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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바그너

last modified: 2015-03-03 07:32:07 by Contributors


Wilhelm Richard Wagner 1813.05.22~1883.02.13

Contents

1. 생애
2. 작곡 특징
3. 라이벌
4. 반유대주의 논란
4.1. 바그너 옹호측의 시각
4.2. 바그너는 반유대주의자가 맞다는 시각
5. 기타
5.1. 바그너의 주요 작품들

1. 생애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이프치히에서 경찰서기였던 아버지 카를 프리드리히 빌헬름 바그너(Carl Friedrich Wilhelm Wagner)와 어머니 요하네 로지네 바그너(Johanne Rosine Wagner) 사이에서 9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그너는 태어난 지 정확하게 6개월 후에 아버지를 잃게 된다.

바그너의 어머니는 당시 알려진 연극배우이자 가수, 시인 그리고 화가였던 루트비히 가이어(Ludwig Geyer)와 재혼을 한다(일설에는 바그너의 친부가 가이어라는 주장도 있지만 근거는 희박한 듯 하다). 그래서 바그너의 어린 시절은 예술계에서 활동을 하였던 계부 가이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계부 가이어도 일찍이 1821년 가을에 세상을 떠나게 되며 그 이후 바그너의 가족은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긴다.

9살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바그너는 드레스덴 가극장에서 공연된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된다. 13살의 바그너는 호프만(E.T.A. Hoffmann)과 셰익스피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들에게서 받은 영향을 바탕으로 '로이발트'라는 드라마를 만들었다. 비록 이 때의 창작물들은 천재적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끈기와 인내심만큼은 후일의 바그너를 만드는 토양이 된다.

바그너는 나지움의 학업에 흥미를 잃고 이 학교 저 학교를 들어갔다 자퇴하던 중, 18살에 라이프치히 대학에 지원했다. 다행스럽게도 대학입학시험을 면제받고 음학학도로 등록되어 정식학생으로서 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 바그너는 바흐도 역임한 바 있던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음악감독)였던 테오도어 바인리히(Thedor Weinlig)의 제자가 된다.

1833년부터 바그너는 오페라의 카펠마이스터(악장)으로서 여러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경력을 쌓아나갔다. 바그너의 초기 오페라들은 이 시기들에 작곡되었는데 1832년 첫 오페라 "혼례"(Hochzeit)를 프라하에서, 1834년에는 두 번째 작품이자 첫 장편 오페라인 "요정"(Die Feen)을, 1836년에는 세번째 작품인 "연애금제(戀愛禁制)"(Das Liebesverbot)를 뷔르츠부르크에서 완성하였다.
다만, 바그너는 요정은 독일 낭만주의, 연애금제는 이탈리아 스타일, 리엔치는 파리 스타일에 대한 실험적 성향이 강했다고 봤고, 독일 낭만주의 스타일을 채택했다 한다(트리스탄 코드, Bryan Magee(2000)).

1836년 11월에 여배우 미나 플라너(Minna Planer)와 결혼을 한다. 결혼한 이 두 사람은 1839년 9월에 런던으로 향하며, 거기서 다시 파리로 향하는데, 이 때부터 이들은 1842년까지 계속 파리에서 거주하게 된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바그너에게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역경을 가져다 준 시기였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에게 문학적 그리고 음악적인 성장을 가져다 준 계기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바그너는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과의 접촉을 가질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프란츠 리스트와의 만남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음악적 삶의 밑거름이 된다. 바그너는 우선 러시아령 리가에서 시작해서 미완성된 "리엔치"를 1840년에 파리에서 완성하고, 1841년에는 자신의 시와 음악으로 만들어진 낭만적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egende Holländer)[1]을 작곡한다.

1842년, 드레스덴 가극장에서 자신의 작품 "리엔치"가 상연된 것을 계기로 바그너는 드레스덴 궁정가극장의 음악감독이 되어 드레스덴으로 돌아오게 된다. 자신의 작품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자신의 지휘로 초연했고,1842년부터 48년까지 자신의 대표작이 된 "탄호이저"(Tannhäuser)와 "로엔그린"(Lohengrin)을 작곡했다. 1845년에는 그동안 잊혀져 있던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을 지휘해 대중들에게 그 가치를 널리 알렸다. 베토벤에게서 받은 영향은 그의 음악세계에 훗날까지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바그너는 1849년에 36살의 나이로 드레스덴에서 일어났던 5월혁명에 가담하게 되어 지명수배에 오르게 되며, 잠시 리스트의 집에 피신했다가 스위스의 취리히로 망명하게 된다.

1858년까지 이어지는 취리히 망명시절은 바그너의 창작열을 불태우게 하여 저서 "미래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der Zukunft)과 "오페라와 드라마"(Oper und Drama)등을 저술하는데 이는 바그너가 이전 오페라들과는 다른 악극(Musikdrama)의 당위성과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또한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에 제1부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과 제2부 "발퀴레"(Die Walküre) 등도 작곡되기 시작했다.

1850년, 바이마르에서 리스트의 지휘로 바그너의 작품 "로엔그린"이 초연되고, 1852년에는 베젠동크 부부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들 부부는 바그너의 망명생활을 도와주었는데 바그너는 베젠동크의 부인 마틸다에게 금지된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다. 이 경험이 가곡집 "베젠동크 가곡"과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의 창작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1853년에는 취리히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런던에서도 8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1857년에는 당대의 명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가 부인 코지마[2]와 함께 결혼기념여행으로 바그너를 방문했다. 이때의 만남으로 후일 코지마는 뷜로우를 떠나 바그너와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결혼으로 인해 리스트는 바그너와 절교하게 된다.(...) 바그너의 민족주의적 사상을 매우 싫어했다고. 1861년, 파리에서 "탄호이저"를 초연하기 위해 "바카날"을 작곡했고 이것은 파리에서 3번 공연되었다.

1864년, 추방이 해제된 후 바그너는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초청을 받고 뮌헨으로 오게 된다. 루트비히 2세의 열정적인 지원으로 바그너는 한스 폰 뷜로의 지휘로 "탄호이저"를 공연할 수 있게 되지만, 루트비히 2세의 과도한 바그너 지원에 바이에른 국민들의 시선은 좋지 않았다. 심지어 바그너를 싫어하는 은행장이 은행으로 돈을 찾으러 온 바그너에게 돈을 동전으로 내줘서 동전을 가득 싣고 가게 했고, 그 광경을 본 바이에른 국민들의 여론은 더욱 악화된다. 결국 1865년, 바그너는 뮌헨을 떠나 스위스 루체른 근교의 트립센으로 옮겨간다. 같은 해,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역시 뷜로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1866년 루체른으로 돌아온 바그너는 그곳에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들"(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를 작곡해 1867년에 완성했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이듬해에 역시 뷜로의 지휘로 초연되어 바그너의 명성은 더욱 높아진다. 1868년 11월에는 프리드리히 니체와 처음으로 라이프치히에서 만나게 되고, 이후 니체는 1872년까지 루체른의 바그너를 방문하는 절친한 사이가 되지만 후에 바그너의 작품성향에 동의하지 못한 니체는 바그너와 격렬한 논쟁 끝에 절교하게 되고 만다. 이후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 대해 '데카당스 예술가'라고 비난을 가했고 "음악을 지중해적인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당시 니체와 바그너 사이의 야사 하나. 니체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자 가만히 듣고 있던 바그너는 "썩 나쁘지 않은 곡이군. 누가 작곡했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니체는 "이거 브람스 씨가 작곡한 신곡인데요?"라고 말한 것. 당시 요하네스 브람스는 바그너와 대단히 사이가 나쁜 라이벌 관계였다. 당연히 바그너는 대놓고 불쾌감을 나타냈다고.

이미 코지마와의 사이에 아들 지크프리트를 낳았던 바그너는 결국 1870년 코지마와 정식으로 재혼하게 된다. 리스트를 외할아버지로, 바그너를 아버지로 둔 지크프리트는 후일 아버지의 작품의 지휘자로, 작곡가로 활약하게 된다. 아직 완성을 보지 못했던 "니벨룽의 반지"중에 하나인 지크프리트가 1871년에 완성된다. 그러는 사이에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는 각각 1869년과 1870년에 뮌헨에서 초연된다.

1872년부터 바그너는 스위스 지역을 떠나서 독일 바이에른 주 남동부지역의 소도시 바이로이트로 거처를 옮긴다. 바그너는 자기 악극을 상연할 극장 건립을 추진하여, 마침내 1876년 바이로이트에 극장을 완성시켰다. 이 극장 개관기념으로 대규모의 악극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초연되었는데, 전 유럽의 명사들이 몰려와서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1882년에는 (아마도 니체가 가장 싫어했을 성향의 작품인) 신비극 "파르지팔"(Parsifal)이 초연[3]되었다. 이것이 상연된 후 요양차 베네치아로 갔으나, 1883년 2월 13일 벤다르민 궁(宮)에서 70년의 생애를 마쳤다. 공식사인은 심장마비였다는데, 진짜 사인은 복상사였다는 괴담이 있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에 있는 하우스 반프리트(Haus Wahnfried)의 정원에 묻혀있다.

2. 작곡 특징

그의 악극의 특징은 우선 지도동기, 혹은 유도동기 등으로 번역되는 라이트모티프의 사용에 있다. 라이트모티프는 극의 중요한 주제로서 극 안에서 계속 변형되어 제시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극의 전개를 암시하고 극 안의 통일성을 공고히 하는 효과가 있다. 이 라이트모티프의 사용은 바그너의 후계자들에게도 이어졌고,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가인 자코모 푸치니도 라이트모티프를 자신의 방식대로 소화해 사용할 정도였다.

또한 스스로 무한선율이라고 명명한 것으로, 이전의 오페라가 아리아레치타티보에서 선율이 중단된 것과는 달리 선율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방식을 구사했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바그너의 악극이 기존의 오페라나 당대의 이탈리아 오페라들과는 다른 방식이다. 무한선율에서는 가사를 듣기 쉽게 하기 위해 레치타티보 풍으로 부르게 하기도 한다.

또한 바그너의 악극은 극단적인 반음계적 화성으로 당대에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에서는 전통적인 조성체계가 흔들리는 이른바 "트리스탄 화음"이 등장한다. 상당히 자유롭게 조가 바뀌는데 결국 이것은 아르놀트 쇤베르크에 의해 무조음악을 여는 시초가 되었다고 봐도 좋을것이다.

음악 자체가 정교하고 화려하며 스케일이 큰 편이라 현대의 많은 클래식애호가들사이에서는 바그너빠가 많은 편이다. 반대로 까들은 바그너 좋아하면 겉멋만 들었다고 까는 편이다. 바그너빠를 바그네리안이라고 하는데, 사전에도 당당히 수록되어있다!

3. 라이벌

바그너는 그 이전과 다른 악극을 만들었고, 전 유럽의 음악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바그너의 음악은 당대에도 찬반의 논란이 뜨거웠고, 동시대의 브람스와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가였던 주세페 베르디와 자주 라이벌로 회자되곤 했다. 특히 바그너와 브람스는 당대에 쌍벽을 이루는 음악가로서 나중에 가면 각자의 추종자들이 파벌화되는 양상까지 보인다.[4]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서로의 음악을 높이 평가했다고 전한다.[5]

4. 반유대주의 논란

물론 바그너 자신이 후세의 나치즘을 미리 내다보고 악극을 만든 건 절대 아니지만, 그가 독일 민족주의를 그의 작품에서 강조한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 일례로 "로엔그린"에서 작중의 배경이 독일이 통일된 시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일 국왕'이라는 용어를 쓰는 등에서 그러하다.[6]니체와의 절교의 요인에도 이 독일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깊게 작용했던것 같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그의 후손과 아내가 나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더 까이게 되는 점도 있다. 아내인 코지마 바그너(1837~1930)가 1920년대 아돌프 히틀러와 공식적으로 만나 사진도 같이 찍고 그를 칭송하였며 그녀가 죽을 때 히틀러가 애도했으며 나아가 자신이 정권을 잡자 바그너 특설연주회와 같이 바그너 후손들을 초청하면서 더더욱 나치=바그너라는 인상을 심어주게 된다. 물론 지금은 바그너 후손들은 그 당시 나치에게 반대했더라면 그 조상들도 아우슈비츠에 갔을 것이라고 항변하고 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 반대할 것도 없이 최소한 중립이라도 지킬 수는 있지 않았을까. 당시 바그너 작품에 대한 나치스의 지지를 볼 때, 애매한 태도만 취했어도 바그너의 가족들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며, 설혹 그럴 수 없는 입장이었다고 해도 코지마 등이 한 친나치적인 행동은 어쩔 수 없이 한 일이 아니라 꽤 적극적으로 나선 감이 있다. 니체나 바그너나 죽고 나서 가까운 사람들이 어그로를 왕창 끌었다

이에 대해서는 BBC에서 했던 다큐에서 나온 표현이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 "아름다운 실크 태피스트리가 있다. 그리고 거기에 돌이킬 수 없는 얼룩이 졌다. 태피스트리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그 얼룩 또한 진짜다."

4.1. 바그너 옹호측의 시각

게다가 바그너가 다룬 악극에서 다룬 소재들은 대부분 게르만의 신화와 전설들이었다는 점도 나치가 바그너 작품을 오용하도록 만든 요인이 되었다. 일각에선 바그너의 음악적 특성때문에(즉 무한선율적인 특성이) 나치즘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조종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다소 억지인 감이 있다. 오죽하면 옹호 측에서는 나치와 바그너 떡밥이 나오면 그들이 히틀러의 바그너를 보고 평가한다 할까.

바그너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코지마의 영향으로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을 가졌다지만, 그게 그리 큰 게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세기 후반기의 독일지식인 사회에서 반유대주의는 여러 지적 유행들 중 하나로 취급되는 판이어서 바그너의 몇몇 사례를 가지고 반유대주의자라고 비판한다면 당대의 여러 독일 지식인들도 똑같이 걸려들게 된다. 옆동네에서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만 봐도 당시 유럽에서 반유대주의는 딱히 색다를 것이 없는 것.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그의 당대 라이벌들이었던 유대인 음악가들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이 쓰였을 뿐 그 자신이 유대인 자체를 혐오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대인 음악가인 헤르만 레비[7]같은 후배를 매우 아꼈고 그를 지원했던 것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레비에게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를 믿으라고 권유를 하긴 했었다고 한다. 그것조차도 강압적으로 권유하진 않았고 레비가 어렵다고 하자 할 수 없다면서 이해해주었다.

다만 바그너는 멘델스존을 무척 싫어했다. 이것 때문에 그가 유대인을 싫어했다고 증거처럼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것조차도 멘델스존이 유대인 출신이 아니라 엄청난 부잣집 아들[8]이라는 이유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멘델스존은 유대인이지만 유대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하여 상류층에 편입된 집안 출신이며 그 자신도 유대계 혈통에 아무 관심이 없었고 도리어 성실한 기독교도(개신교)로 지내왔다는 걸 생각하자. 앞서 말한 후배 음악가 레비가 유대교를 믿어도 개의치않고 후원하고 아끼던 바그너이다. 단지 유대인이라서 무작정 싫어했다고 볼 수는 없다.

4.2. 바그너는 반유대주의자가 맞다는 시각

그러나 상기의 사례는 바그너 옹호측의 시각이고 당연히 그 반대의 시각도 존재한다. 반유태주의자가 정작 자기 주변의 유대인은 잘 돌봐준 사례는 꽤 존재한다. 실제로 나치스의 핵심인사 헤르만 괴링도 한 편으로는 유대인을 몰살시키면서 한 편으로는 자기가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유태인 가족들이 도움을 청하자 그들을 보호해주기도 했다.[9] 괴링이 자기 주변의 유대인을 보호했다고 해서 그가 반유대인사가 아니라고 말 할 수는 없듯이 바그너 또한 자기와 가까운 유대인들과 잘 지냈다고 해서 반유대인사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근거는 될 수 없다. 레비같은 자기 지인은 유대인이라도 상관없었지만 자기 지인이 아닌 유대인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음악 속의 유대적 성향(Das Judenthum in der Music)'을 비롯해 바그너가 남긴 많은 글들은 반유대주의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아주 많은 정치적 모순과 윤리적 불안정을 보여준다. 그 밖에도 음악적 재능은 지극히 뛰어났지만 인간적으로는 일관되지 못하고 편협하고 고집스러운 점이 많아 적을 많이 만드는 타입이라고 한다. 그래서 혹자들은 바그너의 음악을 음악 자체로만 볼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영국의 지휘자 머스 비첨은 바그너 악극 공연을 비난한 신문사 사장에게 "그럼 당신 신문사에 걸려있는 홀바인(독일의 화가)의 그림을 태워버리시오. 그럼 나도 바그너 악극을 연주 안하리다."라고 했다고 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과연 음악은 음악으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르게 봐야 하는지는 지금도 논란중인 문제이다. 플라잉 더치맨유태인이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식의 개소리는 집어치고 주로 바그너 옹호측은 "음악만 봐달라", 반대파는 "인품이 배제될 수 없다"라고 보는 편인데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일제에 부역해서 동족을 죽음으로 내몬 친일파인사들의 작품을 인성과 예술성은 별개로 봐야한다면서 옹호하는 측의 논리와 일맥상통한다. 이광수, 서정주 등이 그 대표사례다. 이들은 친일인사인데도 그 작품성이 뛰어나다면서 그들의 행각을 두둔하는 이들이 오늘날에도 적지 않다. 다만 이들과 바그너가 다른 건 바그너는 나치즘과는 무관하다는 점. 히틀러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은 바그너가 나치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게 더 이상하다.

다만 모두가 인정하는 것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는 그의 철저한 독일 민족주의 사상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거다. 아마도 바그너가 유태인을 안 좋아했던 것은 독일땅에서 수백년을 살아오고도 독일이라는 국가에 동화될 생각이 전혀 없는 유대계 사회 전반에 대한 것이지 그냥 평범하게 유태계 독일인으로 살고 있는 유태인에게는 딱히 적대감은 없었던 거 같다.

그럼에도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적 성향은 심한 편이였다.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20대 후반에 파리에서 철저한 실패를 겪던 시절의 경험, 극심한 빚, 그의 정치적 성격이 그것들. 여기다가 편집증적 성격까지 한몫 했을거다.

바그너의 초창기는 거의 굶어죽기 직전까지 몰렸었다. 당시 파리 오페라계의 거물 인사였던 코모 마이어베어로망탈 알레비 모두 유대인이였다. 바그너는 그들이 자기보다 못하다 생각했으나 당시 오페라계를 장악하던 건 그들이고, 바그너는 가진 게 전혀 없었다. 그는 마이어베어에게 아주 굴욕적인 자세로 일거리를 구하기도 했었고(이때 27세) 마이어베어는 리엔치의 초연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공연에 도움을 줬으나, 당장 직접적으로 생계에 큰 도움을 주는게 아니였다. 자신의 상황을 유대인 출판업자와 언론인, 평론가가 개입된 음모라 봤을 바그너가 그의 가장 굴욕적인 모습을 유대인에게 보여줬으니 그는 겁이 났고, 익명의 기사에서 마이어베어의 뒷통수를 친다.

바그너는 루트비히 2세를 만나기 전까지는 빚쟁이였다. 당시 대금업자의 절대다수는 유대인이였고, 돈을 빌려놓고 갚지 않는 짓거리를 해댄다(...) 그러면서도 유대인이 내 돈을 빨아먹네 뭐네 해대는데 그걸 보고만 있을 리가 없고, 결국 상황 악화(...)

젊은 사회주의자였던 바그너는 사유재산이 모든 악의 기원이라 봤고, 사회주의자를 포기한 다음에도 거기에 대한 혐오감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1848년 좌파 혁명 당시에 끼어있었으니까. 그리고 돈 많은 사람의 이미지는 거의 유대인(...). (브라이언 매기, 트리스탄 코드, 2000) 즉, 그의 사유재산 혐오는 진정으로 소유의 체제를 부정하는 가치관이 아니라, 그냥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덮는 핑계일 뿐인 것으로 보인다.

위에 나온 것처럼 처음에는 니체와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고 하는데, 나중에 니체가 바그너 빠에게 바그너 까로 돌변하면서 키배를 벌였다. 두 천재의 키배(라기 보다는 키워 니체)를 보는 것도 꽤 재미 있을지 모른다. 이상한 것은 둘의 관계가 박살나고 니체는 자기 자신의 철학을 구축해둔 상황이라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끊임없이 바그너를 공격한 것인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추측만 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바그너의 이러한 경향에 후손들의 잘못 및 히틀러의 병신짓이 더해져, 지금도 유대인 중에서는 바그너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스라엘에선 최근까지도 바그너 음악의 공연은 터부시되었다가 그 터부가 조금씩 풀리는 느낌[10]이다.

5. 기타

좀 우스갯소리로 13과 인연이 많은 음악가로 언급된다. 태어난 해에 13이 들어가고 탄호이저를 완성한 날이 4월 13일이며 니벨룽겐의 반지는 1876년 8월 13일 처음 연주되었으며, 그는 13개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그리고 죽은 날은 13일이었다는 것. 다만 이거 말고 상당히 억지도 들어가기에 다 믿은 걸 못 된다.(대중들 앞에 1831년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숫자를 합치면 13이라느니 하는 것들. 80년대 금성출판사에선 낸 책자에선 엉뚱하게 바그너와 13을 다루면서 바그너가 죽을 때 유언으로 난 13과 인연이 많지만 행복했다는 유언을 했다는 만화를 그린 바 있다. 완전한 엉터리다.)

베토벤의 영향을 강하게 받긴 했지만 절대음악을 완성한 베토벤과는 달리 바그너가 작곡한 곡들의 종류는 오페라와 같은 극장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절대음악, 특히 교향곡 분야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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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일설에 따르면 항상 빚이 많았던 바그너는 파리의 빚장이들을 피해서 리가로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도 많은 빚을 졌다. 더군다나 파리의 채권자들이 리가까지 와서 독촉을 하자, 배를 타고 북해를 가로질러 영국으로 갔는데 유별나게 호된 풍랑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 체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대음악가로 성공한 만년의 바그너가 "북해에서의 고생이 이 오페라를 만들게 하였다"고 뻐기자, 당시 사정을 잘 알던 친구가 "그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아니라 '도망가는 독일인'이 되어야지"라고 받아쳤다고.
  • [2] 프란츠 리스트의 딸이다. 참고로 리스트도 꽤나 바람둥이였다고.
  • [3] 장래의 황제를 비롯한 수많은 명사들이 초연관람을 했다지만, 정작 재정적으로는 대실패였다고.
  • [4] 바그너파였던 구스타프 말러, 안톤 브루크너는 브람스파의 음악 평론가 한슬릭에게 대차게 까였고, 또 체코의 대표적인 음악가인 안토닌 드보르자크메타나 역시 각각 브람스파, 바그너파여서 추종자들간에 논쟁이 붙기도 했다.
  • [5] 적어도 파벌화되기 전까지는. 자세한 것은 요하네스 브람스의 관련항목 참조.
  • [6] 그러나 독일왕이라는 명사 자체는 작중의 배경인 시대에서도 정치적 상황이 어쨌든 간에 실제로 통용되고 있었다. 일찍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선거에서 선출된 사람에게 독일왕이라는 칭호가 주어지며, 게다가 독일 지역의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동프랑크의 왕이 독일왕으로 칭호가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꼭 독일민족주의를 강조했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 [7] 1839~1900, 덕분에 그는 바그너를 매우 존경했다. 바그너 장례식에도 참여했으며 뒤에 바그너에 대한 책을 쓰면서 그를 매우 존경하는 글도 써주었고 다른 유대인들이 바그너를 욕하면 반론했다고 한다.
  • [8] 어린 멘델스존이 클래식을 공부하자 은행장이자 엄청난 부자인 아버지는 아예 사설악단을 창단해 어린 아들에게 지휘자를 맡기는 선물(!)까지 했다. 많은 음악가들이 가난에 시달리던 터라 이런 점 때문에 유대인을 떠나 멘델스존을 싫어하는 게 많았다. 같은 유대인이라고 해도 어차피 개종하고 유대인이란 인식을 버린 멘델스존이라 유대인 음악가들도 같이 깠을 정도이다.
  • [9] 그들을 체포하려는 나치 경찰에게 그들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괴링이 말하자, 경찰이 그들이 유대인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괴링이 말하길, "누가 유대인이고 아닌지는 내가 결정한다!"라고 일갈해서 결국 경찰들이 데꿀멍하고 그 유대인 가족은 살아남았던 일이 있다.
  • [10] 유대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바그너 음악을 이스라엘에 연주할 때 반발이 장난이 아니었다.
  • [11] 기동전사 건담 SEED 시리즈를 본 사람들이라면 반가운 이름들이 꽤 있을 것이다.
  • [12] 독일어 엔(en) 은 우리말'~의'에 해당한다. 따라서 니벨룽'겐의' 반지란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 [13] 그의 마지막 작품. 사실 파르지팔 다음에 불교적 내용에 바탕을 둔 정복자라는 오페라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결국 만들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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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03 07:3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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