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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last modified: 2015-12-04 17:48:37 by Contributors

Contents

1. 18세기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겸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령의 상속자로 실질적인 여제
1.1. 여대공 시절
1.2. 결혼
1.3.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4. 동맹의 역전
1.5. 7년 전쟁
1.6. 통치
1.7. 성격
1.8. 평가
1.9. 가정
2.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실의 여대공


1. 18세기 신성로마제국의 황후 겸 합스부르크 가문의 통치령의 상속자로 실질적인 여제[1]



세월이 야속해 너도 애 열여섯 낳아봐
1717년 5월 13일 ~ 1780년 11월 29일

카를 6세의 장녀로, 프란츠 1세의 황후.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레오폴트 2세,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풀네임은 마리아 테레지아 발부르가 아말리아 크리스티나(Maria Theresia Walburga Amalia Christina). 어딘 가의 용종

"역사 속에서 나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에서 나라를 떠맡게 된 군주의 사례를 찾기는 힘들 겁니다. 하지만 나의 백성들은 내 첫 아이들입니다."

1.1. 여대공 시절


10~11세때 그려진 초상화.[2] 역시 리즈시절은 뭔가 다르다.고영욱님이 좋아합니다.

카를 6세와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가문의 엘리자베트의 장녀로 태어났다. 유럽 최고 왕가의 혈통이자 빼어난 미모를 가진 황녀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매우 많았다.카를 6세는 일찍이 즉위 초에 딸도 왕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다는 국사조칙[3]을 내렸고 주변 국가들도 이를 승인했다. 이후 태어난 외아들이자 장남이 일찍 죽은데다가 딸만 내리 셋만 낳는 바람 장녀 마리아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자가 된다.

1.2. 결혼

처음에는 마리아 테레지아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4]가 약혼자로 거론되었고, 오스트리아의 국보급 장군 사보이 외젠의 강력추천으로 프로이센 왕세자 프리드리히[5]를 마리아 테레지아의 배필로 생각했다. 이에 혼담이 오가긴 했지만 진지하게 논의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종교의 차이로 성사될 가능성은 희박했다..[6] 이후 마리아 테레지아 공주는 1723년 빈에 유학을 온 프랑수아 에티엥 드 로렌[7]과 사랑에 빠졌는데 자기 전엔 꿈에서 그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궁녀들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할 정도였다고 당시 영국 대사는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카를 6세도 로렌 가문이 합스부르크 가문과 혈연이 있는데다가[8] 양가의 인연과 인품이나 지성이 쓸만하다고 여긴 프랑수아를 마음에 들어했고 로렌을 둘러싼 이해관계[9]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연애가 맞물리면서 당시로선 100%는 아니지만 당시 보기드문 연애결혼을 했다.[10] 단 둘째 딸과 프란츠의 동생 카를 알렉산더(로렌의 샤를)와 겹사돈 맺는것은 반대했다. 이 둘은 카를 6세가 죽고나서야 결혼한다.

로렌의 프랑수아는 결혼을 하기 위해서 자신의 태어나고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영지인 로렌(로트링겐)을 포기해야 했는데 그의 어머니[11]가 강력하게 반대를 했지만 결국엔 고향을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자신의 영지 로렌을 루이 15세의 장인에게 바치고 대신 토스카나 대공국을 받는다는 조건의 서류를 보자 죄책감과 미련 양심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주저하고 몸을 부르르 떨며 여러번 펜대를 던졌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그때마다 공손하게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던진 펜을 계속 주워다 바쳤고 결국엔 사인하고 말았다는 일화도 있다.

1.3.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카를 6세가 죽자, 카를 6세의 후계자로서 그녀는 아버지가 갖고 있던 합스부르크 수장지위와 상속령과 여러 나라의 작위를 이어받을 권리를 갖게 되었다. 문제는 카를 6세는 국사조칙은 어디까지나 보험용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추정상속자이긴 해도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아들 낳는걸 포기 하지 못했었고 그에 따라서 계승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주로써 필요한 체계적인 교육을받지 못한 것[12].

그리고 아버지가 힘들여 추진한 국사조칙이 무색하게 주변에서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 계승의 합법성에 대해 걸고 넘어지기 시작했다.[13] 특히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가 선전포고도 없이 슐레지엔을 공격했고 이에 1차 슐레지엔 전쟁이 일어났다.
슐레지엔은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지역이 된 터라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인 오스트리아에 미련이 없어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를 환영했다. 남편 프란츠는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10살이나 연상인데다가 어릴 때부터 소국의 왕자로 살아남기 위해 국제 정세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를 6세에게 물려받은 군대로는 프로이센의 군대를 막기 어렵다고 봤고 아내를 설득 협상을 요구해서 처음이지 마지막으로 국사에 참여해 프로이센 사절과 협상을 했는데 커튼 뒤에서 듣고 있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편이 조금이라도 양보하려면 에헤헴~~ 드립으로 방해를 했고 결국 협상은 나가리... 이후 프란츠 슈테판은 다시는 국사에 나서지 않고 자신의 취미에 열중했다고 한다. 결과를 보겠지만 결국은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옳았다.[14]

1741년 3월 13일에 넷째이자 첫 아들인 요제프가 태어났고 6월 25일에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넷째 아이를 낳기 전 세 아이가 모두 딸이라 매우 위축된 상태였다. 이 시기에는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적으로 돌아선 상태에 보헤미아는 배신을 때리고 카를 7세에 충성을 맹세하고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귀족들마저 동요하며 이탈할 움직임이라 매우 어려운 상태였는데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기인 요제프를 안고 헝가리로 달려가 의회 연설에서 장자 요제프를 선보이며 군자금과 병력을 얻어냈다[15].

그러나 전쟁준비가 부족한데다가 외교적으로도 오스트리아가 고립되었고 프로이센군이 결국엔 빈 코 앞까지 당도한 상태라 급박한 때 였다. 결국 다시 협상에 돌입하여 슐레지엔을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에게 양도해서 적을 하나 줄이고. 프로이센과 협정으로 한숨 돌린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손잡고 합스부르크를 뒷통수 치며 보헤미아 왕위와 신성로마제국 제위에 오른 카를 7세가 대관식을 하러 군대와 함께 프랑크푸르트간 사이에 본진 뮌헨을 탈탈 털면서 사실상 승기를 잡았다.바보 아니야 이거 바이에른은 프랑스 도움으로 다시 뮌헨을 탈환하긴 하지만 다시 오스트리아에 대들 국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곧 카를 7세가 사망한 직후 남편을 프란츠 1세로 황제의 자리에 앉히는데 성공한다. 적국 작센도 바이에른 꼴을 보고 순순히 굴복했고 남은 적은 이제 프랑스 밖에 없었다.

바이에른을 밀어 완전히 합스부르크 가문을 뒤집어 엎으려던 프랑스와는 계속 전쟁을 이어갔지만, 결국 영국과 손잡고 쇼미더머니를 친 결과 마침내 1748년 아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국사조칙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1.5. 7년 전쟁

즉위초와 달리 통치경험이 원숙 해진데다가 제국에 대한 통제력이 공고해졌기에 왕위 계승 전쟁 때 잃어버린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일으킨 전쟁 주도하게 되는데, 십여년간 내정개혁과 군개혁을 실시하면서 카우니츠[16]를 등용해 프랑스에게 접근했다. 당시 프랑스 궁정의 실세인 퐁파두르 부인과 함께 동맹을 유도했고 개인적으로 프로이센 까에 프리드리히 2세를 증오하는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와 협력해 프로이센 공격을 감행한다. 초반에는 그동안 힘을 쌓은 보람도 없이 또 프로이센 군대에 호구털리면서 프라하까지 밀렸지만 프로이센은 사방이 적이였고 [17] 너무 깊숙히 쳐들어오다가 보급대가 습격당하면서 자국으로 철수 위기를 넘긴다.

이후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프로이센을 공세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러시아군은 이길만하면 보급상 문제로 후퇴하고 프리드리히도 만만찮은 상대이기에 결정적인 승리는 찾지 못했다. 영국의 정권 교체로 프로이센에 대한 재정지원이 끊기고 프로이센이 약화 되면서 승기를 잡았고 프리드리히 2세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오스트리아의 우세가 이어졌으나 프로이센이 남은 병력으로 끈질기게 버티고 동맹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가 서거하면서[18] 분위기가 뒤집혔다. 하필 엘리자베타 여제의 뒤를 이은 인물이 독일 홀슈타인 지방 출신이라 중증 이자 프리드리히 2세를 광적으로 숭배하는 표트르 3세였던 것. 어처구니 없게도 표트르 3세정도는 아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남이며 후계자 요제프 2세까지도 적국의 원쑤 프리드리히 2세 빠가 되면서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19]

그 결과 러시아가 전쟁에서 빠지고 오스트리아는 홀로 남아서 역시나 프로이센에 털리고, 프레스부르크(브라티슬라바) 조약으로 슐레지엔은 프로이센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빚더미에 올라서는네 이전 재정수입의 22%를 차지하는 슐레지엔을 되찾으려고 7년전쟁의 순수 전쟁 비용만 11년치 재정수입인 2억 6천만 굴덴에 전후 여파로 전쟁이 끝난 첫해 1763년엔 세입(2300만 굴덴)보다 세출이(7000만 굴덴) 3배나 될 정도로 국력이 심각하게 손상되었다.[20]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했다.

1.6. 통치

7년 전쟁이 끝나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손상된 국력을 회복하기 위한 여러 내정개혁을 실시 했는데 그 중 하나가 전국에 초등학교를 설치해 의무 교육을 실시했으며 덕분에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크게 성장했다. 또 일반 징병제를 채택해 전국민의 병역을 의무화하고 농민 출신이라도 급료를 받게 해 병사들의 안정된 생활을 보장했다. 그녀 치세에 오스트리아는 안정기에 들어섰으며, 당대인들에게 여성의 영광이자 왕들의 모델로 여겨졌다. 다만 이런 조치는 적국인 프로이센에선 100년전 대선제후 시절에 했던것이다. 아들 요제프2세의 개혁 조치에는 보수적인 시각으로 태클을 자주 걸어서 계몽군주라는 세평이 무색하긴하다.

실책도 있었다. 모든 여성이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녀는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을 혐오했고[21], 여성의 술집과 여관 취직을 금지시켰다. 또한 여성은 밤길을 지나다닐 수 없도록 하는 통금령을 내렸고, 이를 어기는 여성은 매질을 가하고 머리카락을 모두 삭발하게 했다. 또한 매춘부를 매우 혐오하여 감화원을 설치해 격리 수용을 했는데 이는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루이 15세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에게 예의를 표하라고 지시를 해야했다.

폴란드 분할에 대해서도 구설수에 올랐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악마와도 같다며 지독히도 혐오하던 프리드리히 2세와 손을 잡고 폴란드를 분할하였다.[22] 이는 오스트리아의 국익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평소 철저한 도덕주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입장과 반대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사실 폴란드 분할을 오스트리아에서 주도한것은 아들 요제프 2세와 재상 카우니츠가 손을 잡고한 것인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그간의 정책과 충돌하는 것이었고 우려는 표명했지만 국익을 위해 침묵했다.. 당시 프리드리히는 이에 대해 비꼬았는데, 그 여자는 울고 또 울었지만 얻을 수 있는 이익 모두를 철저하게 취했다고 평했다.

두 차례의 전쟁 후 유일하게 남은 공적인 프랑스와의 동맹도 결과적으론 그다지 시원찮았는데 7년전쟁에선 프랑스가 프리드리히 2세에 로스바흐에서 패퇴하고 일찍 독일전역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슐레지엔을 뺐는 대가로 프랑스에 벨기에 할양을 할 약속은 지키지 않았고 1777년 바이에른 왕위계승 전쟁때 또 한번 프로이센과 충돌 할 때에는 프랑스에서 파병을 거부했다. 안습

그녀의 공식 지위는 오스트리아 여대공(1740~1780), 헝가리,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여왕(1741~1780), 보헤미아 여왕(1743~80), 신성 로마 제국 황후(1745~1765)등등으로, 실제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적은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그녀를 가리킬 때는 공식칭호와 상관없이 '여제'라 불린다. 카를 6세의 딸인 그녀가 남편보다 혈통면에서 더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데다, 실제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실권 대부분을 그녀가 갖고 있어서 사실 상의 황제는 마리아 테레지아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즉위한 아들 요제프 2세와 함께 그녀 자신이 사망하기 전까지 공동통치했다. 아들 요제프 2세는 남편과는 달리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들은 허수아비까지는 아니었다.[23] 공동통치자이며 후계자인 요제프 2세와는 심한 갈등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러 관계없는 국가들이 결혼동맹에서 온 동군연합으로 묶인 느슨한 체제의 합스부르크 제국에 있어 아들 요제프 2세의 전제적 계몽주의가 국가를 분열시킬 수 있다고 보아 아들의 행동에 항상 제동을 걸었고, 요제프 2세는 어머니를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로 보았다. 서로 폐위시키겠다는 협박을 한 적도 있다.[24] 자세한 내용은 해당항목 참조]

이를 보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질적인 권한이 없이 아들을 황제로 삼아 조종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실제 통치에 필요한 오스트리아 대공,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 작위 등을 전부 본인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도 완전한 통치자였다. 대신 남편과 아들에게 오스트리아의 공동 통치자라는 직위를 주긴 했다. 물론 선임 통치자는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이었다. 남편은 알아서 재정분야를 제외하면 모두 아내에게 일임했었다. 이후 아들 요제프의 팽창정책과 개혁 조치는 우려섞인 시선으로 경계했지만 모두 막지는 않았다. 군제개혁과 교육정책은 모자의 뜻이 일치했고 [영토 문제에 있어서 아들의 팽창정책인 1차 폴란드 분할(1772년)이 개시되기 전에도 오스트리아 단독으로도 1769년에 폴란드 왕국령 땅을 침략한적이 있는데 이때에는 마리아 테레지아도 아들의 뜻에 동의했다. 투르크령의 부코비나를 합병하는것은 소극적인 찬성을 했다.]다만 사법 개혁과 교회개혁이나 종교정책에선 진짜 주인의 권한으로 태클을 걸어서 요제프 2세는 단독 통치자가 될 때에나 자신의 구상을 펴게 된다.

1.7. 성격

개인적으로는 유쾌하고 활달한 성격이었으며, 상당히 다혈질에 자존심도 셌다. 30대까지는 빼어난 미모와 달변을 자랑했으며 밤새 춤추고 노는 것을 즐겼다. 계속되는 전쟁에 대해서도 내가 임신중만 아니었다면 직접 전쟁터에 나갔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성격이었다. 허례허식을 혐오하여 궁정의 경직된 예법을 혁파하였으나,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주의였기 때문에 그녀의 개인적 삶과 공적인 삶은 철저히 분리되었다.

그러나 남편이 사망하고 40대가 되면서 스트레스를 과식으로 달랬기 때문에 점점 살이 쪘고, 그 이후로는 평생 날씬한 몸매로 돌아가지 못했다. 성격도 유쾌하고 강한 성격에서 비관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변했다. 남편이 사망한 뒤 그녀의 삶은 평생 애도하는 삶이었다.

1.8. 평가

지성과 재주를 겸비했지만 운이 없는 군주.

같은 시대의 먼치킨에 운빨까지 좋은 프리드리히 2세가 있었던 것이 천추의 한이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은 이기기 어려운 전쟁을 이긴반면 7년전쟁은 질수 없는 싸움[25]을 운빨이 날려 먹은 격. 당시 시대상으로나 여자라는 생물학적 한계도 있어서 뛰어난 능력과 달리 초기엔 거의 20년간 임신-출산 크리로 국사를 전력으로 돌 볼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26] 직접 전쟁에 참가해서 국운을 걸고 군대를 지휘하는 프리드리히에 맞서서 빈에서 원격으로 부하들을 조종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훨씬 불리한 조건이었다.

전쟁 사이와 7년전쟁 후의 개혁조치도 근대 이성의 시대라 개혁조치를 통해 당시의 기준으로 '불순 사상', 즉 자유주의가 성장하는 조짐을보고 보수적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 즉위하여 타고난 의지력와 재능으로 합스부르크 세습령을 지켜내고 가문의 전통이자 독일을 대표하는 황제자리를 찾아오고 카를 6세 시기부터 기울어가던 나라를 망조에서 건져내며 후계자(요제프 2세,레오폴트 2세)들을 잘 키워내고 제국을 유지한 것만으로도 능력있는 군주라고 평가 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역사 생존시나 생존후에도 강력한 카리스마와 존재감 통치력을 발휘한 군주는 없었고 비견 할 군주는 후손 프란츠 요제프 1세 정도 밖에 없을것이다.

무엇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신민들에게 진정 사랑받았던 군주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이전에 느슨한 동군 연합체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전쟁을 겪으면서 느슨한 연맹체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뭉치게 되었고 살아 생전 이미 '국모'[27]로 불릴정도였다. 마리에 테레지아 이후에도 오스트리아의 기본방향은 테레지아 시절 정책인 점진적인 개혁과 관용이었으며 사후에도 후계자과 신민들의 추앙을 받게 된다.

1.9. 가정

남편복과 자식복이 많았다. 거의 20년 동안 임신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많은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다른 유럽 왕족들이 부러워했다고. 많은 아이를 둔 것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남편 프란츠 슈테판과 금슬이 매우 좋았다. 그래서 공식적인 행사 아닌 사적인 자리에서는 평범한 부부처럼 소박하고 화목하게 지냈다.[28] 프란츠 슈테판은 전술된 일화들에서 보듯이 아내의 비위를 잘 맞추어 주는 등 데릴사위의 주제파악을 매우 잘해줬고, 여러대 근친혼으로 구성원들이 많이 줄어버린 합스부르크가문이 다시 번성하는 훌륭한 씨내리(?) 역할도 매우 잘해 주어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겐 최고의 남편감이었다. 바람 핀건 빼고

남편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사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그외 다른 모든 면에 있어서는 남편의 의견을 따랐다. 하지만 프란츠 슈테판 또한 자존심 강한 부인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마누라에게 알아서 설설 기었다. 그러나 주체할 수 없는 프란츠 슈테판의 바람기 때문에 결혼생활 내내 마음고생이 심했다.

앞서 서술한 대로 유일한 동생[29]인 마리아 안나의 경우 남편 프란츠 1세의 남동생 로렌(로틀링겐)의 샤를(카를)과 결혼해서 겹사돈 관계였다. 이쪽도 연애결혼인데, 아버지 카를 6세가 로렌 가문과 너무 단단하게 맺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바람에 이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카를 6세가 죽은 뒤에야 결혼을 할 수 있었다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이 젊은 나이에 사산하고 그여파로 일찍 사망하자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서 합스부르크-로렌의 후손은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의 후손만 남게 되었다.

참고로 남편 프란츠의 동생 카를은 은근히 마리아 테레지아의 골칫거리였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전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고 벨기에 총독으로도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결코 무능한 인물은 결코 아니었으나, 막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군 지휘를 맡아 프리드리히 2세에게 계속 호구잡히며 허구헌날 맨날 깨졌다. 7년 전쟁때는 좀 나아져서 한두번 씩 프로이센군을 격파했으나, 결정적일 때 또 호구잡히면서 결국 스스로 사임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입장에선 남편의 시동생에다가 하나뿐인 동생의 남편이라 자신이나 남편의 체면 상 짜르지도 못했고, 결국 전쟁에 지는데 한몫했다. 아님 이길때까지 함 써보자는 고집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방인 프리드리히 2세가 후일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릴 정도로 워낙에 먼치킨이라서 카를(샤를) 입장에선 억울할수도...

프란츠 슈테판과의 사이에서 다섯 명의 아들과 열한 명의 딸을 낳았다. 총 16명의 자녀들을 낳았으나 이 중 5명은 요절하고 11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당시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점을 감안하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은 당대 다른 유럽 왕족들의 자녀들에 비해 놀라울 만한 생존률을 보여준 셈.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매우 엄격한 어머니였고 칭찬에 인색했다. 더욱이 그녀는 16명의 자녀 모두를 공평하게 사랑하지 않았다. 아이들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게 컸으며 편애하는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다른 아이들을 항상 비교했다. 거기다 남편 사후에는 매사에 비관적인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마리아 테레지아를 원망한 자녀들도 꽤 있었다.

국익을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만 했던 딸들에게 항상 미안해 했으며 어떻게든 보상하고자 했다지만 이미 자기 의사와는 상관 없이 먼 외국으로 보내진 딸들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유별난 편애를 받았던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만 허용된 연애결혼도 다른 딸들의 가슴에는 못을 박기에 충분했다. 유능한 통치자로 명망이 높았지만 좋은 어머니는 아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정략결혼을 한 딸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했으나 자기 자신부터가 그 말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았던데다 딸들은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진 경우도 있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되려 어머니를 닮았는지 야심 많은 딸들이 많았다. 실제로 마리아 아말리아와 마리아 카롤리나는 자신들이 시집 간 나라에서 남편을 제치고 권력을 휘둘렀다. 자식들 중엔 세간에 가장 유명한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정도가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는) 위와같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따른 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계가 분명했던 루이16세에게는 이러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태도가 그다지 도움이되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 정세가 위태롭게 돌아가게되자 남편 대신 정사에 어쩔 수 없이 관여하기 시작하였고 이 때 남편보다는 어느정도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책으로 결국 일가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 유아기를 넘겨 살아남은 자식들은 다음과 같다.

  • 마리아 안나 요제파 안토니아 요한나
    1738~1789. 차녀지만 장녀가 3살 때 사망하는 바람에 사실상 첫째 아이 취급을 받았다. 아들을 기대했지만 딸로 태어나 마리아 테레지아를 실망시킨 불쌍한 딸. 뒤이어 동생 요제프가 태어나면서 거의 묻히다시피 했다. 19세 때 늑막염을 앓고 등도 굽어서 결혼 시장에 내놓을 수가 없자 거의 방치되다시피 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했다. 병약하나 매우 총명하고 성실했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빛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인 프란츠 슈테판만이 이를 알아주고 사랑해 주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남동생인 요제프와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고 요제프의 아내인 이사벨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나중엔 아버지마저도 등을 돌렸다. 훗날 아버지와는 화해했으나 요제프와는 끝까지 대립해 결국 요제프가 황위에 오르자 추방되다시피 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 후 수녀가 되어 죽을 때까지 수녀원에 있었고 대부분 자선 활동을 했다. 훗날 대수녀원장이 되었다고 한다.

  • 요제프 베네딕트 아우구스트 요한 안톤 미하엘 아담
    1741~1790. 냉정하고 시니컬한 성격이었으나 가족들에게는 따뜻했다.차도남 마리아 테레지아의 첫 아들. 프란츠 1세 사망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했다.

  • 마리아 크리스티나 요한나 요제파 안토니아
    4녀. 1742~1798. 통칭 미미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편애가 유별났던 탓에 다른 형제자매들과는 당연히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아름답고 총명한데다가 성격도 마리아 테레지아와 많이 닮았고 태어난 날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일이라 모녀가 늘 함께 축하를 받았다. 그림 실력도 뛰어나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는데 문제는 그걸 믿고 감시자 노릇을 자처하느라 어머니에게 형제자매들의 잘못을 고자질하고 잔소리를 했기 때문에 다른 형제자매들은 크리스티나를 싫어했다. 더욱이 크리스티나는 형제 중에 유일하게 연애 결혼을 허락받았고, 결혼할 때 막대한 지참금을 가져갔으며, 남편이 테셴의 공작으로 임명되는 특권을 받은데다 락센부르크의 대저택[30]까지 하사받았기에 자매들이 특히 싫어했다. 덕분에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에는 형제들의 냉대와 경멸을 참아내야 했다. 연애결혼한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었는데 그것도 모자라 프레스부르크에 있으면서 평생 마리아 테레지아의 곁을 지켰으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기 때문. 나중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녀를 가리켜 "어머니의 얼굴을 제일 많이 봤다."며 불평했을 정도.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받고 오스트리아에 편히 있을 수 있었다지만 자식복은 없었다. 딸 하나를 두었지만 일찍 죽었고 그 후 다시 임신하지 못해 결국 친자녀는 두지 못했기 때문에 양자를 들여야 했다.

  • 마리아 엘리자베트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5녀. 1743~1808.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중 제일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고 한다. 애칭은 리슬.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부심으로 거만하고 경박했지만 크리스티나 못지않게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랑을 받았으며 크리스티나와 사이가 좋았던 거의 유일한 형제. 2녀 안나의 건강이 나빠진 게 엘리자베트의 탓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크리스티나와 짜고 큰언니 안나를 따돌리고 어머니와 안나 사이를 이간질했다. 덕분에 안나와 사이가 좋았던 아말리아와도 사이가 나빴으며 결혼과 수도원행으로 헤어진 뒤에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1767년 궁정에 천연두가 퍼졌고 엘리자베트 역시 천연두에 감염됐다. 회복은 됐으나 그 후 아름다운 얼굴을 잃어버려 다른 왕실과의 혼담이 영영 깨지고 말았다. 결국 수녀가 됐으며 나중에 인스브루크 수녀원의 수녀원장이 되었다.

  • 카를 요제프 에마뉴엘 요한 네포무크 안톤 프로콥
    차남.(1745–1761) 마리아 테레지아와 남편 프란츠가 가장 총애하던 자식이었다. 형인 요제프는 조용하고 약간 내성적인 성격인것과 달리 외향적인 성격이었다고 하고, 다른 형제 자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신의 지성을 잘 물려받았다고 생각하여 자식 중에서 편애해서 장남인 요제프와 라이벌이 됐고 사이도 약간 불편했다고 한다. 형인 요제프가 당연히 그를 경계했고 자신도 야심을 숨기지 않을 정도였다고. 그러나 그러나 16세때 천연두에 감염돼 요절했다.

  • 마리아 아말리아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6녀. 1746~1804. 예쁘고 재능도 있고 그림도 잘 그렸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의 기준에는 못 미쳤는지 차녀 안나와 함께 찬밥 취급 받던 공주. 크리스티나에 비해 애교가 없고 무뚝뚝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가 항상 아말리아를 크리스티나와 비교했기 때문에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고, 이것이 점점 심해지면서 크리스티나를 매우 증오하게 되었다. 게다가 자신은 연인이 있었음에도 파르마의 페르디난트와의 정략결혼으로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해야했기 때문에 크리스티나와 어머니를 평생 미워했다.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어머니의 명령에 반기를 들고 꾸준히 외도를 저질렀으며, 더 나아가 친정인 오스트리아에 이익이 되는 길과 반대의 길을 걸었다.

  • 페터 레오폴트 요제프
    3남.(1747~1792) 그당시 장남은 후계자이고 전근대 이전은 사망률이 높기 때문에 차남 까지는 보험용으로 관심을 받지만, 3남인 탓에 성장기에는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장남 요제프는 어머니의 작위를, 차남 카를은 아버지의 영지 토스카나를 물려받고, 레오폴트는 밀라노를 물려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둘째형이 일찍죽고 1765년 토스카나 대공이 되었다. 1790년 형 요제프 2세가 죽은 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 레오폴트 2세가 된다.

  • 마리아 요제파 가브리엘라 요한나 안토니아 안나
    9녀. 예쁘고 유순한 성격으로 다른 형제들과 매우 사이가 좋았고 오빠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1767년 빈에 천연두가 돌았고[31], 마리아 테레지아와 함께 납골당에 기도를 하고 왔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아 요제파는 그 직후 천연두에 걸렸고 결국 사망했다.

  • 마리아 카롤리나 루이자 요제파 요한나 안토니아
    10녀. 1752~1814. 마리 앙투아네트 바로 위의 언니로 활달하고 강한 성격으로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장 사이가 좋았다. 마리 테레즈 샬로트의 이름은 그녀의 이름에서 땄고, 나중에 마리 테레즈가 그녀를 만났을 때 "어머니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모를 가장 사랑하셨어요."라고 언급했을 정도. 그리고 이 사람이 원래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프랑스 왕세자와 혼담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로 사망한 뒤 요제파가 결혼했어야 할 나폴리 왕세자와 결혼하였다. 그러니까 바로 윗 언니가 죽어서 결혼 순서가 한줄씩 당겨진 것. 요제파 대신으로 나폴리로 시집간 이후에는 많은 자식들을 낳아 대가족을 거느렸다. 무능한 남편을 대신하여 나폴레옹에 의해 왕위를 잃을 때까지 나폴리 왕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시에르즈리로 가기 직전까지 편지를 주고 받았다. 당시 외교 표준언어이자 전 유럽 궁중의 언어는 프랑스어였는데[32], 여동생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소식을 접해들은 이후로 그녀는 평생 프랑스인들을 증오하여 프랑스어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에 의해 나폴리 왕국을 빼앗긴데다, 자신의 딸이 원수나 마찬가지인 사람의 아들 루이 필리프[33]와 연애결혼하는 걸 봐야 하는 불행을 겪었다.

  • 페르디난트 카를 안톤 요제프 요한 스타니슬라스
    4남. 1754~1806. 모데나 공작. 이쪽은 아버지처럼 모데나 공작령의 상속녀에게 데릴사위로 팔려(?)간다. 실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일찌감치 미래의 며느리를 의눈으로 노리고 4남의 결혼상대로 찍어놓서 다른데서 못 채가게 빈의 궁정에서 안놔줬다고 한다...

  •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11녀. 1755~1793.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다. 원래는 혼담이 없었으나, 마리아 요제파가 천연두로 죽은 이후 마리아 카롤리나 대신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했다. 야심만만하고 드센 언니들에 비해 유순하고 얌전한 성격이었으나 최후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 가장 안습한 인물이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 막시밀리앙 프란츠 그자비에 요제프 요한 안톤.
    5남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아이. 1756~1801. 후에 쾰른 선제후 겸 대주교가 된다. 머리가 나쁜데다가 무례하고, 자신의 지위[34]를 지나치게 뽐내는 성격이어서 형제들을 항상 곤란하게 했다.


2.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실의 여대공

1855년~1944년
1번 항목이자 흔히들 마리아 테레지아하면 떠올리는 '여제'와는 동명이인. 아버지는 포르투갈 왕 미겔 1세, 어머니는 아델하이트 왕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둘째 동생인 카를 루드비히 대공(1833~1896)과 결혼했다. [35] 남편과 나이 차이가 상당했고(22살!) 그의 둘째 부인(마리아 안눈치아타 : 1843~1871)의 자식[36]프란츠 페르디난트를 포함해 넷(3남 1녀)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아껴주었다고 한다.

상당히 개방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자신의 양아들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의 결혼을 지지했으며, 그의 결혼식에도 참석한 유일한 황실 인사였다고 한다.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 사건으로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가족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했는데 귀천상혼이란 이유로 오스트리아 황실에서 프란츠의 자녀에게 연금 지급을 거부하자, 마리아가 본인이 받는 연금을 대신 주겠다고 나섰다. 당시 마리아는 오스트리아 황실 내에선 가장 발언권이 강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마리아의 행동을 무시하기는 곤란했고, 이 때문에 연금을 되돌려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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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마리아 테레지아는 공식적으로는 황제의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제'로 불리는 이유는 아래 통치 항목을 참고.
  • [2] 그림 설명. 합스부르크 왕가의 피를 물려받은 후손답게 턱이 약간 볼록하게 튀어나와있고 저 턱은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서 나폴레옹에게 시집간 마리 루이즈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 [3] 국사조칙은 첫자식이 태어나기전에 공표 한것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를 책봉하고 나서 한게 아니다. 1713년에 공표한 것이므로 1717년에 태어난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혜자인 것이지 애초에 그녀에게 물려줄 목적으로 만든것은 아니다. 사실 국사조칙은 어디까지나 '보험용'으로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장성하고 나서도 아들 낳는 것을 포기하지 못했다. 국사 조칙의 자세한 내용은 카를 6세항목 참조 할 것.
  • [4] 이 당시엔 앞선 순위로 형이 둘이나 있어서 스페인 왕위 계승자는 아니었다
  • [5] 나중에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그 프리드리히 대왕.
  • [6] 합스부르크 왕실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겸임하는데 황제는 '가톨릭교회의 보호자요 신앙의 수호자'이다.. 수십년전 30년전쟁으로 신교도들한테 호구털렸는데 종교가 다른 결혼은 상대방이 개종하지 않는이상 불가능하다. 프로이센 입장에서도 종교문제와 왕세자를 데릴사위로 바쳐야 하기 때문에 잠시 거론만 되는 것이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일찍이 사촌인 영국공주와 약혼했다가 파혼하고 브라운슈바이크-베베른 공작가문 출신 여성과 결혼한다.
  • [7] 결혼 후의 독일식 이름으로는 프란츠 슈테판 폰 로트링겐이 된다.
  • [8] 프란츠의 할머니는 카를 6세의 할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의 딸이다. 따라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는 8촌이다. 역시 근친덕후 합스부르크
  • [9] 로렌 가문은 샤를마뉴의 후손으로 적당히 지체가 높으면서도 로렌 공국 자체가 신성로마제국 영방에 속하면서도 프랑스 왕국 깊숙히 자리잡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를 집어삼킬 위험이 없었다. 거기에 로렌은 프랑스와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기에 프랑스를 견제할 수 있는 전초기지로 기능할 수 있었다.
  • [10] 프란츠의 아버지 레오폴트 로렌공작이 프란츠의 형이 살아있을 때부터 후계자를 합스부르카가문 장가보내려고 시도했다. 사돈인 프랑스 왕실(레오폴트의 배우자는 루이 14세의 조카)에서 경악해서 경고 할 정도.
  • [11] 프란츠의 어머니는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작의 딸이다. 완전 프랑스인. 대신 동생 카를 알렉산더는 적극 찬성했다.
  • [12] 국사조칙은 카를 6세의 첫자식이자 유일한 아들 레오폴드가 태어나기 3년전에 취한 조치였다. (당연히 테레지아가 태어나기도 전)
  • [13] 무려 200년전 문서를 들고 나왔다...불만이 있으면 카를 6세때 주장안하다 굳이...이는 2~3년전 카를 6세의 말년에 (1737~1738) 에 치뤄진 폴란드 왕위 계승전쟁에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패배하여 나폴리,시칠리아,를 잃었고 오스만과의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동남부 영토를 잃었다. 전쟁에서도 참패했고 거기서 2년밖에 안 지났으니, 주변국들이 호구로 보고 뜯어먹을 구석을 찾은것. 폴란드 왕위는 오스트리아-러시아가 지원한 아우구스트 3세가 계속 유지하기는 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트 3세에게 밀려 왕위를 빼앗긴 폴란드 전 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가 프란츠 1세에게 로렌 공국을 양도받은 루이 15세의 장인이고, 완전히 패배라고 보긴 어렵고 투르크와의 전쟁은 패배였으나 치세 전반에 승리로 얻은 영토 일부는 지켜냈다.
  • [14] 마리아 테레지아도 똑똑하고 재능있는 편이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후계자 교육이 부족했다. 더욱이 10대 때부터 임신크리로 인해 견문이 짦았던데다가 나이가 젊어서(23세) 생긴일이다. 적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5살연상에 태어나서부터 왕세자로 혹독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처음엔 마리아 테레지아처럼 경험부족으로 인한 실책을 저질렀었으니... 1741년 첫전투에서 줄행랑 치는 병크를 저질렀는데도 군대가 무너지지않고 부하들이 잘 마무리 해주어서 이길 수 있었다.
  • [15] 이전까지 헝가리 의회와 헝가리 귀족들은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크던 작던 반항적인 자세로 일관하였는데, 마리아 테레지아의 과단성에 감복하여 여왕에게 3만명의 병력과 재정지원을 약속 하였다. 이것이 정치적으론 유의미한 사건이고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귀족과 일체감을 공유한 것은 좋으나 실제로 보내준다는 병력은 늦게와서 별도움은 안되었고 실제론 오스트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 자력으로 막은거나 다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가 헝가리 귀족과 일체감을 공유한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 시기가 유일할 정도였고, 이 시기를 가리켜 헝가리 귀족들의 황금시대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 [16] 시동생 카를의 수하로 벨기에를 잘 다스린 공적으로 재상으로 등용한다.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1793년까지 오스트리아의 재상. 오스트리아 역사상 유이한 국가재상(슈타츠칸츨러,Staatskanzler ) 유이한 국가재상 후임자는 손녀 사위이자 빈 회의를 주도한 메테르니히다
  • [17] 러시아 프랑스를 제외하고도 작센 스웨덴도 동맹을 맺었다. 바이에른은 중립. 거기다 스페인은 부르봉 가문이 왕위에 등극한지 2~3세대이던 시절이라 프랑스 2중대였다. 폴란드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승리하며 그들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등극한 아우구스트 3세 시절이였는데, 왕위에 오른 과정이 과정인 만큼 당연히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측에 붙었고 직접적인 군사 행동은 안했지만 통행로와 주둔지 제공등으로 러시아군을 서포트. 당대 유럽 국가 대부분이 적이였다. 사방이 적이라는 것도 비유가 아니라 진짜 물리적으로도 서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남쪽으로 작센과 오스트리아, 북쪽 스웨덴, 동쪽 러시아로 완전히 둘러쌓여 있었다.
  • [18] 국내 인터넷에선 갑자기 서거한걸로 알려졌는데 건강이 안좋아서 오스트리아가 승기를 잡기전인 전쟁 중반부터 오늘내일 했다고 한다.
  • [19] 독일에선 젊은이들 사이에선 프리드리히 빠정도가 아니라 숭배분위기가 퍼졌고, 독일은 물론이고 한번도 가본적 없는 영국에선 인기가 엄청나게 높았으며(프랑스 털어주니깐.) 심지어 아메리카 신대륙에서도 프리드리히 빠가 많았다. 훗날의 나폴레옹도 프리드리히 빠였는데 나폴레옹 이전에 유럽 의 젊은이들에겐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냥 팬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숭배 수준이었다...
  • [20] 프란츠 1세 항목에 전쟁중에 돈을 꽤 벌었다고 하는데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왕실 예산은 3% 내외(사치가 심한 프랑스는 5%)였기 때문에 국가 예산과 비교가 안 된다. 당시 가장 큰 지출은 상비군인데 수십만 명 먹여주고 재워주는것만 해도 엄청난 돈이 들고 화기 군함 대포 등은 현재에도 돈 잡아먹는 귀신인데 당시 경제활동 상황을 보면 국가에 큰 부담이다. 물론 적국 프로이센도 전쟁으로 국토가 잿더미에 빚이 쌓였기 때문에 당분간 서로 충돌할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남편이 벌어놓은 재산 덕분에 국채 발행에 성공했다고 하니 왕실 재산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천문학적 규모였던 건 사실인 듯.
  • [21] 한 때 퐁파두르에게 'cousin'이라고 쓴 다정한 편지를 보냈다는 추문이 있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단 한번도 퐁파두르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었다. 당시 예법으로도 신분차이가 나는 사람한테 말을 거는것도 결례에다 체면이 깎이는데 편지를 썼을리가 없다.
  • [22] 프로이센은 예카테리나 2세가가 폴란드 왕위를 획득하고 전 국토를 병합하려 하자,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끌여들여 분할을 제안하였다.
  • [23] 7년전쟁에서 실패와 남편 프란츠의 사망이후 국사에 대한 관심이 준 영향도 있다.
  • [24] 물론 아들이 많다고 후계자를 갈아 치울수 있는건 아니다.. 테레지아 본인도 국사조칙이라는 새로운 헌법에 따라 승계했고 유럽국가의 왕위 계승은 현직 왕이라도 마음대로 좌우 할수 있는게 아니다. 훗날 손자대의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황제론 2세) 시절 승계자 페르디난트 1세는 신체장애와 정신지체까지 앓던 폐인이었지만 다른이를 세우는 것에 대한 '논의' 조차도 꺼내지 못 했다.
  • [25] 시동생 카를 알렉산더(로렌의 샤를)이 로이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에서 박살나고 사임하면서 한 말이다. 훗날 장조카 요제프 2세때 삼촌이자 이모부를 다시 등용하려지만 결단코 사양한다. 물론 오스트리아는 카를 6세 시절 사보이의 외젠을 명장이라고 은퇴도 못하게 노인학대(?)한 전력이 있다.
  • [26] 물론 부부간 금슬이 나빴거나 아니면 손이 귀해 자식이 적었다면 임신으로 인한 리스크는 경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군주제 하에서 후손의 생산은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이므로 등한시할 수 없었다. 더욱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경우 집안의 남자 후손의 부족으로 인해 여자의 몸으로 왕관을 쓰게된 입장으로 승계문제 때문에 전쟁까지 치렀었으니...
  • [27] 동양서 유교윤리로 왕비를 국모드립 치는것과 달리 업적에 대한 평가다
  • [28]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가서 적응하기 더 힘들어했다는 얘기가 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왕족이어도 사석에서는 사생활이 있었는데 프랑스 궁정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그런데 묘하게도 궁정문화 자체는 오스트리아쪽이 더 보수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29] 막내 여동생도 요절했다. 1남 3녀중 카를 6세의 자식중 딸 둘만 남았다
  • [30] 외국으로 시집간 다른 딸들이 평생 그리워하던 가족 나들이 별궁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를 본딴 소 트리아농을 베르사유 안에 건설하기까지 했다.
  • [31] 마리아 엘리자베트와 마리아 테레지아가 천연두에 걸렸다. 거기에 요제프 2세의 황태자비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요제파가 사망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도 사경을 헤맸으나 곧 회복되었다.
  • [32] 그들 남매의 부친인 프란츠 1세는 불어권에서 장가와서 일평생 독일어를 배우지 않고 프랑스어만 쓰고 살았다고 할 정도였다. 전혀 문화가 다른 나라에 시집가거나, 심지어 왕위를 계승하러가는게 가능했던 이유가 이 덕분이었다.
  • [33]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의 마지막 국왕으로, 부르봉 가문의 방계인 오를레앙 가문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왕족이었음에도 왕위에 대한 욕심으로 프랑스 혁명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을 베는 데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 [34] 황제의 아들이자 동생이자 선제후
  • [35] 합스부르크 가문 가계가 마리아 테레지아-둘째 아들레오폴트 2세-프란츠 2세-셋째 아들 프란츠 카를 대공(1802~1878)-프란츠 요제프 1세/막시밀리안 1세/카를 루드비히 이므로 궂이 따지자면 위 여제의 고손자의 후처(세번째 부인)이 된다.
  • [36] 첫째 부인 마르가리타(1840~1858) 사이에서는 자식이 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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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2-04 17: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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