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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콴유

last modified: 2015-04-14 17:13:52 by Contributors

Contents

1. 생애
1.1. 청년기
1.2. 정치 입문
1.3. 원치 않았던 건국의 길
1.4. 싱가포르의 국부
1.5. 사망
2. 평가: 비판과 반론을 중심으로
2.1. 권위주의적 통치
2.2. 경제성장의 허와 실
2.3. 언론통제
2.4. 종합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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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왼쪽이 더 늙어보이지?

한문 李光耀
병음 Lǐ Guāngyào
객가어 발음 Lí Kông-yeu
한국어 리콴유
이광요
영어 Lee Kuan Yew
Lee Kwan-Yew[1]

1923년 9월 16일 ~ 2015년 3월 23일(만91세)

"대통령을 잘못 뽑으면 한번 임기에 정권이 망하고, 두번째 임기에 나라가 망한다"

싱가포르의 정치가.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를 지낸 뒤, 독립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26년간 장기 집권하였다. 싱가포르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으나, 재임기간 중 (그리고 지금도) 독재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권위주의적 정치체계를 확립하여 평가가 엇갈리는 사람. 한국으로 치자면 평가가 극과극을 달리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비슷하다.[2]

1. 생애

"나는 일생동안 네 나라의 국가(國歌)를 부르며 살아야 했다. 영국의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일본의 ‘기미가요', 말레이시아의 ‘나의 조국’, 그리고 싱가포르의 ‘전진하라 싱가포르'이다."
- 리콴유의 자서전 <일류국가로의 길> (From Third World to First: The Singapore Story - 1965-2000) 중에서

1.1. 청년기

1923년에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국 광둥성 출신의 객가(客家)[3]로, 중국인, 화교의 후손 중에서도 한족 이주민 집안의 후손인 셈이다. 집안은 사업을 통해 꽤 성공했는데 그 덕분에 리콴유도 좋은 교육을 받았고, 본인도 열심히 공부했는지 1935년 싱가포르 최고의 명문학교인 래플스에 수석 입학했고, 1940년 졸업시험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전체를 통괄(영국령 말레이 연방)해서 최우수 성적을 얻었다.

졸업 직후 한창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시기인 10대 후반인 1941년, 일본군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쳐들어 오자 정치적으로 각성하였다.[4][5] 전쟁이 끝난 뒤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돌아왔고, 싱가포르에서 노동자 쟁의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다.[6] 특히 다양한 인종과 언어, 민족, 문화가 복잡하게 얽힌 싱가포르에서 소송의 합의와 중재를 위해 발로 뛰며 좋은 성과를 얻어냈기 때문에 1950년대 이미 변호사로서 유명해져 싱가포르는 물론 말레이시아에도 알려졌다. 역시 흠좀무. 이 과정에서 영국 식민당국도 리콴유를 주목했다고 한다.

1.2. 정치 입문

1954년 10월 인민행동당(People Action Party, 현 집권 여당)을 창당하고 정치활동을 본격화했다. 활발한 정치활동으로 리콴유는 점차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 1959년 5월 주민선거에서 PAP가 자치의회 의석 43석 중 41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당수인 리콴유는 자동으로 싱가포르 자치정부 수반에 올랐다.

자치 정부 수반이 되긴 했지만 싱가포르는 너무 작은 나라였기 때문에 리콴유 정부는 이웃 대국인 말레이시아 연방에 가입해서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 공업으로 대성하기에 싱가포르는 자원도, 인구도, 내수시장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를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말레이시아도 리콴유의 명성을 눈여겨 보고 싱가포르를 받아들였지만, 중국계가 압도적인 싱가포르와 싱가포르의 공산주의 운동은 말레이시아에게 위협적으로 보였고, 결국 양자의 갈등이 격화된 끝에 말레이시아는 1965년 8월 일방적으로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했다. 이것도 몇 번이고 늦춰진 것으로 리콴유가 말레이시아 수상한테 몇백만명의 시민들을 져버릴 셈이냐고 절규하면서 하도 난리를 쳐대서 애물게 연기해준 것이다. 이 동안 리콴유 정부는 말레이시아의 싱가포르 축출결정을 뒤집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했고 연방 잔류에 사활을 건 리콴유의 싸움은 어느정도 성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1.3. 원치 않았던 건국의 길


하지만 1965년 8월, 리콴유 정부는 일방적으로 말레이시아 수상에게 불려가 축출 통보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싱가포르의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이때 영상을 찾아보면 리콴유는 발표를 기다리며 애물게 손수건으로 얼굴만 닦고 있었고 축출 통보를 받자마자 눈물을 글썽이며 애통해했고, 옆에 있던 싱가포르 대표단들의 표정은 진짜 X 씹은 표정이 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심지어 소감 인터뷰 중에 자신은 일생동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의 통합을 꿈꿔왔다고 하며 울먹이다가 기자들에게 인터뷰를 잠깐만 중단해달라고 한다. 어지간히도 가슴이 아팠던 모양이다. 여러 나라들중에 드물게도 분리 독립을 비통한 심정으로 받아들인 케이스. 리콴유가 일생 후회하고 슬퍼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독립'당한걸' 가장 가슴아프고 많은 사람을 실망시킨 때라고 회고하였다.(디스커버리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편 참조) [7]

1.4. 싱가포르의 국부

독립 후 리콴유는 살아남기 위해 이스라엘 장교단을 불러 군대를 육성하고, 인재양성에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를 위해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하고, 그러면서도 권위주의적 국가의 모습은 철저하게 지켰다고 전해진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유명한 싱가포르의 온갖 통제질서와 벌금제도, 태형 따위는 유명하다.[8] 심지어 미국의 압력에도 태형을 강행할 정도이니.

1959년 자치정부 수반으로 선출된 이래 1991년 명목상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0년이 넘게 싱가포르를 통치하였으며, 퇴임 이후에도 선임장관(Senior Minister)의 지위를 가지고 싱가포르 정부를 사실상 좌지우지했고, 후임 고촉통(吳作棟) 총리가 퇴임하자 아들 리셴룽(李顯龍)을 총리에 앉혀 사실상 부자세습에 성공했다. 이후 리셴룽 총리 시절에는 고촉통이 선임장관 지위를 물려받고 리콴유 자신은 내각고문(Minister Mentor, 스승장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이 되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2011년에야 고촉통과 더불어 각각 내각고문과 선임장관에서 물러났는데, 이는 그 해 총선에서 집권당인 인민행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떨어지고 야당인 노동당이 사상 최다의석을 확보한 데 따른 데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로 보인다. 본인은 성명을 통해 “총선 이후 새로운 정국에 대해 깊이 생각해 이번 결정을 내렸다”면서 “리셴룽 총리와 젊은 지도자들이 새롭고 젊은 내각을 구성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1.5. 사망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오더니 2015년 3월 18일 폐렴으로 위독하다는 보도가 나왔고, 사흘 뒤인 2015년 3월 23일 오전 3시 18분 향년 9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리셴룽 현 싱가포르 총리로부터의 발표가 있었다.

생전에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리콴유의 장례식은 3월 29일 국장으로, 국립싱가포르대학에서 엄수되었다. 세계 각국의 전현직 국가 수반 다수가 참석했고,[9]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5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의 유골함에 함께 안치되었다.

2. 평가: 비판과 반론을 중심으로

2.1. 권위주의적 통치

본인은 싱가포르 정치의 안정을 위해서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그런 그의 행태에서 '아시아적 가치'가 거론되기도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10] 싱가포르는 분명히 독재국가 맞다.

일부 옹호자들이 그가 개인적으로는 검소하고 절약하는 타입이라고 옹호하지만, 독재와 개인의 청렴성은 전혀 무관하기 때문에, 독재를 실드할 근거는 안된다.애초에 독재 권력을 쥐고 있으면 돈이 무슨 필요?

현재 싱가포르에서 이권이 따르는 국영기업이나 관변단체의 수장, 또는 정부요직들은 상당부분 리콴유 일가나 그 측근들이 차지하고 있다. 당장 싱가포르 최대의 기업으로 싱가포르 여러 대기업의 지주회사이자 전 세계 여러곳에 투자를 하고 있는 국영기업 '테마섹 홀딩스'의 CEO가 그의 며느리이자 리셴룽 총리의 부인인 호칭(何晶) 여사다. 또한, 리콴유의 차남이자 리센룽의 동생인 리셴양은 싱가포르 최대의 통신업체인 싱텔(Singtel)의 CEO를 역임한 적도 있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대통령 영부인이 LH,대통령 동생이 KT의 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11]

리콴유 본인이 직접적인 수뢰 등을 강력하게 배척하고, 싱가포르 공무원들이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정부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리콴유 일가는 정부 요직을 세습하고 있다.

그러나 부정부패와 족벌주의로 악명높은 대다수의 제3세계 국가와 달리 싱가포르의 지도층은 철처히 능력위주로 등용된 자들이며 이는 리콴유 일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리콴유 본인만 하더라도 영국 식민지 시절 싱가포르 현지인들중에서 최우수 등급의 성적을 자랑했고 영국 케임브리지를 졸업했다. 리콴유의 아들, 며느리도 미국, 영국의 명문대학 출신의 엘리트들이자 다양한 경력을 가진 자들이고.

따라서 단순히 혈통만으로 싱가포르의 정부나 공기업의 요직을 세습하는건 결코 아니다. 실제로 리콴유의 손자중 하나가 군 복무과정에서 물의를 일으켰다가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으며 낮은 학력을 가졌던 리콴유의 부친은 아들이 총리가 된 뒤에도 게속 시계수리점에서 일했다.

하지만 반론으로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한들, 일가가 공직을 맡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부적절한 것임에 틀림없다. 위에서 명문대 졸업을 했다고 옹호하는데, 사실 영미권 명문대가 학교의 명성도를 위해 외국의 유력 자제들을 느슨한 기준으로 입학시켜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2] 이것을 떠나서도 공직에 인맥이나 혈족을 배제하는 것은 공화제의 기본이고, 한국에서도 임명직 공무원에 최고집권자의 친인척이 나서지 않은 것은 불문율로 되어 있다. 이는 북한, 사우디 아라비아같은 전제 왕정 국가에서나 보이는 현상으로, 리콴유 일가가 국가의 요직을 장악하는 것을 단순히 능력으로 치장할수 있는지 의문이다.

2.2. 경제성장의 허와 실

싱가포르의 빈부격차가 큰 점이 비판의 대상의 되는건 사실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5만달러에 가깝지만, 지니계수가 46.3에 이르고 있다.[13] 이건 선진국에서는 소득불평등이 매우 큰 미국(45)보다도 더 불평등한 경우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부익부 빈익빈이 심각한 나라인데, 1990년대까지만 해도 소득불평등이 현재처럼 심각하지 않았으나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밀려들어온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인하여 기업친화적인 경제체제가 강화되었고 최근 10여년사이에 상대적으로 빈곤한 외국 이민자가 급격히 늘어난터라 빚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싱가포르에서는 사회보장제도가 제대로 안되어 있어서 아주 부자가 아닌 이상, 70살 먹은 노인들도 알바에 나서야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라는 식의 얘기가 나오는데 이는 적지않게 과장된 내용이다. 싱가포르에는 CPF(중앙연금준비기금)제도라는게 존재하는데 자신의 소득중 일정비율을 의무적으로 저축하는 개념이다. 젊었을때 열심히 일하고 저축한 돈으로 노후를 편하게 보내도록 하자는게 기본취지이고 싱가포르 정부에서는 이 CPF로 조성된 재원을 내실있게 운용하여 매년 상당한 수익을 거두고 있다.

그런데, 싱가포르도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심한 나라이다보니[14] 싱가포르인들은 연금재원이 장래에 고갈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고 그에 대한 비판여론도 존재한다.

2.3. 언론통제

언론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긴 하지만 싱가포르도 일단은 다당제 국가를 표방하기 때문에 선거과정에서나마 국민들이 자신의 불만을 표시할 수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실시되는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여당인 인민행동당의 득표율이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추세이기에 여당에서도 꾸준히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 즉, 분명한 독재정치이기는 하지만 생각보다는 국민들의 눈치를 보고,여론을 의식한다.

정부가 무료로 보급하는 인터넷망은 항상 감시되고 있으며, 리콴유 일가의 이름이 자주 언급되면 바로 정부에서 조사나온다는 소문이 있다 조사만 나오면 모르겠는데, 싱가포르의 많은 기업이 이 일가 소유이기 때문에, 만약 이 일가를 나쁘게 말했다가 찍히면, 본인 일자리를 잃거나 혹은 허위사실 유포 또는 명예훼손으로 거액의 벌금을 내야 한다. 여기에 언론기관에 대한 통제도 심해서 형식상 언론의 자유가 있으나 실제로는 제약이 있다. 예전 일해거사처럼 기자를 체포해서 코렁탕을 먹이는 무식한 방법을 쓰는게 아니라, 명예훼손으로 고소라는 합법적인 방법을 쓴다. 패소한 자가 돈을 안내고 배쨀까봐, 아예 언론사들은 미리 거액의 보증금을 예치해둬야 두고, 만약 정부에서 명예훼손을 걸면 그대로 이 예치금은 날라가고 다시 거액의 보증금을 예치해둬야 한다. 안넣고 배째면 등록 취소크리. 그리하여 실제로 싱가포르의 언론자유지수는 세계 150위권으로, 이라크러시아와 동급이다. 어떤 평론가들은 이렇게 리콴유 일가가 지배하는 싱가포르를 잘사는 북한이라고 혹평하기도 한다.

다만, 외부사이트 접속자체가 불가능한 북한이나 유튜브, 트위터같은 대중적인 인터넷 사이트, 서비스도 꺼리낌없이 차단하는 중국과 달리 싱가포르에선 외국의 인터넷 사이트에 자유롭게 접속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언론매체에서도 외국의 민주화운동 관련 뉴스가 자주 보도되는 편이고...국민의 눈과 귀를 완전히 막는 정도는 결코 아니다. 그러나 싱가포르 국내 문제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통제와 각종 소송 등을 통해서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외국의 언론까지 교묘하게 입을 막아 버리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야당 당원들을 "공산주의자"라는 죄목으로 가두는게 일상이었다. 90년대 이후엔 자제한 편.

일부 외국에서는 종신총리를 예상하였으나 정권(총리직)을 측근인 촉동에게 넘겨주고 물러났다. 그러나 실질적인 총리는 리콴유라는 말이 계속 나돌았는데 실제로 '선임장관'이 되어 내각에 관여한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고촉동은 15년간이나 재임하면서 나름대로 입지를 구축했고, 리콴유의 아들 셴룽은 고촉동에 이어 총리가 되었다. 또한, 고촉통 정권,리센룽 정권에서도 사실상 선임장관,내각고문으로 계속 정권에 참여하고 있어 완전히 퇴임한 2011년까지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싱가포르에서 리콴유 사후 독재자라고 비판한 동영상을 올린 학생이 바로 체포되었다. #

2.4. 종합

마실 물조차도 없었던 가난한 어촌마을이었던 싱가포르를 오늘날과 같은 강소국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는 점에서는 일부에선 높은 평가를 받는다. 물론 입지조건이 좋기도 했지만 소말리아, 이집트, 예멘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그것도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당시 싱가포르는 (물론 1950~60년대의 한국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좀 심하게 말해서 0의 상태나 다름없었다는 점은 생각해야 한다.

수차례 헌법까지 바꿔가며 종신집권을 추구하다가 부하의 총에 맞아 죽은 박정희와 달리 리콴유는 자리에서 물러날 때를 알았고, 자신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 자였다. 또한 리콴유는 개인적인 우상화를 혐오했기에 땡전뉴스같은 일도 없었고, 그가 살아있을 적엔 싱가포르화폐우표에 그의 얼굴이 등장한 적도 없었다. 물론 여러 독재정권들과는 달리 반대파들을 가둬두거나 거지로 만들기만 했을뿐, 처형하거나 고문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는 것도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3. 기타

  • 한국과의 인연
    1994년, 야당시절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아태재단 이사장 신분으로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라는 미국의 외교 전문지에아시아의 민주화에 대한 글을 기고한 후 리콴유 전 총리가 설한 "아시아적 가치"를 두고국내외 저명한 석학들까지 가세해 수년 간 치열한 설전이 벌어졌다. 리콴유는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는데 반해서 김대중은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강조. 외국에서는 아시아의 대표적인 권위주의 정치인과 민주화 운동가의 논쟁을 꽤 흥미있게 보았던 모양.

그래도 리콴유 자신은 한국에 꽤 우호적이다. 2000년에 출간된 자서전 <일류국가로의 길>에서도 한국 관련 내용을 1개 장에 할애했을 정도. 제2차 세계대전 시절 일본의 싱가포르 점령기에 당시 일본군으로 참전했던 조선인을 통해 한국과 처음 접했다고 회고했고, 때문에 초기에는 한국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지만 이후 싱가포르와 비슷한 한국의 경제성장 과정을 접하면서 우호적인 인식이 강해졌다고 썼다.

특히 자서전에서 1979년 10월 피살당하기 직전의 박정희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던 내용도 비중있게 소개했다.[15] 아울러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일화를 인용해 공식석상에서 견해나 권고를 피력한 경우가 6차례였고, 박정희 대통령 피격 소식을 접한 후 그 부재가 단순한 지도력 공백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 한국이 유무형으로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 보기도 하였다.[16]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회고록에 평을 남겼는데, "김대중은 높은 가치를 굳게 지켜낼 줄 아는 사람이며, 여러 차례의 위기를 겪으며 강해진 사람이다. 더 높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자제[17]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한 때는 싱가포르인과 한국인과의 결혼을 장려했다고 하며, 한국인 이민도 꽤 받았을만큼 우리나라에 호의적이었던 정치인.


1999년에 한국을 방문했는데, 이전에 키배를 벌였어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고.

그의 "아시아적 특수성"이라는 주장은 학계에도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일례로 매우 유명한 정치학자 중 하나인 랜시스 후쿠야마의 경우, "동양의 유교문화가 민주주의와 조합되기 어렵다는 리콴유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것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동양이 고도의 경제적 번영을 이룬 가운데서도 광범위한 정치참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후쿠야마의 반론을 뒷받침하듯 한국, 일본, 대만 등 경제적으로 번영한 동아시아 국가에서는 역동적인 민주정체가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홍콩에서도 우산 혁명에서도 보이듯 정치적 권리에 대한 요구가 분출하고 있다. 동아시아 내에서도 오히려 싱가포르의 사례가 특이한 것. 중국도 리콴유 체제를 궁극적인 롤 모델로 삼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 개인적인 일면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와 가족은 그를 '해리'라고 불렀는데, 공식적 석상에서는 언급된 일은 없다. 다만, '해리 리콴유'라고 지칭된 적은 있다. 비단 가까운 친구나 가족뿐만이 아니라 영국 식민 시절 학교 다닐때는 그냥 '해리 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사후에 자신의 집이 국가 성지화 되는걸 막기위해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집을 허물라고 지시했다.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도록 한 것도 국토라고는 도시 하나뿐인 싱가포르의 공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취지였다고. 하지만 타 정당이 당선된 국회의원 지역구에는 예산을 깎는 졸렬한 짓도 한다고 한다.

    표준중국어할 줄 알았다.[18] 약간 어눌하지만 굉장히 유창했다.[19] 본인말로는 보통화 공부를 열심히, 그리고 꾸준히 해 왔다고 한다. 원래 집안이 표준중국어가 아닌 객가 방언이나 복건어를 사용하던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복건어가 아닌 표준중국어를 싱가포르의 4개 공용어 중 하나로 지정한 것도 그의 집권기에 일어난 일이다.

    또한 공용어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왔는데 2009년, 한계성을 언급하며 일부 실패를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앞서 2006년 방한 강연에서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에게 외국어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만큼, 외국어 교육 그 자체를 부정한건 아니며,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시행착오를 일부 인정한 것이라 보는게 보다 타당할 듯.

생전에 2권의 자서전을 출간했다. 1998년의 첫 자서전인 <싱가포르 스토리>는 청년기와 1965년의 분리독립이라고 쓰고 축출당했다고 읽음 관련 내용이고, 2000년에 출간된 후속편격인 <일류국가로의 길>은 건국 이후 싱가포르 초대 수상이자 국부로서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둘 다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되었음.

위키릭스에 의해 폭로된 정보에 의하면 이슬람 종교에 굉장히 부정적이라고 하며, 저 종교는 해로운 종교라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리콴유도 쿨하게 인정했으며, 그 말이 나온 당시의 상황이 동남아의 이슬람 극단주의에 대해 나온 비판 중에 나온 말이라고 했으며, 모든 종교가 극단적으로 가면 신념을 지킨답시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슬람이 그 빈도가 매우 높아서 동남아시아[20]의 대표격으로 예를 든 것 뿐이라고 했다.

참고로 이 양반은 명예훼손을 남발하여 영어권 매체나 신문 역시 고소를 당한 적이 수 없이 많다. 리그베다 위키의 리콴유 항목도 싱가포르에서 고소는 할 수 없지만 차단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2015년 3월 23일부로 사망하여 그런 가능성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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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철자가 어떤 중국어 방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장남 리셴룽은 한어병음방안을 따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표준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하였다.
  • [2] 우연하게도 두 사람은 10.26 사건 일주일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정상회담을 갖는다(1979년 10월 19일). 당시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고 있던 박근혜 대통령이 두 사람의 통역을 맡았다고 한다.
  • [3] 객가인들은 한족에 속하는 작은 집단으로, 이들이 사용하는 객가 방언은 고대 중국어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어 항목 참조.
  • [4] 자신의 저서 '싱가포르 스토리'에는 이 당시 일본군에 끌려갔다 학살당하지 않고 도망나온 몇 안 되는 케이스 중 하나라고 술회하였다.
  • [5]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군 통역을 했던 친일파였다. 물론 생계형 친일파이긴 했지만
  • [6] 리콴유는 1946년 런던 정경대학교(LSE)에 입학했다가 케임브리지 대학교 법학과로 옮겨 졸업했다. 부인인 과걱추(柯玉芝, 1920~2010)와는 동문으로 유학 시절에 만나 1950년 결혼하였다.
  • [7] 싱가포르가 경제대국이 된 오늘날 되돌아보면 이 때 말레이시아가 선택을 잘 못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화교 인구가 다수인 싱가포르의 존재가 국가 통합성, 내부 안정에 장애를 초래하는 '혹'으로 인식했던 것. 그리고 당시 기준에서 일개 도시 정도에 불과한 섬나라 싱가포르가 1인당 소득 5만 달러의 부자 나라가 될 걸로 생각하는 이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 [8] 그의 자서전인 '싱가포르 이야기'에서 자신이 선생님에게 맞았던 시절을 회고하면서 "나는 서양 교육계에서 왜 매질에 그렇게 부정적인지 이해할 수 없다. 내 친구들이나 나에게는 체벌이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과거의 이런 모습이 현재의 싱가포르태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 [9] 현직 국가원수가 참석한 경우는 한국(박근혜 대통령), 일본(아베 신조 수상), 호주(토니 애봇 수상), 인도(모디 수상) 등이었고, 중국은 리위엔차오 부주석을 파견했다.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과 함께 참석했다. 대만의 경우는 마잉주 총통이 '하나의 중국'을 요구하는 중국과의 마찰을 고려하여 국장 직전에 개인 자격으로, 비공개 조문을 하고 돌아갔다.
  • [10]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보통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가 가능해야 하는데, 살펴보면 알겠지만 싱가포르는 그런 거 없다.
  • [11] 이런 행태는 한국에서는 5공때 특히 심했다. 그 결과 6공이 드러나고 나서 일해거사의 본가뿐만 아니라 처가집 식구들도 청문회에 불려나오거나 혹은 사법처리의 대상이 되었다.
  • [12] 할아버지 부시 말고, 아들 조지부시 일가가 예일대를 졸업한 것, 또한 한국 재벌 자제들이 대부분 미국의 명문대에서 학위를 딴 것을 상기하자. 또한 이셴룽이 매우 공부를 잘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학력과 리더쉽은 사실 아주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이들의 학력만으로 친족정치를 옹호하기 힘들다.
  • [13] CIA FACTBOOK, 2011년
  • [14] 단 저출산은 그 이유가 매우 복합적인데다 대개 제3자가 봤을 때는 징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조차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일도 많기에 정말 먹고사는 것조차 어려운 가난한 상황이 아니라면 뭐가 원인이라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
  • [15] 당시 영부인 대행 격으로 통역을 맡았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도 간략히 언급했지만, 자서전에서는 (이름은 따로 적지 않고) 그냥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가 통역을 했다" 정도로만 썼다.
  • [16] 실제로 5공화국 출범 직후, 한국은 무기 개발 부서를(특히 미사일) 축소했으며, 세계은행의 자금 지원을 받기 위한 협상에서 자동차, 중공업 축소를 사실상 강요받았다.
  • [17]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1998년 홍콩의 성도일보에서 김대중을 평한 내용이 있다. 야당 시절 생명의 고비만 수차례를 넘긴 고초를 겪은 김대중 당선자가 속된 말로 "손볼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상황이고, 그 중에는 자식을 고문해 후유증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보복 대신 화해와 타협을 택한 DJ를 장수를 용서한 조조에 비유하면서, "간웅과 노정객은 종이 한장 차이"라는 평을 남겼다.
  • [18] 해당 동영상 1분에 나오는 내용에 의하면 표준중국어는 그가 구사하는 언어 중 제3언어(제2외국어)이고 그래서 본인은 그렇게 썩 유창하게 잘 못한다고 했다. 다른 동영상 보러가기.
  • [19] 과장 좀 보태서 이광요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중국어도 모르는 사람이 링크된 동영상들을 보면 그냥 중국인 할아버지가 중국어 하는 동영상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이다.
  • [20] 실제로 싱가포르 바로 옆의 인구대국 말레이시아가와 인도네시아가 모두 이슬람 국가이다. 인도네시아는 무슬림의 인구가 많을 뿐,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는 세속국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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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4 17: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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