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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last modified: 2015-09-20 18:37:21 by Contributors

중화인민공화국국가주석
1대 2대
건국 마오쩌둥 (1949~1959) 류사오치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주석
1대 2대
건국 마오쩌둥 (1949~1976) 화궈펑

© Zhang Zhenshi (1914–1992). Mao Zedong portrait attributed to Zhang Zhenshi and a committee of artists (see [1]). (cc-by-2.0) from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기
2.2. 청년 시절
2.3. 대장정
2.4. 제2차 국공합작과 국공내전 재개
2.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한국전쟁
2.6. 반우파운동
2.7. 중소분열
2.8. 대약진 운동
2.9. 문화대혁명
2.10. 사망
2.11. 마오가 점지한 후계자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2. 부정적 평가
3.3. 결론
4. 마오쩌둥의 성격
4.1. 지도력
4.2. 군대식 사고
4.3. 전략적 허세
4.4. 대담함과 배포
5. 마오의 사생활
6. 사상
6.1. 마오이즘
6.2. 사상적 뿌리
6.3. 혁명 이론
6.4. 군사 이론
6.5. 여담
7. 어록
8. 한국에 알려진 마오쩌둥의 한국 관련 발언의 진상
9. 관련 서적
10. 그 외


1. 개요

毛泽东·毛澤東(모택동) / Máo Zédōng (1893년 12월 26일 ~ 1976년 9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의 핵심 건국자이자 혁명가인 동시에 폭군이자 독재자인 인물. 평가에 따라 영웅도, 악당도, 그 둘이 모두 가능할 수도 있는 가장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20세기 문제적 인물 중 하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제1대 주석. 수백 명의 병력을 거느린 게릴라 부대 지도자로 시작해서 수백만 대군을 거느린 적을 격파하고 결국 천하를 손에 넣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집권 이후의 여러 실책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서구권에서는 오늘날 강철의 대원쑤와 더불어 냉전 시기의 냉혹한 공산주의 정치가로도 평가받고 있다. 결국 천하를 말안장 위에서 얻을 수는 있지만 말안장에서 다스릴 수는 없다는 것을 실증한 인물.

한국에서는 그저 공산주의 정치가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 게릴라 전술의 완성자이기도 하며 저술가, 사상가로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기도 했으며 명필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성격을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복합적 인물.

인생 역정 자체는 엄청나게 대단한 데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라는 점에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신화적인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선 일단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고 있으니 중국인들, 특히 중국 공산당 당원들 앞에서 깎아내릴 때는 굉장히 조심할 것이었지만 현재는 마오쩌둥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는 거의 사라진 상황. 드라마에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나타낸다. 허나 아직도 굉장히 민감한 소재인 것은 사실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제일 뛰어난 정치가가 누구에요?"라고 물으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마오쩌둥을 뽑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정도. 그래서 스탈린의 공적을 모두 부정한 흐루쇼프와는 달리 마오의 정책과 정반대 정책을 실시한 덩샤오핑도 "마오쩌둥의 공과는 7:3"이라고 주장하며 그를 신화적 위치에서 끌어내리진 않았다. 소련에는 스탈린이 없어도 레닌이 있기 때문에 스탈린 비판이 가능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그 어떤 인물로도 대체 불가능한 역할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비판이 민감하다.

그러나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홍위병의 행패 등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현대 중국인들도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존경과 애증이 섞인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맨몸을 일으켜서 아편전쟁 이래 100여년간 계속된 천하대란을 종식하고 천하통일을 이룬 면으로 보면 보면 유방이나 주원장급의 인물이지만 집권 이후에 과대망상적이고 급진적인 시책으로 국가에 재앙을 가져온 것을 보면 왕망이나 수양제급. 중국 역사의 맥락에서만 나올 수 있는 영웅과 폭군의 일면을 모두 가지고 있으며 그래서 애증이 엇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모택동이라는 한자 표기 역시 널리 쓰이며 연변자치주와 북한의 경우에는 한자 쪽이 표준이다. 중국식 발음은 "마오쩌뚱"에 가깝다. 현대 중국어 한자음의 로마자 병음 표기법이 확립된 후에는 Máo Zédōng으로 쓰고 마오쩌둥이라고 읽는다. 과거에는 병음이 확립되지 않아 Wade–Giles 표기법에 따라 Mao Tse-tung이나 Mao Tze-tung이라고 썼다. 그래서 영미권의 문헌 중에는 이렇게 표기된 문헌이 많다. 여담으로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도 이 표기를 쓰고 있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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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성 샹탄현에 있는 마오쩌둥의 생가. 상당히 부유했음을 알 수 있다.

1893년 후난 성 샹탄에서 태어났다. [1] 어릴 적 가정형편은 넉넉한 편이었다. 객가인 집안이라고 한다. 14살 때 뤄씨 성을 가진 여인과 혼인하였으나 이 결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라서 결혼을 거부하고 가출하였다. 그 뒤 장사의 주성중학에 입학하였고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혁명군에 잠시 가담했다가 후난성 공립고등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후난 제1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 스승이자 후의 장인이 된 양회중 교수를 따라 북경대에서 약 2년간 보조 사서로 근무했다. 이때 공산주의 사상을 처음 접하고 많은 독서와 토론, 강연 등을 통해 사상적 기초를 닦았다.

젊었을 때 신해혁명에 사병으로는 잠시 군문에 진입한 적이 있었지만 체계적인 군사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밀덕후였는지 클라우제비츠와 손자병법, 그리고 중국의 역대 군담소설류를 매우 좋아해서 손에 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혼자 군사학을 독학하면서 전략-전술론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갖게 된다.

이 당시 마오쩌둥은 정식 학생은 아니었지만 베이징대학 철학과 수업에 들어와 계속 청강을 했다. 한 번은 정식 학생도 아니고 사투리를 쓰는 말단 직원이 자기 수업을 듣는 것을 고깝게 보던 철학과 교수 한 명이 수업시간에 들어온 마오쩌둥을 학생들 앞에서 모욕을 주어서 쫓아내었다. 이후 1949년 마오쩌둥이 베이징에 입성하자 이 교수는 허겁지겁 장제스를 따라 대만으로 도망쳤다. 그 철학과 교수가 그 유명한 후스(胡適)[2]이다. 사실 당시 베이징대학교 총장을 맡고 있던 후스는 공산군이 입성할 무렵 마오쩌둥으로부터 과거는 잊어버리고 자리를 보장할 테니 대만에 가지 말고 남아달라는 대인배적인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후스는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못 믿는다"며 이를 거절했고 대만으로 튀어버렸다. 후스의 말처럼 17년 후에 문화대혁명의 본격적인 시작은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붙인 교수를 비판하는 대자보로부터 시작했고(마오는 이 대자보를 전국에 회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철학과 교수들은 홍위병 제자들에게 엄청나게 고초를 겪었다. 이들 중 슝스리 같은 일부는 박해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다. 후스도 아마 남았으면 비슷한 운명을 겪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후스의 실용주의 사상은 마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그동안 사망한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고 학교 사업도 벌여서 교장이 되어 꽤 돈을 벌게 된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그동안 사귀던 양교수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계급으로 치면 그는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중국 공산당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2.2. 청년 시절

1921년 중국공산당 1차 전당대회에 참석, 회의서기를 맡았다.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 창립 멤버라는 이야기. 여담이지만 이때 창립 멤버 수십 명 중에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있던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딱 두 명 뿐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사망하거나 혹은 국민당이나 일본측으로 전향했다.

창립 멤버이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것은 아니고 활발한 실무 활동과 이론 제시로 명성을 얻었다. 당시 공산당은 쑨원의 뜻에 따라 국민당과 연합(국공합작)을 하고 있었고 공산당원들은 개별적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고 있었다. 마오쩌둥도 공산당적을 가지고 국민당에 가입했고 국민당 정부의 명령을 받아 향촌조사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은 농민의 혁명 역량을 주목하게 되었다.

위안스카이의 참칭 이후 국민당은 쑨원의 본거지인 광둥성만 장악하고 있었고 북부는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쑨원은 북벌을 결심했고 국민당군은 1926년 광둥성을 출발하여 계속 북벌을 하여 1927년에는 상하이, 1928년에는 베이징을 장악했다. 그러나 북벌군을 이끌던 장제스는 1927년 4월 상하이를 장악하자 공산당을 배신하고 갑자기 공산당원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국민당적을 가지고 있던 공산당원들의 90%는 모두 살해되었다.

이후 공산당은 복수를 위해 봉기했고 1927년 8월 1일에 봉기한 난창봉기는 국민당에게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9월 7일 마오쩌둥도 고향인 후난 성에서 거병했으나 압도적인 국민당군에게 참패했고 마오쩌둥도 포로로 사로잡혔다. 마오쩌둥은 처형장으로 끌려다가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주했고 이후 패잔병을 규합하여 후난성 남방에 있는 장시성으로 보피, 징강산(정강산)에서 게릴라전을 펴기 시작했다. 이후 자신들을 중국공농홍군(홍군)이라고 자칭하게 되었다. 이후 비슷하게 쫓겨온 주더가 이에 합류했고 이때부터 마오쩌둥은 특유의 게릴라전을 펴기 시작했다. 1930년 아내인 양카이후이도 국민당군에 체포되었고 마오쩌둥과 결별하고 공산주의를 버리면 살려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 아들 마오안잉이 보는 앞에서 총살당했다.

여기서 마오쩌둥은 절대로 민폐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엄격한 군율을 만들었다. 삼대기율 팔항주의라고 불리는 이 규칙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즉시 사형이었다. 당시 중국의 군대란 국민당군이고 군벌군이고 완전히 무장한 떼강도나 다름없었고 이들이 마을을 지나가게 되면 강도는 물론이고 강간이나 살인도 벌어졌으나 마오쩌둥의 군대는 군율이 엄정했기 때문에 농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병사의 충원도 용이하였다.

이 당시 주창한 16자 전법은 굉장히 유명하며 유격전술의 기초가 되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비즈니스 모델로 주창되기도 한다.

적진아퇴(敵進我退) - 적이 진군하면 아군은 물러나 피하고
적주아요(敵駐我擾) - 적이 주둔하면 아군은 교란한다.
적피아타(敵疲我打) - 적이 피폐해지면 아군은 타격하고
적퇴아추(敵退我追) - 적이 물러나면 아군은 추격한다.

장제스는 이를 눈엣가시로 보고 계속 대부대를 보내 진압작전을 폈으나 마오쩌둥은 국민당의 토벌을 맞이하여 수적으로 불리한 공산당의 게릴라, 매복 전술 등 유효한 전략을 제시했고 전문적으로 군사학을 공부했던 주더는 실질적인 지휘를 맡아 엄청난 전과를 이루게 되었다. 마오쩌둥의 전략은 기본적으로 기동전으로서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분산시켜 일시적으로 아군의 수적 우세를 확보하여 분산된 적을 각개격파하는 식이었다.

이들은 4번에 걸친 국민당군의 진압을 분쇄하고 정규군 60만, 민병 200만이라는 엄청난 대군으로 성장했다. 국민당군은 참패할 때마다 엄청난 물자를 버리고 도주했고 이런 물자로 홍군은 대군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를 두고 "우리 홍군의 보급부장은 장제스다!"라고 큰소리를 칠 정도였다.

2.3. 대장정

이때 공산당의 잔존 지도부가 마오쩌둥이 있는 루이진(서금)으로 계속 오면서 마오쩌둥의 지휘는 흔들리게 되었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은 당시에는 확고한 지도자가 아니었고 공산당에는 그의 경쟁자가 여럿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소련에서 유학한 젊은 세대 간부들은 스탈린을 앞세워 당권을 장악했고 마오쩌둥과 주더는 실질적인 지휘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이들 젊은 간부들(28인의 볼셰비키라고 불린다.)은 이제 홍군은 클 만큼 컸으니 게릴라전을 버리고 정규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국민당군은 독일에서 한스 폰 젝트 장군을 초빙하여 진지전을 벌였고 거기에 28인의 볼셰비키는 정규전으로 맞섬으로서 엄청난 병력 손실을 당했다. 결국 대부분의 병력을 잃은 공산당은 루이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공산당 지도부는 멀리 산시성에 마련된 해방구로 도피하려고 한다.

1934년 10월 공산군은 국민당군을 견제하기 위한 소수의 결사대를 뒤로하고 서쪽으로 향했고 국민당군의 포위를 뚫고 8만여 명의 홍군과 함께 탈출하여 1년여 동안 죽을 고생을 수없이 넘겼다. 중원을 시계 방향으로 반 바퀴 도는 행군이었으며 국민당군의 추적 뿐만 아니라 날씨, 식량, 그리고 소수민족 지역까지 통과해야 하는 엄청난 대모험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와중에서 자신을 몰아냈던 젊은 간부들을 배제하고 당권을 되찾게 되었다. 마오쩌둥은 근성을 발휘하여 살아남은 6천여 명의 홍군과 함께 산시성 옌안 소비에트에 도달하는 대장정을 성공시켜 공산당의 대표 인물로 급상승하였다. 1년동안 잃은 병력은 전 병력의 90%가 넘었으나 공산당은 어쨌든 살아남았고 다시 산시성에서 힘을 기르게 된다.

2.4. 제2차 국공합작과 국공내전 재개

이후 옌안에서 힘을 쌓고 있었지만 여전히 국민당에 비해 불리하던 도중 장쉐량장개석을 감금하고 강제로 제2차 국공합작을 강요하는 서안 사건이 일어나면서 기사회생했다. 장제스는 석방조건으로 국공합작에 동의했고, 이후부터 공산군은 형식상 자신들을 토벌하려고 했던 국민당군에 소속되어 제18방면군을 이루게 되었으나 실제로는 거의 독립적으로 운용되었다. 18방면군은 황하이북의 8로군과 장강부근의 신4군으로 이뤄졌다.

일본군에 밀린 국민당군은 쓰촨성 충칭으로 대피하였으나 마오쩌둥은 화북에서 공산군을 이끌면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국공합작은 말 뿐이었고 실제로는 장제스는 일본군보다 공산군을 더 경계하였다. 또한 이때 마오쩌둥은 농촌을 근거로 세력을 엄청나게 확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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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중재로 평화회담을 위해 만난 장제스와 마오쩌둥.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사진.

항일전 이후 1945년 미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을 중재하여 연립정부를 구성시키려고 했고 조지 마셜이 중국에 방문하여 장제스-마오쩌둥과 3자회담을 갖기도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1946년 국민당은 먼저 휴전안을 깨고 선공을 벌였으며 한때는 공산군의 근거지인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당군은 병력을 지나치게 확산시키는 우를 범했고 공산군은 농촌을 휘젓고 다니면서 게릴라전을 폈다. 결국 상황은 국민당군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1948년 가을 린뱌오가 만주지역의 국민당군을 섬멸하면서부터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되지 않아 마오쩌둥은 국민당 정권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1949년, 중원의 패자가 되었다.

물론 이런 집권 후에 당연히 피의 숙청이 따랐다. 중공정권 성립 후에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간 지주나 자본가들은 수백 만 명에 달했다. 이런 숙청은 인민재판 형식으로 이뤄졌으며 지주라는 이유만으로 처단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시절의 실무공무원들은 상당수 신정부에서도 일하게 되었으며 이렇게 관료주의에 찌든 실무자들은 후에 대약진운동 때 허위보고나 생산량 조작 등의 엄청난 병크를 저지르게 된다.

지주계급을 싹 날려버린 공산당은 약속대로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이는 아주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다. 국민당이 실시하려다가 행정력 부족으로 못한 토지개혁안으로 실시했으니 중국의 농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만약 국민당이 이 개혁안을 밀어붙였다면 중국은 공산화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2.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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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과 마오쩌둥. 김일성 목 뒤를 자세히 보면 혹 비스무리한 게 보인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자마자 마오쩌둥에게 닥친 현안은 1950년의 한국전쟁이었다. 마오쩌둥도 한반도 개입은 처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인천상륙작전 후에 전세가 역전되자 "이 전쟁은 내전이므로 내전의 당사자인 남조선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무방하지만 미군은 38선에서 진격을 멈춰야 하며 38선을 넘으면 그 이후의 모든 일은 미국의 책임이다"라고 미국에 대해서 경고를 한다. 그러나 미국은 38선을 넘었고 이는 마오쩌둥에게는 미국이 자신들을 치러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려 했고 마오가 참전하지 않으면 한반도를 포기하겠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스탈린은 대외관계에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이라서 천조국 미국과 직접 대결하는 것은 피하려고 했다. 6.25도 사실 한국에서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되어왔지만 실제로는 김일성이 소극적인 스탈린을 충동질했다고 흐루쇼프 회고록에 나온다. 스탈린은 그리하여 중국마저 북한을 돕지 않을 경우 북한 정부와 북한군을 중국 동북 지방으로 철수시키려고 했다.

한반도 파병안을 놓고 중국 지도부는 갈라졌다. 저우언라이린뱌오는 참전을 반대했는데 당시 국공내전이 끝난 지 1년도 안되어 세계 최강 미국과 맞붙는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기 때문이다. 총사령관인 주더는 중립을 지켰지만 펑더화이는 파병안에 찬성했다. 마오쩌둥도 북한이 망하면 미국의 다음 목표는 자신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걱정했기 때문에 본토에서 미군과 싸우느니 한반도에서 싸우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순망치한"을 외치며 총 60만 대군을 파병했다. 마오의 생각으로는 미국이 북한을 장악하면 순식간에 중국의 북부 항구들은 봉쇄될 수 있고 만약 미국과 대만이 협공을 하면 새로 성립된 공산 정부는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마오쩌둥은 펑더화이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중국인민지원군'을 한반도에 대규모로 파병했다. 정규 인민해방군을 투입했으면서도 '인민지원군'을 사칭한 것은 중국정부가 UN과 직접적으로 맞서는 것을 피하고 이 '지원군'이 중국 정부와 아무 상관없고 이들이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조선 인민을 불쌍히 여겨 자발적으로 참전했다"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인해전술을 펼쳐서 한반도의 북부에서 국제연합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보급로에 대한 깊은 생각도 없이 마구 돌격한 결과 국제연합공군에 의해 보급로가 차단되는 바람에 한반도 중부에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당시까지만 해도 너무 깊이 진격한 것만 빼면 실수는 거의 없었다. 다른 능력도 나름대로 나쁘지는 않은 편이었고 군사적 능력은 발군이었다. 대장정과 그 이후 전쟁에서 보여준 모습만 봐도 전술 능력은 우수했고 한국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을 예상하고 적절한 참전으로 자국의 위상도 높이고 완충지대를 만들어내는 등 전략적 식견도 좋은 편이었다. 1.4 후퇴 당시 미국 정부와 유엔군사령부는 전선이 전라도의 금강에 설치된 방어선까지 밀리게 되면 유엔군은 축차적인 방어를 하면서 부산까지 후퇴한 뒤 최종적으로 유엔군은 일본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군제주도로 철수한다는 한국정부 망명계획을 극비리에 기획하고 있었다. 대만 돋네 만약 이게 시행되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주의 독재에 시달렸을 것이다.

중공군의 제3차 공세는 현지 사령관인 펑더화이가 무리한 진격임을 상기시키며 여러 차례 말렸지만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지속적인 공세를 원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공세를 지속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마오쩌둥은 이 전쟁에 참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뜻을 밝힌 큰 아들 마오안잉을 참전시켰다. 마오안잉은 전쟁 도중에 미 공군의 네이팜 폭격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의 유해를 중국으로 옮길지 여부를 묻는 참모진의 건의에 마오쩌둥은 시신을 북한에 그대로 두라고 지시하였다. 마오안잉의 묘는 2012년 현재에도 북한에 있으며 이 묘는 북한과 중국의 혈맹을 상징하는 정치적 장치로 이용되고 있다.

2.6. 반우파운동

6.25 참전으로 막대한 전비를 쓰고 수십 만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그래도 중국은 아편전쟁 후 거의 100년만에 평온한 국가를 이루게 되자 1950년대 중반까지 견실하게 경제 성장을 한다. 중국 농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되자 열심히 일을 했고 식량 생산은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후에 대약진운동의 결과 농업집단화가 되자 대기근이 일어나지만 1950년대 중반 중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은 한국보다 높았다.

이런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자신감이 생겼는지 갑자기 마오쩌둥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며 "백가쟁명 백화제방"이라는 구호를 외친다. "모든 정파의 의견이 개진되도록 하라!" 지식인들을 만나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세요"라고 말해서 이 시기에 공산당과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한 시위대는 "마오쩌둥 물러나라! 장제스가 더 좋다!"라고 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비판의 홍수가 계속되었는데 몇 달 후 마오쩌둥은 갑자기 "현재 우파반동세력이 국가를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선언하며 비판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선다. 이때문에 수십 만 명의 "우파"가 체포되고 일부는 처형되기까지 했다. 이를 반우파운동이라고 한다.

마오쩌둥이 언론의 자유를 허용했다가 갑자기 이렇게 방침을 바꾼 것에 대해 여러 설이 존재한다. 어떤 설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정말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려고 했는데 내외적 환경이 너무 극단으로 흐르자 이에 놀라서 탄압책을 폈다고 한다. 이 설은 아래 설명할 "마오의 사생활"을 쓴 주치의 리즈수이의 견해다. 책 내용을 보면 리즈수이가 굳이 마오에게 우호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이 설은 설득력이 있다. 당시 중국 국내에서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왔으며 헝가리에서는 반공봉기가 일어난 데다가 흐루쇼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시작해서 전반적으로 위기감이 증폭되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어떤 연구자는 마오쩌둥이 일부러 반대파를 지하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벌였다고 하기도 한다. 마오 자신도 "독사를 굴에서 나오게 하려면 미끼를 던져야 한다"는 말을 한 것은 이런 설을 뒷받침했다. 마치 조조업군으로 옮겨가면서 허창의 반대파에게 일부러 헛점을 보여 반란을 일으키게 한 후 근처에 주둔하던 하후돈으로 하여금 진압하게 하여 반란파 뿐만 아니라 잠재적 동조자까지 싸그리 처단한 것과 비슷하다. 마오는 자치통감을 수십 번 완독할 정도로 이런 고사를 잘 알고 있었고 그에 따라 실행한 것인 것이다. 이는 후에 문화대혁명에서 다시 나타난다.

2.7. 중소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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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스탈린의 생일파티에 참가한 사진.스탈린 바로 옆에 선 것에서 보이듯 공산진영의 2인자 노릇을 했다.

1950년대 초반까지 소련은 전세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이념의 조국"이라고 불렸다. 중국 공산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계속 받으며 활동했다. 그러나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마오쩌둥을 "무식한 농부"라고 무시했으며 마오쩌둥의 혁명이론을 "마가린 사회주의"라고 디스했다.

마오쩌둥은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천하를 장악한 후 1949년 말에 장기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 방문의 목적은 소련에 대해 여러 원조를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소련으로부터 수억 달러(현재 시세로는 수십 억 달러)의 차관을 끌어내고 소련에 다수의 중국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때만 해도 마오쩌둥은 소련과 스탈린에 불만은 있을지언정 디스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소련이 미국과 직접 맞붙어봐야 손해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중국의 참전을 종용했고 이는 중국 참전의 한 이유가 된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북한 정권이 망하면 그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망치한이라고 했다.

정작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겨 크게 환영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동유럽의 잔챙이 국가에 비해 대국이었던 중국과 틀어지면 소련도 난처했으므로 어느 정도 원조를 해주는 척은 했다. 당시 스탈린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교황이나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소련의 국력은 세계 2위였기(독소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종전 3년 만에 회복했다.) 때문에 어쨌든 중국인들은 소련을 자신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 여겼다.

그러나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루쇼프가 1955년부터 서방과 평화공존을 외치며 스탈린을 디스하기 시작하자 중국 지도부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마오쩌둥은 "평화공존"이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소련의 방침은 "수정주의"라고 비난했다. 마오쩌둥과 흐루쇼프는 공개적으로 "저 새끼 트로츠키파다"며 욕을 할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중국과의 여러 기술 거래에서 중국을 사회주의 우방이라기보다는 철저히 털어먹을 대상으로 여겼고 소련이 자신들에게 판 여러 무기들이 다른 나라에 파는 국제 시세보다 훨씬 비싼 것을 알자 중국 지도부는 소련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사상면에서도 스탈린은 인간의 의지보다도 기술과 생산력을 중시했는데 이는 의지나 정신을 중시한 마오쩌둥 사상과는 모순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글에는 오직 기술만 있고 인간은 없다"고 비판했다.

이때문에 195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은 소련을 추종하던 그 전의 방침에서 180도 돌려 스스로 공산주의의 종주국을 자처하게 된다. 소련은 1960년 중국과 맺은 모든 기술 이전협정을 취소하고 기술고문단을 철수시켰으며, 중국과는 관계가 더욱 악화된다. 또한 동유럽 각국은 소련의 위성국이었으므로 마찬가지로 이들과 중국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중국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인해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도 당시에는 나빴으므로 1960년대 중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고작 비슷하게 고립된 알바니아가 중국의 유일한 맹방이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어 중소간의 관계가 악화됨을 감지한 미국은 중국에 접근했고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게 된다. 이것이 유명한 핑퐁외교다.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은 중국을 방문하여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저우언라이와 회담하고 미중간의 상호교류 확대와 평화 관계를 도모하는 상하이 커뮤니케를 발표했다. 당시 상하이 커뮤니케는 한국에도 큰 충격을 주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대미불신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주었다.

2.8. 대약진 운동

(이렇게 대약진 운동이 망하게 내버려둔다면) 농촌으로 달려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전복할 것이다. 해방군 여러분이 나를 따르지 않으면 나는 홍군을 찾아가 또 다른 해방군을 조직할 것다. 그러나 해방군이 나를 따를 것이라 생각한다.
- 마오쩌둥, 1959년 루산회의에 앞서 있었던 연설에서

마오의 본격적인 실정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사후인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다.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마오쩌둥은 영웅의 풍모가 있었는데, 이후부터는 정말로 폭군이 되어버린다.흑화 타락

소련과 점점 사이가 악화되자, 마오는 중국의 전략적 위치에 불안감을 느낀다. 남으로는 미국 세력에 봉쇄되어 있고 북으로는 소련까지 적으로 두게 되자, 마오쩌둥은 어떻게든 중국을 스스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나온 구호가 '자력갱생'.

마오쩌둥은 중국은 기술은 적고 인력은 많으므로 노동력을 모두 이용하여 기술을 상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대규모 제철소를 건설할 만한 기술이나 자본이 없으니, 각 마당마다 재래식 고로를 설치해 수로 질을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공업화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사회주의 지상락원을 건설하기 위해 대약진 운동의 기치하에 농촌을 집단 농장 단위인 공사로 재편성하고 아무런 기술적ㆍ경제적 기반도 없이 영국보다 더 많은 철강생산을 위해 온 인민을 제철사업에 총동원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 사업은 인력 낭비와 환경파괴, 그리고 재래식 제철법으로 생산한 탓에 현대 공업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똥철이 남조되었을 뿐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이렇게 만든 철 중 약 10%만이 다른 고철 또는 철광석과 함께 재활용이 가능하였고 나머지 90%는 이용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많은 공산권 국가들이 국가 막장 테크로 가는 힘찬 첫 걸음을 내딛을 때의 징조는 보통 '산업에서 미국 따라잡기'와 '엉터리 통계'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음은 이미 세계 최고 생산량의 공업국인데 현실은 시궁창이라, 윗놈들은 아랫놈들을 닦달하고 밑에서는 눈치 때문에 숫자를 속여서 올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관료주의에 물들어 현장으로 나가보지도 않고 보고서의 숫자들만 믿고 있다간 그야말로 막장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이 테크를 그대로 밟았다.

마오가 정권을 잡은 초기에 공산당의 목표는 곡물 생산량을 크게 향상시키는 것과 철강 생산량을 영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밑에서 올라오는 수치들은 정말로 "우리 이러다 10년 안에 미국 따라잡는 거 아닐까?"라고 착각할 수준이었다. 후에 현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마오는 한참 동안이나 실을 부정했다.

이러한 수치 날조는 지방의 관리들이 실적을 보고하기 위해 사실을 허위날조하면서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다. 한 지방에서는 논농사에서 200배의 수확을 올렸다고 해서 덩샤오핑이 직접 확인하러 가 보니 다른 논에서 뽑아다 옮겨 심은 것이었다. 게다가 철강 생산량을 올리려고 농기구의 철을 용광로에 집어넣어 철강으로 만드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렇게 인력이 빠지고 농사에 필요한 도구까지 없애버린 것만으로도 벌써 농업생산량은 상당히 저조해졌는데 생태계에 대한 이해는 눈곱만큼도 없는 상태에서 마오쩌둥이 "저 새는 해로운 새다"란 교시를 내려서 단 1~2년 만에 전국에서 참새의 씨를 말려버리고 만다. 참새의 씨가 마르자 병해충이 폭증하였고 이는 앞에 언급된 실정과 이후 발생한 자연재해 등의 수해로 인해 1957~1960년 사이에 1,000만 명(공식발표)~2,000만 명(평균), 또는 4,000만 명, 많게 잡아선 7,000만 명이라는 인류 역사상 무참한 아사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결국 공산당 정부의 관리들이 소련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싹싹 빌어 연해주의 참새 20만 마리를 공수해오고 미국에서도 곡물을 긴급히 수입해서 한숨 돌렸다는 후문이 있다.

이 사례의 최대 문제점은 중국의 최대 자원인 인력을 활용하자는 발상은 좋았지만 정작 그걸 어떻게 해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는 데 있다. 여기에 사람들이 대약진 운동으로 지나친 광신의 상태로 빠져버렸고 마오는 자연과학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마오 본인이 인정했다. 사실 대약진운동에는 마오쩌둥이 무식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전직 MIT 교수였던 첸쉐썬 박사의 권유가 큰 역할을 했다. 마오쩌둥이 아마 과학에 대한 지식이 좀 있었어도 아마 대과학자였던 첸박사가 그렇다고 하는데 믿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오쩌둥도 이런 첸쉐썬의 가설을 성급하게 실험 없이 실시한 잘못은 피해나갈 수 없다.

물론 경제도 파탄이 났다. 이 때문에 마오는 일시적으로 실각하고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의 실용주의 성향의 인물이 등장하여 경제를 수습한다.

다만 여기서 커다란 기아가 생긴 것은 공산당 집권후 10년간 기아를 없어서 인구가 폭증했다가 갑자기 거대한 기아가 온 탓도 있다. 10년간 중국의 인구 증가는 1950년 5억 4,000만에서 1959년 6억 6,000만으로 10년간 거의 1억 2,000만이 늘어났는데, 국민당 집권 시기에는 기아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인구가 잘 늘지 않았지만, 공산당이 집권한 이후 여러 정책의 효과로 인구가 매년 천만 이상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인구증가에 기근이 겹치니 결국 이런 문제를 만들게 되었다. 일부 논자들이 1959년의 대기아를 들어 장제스를 옹호하는데, 장제스시절에는 아예 기아가 일반적이어서 인구증가가 억제되어 기아가 돋보이지 않았을 뿐, 장제스 정권이 공산당보다 나아서 희생자가 적었던 것은 아니다.

2.9. 문화대혁명



대약진운동 실패로 마오쩌둥은 공산당 내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국가주석직을 사임했다. 그럼에도 워낙 상징적인 인물이라서 실권은 내주었지만 공산당의 지도적인 위치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상징적인 당주석직만 유지하게 되었다. 마오가 실권에서 밀려난 동안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당총서기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정책을 모조리 뒤집으며 실권을 장악해갔고 마오쩌둥은 점점 상징적 위치로 밀려나 사망할 때까지 중국공산당중앙군사위원회주석직을 유임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이를 뒤집기 위한 계책을 사용한다. 이것도 중국 고사에 자주 나오는 "차도살인(칼을 빌려 사람을 죽임)"의 방법이었다. 자신이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자신과 무관한 듯한 사람들을 동원하여 적을 타도하고 자신에게 이용된 사람들마저 버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마오쩌둥은 문예비평에서 비롯된 한 사건을 두고 언플를 실시한다.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이 자들은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주자파이다. 사회주의를 지키기 위해 젊은이들이 나서자!"고 외쳤고 이에 선동된 젊은이들은 홍위병이 되어 기존 질서를 완전히 뒤집는다. 이 혼란 속에서 마오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다시 정권과 당권을 장악했고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은 쫓겨났다.


마오쩌둥(왼편)과 류사오치

류사오치는 카이펑으로 귀양을 갔다가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원래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으나 홍위병의 위협을 받은 의사가 치료를 거부해서 죽었다고 한다. 덩샤오핑은 엔진공장으로 쫓겨났다.

이것이 바로 중국 현대사 최대의 병크문화대혁명. 기존의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분위기 속에서 멀쩡한 학자들과 문인들이 죽어나가거나 끌려가서 강제 노동을 하고 각종 서적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되었으며 학교 수업은 사실상 정지 상태에 이르렀고 정신병자가 늘어나는 등 사회 전반이 개판이 되었다. 더욱 자세한 설명은 문화대혁명, 홍위병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3년여에 걸친 문화대혁명 동안 저우언라이를 제외하면 중공정권을 성립시키는데 공을 세웠던 공신들은 대부분 귀양가거나 숙청당하고 마오쩌둥은 정부와 당을 모조리 장악하여 신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자 홍위병의 활약으로 정권을 잡은 마오쩌둥은 이제는 홍위병이 잘못된 노선을 걸었다며 그동안 홍위병을 부추키던 것을 그만두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이들을 진압하는가 하면 농민에게 배우라면서 홍위병들을 농촌으로 내려보냈다. 결국 자신에게 이용된 자들도 헌신짝처럼 버려버렸다. 이렇게 마오쩌둥은 정권을 되찾긴 했으나 3년간의 혼란은 너무나 극심해서 중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이 시기에 중국은 10~20년 퇴보했고 많은 전통 문화들도 단절되거나 없어져버렸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선 아직도 이러한 마오의 잘못에 대해 거론하기 꺼려하며 건국의 공만은 인정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비판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은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금기시된다. 워낙 엄청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다들 잊고 싶어하는 듯하다.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공칠과삼(功七過三), 즉 7할은 공이 있고 3할은 잘못했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문화대혁명에 관한 대부분의 정부문서는 비밀로 분류되어 공개하지 않고 있다.

2.10. 사망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의 선동에 적극 가담한 린뱌오가 마오쩌둥의 후계자가 되는 듯 했다. 린뱌오는 이를 위해 마오쩌둥을 상징적 지위로 보내고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으나 마오쩌둥은 전혀 린뱌오와 권력을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린뱌오 자신도 항일전쟁시 뇌를 부상당해 건강도 좋지가 않았기 때문에 성급해졌고 결국 두 사람은 국내 정치 권력 문제로 대립하게 되었다. 1971년 린뱌오 또는 린뱌오의 부하들은 마오쩌둥을 암살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사전에 감지되어 실패하고 린뱌오는 소련으로 도망가다가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마오쩌둥은 수족 같았던 자기의 부하가 자기를 죽이려 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문에 군부에서 린뱌오 세력의 숙청이 벌어졌으나 마오쩌둥은 충격 때문인지 피를 보지 말라고 지시하여 대부분의 린뱌오 부하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헬기로 몽골로 탈출하려던 린뱌오의 부관도 연료가 떨어져서 불시착해서 체포되었으나 피를 보지 말라는 마오의 지시 덕에 처형되지 않고 감옥살이로 끝났다고 한다.

다만 이런 정신적 충격 때문에 마오쩌둥은 권력에 달관한 듯 했고 이렇게 되자 마오쩌둥의 부인인 장칭이 이끈 사인방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마오쩌둥은 1970년대부터 파킨슨씨병 혹은 운동뉴런 장애로 보이는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1972년 중국의 닉슨이 방중했을 때 마오쩌둥은 공식 석상에 나와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저우언라이 총리가 모든 의전을 담당할 정도. 이를 기화로 부인 장칭을 비롯한 극좌파 사인방이 날뛰면서 국정을 농단했다.

이 당시 사실상 국정은 저우언라이가 맡아서 했으나 저우언라이도 곧 암이 발발하여 건강이 몹시 나빠졌다. 이를 기화로 정권을 노리고 있던 사인방은 마오의 후계자를 노렸다. 이를 우려하던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 때 실각하여 엔진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덩샤오핑을 불러들여 국정을 넘겨주기 시작했으나 사인방은 덩샤오핑을 잠재적 경쟁자로 생각했기 떄문에 (이건 사실 맞는 것이었다) 덩샤오핑을 실각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다만 마오쩌둥은 후계자 자리를 장칭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후배였던 화궈펑으로 지명했다. 마오쩌둥은 말년에 말도 제대로 못할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화궈펑이 병문안을 오자 "당신이 맡는다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메모를 건네 화궈펑에게 힘을 달아주었다. 저우언라이는 1976년 초에 사망했고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인파가 천안문광장에 모이자 사인방은 이를 군대를 동원 진압했다. 그리고는 이 혼란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고 마오의 이름으로 덩샤오핑을 다시 실각시켰다.

마오쩌둥은 1976년 9월 9일 사망했고 중국에서는 애도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자신이 죽은 뒤 화장해달라고 유언했지만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미라가 되어 천안문광장에 있는 모주석기념관에 안치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 6일, 후임주석 화궈펑은 국정을 농단하던 사인방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예전에는 이를 군부가 권유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는 화궈펑의 결단이었다고 한다. 사인방은 모두 감옥살이를 하다가 옥사하거나 출옥 후 사망했다.

2.11. 마오가 점지한 후계자들

마오가 처음 후계자로 점찍었던 것은 고향 후배 류사오치였다. 류사오치는 대장정 중의 쭌의회의에서 마오를 지지하여 마오가 당권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를 신임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류사오치는 점점 떠오르게 된다.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마오쩌둥은 이에 책임지고 사임하고 1959년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직에 오르자 류는 마오쩌둥의 정책을 뒤집기 시작한다. 이때 마오쩌둥은 한때 자신이 후계자로 내세웠던 류사오치가 자신의 실권을 배제하려 하자 배신감을 느끼고 그를 타도하려고 술책을 쓴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으로 류사오치는 실각하고 귀양 가서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다.

그 이후 떠오른 것은 린뱌오였다. 사실 린뱌오와 마오쩌둥은 그다지 연분이 깊지 않았다. 그럼에도 린뱌오가 펑더화이와 류사오치의 숙청을 도운 데다가 국방부장 재임시에 중인분쟁에서 인도군을 대파했기 때문에 린뱌오는 "마오주석의 친밀한 전우"로 떠올랐다. 하지만 린뱌오는 마오쩌둥 사후 권력 후계 문제를 놓고 마오쩌둥과 대립하였고 결국은 마오쩌둥을 암살하고 권력을 찬탈하려는 쿠데타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여 도망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그 다음에 떠오른 것이 사인방의 한 명이던 왕훙원이다. 초등 중퇴인 일자무식이었던 왕훙원은 문화대혁명 당시 상하이에서 조반운동을 하며 떠오르고 곧 문화대혁명의 중심인물이 된다. 그리하여 중앙정계로 발돋음했고 마오쩌둥은 그를 눈여겨보다가 후계자로 삼으려고 여러 책임을 맡겼으나 그릇이 아니었던 왕훙원은 마오의 기대를 저버리고 중앙정계에서 권력에 탐닉하고 여러 실무에서 무능을 보이는 등의 실책을 보이다가 눈 밖에 났다.

마지막으로 마오쩌둥이 선택한 사람은 후난성 고향 후배인 화궈펑이었다. 당시 후난성 당서기를 맡고 있었고 중앙정계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인물이었는데 마오쩌둥은 그가 문화대혁명을 계속하리라고 기대하고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마오 사후에 화궈펑은 사인방을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는 듯 했으나 결국 노회하고 당커리어가 훨씬 높았던 덩샤오핑에게는 역부족이어서 권력을 빼앗기고 만다. 결국 마오쩌둥이 점지한 후계자들은 하나같이 모두 실패한 셈.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청조 멸망 이래 혼란에 빠져 있던 중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중국 대륙을 제패했다는 평가가 중국인들 사이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실제로 중국에서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자이자 국부로 칭송받고 있다. 군벌이 할거하던 중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세웠고 장제스 치하에 비해서는 생활이 개선된 점이 높이 칭송되고 있다. 다만 마잉주 치하와 시진핑 치하에서 어느 쪽이 좀더 개선되었는지는 글쎄

대체로 (마오빠든지 마오까든지) 중국인들이 동의하는 마오의 업적은 세가지다.

  • 중국통일 - 장제스 치하에서 실질적으로 군벌에 의해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했다. 이것은 위에서 말했듯이 유방이나 주원장에 맞먹는 업적이다.
  • 여성해방 - 그의 치하에서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개선되었으며, 축첩제는 폐지되었고, 여성 인신매매도 금지되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여성의 사회진출면에서는 선진국에 그리 뒤지지 않는다.
  • 토지개혁 - 지주계급을 정리하여 현재 급격한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사실상 지주제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개방 후에도 중국개혁의 발전은 암담했다고 평가된다.

3.2. 부정적 평가

하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관념적인 목표를 내세워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을 진행시켜 중국의 국력을 약화시키기도 하였다. 마오쩌둥에 대한 존경이 대단한 중국인들 역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중국이 10년 퇴보하였고 그동안 서방 국가들이 10년 진보하여 중국의 발전이 도합 20년 가량 늦춰졌다고 평가한다고.

한때 서구권 진보 진영에서는 마오의 정책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지만 80년대 이후 죽의 장막이 열리면서 그의 정책이 벌여놓은 실정이 온 천하에 드러나 이런 평가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2014년 삼국지연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실린 책을 내놓은 위안텅페이(袁騰飛)라는 학자는 2010년에 "마오쩌둥 주석은 독재자다. 1949년 이후 그가 유일하게 잘한 일은 죽은 것"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기사 말미

한국 국민인 우리들의 입장에서 볼 때도 좋게 평가 할 수가 없는데, 바로 6.25전쟁의 중공군 개입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1950년 말 당시 국군UN군의 공격으로 북한은 북한 거의 전 지역을 잃고 중국에 임시정부를 세울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소련은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까 두려워 김일성의 원군 요청을 거부했으나 마오쩌둥은 '북한이 없으면 중국은 자유진영 세력(미국)과 직접적으로 국경이 맞닿게 된다.'고 생각하여 3개 군단이라는 대부대로 한반도를 침략한다. 우리 입장에선 조국통일이 눈앞에 있던 순간에 그야말로 폭풍찬물을 끼엊은 격.

3.3. 결론

요약하자면 공산주의 혁명가로는 최고의 인물 중 하나이고 정권을 획득하는 데는 천재였었다. 어떤 중국인은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직후 사망하였다면 오늘날에도 말 그대로 신성불가침적인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국가지도자로는 사상 최악의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공과로 따지면 자신이 존경했던 진시황과 비슷하다. 군벌과 열강에 의해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시키고, 강력한 행정력을 갖춘 정부를 건설한 것은 큰 공이지만, 집권후 그런 강력한 행정력을 이용해 과대망상적인 정책을 강행했다가 국가와 민생을 도탄에 빠드린 것은 큰 과오이다.

그러나 농촌 중심의 혁명전략을 세운 그의 사상은 아직도 많은 추종자를 이끌고 있다. 2012년 현재에도 마오주의자를 자처하는 게릴라가 남미와 같은 저개발국가에서 활약하고 있고 특히 네팔에서는 이들이 게릴라전을 벌여 결국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세우는 데 일조했으니. 참고로 중국에서는 이들의 적인 네팔의 왕정을 지원했기 때문에 이들을 마오주의자라고 보도하지 않고 '비적'이라고 보도했다는 웃지 못할 사례가 있다. '비적'은 국민당이 공산당을 부를 때 쓰던 말이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의 정책을 모조리 뒤집으면서도 공7, 과3'이라는 희대의 명언으로 마오쩌둥을 영웅의 위치에서 끌어내리지는 않았다.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격파하고 집권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마오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기 때문에 마오를 지운다는 것은 중국 공산당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인들도 마오가 중국을 통일한 것은 공으로 치지만 문화대혁명이나 대약진운동의 병크는 당연히 과로써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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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다른 건국 영웅들을 신으로 모시고 있는 중국의 한 사당. 왼쪽은 주더 원수, 오른쪽은 저우언라이 총리.

현대 중국인들의 마오쩌둥에 대한 존경심은 대단하다. 호남성에 위치한 마오쩌둥의 생가에는 중국인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으며 심지어는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그만큼 반감을 가진 중국인들 역시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경우냐 하면 중국 근대사를 배우는 도중 학교 커리큘럼상 마오쩌둥 생가를 방문해야 했을 당시 한 중국 출신 여학생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그 독재자의 집에 들여놓고 싶지도 않다고 말하며 강력히 반대했다고. 학교에서는 이걸 정당한 사유로 받아들여 그 학생은 결국 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근에 중국의 빈부격차가 늘어나자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긍정적 평가도 늘어나고 있다. 개방 후 중국의 경제 발전은 여러 모로 대단한 업적임에 틀림없지만, 그로 인해 한국을 능가하는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를 초래했기 때문에 2010년대 들어 차라리 문화대혁명 시절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신좌파(뉴레프트)가 중국에서 생겨난 것.

마오쩌둥의 여러 정책은 국가적 발전이라는 면에서는 해를 끼쳤다는 점에서 한국의 서브컬쳐에서는 "저 새는 해로운 새다"는 병크로 가득한 지도자로 희화화되고는 있다. 허나 그가 만든 정부와 당의 조직력과 행정체계, 그리고 조직이념 같은 것은 그대로 남아 개혁개방 후에 중국의 고속 성장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그의 업적을 모조리 부정할 수는 없다. 장제스가 20여년간 정권을 잡고도 발전을 담보하는 강력한 국가체계를 만드는 데 실패하고 대만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봐도. 하지만 마오가 욕을 먹을 수 밖에 없는건 실제로 오늘날 나치즘,주체사상 등을 까는 주장의 핵심과 비슷한데, 그 몰윤리성은 둘째치더라도 미래에는 다시는 나치즘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가 분명한 인물의 공만 강조되다보면 결국 과가 덮여지고 언젠간 비극적 역사가 반복되는 빌미를 줄 수 있기 때문.

대만에서는 통일파와 독립파를 막론하고긍정적인 평가가 나올 리 없다. 국민당을 위시한 통일파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대륙 본토를 점거한 역적 도당의 수괴이고 독립파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며 호시탐탐 노리는 적성 국가의 수괴이니 당연할 수밖에. 장개석 집권 시기에는 모비(毛), 모적(毛), 주모한간(漢奸)등 온갖 멸칭을 갖다붙였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대만인들도 이들이 역사적 위인이라는 것은 이제 인정하는 듯. 2014년, 대만의 한 웹사이트에서 "20세기 가장 위대한 중국인은 누구냐"라는 설문조사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이 1,2,3위를 하자 화급히 설문조사를 중지하기도 했다.

4. 마오쩌둥의 성격

4.1. 지도력


대부분의 독재자가 그렇지만 사람을 다루는데 능했고 지도력이 좋았다. 그리고 성격 자체는 매우 친화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의 지도력이나 인망이 이렇게 대단했기 때문에, 건국 후 아무리 잘못된 정책을 들고 나와도 부하들이 반대하지 못해 오히려 참극을 빚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관용을 베푸는 것을 "가족주의"라고 하면서 매우 깠다. 일단 그는 자신이 적으로 간주하면 그때는 인품이고 뭐고 없이 잔인하고 비정하게 숙청을 했다. 이런 성격적인 면이 후에 문화대혁명을 불러왔다고도 한다.

당내의 그의 전직 라이벌들(장궈타오, 왕밍 등)은 결국 모두 당이나 중국을 떠나 망명했고 그의 부하였으나 그에게 반대해 밉보였던 펑더화이나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은 모두 쫓겨났는데 펑이나 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4.2. 군대식 사고

전문적으로 군사교육을 받은 바 없지만 손자병법이나 클라우제비츠를 즐겨 읽던 밀덕후이자 성공적인 게릴라 지도자로서 사고가 군대식으로 굳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은 실전에서 총을 쏴본 적이 거의 없으며 게릴라 시절의 사진 중에서도 군복 차림은 많지만 총을 차고 있거나 들고 있는 사진은 거의 없다.

그래서 부하들이 자신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항상 정책이든 뭐든 간에 군대식으로 사고했으며 일단 적으로 간주되면 무조건 섬멸해야 직성이 풀렸다고 한다. 그것이 잘 나타난 일화가 "저 새는 해로운 새다". 마오의 사상에는 못지않은 "정신주의적" 일화가 많은데 마오주의가 뿌리는 정신주의에 맞닿아 있으므로 비슷한 병크가 나타났다. 대약진운동도 끝까지 "정책이 병크가 아니라 인민의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자신을 옹호했다고.

4.3. 전략적 허세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일화.

1957년 11월 볼셰비키 혁명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 왔을 때 흐루쇼프의 도취감은 최고조에 달해있었다. 최초의 ICBM스푸트니크 호가 막 발사되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이 새로운 크레믈린 지도자를 싫어했고 탈스탈린주의에 대해 반대했지만 이 감동적인 기술의 위업은 "객관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대의를 진전시켰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동풍이 이제 서풍을 압도하고 있다"는 선언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무한한 인력과 "제3세계" 에서 솟아나는 혁명적 조류와 합쳐질 때 소련 군사력의 이 새로운 조짐은 "사회주의의 힘이 제국주의의 힘을 압도할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우리는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며 모인 동지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회상한다.

"우리는 원자탄과 미사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재래전이든 핵전쟁이든, 어떠한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중국의 경우, 만일 제국주의자들이 우리에 대해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마 3억 명 이상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전쟁은 전쟁이다. 세월은 지나갈 것이고, 우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아기들을 낳으며 일할 것이다."

단, 이것은 좀 더 당시 사정을 감안해야 한다. 이 상황을 잘 모르면 뭔 대륙의 기상 내지 중2병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이 말은 전략적인 계산하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을 한 1950년대 후반은 중국은 핵무기가 없었지만 양대 핵강국인 미국과 소련 모두 적대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핵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함으로써 양 강대국이 유사시 중국에 핵공격을 하려 할 때 한 번쯤 재고하도록 허풍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저런 대외발언을 마오쩌둥의 성격이라고 곧이곧대로 생각하는 건 무리다.

마오가 저런 말을 하면서 핵무기가 쓸모없다고 주장했지만 뒤로는 핵개발을 시도했다는 것은 저 말이 전략적인 처지를 고려한 허세라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2차례의 대만 해협 위기와 소련의 중국 지원 중단 이후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개발을 시작한 지 2년만인 1964년에 핵실험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해에 사정거리 800km자리 둥팡로켓에 핵탄두를 장착하여 발사하는 핵실험을 실시했다(참고로 이렇게 직접 미사일에 달아 핵실험을 한 나라는 중국이 유일하다고 할 만큼 위험한 실험이었다.). 이런 허세나 비이성을 내세우는 전략을 미치광이 전략이라고 하며 국제정치학 용어로 자리잡을 만큼 유명한 전략이다.

그의 말을 듣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지도자였던 안토닌 노보트니(Antonín Novotný)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어했다.

"그래, 좋다. 당신네들은 3억이 죽어도 아기를 좀 더 낳으면 된다 치자. 우리는 1천 2백만 명밖에 없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모두 다 죽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사람들은 한 명도 남지 않을 것이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런 정서에 공감했고 마오쩌둥의 태도가 아주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다. 흐루쇼프가 나중에 말하길 "나는 그의 얼굴을 보아서는 그가 농담을 하는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었다."

Gaddis, John Lewis., We Now Know: Rethinking Cold War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박건영 역, 『새로 쓰는 냉전의 역사』, 서울: 사회평론, 2002, pp.419-420)

그리고 마오쩌둥은 또 이렇게 말했다.

미국의 원자탄이 아주 강력하여, 중국에 투하될 때 지구를 관통하는 구멍을 내거나 아니면 지구를 날려버릴지라도, '''이것은 태양계에는 중요한 사건이겠지만 우주 전체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 1955년 1월, 마오쩌둥 -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닉슨에선 닉슨과 만난 브레즈네프가 이 일화를 들먹이며 마오를 천하의 미친놈이라고 까댄다.

4.4. 대담함과 배포

역시 한 시대를 풍미해서 그런지 대인배적 일화도 좀 있다. 가령 공산당 내에서 가장 큰 경쟁자였던 정적인 장궈타오는 후에 전향하여 국민당으로 도주했고 중국이 공산화 된 후 홍콩으로 도주했지만 마오쩌둥은 본토에 남겨져서 사로잡힌 장궈타오의 가족들을 그냥 홍콩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게 아무렇지 않게 보이지만 사실은 마오와 장은 엄청난 악연이 있다. 장궈타오는 한때 마오쩌둥보다 세력이 큰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대장정시에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마오쩌둥을 체포해 처형하려고도 했다. 하지만 대장정시에 마오와는 다른 경로를 택했다가 휘하의 모든 부대를 잃고 빈털털이가 되어 허겁지겁 자신이 체포하려했던 마오쩌둥의 근거지로 피난 와서 경멸의 대상이 되다가 결국 배신해 국민당으로 전향한 것이다.

항일전쟁이 끝난 직후 미국측에서 중재하여 국민당과 공산당은 평화 협상을 가졌다. 장제스는 마오쩌둥을 충칭으로 초청했고 이는 적진 한가운데로 가는 매우 위험한 행위였다. "20세기판 홍문지회"라는 비유도 있을 정도. 대부분의 공산당원은 장제스의 음모가 있을 것이라며 말렸다. 실제로 장제스는 마오쩌둥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검토하기도 했으나 미국의 개입으로 실패하였다. 마오쩌둥은 유유히 충칭으로 와서 장제스와 회담한 후 옌안으로 돌아갔다. 이 행위는 중국인민들에게 마오쩌둥이 천하를 차지할 만한 배포가 있다는 증거로 비춰졌다(위의 사진).

5. 마오의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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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의 가족. 왼쪽이 막내딸 리나, 가운데 남자가 마오안잉, 그 옆이 며느리 류쓰치.

당시정치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골초였다. 엄청난 골초였지만 80살 넘어 장수한 것을 보면 대단한 셈.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첫 경험은 13살 때 같은 마을의 12살 소녀를 윤간했던 것. 그런데 공산당 지도부는 소녀가 마오쩌둥과 결혼했던 것이라는 개드립를 쳤다. 마오쩌둥은 후에 지도자가 된 후 소녀를 다시 불렀으나 너무나도 늙어버린 소녀의 모습에 깜짝 놀랐고 소녀에게 거금의 돈을 전해주게 된다.

상술한 아버지가 지정한 결혼에 반대하여 가출한 것을 제외하면 결혼은 총 세 번 했다. 첫번째 부인은 스승 양창제 교수의 딸인 양카이휘(양개혜)였다. 둘은 호남사범의 동급생이었고 아이는 세 명을 낳았다. 남편의 혁명운동 뒷바라지를 하다가 국민당군에 잡혔고 국민당은 전향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부, 총살당했다. 이 중 장남 마오안잉은 한국전쟁에서 전사하고 둘째 마오안칭은 2007년까지 살아남았다. 셋째 마오안룽은 양카이휘가 처형된 후 보살핌을 받지 못했는지 4살의 나이로 죽었다.

두번째 처 허쯔전(하자정)은 아직 첫번째 아내가 살아있던 때인 1928년 장시소비에트에서 결혼했다.하렘물 여성이지만 홍군의 명사수였다고 하며 장정도 같이 했다. 마오와의 사이에서 무려 6명을 낳았으나 너무 어렸던 네 명은 장정 중 인근 농가에 맡겼는데 세 명은 행방불명되었다. 이렇게 맡긴 한 명 중 리민이라는 자는 후에 천하를 통일한 아버지가 찾아내어 북경으로 데려왔다. 그러나 허쯔전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1937년 허쯔전은 모스크바로 갔고 이후 마오는 장칭과 결혼하기 위해 허쯔전과 이혼했다.

이후 심복이었던 캉성의 소개로 배우출신 이혼녀 장칭과 결혼했다. 여기에 대해서 말이 많고 허쯔전이 모스크바에 가있는 동안 바람피웠다는 것이 정설이다. 마오와 장칭은 1938년 결혼했고 둘은 딸 하나를 낳았다.

역대 중국 황제들처럼 마오쩌둥은 여자를 무척 밝혔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성인 여성이 아닌 10대의 소녀들을 좋아했다. 나이 든 여자들은 세상물정에 너무 밝은 데다 순진한 맛이 없다고 멀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일설에 의하면 조조처럼 유부녀를 좋아했다고 한다. 마지막 부인 장칭도 이혼녀 출신. 장칭은 이혼 후 마오의 심복이자 정보기관의 수장인 캉성의 정부였으나 장칭이 워낙 잠자리를 밝혀 체력이 감당이 안되자 캉성은 마오에게 바쳤다고 한다. 마오쩌둥은 특히 교육 수준이 낮은 순박한 시골 아낙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70대 늙으막에 현지지도 할 때 눈에 든 20대 초반의 유부녀가 있었는데 마오쩌둥은 이름을 물어본 후 수첩에 이름을 적으며 좋아했고 이를 본 심복 왕동싱이 그 유부녀 남편에게 이혼을 종용하고 마오에게 바쳤다고 한다. 그래서 그 유부녀 사이에 사생아 몇 명을 낳았다고.

리즈수이가 쓴 "마오의 사생활"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평생 자신의 성기를 씻은 적이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다. 마오쩌둥은 수영을 즐겨 했고 남방 순행할 때도 강에서 수영한 적이 있는데 수영한 후 몸을 씻지 않나? 그리고 중국인들의 비위생적인 관념을 개선하기 위해서 자신이 목욕하기 운동을 주창한 적도 있기 때문에 당연히 말이 안된다.

덧붙여 마오쩌둥은 성병의 일종인 트리코모나스를 앓고 있었다. 그래서 마오쩌둥과 관계를 맺은 여자들은 모두 그 병에 걸렸다. 그러나 마오의 여자들은 그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당시 중국에서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숭배되던 마오쩌둥과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가 무척이나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오히려 마오의 성병에 함께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일종의 훈장처럼 여겨졌다고 하니 안습.마오에게 여자를 조달해 소개시켜주는 채홍사 역할은 그의 심복인 예쯔롱과 왕둥싱이 맡았다. 하지만 마오의 방탕한 성생활에 그들도 가끔씩 "우리가 이런 더러운 짓만 해야 하나?"라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이 때문인지 왕둥싱은 마오 사후에 4인방을 실각시키는 데에 일조한다.

마오쩌둥의 주치의 리즈수이에 의하면 마오쩌둥은 죽는 순간까지 트리코모나스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러나 트리코모나스는 현재도 일반인 감염율이 15%에 이를 정도로 매우 흔한 병이고 남자한테는 거의 증상이 없고 여성한테도 25% 정도가 무증상이라는 점이다. 예전에는 무좀과 같은 하찮은 질환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성병관으로 판단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1970년대 이후로 파킨슨병 혹은 루게릭병에 시달리면서 더 이상 여성과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된다. 이에 비해서 저우언라이는 어렸을 때 첫사랑이었던 덩잉차오와 결혼해 한 명만 보고 살았으니 참으로 대조적인 부분. 문제는 이러한 마오쩌둥의 바람끼는 부인들을 굉장히 불행하게 만들었다 특히 장칭은 외도를 하는 남편을 보고 남 몰래 울거나 화를 내는 일이 매우 잦아졌으며 훗날 그녀가 문화대혁명에서 지독한 잔인성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참 특이하게도 몸을 잘 씻지 않았다. 몸을 샤워를 하거나 비누를 이용한 샤워를 잘 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하인들이 수건을 물에 적셔서 그의 몸을 닦아주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빨을 거의 딱지 않아서 말년에는 치아가 다 썩어서 성한 이가 없을 정도였다. 오지나 사막 같은 곳에서 살다보니 안 씻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듯 하다.

개인사에서 훌륭한 일화도 있는데 바로 위에서 나온 아들 마오안잉의 전사에 관한 일화이다. 마오안잉은 한국전쟁 당시 전쟁에 참전했는데 마오쩌둥은 어쨌든 아들이 참전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주석이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보낼 것인가".

마오안잉은 펑더화이를 보좌하면서 참모부에 근무했는데 미군기의 공습으로 전사했다. 전선 사령관인 펑더화이는 이 사실을 보고받고 마오쩌둥에게 전화를 걸어 전사 소식을 알린 뒤 시체를 후송하려 했으나 마오쩌둥은 다른 인민의 죽은 자식들을 후송해올 수 없는데 자기 자식만 후송할 수는 없다고 그 자리에 묘를 만들라고 했다. 마오쩌둥은 아들이 전사하자 며느리의 개가를 주선해주고 결혼식 때 거액의 축의금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6. 사상

6.1. 마오이즘

일명 마오쩌둥주의(모택동주의)라고 평가되는 마오쩌둥식 사회주의. 도시의 노동자들이 아닌 농민들을 혁명의 기반으로 파악한 마오쩌둥 특유의 사상이다. 일명 농민들의 맑시즘으로 불리는 사상으로 한때는 제3세계의 혁명가들에게 "빛나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현재는 사회주의 세력의 전반적인 퇴조 때문에 거의 듣보잡 신세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6.2. 사상적 뿌리

마오쩌둥사상은 스스로는 유물변증법을 토대로 했다고 하나 객관적인 현실보다는 주관적인 의지를 강조했기 때문에 사실 관념론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또한 마르크스주의보다는 중국의 전통 사상에 훨씬 더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중국 철학에서 대가들이 쏟아져나왔을 때 그 대가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되고 있다. 철학사적 면만 따져도 마오쩌둥은 주요인물에 들만한 인물이다.

또한 마오이즘은 아나키즘 사상가인 크로포트킨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애초부터 모택동이 공산당에 가담하기 전에 크게 영향받은 것도 아나키즘이었고, 그 당시만 해도 "나는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정도였다. 실제로 훗날 대약진운동 시대에 만든 민공사같은 제도는 아나코 콜렉티비즘(무정부 집산주의)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은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북한 스스로는 부정하지만 소위 인간 중심, 수령론 같은 것은 마오주의의 주장과 판박이다.

6.3. 혁명 이론

마오쩌둥의 사회주의는 소련식의 마르크스주의인 레닌주의(사실은 스탈린주의)와는 좀 다르다. 이는 당시 중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혁명 당시 러시아는 농업 국가이기는 했어도 도시에는 충분한 수의 노동 계급이 형성되어 있었고 정부기관이 도시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도시 노동자만 잘 조직해도 혁명을 이룰 수가 있었다. 그래서 레닌주의에서는 도시의 노동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다.

중국은 러시아보다도 훨씬 뒤쳐진 농업 국가였고 노동자와 도시화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적용해서 사회주의 혁명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실제로 1차 국공합작이 붕괴된 후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중국 공산당의 당권을 잡고 소련식의 전략을 차용했다가 모두 망하고 만다. 이렇게 되어 마오에게 자연스럽게 당권이 돌아왔다. 반면에 마오쩌둥은 소련의 혁명 이론 대신 중국 고유의 농민 반란의 역사에 주목하여 농민을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로 삼는 전략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마오쩌둥은 도시의 직접 봉기 대신에 농촌에서 세력을 넓혀서 도시를 포위하는 전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전략은 전근대적 사회에 매우 효과적이었고 한동안 여러 제3세계의 혁명가들이 차용하여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마오쩌둥은 이런 마르크스-레닌-스탈린주의에 입각한 교조주의를 "(비료로 쓸 수 있는) 똥보다도 못하다"고 경멸했다. 이런 점 때문에 마오쩌둥은 서구의 사상을 도입한 인물이 아니라 장각이나 이자성처럼 중국의 전통역사 맥락에 있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이 중국의 전통을 모조리 박살내려고 했던 것을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렇게 마오쩌둥의 이론은 소련식의 사회주의와는 영 별개의 것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국공내전의 말기까지도 신뢰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제스에게 엄청난 원조를 해주기도 했다. 소련측은 마오쩌둥을 "마가린(짜가) 사회주의자"로 공공연히 무시했는데 결국 이것은 후에 중소분쟁과 중국-소련 국경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6.4. 군사 이론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은 중국의 고대 병법과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결합한 독특한 것이었다. 클라우제비츠는 "중심의 유린"을 중시했지만 마오쩌둥은 일단 자신의 역량이 뒤쳐질 때는 중심보다는 주변부를 장악하면서 중심을 포위하여 고립시킨후 적의 역량이 감소하고 자신의 역량이 우월해졌을 때 적의 중심을 쳐야 한다는 이론이다. 이때문에 마오쩌둥은 전술 레벨에서든지 전략 레벨에서든지 자신의 역량이 뒤쳐질 때는 적의 주력과 대결하는 것은 피했고 결정적 순간에 압도적인 병력을 집중시켜 적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마오의 군사이론은 혁명이론과 불가분의 관계인데 마오는 게릴라와 농민의 관계를 수어지교라고 했다. 즉 게릴라는 농민의 지지가 필수적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마오의 군대는 삼대기율 팔항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군율이나 군기가 엄정했고 당시 떼강도나 다름 없었던 군벌군이나 국민당군과는 달리 농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서 농민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그래서 기계화보다는 보병의 과감한 기동력과 수적 우위를 중시했고 무기의 성능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민중의 각성을 더욱 강조했다. 소련이나 미국과 같은 침략자가 중국에 쳐들어오면 중일전쟁처럼 대규모의 게릴라전을 펼쳐 적을 "인민의 바다"에 빠뜨려 수장시킨다는 것. 이것을 "인민전쟁"이라고 한다. 이는 항일 게릴라전에서 효과적인 전술로 검증되었다. 일본군은 거점 점령에 집착하는 편이었는데 팔로군은 거점과 거점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두들기고 도망가는 전술로 일본군의 물자와 사기를 소모시켰고 인민들 속으로 쏙 숨어버림으로서 일본군이 찾을 엄두도 못 내게 만들어버린 것.

이런 전술은 1930년대 이전의 아무것도 건설되지 않았던 중국에는 합당한 것이었지만 건국 후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있던 때에 건설된 것을 모두 포기하고 인민전쟁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희생이 크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하여 전문적으로 군사교육을 받았고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을 지휘하여 미국의 힘을 겪어본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이런 마오쩌둥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1950년대 말 펑더화이는 이제 "우리도 미국이나 소련처럼 프로페셔널한 장교단이 지휘하고 첨단무기로 무장한 인민해방군을 건설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마오쩌둥의 군사이론과는 모순되는 것이었고 결국 이것은 펑더화이 실각의 한 이유가 된다. 마치 1930년대 소련에서 당료들과 투하쳅스키의 충돌이 그의 숙청으로 이어진 것과 비슷하다.

어쨌든 마오의 군사이론은 정치이론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유용하게 연구되는 분야이다. 이것은 경영전략에서도 꼭 한 번쯤은 이야기된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월마트애플이 바로 마오쩌둥 이론을 경영면에서 제대로 응용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6.5. 여담

인도에서도 마오쩌둥주의자들이 정부와 전투를 벌이고 있다. 워낙 지주세력의 힘이 세기 떄문에 마오주의자들의 선전히 잘 먹혀들혀가고 세력이 크다. 매번 경찰들이 마오주의자들과 교전하다 죽었단 뉴스가 왕왕 뜰 정도. 외국인 관광객들이 오지로 관광 갔다가 마오이스트들에게 피랍당한 적도 있다.

근데 목표를 이루려면 도시로 진입을 해서 선동을 하고 그네들이 말하는 소위 혁명을 일으켜야 되는데 도시에 진입할 능력도 역량도 없다. 거기다 그나마 같은 공산당이라고 어느 정도 감싸주던 인도 공산당과 기타 좌파 정당들도 마오주의자들이 사상이 다르다고 자기네들까지 팀킬해대니 원수지간으로 돌아서고 아예 정부랑 편 들고 같이 싸우고 있다. 마오쩌둥주의자들은 인도에서는 완전히 불온단체로 찍힌 상태다.

마오쩌둥 주의자들이 인도 오지 전역에 넓게 산개해서 게릴라전을 벌이는 형편이라 정부도 마오주의자들을 억제는 할 수 있지만 완전히 쓸어버리는 것은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마오이스트 입장에서 봐도 경찰도 버거운데(자존심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인도 정부는 경찰로 충분하다고 보고 군대를 안 보내고 있.다)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건 불가능하고 도시민들이 선동될 가능성은 없고 결국 오지에서 교전하거나 도시에서 테러를 저지르는 것밖에 없는데 그러다 민심은 점점 멀어지고 목표하는 건 이루지도 못하고 망했어요.

7. 어록

마오쩌둥은 시인과 문필가로 유명하다. 이 점에서 조조와 정말 비슷하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조조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치하에서 조조가 재평가되기도 했다. 전술했다시피 사서로 일한 적도 있고, 독서를 엄청나게 한 걸로도 유명하며 게릴라 시절에도 공작원이 외부에서 구해주는 신간을 가져다주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 관련 서적보다는 중국의 여러 고전 역사책을 탐독했으며,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과거의 예를 찾아 어떻게 할 것인지 연구했다고 한다. 다독(多讀)과 역사로부터 교훈을 배우는 것은 많은 성공한 지도자들의 공통적인 습관이기도 했고 마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마오식 사회주의는 원산지인 소련의 사회주의와 심각한 차이가 있었고 또 그랬기에 중국식 사회주의가 그럭저럭이라도 돌아갈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자치통감을 17차례나 보고 연구한 것은 유명한 일화. 문화대혁명에서 홍위병들은 과거의 것을 모두 파괴해야 한다고 했는데 정작 홍위병의 두목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은 옛날 역사책이나 제왕학 서적을 보고 어떻게 할 지 궁리하고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홍위병에게는 책을 너무 많이 보면 해롭다면서 자신은 책에 묻혀 지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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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사진을 바탕으로 만든 기록화. 그림에서도 보이지만 저렇게 서재의 책이나 그가 읽던 책들은 공산주의 관련 서적이 아니라 모두 왕조시대의 사서거나 혹은 그 사서를 읽기 위한 사전이었다. 말씀하신 대로 책을 많이 읽으면 역시 해롭네요

이렇듯 그는 강렬한 인상을 주는 문장을 만드는 데 매우 능했다. 번역된 문구로는 잘 알 수 없지만 원문을 보면 중국의 특유의 댓구를 잘 이용한 인상적인 문장이 많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모든 저항에는 이유가 있고 혁명에는 죄가 없다."(조반유리, 혁명무죄 / 造反有理,革命无罪)
"가장 높은 곳에 뜻을 두어라."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나날이 발전한다.(好好学习, 天天向上)
"전쟁은 전쟁을 통해서만 종식될 수 있다. 총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총을 드는 수밖에 없다
"남이 나를 범하지 않으면 나도 남을 범하지 않는다. 만약 남이 나를 범하면 나도 반드시 남을 범한다." (人不犯我,我不犯人;人若犯我,我必犯人)
"당대의 인물이 바로 역사의 주인이다." (数风流人物还看今朝)
"독서하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적용한다는 것 또한 배우는 것이며, 보다 중요한 배움이라 할 수 있다."
"말만 늘어놓지 말고, 실천가가 되어라."
"작은 불씨는 들판을 불사르고, 큰 불씨는 물에 기세를 그친다."
"스스로 노동하여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라." (自己动手丰衣足食)
"인민, 오직 인민만이 세계 역사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人民,只有人民才是推动历史发展的决定力量!)
"모든 반동파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 (一切反动派都是纸老虎!)
"이것은 단지 만리장성을 완주하는 첫 걸음일 뿐이다!" (这只是万里长城走完了第一步!)
"하늘은 곧 비가 오려 하고, 어머니는 시집을 가려고 한다. 그렇게 하게 해라!" (天要下雨, 娘要嫁人, 由它去吧!)
"결심을 했으면 희생을 두려워하지 마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이기는데 집중해라 (下定决心,不怕牺牲, 排除万难, 去争取胜利)
"나의 영예가 내 자손들에 의해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다리가 없고 배가 없으면 강을 건널 수 없다"
"배우고 또 배워 앞으로 나아가라."
"아무리 큰 우물이라도 하늘보다는 작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평등하지만, 사람마다 능력이나 인격의 우열이 있으니 자기보다 나은 자를 따라야 질서가 잡히는 것이다."
"인민을 위하여 일을 하라." (为人民服务)
"일이란 투쟁이다."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편다." (백화제방, 백가쟁명 / 百花齊放, 百家爭鳴)
"자기 만족은 학문의 적이다. 우리가 자기 만족을 면하기 전에는, 우리는 실제로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정녕 할 수 없는 일은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마라."
"정치가 유혈 없는 전쟁인 반면에 전쟁은 유혈 있는 정치이다.
"법칙의 성격을 띠고 있는 모든 군법과 군사 이론들은 전(前) 시대나 우리 자신의 시대에 산 사람들이 축적한 전쟁 체험의 총화이다. 우리는 피의 대가로 얻은 교훈을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그 교훈은 과거 여러 전쟁의 유산이다. 그것을 연구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중략) 우리는 그런 유산들을 우리 자신의 체험이라는 시험대에 올려놓아야 한다. 그래서 유용한 것은 소화시키고, 무용한 것은 버리며, 우리 자신의 고유한 체험은 덧붙여야 한다. 그 세 가지는 몹시 중요한데,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전쟁을 지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일은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살았을 때 비판받지 않은 자, 죽어서 비판받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진지함이다."
"실수와 좌절을 겪고 지혜를 얻는다."
"인간은 죽기 마련인데, 그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거나 깃털보다 가볍다." (人固有一死-惑重于泰山, 惑輕于鴻毛)
"빛나는 날로 나아가는 길은 굽이굽이 사연도 많다."
"힘든 일은 눈 앞에 놓인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이든 움켜쥐고 내 것으로 만들어라."
"분열하지 말고 단결하라."
"세상에는 이유 없는 사랑 없고, 이유 없는 미움 없다."
"아무리 많은 공을 세웠더라도 절대 교만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열정과 냉정, 긴장감과 원칙이다."
"사상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바뀌고 적응해야 한다."
"한 번 실수는 실수지만, 두 번 실수는 음모다."
"제대로 가려면 멀리 보라."
"한 번 더 생각하라. 고민하고 예측할수록 지혜가 나온다."
"혁명(革命)은 만찬(晩餐)도, 수필(隨筆)도, 그림도, 한 폭의 자수(刺繡)도 아니다. 그것은 조용히, 서서히, 조심스럽게 앞뒤를 가리며 점잖게 순순히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히틀러가 더 잔인하지 않았나? 사람을 더 많이 죽일수록 진정한 혁명가가 되어간다."
"행운에 기대고, 남의 도움으로 이기려는 마음을 버려라."
"저 새는 해로운 새다"
"먹을 것이 없으면 끼니를 줄이면 되잖나! 굶어죽는 건 옛날에도 있었던 일인데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보고까지 하나?"
"맹목적으로 소련을 따를 수는 없소. 방귀를 뀌면 냄새가 나는 법인데, 소련이 뀌는 방귀가 모두 향기롭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소?"
"동지들! 여러분은 각자 책임을 철저히 분석해야 할 것이오. 똥을 누고 싶다면 누시오! 방귀를 뀌고 싶다면 뀌시오! 그러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이오."
"먹은 다음에 똥을 눠야 한다는 것 때문에 먹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오!"
"문예는 국가에 봉사해야 하며, 문예는 중국 공산당이 지도하는 혁명의 대의에 입지해야 한다! 모든 예술과 표현은 낙관적이여야 하며 당에 대한 어떠한 비판/폭로/비난도 엄격히 금한다!"
"우리는 전쟁의 승자다. 승리했는데 뭐하러 무슨 보상금을 받냐?"
"책을 너무 많이 읽는것은 해롭다."
"부농들만 보아도,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를 알 수 있다."
"우리의 제도는, 노동자 계급을 지도자로, 노동동맹을 기초로한, 인민에 의한 민주독재이다."
"나의 생각으로는 (루쉰은) 감옥에 갇혀 글을 쓰고 있거나, 아니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아무 소리도 않고 가만히 있었을 것 같소."
"공산주의는 사랑이 아니다. 적을 부수는 망치다."
"모든 반동투쟁은 부당하고, 모든 혁명투쟁은 정당하다."

8. 한국에 알려진 마오쩌둥의 한국 관련 발언의 진상

일부 뉴라이트 쪽 블로거들은 마오쩌둥이 미국 기자이던 에드거 스노우에게 "일본이 억지로 빼앗아간 중국 땅인 한반도를 되찾아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왜곡해서 주장한다. 그러나 에드거 스노우의 책 <중국의 붉은 별>을 읽어봐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티베트에 대해서는 영유권을 주장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옛 식민지였던 조선에 대해서는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에드거 스노우 저, <중국의 붉은 별>, 두레, 1982년.) 즉 한반도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이야기이며, 이는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다. 또 마오쩌둥은 '연합정부'의 외교관계에 대해 쓸 때 "우리는 한국 독립에 관한 카이로 회담의 결정이 올바른 것이었다고 인정한다." (모택동 저 장차근 역, <모택동 사상과 중국혁명>, 평민사, 2008년.)라고 언급하였다. 책만 찾아봐도 바로 나오는 뻔한 이런 엉터리 같은 주장이 자꾸 웹을 돌아다닌다.

또 이들은 1961년 전당대회에서 마오쩌둥이 "부탄, 한국, 베트남, 대만를 비롯한 중국의 빼앗긴 땅들을 되찾아야 하는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에 중국에서 '한국' 이라는 말은 쓰지도 않았으며 마오쩌둥이 그 발언을 했다는 당시에는 흐루쇼프의 소련과 마오쩌둥의 중국이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에 관한 경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과 가까운 북한과 베트남과 마찰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우방을 더 늘려도 시원찮을 판에 우방에게 허튼 소리를 해서 좋은 기회를 날려버릴 리가 없지 않겠는가? 결정적으로 1961년에는 중국 공산당 전당대회가 열린 적이 없다. 제8차 대회가 1956년, 다음 제9차 대회가 1968년 열렸다. 영문 위키피디아.

9. 관련 서적

워낙 다면적인 인물이기에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어느 한쪽만을 다룬 서적들이 많다. 그래서 한쪽만 보면 레전드 또는 천하의 개쌍놈이 된다. 개인적 성향이나 사생활을 다룬 책들은 대체로 야사(野史)그 야사말고적인 책들이 많으며 검증도 어렵고 저자의 신뢰도도 그다지 높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인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이 가치를 두지 않는 책들이다. 문제는 이런 책들이 대중의 호기심에 잘 영합하기 때문에 이런 책들이 정말 정설인 양 알려질 때가 많다. 그래서 비판적인 읽기와 균형 잡힌 독서가 중요하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야사적인 책들에서 인간적인 마오의 모습을 보려면 24년 동안 마오의 주치의를 하다가 미국으로 망명한 리즈수이가 펴낸 <마오쩌둥의 사생활>이라는 책이 있다. 다만 이 책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으며 다른 마오의 주치의(주치의가 여러 명이었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들어 이 책의 오류를 지적하는 책을 홍콩에서 펴내기도 했다.

다른 야사적인 책으로는 마오쩌둥을 거짓말장이이자 마약왕, 그리고 무자비한 악당으로 묘사한 <마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다. 이 책의 저자 장융은 문화대혁명 직후 영국으로 간 망명객으로서 마오에 대한 논조는 매우 비판적이다. 읽다보면 개인적 증오심이 묻어날 정도다. 스스로도 마오쩌둥을 괴물(monster)로 묘사하려 했다고 한다. 원판으로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오늘날 많은 중국인들이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항일 전쟁의 주역은 공산당이 아닌 국민당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마오가 1941년 무렵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농민들을 상대로 아편을 팔아 막대한 수익을 챙겼고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는 병크티베트 침공, 심복이었던 린뱌오의 아들이 그를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몽골로 달아나다가 비행기 사고로 죽는 내용까지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대중역사서로는 서구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학계에서는 매우 비판적으로 본다. 특히 사료의 검증 없이 결론을 내고 끼워맞추기 식으로 선택된 사료만을 제시한 것은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민당측이나 중소결렬 후에 중국과 적대관계가 된 소련의 프로파간다를 사료검증으로 받아들여 쓴 부분이 상당수다. 게다가 일부 부분에 있어서는 심각한 오류도 있으니 상당히 가려 봐야 한다. 이를테면 김일성이 죽은 건 한국전쟁이 남침인 서류가 공개되자 놀라서 죽었다거나 하는 것. 즉 이 책에는 마오를 증오하는 저자의 정치적 입장에서 왜곡한 내용이 상당히 많다는 이야기.

개인적 일면을 다룬 책은 마오쩌둥의 아들이 쓴 <나의 아버지 마오쩌둥>이라는 책이 있다.

객관적 시각으로 이 사람을 볼 수 있는 책은 로마인 이야기의 번역자 김석희가 번역한 앤 포크너의 <마오쩌둥>이 있다. 그리고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펴내고 한국에서 번역된 <마오쩌둥: 중국의 혁명을 이끈 반항아>라는 책과 로스테릴의 <마오쩌둥>이 있다. 셋 다 서양 주류학계가 보는 객관적인 마오관을 다루고 있다.


20세기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인 모주석어록. 총 2억부가 인쇄되었다고 하지만 5억부까지 늘어나기도 한다. 현재도 중국의 헌책방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다(최근에 인쇄된 중영 대역본도 존재한다.). 일설에 의하면 마오쩌둥이 만약에 이책의 인세를 챙겼다면 수백억대의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마오쩌둥 어록 항목 참조.

한국인이 펴낸 책으로는 2012년 11월에 나온 "중국지" 상하권이 있다. 이 책은 진보언론인 미디어 오늘에서 원로 언론인인 현이섭씨가 연재했던 글인데 삼국지연의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독자들이 읽기 편하게 실제 역사를 각색한 것이다. 마오의 모습은 상권에서는 영웅적인 불굴의 혁명가로 나오지만 하권에서는 무지막지한 폭군의 모습으로 나온다.

정말 정말로 원전에 도달하고 싶은 사람은 홍위병의 필수요소였고 문화대혁명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던 모주석어록(일명 모택동어록, 영어로는 Little red book)을 읽어보는것도 괜찮다. 모택동이 스스로 한 이야기들을 쭉 적어놓은 책. 물론 한국에서 구하기는 힘들다. 과거에는 이런 걸 읽었다간 코렁탕을 취식하게 되었고 게다가 민주화 된 이후에 정식 출간이 된 적이 없을 뿐더러 마오이즘 관련 서적이 출판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을 때는 이미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이 개방되고 동유럽이 무너지던 시대여서 마오이즘 자체가 이미 한물 간 사상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연구 차원에서 도서관이나 여타 정식 경로를 통해서 모주석어록을 읽어보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이 아니므로 괜찮다.

모주석어록을 거론하는 이유는 마오쩌둥의 모순론이 국내에 출판되어있긴 한데 생각보다 내용이 길고 어렵기 때문. 괜히 홍위병들이 모주석어록을 하나씩 소지하고 다니면서 읽은 게 아니다. 일반 대중들이 다가가기 쉽게 잠언 형식으로 쉽게 써있기 때문. 다만 조선족 자치주에서 돌아다니던 번역본이 있다고 한다. 북경에는 민족출판사라는 북경 유일의 소수민족 관련 책을 출간하는 전국 규모의 출판사가 있다. 아마도 이것은 이 민족출판사에서 1966년에 발간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연변지역 헌책방에서는 간간히 구입할수있는 듯.

10.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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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위원이 된 선통제와 찍은 사진.

  • 복거일대체역사소설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제1차 국공내전 중이던 1935년에 옌안에서 벌인 전투에서 저우언라이, 주더와 함께 국민당군에게 끔살당했다.대신에 겨우 살아남은 류샤오치가 1956년에 국민당을 박살내고 중국 대륙 북부에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는 데 성공했다.

  • 해리 터틀도브의 <월드 워> 연작에서는 1942년에 지구에 날아온 파충류 외계인 집단과 영웅적인 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나온다. 이 투쟁은 60년대까지 계속돼서 결국 중국에서 외계인을 몰아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서는 퍼즐을 풀면 이 양반이 암살단의 일원 내지는 협력자였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고 하여 논란이 되었는데 실은 그 내용은 기사단이 어쌔신의 심볼을 마오의 얼굴로 합성한 것으로 브라더후드의 각본가가 성당기사단원이라고 인증시켜줬다.

  •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50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임에도 그의 저서는 성경의 판매 추정량과 맞먹는다. 최소 판매 추정량만 따지면 그의 저서들은 총 14억 5000만 부수, 성경은 25억 부수다.

  • 그는 양치질 대신 중국 의 한 종류인 고차(苦茶)라는 것을 수시로 마셨으며 양치질 대용으로 고차를 입에 머금고 가글하는 걸로 대신했다고 한다. 이것이 장기간에 걸치다 보니 치아의 색이 초록빛을 띈 채 변색되고 구강 상태가 염려됐지만 검진 결과 놀랍게도 치아 상태가 충치 하나 없이 매우 건강하고 양호했다고 한다.

  • 중국인들이 도박마작을 금하려 했지만 마오쩌둥 본인은 마작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다면서 포기했다. 비슷한 일화로 싱가포르의 총리였던 리콴유도 다른 건 다 금지해도 마작만큼은 어쩔 수 없더라고 GG 친 것도 있다.

  • 미니어처 게임 DUST에서는 스탈린과 대동단결하여 중소 연방을 만든다. 더욱이 그의 이름을 따서 마오쩌둥 대공전차를 만드는데 85mm 4연장 대공포로 무장하고 있다.

  • KOEI노부나가의 야망 무장풍운록 오프닝을 패러디한 '마오쩌둥의 야망'도 있다.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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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삼국지에 나오는 형주의 장사군에 포함된 지역이다. 곧 한현, 황충, 위연과 동향인
  • [2] 베이징대학 총장을 역임한 컬럼비아대 철학박사이며 유명한 교육철학자 듀이의 제자이다. 중국 철학계의 아버지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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