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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

last modified: 2014-10-11 20:42:48 by Contributors

旅順 여순 Lüshun

Contents

1. 개요
2. 청일전쟁
3. 러일전쟁
4. 관동군의 시작
5. 태평양 전쟁 후
6. 한국과의 관련


1. 개요

중국의 옛 도시 이름. 현재는 다롄의 일부이다.

영어로는 Port Arthur(포트 아서), 러시아어로는 Порт-Артур(포르트-아르투르). 19세기 이곳에 정박한 영국군함 함장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만주의 랴오둥(요동)반도 끄트머리에 자리잡았다. 주변에 있는 고지가 보호하는 후미진 만(灣)이 있어 천연의 항구입지를 갖추었으며, 황해와 보하이(발해)만을 감시,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일찌기 전략 요충지로서의 가치를 주목받았다.

2. 청일전쟁

19세기말 나라 북양함대의 기지가 설치되었다가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에게 점령된다 (현장을 점령한 일본군 여단장이 훗날 같은 장소에서 곤욕을 치르게 되는 삽질의 달인 기 마레스케..!!).

이때 뤼순에서는 훗날의 난징 대학살 사건을 연상케 하는 대학살이 진행되었는데,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으나 그 발단 및 전개과정이 너무나도 비슷하다. 항복 후 민간인으로 변장한 청군 병사들이 저항했거나 또는 그렇다는 핑계를 대고 일본군이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 이것이 도시 전체에서 수일에 걸쳐 진행된 것을 상부에서 무시하거나 반쯤 조장한 것. 이때 현장에서 학살을 목격한 미국인 특파원에게 일본 외교관이 정말로 학살(Massacre)이 있었느냐고 묻자 그 특파원은 학살이 아니라 도살(Butchery)이었다고 대답했을 정도로 참혹했다. 최대 희생자는 3만까지 추정할 수 있으나, 일단은 5천 명 내외가 정설이다.

청일전쟁 종전 후 뤼순, 다롄을 포함한 랴오둥반도 남단을 일본이 조차(租借)하려 했으나, 러시아+프랑스+독일의 압력으로 포기하니 이것이 삼국간섭이다. 러시아가 일본에 압력을 가한건 남하정책에 몰두하던 러시아 또한 부동항인 이곳을 탐내었기 때문. 그리고 뤼순은 러시아의 조차지가 되어 러시아 태평양함대의 실질적인 모항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했다. 뤼순이야말로 러시아가 태평양에서 얻은 최초의 부동항이었기 때문이다.

3. 러일전쟁

이후 뤼순에는 군항과 항만방어용 요새가 건설, 확장되니 머잖아 시신으로 산을 이루고 피로 강을 이루는 참극의 현장이 된다. 10년 뒤 일본군에게는 이곳을 다시 노렸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른바 사망 플래그 성립(…).


지도 왼쪽 위 Port Arthur가 뤼순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처음엔 러시아 함대를 봉쇄할 목적에서 뤼순은 그저 포위의 대상이 되었지만, 발트 함대가 다가오면서 통수부에서 뤼순을 함락시키라고 독촉하기 시작하고, 결국 일본군은 뤼순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요새화된 뤼순을 둘러싼 치열한 전투의 상징이 203고지. 상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으나, 참호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접근하는 보병에게 난사하는 전술은 이로부터 10년뒤 제1차 세계대전의 유럽전선에서 대규모로 재연된다. 전쟁의 교훈을 망각한 지휘부 때문에 죽어간 병사들 지못미(…).

놀라운 것은 러일전쟁 발발시까지 러시아가 최초 상정한 수준의 한참 아래 수준으로만 요새화가 진척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조금 짓다 만 요새. 러시아도 돈이 없는지라 예전에 중국이 구축했던 진지를 강화해서 요새화한 곳이 많고, 요새의 장갑도 그 당시의 포화를 견디기 힘들었으며, 결정적으로 숫자도 부족해서 203고지에서 보여준 일본군의 대삽질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그렇게 버티기도 어려웠을 지경이었다. 덤으로 갑자기 개전한 탓에 뤼순에는 식량도 부족해서 괴혈병이 만연했고, 무장도 잘 갖추어지지 않아서 나중에는 침몰한 함선에서 화포를 떼어서 요새에 설치하는 막장테크를 탔다는 것.

또한 뤼순의 항만은 크기가 작고 얕아서 대형함선을 수리할 도크등을 만들기 어렵다. 바로 옆에 더 크고 깊은 만을 가진 다롄이 있기 때문에 러시아는 다롄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위해 준설을 하고 공사자재를 쌓아놓았는데, 방어시설물이 전무하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일본군에게 한번에 점령당한 후 다롄은 일본군의 보급항이 되 버렸다.

게다가 뤼순과 요동반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육상통로인 진저우는 청나라시대부터 쌓은 튼튼한 성곽과 참호, 요새시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거의 방치상태로 놔두었다가 전쟁 발발 직후 소수의 병력만 배치했으나 그것마저도 단 한번의 일본군의 공격에 뿔뿔히 후퇴하는 막장행각을 벌였다. 그래서 전쟁이 발발한 지 얼마도 지나지 않아서 일본군은 뤼순을 완전히 포위할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한다면 완전포위상태에서 짓다 만 요새안에서 부족한 물자를 가지고 버티는 러시아군을 바로 옆에 보급항이 있으며 뤼순 외곽의 중요지점을 몽땅 장악한 일본군이 그렇게 오랜 시간과 희생을 들여가면서 공격 끝에 함락한 것이 믿겨지지 않을 지경. 게다가 뤼순은 청일전쟁때 이미 일본이 점령한 바 있어서 지리가 어둡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203고지에서도 나오지만 지휘관중에서 X맨이 있으면 개고생을 한다는 점이 여실하게 증명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4. 관동군의 시작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뤼순을 비롯한 주변지역 - 요동반도의 첨단 부분. 10년전 삼국간섭으로 포기해야 했던 곳을 차지한 일본은 현지를 관동주(關東州)라 일컫고 관동도독부(이후 관동주청으로 개편)를 설치하여 만주 진출의 발판으로 삼는다. 이곳에 주둔한 군대를 "관동군"이라 한다.

관동주는 홍콩처럼 조차지로서, 99년 기한으로 청나라(신해혁명 후에는 중화민국, 만주국 성립 이후에는 만주국)로부터 빌린 땅으로 2004년에는 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당연히 대영제국이 향항(홍콩)이 영원히 자기 땅이 될꺼라고 생각한 것 처럼 일본도 관동주도 영원히 자기 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99년은커녕 40년 만에 관동주를 토해내야 했다.

5. 태평양 전쟁 후

1945년 태평양 전쟁이 종료한 후 소련이 일방적으로 불가침조약을 깨고 만주를 기습 침공한다. 선조들이 러일전쟁에서 수개월간 피흘리며 싸우다 빼앗긴 뤼순에 그 후손인 소비에트의 공산주의자들은 손쉽게 침략을 성공. 소련이 접수하여 예전처럼 해군기지로 이용하려다 1955년 중국에 반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년 뤼순과 다롄을 합쳐 뤼다(旅大 = 順 + 連)라 하였으나 1981년 뤼다를 다롄으로 변경하면서 다롄시의 구(區)가 되었다. 현재 행정구역명은 다롄시 뤼순커우(旅順口)구.

6. 한국과의 관련

뤼순이 우리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올 수 밖에 없는 건,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신 뤼순감옥이 있기 때문. 일제의 위협에도 끝까지 당당하고 의연함을 잃지 않으셨다던 무대가 바로 이곳이었다. 또한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든지 묘청의 서경천도가 천년간 우리역사상 중대 사건이었다는 등의 역사관으로 알려진 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과 노블리스 오블리제 정신을 잘 보여준 독립운동가인 우당 이회영 선생도 이곳에서 순국하셨다. 잠시 묵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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