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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 가든 작전

last modified: 2015-12-06 15:05:53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작전의 배경
3. 공세 초기
4. 머나먼 다리
5. 결과
6. 패배의 희생양
7. 패배 원인 분석
7.1. 느린 속도
7.2. 빈약한 통신망
7.3. 적정 무시와 독일군 지휘관들의 역량
7.4. 연합군의 안일한 인사
8. 대중문화
9. 기타



국방일보에 소개된 연합군의 진격로.

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유럽전선에서 있었던 연합군의 네덜란드 수복 작전. 전쟁을 크리스마스 이전에 끝내겠다던 연합군의 오만이 낳은 참극.
노르망디에서 날려먹은 사단 재투입한 독일 vs 오만한 연합군의 병림픽

작전과 작전이 동시에 진행됐기 때문에 두 작전 명칭을 합쳐 마켓 가든 작전이라 부른다. 독일군은 1944년 크리스마스 전에는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하고 있던 연합군 수뇌부의 예측을 무산시키며 휘르트겐 숲 전투와 함께 서부전선의 기적(Miracle In The West)이라 전사에 기록된 독일군 방어전의 서막이 되었다.

2. 작전의 배경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연합군파리를 비롯한 프랑스 각지를 나치스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나가고 있었다. 독일군프랑스에서 물러나게 되자 나치 독일 사령부는 명령을 내려 프랑스 북부의 주요 항구들을 끈질기게 사수[1]하거나 개박살내버렸고, 그 결과 마켓 가든 작전이 시행되기 직전 시점에서 연합군이 대규모 물자를 하역할 수 있는 지역은 노르망디만이 유일했다.

물론 프랑스 전역에선 독일군의 그 짓거리가 연합군에게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라인강을 넘어 독일 영토를 향해 진격하면서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보급선이 너무 길어지고 있었던 것. 특히 1944년 늦여름에 접어들자 노르망디에서 하역한 물자를 전선으로 수송하는 동안 보급부대가 훨씬 더 많은 물자를 소모해버리는 웃지못할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탱크 뿐만이 아니라 보급차량도 일단은 석유로 굴러가니 당연히 생길 수 밖에 없었던 문제였다. 그래서 탄약이나 식료품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보급차량이 소모하는 연료는 연합군 수뇌부에게도 큰 골치거리였다. 결국 보급 능력이 한계에 부딪히자 연합군의 진격은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영국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는 휴식과 재정비를 마친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네덜란드 지역의 주요 교량들을 점거하고, 이에 호응하여 대기중인 지상군이 진격을 시작해 독일군의 라인강 방어선을 돌파하는 작전을 제안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개발살난 독일군이 상당히 약체화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에 연합군은 이 작전안을 수용하고, 9월 17일 일요일을 작전 개시일로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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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하하는 연합군 공수부대.

3. 공세 초기

9월 17일이 되자 이른바 "마켓 작전"에 따라 연합군은 대규모 공수부대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미국제101공수사단 "울부짖는 독수리"가 먼저 에인트호번에 투입되었고, 이어서 미국의 82공수사단 "올 아메리칸"이 네이메헌, 영국의 제1공수사단 "레드 데블스"가 아른헴에 투입되었다.

문제는 이 지역에 있던 독일군이 혼란을 수습한 후 점점 강화되면서 연합군의 생각만큼 약체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전차를 비롯한 중장비를 보유하여 아무리 정예병력이더라도 고작 소총, 주카포, 수류탄 정도로 무장한 공수부대 따위는 상대하고도 남을 전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독일군 공수부대 지휘관 쿠르트 슈투덴트가 B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원수의 명령으로 아른헴 방면에 주둔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발터 모델 자신이 "총통의 소방수", 방어의 사자로 불리며 동부전선에서 이름을 날린 최강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네덜란드 방면에서의 연합군 공세를 예측하고 B집단군 사령부를 아른헴 근교로 이전해 있는 상황이었으나 연합군은 사전에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작전 당일, B집단군 사령부 2km 내에 영국군 공수부대가 강하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코넬리우스 라이언의 논픽션에서는 당시의 발터 모델이 허둥지둥하며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 영국군 공수부대 출신의 저자가 당시 참전 용사들을 인터뷰한 <It Never Snows in September>에 의하면 영국군이 B집단군 사령부를 점거하였을 때 군사용 지도 한 장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철두철미하게 비상 상황에 대처하여 사령부를 이전시켰다고 한다.

에인트호번에 강하한 101공수사단은 가장 근접한 교량은 성공적으로 확보하였지만, 다른 교량은 독일군이 먼저 점령하고 폭파시키는 바람에 초장부터 삐끗거리고 있었다. 네이메헌에 강하한 82공수사단은 독일군이 선수치는 바람에 교량은 하나도 탈취하지 못하고 대치상태에 돌입했다.

게다가 아른헴에 강하한 영국의 제1공수사단은 일단 아른헴 대교의 입구를 장악하면서 독일군의 추가병력 투입은 저지하는데 성공했지만 교량을 완전히 점거하지는 못했으며 무엇보다 주변에는 SS 9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 SS 10기갑사단 프룬츠베르크가 배치되어 있었다.

사실 당시 배치된 독일군중에 SS 9기갑사단은 SS 10기갑사단에다가 장비를 넘기고 재편성하러 후방으로 가던중이라서 긁어모아도 연대규모밖에 되지 않았고 SS 10기갑사단도 장비를 받았어도 팔레즈 포켓에서 워낙 박살이 나서 일반 보병사단 수준에도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경무장 보병인 공수부대로서는 전차를 가진 독일군을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동부전선에서 온갖 전투를 치른 노련한 군인들이었던 만큼 당황하지 않고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아른헴 대교. 마켓 가든 작전 이후 폭격으로 다리는 파괴된다.)

4. 머나먼 다리

한편 이에 호응하여 진격 중이던 영국 30군단의 "가든 작전"도 초창부터 삐끗거리고 있었는데 예정대로라면 첫날 101공수부대가 있는 에인트호번까지 진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문제는 우회로도 없는 단 하나의 도로를 노리고 중간에 매복한 독일군 대전차포들이 활약하면서 예정보다 훨씬 늦은 9월 18일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독일군이 교량 하나를 날려버린 까닭에 임시교량을 준비하느라 발목이 잡혔다. 결국 9월 18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던 네이메헌에는 9월 19일이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고 여기는 독일군이 교량을 점령하고 버티고 있었던 까닭에 또 발목이 잡혔다. 결국 82공수사단이 30군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보트로 반대쪽에 상륙하여 독일군을 몰아붙인 끝에 교량을 탈취하였지만 독일군 역시 맹렬하게 반격한 까닭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후였다.[2] 특히 9월 20일까지 가든 작전을 마치기로 했는데 이 시점에서 작전은 이미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한편 영국 제1공수사단은 목숨을 걸고 독일군의 장갑차량들을 무력화시키면서 아른헴 대교 입구를 사수하고 있었으나 작전 계획이 제대로 틀어진데다가 지속적인 독일군의 포격에 대부분의 전투부대가 박살이 나버려서 매우 비관적인 상황이었다. 연합군은 교두보를 강화하기 위하여 9월 21일 자유 폴란드 공수여단을 투입하였지만 투입시기도 늦고, 착륙지점도 전투를 벌이며 격전지로 가기에는 거리가 있었고 전황을 뒤엎을 수 있는 전력은 아니었기 때문에 영국군과 똑같이 따로 포위당해 비관적인 상황에 빠졌다. 결국 9월 25일 더 이상 버텨봤자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연합군은 작전을 중지, 진격하던 30군단은 그자리에 멈추고, 영국 공수부대와 폴란드 공수부대의 얼마 남지 않은 잔존병력은 라인강 너머로 간신히 철수하였다.

영국군 공수사단의 피해가 커서 1만명의 강하병력중 약 2,000명의 탈출부대원만 남고 전멸했다.[3] 이로서 영국 공수부대는 전력이 거의 없어졌다.

5. 결과

"이 전투에서 용전을 펼친 모든 장교와 병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1944년 9월 27일, 발터 모델 원수가 서부전선 총사령부를 통해 휘하 장병들에게 전달한 메시지

"지금 적군은 비교적 안정적이고 응집력 있는 전선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1944년 9월 29일, 아이젠하워 사령관이 연합군 참모진들에게 보낸 서한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마켓 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은 8,000여명이 사상, 또는 포로로 잡힌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연합군은 17,000명 가량이 전사, 부상, 또는 포로로 잡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 작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군을 몰아붙이고 있던 연합군에게는 뼈아픈 작전 실패였으며 그 결과 연합군의 라인강 돌파는 훨씬 더 뒤인 1945년 봄으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질 것 같아 전선에서 활약한 병사들을 잠시 후방으로 돌려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하지만 연내 종전은 물건너 갔어도 독일군은 이미 졌고 전의나 사기도 떨어진 상황이라 도발을 하더라도 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 오판한 결과 아르덴 지역에 휴양하던 부대까지 합쳐서 4개 사단, 실제 가용병력으로 따지자면 겨우 1개 사단에게 수비를 맡기는 바람에 아르덴 대공세가 시작되자 초반에 줄줄히 털리는 불상사가 빚어지기도 했다.

9월에 서부전선의 독일군 G집단군 참모장으로 임명된 프리드리히 폰 멜렌틴 소장은 회고록에서 '아른헴 전투에서의 승리로 많은 혼란이 종식될 수 있었다.'라며 독일군의 승리가 준 거대한 전략적 효과를 언급했다. 이는 스티븐 앰브로스의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가을부터 독일군은 매우 짜임새 있는 반격을 주도하며 각급부대를 후방으로 집결시켜 재무장, 재조정한 후 밀착방어선을 형성하였다.'며 간접적으로 나타나 있고, 아이젠하워가 가족에게 쓴 편지에도 이러한 독일군의 조직적으로 정비된 저항에 대하여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이 있다.

다만 국내에서는 전술적 부분에서 이 작전의 실패를 다소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있어 연합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독일군에게 패배하여 퇴각한 전투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히는 "큰 희생을 치러가며 상당한 거리를 진격하긴 했으나 가장 중요한 작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된 전투"이고, 연합군은 일부 돌출지역을 제외하고는 퇴각하지는 않았다. 이 작전 직후 얻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80km의 도로와 북해 사이의 스헬데 강 삼각주 지역을 확보하여 안트베르펀 항구를 주요 보급로로 사용하기 위한[4] 스헬데 강 하구 전투가 있었으니까... 다만 이 전투는 네덜란드 빼고는 2차 세계 대전 전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다.

몽고메리가 자기 변호를 위해 90% 성공한 작전이라고 발언하자 이에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의 남편 베른하르트 공이 "우리나라는 당신네들이 한번 더 성공해도 될 만큼 부유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비꼰 일화가 유명하다. 후에 몽고메리는 어느 정도 책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는 듯 했지만, 그러면서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를 비판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사실, 아이젠하워도 최종 결정자로서 작전을 승인하고 자신의 입으로 마켓 가든 작전이 현재 가장 뛰어난 작전이라고 평가하며 종전 후에도 '당시엔 마켓 가든 작전이 필요했으며 최선의 선택이었다.'라고 변호하는 등 비판을 받을 여지는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젠하워는 패전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지만 몽고메리는 그렇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몽고메리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과 인성에 대한 평가가 동시에 하락하게 된다. 밑에 서술된 것처럼 책임을 엉뚱한 이에게 떠넘긴 시점에서 이미 인성면에서의 비판은 받아 마땅하다.

참고로 아른햄은 1945년 4월 캐나다 제1군단에 의해 해방되었다.

6. 패배의 희생양

자유 폴란드군 공수부대 지휘관 스타니슬라프 소사보흐스키만은 처음부터 그 작전을 무모한 자살행위라 생각하며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참모들에게 “영국놈들은 독일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거야.”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하지만 결국 폴란드 공수부대는 독일군의 살인적인 포화를 뚫고 라인강 건너편 드릴에 낙하하였고 퇴각 명령이 내려진 이후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여, 포위당한 영국군의 탈출로를 열어주는 데 성공하였다. 격전을 치르면서 아른헴에서 폴란드 제1독립공수여단은 작전 실패 이후 1,000여 명에 이르는 투입병력의 40-60%(411-590명)가 증발해야만 했다.[5] 이러한 공적을 세웠음에도 마켓 가든 작전의 패배에 대한 책임은 정작 브라우닝과 몽고메리를 대신하여 소사보흐스키가 뒤집어쓰게 되었다.

1944년 10월 17일, 몽고메리는 영국군 참모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폴란드 공수부대를 비판하며 소사보흐스키를 전출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어서 브라우닝 또한 참모차장인 로널드 윅스 중장에게 폴란드 공수부대의 역량에 의구심을 표현하며 '이 장교(소사보흐스키)는 위기 상황에서 무력한 대처능력을 보여주었고 논란을 일으키며 맡은 바 임무들을 능동적으로 수행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였는데 현재 35년째 영국군 공수부대에서 근무 중인 마이크 러셀 대령은 2012년, <Polski Bohater(Polish Hero)>에서 이러한 몽고메리와 브라우닝의 행적에 대하여 패전의 비난을 소사보흐스키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라 평가하였다.

결국 1944년 12월 26일, 소사보흐스키 장군은 폴란드 공수여단장에서 물러났는데 모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소장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한직에만 머물렀고 33년의 군 경력을 마감하고 1948년 퇴역할 당시 300파운드의 퇴직금뿐 연금조차 받지 못하였다. 소사보흐스키 장군은 75살까지 영국의 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였고 76세의 일기로 삶을 마감하였다. 그의 아들이 화장된 아버지의 유해를 고향 바르샤바로 가지고 돌아간다.

그러나 폴란드 공수부대의 구출을 받아 생환한 영국군 공수부대원들과 네덜란드인들은 소사보흐스키의 희생을 결코 잊지 않았다. 사후 네덜란드에서는 영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소사보흐스키에게 청동사자장을 추서하였고 2006년, 폴란드 공수부대가 착륙한 지점에 기념비를 제막하여 그들의 공적을 기렸다. 2012년, Polish Heritage Society UK의 지원을 받아 영화 <Arnhem - A Debt of Dishonour>가 제작되었고 영국군 공수부대 장교들 또한 이에 협조하였다.

7. 패배 원인 분석


(지그프리트 선을 넘어 진격하는 연합군)

7.1. 느린 속도

"이건 실 한가닥으로 바늘귀 7개를 단번에 꿰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금만 늦거나 한개만 실패해도 모든 것이 실패한다."[6]

작전 이후 여러 보고서가 만들어졌으며 그중 연합군을 성공적으로 방해한 독일군 제1공수군(이름은 야전군이지만 실제 전력은 훨씬 낮았다)의 지휘관 쿠르트 슈투덴트는 공수작전인 "마켓"의 내용 자체는 뛰어났다고 평가했지만 영국 30군단의 느린 진군 속도가 자멸을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그에 반해 당시 82공수사단장 게빈 준장은 30군단장 호록스 중장을 이제껏 봐왔던 지휘관들 중에 제일 현명했다고 평했다.

사실 아른헴까지의 100km는 우회로도 없고 주변에 엄폐물도 없는 단 하나의 도로, 그것도 운하를 따라 형성된 국도로만 가야 했으므로 독일군의 필사적인 저항에 느린 속도는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연합군 수뇌부가 독일군이 이미 졌고 싸울 마음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실제 방공포병들이 연합군 폭격기가 나타나자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 경우도 있으므로 연합군의 분석이 틀렸다고 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아른헴에서 쉬고 있었던 부대는 제대로 된 중장비조차 없는 보병 여단 수준이라는 평가를 들었어도 정예 무장 친위대(Waffen-SS) 소속 부대로서 지휘관인 빌헬름 비트리히는 동부전선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은 유능한 기갑 지휘관일 뿐 아니라 독일군 전투 지역 경계에서 영국군 야전병원 설치를 용인함으로서 연합군과 독일군의 피해를 모두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성도 갖춘 인물이었다.[7]

독일 공군은 연합군의 패인을 공수를 3일에 걸쳐서 계획한 것으로 꼽았다. 사실 3일에 걸쳐 계획한 까닭에 2일째부터는 안개가 끼는 바람에 작전에 엄청난 차질이 빚어졌다. 2일째 도착하기로 했던 폴란드 1공수여단이 수일이 지나서야 도착했던 것이다. 상황은 다른 공수부대들도 마찬가지였으나 예비 전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1공수사단이 더욱 급박했다.

7.2. 빈약한 통신망

제1연합공수군의 부사령관이자 마켓 가든 작전에서 공수부대를 야전에서 지휘한 프리드릭 A.M. 브라우닝 중장은 패인을 통신체계의 미흡함과 날씨로 꼽았다. 실제로 영국 1공수사단은 통신이 먹통이었는데 브라우닝 중장은 강건너 82공수사단과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를 야기했다. 이 문제는 무전기의 전파발진 수정판을 잘못된 것으로 챙겨오는 바람에 빚어진 사태였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영국본토와의 연결은 성공시켜서 결국 영국본토를 경유하여 상급제대와 연락을 할 수 있었다고. 이 문제로 1공수사단 내에서는 물론이고 작전 첫 24시간 동안 브라우닝은 1공수사단이 안전하게 도착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이러한 연락 체계는 브라우닝 자신의 잘못이 큰데, 작전 전에 1연합공수군이 창설되고 휘하에 자신의 1영국공수군단이 창설되자 원래의 자신의 영국공수군 사령부를 1공수군단 사령부로 바꾸면서 다른 부대와 연락체계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수뇌부도 마찬가지여서 아이젠하워의 SHAEF 총사령부는 아직도 노르망디의 그랑빌에 있어서 몽고메리나 브래들리와의 교신엔 3일이 걸리는 처지였다. 이 연락 병크는 거의 다 죽었던 독일 공군이 마켓 가든 전역에서는 우위를 차지하게 만든다. 이유는 공군과의 연락 부족으로 공군은 스케줄대로 출격한 뒤 그대로 독일 폭격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이 병크 때문에 공수부대에 보급품을 투하하는 수송기들은 거의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지 못해서 수많은 보급물자를 다른곳에 떨어뜨리거나 격추되어 손실하는 막장짓을 저지르게 된다. 예로 1공수사단의 보급품 회수율은 잘해봐야 10%를 넘지 못했다.

그럼에도 영국 공수부대가 고립된 상황에서도 워낙 결사적으로 항전한 탓에 독일군도 9일이 지나기까지 확실하게 밀어버리지는 못했다. 당시 독일군 지휘관 발터 모델은 이러한 영국군의 용전에 나름 감명받아 참모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개인적으로 항복 의사를 타전하나 프로스트 중령이 "미안하군, 귀관들을 전범으로 수용할 공간이 부족해서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명대사를 전했다는 것이 유명하다. 다리 옆에 마련한 영국군 전투 지휘소가 폭격을 당해 부상병으로 넘쳐나자 양측의 위생병들이 전투를 잠시 중지하기로 합의하고, 독일군도 영국군을 도와 화염에 휩싸인 사령부 건물에서 부상병들을 구출한 뒤 전투를 재개했다는 것 또한 실화이다.

7.3. 적정 무시와 독일군 지휘관들의 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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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 18일, 제2 SS기갑군 사령부에서 발터 모델)

일반적으로 기갑 부대가 존재한다는 징후를 무시하고, 이를 지적하는 정보장교를 다른 곳으로 전출시키는 등 정보 분석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는데, 일례를 들자면 연합군은 이미 마켓 가든 전역의 독일군을 최대 15,000명의 보병과 250대의 전차로 추산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공수부대를 투입한 것은 제일 깊숙히 있는 1공수사단이 길어야 5일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었고, 또 전차 자체도 특히 시가전에서는 무적이 아니다. 프로스트 중령의 대대가 압도적인 독일군을 상대로 고립되어서도 4일간이나 죽을 힘을 다해 버텼던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른헴 주둔 독일군은 3,000여명의 보병과 몇대의 전차로 브라우닝의 추산과 일치했다.

문제는 몽고메리 원수가 오랜만에 펼치는 회심의 진격을 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연합군 수뇌부의 인식과 마침 해당 지역에 동부전선의 수호자, 방어의 귀재, 반격의 천재라 불리는 발터 모델 원수가 B집단군으로 와 있었다는 것이다.

14시에 영국군의 강하를 육안으로 목격한 발터 모델이 B집단군 사령부를 이동시켜 제2 SS기갑군의 빌헬름 비트리히 사령부에 도착한 시간이 15시, 연합군의 작전 목표를 파악하여 최초의 방어 작전이 개시한 시각이 17시 30분이다. 모델은 네덜란드의 모든 부대와 준군사조직, SS보급대대, SS하사관학교, 네덜란드 SS경찰대대, 헤르만 괴링사단 보충대대, 루프트바페 고사포 부대, 해군 대원들도 동원하여 방어 작전을 수립하였고 이러한 엷은 방어선은 효과적으로 영국군 공수부대의 아른헴 다리로의 접근을 차단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군에게 포로가 된 독일군 47명은 무려 27개의 다른 부대 소속이었다고 한다.

모델의 주특기가 도망치는 아군을 수습해서 반격을 가하는 것이었고 비트리히가 동부 전선에서 발터 모델의 지휘를 받은 경험이 있었기에 SS기갑부대가 효과적으로 지휘 체계에 편입된 것, 특히 모델과 비트리히는 제1차 르제프 전투 당시 3면이 포위된 독일군 9군을 완전 포위하기 위해 후방에 투입된 소련군 공수부대를 오히려 역으로 포위하여 섬멸해버린 경험이 있었다는 것, 그에 더하여 2차대전 최고의 공수부대 지휘관으로 손꼽히는 쿠르트 슈투덴트의 존재도 독일군에게 실로 행운의 인사였다. 그야말로 對 공수부대 전투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셈이니.

더군다나 작전기간 동안 네덜란드와 벨기에 북부에 주둔하던 독일군은 기본적으로 북동프랑스 연안과 베네룩스 3국의 연안을 방어하는 제15군으로 이 야전군은 독일군이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지로 유력시하던 칼레 등이 관할지였다. 당연히 야전군의 후퇴 및 고립 등으로 전투력이 줄긴 했어도 작전 개시 시점까지 전투력을 상당부분 온존한 편이었다.

후일 발터 하르처 SS중령은 ""마켓가든 작전에서 독일군의 승리가 자랑스러운 것은 2류 부대를 동원하여 연합군 정예부대를 막아냈기 때문."이라고 회고한 것을 보면 이들 독일군 지휘관들의 역량이 연합군을 압도했음을 알 수 있다. 폰 멜렌틴 소장은 '모델 원수는 노르망디 작전 이후 피투성이가 된 부대를 잘 수습하여 아른헴을 방어해냈다.'고 회고록 <Panzer Battles>에 기록하였다.

Osprey 시리즈 또한 발터 모델을 승리자로 정의하였다. 9월 초에 이미 네덜란드 방면 공세를 예측하고 부대를 효과적으로 주둔시킨 전략적 시야와 기습 작전 3시간 만에 반격 작전을 수립하여 '강하 작전이 주는 기습적 효과'를 무산시킨 전술적 임기응변 능력, 작전 기간 내내 최전선에 직접 임하여 전투 상황을 파악하고 공군 폭격을 위시한 적절한 증원 분대 운용을 가능하게 한 지휘 능력이 '노르망디 작전 이후 최초의 독일군 승리'를 이룩한 것이라고 평했다

7.4. 연합군의 안일한 인사

“영국군이 그곳에 낙하했습니다. 하지만 우왕좌왕했습니다. 무전기는 작동하지 않고 계획도 틀어졌으니까요. 영국군은 임기응변 능력도 없었습니다. 용감하게 싸우긴 했습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노련한 군인들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 빈리히 베어 소령, 당시 B집단군 사령부 정찰 장교

모델, 비트리히, 슈투덴트를 위시한 역전의 독일군 지휘관들에 비교하면 연합군 지휘관들은 실전 경험이 너무 부족했다. 영국 1공수사단의 사단장 어퀴하트는 전에 전혀 공수부대를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다. 부하들은 이 사단장을 상당히 신뢰했고 실제로도 괜찮은 지휘관이었지만 공수부대의 전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초기의 계획인 10km 쯤 진격해서 아른헴 다리를 점령한다는 계획은 독일군의 저항이 아예 없을 때나 가능한 얘기였고 실제로 독일군에 막혀서 본대는 아른헴 다리를 볼 수 있는 거리까지도 가지 못했다. 또한 다른 지휘관을 찾으러 간다고 했다가 독일군에게 포위를 당해서 수 시간 동안 1공수사단은 지휘관 공백 상태에 놓였다.

브라우닝장군 역시 공수부대를 지휘한 경력은 부족한 점이 휘하의 82사단장 게빈에게 비판받았다.

빈리히 베어는 전투 경험이 많은 미국 공수부대원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위치에 낙하하고 오히려 전투 경험이 일천한 영국 1공수사단원들이 작전 최대 목표 지역에 가깝게 투입된 것 또한 실패의 요인이었다고 대답했다. 또한 마켓가든 작전이 사전에 누설되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며, 독일군 사령부는 전혀 그런 정보를 받지 못했다고 한다.


(101공수부대원과 네덜란드 레지스탕트)

8. 대중문화

상영시간 176분 대작인 《머나먼 다리》 <A Bridge Too Far>는 바로 이 작전을 영화한 것이다. 코닐리어스 라이언의 논픽션 원작 <A Bridge Too Far>는 특히 독일군 관점에서 보면 픽션에 가까울 만큼 오류가 있는데 이러한 내용 또한 그대로 시나리오에 반영되면서 전사학자들이 비판하기도 했지만 영화 자체로서의 완성도는 무척이나 훌륭하며 당대 명배우들이 집결하여 연합군 중요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관객들의 몰입갑을 한껏 높여주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 숀 코너리(로이 어커트) - 영국 1공수사단 사단장
  • 앤서니 홉킨스(존 프로스트)- 영국 1공수사단 1대대장
  • 드워드 폭스(브라이언 호록스) - 영국 30군단장
  • 이언 오닐(모리스 개빈) - 미 82공수사단장
  • 로버트 레드퍼드 - 82공수사단 3대대장
  • 진 해크먼(스타니슬라우 소사보스키)- 폴란드 독립공수여단장

밴드 오브 브라더스》 4화에서 주인공과 그 부대가 에인트호번을 점령하여 진격하였다가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에 결국 물러난다.

9. 기타

마켓 가든 작전 당시 영국 제1공수사단 병사는 정찰하던 비무장 독일 장교를 생포하지만 독일 장교가 자기를 풀어주면 여동생과 중매해주겠다고 말하자 그를 풀어줬다. 이후 둘은 전쟁 종결 후 독일 퓌센에서 재회하여 처남과 매부 사이가 됐고, 이 영국 병사와 독일 장교의 여동생은 오랫동안 잘 살았다고 한다. 영국 입장에서는 일개 병사가 사적인 이유로 독일 장교를 그냥 놓아줬다는 사실이 통탄할 노릇이지만.

네덜란드 출신 명배우 오드리 헵번이 10대 시절을 보낸 곳이 바로 이곳인데, 실제로 헵번은 부상병 치료에 자원했다 전투에 휘말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당시 16세의 간호사였던 헵번이 치료한 어느 영국군 부상병과 20여년 후에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부상병은 바로 007 시리즈의 감독 테런스 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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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래서 일부 항구가 1945년 5월 독일군이 항복할 때까지 미수복 지구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 [2] 이때 82 공수사단장의 발언이 걸작이다. "여기가 무슨 노르망디도 아니고, 공수부대가 보트타고 상륙작전 벌인다는게 말이 돼?"
  • [3] 사실 전사자는 2000명 조금 못미치고 포로는 7000여명이었다.
  • [4] 앞서 언급한 대규모 물자를 하역할 수 있는 항구로서 안트베르펀 항구를 연합군이 이전에 점령했지만 스헬데 강 삼각주 지역에 아직 독일군이 남아 있어 당시까지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 [5] 원래 영국으로 망명한 폴란드 망명정부는 이들을 바르샤바 봉기 직전에 바르샤바 교외에 투입시키고 싶어했지만 영국은 상큼하게 씹었고 대신에 이들을 서부전선에 투입했다. 대전 후 대부분의 여단 구성원들이 영국에 남는다.
  • [6] 연합군 지휘부 내의 한 장교가 한 발언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누가 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작전의 위험성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이라 여러 곳에서 인용하는 편이다.
  • [7] 후일 비트리히는 마켓 가든 작전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유로 히틀러의 노여움을 사서 게슈타포에 연행될 위기에 처하나 발터 모델이 자신의 모든 권한을 동원하여 막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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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2-06 15: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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