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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last modified: 2015-04-10 20:34:30 by Contributors

프랑스의 역대 국왕
루이 13세 루이 14세 루이 15세

대관식 복장을 입은 루이 14세, 이아생트 리고, 1701년하얀 스타킹의 쩌는 14세
왕호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 루이 14세
(Louis XIV Roi de France et de Navarre)
이름 루이 디외도네 (Louis-Dieudonné)
생몰년도 1638년 9월 5일 ~ 1715년 9월 1일 (76세)
출생지 프랑스 왕국 생제르맹앙레
사망지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재위기간 1643년 5월 14일 ~ 1715년 9월 1일 (72년 110일)
대관식 1654년 6월 7일

짐은 곧 국가니라. L'Etat, c'est moi(레따 쎄 무아)

Contents

1. 소개
2. 즉위와 재위 초반
3. 잇따른 전쟁
3.1. 위그노 탄압과 낭트칙령 폐지
4. 장기 집권
5. 그의 에피소드

1. 소개

프랑스 역사상 가장 강한 권력을 가졌던 왕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 별명으로 태양왕(Le Roi Soleil)이 있다. 중앙집권적이었던 프랑스에서도 가장 강대한 권력과 유명세를 가졌던 왕이며, 그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한 왕이기도 하다. 유럽의 절대군주를 말하면 항상 빠지지 않는 인물.

대단히 사교적이고 과시적인 인물이었으며, 프랑스 귀족층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앙시앵 레짐아이돌 그것을 위한 장소로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했으며,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야욕을 드러내었던 인물.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쓸쓸한 인생을 보내게 되었으며, 과도한 전쟁과 사치로 인해 프랑스의 국력을 갉아먹게 된다. 부르봉 왕조의 절정이자, 몰락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다.

2. 즉위와 재위 초반

리즈 시절 열 살 때의 루이 14세, 앙리 테스틀랭, 1648년
소녀같다...

부모인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극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탄생은 국가적 축복을 받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 그 자체였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지나쳤던 루이 13세는 세 살배기에 불과한 아들이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정없이 매질하는 모진 아버지였다. 그러던 루이 13세가 1643년 급서하면서 5살이 채 되기 전에 즉위했고, 어머니가 섭정을 했으나 대부분의 국사는 추기경이자 재상인 마자랭(리슐리외의 후임자)이 1661년까지 맡았다. 23세에 친정을 시작한 것.

1648~1653 연간의 프롱드의 난[1] 때는 어머니와 동생 필리프와 함께 수도 파리를 떠나 프랑스 각지로 쫓겨 다니며 오랜 피난 생활을 했었다. 성난 반란군들이 모후인 안 토트리슈의 마차를 둘러싸자 모후가 울부짖으면서 "이 아이가 프랑스의 유일한 미래" 라면서 아들 루이를 내보인 덕에 겨우 풀려난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반란에 시달리지 않았던 평화로운 시절에는 위에 서술한 대로 나이에 맞지 않는 엄한 교육에, 오래 살아야 한다는 미신적인 이유로 동생 필리프와 함께 여자아이 옷을 입고신라 혜공왕? 살았다고 한다. 이때의 암울했던 기억이 반란을 진압한 이후 절대군주가 되어 베르사유 궁전을 건설하고 식탐 대왕이 된 배경이라는 시각도 많다.

1661년 루이 14세는 친정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왕이란 무엇인지 보여주기 시작했다. 귀족들을 무척 싫어했기에 정치적으로는 귀족들의 참여를 제한하는 한편 콜베르 총리를 비롯한 총명한 부르주아 출신들을 발탁해 요직에 앉혔다. 또한 지방 곳곳에 직속 관리를 파견하여 귀족들을 감시했다. 반면 귀족들에게는 '국왕 직속 수건 담당'. '국왕 직속 낭독인', '국왕 직속 심부름꾼'과 같은 차마 웃지 못 할 사이비 같은 직함을 하사해 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2] 그는 궁정 사람들을 과도한 에티켓 으로 옥죄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교양인지 일일이 규정했으며, 이러한 규범은 남녀노소와 직책별로 달랐다.

그는 스스로 나라의 핵심이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사생활에서든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직성이 풀렸다. 이러한 심리는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에게 향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배우와 비슷한 것이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좁게는 궁정, 넓게는 나라 전체가 하나의 무대이며 자신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권력자가 예술을 향유함에 있어서 루이 14세가 다른 왕들과 가장 남달랐던 점은 그 스스로가 예술의 주체, 즉 아티스트였다는 데 있다. 근사한 극장을 지어주고, 예술가들을 데려와서 VIP석에 관람하고 공연이 끝나면 박수로 답례하는 걸로 루이 14세는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천성이 연예인이었다. 배우에게 향하는 박수조차 질투한 그는 자신이 무대에 서는 쪽을 택했다. 네덜란드계 미술사학자 반 룬은 이런 루이 14세에 대해 "왕으로 태어났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한량이 되었을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어린 시절 자신을 공격했던 파리가 영 불편했던 그는 궁정에 오래 엉덩이를 붙이지 못하고 아버지 루이 13세가 사냥용 천막으로 이용하던 베르사유를 자주 찾다가 아예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1662년, 친정을 시작하는 동시에 준공을 시작한 베르사유 궁전은 20년 동안의 공사 이후 일단락되었다. 이사를 하고도 건설이 계속 진행되었으니까. 수십 년에 걸친 공사 결과, 오붓한 분위기의 사냥용 천막이었던 베르사유는 1만 명 이상의 왕실 식구가 상주하며 한 달을 머물러도 다 돌아보지 못할 만큼 거대한 궁전으로 탈바꿈했다. 이 럭셔리한 궁정은 미적 스케일에 있어서 유럽 모든 왕실을 단연 압도했다.[3]

화려하고 장대한 베르사유 궁전 건설 이면에는 재무 장관이던 니콜라 푸케에 대한 루이 14세의 질투심이 있었다. 파리 근교에 멋진 정원을 갖춘 저택에서 살던 푸케는 루이 14세를 자기 저택에 초대했다. 그런데 왕궁보다 멋진 저택에서 사는 푸케에게 질투를 느낀 루이 14세는 이런저런 죄목을 붙여 그를 실각시켰다. 그리고 왕의 권위야말로 절대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푸케의 저택보다 더 화려한 새 궁전 건설에 나섰는데, 그렇게 지어진 것이 바로 베르사유 궁전이다.

3. 잇따른 전쟁

그는 당시 찰스 1세, 올리버 크롬웰, 찰스 2세 등을 거치면서 네덜란드를 제치고 점점 부강해지던 영국에게 맞먹기 위해 세금을 왕창 거두었다. 영국에 대한 경쟁 심리는 자연히 침략전쟁으로 이어졌다. 루이 14세는 레네 산맥알프스 산맥, 라인강이 프랑스의 국경이라고 선언했다. 이른바 '자연 국경 설'인데, 프랑스의 국경은 하느님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것은 자연 환경에 의해 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건 뭐...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렇게 말해놓고는 라인 강을 넘어서 전쟁을 계속 벌였다(…). 그럼 그 말은 왜 한 건데? 내껀 내꺼 네 건 내꺼

대표적인 전쟁으로는...

  • 1667년과 1672~1678년의 영란전쟁 개입.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의 전쟁을 틈타서 처음엔 네덜란드를, 나중엔 영국 편을 들며 여러 차례 벨기에(당시 스페인령 네덜란드), 네덜란드의 영토를 마구 빼앗았다. 그 유명한 "운하를 터트려 간신히 기사회생"한 전쟁 가운데 하나. 찰스 2세와 비밀 동맹을 맺고 네덜란드를 털러 갔지만... 전쟁은 졌다. 그러나 이 전쟁 때문에 네덜란드의 피해도 만만치 않아서 열강에서 탈락하는 계기가 된다.
  • 1683-84년의 "재결합 전쟁"과 뒤이은 1688~1697년의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War of the League of Augsburg. 혹은 9년 전쟁, 대 동맹전쟁). 독일의 팔츠 지방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침입하여 독일,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다구리를 맞았지만 전체 병력은 프랑스가 더 많았다(…). 프랑스 40만 대 동맹군 35만...대충 협상 맺고 끝.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4]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급서하면서 그 영토를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 필리프 공작(Philip, duc d'Anjou = 펠리페 5세)에게 물려주었는데[5] 이것을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트 1세가 딴지를 걸면서 전쟁이 터졌다. 이번에도 스페인 + 프랑스 대 독일, 네덜란드, 영국의 다구리였다. 이것이 1701년부터 1714년까지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다.[6]

이 전쟁은 대체적으로 프랑스가 유리하다가 사부아 공 외젠, 말버러 공작의 뛰어난 능력에 결정적 전투에서 패하여 상황이 재역전되는 것을 반복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다굴 받는 상황인데다가 프랑스의 재정은 식민지가 있다고 해도 이제 전쟁을 버티기엔 무리였고 국민들도 전쟁에 지친 상태였으며 무엇보다 영국이 엄청나게 성장하여 프랑스를 방해하였다.[7]

전쟁은 질질 끌다가 연합군이 프랑스를 쳐바르고 나서 위트레흐트 조약(Utrecht, 1713)과 라슈타트 조약(Rastatt, 1714년)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펠리페 5세는 스페인의 왕이 되었으나, 프랑스의 왕위는 계승할 수 없게 되면서 종결되었다. 따라서 두 왕국이 향후 합쳐질 위험은 사라졌고[8],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적법 계승자로서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의 스페인 소속 영토를 대부분 따냈다. 거꾸로 루이 14세는 전쟁 중 왕세자와 왕세손 증손자들을 잃는 등, 말년에 주요 계승자 대부분이 요절하여 적출 소생으론 루이 15세만이 남았다.

결국 치세 대부분을 전쟁으로 보내면서 국민들의 고통만 늘었고, 유럽 최고의 육군을 자랑하던 프랑스의 세력은 이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쇠퇴하게 되었다. 다만 계승전쟁 이후의 스페인은 부르봉 왕조 지배기인 18세기에 놀라울 정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근데 나폴레옹 전쟁으로 말아먹었지

3.1. 위그노 탄압과 낭트칙령 폐지

또한 1685년에는 신교에 대한 차별 금지를 천명한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최악의 병크를 저지른다. 국가의 종교를 가톨릭으로 통합하기 위해서였는데, 덕분에 프랑스의 칼뱅 파 개신교 신자들인 위그노(Huguenot) 25만 명이 네덜란드, 영국,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으로 대거 탈출했다. 문제는 이들이 대다수가 상공업에 종사하고 있었다는 것. 수공업의 경우는 거의 마비상태였단다.[9]

뜬금없이 1685년에 갑자기 낭트 칙령 폐지된 것은 아니었고, 집권 초반 절대왕정을 구축하고 했고, 종교 일원화와 더불어 위그노 탄압이 "하나의 국가, 하나의 국왕, 하나의 종교"를 모토로 이미 시행중 이었다. 조부 앙리 4세는 명군으로 평가 받지만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은 프랑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톨릭교도들에게 위대한 국왕의 오점 취급을 당했고 칙령이란 것은 하나의 영구적인 법률이 아닌 국왕의 명령에 불과 했기 때문에 폐지라기보다는 철회라고 봐야 한다.[10] 다만 조부 앙리 4세랑 아버지 루이 13세는 위그노의 지지를 얻고 계속된 종교 갈등과 대립을 막기 위해 낭트 칙령을 시행하고 유지한 것이 제일 현명한 정책인데 이것을 폐지한 것 자체가 병크가 아닐 수 없다.

위그노 탄압은 낭트칙령 폐지 전부터 이미 대놓고 시행했는데 구체적으로는 위그노의 자녀를 강제로 빼앗아 가톨릭 집안으로 양자로 보내거나 위그노 가정에 당시 용기병(龍騎兵, dragoon)을 보내서 개종할 때까지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당시 용기병은 국왕의 정예병이었기 때문에 위그노 집에 보내서 개종을 권유(?)하는 거니 당연히 살인, 강간, 약탈, 폭행은 덤 이었다.

이런 식이었으니 신교도들은 울며 겨자 먹기라도 루이14세가 빨리 죽기를 기원하며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 모두가 개종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절대왕정 특성상 아첨꾼들이 북 치고 장구 치며 실적을 올리고 과장한 것을 루이 14세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프랑스에는 더 이상 신교도가 없다" 는 것을 선언하고 낭트 칙령을 폐지한 것이다. 신교도들의 증오를 받은 것은 안 봐도 비디오.

물론 신하들과 왕세자(도팽) 조차도 크게 반대 했지만 루이 14세를 막지는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에 거듭된 전쟁과 실정으로 루이 14세가 욕을 바가지로 퍼먹고 죽고 나서도 축제 분위기(?)였지만 낭트 칙령 폐지는 유일하게 잘 한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국가재정 기반 악화로 이어졌다. 원래 프랑스는 앙리 4세와 명재상 쉴리 덕에 엄청나게 재정이 풍부한 상태였다. 또한 아버지 루이 13세도 30년 전쟁으로 상당부분 탕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재상 리슐리외가 재정에 많은 애를 썼기에 적자는 안 났다. 거기에 콜베르의 중상주의적 정책으로 어느 정도 회복되기도 했다. 하지만 세금을 내야 될 부유한 시민 층들 중에 위그노들이 다수였으니 세입이 감소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개선할 생각은커녕 매번 무의미한 전쟁을 벌이고 사치를 일삼으니 프랑스 재정은 파탄이 나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콜베르도 한심한 루이 14세한테 진절머리가 났을 정도.

물론 낭트 칙령의 철회의 부정적 효과에 대해서는 반론도 존재한다. 1684년부터 1717년까지의 경제적 활력 상실은 위그노의 집단 이주보다는 두 차례의 전쟁(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 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오히려 프랑스에 잔류한 대부분의 위그노[11]들은 거짓으로 개종한 다음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외국에 나가 있는 위그노들과도 거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18세기를 특징짓는 프랑스의 무역 확장[12]에 기여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그가 낭트 칙령을 폐지하면서 신교도들한테 끼친 해악은 국가와 국민들한테 큰 고통만 주어 비난을 피할 수 없다.

4. 장기 집권

중장년기
1715년 9월 1일에 죽을 때까지 왕좌에 앉아 있었는데, 77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4일 전이었다. 그의 치세기간은 최종적으로 72년 3개월 18일이었는데, 유럽의 군주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했다.

그를 능가하는 왕은 태조왕(93년), 장수왕(78년) 등이 있다. 그 외의 랭킹으로는 이집트 파라오 포프 2세(90년, BC 2566-2476)가 있다. 포프 2세나 태조왕의 경우 과장되었다는 해석이 많은 것을 보면 사실상 장수왕 다음으로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럽에서 두 번째로 오래 재위한 사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로써 1848~1916, 즉 68년간 재위했다. 이 분은 조만간 엘리자베스 2세에게 따라 잡힐 듯.

치세 말년인 1711년경 아들인 왕세자(도팽, 혹은 그랑도팽) 루이는 이미 죽었고,[13] 왕세손(프티 도팽)도 나이 30에 급사.... 둘째 손자 필리프는 스페인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펠리페 5세)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패하면서 프랑스 왕위 상속권을 영구적으로 포기... 셋째 손자 베리 공작도 급사.... 맏 증손자마저 천연두로 사망하자 왕위계승을 할 만한 적통은 둘째 증손자 루이 15세가 계승했다. 손자가 계승한 장수왕이나 빌헬름 1세보다 한수 위.

참고로 이러는 동안 이웃 영국에서는 그의 재위 동안 스튜어트 왕조의 찰스 1세, (청교도 혁명 후) 올리버 크롬웰리처드 크롬웰의 공화정, (왕정복고 후) 찰스 2세, 제임스 2세, (명예혁명 후) 윌리엄 3세메리 2세(공동 왕), 앤 여왕, 하노버 왕가의 조지 1세가 차례로 재위했다. (왕이 일곱, 호국경이 둘)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던 절대왕정국가였던 영국이 왕권과 의회의 대립에서 의회가 확고한 승리를 거두면서 입헌군주제 국가가 된 기간이었던 것이다.

앞서 말했듯 루이 14세의 말년은 매우 비참했기에, 그는 죽으면서 네 살배기 후계자에게 다음과 같은 참회의 말을 남겼다.
“짐만큼 무수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드시 피하도록 하라. 그 전쟁들은 신민들을 파멸시켰다. 짐은 종종 전쟁을 너무 가볍게 여겨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생각하였다. 너는 이웃 나라와 싸우지 말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힘써라. 짐이 밟은 나쁜 길을 따르지 말라. 국민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는 정치를 하여라. 아쉽게도 짐은 행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물려준 나라는 이미 왕의 능력으로 변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루이 15세 역시 많은 전쟁을 벌였고, 루이 16세 때 결국에는 프랑스 혁명이 터지게 된다.

동시에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
뭐(...) 왕가가 무너지더라도 프랑스 자체가 멸망 했다던가 그런 적은 없으니까 결과적으로 따진다면 맞는 말이긴 하다(...). 국가란 개념자체는 없어지진 않았지 지금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그가 죽자 대다수가 기뻐했다고 전한다.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느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란 말도...

또한, 따져보면 프랑스 혁명의 씨앗도 이 인간. 프랑스 혁명 이후로 부르봉 왕조는 결국...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과적으로는 암군에 가까웠다고 봐도 되겠다. 진시황이나 한무제필도 나고 말이다. 다만 자신의 왕국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 하나만은 충분해서, 죽을 때까지 성실하게 집무했다. 이것도 진시황 비슷하긴 하지만...

5. 그의 에피소드


위장병이 심한 나머지 속이 좋지 않아 의자에 앉은 채로 용변을 보았다고 한다. 귀족들의 반응은 "시원하시겠습니다." (…).이기붕?? 후빨은 역사는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왕의 배변 순간에 함께한 사람들 중 일부는 닦아준다던 하는 뒤처리를 하는 영광 을 누리기도 했다. 또 몇몇 귀족들은 이걸 흉내 내서 집에서 똑같은 짓을 했었다 (...) 그리고 평생 목욕도 거의 안하고 살았고(딱 3번했다고 한다.).[14][15] 치질에 걸려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16]

주치의가 이빨을 다 뽑아버리고 입천장을 지지는(!) 바람에 입천장에 구멍이 나서 음식을 먹으면 코로 음식물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 주치의는 당대 최고의 명문인 소르본 의대 출신의 당대 최고의 의사 다칸으로, 당시 의학에서는 치아야말로 만병의 근원이며, 건강을 위해서는 불결한 입천장을 소독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7] 또한 가장 이상적인 장의 상태는 텅 빈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18] 왕에게 다량의 설사약을 먹였고, 그것이 앞에서 말한 것처럼 늘 용변을 보고 산 원인이 되었다. 심지어는 바지에다 그대로 실례한 적도 있었다고……. 그렇기에 루이 14세 시대에 화장실은 그의 주된 정무 공간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유럽인들이 대부분 지저분하긴 했지만 루이 14세는 유난히 더럽고 악취가 심했다고 한다. 왕의 말년의 애첩인 맹트농 부인이 그 악취를 견디다 못해 왕에게 목욕을 하며 살라고 권했다라는 루머도 있을 정도. 때양왕

위의 동영상에서와 같이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부분을 다뤘다.

중년 이후에는 중풍에 걸리고 앞서 언급한 치아질환, 소화기질환으로 인한 설사병[19], 유동식만 섭취한 데에서 오는 영양부족[20] 등으로 몸이 좋지 않아 늘 누워 있었는데 초상화에서 보는 당당한 포즈들은 사실 상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물론 루이 본인은 그런 초상화에 크게 만족했다고.

흔히 절대 권력을 가진 왕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그의 권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평가는
"루이 14세의 키는 겨우 150cm 였지만 그 당시 프랑스에서 그보다 큰 인물은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루이 14세가 귀족들을 거느리고 산책하던 중 처음 보는 얼굴이 있자 "그대의 나이는 몇인가?"라고 물으니 "당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해주십시오. 그것이 저의 나이입니다"라고 답했다고 카더라. 심지어 중학교 교과서 등에서도 언급되는 일화.

다른 일면으로는 스페인 출신으로 정략결혼이었던 아내 마리 테레즈[21]와는 소원한 편이었다고 한다. 스페인의 경건한 궁정에서 자란데다 재치가 없었던 그녀가 유럽 제일의 화려한 궁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겉돌기도 했고...그렇지만 루이 14세는 애정이 없었 긴해도 왕비로서 그녀를 추켜세워 주었다. 다른 애첩과 즐기더라도 거의 항상 잠은 아내의 방에서 잤고 부부관계도 어느 정도는 챙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이가 더 나빠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루이 14세는 "그대가 짐을 처음으로 슬프게 하는군."이라고 말하며 슬퍼했다.

정실 왕비인 마리 테레즈와의 사이에 여러 아이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적손(嫡孫)은 오로지 뒷날 루이 15세가 되는 손자만이 남았다. 수많은 애첩들에게서 서자, 서녀들을 보았고 자녀들에게는 상당히 자상한 아버지였다. 서자와 서녀들도 궁궐에서 직접 안아 길렀으며 자란 뒤에는 작위와 재산을 아낌없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애정편력은 상당히 복잡했다.

  • 루이 14세의 첫사랑은 섭정이었던 추기경 마자랭의 조카 마리 만치니였는데, 그녀는 국왕과 결혼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었고 둘의 관계를 반대한 마자랭과 안 도트리슈에 의해 결국 이탈리아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 친동생인 오를레앙 공의 아내[22]와 염문을 뿌렸고, 이후에는 그녀의 시녀인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와 연애하여 아이들을 낳았다.
  • 라 발리에르와의 관계도 소원해진 후에는 신하인 몽테스팡 후작의 아내와 바람이 나서 꽤 오랫동안 동거하게 됐고 라 발리에르는 밀려났다. 둘 사이에는 6명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루이와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당시 교양 있는 부인으로 이름나 있던 맹트농 부인에게 아이들의 양육을 부탁했다. 루이는 몽테스팡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퐁탕주 부인 등을 또 정부로 삼았고(...) 자신이 라 발리에르처럼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 한 몽테스팡은 마녀를 찾아가 흑미사를 올리며 왕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했는데, 결국 이 마녀가 잡히면서 연루되어 있던 몽테스팡은 총애를 잃었다.
  •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맹트농 부인은 왕과 사랑에 빠지기 전에 그에게 불륜을 그만두고 아내를 소중히 여기라는 충고를 하였고 루이가 그 말에 따라 몽테스팡과 결별했다고 한다. 하지만 왕은 또 맹트농에게 빠졌고(...) 얼마 뒤에 마리 테레즈가 죽자 이번에는 아예 맹트농과 결혼해버렸다. 물론 귀천상혼이라서 공식적인 왕비가 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루이 14세 부처(夫妻)의 베르사유 궁전 생활은 일찍부터 귀족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에게도 공개되었다. 특히 일요일의 만찬은 누구나 볼 수 있었으며, 특히 루이 14세가 삶은 달걀을 까먹는 모습이 우아하다고 소문이 나서(...) 구경꾼들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은 그런 국민들의 기대에 답하기 위해 한 번에 다섯 개씩 까먹기도 했다고. 서비스 정신? 먹방의 선구자 최후에는 몸의 반신이 썩어 들어갔는데, 그 상태에서도 귀족들을 불러 모아 작별 인사를 했을 정도로 쇼맨십이 강했던 인물이다. 왕으로써, 자신의 삶이 노출되는 것 정도는 개의치 않았던 인물.

그 외에도 왕비의 옷 입는 법, 화장법, 심지어 출산까지도 공개되었다고 하는데, 특히나 출산 때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산모(왕비)가 기절해버릴 정도였다고.[23]

또한 문학, 예술 분야에 많은 지원을 하여 라신, 코르네이유, 몰리에르 등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가 있었고, 베르사유 궁전은 이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따라서 지방의 영지에서 올라와 궁에 상주하며 중앙 화된 귀족들과 이들 예술가들의 결합은 화려한 궁정문화를 꽃피우게 된다. 연극, 오페라, 가면무도회가 자주 열리고 그 중 백미는 루이 14세가 직접 등장하는 무대나 무도회.

궁중 음악가인 쟝 바티스트 륄리와는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관계로, 그와 그의 음악을 특별히 아꼈다. 심지어 동성애 소문까지 퍼질 정도. 허나 륄리가 안 좋은 소문에 휩싸이자 그를 멀리했다. 륄리가 작곡한 발레에 맞춰 루이가 춤을 추는 공연이 잦았는데, 젊은 루이가 태양신 아폴로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면 온 귀족이 우러러보며 "태양왕 만세!"를 불렀다. 이것이 태양왕이라는 별명의 유래.

각선미가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그의 초상화를 보면 하나같이 다리를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발레를 배웠다고 하며 그런 선상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시 왕을 그리는 작화 법을 따랐다는 설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당시 어진(왕의 초상화)을 그리는 법은 지혜를 상징하는 머리는 노년의 지혜를 상징할 수 있게 중후하게 그리고, 다리는 현실의 통치체계 위에 굳건하게 토대를 둠을 암시하는 청년의 다리를 그러넣는 것이 당시의 작화 법이었다. 이를 왕권 이체설이라고도 한다. 실제로 다시 올라가서 루이 14세의 그림을 보면 다리가 유난히 젊게 그려져 있다. 그걸 단순히 각선미가 뛰어났다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수가 아닐까.

궁중무용에 관심이 많았단 이유로 조선효명세자를 루이 14세와도 비교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나서 부검된 뒤 심장은 암모니아에 담겨져 남았는데 프랑스 혁명 당시 왕속 물건들을 내다팔던 이들이 100프랑으로 팔아치웠다. 이걸 영국인 성직자 윌리엄 버클랜드 주교가 1000프랑에 사가면서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주교의 후손인 의사 프랭크 버클랜드(1826~1880)가 갑자기 먹어버렸다...아놔, 진정한 식인종 이 사람이 워낙에 별미를 찾던 미식가로 전 유럽에서 알아주던 괴인이긴 하지만.[24] 그런 버클랜드가 루이 14세 심장을 먹어보곤 특별한 맛은 없고 그저 세상에서 왕의 심장을 먹어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자랑거리가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고 하니... 루이 14세가 보면 뭐라고 할까.베어그릴스 조상?! 네가 이제 국가 도다.
사실 영국요리맛없어서 먹었다 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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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투석기의 난이란 의미. 첫 반란은 파리의 고등법원이 마자랭을 지지하지 않음으로서 일어났다. 다음 해 콩데 공작이 3개월 만에 이를 진압하였으나 마자랭과의 반목으로 체포되자 2차 프롱드의 난이 4년간 지속되었다. 프랑스에서 귀족이 일으킨 최후의 난이다.
  • [2] 나중에는 이런 자리를 얻기 위해 귀족들끼리 암투를 벌이거나 금전으로 사고파는 일까지 벌어졌다.
  • [3] 빌헬름 1세의 황제 즉위식도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최되었다.
  • [4] 루이 14세는 42세가 되는 1680년에 사경에 가까이 가는 중병을 앓았는데, 그 이후 30년간 더 전공에만 집착했다.
  • [5] 이게 가능했던 것이 앙주 필리프 공작의 친할머니, 즉, 루이 14세의 아내가 스페인의 공주 마리 테레즈였기 때문에 그 혈통을 통해 스페인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마리 테레즈가 프랑스로 시집가서 낳은 자식은 스페인 왕위를 주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 결혼조약에 있었으나 그때 프랑스 측에 스페인이 지불하기로 한 지참금을 완납하지 못한 탓에 이것을 빌미로 루이 14세가 왕위계승 제한 조항이 무효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 [6] 이는 스페인이 프랑스의 속국이 됨을 의미해서 프랑스의 힘이 강화되어 강력한 부르봉 제국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러니 힘의 균형을 원하는 유럽국가 들로선 용납할 수가 없었다.
  • [7] 당시 영국의 국왕은 앤 여왕으로, 당시 영국이 쓴 전쟁 비용이 엘리자베스 1세 시대의 거의 10배나 되었다.
  • [8] 펠리페 5세가 프랑스왕위를 물려받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데 펠리페 5세는 루이 14세의 왕세자의 둘째아들로 왕세손은 따로 있었다.... 왕세손 또한 장성하여 아들을 셋이나 두었고 애초에 펠리페(필리프)가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을 예정이었다면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가 후계자로 지명할리가 없다.
  • [9] 여담으로, 프랑스에서 탈출한 위그노들 중 일부는 네덜란드의 케이프타운 식민지로 이주한다. 위그노들은 프랑스의 포도주 양조 기술을 케이프타운 식민지에서 활용해 현대에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와인을 수출할 수 있는 생산기반을 마련했다.
  • [10] 당시가 절대왕정 시기라 하더라도 국왕의 정책이 영구적으로 확정 되려면 파리고등법원의 승인이 있어야한다. 영국에서는 의회가 왕의 견제 역할이라면 프랑스에서는 파리고등법원이 그 역할을 했다.
  • [11] 스코빌은 1680년대 프랑스 위그노들의 수를 150 ~ 200만 명으로 추산하고, 칙령 철회 전에 10% 정도가 이미 프랑스를 떠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추정에 따라 수치가 다르긴 하지만, '상당수의 위그노는 여전히 프랑스에 잔류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물론 이 경우 모국을 등지고 이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의 이주, 한 마디로 '어딜 가도 먹고 살 수 있는' 숙련공의 이주라는 상대적인 수치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 [12] 18세기의 프랑스는 여러 전쟁들과 많은 선박 손실, 영국에 비해 뒤처진 금융 환경에도 불구하고 카리브 지역과의 교역을 중심으로 한 높은 수준의 무역 성장을 기록했고, 이것이 프랑스 전체의 경제 성장을 주도했다.
  • [13] 왕비에게 낳은 유일한 적자이지만 (첩에서 낳은 서자들은 많다.)루이 14세의 정책에 비판적이어서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다.
  • [14] 물론 이건 근세에 보편적인 것이긴 했다. 청결 면에선 중세만도 못했던 게 이 시대의 특징이다.
  • [15] 더러운 물로 인한 질병이나 전염병에 몇 번 데여보고 물이 질병의 전파원이라고 여겨서 물로 몸을 씻거나 하는 건 최대한 적게 하는 게 좋다고 여겼다. 더러운 물이라면 이게 맞는 말이긴 하다.
  • [16] 이 때문에 그는 수술을 받았는데, 신하들이 같은 방에 있는 상태에서 마취도 없이(!) 수술을 받는 동안 한 번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신하들 앞에서 위엄을 지키기 위한 놀라운 자제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사실 당시의 의학기술로는 이 수술자체가 대단히 위험했기 때문에 비슷한 증세를 가진 수많은 평민들을 마루타 삼아 시험해 본 후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다행히 루이 14세는 왕인만큼 의사들이 많은 신경을 썼기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 [17] 루이 14세도 아무리 건강을 위해서라도 이건 좀 너무 심하다고 주저했지만, 결국 자신의 건강은 자기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것이라면서 이를 전부 뽑고 입 천창을 지지는데 동의했다. 사실 루이 14세는 단 음식인 과자, 초콜릿, 사탕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충치가 심각했다. 나중에는 이가 다 썩어버리는 최악의 사태를 초래했다. 그래서 다칸이 아니라 다른 의사가 진찰해도 이를 다 뽑아야 할 지경이었다.
  • [18] 실제로 1800년대에도 웬만한 병은 다 관장(…)으로 치료했다. 자연과학의 발전이 의학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였다. (생리학 혁명은 레노스혈액소멸 설을 무너트린 혈액 순환이 등장한 1600년대의 일을 말한다.)
  • [19] 루이 14세는 굉장한 먹보였다. 하루 종일 먹어 대서 지나칠 정도로 과식을 했다. 그러니 소화기 질환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다. 나중에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나서 의사들이 부검을 해보니 과식으로 인해 위와 장이 일반인보다 3배나 부풀어 있었다. 그래서 부검을 한 의사들 전부가 경악하고 말았다.
  • [20] 사실 이빨이 썩어서 다 뽑아버린 나머지 음식도 유동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먹보인 루이 14세는 유동식만을 먹어야 하는 것을 크게 슬퍼했다.
  • [21] 참고로 그녀는 루이 14세의 고모(이자 외숙모)인 이사벨라와 루이 14세의 외숙부(이자 고모부)인 펠리페 4세의 딸이다. 따라서 루이 14세와는 내외종 사촌 간.
  • [22] 영국 왕 찰스 1세와 루이 14세의 고모인 앙리에타-마리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다. 루이 14세와는 내외종간
  • [23] 원래 유럽 왕실에서 왕비의 출산은 공개적 행사였다. 혹여 딸을 낳았다가 남의 아들로 바꿔치기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귀족 부인들만 참여하는 조용한 분위기로 치러졌다.
  • [24] 참고로 버클랜드는 개나 고양이 고기는 진 작에 먹었으며 이후 다람쥐, 코뿔소, 타조, 돌고래, 원숭이, 온갖 새고기, 코끼리, 기린, 해삼, 달팽이, 풍뎅이, 집게벌레 등등 지금 봐도 엽기적인 고기를 다 먹어봤다(해삼같은 경우엔 지금도 유럽에서 못 먹는 음식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대부분을 맛있게 먹었다고... 단 두더지와 돌고래 고기는 그도 먹다가 포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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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0 20:3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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