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마이클 조던

last modified: 2015-04-11 00:47:28 by Contributors

[1]

1985년 NBA 올해의 신인상
랄프 샘슨 마이클 조던 패트릭 유잉
1988년 NBA 정규시즌 MVP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1991년 ~ 1992년 NBA 정규시즌 MVP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1996년 NBA 정규시즌 MVP
데이비드 로빈슨 마이클 조던 칼 말론
1998년 NBA 정규시즌 MVP
칼 말론 마이클 조던 칼 말론
통산 5회 NBA 정규시즌 MVP 수상.
1991년 ~ 1993년 NBA 파이널 MVP
아이재아 토마스 마이클 조던 하킴 올라주원
1996년 ~ 1998년 NBA 파이널 MVP
하킴 올라주원 마이클 조던 팀 던컨
통산 6회 파이널 MVP 수상.
1987년 ~ 1993년 NBA 올해의 득점왕
도미니크 윌킨스 마이클 조던 데이비드 로빈슨
1996년 ~ 1998년 NBA 올해의 득점왕
샤킬 오닐 마이클 조던 앨런 아이버슨
통산 10회 득점왕 수상, 역대 득점왕 횟수 1위
(1987년~1993년 7년 연속 득점왕, 1996년~1998년 3년 연속 득점왕 기록.[2])
1988년 NBA 올해의 수비수상
마이클 쿠퍼 마이클 조던 마크 이튼
1988년 NBA 올해의 스틸왕
앨빈 로버트슨 마이클 조던 존 스탁턴
1990년 NBA 올해의 스틸왕
존 스탁턴 마이클 조던 앨빈 로버트슨
1993년 NBA 올해의 스틸왕
존 스탁턴 마이클 조던 네이트 맥밀런
통산 3회 NBA 올해의 스틸왕 수상.
1988년 NBA 올스타 MVP
톰 챔버스 마이클 조던 칼 말론
1996년 NBA 올스타 MVP
미치 리치먼드 마이클 조던 글렌 라이스
1998년 NBA 올스타 MVP
글렌 라이스 마이클 조던 팀 던컨 & 샤킬 오닐[3]
통산 3회 NBA 올스타 MVP 수상.
1987년 ~ 1988년 NBA 슬램덩크 컨테스트 우승자
스퍼드 웹 마이클 조던 케니 워커
통산 2회 NBA 슬램덩크 컨테스트 우승자.

이름 마이클 제프리 조던
Michael Jeffrey Jordan
생년월일 1963년 2월 17일
198cm (6-6)
체중 98kg
출신학교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포지션 슈팅 가드/스몰 포워드[4]
드래프트 1984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3번, 시카고 불스)
역대 소속팀 시카고 불스(1984~1993)
시카고 화이트삭스(1994)
시카고 불스(1995~1998)
워싱턴 위저즈(2001~2003)
등번호 23번, 45번[5]


시카고 불스 영구결번
No.23

마이애미 히트 영구결번
No.23

1991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조 몬타나 마이클 조던 아서 애시

Contents

1. 개요
1.1. 조던의 제왕적 면모
1.2. 독한놈 마이클 조던
2. 플레이 스타일
3. 어린 시절부터 1차 은퇴까지
4. 첫 번째 은퇴와 야구, 그리고 첫 번째 컴백
5. 두 번째 3연패와 두 번째 은퇴
6. 두 번째 컴백과 세 번째 은퇴, 그리고 그 이후
7. 명예의 전당 헌액
8. NBA에 미친 영향
9. 조던의 영상
10. 마이클 조던에 관련한 일화 및 어록
11. 이것저것

농구의 신

1. 개요

미국의 前 프로농구 선수. 現 NBA샬럿 호네츠의 구단주 겸 사업가.

별명은 Air, His Airness[6], MJ[7], Black Cat[8], 한국팬들에게는 농구황제, '그분', 마사장, 세계 최고의 소인배(쪼잔왕), 미카엘 요르단 등등으로 불린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농구 선수이며, NBA의 세계화를 이끈 농구선수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포츠맨 중 하나.

선수 시절 등번호는 23번.[9] 워낙 그가 유명한 탓에 농구의 23번 하면 99.9% 조던. 농구가 아니더라도 조던 세대들은 숫자 23을 조던넘버라고 부르기도 한다.[10] 그의 시그니처 농구화로는 에어 조던이 있다.

아직도 NBA를, 아니 농구란 스포츠 전체를 대표하는 최고의 슈퍼 스타.[11] 이걸 부정하고 싶은 자는 지금 당장 부모님께 외국 농구선수 한 명만 대보라고 해보자. 누가 나오나. NBA는 몰라도 조던은 아는, 아니 NBA를 잘 모를수록 조던은 아는 그런 존재가 조던이다. NBA를 지금의 위치로 올려놓은 두 인물 중 하나로, 나머지 한 명이 커미셔너를 역임한 데이비드 스턴임을 감안할 때, 선수인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 봐도 좋다. 미국에서는 NFL에 대적할 수 있는 스포츠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조던의 선수시기에는 시청률에서 대등하게 기록하는 등 실질적으로 NBA라는 리그를 세계적인 리그로 만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통산 게임당 득점이 30.1점으로 역대 1위에 자리잡고 있는 최고의 득점원이었으며[12],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받은 경력이 있을 정도로 수비력 역시 굉장했다. 거기에 계약서에 "상기에 명시된 경기 이외에 몇 경기를 그저 농구가 좋아서 돈을 받지 않고 뛰어 줄 수도 있다"고 할 정도로 그야말로 '농구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디어에 자신을 포장할 줄도 알았으며, 이미지 메이킹에도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 결과적으로 농구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조던은 매직 존슨, 래리 버드의 라이벌리 시대가 끝나가는 시기인 1990년 초에 최정상 자리를 차지하면서 자연스럽게 NBA 대표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고, 그당시부터 위성 방송으로 라이브 경기를 전세계에서 비교적 싼 값에 송출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매우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나 스마트 기기들로 활발히 정보교환이 되는 시기도 아니라 이미지 메이킹에 더욱 편리한 시대였기도 하다. 매직 존슨이나 줄리어스 어빙 같은 그 이전 세대의 NBA 얼굴이었던 선수들과 비교해보면 시기적으로 굉장히 잘 타고났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기회를 잡은 건 온전히 그의 실력.

1.1. 조던의 제왕적 면모

실제로 조던 본인은 제왕적 인물이었다. 조던 시대의 불스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여러차례 우승을 경험했고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감독인 스티브 커는 "연습때 마이클이 하도 독하게 갈궈대서 경기때는 긴장하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경기보다 연습이 더 힘들었으니까. 사람들은 데니스 로드먼이 마이클한테 쫄아서 얌전히 지낸 줄 아는데 그건 모르는 소리다. 애초에 로드먼은 마이클에게 대들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다." 라고 말했을 정도. 어떤 경기에서는 스카티 피펜이 4쿼터에 조던과 필 잭슨의 지시를 무시하고 결정적인 포제션에서 슛을 던졌는데, 조던이 그 즉시 타임아웃을 부르고 면전에서 피펜을 호되게 질책했을 정도였다. 드물게 스티브 커가 인상과는 다르게 조던에게 상당히 개긴 케이스. 하도 갈궈대서 커가 후렸더니 맞받아쳐서 분위기가 싸해졌다고 ESPN Sports century의 조던 편에서 두 선수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일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연습경기중 커와 조던이 매치업되었는데 (조던 주장에 따르면) 심판들이 커에게만 유리하게 불렀다고 한다. 그러자 조던이 슬슬 열받으면서 상당히 거칠게 플레이하며 트래쉬 토크를 하자, 커도 지지않고 맞받아치며 거칠게 했다고 한다.[13] 결국 분위기가 과열되어 조던이 주먹으로 커를 가격했고 이후 연습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100%조던의 잘못인만큼 조던은 이후 커에게 전화해 사과했으며 이후 커의 승부근성을 높게 평가해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뭐 잘 지냈다. 은퇴 전까지 쭉 한 팀에서 지내면서 96-97 파이널 샷도 패스해주고. 사적으로 친한 건 아니지만.[14] 스티브 커 외에 스카티 피펜 역시 조던을 상대로 쫄지않고 도전을 하는 선수였는데 비록 조던과 피펜은 사적으로 친한것은 아니었지만 조던은 피펜을 매우 존중했다. 반대로 성격이 유순한 호레이스 그랜트는 조던이 제법 힘들게 했는데, 그랜트는 ESPN의 빌 시몬스가 진행하는 b.s. report (욕이 아니다;;) 에 출연해 조던과 친한건 아니었지만 사이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다고 해명했다. 여담으로 그랜트는 여기서 조던에 대해 대단히 높이 평가했는데 본인이 뛰었던 2000년대 초 레이커스와 90년대 불스와의 비교에서 불스의 손을 들어주며 "마이클은 어떻게든 승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선수다"고 평한바 있다. 첫번째 쓰리핏의 주전 센터였던 빌 카트라이트도 라커룸에서 조던한테 워낙 갈굼당해서 워낙 쌓여서 조던 면전에서 다리를 부러뜨리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 말을 하고나니 조던이 조용했다고.

오죽하면 "당시 필 잭슨은 감독이 아니었다. 마이클이 감독이었다"라고 까지 하는 사람도 있으며 잭슨 또한 인터뷰에서 암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이란…

"마이클이 (첫 번째로) 컴백한 뒤 멤버들은 다들 알아서 열심히 뛰었다. 연습도 전쟁이었다. 때문에 나로서는 좀 편한 점도 있었다. 불스가 대학생이라면 (샤킬 오닐코비 브라이언트가 이끈) 레이커스는 초등학생들이었다. 이들의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내가 선수들 개개인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할 필요성을 느꼈다."

1.2. 독한놈 마이클 조던

물론 천부적인 재능과 하늘이 내린 육체가 있었으나,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지독한 노력을 더했다. 이 세가지 모두 조화가 되어 저 위치에 올라간 인물이다. 특히 이런 노력의 바탕에는 그 스스로가 지닌 엄청난 승부근성과 경쟁심이 있었다. 타인의 비난이나 태클에 쪼잔할 정도로 반응해서 그걸 앙갚음해주는 지라.

숱한 사례가 있지만 몇 가지만 이야기하면 유타와의 경기 중 존 스탁턴을 넘어 덩크를 꽂자 관객이 "니 덩치에 맞는 놈이랑 싸워라 비겁한 XX야!" 하자 바로 그 다음 공격에서 유타의 센터 멜빈 터핀(211cm) 위로 덩크를 꽂고서 관객 앞으로 가서 "이제 만족해? (Is that big enough?)" 한다든가.(3분 10초)

49점 올리고 벤치에서 쉬고 있을 때, 기자에게 올 시즌 최고 득점이 몇 점이죠?라고 묻자
기자는 "칼 말론이 기록한 54점인데요"라고 답함. 이후 다시 경기에 투입되어 3연속 득점을 올려 55점을 기록한 후 다시 기자에게 다가와 "이제 55점이 최고득점이지요?"라고 답했다 함.

그 유명한 눈 감고 자유투 시전이라거나. 해당경기는 덴버 너겟츠와의 경기였는데, 당시 신인이었던 덴버 너겟츠의 센터 디켐베 무톰보가 조던을 향해, "아무리 당신이라도 눈감고 던지지는 못할 걸?" 이라고 도발하자 엉? 그래?라고 해맑게 웃으면서 되갚아준 것. 그 후 조던이 한말은 "Welcome to the NBA" 였다.

시애틀 감독인 조지 칼이 조던에게 "나이먹고 이제 그냥 평범한 점프슈터네ㅋ" 했더니 그 다음 경기에서 드라이브인 하나 없이 점프슛만으로 40점 넘게 박아버린다든가...이외에도 알론조 모닝에게 첫 복귀 때 슛을 블락당하고서 그걸 꼭 기억하고 있다가 그 다음 시즌(…) 경기에서 모닝 위로 덩크를 꽂아넣고 미친듯이 포효했다거나. 이쯤 읽으면 미디어가 괜히 포장한 게 아닌가 싶겠지만, 실제로 본인이 경기 후 인터뷰에서 그 장면의 의의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다. 흠좀무. 이런 승부근성과 경쟁심이 너무 지나쳐서 병적일 정도였다는 평까지 듣는데, 심지어 플레이오프 중간 중간 쉬는 날에 도박이나 골프, 여타 스포츠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승부근성을 불태웠다고 한다. 뭐 이렇게 보면 도박 중독(…)에 가까워 보이지만 그게 자기 자신의 본업에는 영향을 전혀 안 미쳤으니 뭐.[15]

그리고 이러한 승부근성을 바탕으로 NBA에서 가장 뛰어난 클러치 플레이어로 손꼽혔다. 때문에 상대팀은 몇초가 남건 2점차건 3점차건 경기 종료 직전 볼을 잡았다 하면 에워싸기 일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차례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 스스로가 클러치 타임의 플레이를 설명할 때조차 "그 순간은 내 스스로가 가장 유리하다고 느낀다" 라고 할 정도.

이런 경쟁심과 승부근성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엄청나서 상대 선수와 팬들의 기를 플레이와 트래쉬 토킹으로 죽여버리곤 했다. 일례로 애틀랜타 호크스, 마이애미 히트 등에서 뛰었고 드림팀 2에도 선발된적 있는 스윙맨 스티브 스미스와 매치업했을 때, 스미스는 조던이 플레이 중에 숫자를 40부터 줄여가면서 세길래 "님 뭐함? ㅋㅋ" 했는데 알고보니 그날 조던의 목표 득점(…)이었다고. 그리고 물론 달성. 그외에 "나 오늘 50점 정도 넣을 것 같은데, 자네 아들이 보고 있다면 미안하게 됐어ㅋ" 실제로 조던은 당대 최고 트래시 토커였던 게리 페이튼과 버금가는 트래시 토커였다.[16] 이렇게 보면 정말 어그로 투성이인 인물이지만, 실력이 너무도 아득해서 상대팀 팬들조차도 욕을 퍼붓다가 그가 플레이를 펼치면 넋을 잃고 바라봐야만 했다.

스포츠 일러스트지와의 악연도 유명한데 자기 야구 선수 시절 악평을 했다고,93년 부터 지금까지 인터뷰를 거부하고 있다. 50세 생일날 표지는 허락했지만 인터뷰는 거부했다고.. 진짜 쪼잔하다

2013년 2월 17일 50세 생일을 맞아 이런 저런 칼럼이 전세계에서 폭주했는데 아래의 칼럼을 읽어보면 조던이 갖고 있는 경쟁심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그가 겪고 있는 나름의 애환을 살펴 볼 수 있다. 인간미가 느껴지는 조던의 모습을 보고 싶은 팬이라면 추천.1편2편3편

2. 플레이 스타일

동부컨퍼런스에서 감독을 하다보면 누구나 능력이 향상된다. 마이클 조던을 상대하기 위해 엄청난 고민과 연구를 하기 때문이다. -前 뉴욕 닉스 감독 제프 밴 건디

플레이스타일은 둘로 나뉘는데, 초창기에는 운동능력을 위주로 닥돌하는 스타일이었다. 점퍼가 안정적이지 않았지만 원체 사기유닛인지라 인사이드를 미친듯이 돌파해 들어갔다. 당시 동영상을 보면 사기에 가까운 운동능력으로 붙잡아도 비집고 들어가고 뚫어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해하지 말아야할 것은 그렇다고 이전 조던이 점퍼가 평균이하였던 것은 절대 아니다! 애초에 농구가 돌파로 모든 슛을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17] 그랬다면 루키시즌에 28점씩 때려박을 수 있을리가 없다. 다만 슈팅 매커니즘이나 폼에 있어서 약간 어설펐던 것이 사실이고, 이에 대해서는 대학시절 은사인 딘 스미스 또한 루키 시즌 이후 조던에게 점퍼를 보완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뭐 그 이후에는 아시는 대로... 완전체가 되었다.

MJ_02.jpg
[JPG image (79.41 KB)]

점퍼 메커니즘의 변화(대학시절-커리어 초반-워싱턴시절)

2년차때 큰 부상을 당하고 복귀한 뒤, 필 잭슨의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 플레이할 때에는 나이로 인해 떨어진 신체 능력을 보완하고자 포스트업을 기반으로 페이드어웨이를 주 무기로 활용하였다.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원래 이름이 트리플 포스트 플레이일 정도로 포스트 플레이가 핵심인 작전이었다. 때문에 포스트 업으로 공간을 잡아먹어줄 수 있는 수준급 빅맨이 반드시 필요했는데,[18] 불스는 수준급 빅맨이 없는 대신, 조던의 포스트업이 탑 레벨의 센터급으로 강한 덕분에 효과적인 전술 수행을 해낼 수 있었다. 조던은 슈팅가드로서도 장신인 198cm의 키에 웨이트로 다져진 엄청난 근육때문에 웬만한 파워포워드 수준의 피지컬을 가졌고, 덕분에 어마어마한 등빨로 포스트 플레이를 펼치며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상대방 가드와 포워드들, 심지어 센터까지도 농락하는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

거기다 2차 3연패 시절의 완성도는 이전보다 더욱 올라가 더블팀을 붙이지 않으면 그냥 점수 헌납하는 수준까지 가버렸다. 특히 뒤로 돌아 포스트업을 하면서 상대 수비를 밀어내며 갑자기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를 구사하는데, 본디 페이드어웨이 자체가 적중률이 떨어지고 거기다 수비가 붙으면 한없이 낮아진다. 게다가 림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이 안된 턴어라운드 슛이라면 가장 적중률이 낮을 수 밖에 없는데, 조던은 이런 슛 적중률이 뛰어났다! 우리나라 농구팬들은 이 말도 안되는 슛을 사기더웨이[19]라 부른다. 그럼에도 상대가 점퍼만을 경계하는 순간 인사이드로 파고들어 여지없이 더블 클러치나 더블 클러치로 안되면 트리플 클러치 덩크를 꽂아대서 나이를 의심케 만들었다.

MJ_01.gif
[GIF image (1.59 MB)]

보셨죠? 이 정도는 해야 올타임 NO.1이라고 불리는겁니다.

본래 신체가 NBA 선수 중에서도 강골이고,[20] 점프력이 압도적인데다 순발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실제로 경기를 보고 있으면 '농구 참 쉽게 하는구나' 싶다. 팀 덩컨과는 다른 의미로 실제로 그가 슛을 쏘는데 다른 선수들이 점프조차 안 하고 바라보거나[21] 포스트업에 퉁퉁 밀려나가는 꼴을 보면 뭐야 담합인가! 싶지만 그냥 진실은 사기유닛.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공을 독점하는, 속칭 "볼호그"인 것도 아니었다.[22] 기본적으로 오프 더 볼 무브로 상대 수비를 제치는 능력 또한 최강급이라 선수들이 그의 기민한 움직임에 속아 애초에 매치업 자체를 이루지 못한 상태로 수비를 강요당하는 상황을 왕왕 발생시켜서 상대팀을 초토화시키곤 했다. 시카고 시절 경기를 보면 분명 공도 없는 조던의 컷인에 상대팀이 우왕좌왕 대다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조던은 유유히 점프슛을 던지는 상황이 끝도 없이 연출되었다. 더욱이 이 시절은 지역수비가 금지라 공 잡았을 때만 더블팀, 아니면 맨투맨만 해야하는 시절인데도, 조던의 움직임을 팀 전체가 예의주시해야 하다보니, 팀 전원이 조던 하나 때문에 혼돈의 카오스를 연출했다. 이 때문에 실제로 초기 조던과 혈전을 벌였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조던을 막기 위한 수비인 조던 룰을 고안해냈는데, 거의 지역수비나 마찬가지인 수비전략이었다.

MJ_03.jpg
[JPG image (84.18 KB)]

"조던 룰"은 단순히 지역수비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조던을 막아야 해!!" 라는 사고의 산물이었다.

수비력도 최강이었다. 87~88 시즌 DPOY(수비왕)을 수상한 것은 물론[23]이고 이때부터 1차은퇴 시즌과 복귀시즌을 제외한 9시즌 연속(87~93 6연속, 95~98 3연속) 올 디펜시브 퍼스트팀 가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런 격언도 있었다. "조던을 막는 것만을 걱정하지 마라. 조던이 너를 막는 것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드가 갖춰야 하는 모든 수비 방법 모두 전부 다 잘했다. 낮고 안정적인 수비 자세는 기본이요 사이드 스텝도 소위 미쳤었다. 단순 스텝만을 밟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거리, 속도를 고려해 크게 스텝을 한 번 밟음으로써 돌파를 완전히 틀어막을 정도로 스텝을 잘 밟았다. 스틸은 또 무지 잘하는데 스틸 실패시 보이는 빈틈도 앞서 말한 스텝을 활용함으로써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커버했고, 그놈의 승부욕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막는 것에 대해 절대 포기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드 주제 블락샷이 1개 넘는 수치가 그것을 증명한다. 1차 은퇴 전에는 경기 당 1개씩 기본 성공. 가드에게 블락 1개는 어마어마한 수치다. 공격을 주도적으로 하는 선수라 수비할 때의 체력을 관리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조던은 그런 거 없었고, 항상 최선을 다해 수비를 했다. 그런데도 40분 이상 꼬박꼬박 82 풀경기.. 혹자는 이렇게 공격과 수비 양쪽에서 모든 힘을 쏟아 넣고도 경기력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끝없는 체력이 그의 실력의 원천이라고들 한다. 동시대에 찰스 바클리나 도미니크 윌킨스같은 라이벌들의 경우, 마음만 먹으면 좋은 수비를 보여주지만 시즌 내내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점을 보면.. 진정한 괴물.. 손이 빠른 덕분에 스틸 또한 경기 당 2개 이상씩 꼬박꼬박 성공시켜 통산 스틸 3위, 플옵 통산 2위일 정도.

3점슛의 성공률이 슈팅가드로서는 낮은 편이긴 하지만 그의 전매특허인 돌파에 이은 앤드원 플레이(바스켓 카운트 프리드로우)가 있기 때문에 큰 상관 없다. 애초에 게임당 평균 30점을 넣어주는 선수인데 3점 좀 못 넣은들 뭐가 대수랴(…). 그리고 3점도 평소엔 그저 보통의 가드 수준이다가, 누가 3점이 안좋다고 입이라도 벙긋하면 불타오른 승부근성으로 전반에만 3점 6개를 넣기도 했다. 그것도 파이널에서. 사실 3점슛이 낮은 이유는 마이클 조던이 농구를 배우던 학창시절에는 3점슛에 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연배에도 이후 3점슛을 장착한 슈터들이 있긴했지만 마이클 조던 입장에선 굳이 플레이스타일을 바꿔가면서까지 3점슛을 익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3. 어린 시절부터 1차 은퇴까지

조던은 노스 캐롤라이나의 소도시 윌밍턴에서 고등학교 시절까지를 보냈다 [24] 그는 레이니 고등학교 농구부 시절, 2학년이 되어 주전선수에 뽑히기를 기대했으나 당시 178cm의 그리 뛰어나지 않은 농구선수였던 조던은 주전선수 선발에서 탈락하고, 코치는 201cm의 키를 가진 동급생 리로이 스미스(Leroy smith)를 주전선수로 발탁했다. 그리고 조던은 자존심에 굉장한 상처를 입었으며 상당한 좌절감과 질투심에 한 인터뷰에서는 "집에 가자마자 통곡을 했다."라고도 전해진다. 결국 1년을 기다려 선발된 그는 점차 키가 커지고 실력이 늘기 시작, 결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 들어간다.[25] 참고로 고교 시절 조던을 탈락시킨 코치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그 후로도 심심찮게 다큐멘터리에 나와서 "내가 탈락시킨 것은 지금의 조던이 아니었다.. 특히 키가.." 를 시작으로 왜 탈락을 시켰는지에 대해 변명해야 했다. 지못미.

재미있는 점은 조던이 원래 가고 싶어했던 대학은 UNC가 아닌 노스캐롤라이나 주립대학(NC스테이트 울프팩)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NBA에서 내로라하는 덩커였던 데이빗 '스카이워커' 톰슨을 좋아하던 조던은 그의 모교인 NC스테잇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조던에게 NC스테잇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대신 조던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던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딘 스미스 감독이 열과 성을 다한 덕에 조던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연하지만 조던의 입학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역사에 길이 남을 기념비적 사건으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은 당시 조던이 사인한 입학서류를 대학 박물관에 전시해놓고 있다.

신입생이던 1982년 그는 패트릭 유잉이 뛰고 있던 조지타운 대학을 상대로 한 NCAA 결승전에서 결승 점프슛을 터트려 일거에 전국구급 스타가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올해의 대학 선수로 선정되었다. 이 때의 추억이 가슴 깊이 남았는지, 그는 프로진출 후에도 저지 밑에 UNC시절 입었던 스패츠를 같이 입었다고 한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럼 한 벌을 해질 때까지 입는거냐'고 생각하는데(실제로 '스페이스 잼'에 출연했을 때 벅스 바니가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때 입었던 스패츠를 계속 입은 건 아니고 프로 데뷔 후 스스로 부진하다고 느꼈을 때 학교에 가서 왕창 구매해서 계속 돌려 입었다고. 조던이 가진 몇 안되는 징크스중 하나. UNC museum의 조던 관의 비디오를 보면 조던이 "I've always worn UNC shorts, I can't go anywhere whithout having them on, No matter how successful I become, you know, it all started at UNC"라고 말하는 인터뷰가 수록되어 있다.

1984년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 3학년을 마치고 드래프트에 참가, 3순위로 시카고 불스에 지명되어 시카고 불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다. 그해 마이클 조던은 신인왕과 all-nba 세컨드팀에 뽑혔다. 1984 LA 올림픽 농구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이때 1위는 휴스턴 로켓츠가 지명한 센터 하킴 올라주원 이었고, 2위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가 지명한 샘 보위라는 센터였다. 당시 포틀랜드는 클라이드 드렉슬러라는 레전드 슈팅가드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가드를 지명할 생각이 없었던 포틀랜드의 지명은 당시로서는 현명한 판단이라고 할 법 했으나, 그 후 샘 보위가 부상으로 몇 해 뛰지 못하고 은퇴하는 바람에 드래프트 역사에 손꼽히는 바보같은 결정 순위에서 항상 1순위로 꼽히고는 한다. 일명 Sam bowie Picks. 안습. 그리고 포틀랜드는 23년 후 비슷한 짓또 한다. 참고로 84년 올림픽 대표 감독였던 인디애나 대학의 바비 나이트 감독이 포틀랜드 프론트에게 조던을 추천했는데 우리는 센터를 뽑을꺼라고 하니깐 "조던을 센터로 쓰면 된다"라고 말한 일화가 유명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조던과 드렉슬러가 커리어 동안 보여주었던 다재다능함을 생각하면 두 선수의 공존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드렉슬러는 큰 키로 인해 SG라기 보다는 SF에 더 가까운 선수였고 두 선수 모두 득점은 물론이고 리딩, 리바운드, 수비까지 수준급 이상이었던 선수고 (물론 수비같은 경우 차이가 많이 난다) 조던은 89시즌엔 포인트가드로 출장하며 32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라는 기록을 낸 적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두 선수의 엄청난 실력과 겹치는 스타일을 생각하면 동시에 기용하는게 낭비기 때문에, 만약 이때 조던이 뽑혔다면 훗날 레이커스의 에디 존스-코비 브라이언트 케이스처럼 드렉슬러가 트레이드되는 결말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다음해엔 발바닥 부상을 당해 대부분을 날렸지만 이후 조던은 독한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해 근육질로 거듭났다. 그리고 플레이오프때에 복귀하여 래리 버드가 버티고 있던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혼자 63점을 퍼붓는 기록을 남겼다.[26] 아무리 막아도 비집고 들어가고, 잡아 끌어도 슛을 성공시키는 그의 플레이에 질린 래리 버드는 "올림푸스의 신이 마이클 조던으로 변장하고 내려온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경기는 연장 접전 끝에 보스턴이 이겼다. 1차전때 49득점, 2차전때 63득점을 넣었고 게다가 그 과정이라는 게 위에 썼듯이 못 막을 움직임을 통해 따돌리고 넣는게 아니라 아무리 막고 잡아당겨도 결국 뿌리치고 슛을 넣으니... 이게 보스턴 측이나 농구계 전반에 준 충격이 어찌나 대단했던지, 조던이 3차전에는 77득점을 올리는게 아니냐하는 반농담성 예측까지 하게되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진 않았다.[27]

당시 매직vs버드 라이벌리를 통해 NBA의 양대 왕조로 군림하던 셀틱스나 레이커스를 포함해 대부분 농구인과 관객들 대부분이 스타플레이어 1명의 득점보다는 전체적인 팀 밸런스를 맞추는 공격과 수비를 지향하고 있었으며, 득점왕은 이기적인 플레이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셀틱스나 레이커스나 스타플레이어 집합소였다는건 일단 제끼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도 그랬었지만 조던의 우승 전까지 매번 나오는 말 또한 "득점왕은 우승할 수 없다"였을 정도. 물론 조던은 이런 인식을 박살내고 양자를 공히 독식함으로써 그를 따라잡고자 하는 이들에게 좌절을 안겨 주었다. 조던을 죽입시다 조던은 나의 원수 실제로 조던 이후로도 득점왕과 챔피언을 독식한 건 샤킬 오닐 1명, 그것도 한 시즌뿐이다.

계속해서 플레이오프에서 좌절을 겪으며, "혼자만 아는 선수이고, 득점왕은 팀을 우승시키지는 못한다"는 악평을 많이 듣던 중 1988년 필 잭슨감독과 텍스 윈터스 코치를 만나고, 그들이 도입한 트라이앵글 오펜스로 인해 그의 공격 부담이 줄고 조던도 그 영향을 받아 팀플레이에 눈을 뜨게 되었다. 정확하게는 필 잭슨이 감독으로 부임한 것은 1989년이고 (그 전에 1년간 코치로 재직) 텍스 윈터가 코치로 부임한 것은 1985년이다. 잭슨 이전에 불스의 감독은 덕 칼린스였는데 당시 그는 윈터와 팀전술을 두고 의견충돌이 있어서 윈터가 사임하고자 했다. 그러나 불스 구단은 오히려 윈터의 사임을 만류하고 칼린스를 해임하면서 잭슨을 감독으로 올리게 된다. 이전까지의 공격방식은 좋게 말해 스윙 오펜스, 나쁘게 말하면 '조던에게 공을 줘!'. 물론 에이스 대접은 당연했고 그 때문인지 조던은 처음에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도입을 반대했다. 그러나 일단 반강제로 시켜보니, 자신이 집중견제를 덜 받고 부담이 덜 가는 점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즉 트라이앵글 오펜스는 반강제로 도입한 것이 아니었으며 조던과의 합의하에 도입한 것이다. 필 잭슨의 첫번째 자서전 Sacred Hoops를 보면 당시 조던이 본인의 공격부담을 줄일 수 있는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흥미를 가졌다고 나와있다. 막말로 당시 조던의 가치는 윈터 코치나 잭슨감독보다 훨씬 높았다. 지금도 선수와 감독이 트러블을 겪을시 감독이 짤리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초짜 감독과 지금만큼의 명성은 없었던 윈터 코치를 조던이 싫어한다? 광속으로 짤렸을 것이다.

결국 그를 향한 보스턴이나 아이재이아 토마스를 필두로 한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스들의 집요한 견제를 가장한 폭력을 특유의 근성으로 헤쳐나간 결과, 결국 모든 장애물들을 헤치고 90-91년 시즌 매직 존슨이 이끄는 LA 레이커스를 꺾고 불스에 우승컵을 안겨주며 MVP에 오르게 된다. 락커룸에서 우승컵을 소중히 껴안고 펑펑 우는 조던의 모습이 공중파를 타며 모두가 '저놈도 인간이었군' 류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MJ_06.jpg
[JPG image (183.34 KB)]

첫번째 우승..

그 후 91-92시즌에는 클라이드 드렉슬러의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를, 92-93시즌에는 찰스 바클리의 피닉스 선즈를 꺾으며 2회 더 우승을 차지하고, 3-peat를 이루게 된다. 또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미국 농구 대표팀, 소위 말하는 "Dream Team"의 제 1회 멤버로 참여, 상대 팀과 평균 점수차를 40점 내면서 두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건다. 이때는 세계 농구계가 지금처럼 평준화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미국 대표팀은 문자 그대로 넘사벽. 상대편 선수들조차 기념촬영에 더 의미를 두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4. 첫 번째 은퇴와 야구, 그리고 첫 번째 컴백

그러나 93년, 그의 멘토였던 아버지가 노상강도를 만나 사망한 후 조던은 크게 상심하여 농구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최전성기에 은퇴를 선언한 그에게 사람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지만,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 조던의 제2의 인생으로 결정한 것은 야구였다. 원래 유년기에 농구와 야구를 두고 심각하게 진로를 고민했을 정도였고, 사별한 아버지 역시 농구를 시작하기 전엔 조던에게 야구선수로서 소질이 있다고 자주 언급했다. 1994년 2월 15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스프링캠프 훈련에 참가함으로서 야구선수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왜 하필 화이트삭스냐 하면 불스와 구단주가 같았기 때문.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영국, 프랑스, 일본 등에서 야구선수 조던을 취재하기 위해 250명의 기자들이 몰려왔다고 한다. 스프링캠프 훈련 후 화이트삭스 산하의 더블A팀인 버밍햄 베론스로 배정됐다. 여담인데 당시 베론스 감독이 테리 프랑코나 감독이었다.그 당시에는 듣보잡 감독이지만 알다시피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이 되어 2004년 월드시리즈를 우승하면서 86년 묵은 밤비노의 저주를 깨버리며 전설이 된 그 감독이다.



유명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짐싸, 마이클!"편 표지. 조던은 이때 실린 비난기사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이후 SI표지 모델로 서는것을 거부했다. 이후 SI의 50주년 기념커버는 수락했지만 특집 인터뷰는 거절했다고.

조던의 마이너리그 데뷔전에 1만여명의 관중이 입장했는데 마이너리그 치고는 이례적인 규모였다. 하지만 경기성적은 좋질 못했다. 첫 경기에서 삼진 2개와 파울플라이 1개를 기록했고, 다음 경기에서도 여전히 안타는 없었고 수비 에러까지 나왔다.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저조한 성적이 계속되자 "에어 조던이 아니라, 에러 조던", "짐 싸, 마이클!" 이라는 기사도 나왔다. 하지만 농구선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조던은 실력을 높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애썼다.[28] 노력의 결과인지 4월에는 11경기 연속 안타를 때려냈고, 7월엔 생에 첫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94년 시즌 결과
경기 127
타율 .202
출루율 .289
장타율 .266
안타 88
홈런 3
타점 51
볼넷 51
도루 30
삼진 114
에러 11

시즌을 마친뒤 애리조나에서 가을 리그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타율은 .251로 많이 좋아진 편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희망적인 분위기로 다음 시즌을 기대했지만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터졌다. 메이저리그 파업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 파업은 232일이나 지속됐으며 90년만에 월드시리즈조차 치르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사태로 치닫고 만다. 결국 1995년 3워 5일 조던은 화이트삭스를 떠났고, 1년 26일만에 야구를 그만두게 된다.

하지만 그와 별도로 그가 활약하던 시절 마이너리그는 조던을 보고자 관중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한다. 더불어 그가 야구선수로 활약하면서 받은 연봉은 겨우 1만 달러였다고. 하지만 그는 배런스 구단에 당시 최고급 버스까지 사다주었는데 버스에는 바텐더 석까지 달려있고 티브이만 6대나 달려있었는데 56만 달러를 주고 사와선 팀에 아예 기부해버렸다.

94-95시즌에 이전과는 다른 45번을 달고 복귀했지만 그간의 연습 부족과 팀원들과 손발이 잘 맞지 않아 결국 동부 컨퍼런스 결승에서 올랜도에게 패배한다. 상대 선수가 조롱조로 "23번이 더 나았어"라고 말하자 몰래 23번 유니폼을 입고 나오기까지 했다. 45번 유니폼을 무진장 찍어내었던 리그에서는 재고를 떠안는 사태를 막기 위해[29] 매 경기마다 천만원대의 벌금을 물렸지만 조던은 꿋꿋이 그걸 입고 나왔다. 하긴 뭐 돈이 모자랄 사람은 아니니까.. 그런데도 떡실신당했다.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닉 앤더슨에게 마지막에 중요한 스틸을 당했고, 현역때처럼 마지막 슈팅 찬스를 맡겼지만 손발이 맞지 않아 날려버렸다.

그러나 그 전해에 조던은 고액의 도박 스캔들에 연루되었고, 또 마피아들이 피닉스 선즈에 돈을 걸었다는 루머도 있었다. 이런 점들이 엮여 그의 아버지가 분노한 마피아에게 보복살해 당했다는 음모론이 돌 정도로 흉흉한 상황이라 첫 번째 은퇴가 다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2014년 9월 14일에 신비한TV 서프라이즈의 코너인 Surprise Secret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다.

5. 두 번째 3연패와 두 번째 은퇴

그 후 와신상담한 조던은 신인시절보다 더 빡센 트레이닝을 거쳤고, 전통의 원투펀치였던 스카티 피펜과 새로 영입한 리바운드왕 데니스 로드먼과 함께 95-96시즌에 72승 10패라는 NBA 역대 최고 승수를 기록하고, 당연하다는 듯 우승하게 된다. 조던이 우승을 결정지었던 파이널 6차전은 아버지의 날에 펼쳐졌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공을 껴안고 코트에 쓰러져 흐느끼는 조던의 모습은 그의 하이라이트 중 빠지지 않는 장면.

MJ_04.jpg
[JPG image (721.74 KB)]

아버지의 날... [30]

그 후 96-97, 97-98 시즌에 칼 말론존 스탁턴이 이끄는 유타 재즈를 연속으로 상대하였다. 96-97 파이널 5차전은 일명 Flu Game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당시 조던이 유니폼도 제대로 입지 못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심한 독감에 걸린 채로 경기에 임했기 때문이다.[31]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기록은 38득점, 7리바, 6어시, 3스틸, 1블록에, 동점 상황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3점슛까지 성공시켰다. 아픈 인간이 웬만한 농구선수가 최상의 컨디션에서도 하기 힘든 기록을 지었다... 더욱 더 대단한 것은 기사나 경기 전 영상에는 조던의 컨디션이 분명 개판인 게 눈에 보였고, 플레이 중 쉬는 시간에는 분명 죽을상을 하고 있는데, 플레이만 시작하면 평상시처럼 날아다니는 통에 도저히 아픈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다는 점. 여담이지만 숙취라고 보도한 언론사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5차전 승리로 우세를 잡은 조던과 불스가 6차전까지 따내며 우승반지를 차지한다. 6차전 마지막 동점상황에서 조던은 스티브 커에게 "나에게 더블팀을 들어오면 패스할 테니 준비해라"라고 말하고, 그대로 되어 커가 자유투라인에서 점프 슛을 성공시킨다. 둘의 사이가 상기한 대로 썩 좋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의미심장한 장면.

MJ_05.jpg
[JPG image (311.14 KB)]

Flu Game이 끝난 후 조던을 부축하는 피펜. 눈이 풀려있는 걸 알 수 있다.

마지막이 된 97-98 시즌, 7차전까지 가는 아슬아슬한 승부 끝에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꺾고 결승에 올라온 그들은 체력의 열세와 상대에게 있던 홈 어드밴티지, 그리고 1차전 패배를 극복하고 4승 2패로 여섯번째 우승컵을 획득한다. 마지막 6차전은 체력이 한계에 달할 대로 달한 데다가 게임 초반에 스카티 피펜이 등 부상을 입어 제 컨디션이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역시 조던이 경기를 캐리하기 시작, 45점을 넣으며 경기를 팽팽하게 가져갔다. 마지막 동점상황에서 3점슛을 얻어맞고 3점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조던은 작전타임 후 혼자 공을 몰고 레이업 - 칼 말론의 공을 스틸 - 당연하다는 듯이 결승 점프슛 성공 을 통해 혼자 4점을 넣는 활약을 보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수비를 밀친 따돌린 후 점프슛을 한 조던의 슛폼은 유난히 여운이 남는 장면이라고 기억되고 있다. 결국 3-peat[32]를 두 번째로 달성하고, 정점에서 다시 은퇴한다.
  • 이 마지막 장면에 대해 굉장히 말이 많고, 당시의 해설자도 "팔로 허벅지를 밀었지만 심판이 못 봤다. 조던은 저런 작은 테크닉도 부리는 선수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현재까지도 논란거리이다. 이에 당사자인 브라이언 러셀은 "수없이 많은 질문을 받았지만, 심판은 파울을 부르지 않았고, 이제 그 일은 과거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농구 역사에 남을 위대한 플레이의 한부분으로 남을수 있어 자랑스럽다." 고 말했다.
    사실 NBA에서 돌파하는 선수가 손을 슬쩍 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조던은 물론이고 코비, 르브론, 웨이드 등 슈퍼스타들이라면 누구나 크고 작은 손장난(?)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이 하필 왜 이슈가 되느냐면 이 샷으로 인해 우승이 결정났기 때문이며 수십, 수백번이나 슬로모션으로 반복재생되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뒤에서 보지 않고 풀샷으로 보면 조던의 손이 분명 러셀의 엉덩이에 닿았지만 러셀은 이 손에 밀려 넘어진게 아니라 조던의 돌파를 따라가다 그가 갑작스레 멈춰서자 똑같이 방향을 전환하다가 미끄러졌다. 조던이 밀어서 넘어졌다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앵클 브레이킹"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조던이 샷을 성공시킨 직후 유타는 타임아웃을 불렀지만 러셀을 포함한 유타 선수들 누구도, 감독인 제리 슬로언도 심판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NBA선수들은 심판에 대한 항의가 일상화된 양반들이다. 오죽하면 2000년대 중반에 심판판정에 심하게 어필하면 자동으로 테크니컬 파울을 주도록 규정을 바꿨겠는가. 어떤 선수들은 항의하다가 실점하기도 하고, 특히 이처럼 타임아웃이 불린 상태에서는 급히 수비하러 돌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벤치로 가면서 억울하다는 제스쳐와 함께 항의하는 것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정착 밀쳐진(?) 당사자조차 심판에게 어필하지 않았다는 것은 본인도 자기가 미끄러진 이유가 조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 당시 은퇴는 첫 번째 은퇴만큼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NBA가 파업으로 치닫고 있었고, 조던과 필 잭슨의 계약이 만료됨으로 인해 공공연하게 3-peat 후의 정점에서 은퇴할 것이란 추측이 이미 산처럼 쌓여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던은 농구에 대한 의욕과 승부욕, 상승욕을 상실한 상태였다고 한다. 3년 연속 우승 후에, 은퇴해서 다른 일 하고 왔음에도, 또 다시 3년 연속 우승을 이룬 이라면, 당연히 찾아올 더 이상 무엇을 이루어야 할지 알 수 없는 권태감에 시달렸던 것이다. 특히나, 병적일 정도로 승부욕이 강했던 그라면 권태감은 더 심했을 거라고 추측된다. 팀 내부 분위기에서도 마찬가지였는지, 필 잭슨이 선수단에 나눠준 다이어리에는 Last Dance라고 적혀있었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은퇴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을 표한 것과는 다르게, 두 번째 은퇴에 관해서는 팬이나 농구관계자, 스폰서 모두가 정점에서 멋지게 퇴장하는 그를 위해 박수를 보내주었고, 세계 각지에서는 이를 기념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심지어 MBC에서 그의 은퇴 다큐멘터리를 직접 제작, 방영할 정도였다면 그 분위기는 대충 감이 올 것이다. 우리나라를 위해, 혹은 우리나라에서 뛴 적 한번 없는 운동선수의 은퇴기념 다큐를 공중파에서 제작 방영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조던의 위엄.
3-peat → 은퇴 → 3-peat이라는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업적을 쌓은 그는, 더 이상의 기록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듯이 그렇게 떠났다.

MJ_07.gif
[GIF image (29.08 KB)]

반지가 6개~

6. 두 번째 컴백과 세 번째 은퇴, 그리고 그 이후

화려한 농구인생을 정점에서 마무리한 조던은 워싱턴 위저즈의 주식을 매입해 주주로서 있다가, 구단주의 권유로 우리 나이로 마흔에 다시 복귀하게 된다. 그가 복귀한 사실에 대해 팬들은 당시 떨어져만 가던 NBA의 인기를 회복시키고자 데이비드 스턴이 복귀를 종용했다 어쨌다 말이 많았고, 후에 조던 또한 자의로 복귀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는 뉘앙스의 인터뷰로 이를 어느정도 긍정했다.

당시 위저즈는 강팀이 아닌지라 복귀 후 플레이오프 진출 정도를 목표로 삼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 게다가 더 이상 실력도 예전의 그가 아닌지라 팀내에서는 그가 중심으로 돌아가는 팀에 대한 팀 내의 불만도 꽤 많았다.

  • 이게 좀 웃긴 일인데, 당시 조던은 젊은 선수들의 서포트에 충실하겠다며 스스로 식스맨을 자처하고 나섰다. 근데 시즌이 지나가다보니 이건 뭐 경기력이 일정 수준은 돼야 식스맨을 뛰지. 결국 스타팅으로 어쩔 수 없이 출격. 막상 그래서 팀 성적을 좀 끌어올리고 보니 어린 놈들은 "노친네가 욕심도 쩌시네영 ㅋ" 이딴 소리나 하고 있었으니 조던도 빡칠 노릇. 게다가 당시 멤버들 꼬락서니를 보면 뭐 이 사람말고 득점할 사람이 없었다. 끽 해야 애송이였던 리차드 해밀턴, 후에 트레이드되어 온 제리 스택하우스 정도.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그러나 나이 마흔에 몇 년씩 딴짓을 해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20점-5리바-5어시라는 리그 엘리트 스윙맨의 지표급의 활약을 보여주어 열심히 그를 따라잡으려 하는 후배들의 목표를 한층 상향시켜 주었다. 조던으로 키배가 벌어지면 나오는 단골 레퍼토리. "그 정도 성적은 얘도 찍을 수 있다능!" "2년 쉬다 복귀하고 마흔넘어서 저 성적 찍어보든가?" "…"

한편 단짝이었던 피펜과 서로 포틀랜드-워싱턴의 저지를 입고 만나는 명장면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친정팀인 시카고 불스와의 경기에서는 개인통산 3만 득점을 기록하며 팬들에게 멋진 기억을 선사해주었다. 그리고 그를 그리워하던 팬들이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보기위해 전국 모든 경기장으로 모여들면서 매 경기가 farewell 세레모니화되는 재밌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지막 유나이티드 센터 방문과 시즌 고별경기는 그 중 백미. 마이클 조던/영상 항목 참조.

어느 프로경기건 경기 시작전 각 팀의 스타팅라인업 소개를 하는데, NBA에서 원정팀은 짤막하게 '몇 번 누구'식으로 언급만 해주고, 홈팀은 불끄고 레이저쇼에 난리를 쳐준다. 흥을 돋구는 겸 우리팀 기 살리기의 일환인데, 조던은 당시 원정팀의 자격으로 유나이티드 센터에 방문한터라 구단측에선 얄짤없이 처리하라 일렀다. 그러나 장내 아나운서는 '마사장님에게 어찌 감히!!!'하며 레이저는 없지만 그 옛날 불스 시절 그대로 "from North Carolina, At Guard, 6' 6", Michael JORDAN!!!" 라고 조던을 소개했고 물론 유나이티드 센터 관중들은 열광하였다. 그런데 조던의 은퇴 후 조던을 괘씸해하던 구단측에서 이걸 빌미로 아나운서를 잘라 버렸다.[33] 이후 그의 마지막 경기였던 식서스 전에서도 원정팀이었지만 식서스는 친히 잘렸던 불스 아나운서까지 초청해서 레이저쇼에 제대로 세레모니를 해주었다.

조던은 비록 전성기에 비해 현저한 능력 저하를[34] 보임에 따라 팬들을 안타깝게 했지만 순간순간 드러나는 그의 운동능력과 센스는 그가 누구였는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35]

이후 워싱턴의 구단주로 복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고향인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연고팀인 샬럿 밥캣츠를 한국 돈으로 3120억 원에 이르는 값을 치러 사들이는 데 성공하며 구단주가 되었다. 간간히 선수들과 연습도 함께 하는 듯. 그리고 선수들을 농락하고 있다[36]

50살 생일인 2013년 2월 17일을 전후로 이런저런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현재 샬럿 밥캣츠의 유망주인 마이클 길크리스트를 상대로 1on1을 해서 승리를 거뒀다는 기사가 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접대농구겠지만, 이 분은 아무래도 상식이 안 통하는지라...그리고 지금까지 읽어보면 짐작하겠지만 조던이 어떤 성깔의 인물인데 감히 까마득한 애송이가 자기를 봐주면서 하는 걸 용납하겠는가? 위의 훈련 영상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아무리 50세라고 해도 봐주면서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고, 만약 대놓고 봐주면서 했다면 박살이 났을 것이다. [37] [38]


조던의 개인 트레이너 역시 지금 당장 복귀해도 "평균 20득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7. 명예의 전당 헌액

2003년 은퇴 이후 6년이 지나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을 얻었고, 09년 4월 명예의 전당 회원으로 선정되었으며, 09년 9월 12일 헌액식을 가졌다. 명예의 전당 헌액 시 보통 파트너를 지목할 수 있는데, 여기에 피펜이다 필 잭슨이다 말이 많았지만 결국 조던이 지명한 것은 어릴 적 우상인 데이빗 톰슨이었다.

한편 이때의 연설이 시카고[39]의 팬들에게 감사하지도 않았고 전체적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자기를 무시, 비아냥한 사람들을 하나씩 이름 들어대면서 까는 내용이었다. 사실 대놓고 욕한 건 아니고 가벼운 디스 수준이었지만, 그간 그의 지랄맞은(...) 성격을 몰랐던 사람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만 사이가 좋지 못했던 제리 크라우스 단장 등에 대한 공개적 디스로 인해 "좋은 자리에서 굳이 그런 얘길 하냐?" 하는 소리도 들었다. 좀 더 대인배의 풍모를 바라는 팬들은 있었지만... 여태까지 봐왔으면서 뭘 기대한 거야
그 때문에 대중적인 신빙성이 없었던 "마이클 조던 = 개새끼"설이 관심받기 시작했다. 결국 그만큼 경쟁심이 강한 이유가 소심하고 공격적인 성격이었다는 사실이 공공연히 드러났고 나이키나 NBA가 그의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얼마나 쉬쉬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어버린 경우. 물론 농구 실력과는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그런 성격 덕에 그렇게 농구를 잘했다는 말이 되기는 한다. 오죽했으면 이 때부터 '세계 최고의 소인배'라는 별명이 하나 추가됐을 정도. [40]

수상경력
NBA 챔피언 6회
시즌 MVP 5회
파이널 mvp 6회
올스타 MVP 3회
올해의 수비상 1회
All-NBA First Team 10회
All-NBA Second Team 1회
All-Defensive First Team 9회 - Gary Payton과 NBA 공동 최다 기록
득점 1위 10회 - NBA 통산 최다 기록
시즌 / 플레이오프 평균 득점 1위
신인상
명예의 전당 헌액

8. NBA에 미친 영향


그가 위대한 것은 경력과 인기로 증명되고 있지만, 더욱 대단한 것은 NBA 농구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기존의 빅맨 중심 농구에서 가드로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이후 그를 보고자란 스윙맨들이 난립하는[41] 경기 양상의 변화를 이끌어냈다.[42] [43] 또한 그의 은퇴 이후 기존의 양웅대립 구조의 마케팅을 지향하던 NBA는 1인 독재의 파괴력을 체감하고는 포스트 조던 만들기에 골몰하게 되었다.그리고 리그를 시망으로 이끌었다

또한 한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데뷔하여 그 프랜차이즈를 통해 6번의 우승을 이끌고, 왕조를 건설함에 따라 이후 NBA 스타가 이뤄내는 업적에 대한 평가의 기준를 끝없이 상향시켰다. 단적으로 그의 후계자로 꼽히는 르브론 제임스가 팀을 옮기자 마자 나온 얘기가 조던 되기는 글렀다...였다. 그를 감안하더라도 스타 한 명이 소속팀과 리그를 넘어선 독보적 인지도를 확보했다는 점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또한, NBA의 세계화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사실 드림팀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처음 바르셀로나 올림픽때 NBA 선수들이 참가하는 것을 처음에는 데이빗 스턴이 막으려 했다. 처음에는 마이클 조던도 비시즌 + 84년에 한번 나갔는데 또? 라는 이유로 미온적이었지만 스폰서인 나이키의 설득과 매직 존슨,래리 버드 두 선배가 자진해 드림팀에 합류한뒤 마이클 조던을 설득하는데 성공하면서 결국 드림팀이 완성되었고 절묘하게 90년대 미디어 시장의 폭발적 확대와 드림팀이 보여준 충격과 공포의 퍼포먼스덕에 사람들이 엄청나게 관심을 갖게된다.[44]

이것에 자극을 받은 NBA는 마이클 조던을 앞세워 세계에 NBA를 홍보했고 마이클 조던의 나이키, 경쟁자인 리복, 아디다스등 세계적 스포츠용품 메이커가 여기에 편승해 어마어마한 투자를 했고 그 덕에 농구가 지금의 국제적인 겨울스포츠이자 하계올림픽의 대표적인 시청률 제조기라는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정작 조던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LA 올림픽만큼의 추억을 만들 수는 없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럴만한게 그 양반들 올림픽 경기보단 쉬는 시간에 카드게임 하면서 놀면서 해도 압도적이어서 그렇긴 하다(...).

10. 마이클 조던에 관련한 일화 및 어록

11. 이것저것

그의 경력 중엔 영화출연도 있다. 벅스 바니를 비롯한 애니메이션 캐릭터들과 함께 나와 농구를 하는 영화였다. 워너브라더스의 스페이스 잼. 이 이후로 농구 선수들이 영화에 많이 출연했다. 다만 평가는 필두였던 조던부터 이미 최악.

EA의 유명한 농구게임 NBA 라이브 시리즈에는 시카고 불스 23번의 이름이 Roster Player였었다. 이는 EA가 마이클 조던 개인의 초상권료가 원체 고가라 지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96년도에 조던이 나온 최신 농구게임을 하려면 NBA 라이브가 아닌 스페이스 잼 게임[45]을 사야 했다. 결국 학생들은 스카티 피펜과 패스를 주고받고 패트릭 유잉 위로 슬램덩크하는 조던 대신 벅스 바니와 패스하고 외계인 위로 팔이 미친듯이 늘어나 덩크하는 조던의 안습한 모습을 봐야만 했다...[46] 그래도 은퇴 후 NBA 라이브 2000부터 조던에게 초상권료를 지불, 2004년까지 게임에 나오게 했다. 허나 그 이후 계약이 결렬되었고 그간은 아예 올스타 팀에서 빠지거나 하다가, NBA2K 시리즈로 유명한 테이크투에서 조던의 초상권을 획득, 드디어 최신 시리즈인 NBA 2K11에서 실명 마이클 조던과 그의 얼굴을 가진 캐릭터를 다시 플레이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NBA 2K11와 2K12의 표지모델은 마이클 조던. 죽은 조던이 산 르브론 제임스를 이겼슴다.

다만 위에 언급된 스페이스 잼이 조던의 실명이 등장하는 첫 번째 게임은 아니다. 아직까지도 PC용 고전 게임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EA의 "Lakers versus Celtics and the NBA playoffs"(PC용 1989년 출시, 메가드라이브용 1991년 출시)에도 조던의 실명이 등장하며, 이 게임이 바로 NBA 인증을 받은 첫 번째 게임이다. 이외에도 아예 조던의 이름을 타이틀로 내세운 건 물론이고 조던을 직접 게임 제작에까지 참여시킨 PC 게임인 "Michael Jordan in Flight"(1993)도 있었고[47], 북미 NES용으로 나온 "Jordan vs. Bird: One on One"(1991)이라든지.. 스페이스 잼이나 NBA 라이브 시리즈 이전에도 조던을 정식으로 등장시킨 게임은 꽤 여럿 존재했다.

본인은 위대한 선수였지만 선수보는 눈은 놀림거리가 되는 일이 많다. 전설의 망한 1픽 콰미 브라운이라든가 당뇨병 환자 애덤 모리슨[48]이라든가.

경쟁심이 엄청난데 그때문에 도박을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도박에 관련된 일화가 엄청나게 많은데(...) 골프를 칠때면 게임당이 아닌 각 홀당 수천불씩 걸었다고 한다. 유투브에도 검색해보면 자선 토너먼트등에서 갤러리(관객)와 즉석에서 내기를 하는 영상들이 여러개 올라와있다. 심지어 아버지가 살해당해서 늪에서 발견된것도 도박빚이 원인이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 더불어 은퇴해서 야구에 도전한것은 자신이 출전한 경기를 포함해서 NBA 경기들에 돈을 걸다가 걸린걸 NBA 수뇌부가 참다참다 아버지 살인건으로 폭발한 것이라는 루머가 있고, 조던의 상품성이 너무도 강력해서 공식적으로 징계를 줄수는 없고, 비공식적으로 징계를 준게 마이너가서 머리좀 식히고 오라는거였다는 루머도 있다.[49] [50] [51]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루머이며, 이런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조던이 도박을 좋아한다 정도로 이해하자. 오해하지 말 것. 미국 스포츠기자들 중에서도 쓴소리 잘하기로 유명한 몇몇(Bill Simmons라던가...)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자기 기사에서 대놓고 비꼬지만 ESPN이나 FOX같은 방송에서는 조던의 도박 자체가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ESPN이나 블리처리포트등 미국 스포츠 언론지에서는 조던의 이런 도박중독을 놓고 "실력은 위대했으나 코트밖에서는 형편없다"라고 대놓고 까기도 하지만. 조던의 위상이 아직도 어마어마한데 저런 발언을 한다는것은 그만큼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

또한 마이클 조던은 코트 밖에서 매너또한 좋지는 않았다는 설도 있다. 그게 어느정도냐면 흑인 래퍼인 Chamillionaire가 동영상으로 자신이 왜 마이클 조던을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한 동영상이 있는데 한마디로 팬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992년 드림팀에 코치로 있었던 마이크 슈셉스키 듀크 감독은 이와 반대로 마이클 조던이 매너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슈셉스키는 조던이 매우 유명한 프로선수이기 때문에 자신을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드림팀이 첫 훈련을 마친 직후, 조던이 아주 정중하게 자신에게 다가와 "함께 훈련하는 것을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요청했다는 것. "그는 '코치님', '부탁드립니다'는 식으로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제 생각엔 그는 나름 저를 편하게 (making me comfortable)해주려고 노력한 듯 했습니다"라고 슈셉스키는 말했다. 참고로 이 인터뷰가 나온 것은 2010년이고 조던의 병적인 승부욕 등에 대해 이미 다 까발려진 상태였고, 슈셉스키는 조던과 개인적 친분도 없는지라 쉴드쳐줄 이유도 없다. 그러나 위에 나온 래퍼와 정반대로 슈셉스키는 조던과 대표팀 생활을 몇주간 하면서 조던의 성격에 대해 상세히 경험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다만 사람의 성격이란 딱 잘라서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며 조던같은 스타의 경우 사람마다 일화가 다른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봐야 할 듯 하다. 일단 조던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어느 정도 있는 편이다. 한 사람에게 잘해줬다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 잘해준다는 얘기도 아닐 것이기에 카밀리온에어와 슈셉스키의 경험담을 두고 마이클 조던의 성격을 알기는 힘든 것. 그리고 슈셉스키는 감독으로서 조던을 만난 것이고 카밀리온에어는 별로 관련이 없는 타인으로서 만났다는 점도 고려해야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대로 Chamillionaire랑은 딱 한번 만난 것이라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것도 이 사람 입장에서 한 증언만 있기 때문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 조던 성격이 정말 별로인지, 그날따라 컨디션이 안 좋았던지, Chamillionaire이 무례하게 대한 것이던지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다른 사람의 성격을 한 두 번의 일화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노릇이고 조던이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이런저런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인터뷰 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하자.## ##



여담이지만 정말 심각한 골초다. 은퇴하고 골프와 사업등을 병행할때 언론에서 농구공을 든 조던은 이제,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어 골프채와 시가를 들었다고 하는데, 사실 현역시절부터 시가 잘만 펴댔다. 구글링 조금만하면 라커룸에서 샴페인과 시가를 맛나게 빨고 있는 조던의 사진이 바로 나올 정도...

이러면 '어? 그렇게 연습벌레에 웨이트하고 몸 신경쓰는 사람이 담배라고?' 하며 안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시가 항목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듯이 시가는 궐련 담배 피우듯이 폐로 연기를 들이마시는 담배가 아니라 입으로만 피우며 연기를 맛보는 담배다. 물론 구강암 등의 위험 때문에 건강에 좋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지만 조던의 운동 능력을 크게 해치지는 않았을 것.... 이기도 한데, 오프시즌당시 시가를 자르다가 손가락 인대를 베인 사건도 일어난 걸 보면, 좀 많이 악영향을 받은건 맞다.NBA 스페셜 기억에 남을 NBA 최악의 부상들

어렸을 때 수영하다가 죽을 뻔한 경험이 있어서 물이라면 질색을 한다고 한다. 친한 친구랑 수영하다가 파도에 휩쓸렸는데 그 친구가 물 속 깊숙히 빠질 때 자신을 꽉 붙잡는 바람에 같이 익사할 뻔했다고 한다. 자신은 겨우 뿌리쳐내고 목숨을 건졌으나 그 친구는 안타깝게도 파도에 휩쓸려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52]

50세에 본인이 연 농구캠프에서 여전히 덩크슛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농구팬들을 경악하게 했고,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아이들과의 매치업에서 포스트업을 무차별로 시전하여 득점을 하시는 여전한 승부욕을 보여주셨다고(...) 승부욕엔 어른이고 아이고 얄짤없으신 우리의 마사장님

2013년에 2K게임즈에서 제작한 NBA농구게임의 최신 시리즈인 NBA2K14의 프로모션 행사에 참석하여 한 발언이 이슈를 몰고 왔다. 자신이 최전성기의 기량이라는 전제하에 현재 NBA 리그의 최전성기를 찍고 있는 에이스들과의 대결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르브론 제임스, 드웨인 웨이드, 카멜로 앤서니 등의 선수들에게 전부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코비 브라이언트만 제외하고" 는 자신감을 드러낸 것.

유독 코비만을 제외한 이유는 "그는 나의 모든 것을 보고 훔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 발언에 현재 리그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에이스들이 보낸 답변도 가지가지인데, 르브론 제임스는 "매치업을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누구도 확신은 할 수 없다. 게임 홍보에 도움은 되겠다" 라며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 반면, 코비는 "내가 그의 플레이를 훔쳤지만, 지금 세대들은 내 플레이를 훔치고 있다" 라고 했다고. 그러니까 쉽게 말해 나도 지금 너님 명성만큼 올라왔음. 그럼 일단 3peat 2번 달성부터 해야 할 것 같은데?

이 기사에 네티즌들의 반응도 가지가지인데, 베플만 몇가지 꼽아보자면 '코비가 1:1은 잘 하지. 근데 팀 우승은 못 시키지' 라든가 'MJ가 이긴다에 내 손모가지와 전 재산 건다.', '확실히 코비가 조던의 사기더웨이를 따라 할 수 있으니 조던의 말이 맞긴 하네', '조던은 너무 코비한테 우호적이야~'라는 반응 등등. 40세에 복귀한 걸 빼고 최전성기에서 은퇴한지 17년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의 발언 하나하나가 이런 이슈를 몰고 온다는 것은 그만큼 맨 위의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그가 아직도 농구를 대표하는 최고의 슈퍼스타임을 증명하는 일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여기까지 찬찬히 쭉 읽어보면, 위에서 그를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소인배'(…)라고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패배는 절대 잊지않고 엄청난 노력을 통해 결국 최후의 승리자로 올라선 그의 향상심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듯. 혹자는 만약 누군가 그의 평득 같은 기록을 깬다면, 축하멘트를 날린 조던이 다음 날 은퇴번복을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미국의 유명 스포츠 잡지인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최다 표지 모델을 장식하기도 한 인물이다. 해당 표지는 그의 50세 생일인 2013년 2월 17일 표지로, 이것으로 그는 표지모델로 50번째 등장하게 된다. 벌써 은퇴한지 10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53]

조던시대에 없었던 2차스탯이 생기면서 재평가가 되고있는데 평가가 더 올라가고 있다(...) 대표적인 2차 스탯인 Player Efficiency Rating의 경우, 스탯괴물로 유명한 윌트조차 제치고 역대 1위다!! 이는 이 스탯이 효율성을 따진 스탯이라 매번 풀타임 가까이 뛴 윌트가 손해봤기 때문이기도 한데,아무리 그래도 커리어 30-20 기록한 양반을 제친다는 건... 게다가 다음의 I love nba 란 커뮤니티에서 역대 우승 팀 중 PER 1-2위의 격차가 가장 크게 나는 팀 10걸에 대한 자료가 올라왔는데, 이중 조던의 불스가 네 차례나 올랐으며 1992-93 불스의 경우 역대 2위로 조던과 팀내 2위였던 호레스 그랜트와 차이가 13.1에 달한다. 물론 이 자료는 수비공헌도를 거의 나타내지 못하는 만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지만 (대표적으로 스카티 피펜의 공헌도가 과소평가된다), 조던의 팀공헌도가 다른 팀 동료에 비해 넘사벽으로 높았다는 건 확실히 보여준다.

NBA에서 뛰는 다른 선수들과도 차원이 다른 인기를 자랑했다. 보통 스타급 농구선수라고 해도 비슷한 레벨의 가수/연예인들보다 인지도가 떨어지는데 [54] 조던만은 예외였다. 유명한 일화로 불스 선수들이 "누가 더 유명인사를 많이 알고 있나" 내기를 할때 재닛 잭슨에게 전화 걸어 "재닛한테 MJ라고 전해주세요."라고 딱 한마디 해 그녀의 전화를 순식간에 받아내기도.
현역시절엔 무려 9번이나 올스타 투표 전체1위에 올랐다. 2위는 빈스 카터와 줄리어스 어빙으로 각각 4회, 3위는 코비, 야오밍 등으로 2회다.
미국의 여론 조사 기관인 Harris Poll의 자료에 따르면 "가장 좋아하는 운동선수" 항목에서 조던은 93년부터 2005년까지 단 한번도 빼놓지 않고 1위를 차지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설문이 시작된 게 93년이다! 즉, 이 기록이 더 길수도 있었단 말. 게다가 이 기간중 상당부분 은퇴한 상태였는데 (93년 1차 은퇴, 95년 복귀, 98년 2차 은퇴, 01년 복귀, 03년 최종 은퇴)그럼에도 불구하고 1위를 놓치지 않았단 말. 그러나 06년부터는 타이거 우즈에게 1위를 뺏기는데 우즈는 10년까지 1위를 하다가 스캔들로 몰락하고 조던은 13년에 기어이 1위로 복귀한다(...) 14년엔 2위로 내려앉았는데 은퇴한지 11년이나 지난 양반이 아직도 최고의 인기선수 자리를 놓고 다툰다는게... 참고로 조던 외에 1위를 한번이라도 차지해본적이 있는 농구선수는 코비 브라이언트(10년에 우즈와 공동 1위), 르브론 제임스(14년에 처음으로 1위)뿐이다. [55]

동명이인으로 배우 Michael Bakari Jordan이 있다. 이 배우도 2015년 판타스틱 포의 휴먼 토치로 나오는 등 나름 유명한 젊은 (1987년생) 배우지만 농구선수 조던이 워낙 넘사벽으로 유명한지라 마이클 조던이라고 하지 않고 꼭 미들네임까지 넣어 [56] 마이클 B. 조던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구글에선 연관검색어로 "마이클 B. 조던과 마이클 조던과의 관계"가 아직도 뜰 정도(...) 재밌게도 마이클 B. 조던도 농구실력이 상당해서 매년 NBA에서 올스타 주간에 개최하는 연예인 농구대회에 단골로 참가한다.
----
  • [1] 사진의 신발은 AIR JORDAN XX3
  • [2] 루키시즌인 1985년, 부상으로 시즌을 접다시피한 1986년, 1차 은퇴시기인 1994~1995년을 제외하면 1998년 2차 은퇴시기까지 한 해도 득점왕을 놓친 적이 없다. 2위가 저 유명한 윌트 체임벌린의 7회인데 마사장은 그걸 연속으로 하고도 한 번의 은퇴 번복 후에 3번을 더 연속으로 했다. 충격과 공포.
  • [3] 99년의 MVP가 아니고 2000년의 MVP다. 99년은 파업으로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았다.
  • [4] 2차 은퇴까지 커리어의 대부분을 SG로 뛰었지만 수비시에는 상대방의 PG를 맡는 경우도 많았다. 3차 은퇴 이전인 워싱턴 시절에는 주로 SF로 뛰었다.
  • [5] 첫 번째 복귀 때 달았던 번호.야구할 때도 달던 백넘버였다. 마이클 조던 관련 영상물 중 하나인 〈Above And Beyond〉를 보면 1996년 올스타에 참여한 조던이 등번호 45번인 알론조 모닝에게 '그 운 없는 등번호로 잘 해보라고.' 라는 식으로 웃으며 농담하는 장면이 나온다.
  • [6] His Highness + Air
  • [7] 마이클 잭슨의 별명이기도 하다.
  • [8] 젊은시절에 한시적으로 불리웠던 별명.
  • [9] 조던은 그의 형 래리 조던과의 1:1 농구시합에서 항상 이겨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래리 조던의 학교 선수시절 등번호는 45번이였는데, 마이클은 형의 반만큼만이라도 농구를 잘 했으면 좋겠다라는 의미로 45번의 2분의 1인 23번을 선택한 것.
  • [10] 데이비드 베컴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등번호 7번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조던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23번을 선택하기도 했다. 농구 외 스포츠에서도 상징적인 번호.
  • [11] 이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로 2K게임즈에서 제작한 NBA 2K12에서는 전설의 농구선수 18명의 팀을 플레이 하여 플레이한 선수들의 팀을 해금해서 그 팀과 선수들로 통상경기에서 게임을 즐길수 있는 그레이티스트 모드가 있다.여기서 버젓히 1번, 즉 맨 앞에 위치하고 계시다. 참고로 2번은 매직 존슨, 3번은 래리 버드.
  • [12] 워싱턴 복귀 이후 상당히 떨어진 수치이다. 그 전까지는 31.5득점.
  • [13] 두 선수의 체격, 운동능력, 힘 차이를 생각하면 커가 대단한 것.
  • [14] 위에 언급된 싸움에 대해 커는 인터뷰에서 "이 사건 이후 마이클이 나를 정말 존중하게 되었다"면서 조던이 자신에게 쥐여사는 동료보다 자신에게 개덤빌수 있는 동료를 더 존중한다고 한 바 있다.
  • [15] 하지만 1차 은퇴 때 나왔던 수많은 카더라중 도박에 대한 설이 있었다는 점에서 영향을 전혀 안 미쳤다고 보긴 어렵지만.
  • [16] 페이튼이 상대를 인격적으로 도발하는 이빨이었다면, 조던은 상대방을 실력으로 무시해서 살짝 비꼬는 이빨. 혹자는 우아하다고도 표현했지만 달리 보면,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고 짜증나고 근데 이기지는 못하겠고. 사람 홧병나게 만드는 트래시 토킹의 소유자였다.
  • [17] 아무리 돌파의 비중을 높여도 농구에서 대부분의 득점은 점퍼다.
  • [18] 이 때문에 후에 LA 레이커스는 2000년대 초반의 샤킬 오닐, 그리고 그의 이적 후 영입된 파우 가솔같은 빅맨을 통해 트라이앵글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 [19] 이 사기더웨이는 카림 압둘자바가 구사하는 스카이 훅과 더불어 막을 수 없는 두가지 슛이라 불리우고, 조던 키드들은 휴식시간이나 체육시간에 이 사기더웨이를 열심히 흉내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거면 사기더웨이가 아니다. 그리고 덕 노비츠키가 이 사기더웨이의 뒤를 잇고 있다.
  • [20] 부상을 입어도 참아내는 인내력 또한 있었지만 아무리 인내한다고 해도 매 시즌 82경기를 거의 풀로 소화하는 건 타고나야 한다. 그의 입지에 도전하는 이들이 기술측면보다 더 좌절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런 신체능력. 물론 2년차때 부상을 당한 이후로 지독한 웨이트를 통해 근육을 단련한 덕도 있다. 신인시절에는 호리호리한 느낌의 선수가 점차 전신의 근육이 압도적인 수준이 된다. 하지만 웨이트 빡세게 하기만 해서 될 것 같으면 아무나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것..게다가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근육량을 급격히 늘릴 경우 프로선수들은 부상 위험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도 40살까지 거의 풀 시즌을 매번 소화했으니 진정 괴물.
  • [21] 상대해 본 선수들이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눈, 어깨, 발, 무릎등 오만가지 부위로 일반인들은 느끼지도 못하게 아주 작은 모션페이크를 미친듯이 넣어서 순간적 균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반응조차 못한다고. 심지어 포스트업 상태에서 등으로도 페이크를 넣는다고 한다. 흠좀무 게다가 억지로 막으면 공중에 떠서 앤드원.
  • [22] 여담이지만 블랙캣 시절, 정확히는 선수생활 3,4년차때 시즌 평득 37.1-35.0을 찍으면서 2연속 득점왕을 차지하면서도 팀 성적이 1라운드 탈락-2라운드 탈락으로 끝나자 언론에서 '득점욕심만 있는 볼 호그'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그 다음 시즌인 88-89시즌에 역대 가장 위대한 시즌 퍼포먼스를 꼽으면 반드시 꼽히는 32-8-8 시즌을 만들어 냈다. 이 시즌 중에 7경기 연속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후, 8번째 경기에서 40-7-11을 기록하고 다시 세경기 연속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다. 시즌을 통으로 '내가 이래도 득점밖에 모른다고?'라고 시위한 셈.
  • [23] 수비왕이라는 상 상당수가 골밑을 지키는 파워포워드나 센터에게 가는 것을 생각하면 역대 공격력 1위 슈팅 가드가 수비왕을 수상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기적이다.
  • [24] 조던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지만 그가 아직 아기였을때 아이들을 조용한 곳에서 키우고 싶었던 그의 부모 (제임스, 들로리스 조던)는 윌밍턴으로 이사갔다. 조던은 같은 주의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으로 진학하기전까지 쭉 그곳에서 살았다.
  • [25]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Chapel Hill. UNC, 채플힐 또는 운동부 마스코트인 타힐스(Tar Heels)라고 한다.
  • [26] 바로 이 경기.#49초짜리 하이라이트 영상이다.조던이 크로스 오버 연타로 래리 버드를 농락하며 점퍼를 집어넣는 모습은 17초부터 나온다.
  • [27] 버드의 해당 코멘트가 비꼬는 말이거나 정신승리라는게 국내 농구팬들 사이에서는 마치 사실처럼 퍼지고 있는데, 정작 미국에서는 그런 시각이 전혀 없다. 참고로 당시 버드의 인터뷰 전문은 "마이클이 우리한테 한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그는 오늘 경기에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기가 막힌 선수였습니다. 그냥 신이 마이클 조던으로 변장한 것 같았습니다." 원문을 확인하고 싶으면 여기서 확인해보자. 앞뒤문장을 살펴봐도 비꼬는 발언이라고 하기 힘들다. 이런 엄청난 활약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이겼으니 결과적으로 자기 팀을 띄우는 발언이긴 하지만, 이 때 버드는 순수하게 조던의 엄청난 기량에 감탄하는 뉘앙스에 가까웠다. 참고로 이때 버드는 조던의 활약에 대해 얘기하면서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는데, 1년후 파이널에서 레이커스에 패하고 "매직은 내가 본 최고의 선수였다"고 할 때도 이렇게 고개를 흔들면서 인터뷰했다.
  • [28] 매일 200~800회의 스윙연습을 했다고 한다.
  • [29] 물론 이건 당시의 사태일뿐. 조던이 23번으로 복귀하고 더 이상 발매되지 않게된 45번 유니폼들은 이후 미친듯이 프리미엄이 붙었다. 지금은 구하기도 어렵고, 구하려면 가격대는...
  • [30] 여담이지만 이때 함께 공을 껴안고 있는 브라운이란 선수가 함께 공을 꽤 오래 잡고 있었는데, 상황을 파악하고 공을 놔줬다. 만약 놓지 않았다면 싱와 취급을 받을 뻔 했다...
  • [31] 그런데 훗날 조던의 트레이너였던 팀 글로버에 따르면 감기가 아니고 식중독이었다고 한다. 유타 원정을 떠나 유타 원정때 늘 이용하던 Park City라는 소도시의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밤에 배가 고파서 룸서비스를 시켰으나 9시가 지난 시각이라 룸서비스는 종료된 후였다. 그래서 야식으로 피자를 시켰는데 피자 한판 배달하는데 배달부가 다섯명이나 온 것도 이상하고 맛도 이상해서 버리자고 했는데 마사장님은 처묵처묵...
  • [32] three repeat를 줄여말한 말장난. NBA의 전설적인 감독 레드 아워백이 말한 후 NBA에서 주로 통용되는 말이다.
  • [33] 1분 20초부터 보면 된다.
  • [34] 확실히 저하된 것이 시카고 시절과 달리 수비를 달고 뛰는 점프슛이 상당히 늘어났다. 응? 단적으로 2차 복귀 이후로 이상하게 2단 점프슛을 자주 시도했는데, 그 이유가 스피드와 점프의 약화로 인해 한번에 다른 선수를 제낄 수 없어서(…). 빨리 높게 못 뛰면 두 번 뛰면 되지!
  • [35] 당시 나왔던 소인배복수
  • [36] 실제로 샬럿 밥캣츠의 훈련 영상이 떴는데 슈팅 게임에서 조던이 승리했다. 현역 선수들 지못미.
  • [37] 참고로 마이클 길크리스트는 그냥 듣보잡 수준 플레이어가 아니라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2픽으로 꼽힌 대형 유망주이다. 샬럿 밥캣츠의 차세대를 책임지는 선수. 이 때문에 팬들은 설령 조던이 이겼으면 이긴대로 빡쳤을 거라고(...) 이딴 놈이 우리 팀 유망주라니
  • [38] 사실 1대1농구는 체력소모가 3대3이나 풀코트 농구에 비해 훨씬 적기 때문에 늙은 조던이라도 이기는게 가능하다. 이때 조던은 260파운드에 달하던 체중을 현역시절에 가깝게 줄인 상태라 몸상태가 매우 좋았다. 또 5점내기같은 짧은 경기에서는 얼마든지 이변이 가능하다. 농구는 공격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슛하나 놓치고 "어? 어?"하는 사이 5점 정도 먹을 수 있다. 실제로 조던이 은퇴후 주최한 농구캠프에서 조던과 나이가 비슷한 일반인이 무리한 페이더웨이를 연속으로 성공시켜 3점 내기 1대1에서 조던을 이긴적이 있다. 하물며 한때 역대 최고수준의 기술을 자랑했던 조던이야... 조던을 상대한다는 긴장감, 약간의 운이 따르면 충분히 있을법한 얘기다.
  • [39] 시카고 불스와 조던의 계약은 프로구단 역사에 유례가 없을 노예계약이다. 이때문에 그는 연봉에 대한 불만이 꽤나 많았으며 농구화 판매등의 가외활동을 엄청나게 많이 했다. 정확히 말해 노예계약까지는 아니었으나, 계약 당시에는 연봉이 고액에 속했지만 90년대 초반 엄청난 연봉의 상향이 이뤄지면서 기존의 장기계약자들이 본의 아니게 노예계약이 되어버린 것. 사실 당시 연봉 인플레는 이후 너무 극심해서 개나소나 1000만이라는 분위기였다. 대표적인 것이 워싱턴 불리츠의 주원 하워드. 그리고 조던보다 더 피를 본 것이 다름아닌 피펜이다.
  • [40] 사실 이때 연설에서 조던이 한말은 유머를 겻들인 비아냥, 즉 평상시에 하던 트래쉬토킹에 가까웠다. 악의가 있다기보던 상대방의 자존심을 가볍게 긁는 농담에 가까운것. 위에도 나와있지만 조던의 트래쉬토킹은 인격모독보더 살살 약올리는 수준이고 따라서 트래쉬토커로서 조던의 악명을 알던 많은 nba팬들과 같이 뛴 선수들은 "michael being michael"로 받아들였다. 물론 공식석상, 그것도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그런 가벼운 태도로 말하는게 적합했냐는 문제가 있다. 특히 조던은 현역시절 이미지메이킹에 철저한 편이었기 때문에 더욱 괴리감이 느껴졌을 것.
  • [41] 일각에서는 빅맨들의 플레이가 차츰 포스트업이 아닌 페이스업 위주로 변화한 것조차 조던의 영향을 받은 세대들의 등장 때문이라고 주장할 정도. 흠좀무.
  • [42] 핸드체킹룰의 변화 또한 그의 간접적 영향. 빅맨 중심의 농구라면 지향할 수 없었던 룰의 변화는 조던의 은퇴후 조던과 같은 스타를 양성하기 위해 상대적인 이득을 스윙맨에게 부여함으로써 경기의 재미를 극대화하고자 했던 NBA의 노림수였다.
  • [43] 그러나 정작 이 룰은 조던의 1차은퇴 후 도입되었다. 물론 이후이는 복귀한 조던이 예전보다 하락한 운동능력에도 nba를 지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다만 현재 "수비수가 공격수에게 손도 못 대는(공격진행방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먄 댈수 있다. 밀면 안되는것) 심한 핸드체킹룰은 2004-05년에 도입되었다. 이로 인해 그 다음 시즌, 무려 득점 상위5걸 중 4명이 커리어하이를 기록하는 득점 인플레가 일어나기도. 이 중 앨런 아이버슨은 전성기가 지났고 평균 20점을 넣는 크리스 웨버가 합류했음에도 3점 가까이 올랐다. 또한 이들은 모두 그 다음 시즌, 팀내 상황이나 기량에 큰 변화가 없었음에도 득점이 크게 하락했다. 르브론과 코비는 각각 4,5점씩이나... 이는 핸드체킹룰 변화에 익숙치 못한 수비수들이 초기에 대응을 못했다가 이에 익숙해진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하다.
  • [44] 2012년에 드림팀 결성 20주년을 기념으로 nba tv에서 제작한 "The Dream Team"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드러난 내용이다. 당시 FIBA에서 "다른 나라의 프로들은 아마추어로 분류되어 올림픽 참가가 가능했다"며 모든 나라의 프로팀이 올림칙에 나갈수 있다는 룰 개정안을 통과시킨다. 이에 미국은 팀을 결성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u.s. basketball committee 소속이자 NBA VP를 지낸 로드 쏜이 처음 연락한 멤버가 조던이었다. 그러나 조던은 이미 금메달도 있는데다가 "올림픽에 나가 혼자 고생하긴 싫다"며 다른 정상급 선수들의 참여여부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했고 이에 따라 매직 존슨, 래리 버드, 칼 말론 등 당대 최고 스타들로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던이 선수촌 입소못한 걸 아쉬워했는지 여부는 다큐멘터리에 나오지 않으나 조던이 거의 매일 척 데일리 드림팀 감독과 골프를 치며 친해졌다는 내용은 나온다.과연 친목왕 척 데일리 또한 골프치고, 연습하고, 밤새 카드치고, 잠깐 눈붙히고, 경기하고를 반복하자 동료들이 그의 괴물같은 체력에 놀라며 질려하는 모습이 나온다.
  • [45] 본인이 출연한 그 영화의 게임 버전.
  • [46] 스페이스 잼 게임에는 각 캐릭터마다 필살기가 존재했는데 조던은 외곽지역에서 팔이 쑥 길어지면서 덩크하는 모션이 필살기였다...
  • [47] 실사 디지타이징을 사용한 그래픽은 뛰어났지만, 너무 과하게 시뮬레이션을 추구했다는 평을 받아 흥행은 별로 좋지 않았다
  • [48] 콰미랑은 좀 다른 것이, 콰미는 정말 포텐봤다 망한 거지만, 애덤 모리슨은 지병이 있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뽑은 것이다. 물론 이런 애를 3픽으로 뽑은 것 자체가 뻘짓이란 건 다를 바 없지만, 최소한 애덤 모리슨은 대학 무대를 주름잡았던 선수였다. 그리고 사실 콰미는 하필 워싱턴이 1픽으로 뽑아서 그렇지, 당시 스카우팅 리포트와 워크아웃 결과에 따르면 리틀 가넷이나 크리스 웨버에 비견되었다(...) 당시 1~4픽 안에 고졸 루키인 타이슨 챈들러, 에디 커리가 싹 다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콰미는 어차피 최소 3픽안에는 뽑힐 것이었다. 뭐 레전설이 된거야 어쩔 수 없지만.
  • [49] 사실 이건 좀 말이 안되는 것이, 이 정도 건이라면 그건 상품성과 무관하게 언젠가 터져버릴 시한폭탄과 같은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대로 안고 갈래야 갈 수가 없다. 게다가 버리지 않고 상품성을 보존한답시고 징계대신 다른 스포츠, 그것도 프로에 도전하게 내버려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몸이 완전 망가질지도 모르는데? 그나마 조던이라 2년동안 이런 뻘짓을 하고도 농구하는 게 가능했던 것 뿐이다. 실제로는 이건 거의 미친 짓이고, 은퇴 후 몇년을 딴 짓하다 복귀해서 여전한 지배력을 보여주며 성공한 사례는 그만이 유일하다.
  • [50] 일부 농구팬들은 마치 야구하다오는게 쉬다오는 것인양 "부상 때문에 오랫동안 쉬어서 선수생활을 길게 한 그랜트 힐처럼 조던도 야구하다 와서 신체에 무리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라고 하는데, 야구는 어께와 무릎에 가장 무리를 주는 스포츠중 하나다.(http://sportsmedicine.about.com/od/baseballinjuries/a/baseballinjury.htm) 이 글은 야구와 소프트볼에서 흔한 부상에 대한 글인데, 무릎 인대손상, 과도한 무릎사용으로 인한 건염 등에 대해 나와있다. 야구선수들의 선수생명이 농구나 축구보다 길어서 야구가 신체부담이 적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체력소모가 덜한거지 모든 프로스포츠는 몸을 갉어먹는 직업이다. 게다가 당시 조던은 야구선수로 성장하기 위해 강훈련을 거듭했고, 그 결과 더블A급에서도 통할법한 기량을 갖추는데 성공했다. 물론 준수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30대 초반인 남자가 고등학교 이후 10년 넘게 하지 않았던 야구, 그것도 프로야구에 도전한다는 걸 감안해보자. 게다가 농구와 야구는 쓰는 근육도 다른데 농구에 십수년간 맞춰진 몸을 야구에 적합하게 바꿔야 했다. 그리고 농구로 복귀한 이후에도 이런 몸만들기 과정을 거쳐야했다. 30대 초반이... 그 과정에서 부상당할 위험도 농후했는데 이건 완전히 말도 안되는 짓.
  • [51] 조던은 98년 은퇴당시 5억달러였던 재산을 2014년 기준으로 10억달러까지 불렸다. 조던이 도박빚에 시달릴 정도로 재산관리를 못하는 사람이었으면 벌써 파산했어야 정상이라는 논거인데, 실제로 연봉으로만 2억달러를 번 아이버슨을 포함해 상당수 NBA 선수들이 은퇴후 재산관리를 못해서 파산한다. 즉, 실제로 조던이 도박중독이었으면 아무리 재산이 많아봤자 지금쯤 다 날렸을 것이다. 더군다나 경기결과를 놓고 도박을 했다면, NBA가 아무리 덮으려고 해도 도박사들로부터 정보가 흘러나갈 수 밖에 없다. MLB 레전드 피트 로즈 역시 이런식으로 불법도박이 탄로나 영구제명당했다. NBA 사무국이 빅브라더 수준의 자금과 영향력을 가진 조직도 아니고 이 정도 규모의 스캔들을 덮는건 불가능하다. 실제로 조던이 경기에 돈을 걸었다면 20년동안 들통이 안 날리 없다. (실제로 로즈의 경우 1987년에 경기결과를 놓고 베팅을 했는데, 2년만에 걸렸다) 그리고 만약 조던이 승부조작을 했으면 들통나는 즉시 스포츠 세계에서 매장당할텐데 아무리 리그를 주름잡는 최고의 기량을 뽐내는 스타 선수더라도 이 정도로 큰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선수를 NBA가 간판 선수로 홍보할 리가 없다. 조던이 도박을 즐기고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그 문제가 심각했던 건 엄연히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버지 살해건을 연결시키는 건 현재로선 뚜렷한 근거가 없기때문에 어디까지나 가십성 음모론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런 식의 기사는 주류 언론에서는 다루지도 않으며 가십성 인터넷 언론에서나 나오는 얘기다. 이런 매체들의 신뢰도는 그야말로 찌라서 수준. 엘비스 프리슬리가 살아있다는 음모론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심지어 NBA 사무국이 조던의 아버지를 청부살해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기도 하는데 NBA 사무국이 이 정도 사건을 저지르고 묻어버릴 정도로 파워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NBA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있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는 꼴. 참고로 NBA 사무국의 최정점에 있는 총재의 연봉이 800만달러로, NBA 선수중에서는 평균(5~600만)보다 약간 많고, 스타팅 멤버급의 선수의 연봉도 되지 못한다. NBA는 구단주들의 돈으로 돌아가는 리그다. 그리고 돈줄을 쥐고 있는 이들이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현대 사회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진리이다. NBA 총재는 리그가 잘 돌아가기 위해 구단주들이 뽑은 월급쟁이 사장이지 결코 절대권력자가 아니다.
  • [52] 플레이보이 1992년 5월호 인터뷰 중.
  • [53]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가 조던으로 인해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비단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뿐만 아니라 조던 시대에 스포츠 미디어는 웬만하면 흥했다.
  • [54] 한 예로 토니 파커와 에바 롱고리아가 사귈때, 파커는 올스타급 선수고 롱고리아는 나름 인기가 많지만 연예계에서 정상급 스타는 아니었음에도 주목도는 롱고리아가 훨씬 높았다.
  • [55] 이 두 선수는 조던 이후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린 선수인데 커리어를 통틀어 이 리스트에서 조던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한게 각각 한번씩 뿐이다. 르브론은 아직 커리어가 남았으니 그렇다고 쳐도 코비는 커리어가 거의 끝난데다 2010년 1위 이후 계속 순위가 하락세인걸 보면 더 올라가긴 힘들 듯.
  • [56] 미국에서 공식문서를 쓸때 제외하면 미들네임을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미들네임을 서로 모르는 경우도 많을 정도.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11 00:47:28
Processing time 0.4797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