리의 스포츠 게임이 되었다"라고 평가했다.

애플바움의 논픽션 <굴라그>에 따르면 이때 당시도 굴라그 체제는 변함없이 가동되었지만[7] 스탈린 시대처럼 그런 거 없다 등으로 일관하는 게 아니라, 반체제 유명 인사가 굴라그에 수감되거나, 좌천되어 노동현장에 떨어지더라도 서구의 지속적인 관심과 구명 요청 및 생사확인이 가능했던 시대이다.

브레즈네프는 흐루쇼프 집권기에 열심히 까대던 스탈린을 자신이 집권하자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가령 자신의 직함인 제1서기를 스탈린의 직함인 서기장으로 다시 바꾸었다. 그러나 당시는 스탈린주의의 피해자들이 아직 멀쩡히 살아있던 시절이므로 아예 복권(...)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또한 미국으로 망명해있던 스탈린의 친딸인 스베틀라나가 회고록 등을 발간하고 다녀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는데, 이는 브레즈네프 본인도 스탈린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더 이득으로 여겼기 때문이 크다.

2.4.2. 아직은 멀쩡하다고?

한편, 브레즈네프는 대외적으로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진행되던 프라하의 봄소련군 탱크로 깔아뭉개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선언하였다. 레흐 바웬사가 주도한 폴란드 연대노조의 파업도 폴란드 정부를 압박해서 강경진압을 유도했다. 또한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서 자신이 죽은 뒤에도 소련이 망할 때까지 향후 소련 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안겼다. 하지만 고르바초프는 또 개입을 안 해서 동구권 정권들의 도미노 몰락에 기여하기도 했으니 원...

또한 대외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의 내전에 개입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에 소련의 원조를 받은 북베트남남베트남을 몰아내고 베트남무력 통일했다. 브레즈네프는 북베트남에 군사적 원조를 제공하는 한편 미군이 북위 17도선, 즉 원래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국경선 위로 진격할 경우 소련군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 결과 미군은 남베트남에서 성과 없는 소모전만 벌이게 되었고, 결국 철수로 이어졌다. 미소 간의 전면핵전쟁으로 전 세계 인류가 함께 망했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도 있었기에 미국이 확전을 고려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2008년딕 체니의 주장을 조지고 부시는 대통령이 묵살했는지 생각해 보자. 하물며 그 당시는 소련의 군사력이 절정 직전이었다!

아프리카에서는 포르투갈식민지에서 발생한 해방운동을 쿠바를 통해 지원해 주었다. 대표적인 예가 앙골라의 MPLA. 포르투갈 본국에서 발생한 쿠데타 덕분에 독립을 쟁취한 앙골라에는 몇 개 게릴라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다. MPLA는 소련이 밀어주는 게릴라 조직. 독립 후 내전 상태에 들어가자 브레즈네프는 쿠바에게 MPLA를 직접 지원하라고 명령했고, 쿠바군이 내전을 싸악 정리해 버렸다.

그리고 소련과 함께 공산권 양대 강대국인 중국과 공산권 지도자 위치를 놓고 대립하여 중소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달았으며, 1969년에는 우수리강 유역의 다만스키 섬(중국명 전바오 섬)에서 양국 군대간의 무력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중국-소련 국경분쟁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이처럼 브레즈네프는 소련이 공산권의 맹주라는 사실을 전세계에 재인식시키면서 소련의 위세를 유지하려 애썼다.

2.4.3. 자뻑의 세계로

그의 이러한 확고한 대외정책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기 자신에게 훈장을 수여한 일은 좀 도가 지나쳤다.[8]느닷없이 2차대전 때의 전공을 이유로 소련 최고의 영예인 소비에트연방영웅 훈장을 자신한테 직접 수여하기도 했는데 그 횟수가 무려 네 번(1966, 1976, 1978, 1981)이었다. 장군 중의 장군으로 손꼽히는 게오르기 주코프와 동급이다! 거기에 그와 비슷한 등급인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1961)까지 더하면 무려 5중 영웅이 되는 셈. 이외에도 재임 기간 18년 동안 총 200여 개의 훈장을 수여받았는데, 브레즈네프의 명예욕을 아는 측근들의 충성 경쟁이 무차별적인 훈장 수여로 나타났다고 한다. 뭔가 조선 왕들의 존호 올려주기에 비견할 법하다. 스탈린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이런 상훈에 대한 욕심은 전직 서기장들인 스탈린이나 흐루쇼프에 비해 브레즈네프 자신이 전쟁 때 별다른 전공이 없었다는 자격지심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스탈린은 2차대전 때 당, 정, 군을 망라한 최고 지도자였고, 흐루쇼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드물게 개념인 축에 속한 정치위원으로 여러 전공을 세웠다.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에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의 정치위원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흐루쇼프. 물론 브레즈네프도 일선 야전군 정치위원이긴 했지만, 뚜렷한 전공을 세운 적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말년에 갈수록 이러한 훈장부심은 심해지기만 했는데, 생전에도 사후에도 해외뿐 아니라 소련 국내에서까지 비웃음거리가 되어 사미즈다트 같은 지하 출판물에서도 디스했을 정도였다. 죽기 6개월 전에도 키예프 1500주년기념메달을 받고 갔을 정도이고, 1978년에는 2차대전 종전 직후에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영웅들에게만 일괄적으로 수여되고 사실상 수훈이 종료되어 있던 전승훈장을 멋대로 부활시켜 수상하는 자뻑 모드를 보여주었다.


또한 1979년에는 조악한 수준으로 쓰여진 자신의 회고록이 출판되자마자 레닌상 문학 부문을 수상하는 등 문학에 대한 능욕까지 해버렸으며, 게오르기 주코프 회고록에 있지도 않은 자신의 전공을 창작해서 쓰라고 하는 위엄을 보여주기도. 어째 비슷하게 회고록으로 노벨문학상을 탄 어느 영국 할아버지와 비슷해 보인다. 뭐, 이 영국 할아버지는 문학상보단 노벨평화상을 원했지만...

결국 이 양반이 죽은 후인 1988년에 소비에트 최고 회의에서 관련 법규를 개정해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든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이든 1회 초과 수상 자체를 금지해 버렸다. 1년 뒤인 1989년에는 억지로 단 전승훈장이 박탈되었다. 그리고 소련이 망했죠.

2.5. 말년

브레즈네프는 막상 절대권력을 완전히 구축한 뒤부터 건강이 나빠졌고, 1979년부터는 주요 행사에 불참하는 일이 잦았다. 정보 통제가 심했던 나라인지라 서방에서는 브레즈네프 사망설, 대역설 등이 심심찮게 제기되었고, 공식사진도 여러차례 포샵처리가 가해졌다. 포샵처리가 안 되거나 어쩌다 찍힌 사진을 보면 눈에 초점도 없고 입도 반쯤 벌리고 축 늘어진 모습이 병색이 완연했다. 아아, 님은 맛이 가셨습니다! 권력을 쥐었는데 왜 유지를 못 하니?

1982년 3월, 브레즈네프는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이후로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982년 11월 10일 오전 8시 30분에 모스크바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해 붉은 광장의 원훈 무덤에 매장되었다.

3. 여담

브레즈네프는 다른 공산당 고위층들처럼 화려한 다차(러시아식 별장)를 여러 개 소유하고 있었다. 평생 시골에서 살던 자기 어머니를 불러 다차를 구경시켜주자 어머니는 놀라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참 좋구나, 레오니트." 그리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들이 오면 이건 다 어떻게 될까?" 공! 산! 당! 댁 아들이 공산당의 우두머리란 말이외다

또한 명목상 소련의 국가원수인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이 되어 서방 국가에 갔을 때부터 서방의 명품 자동차나 양복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권력을 잡고 나서 서방의 자동차 수집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반동! 반동이다!


입술이 찰지구나! ANG? 옆에서 후후임 서기장이 나중에 자기도 저 짓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불안한 눈으로 보는 것을 보라!

브레즈네프는 뜨거운 맨 투 맨, 마우스 투 마우스 키스로도 유명하다. 공산국가의 정치인들과 만나면 키스하는 걸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 키스는 사실 원래 러시아의 인사법이다. 1960년대 러시아에서 영화나 사극을 보면 이런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런 풍습이 공산권으로 들어가서 동지들끼리의 우애의 상징 정도로 생각하고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거지만, 미국 같이 게이에 대한 터부가 강했고 남자들끼리의 육체적 접촉(서로 잡기, 서로 허그 오래하기)이 금기시되는 나라에서는 굉장히 괴악하게 봤다고 한다.

위 사진에서 연출된 뜨거운 키스는 1979년 동독 창건 30주년 기념으로 방독했을 때 에리히 호네커와 나눈 것이다. 그리고 이 사진을 모사한 그림이 베를린 장벽의 잔존 구간인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에 남겨져 있다. 충공깽.#

70년대 말 80년대 초기 미국의 반공극에서 소련의 높으신 분내지는 최종보스격으로 자주 출연했다. 아예 브레즈네프 이름을 달고 나오는 경우보다는 주로 브레즈네프 비슷한 높으신 분이 악역으로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 80년대 미국에서 리처드 닉슨 시대를 다룬 인기 정치드라마에 나온 브레즈네프는 의외로 그의 이미지를 잘 구현했다고 한다. 느글느글하게 닉슨 행정부를 조종하려고 하는 암흑보스의 이미지가 잘 나왔다는 평.

패러디 영화 <스파이 하드>에 나오는 미친 장군 레슬리 렝코가 완벽하게 브레즈네프의 이미지를 채용했다. 그의 이미지를 채용한 렝코 장군은 21세기인 지금 나왔다면 유족의 항의를 받을 정도의 캐릭터이다.

훗날 그의 후임 서기장들 중 하나가 되는 고르바초프와는 사진을 통해 처음 대면하게 되는데, 청년 공산주의자 대표로 고르바초프가 유력하게 천거되었지만 "이 친구 청년 치곤 머리 숱이 너무 적구먼"하고 반려시킨 일화도 있다. 고르바초프는 이미 그때부터도 탈모가 심했던 것 같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김재규 역을 맡은 백윤식이 박통의 죽음을 감추자는 이유로 "쏘오련에서는 브레즈네프가 죽었을 때 일주일이나 비밀로 감추었어요."를 서두로 박정희의 죽음을 보안에 부치자고 주장하는데 고증오류다!. 1979년에 브레즈네프는 살아있었고 크렘린은 브레즈네프의 사망을 사망 하루 만인 1982년 11월 11일에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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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브레즈네프의 초상이 들어간 마트료시카가 실제로 기념품으로 팔린다(...)
  • [2] 왼쪽은 후임인 유리 안드로포프, 가운데는 동독에리히 호네커, 오른쪽은 이 항목. 여담으로 가운데와 왼쪽은 키스를 한 적이 있다. 맨 밑 참조.
  • [3] 오르기 말렌코프를 포함했을 경우.
  • [4] 의외라면 의외일거 같지만 1960년의 당시 소련의 라디오 보급률이 50%에 지나지 않았다.
  • [5] 실제로 펩시가 본격적으로 소련에 진출했을 때가 바로 브레즈네프 정권 시기였고 펩시뿐만 아니라 상당수 미국기업들도 이 시기에 소련에 진출하기도 했다.
  • [6] 이런 관료주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게 바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는 고르바초프가 급진적 개혁을 밀어붙이는 계기가 된다.
  • [7] 정작 당시 소련에선 1960년에 이미 흐루쇼프가 "굴라그는 모두 해체되었다"라고 대외적으로 개드립을 친 지 오래였다.
  • [8]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즈네프는 스탈린식 우상화는 실시하지 않았다. 흐루쇼프에 이어 브레즈네프에 대한 유머가 소련에서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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