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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톨스토이

last modified: 2015-04-13 23:48:55 by Contributors


레프 니콜라예비치[1] 톨스토이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Lev Nikolayevich Tolstoy)
1828.09.09 - 1910.11.20

강세가 있는 러시아어 발음은 례프 니깔라예비치 딸스또이. 레프(Лев)라는 이름의 영어식인 리오 톨스토이(Leo Tolstoy)로도 불린다. 레프는 러시아어로 사자라는 의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함께 러시아 문학의 끝판왕

러시아위대한 대문호이자, 도덕적, 종교적 사색가이며 기독교적 아나키스트이다. 동시대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와 자주 비교되는데, 이 비교는 인터넷 키베에서부터 후대 문학인들의 논쟁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러시아 문학계의 초대형 떡밥이다. 그리고 언제나 결론은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Contents

1. 초기의 삶
2. 창작 전기
3. 회심(回心)
4. 후기 작품과 최후
5. 뒷이야기
6. 전쟁과 평화의 고증성 논란 떡밥
7. 톨스토이의 조상
8.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
9. 평가


1. 초기의 삶

톨스토이는 1828년 제정 러시아의 툴라 근방의 톨스토이 가 영지인 야스나야폴랴나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2세때 막내 여동생을 낳고 사망하여 '숙모'라고 부른 먼 친척 아주머니 밑에서 자랐다. 숙모라 불린 친척 에르골스카야 아주머니는 어머니와 다름없이 톨스토이의 훗날 성장과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2] 사실 '숙모'는 아버지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으나 톨스토이의 조부가 집안을 말아먹고 빚이 많아서 부유한 여성을 만나기 바라는 대인배 마음으로 청혼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사정을 아는 톨스토이의 생모와 관계가 오히려 나쁘지 않았고 톨스토이의 생모가 사망하자 레프톨스토이의 아버지가 다시 청혼하지만 아이들과의 사이가 어색해질까봐 다시 거절하고 대신 평생 아이들의 엄마 노릇을 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감동스토리는 1836년경 아버지의 유품 편지를 정리하다 톨스토이가 발견했다고 한다.

참고로 톨스토이의 막내 여동생은 '숙모'라 불린 에르골스카야 아주머니의 조카 톨스토이 공작[3]과 결혼한다. 아버지는 카자 주지사를 거치며 관직을 역임했지만 9세때 급사하여 큰 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가 14세때 큰고모도 사망하여 작은 고모가 후견인이 되었다. 이때문에 톨스토이가문 형제들은 부모없이 서로 의지하는 사이였고 형제들과의 사이는 전부 좋았다고 한다. 특히 맏형인 니콜라이를 좋아했는데 맏형도 문학적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1844년에 외교관이 되려고 카잔 대학 동양어학과에 입학했다가 다시 농민들을 위해 일하려고 법과대학으로 전과하였지만 학업에 열의는 없고 스스로 관심분야에 책만 보던터라 수업태도 불량으로 유급당했고 결국 자퇴한다. 1847년에 야스나야폴랴나로 돌아온 톨스토이는 위의 형 셋과 달리 당시 귀족들의 진로인 문관이 되거나 군인이 되거나 중에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농촌에 틀어박힌다.

이때 잠시 농촌생활에 열의를 가지고 농노들에게 교육이라던가 병원을 제공하고 온정적인 지주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농민들의 차가운 반응과 불신으로 실망하고 다시 도시로 나오게 되었고,이후 젊은 톨스토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학사검정고시로 학사학위는 따지만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상류사회의 사교계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어머니가 2살 때 죽어 일종의 콤플렉스를 가진 톨스토이는 성장하면서 여자에 집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거액의 도박빚을 지는 등, 계속 무분별하게 살아가던 톨스토이는 도스토모씨와는 달리 도박을 끊기로 결심하고 그러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여 맏형 니콜라이가 복무하던 캅카스 전선으로 여행을 간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카자크들의 삶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언어와 문화 풍속들에 깊은 감명을 가지는데 여기서 쓴 글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한다.

당시 러시아는 캅카스 지역을 병탄하기 위해 그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톨스토이는 호전적인 소수민족인 체첸인들과 상대하면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긴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입대하여 당시 귀족들처럼 유년군사학교나 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 포병 하사관부터 시작하여 공을 세워 현지임관하고 복무 중에 틈틈이 그의 성장기가 반영된 반자전적인 소설을 썼는데 <유년 시대>(1852), <소년 시대>(1854), <청년 시대>(1857)가 그것이다. 이때쯤부터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서려고 전역신청을 했는데 전쟁이 터지는바람에 전역이 거부당하고 크림 전쟁에도 참전한 톨스토이는 세바스토폴 전투에 공을 세웠고 공을 인정받아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고, 중위로도 진급한다. 이때부터 문필생활을 하기 시작하여, 1855년에는 세바스토폴 전투에 관한 짧은 글들을 잡지에 실었다. 이것이 <바스토폴 이야기>이다. 이런 군경험은 여러 작품에서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잔혹한 체험 때문에 톨스토이는 평화주의로 기울게 된다. 톨스토이는 1856년에 군에서 제대하고 1857년부터 1861년까지 서유럽을 두 차례 여행했다. 그 곳에서 교육 방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된 톨스토이는 영지로 돌아와 농민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열고 신문 <야스나야폴랴나>를 발간해서 자신의 교육관을 설명했다.

2. 창작 전기

톨스토이는 30살이 넘어 겨우 정신을 차려 아내를 맞이했는데, 아내로 고른 여자가 하필이면 18살밖에 안된 친구의 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였다(당시 톨스토이는 34살). 어쨌든 나이차에 관계없이 톨스토이는 소피아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다. 소피아의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은 톨스토이를 매료시켰고 그의 걸작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에 소피아를 모델로 한 주요 인물을 등장시키게 했다.

톨스토이는 1869년의 희대의 대작 <쟁과 평화>를 완성시켰다. 나폴레옹 전쟁러시아 원정을 소재로 한 이 역사 소설에서 톨스토이는 실제로 특출난 사람이나 영웅(소설에서는 나폴레옹)은 역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역사관을 내세우며 '위대한 사람'을 중요시하는 역사관을 강력히 부정해 뭇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7번이나 격전지를 답사하고 생존자들을 직접 찾아 인터뷰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전쟁과 평화>는 소련 시절에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공산주의 사회였기 때문에 인원동원이 간편했기에 보조출연자연인원 총 75만(!!)을 동원해 거대한 전투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이는 기네스북에도 오른 기록이다.[4]

톨스토이는 1875년부터 1877년까지 그의 두 번째 걸작 <안나 카레니나>를 연속물로 출간했다. 겉보기에는 단순히 불륜을 다룬 것 같아 보이는 이 소설은 1870년대의 귀족계급과 러시아의 사회, 도덕, 철학에 대한 문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들, 특히 간통에 대한 상류계급의 위선적인 태도와 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종교적 신념의 역할 등을 강하게 고찰한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작품은 2007년 노턴출판사에서 조사한 영어권(!) 작가 125명이 선정한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뽑혔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보다는 안나 카레니나를 좋아했다고.

3. 회심(回心)

<안나 카레니나>를 쓰고 있던 해에 톨스토이는 갑자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톨스토이는 도덕적 자기 점검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고통스런 물음을 <고백>(1879)라는 에세이에서 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정신적 위기와 함께 급격하게 변화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크리스트교 사상을 발전시켜 <신의 왕국은 그대 안에 있다>(1894)라는 에세이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톨스토이는 그 에세이에서 어떤 폭력이나 무력의 사용은 해로운 것이며 폭력에는 비폭력으로 맞서야 하고 정부로 대표되는 무력이나 종교, 유재산, 맹세 등 모든 형태의 강제적인 힘에 반대하는 사상을 펼쳤다. 이는 후세에 '톨스토이주의'라는 사상 형태로 발전되었다.

종교와 일치하는 삶에 강한 열정을 느낀 톨스토이는 거름통 들면서, "나도 농부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생활을 동경했던지라 <인생론>, <참회록>을 저술하고 스스로 재산과 영지를 포기하고 스스로 농부처럼 일하는 금욕적인 삶을 선택했다.

부인 소피아는 농민으로 돌아가겠다는 톨스토이의 폭탄선언을 듣자 톨스토이와 대판 다투고 만다. 물론 톨스토이 개인에게 있어서는 분명 고뇌에 찬 결단이겠지만 이제껏 귀족으로 살아 온 소피아에게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고매한 이상이라 하더라도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작농들도 톨스토이에 동조하지 않고 되려 그를 비웃었다(...) 톨스토이는 1881년 이전에 쓴 모든 소설의 저작권을 소피아에게 양도했지만 소피아의 화는 풀리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에세이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를 비롯해 회심하기 전에 쓴 모든 작품을 부정했다(!). 이 글에서 톨스토이는 모든 예술은 사람들의 윤리적인 교화를 도와 사람들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피력했다. 또한 예술이 가진 사상은 어떤 무지한 사람에게라도 전파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기준에 따라 톨스토이는 이전에 쓴 자신의 모든 작품들이 보통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헛된 목적으로 쓴 '귀족의 예술'이라고 흑역사 취급했다. 이 에세이는 러시아 문학계에 엄청난 파장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4. 후기 작품과 최후


톨스토이는 <반 일리치의 죽음>(1886)을 시작으로 다시 소설 쓰기로 돌아갔다. 이 작품을 읽고 차이콥스키는 "톨스토이는 동서양 최대의 작가"로 극찬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찬미자는 보코프간디가 있다. 이때부터 러시아 민담과 설화에 관심을 가진 톨스토이는 민담 형식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효과적으로 들려줄 수 있는 <바보 이반>, 조이스가 세계문학이 아는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극찬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5], <사람은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등의 단편 소설들을 썼으며 국내에는 <톨스토이 단편선>으로 다른 톨스토이의 걸작들보다 더 널리 알려졌다. 다만 후기 톨스토이 작품들은 과학과 종교를 악마의 발명이라고 조롱하는 등의 서술로 인해 전기 작품들에 비해서 홀대밭는 경우가 많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부터 성욕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는데, 그 영향으로 노년에는 성적인 욕망을 비판하는 작품들을 쓰기도 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은 <크로이체르 소나타(1890)> 와 <악마(1889)>이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에서 톨스토이는 섹스를 비정상적이고 불결한 행위로 비판하고, 인간이 성욕에서 해방되지 않는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상낙원은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주장한다. <크로이체르 소나타>와 <악마>는 둘 다 자신의 성욕을 절제하지 못한 주인공의 파멸로 끝난다. 둘 다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톨스토이 역시 젊은 시절 아내 소피아와 결혼식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녀를 마차 안에서 강간한 적이 있었고 결혼 후에는 하녀들이나 농부들과의 관계를 즐겼다. 섹스에 대한 그의 비판은 과거의 방탕했던 생활에 대한 고해성사이다.

한편 톨스토이는 사회 운동가들의 구명을 위한 자금 모금을 위해 장편소설 연재도 시작했는데 이 소설이 바로 톨스토이의 마지막 걸작인 <부활>이다. 작중에 등장하는 러시아 정교회에 대한 수위높은 비판 때문에 톨스토이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 당하기도 했다. 호불호가 갈리는 작품이나 전 작품들을 고려하지 않고 부활 그대로의 작품만 본다면 절대 졸작이라 평할수 없다. 대귀족인 신분으로서 하층민들의 삶을 이해해가며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내용은 그당시나 지금이나 어지간한 내공 아니고선 쓸 수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완성된 지 무라트(Хаджи-Мурат)는 자신의 군복무 시절에 만난 무슬림 바르인 전사, 하지 무라트의 이야기로 톨스토이 최상의 작품에 속하며 해럴드 블룸에 의하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꼽히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톨스토이와 부인 소피아와의 갈등은 점점 격해져만 갔고 결국 대판 부부싸움을 벌인 이후 나이 80이 넘어가는 늘그막에 농민과 같은 삶을 살겠다고 딸을 데리고 가출을 시도하였으나, 차역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1980년대 위인전에선 비참하게 겨울 날씨 역에서 쓰러져 죽었다고 나온 바 있었는데, 그건 아니고 역장 숙직실로 옮겨져 눕혀진 상태에서 유언까지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마지막 유언은 "사람들은 왜......."

하여간에 엄청나게 건강했고 70세에도 젊은이와 다름없는 근력을 지녔다고 한다.

5. 뒷이야기

아내 소피아와의 사이에서 13명의 아이들을 두었고 그 중 다섯은 어린 시절에 죽었다.[6] 하지만 사실 톨스토이에겐 또다른 아이가 있었다. 자신의 하녀였던 아크시니야 바지키나가 낳은 사생아 아들이었지만, 어쨌든 자식은 자식이었다. 티모페란 이름의 이 아이는 마구간 지기, 산지기로 평생을 살았다. 이 사실은 톨스토이가 부부 사이에 비밀은 없어야 한다며 자신의 옛 여자관계를 비롯한 자신의 15년 간의 과거를 적은 일기를 아내에게 보여줘서 아내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도박으로 수많은 재산을 날렸고 온갖 여자들;집시, 창녀, 어머니 친구들의 농노들과 관계한 사실은 물론 사생아까지 있다는 사실들이 낱낱이 적혀 있었다. 톨스토이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안나 카레니나 속 레빈이란 인물에 투영한다. 레빈이란 인물 역시 자신의 더럽고 방탕한 과거와 무신앙을 고백한 일기장을 키티에게 건내고 용서받는다.

이런 독특한 남편 때문에 소피아는 대단히 힘든 삶을 이어가야 했다. 유모도 없이[7] 혼자서 13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물론 톨스토이의 글을 일일이 읽고 필체를 교정하는 작업을 맡아야 했다. 게다가 노년에 겨우 대문호의 아내로서 편안하게 사는가 했더니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갑자기 남편이 모든 재산을 버리고 뛰쳐나가려 하니 분통이 터질 만도 하다. 또한 톨스토이가 지나치게 대문호로 추앙받은 나머지 소피아는 소크라테스의 아내인 산티페처럼 '위대한 남편을 이해하지 못한 '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의 목가적 정신이 담긴 소설 작품들이나 소설책 표지나 속표지에서 볼 수 있는 수염이 성성한 푸근한 할아버지와도 같은 인상과는 달리, 청장년기는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강한 성욕으로 유명했다. 그의 부인은 결혼 초기 10여 년간 임신 상태가 아닌 기간이 거의 없었다. 이와 같은 그의 정신적 사상과 행동간의 괴리는 노문학에서 톨스토이를 연구할때 관심있게 보는 주제 중 하나이다.

목가적 정신이나 크리스트교에 대한 경건한 신앙심이 드러나있는 작품세계로 유명하다. 하지만 어둠의 힘이라는 희곡에서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기를 생매장하는 묘사가 있다. 흠좀무...

6. 전쟁과 평화의 고증성 논란 떡밥

그의 장편소설 전쟁과 평화는 흔히 그의 일생최대의 대작으로 설명되지만 밀덕들이 보기엔 눈에 거슬린다.

우선 주인공 보정으로 러시아 쪽 인물들이 너무 미화되어있다는 비판인데 특히 쿠투조프를 비롯한 러시아 인물들은 지나치게 관대하게 서술한 반면 나폴레옹은 권력욕과 명예욕에 가득찬 부정적 인물로만 서술했기에 발표 초기 부터 역사왜곡 드립이 있었다. 러시아 장군 중에서도 현재는 올바른 전략적 판단으로 평가받는 바클라이 드 톨리는 외국계라고 겁쟁이 독일인(?)[8]이라 디스한 반면 반대편 바그라티온 장군은 고평가 한다. 그리고 전황과 관련하여 아우스터리츠는 오스트리아 때문에 망했어요[9] 징징에 프리틀란드는 다 이겨 놓았는데(?) 괜히 강화했다. 러시아 전역에선 역덕후들의 나폴레옹의 if 떡밥을 분쇄하며 뭘 하든지 프랑스는 졌다 식의 서술 때문...

그러나

애초에 톨스토이는 역사관을 위한 창작물[10]을 쓴 것이지. 밀덕용 전투 고증연대기를 서술한 것이 아니다. 물론 아우스터리츠 전투와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의 비중이 소설에서 큰 편이지만. 어디까지나 작가의 의도에 따라 소설의 장치로 쓰인것이지 역사교재나 고증의 목적이 아니다. 일단 주인공 둘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 부터 피에르(표트르 키릴로비치 베주호프 백작) 부터가 완전한 가공 인물에다가 조연급으로 전쟁에 나선 니콜라이 로소토프 백작 등도 가공인물이 많다.... 거기다가 두 주인공 볼콘스키 피에르는 나중에 부정적으로 바뀌지만 볼콘스키는 나폴레옹을 흠모하는 사람이었고 피에르는 아예 숭배자였다.

사실 전쟁과 평화에서 비중이 큰것은 볼콘스키 공작 가문의 노공작과 영애, 베주호프 백작 피에르의 이상주의자로써의 공상과 그에 모순된 방탕한 생활, 회심과 현실적인 좌절등이고 공상, 로소토프 백작가문의 노백작 부부와 딸 나타샤 등이 대화와 사건이 더 많다.

또한 러시아 인물의 고평가라는게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온화한 모습으로 묘사하지만 경솔하게 젊은 신하들 말을 듣고 행동하다가 아우스터리츠에선 쳐발리고 전투중에 도망치다 나라잃은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약한 모습도 보여준다. 작전에 사사건건 간섭하여 똥별역할 한것도 역시 감추지 않고 나온다. 또한 가공인물이지만 자신의 가문으로 추정되는 톨스토이 백작[11]은 황제의 시종인데 아우스터리츠 전투중에 황제를 버리고 황제의 마차를 훔쳐타고 도망쳐서 황제가 도망간다는 소문이 퍼지고, 병사들이 황제가 도망간다고 동요하게 만드는 안습 활약도 써서 셀프 가문디스도 한다...

러시아 군인중 장군들은 바그라티온 장군과 쿠투조프를 제외하면 대부분 똥별로 묘사한다. 1812년 전역서도 알렉산드르의 궁정에 똥별들이 모여서 각양각색의 의견 전투 이론을 내세우며 중상모략과 뒷통수질 병신짓 하는 것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노공작(안드레이 볼콘스키의 부친)을 비롯한 러시아의 선전설(?)과 나폴레옹 디스 대화는 어디까지나 국뽕(?)으로 당시 아우스터리츠나 프리틀란드에서 지고나서도 프랑스에 대한 분노와 정신승리 하는 여론이 오히려 사실성과 부합한다. 보로디노에서도 실제역사에도 초기에 승전으로 보고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황실 주최 승전 감사기도회(?)가 열릴 정도였다.

쿠투조프 평가에서도 실제로는 쿠투조프는 소설 내에서도 인물간 대화를 통해 투르크와 전투에서 다 이긴걸 평화조약서 호구잡히고 늙어빠져서 말도 못타고 장님(?)에[12] 호꾸벅꾸벅 조는 쓸모없는 노인네(?) 젊은 여성 이 나올때나 애꾸눈이 번쩍 떠지다~라는 디스도 나오고 음흉하고 호색하다는 소문도 필터링 없이 나온다. 바그라티온도 상관 바클라이 드 톨리 뒷통수를 여러번치고 항명에 황제에게 중상모략과 톨스토이가 집필시에나 현재 전문가들이 전략적으로 옳은 평가받는 청야전술을 밥통싸들고 반대하는 걸 여러번 보여줘서 전략적 견해가 부족하다고 간접 디스하고, 쿠투조프가 오판하고 적당히 무마한 전투보고서를 보로디노 전투에서도 병력 배치가 잘못돼서 처음부터 진 전투였다고 평가하고 작가가 직접 쿠투조프가 차르에게 보낸 보고서의 오류를 지적질 한다. 조상디스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을 폄하한 부분도 없고 쿠투조프는 지략보다는 약간 열외 탄 말년병장 같은 태도로 뚝심과 인내심의 덕장으로 그려진다. 작가의 의도는 애초에 목적이 톨스토이의 역사관을 그릴 장치이지 나폴레옹과 쿠투조프의 지략 대결과 전투 고증을 쓰려고 한것이 아니다. 나폴레옹과 같은 위대한 인간이라도 역사를 자신의 마음대로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역사관을 서술 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가 본디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영광을 회복시키자는 취지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원래는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자유주의 사상에 감화되어 돌아온 젊은 장교들을 중심으로 1825년에 일어난 카브리스트의 난(12월의 난)에 대해 쓸 것이었고, 혁명 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던 경험이 있는 지식인[13]의 이야기를 쓸 예정이다. 그리고 혁명에 대한 배경 설명이 필요하니 데카브리스트 난의 전단계인 나폴레옹 전쟁에 대하여 프롤로그 격으로 쓴 것이었다.[14] 하지만 톨스토이는 데카브리스트에 대한 작품을 쓰려다가 3 챕터 정도 쓴 다음 손을 놨다.[15] 3편 후반부에도 나오는 대사로 미루어 데카브리스트 지식인 몇명보다 러시아 민중이 더 중요했다고 생각을 바꾸고 전쟁과 평화에 집필한것. 데카브리스트 관련 소설을 쓰다 접고 쓴건 맞는데 프롤로그가 본편을 잡아먹은건 아니다. 애초에 생각을 바꿔서 작품을 엎어버리고, 다른 소설을 쓴것이다. 전쟁과 평화는 내용상 1813년에서 끝난다. 에필로그는 7년후 1820년 이야기가 잠깐 나오고 등장인물들의 뒷이야기와 시대상이 약간 나오는정도고 데카브리스트 난은 역사상 1825년 12월이니 당연히 작품엔 나오지 않는다.

7. 톨스토이의 조상

투조프 관련
앞서 전쟁과 평화 떡밥과 관련하여 쿠투조프가 톨스토이 가문 조상설(?)까지 돌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쿠투조프는 딸만 5명을 남기고 외손자 마트베이 표도로비치 톨스토이(П. М. Толстой,Matvei Fyodorovich Tolstoi)가 물려받았다 해서 레프 톨스토이는 쿠투조프의 외증손이고(?) 전쟁과 평화에서 조상빨로 실제이상 후빨 했다는 음모론(?)까지 있는데. 결론부터 쓰자면 쿠투조프는 레프 톨스토이의 조상이 아니다. 레프 톨스토이의 할머니는 고르차코바 공작 가문 출신 펠레게야 니콜라예브나 톨스토야 백작부인이지 쿠투조프의 딸 파라스코비아가 아니다...

톨스토이 가문은 14세기 발트지역 리투아니아에서 발원한 귀족가문으로 꽤 후손이 많은 편이고[16]쿠투조프의 진짜(?)외증손은 이반 이바노비치 톨스토이 백작(Ivan Ivanovich Tolstoy: 1858~1916)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17]

레프 톨스토이 직계 조상의 간략한 가문 역사를 쓰자면 17세기 러시아 차르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시절부터 톨스토이 가문은 궁내관, 궁정고관 군인 등을 지냈고 18세기 초 표트르 대제 시절 레프 톨스토이의 현조부 표트르 안드레예비치가 여러 활약[18]으로 백작 작위를 획득하고, 가문의 중시조급 조상이 되었다. 이후 예카테리나 1세를 옹립하는데 공신이 되었고 2년 만에 서거하자 이반 5세의 후손 안나 이바노브나가 등극해서 고조부 이반페트로비차와 나란히 체포되어 작위와 재산이 박탈되고 이반 페트로비치는 현조부보다 빨리 병사하여 가문의 위기였지만, 증조부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시절 엘리자베타 여제가 즉위 하며 작위와 재산이 복구 되었고, 조부 일리야 안드레비치는 해군장교와 근위병으로 활약하고 준장으로 퇴역 했다.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는 조부의 외아들이며 두 여동생이 있는데 1812년 전쟁에 참여했고 파리까지 전투에 참여하여 훈장을 얻었고 중령퇴직 후 카잔 주지사를 지냈다.

톨스토이의 외가 볼콘스키 공작가문[19]은 톨스토이의 친가보다 더 명문가인데 가문의 기원은 7~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류리크비치 가문과 체르니고프스키 가문의 후손으로 러시아 전통 귀족중에서도 성골급으로 치는 초명문가이다. 볼콘스키 가문의 성은 과거 영지의 볼콘카 강에서 유래하여 13세기부터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톨스토이가 물려받는 야스나야 폴라냐는 외증조부 쿠투조프가 아니라 육군소장을 지낸 '세르게이 표트르비치 볼콘스키 공작'이 구입하였으며, 외조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는 예카테리나 2세시절 고관을 지냈다가 좌천되어[20] 영지에 정착했고 외동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볼콘스카야를 낳았지만 딸이 2세때 아내가 사망하였지만 평생 재혼하지 않고 딸 하나만을 열심히 길렀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외조부는 당시 러시아 귀족과 달리 상당한 지식인이라서 프랑스 문화와 볼테르에 관심이 많았고, 어머니 마리야에게 불어, 독어, 이탈리아어, 영어에 수학 물리학 경제학까지 가르치고 자신은 식물과 원예 연구를 하면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어머니 마리야는 외조부가 죽고 얼마 후에 톨스토이의 아버지 니콜라이를 만나 결혼하고 톨스토이 가문은 외가 재산을 몽땅 물려받아서 떼부자가 되었다. 결론은 장가를 잘가야 한다.

8. 영지 야스나야 폴랴나


러시아에서도 명문 귀족이었던 톨스토이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영지는 야스나야 폴랴나(Ясная Поляна - 밝은 숲의 빈터) 라고 불린다. 모스크바 에서 남방 200km 떨어져 있는 툴라 시의 근교에 있다. 외증조부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볼콘스키 공작의 영지로 외동딸인 그의 어머니 마리야 니콜라예브나가 물려받고 아버지와 결혼 한 후 이곳에 정착했다. 백작 작위를 가졌던 톨스토이는 장년기 이후 이곳에 정주하며 작품 활동을 했고, 자신의 자택을 이용하여 학교를 만들어 소작농들의 자식을 가르쳤다. 이 저택은 작은 도서관도 딸려 있는데, 장서수는 2만권을 넘는다고. 톨옹이 사망한 후에도 이 영지내의 묘지에 묻혔다.

톨스토이가 사망한 후, 미망인 소피아는 정부에 이곳을 국가가 관리해 줄 것을 차르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했으나, 거절당했다. 1917년 집권한 공산 정부는 집권한 후 바로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하고 국가가 관리했다. 다만 이곳의 관리를 톨스토이의 큰딸 알렉산드라에게 맡겼는데, 그녀는 공산 정부가 싫어서 이후 해외로 망명해버리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때 이 영지는 독일군에게 접수되고 자택은 독일군의 야전병원으로, 그가 남긴 원고들은 독일군의 땔감이 되는 굴욕을 당하기도 한다. 더구나 독일군의 만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톨스토이 묘지 옆에 줄줄히 전사한 자군 병사들의 무덤을 썼으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으로 침략자와 동침하게 된 톨스토이옹이 황천에서 상당히 불편하셨을듯..

그 당시 톨스토이의 자택을 접수했던 부대를 지휘한 독일군 지휘관 하인츠 구데리안은 자서전 "기계화부대장" 에서 자기는 대문호의 저택에 손까딱 하지 않았고, 땔감설은 소련의 모략선전이라고 주장했다. 근데 소련의 선전선동 못지 않게 구데리안의 자서전도 자기 변명이 꽤 많아서 진실은 저너머에.

어쨌든 독소전쟁 후에는 독일군이 톨스토이옹의 저택에 저지른 여러 만행들은 모두 원상복귀되었고, 현재는 2차대전 이전의 상태로 보존되어 공개되고 있다.

9. 평가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소련이 건국된 이후에도 톨스토이는 오히려 더 높이 평가받는 기묘한 현상이 생겼다. 톨스토이가 특히 소련 체제에서 높이 평가받은 이유에는 농민의 현실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그들을 대변하는 톨스토이의 작품들이 공산 세력의 '롤레타리아 정신'과 연결된다는 점도 있었다. 한 예로 블라디미르 레닌은 "톨스토이 이전에는 진정한 농민의 모습이란 없었다"라고까지 할 정도였다. 다만 톨스토이만 이런 높은 대접을 받은 것은 아니고 러시아의 문학 애호 경향은 소련에서도 유유히 이어져서 알렉산드르 푸시킨, 니콜라이 고골, 안톤 체호프 등의 대부분의 문호들은 소련에서도 존경을 받았다.

소련에서는 (적어도 문학에서 만큼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같은 대대적인 문화탄압이나 과거부정은 벌어지지 않았고, 그저 구체제적 경향이 농후한 작가들이 개별적으로 비판받은 정도였다. 대폭 평가 절하된 인물은 혁명 운동을 악령으로 디스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정도고 그도 흐루쇼프 시절에 복권되었다. 오히려 러시아 문학의 전통은, 막심 고리키, 렉산드르 헤르첸, 투르게네프등의 작품을 유년 시절부터 읽고 열광하며 혁명과 인민 해방의 꿈을 꾸며 자라 결국 나라를 얻게 된 블라디미르 레닌, 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 등 볼셰비키의 지도자들을 통해 소련 체제의 성립과 연결되었다는 것이 더욱 정확한 표현이다.

2차대전 이후 동독에서도 보인 특성이지만, 제정 러시아의 문필가들은 정치성 만으로 목숨이나 경력, 명성을 날려 버리기에는 볼셰비키 혁명가-지도자들에게 당장 감정적인 차원에서부터 너무 큰 존재였다. 인과 마가리타의 저자 하일 불가코프, 강은 흐른다하일 숄로호프 등 적지 않은 작가들이 소련의 공포 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점에 스탈린에게 직접적으로 항의를 했음에도 큰 보복을 당하지 않고 살았을 만큼 소련 당국은 적어도 문학에 관해서는 구 체제를 존중하고 계승하도록 신경을 썼다.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경우도 다른 방면에서 활약했던 반체제 인사들에 비하면 훨씬 더 온건하게 처벌 받은 편에 속한다. [21]

그러나 현 러시아 공화국의 블라디미르 푸틴 집권 후에는 정말로 "푸"대접을 받는듯. 톨스토이 서거 100주년인 2010년에도 아무 행사도 없었다고 한다. 되려 해외에서 더 화제였고 한국에서도 서거 100주기 기념이라고 행사를 가지고 그에 대한 책자나 완역판이 홍보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2010년은 공교롭게도 체호프의 탄생 150주년 기념해였는데, 체호프에 대한 행사는 성대히 열린 반면 톨스토이에 대한 행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체첸과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책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가 톨스토이의 평화주의를 부담스럽게 느꼈다는 설이 유력하다. 게다가 톨스토이는 현재 국교의 레벨로 재등극한 러시아 정교회에 파문당한 인물이다.

러시아 자국에서보다는 해외에서의 대접이 훨씬 좋은 작가이다. 실제로 러시아에서 톨스토이는 생각처럼 인정받는 편이 아니며 호불호도 갈리는 편이다. 러시아 문학 = 톨스토이 정도로 생각하는 우리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러시아 사람들은 보통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알렉산드르 푸시킨[22] 등을 훨씬 알아주는 편이다. 이는 도스토옙스키 등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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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러시아인 미들네임은 아버지의 이름이다. 형제들은 다 니콜라예비치다. 같은 예로 알렉산드르 1세의 형제들은 아버지가 파벨이라 4형제가 모두 파블로비치다.
  • [2] 훗날 전쟁과 평화에서 '소냐' 캐릭터로도 등장한다.
  • [3] 후술 하겠지만 톨스토이 가문은 레프 톨스토이 직계만 있는게 아니다.
  • [4] 물론 75만을 한 번에 동원한 건 아닌 여러 장면에 걸쳐 따로 동원했다. 사실 소련 시절, 이런 경우가 꽤 있었다. 러시아 신화를 영화로 만든 작품에선 거대한 드래곤과 싸울 때 10만이 넘는 군인들을 동원하기도 했으며 《요한 돈 강》(1957)이라든지 여러 영화에서도 엄청나게 동원했다. 한편 당시 중국은 제작규모 열악과 같이 문화대혁명 와중으로 영화 인력까지 숙청하던 터라 이런 대규모 인력 동원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한 장면에 엑스트라 최다 동원 영화는 1982년작 《간디》에서 장례식을 보러온 인도 30만 엑스트라들. 비슷한 예로, 북한의 《불가사리》에도 몇 만 명 동원되었다.
  • [5] 이 작품은 애먼 대천사 미카엘을 끌어들였다. '천사=미카엘'이라는 인지도 때문이었지만...
  • [6] 어린 학생들에겐 귀족 출신 잘사는 주제에 짐승같이 피임도 안하고 징그럽게 많이낳아서 여성학대 드립칠지도 모르지만 당시 귀족들도 높은 영아 사망률때문에 폐경전까지 덮어놓고 낳는게 더 일반적이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50년전까지 여성 1명당 출산율이 6명이 넘었다.
  • [7] 톨스토이는 장 자크 루소의 영향을 받아 당시 귀족 여성들이 애들을 팽겨치고 유모에게만 맡기는것에 반대했다.
  • [8] 실제론 스코틀랜드계 이고 발트 태생 러시아인이다.
  • [9] 차르 시절이라 대놓고는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알렉산드르 1세의 실책도 써 놓긴 했다.
  • [10] 톨스토이 자신은 전쟁과 평화를 소설도 서사시도 연대기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창작물이라 평가했다.
  • [11] 문관 톨스토이 백작이라는 또다른 인물이 나오는데 역시 똥별이다. 조상디스
  • [12] 투르크 전쟁서 한 눈을 잃었다.
  • [13] 작품에서는 피에르.
  • [14] 한때 초판본이라고 해서 약간 다른 결말로 철학적 내용이 전혀 없는 축약판이 나온 적이 있고 한국에서도 번역되었다. 문제는 그 작품은 살아생전 톨스토이도 자기 작품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습작이었고 그걸 소개한 학자도 자기가 발견한 초판본을 임의 삭제 했다는 의혹이 있다. 즉 공인된 판은 우리가 보는 바로 그 장편이 맞다.
  • [15] 당시엔 당연히 발표도 안되었고 사후 톨스토이 전집에서는 원고들을 모아 발매 되었다. 당연히 미완성으로 더 쓸 가치를 못느낀것
  • [16] 톨스토이 가문의 여러 인물들 참조, http://en.wikipedia.org/wiki/Tolstoy_(family)
  • [17] 톨스토이 가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여기도 참조하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rsakes&logNo=130175780969
  • [18] 원래 표트르 대제의 반대편 소피아 섭정왕 편이었으나 전향해서 표트르 대제의 신임을 얻었고 이후 여러 군공과 초대 오스만 제국 대사로 10년간 재직하면서(전쟁시엔 2년간 감금도 되었다.) 공을 쌓았는데 표트르 1세에 반기를 들고 도망간 황태자를 설득하여 납치(?)한 공로도 유명하다.
  • [19] 전쟁과 평화에서 주인공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의 이름이 외가에서 유래하며 V에서 B로 바꿨을 뿐이다.
  • [20] 당시 권력자였던 피촘킨이 먹고 버린 정부와 결혼하길 권유했는데 거부하고 외조모 예카테리나 드미트리예브나 트루베츠카야와 결혼해서 찍혀서 관운이 막히고 아르헹겔스크 주지사를 하다가 짤렸다.
  • [21] 솔제니친은 서방으로 추방형을 받았는데, 소련 체제가 굳이 가혹하게 다루려고 했다면 솔제니친을 시베리아나 북극권의 굴라그나 감방으로 보내버릴수도 있었다.
  • [22] 혈연상 푸슈킨과도 먼 친척이라고 한다. 흠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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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3 23:4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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