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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력제

last modified: 2015-12-02 18:31:54 by Contributors

명의 역대 황제
13대 목종 융경제 주재후 14대 신종 만력제 주익균 15대 광종 태창제 주상락



묘호 신종(神宗)
시호 범천합도철숙돈간광문장무안인지효현황제
(範天合道哲肅敦簡光文章武安仁止孝顯皇帝)
연호 만력(萬曆)
주(朱)
익균(翊鈞).
생몰기간 1563년 9월 4일 ~ 1620년 8월 18일(58세)
재위기간 1572년 7월 19일 ~ 1620년 8월 18일(48년 30일)

Contents

1. 개요
2. 만력중흥(萬曆中興)
3. 48년 막장 로드와 왕위계승논쟁(쟁국본, 爭國本)
4. 막장행각의 결과
5. 막대한 낭비
5.1. 제발 한국인이면 만력제 좀 응원합시다
5.2. 만력삼대정
5.3. 그외의 낭비
6. 와병설
7. 기타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神宗 萬曆帝

융경제의 3남. 명 4대 암군 중에서도 단연 원탑. 그 악명높은 선조를 명군으로 보이게 만들 정도의 막장.[1] 누구나 인정하는 명나라 멸망의 근본원인. 심지어 정통사서인 명사에서 조차 명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황제 한 명이 나라를 어떻게 말아먹는가를 몸으로 보여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별명은 파업(태업) 황제. 또는 조선출병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기 때문에 선조맥아더. 또는 조선의 산타클로스. 결론은 조선의 수호천자 파업제. 명군이 조선에서 상당히 깽판을 쳤어도 임진왜란때 명군이 없었다면 조선군만으로는 왜군을 물리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 명군은 혀로 왜군을 물리겠다던 심유경의 농간때문에 1593년이후로는 잠시 남진을 거부하는등 소극적이 되지만,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20만의 대군을 파견해 왜군을 막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덕에 중국에서도 안올리던 제삿상을 사후 400년이 가까운 20세기초까지 한국에서 받았다.[2]

이런 주제에 명나라 황제들 중 가장 오래 재위했다. 총 48년. 그런데 그 중 30년 간의 업무거부라는 사상초유의 일을 벌였다.[3] 업무거부에 대한 해석도 꾀병, 병, 정치에 대한 환멸 황제의 복지개선등등으로 가지각색이다.

2. 만력중흥(萬曆中興)

열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의 자리에 즉위한 만력제는 즉위 초 10여년간 자성 황태후 이씨[4]의 후원을 받는 대학사 장거정, 환관 풍보(馮保)의 도움을 받으며 통치에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명군의 자질을 드러냈다.[5]처음부터 암군이었던 건 아니었단다

명 왕조의 통치체계는 환관조직과 관료조직의 대립으로 나타나는데, 풍보와 장거정은 드물게도 장기간에 걸친 연립내각을 구축해 국정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했다. 장거정은 내치에서는 기강 확립, 태만한 관료의 정리 작업, 황하 하류의 치수사업, 무엇보다 토지/세제개혁인 일조편법(一條鞭法 - 중국사/세금 제도 항목 참조) 등의 업적을 남겼다. 또 외치로는 척계광(戚繼光), 이성량(李成梁)을 요동과 몽골에 파견하여 북로(北虜)를 막고, 또 절강성, 복건성, 광동성의 해안 방어에도 주력하여 남왜(南倭)의 움직임도 봉쇄했다. 풍보 또한 환관조직을 통제하여 조정을 장악하고 장거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하지만 만력 10년에 장거정이 죽자(1582), 만력제는 뒤통수돌변하여 2년 후엔 그를 부관참시하고 작위를 박탈한 후 가산을 몰수해 버렸으며, 장거정의 큰아들을 고문받다가 자결하게 만들어 버렸고 유족들이 굶어 죽기까지 했는데도[6] 눈도 까딱하지 않았다. 풍보 또한 조정에서 쫓겨나 버린다. 그리고 이것이 만력제가 어긋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이에 대한 해석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단 장거정과 풍보가 둘 다 표리부동한 인물이었던 것이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가 있다. 장거정은 어린 만력제에게 무척이나 엄격한 스승이었다. 특히 재물축재나 유흥에 극도로 엄격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림 그리는 것조차 심취하다가는 송휘종처럼 나라를 말아먹을 수 있다고 결국에는 그림 안 그려도 말아드셨다 자제를 요구할 정도였다. 이런 장거정에 대한 어린 만력제의 두려움과 존경심은 대단했는데, 장거정이 집을 신축한다고 하자 자신의 용돈에서 천냥이나 뽑아서 스승께 드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장거정 개인계좌에서만 일만냥이나 되는 돈을 인출해서 저택을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만력제는 엄청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사후 정적들의 발고로 인해 장거정의 자산 조사를 명령하니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전국 곳곳에 그의 이름으로 건립된 대저택들이 즐비했다거나 장거정의 재산이 황제를 능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거나 할 정도였다.[7] 결정적으로 타격이 된건 장거정이 귀향길에 척계광[8]이 보내준 명나라 국군으로 자신의 가마를 호위하게 했다는 진실이 밝혀지면서 만력제가 제대로 장거정의 일족을 죽이는 명분이 되었다. 전근대에 황제의 권위나 권력에 대등하게 보이는 행위를 하는것은 부정부패와는 달리 구족을 멸할 대죄중에 대죄다. 반대파는 장거정이 반역을 했다고 고발했지만 만력제도 이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9] 다만 빡쳤을 뿐

풍보 또한 마찬가지로 사적으론 상당히 부패하여 사적 이익을 많이 챙겼고, <풍보전>에 의하면 '풍보가 싫어하는 자는 모조리 쫓아냈다'고 할 정도로 권력을 탐하는 모습을 보여 적이 상당히 많았다. 때문에 장거정 사후 강서도어사 이식, 절강도감찰어사 왕국칙에 의해 탄핵받고 남경으로 유배가게 된다.

또한 장거정은 자신의 개혁정치를 수행하기 위해 측근을 기용하고 무리하게 정책을 밀어붙임으로써 사람들의 불만이 컸는데, YS? 그가 예상치 못하게 사망하자 반대파가 대폭발. 특히 장거정은 집권 중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황제에게 탈정[10]을 명받고 계속 현직에 머물렀는데, 당시 이는 당시의 성리학 세계에서 매우 큰 반발을 사야 했다. 장거정과 같은 편조차도 탈정을 취소해야 된다고 주장하다 탄핵을 받고 물러나야 했을 정도였는데, 여기에 탈정 중에 치러진 만력제의 혼인 때 화려한 예복을 입고 참석하면서 '사람으로서의 기본이 되지 않은 불효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스승으로서 숨통이 막히게 만력제를 다스렸던 장거정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란 견해도 있다. 아버지 융경제가 태자의 사부로 붙여준 장거정과 황제의 측근 환관이였던 풍보는 만력제의 사생활을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9세의 나이로 황제가 된 후에도 매달 3, 6, 9가 들어가는 날 오전에만 신하들의 상주를 받고 나머지 날은 공부를 시켰다. 거기다 이들은 자성 황태후의 후원을 받았기에 만력제는 황제가 된 이후에도 이들에게 기를 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만력제가 놀자판을 벌일라치면 옆에 붙은 환관들이 풍보에게 이를 알리고, 풍보가 다시 이를 장거정이나 자성 황태후에게 고해서 만력제로 하여금 '죄기조(罪己詔)'라는 제목의 반성문을 여러번 쓰게 한 적이 있을 정도. 심지어 자성 황태후가 심하게 화났을 때는 노왕(潞王)[11]에게 황제시킬 걸 그랬다면서 조상들에게 석고대죄를 하여 만력제로 하여금 싹싹 빌도록 하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이 시기 만력제는 어찌보면 황제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셈이고, 이후 이어지는 만력제의 탈선은 이러한 상황이 빚어낸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주 단순히 말하면 장거정이 죽고 나서야 만력제는 사춘기를 맞이한 것.

어쨌든 이 사건은 만력제 개인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신하들의 능력과 도덕성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정치에 대한 환멸을 느꼈기에 이후의 업무 방기가 이루어졌다는 해석이다.[12]

그러나 기본적으로 정설에 가까운 해석은 반대파의 모함에 만력제가 넘어간 것. 이 시기의 명은 그럭저럭 이전의 혼란(북로남왜의 화)를 극복하고 다시 세력을 어느정도 떨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장거정 사후의 혼란상은 결국 만력제에게 그 책임을 지우는 경우가 많다.

3. 48년 막장 로드와 왕위계승논쟁(쟁국본, 爭國本)

(ɔ) Ming Dynasty Imperial Painter from
여하간 만력제는 이후 병을 이유로 30여 년간 사실상 직무 수행을 거부한다.[13] 핑계라는 설과 아니라는 설이 있고 논란이 많다.

만력제와 관료들의 충돌은 특히 후계문제에서 절정에 달한다. 그는 활달한 성격의 후궁 정귀비를 총애했는데, 이 때문에 정귀비 소생인 셋째 주상순(朱常洵)을 태자로 책봉하려고 했지만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대신 맏아들인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늦추면서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무려 19년이나 미루고 주상락이 성인이 되자 어쩔 수 없이 태자에 책봉하니 그것이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후의 일이다.

만력제의 어머니인 자성 황태후조차 "너 왜 태자책봉을 안하니?"라고 물었는데, 만력제는 "애 엄마가 궁녀 출신이라서요. 신분이 천하잖아요."라고 대답했다. 문제는 어머니인 자성 황태후도 융경제의 승은을 입은 궁녀 출신이었다는 것. 본격 모친 능욕 + 셀프디스

참고로 이 사건은 동쪽 조선에도 영향을 미치니, 광해군의 세자 책봉 승인도 늦어지게 된 원인이 바로 장자 지지 신하들의 견제 때문이다. 이것은 광해군의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원인이 되고, 크게 보면 광해군 성격이 삐뚤어지는데도 영향을 제법 미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임해군이 보통 평범한 인격을 갖기만 했어도 광해군을 제치고 임금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임해군이 워낙 천하의 개쌍놈인지라 임해군이 왕으로 즉위할 경우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나중에 뒤늦게 영창대군이 태어나면서 더 문제가 꼬여버렸다.

여튼 이 사건을 국본의 쟁, 쟁국본(爭國本)이라고 한다.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사실상 두 가지 뿐이었는데, 첫째 황제가 신하들에게 굴복하거나, 둘째 황제가 유혈사태를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기 세력을 구축하거나 둘 중 하나 뿐이었다. 문제는 만력제가 둘 다 할 생각이 없었던 것. 만력제는 신하들에 대한 신뢰를 포기했고,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황제권을 보유했다고 평해지는 명의 황제인만큼 자기 세력을 구축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겠지만 아예 인간 불신에 빠져버린 건지 그 대신 선택한 것이 황제로서의 업무에 대한 파업.

만약 만력제가 스스로 강한 의지를 가지고 밀어붙였다면 어떤 식으로든 결판이 났겠으나 애초에 그런 의지를 보여주질 못했다는 게 문제다. 좀 심하게 말해서 진짜 태자책봉을 마음대로 하려 했다면 어떤 사건에서든 둘중 하나를 걸어서 날려버리는 방법도 있다. 실제로 만력제가 파업한 30년동안 민란도 많고 혐의걸만한 사건도 많았다. 그러나 딱히 그런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다. 만력제 자신도 9살때부터 황궁에서 성리학 교육을 받으며 커온 인물이여서 성리학 바깥쪽에서 해결책을 찾는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한 모양이다. 그렇다고 해서 관료층과 타협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성리학 사회에서 장자계승의 원칙을 저버린다는 것은 사회의 근본질서 자체를 부정해 버리는 것. 이는 쉽게 말해 국회의원들이 대통령 지시를 받고 헌법을 위반하는 것과 마찬가지. 물론 한국에서 유신 때 실제로 저질러버리긴 했지만(…). 그렇다면 만력제가 자신의 고집을 꺾으면 되는 일이였지만, 진짜 인간 불신에 빠져버린 건진 몰라도 만력제는 30년 동안이나 그러질 않았다.

어쨌거나 이 같은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조기에 해결되지 못하고 30년을 끌게 되는데, 장거정 사후 이를 조정의 공론을 이끌어갈 뚜렷한 리더 또한 존재하지 않아서 이 사태를 해결할 만한 사람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임금이 별로 일을 하지 않는 삼국시대 촉한의 경우 뛰어난 재상(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이 조정을 이끌었다. 하지만 명에서는 원칙적으로 황제가 독재를 하였으며 재상(승상, 상국 등)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히려 홍무제 주원장의 뜻에 따라 이에 해당하는 위치는 금기시 되었다. 명나라의 '내각대학사'는 현실적으로 재상에 해당하는 위치이기는 했으나, 법률적으로나 정치 윤리적으로 이전의 재상과 동등한 권위는 가질 수 없었다.

장거정 이후 실권을 잡은 사람은 대학사 신귀행이라는 인물로 온건파였는데, 대체로 신하들과 황제 사이에서 온건하고 중립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결국 이 태자 책봉사건에서 줄서기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겉과 속이 다르다"는 신하들의 탄핵을 받고 물러나야 했고, 그 이후로는 그야말로 권력의 공백.

어쨌든 이후에도 태자의 지위는 확고하지 못했던 모양. 주상순은 복왕(福王)에 봉해졌지만 임지인 낙양으로 떠나지 않고 황궁에 남았고, 정쟁은 계속되었다. 결국 정귀비 쪽에서 손을 썼는지, 주상락이 머리를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14] 1615년 정격안이라는 태자에 대한 테러 미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방보, 오성 두 환관과 장차가 죽었다. 참고로 당시 복왕 주상순은 바로 전 해인 만력 42년(1614)에야 낙양으로 이동한다. 타이밍은 절묘하네.

처형 시에 만력제는 '장자를 세우는 건 고금의 법도. 태자를 모해하려는 이는 용서치 않겠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당신이 할 말이 아니지

태업의 이유로는 그 외에도 여러가지 있을 수 있겠으나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만인지상이자 지존인 천자의 위에 오른 인물이 업무를 내팽겨쳤다는 것이 실제 역사이며, 예나 지금이나 이는 그의 사후 제국의 멸망에 중대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지목된다.

4. 막장행각의 결과

여하간 30년이나 파업을 한 덕분에 많은 관리들, 심지어 재상도 황제의 얼굴을 까먹을 정도였고 중급 이하의 관리 중 황제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조정 관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임금이 누군지도 모르니 태평성대가 분명하다. 심지어 1607년(만력 34)에 임용된 재상 이정기는 재상직을 때려쳤다. 그도 그럴게 당시 중앙 부처 9부의 관직 31개 가운데 24자리가 비어 있었고, 호부와 통정사를 제외하고는 책임자가 없었으며, 독찰원과 대리사는 도장마저 없었다. 다 땜빵해야 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앞서 말했던 동림당에서의 견제가 장난이 아니었다. 문제는 만력제는 사직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자기 집은 복건성으로 다시 이사해 두고 절에 묵으면서 5년간 152건의 사직서를 보냈지만 황제는 또 묵묵부답. 동림당에선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라는 반응까지 나오면서 더욱 모함이 심해졌고 결국 참지 못한 이정기는 황제를 씹고 스스로 낙향해서 4년만에 사망한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황제를 능멸한 사형감이었으나, 만력제는 시크하게 그에게 바로 문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끝냈다.

그냥 때려쳤다면 모르겠는데 그리고 사후에 무덤 건설 비용으로 재정을 또 다시 무지막지하게 까먹었다. 그의 송덕비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이렇게 써 있다

짐의 공덕이 너무 크므로 세상 말로 표현할 수 없도다.

이러한 양식은 무자송덕비라고 해서, 황제에 대한 칭송과 역설적인 겸손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어 동양에서는 아예 전례가 없는 양식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측천무후의 경우에도 이러한 비를 세웠다. 무자송덕비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인종 홍희제의 무덤 이후부터는 능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히 비문도 없다. 이후 가정제가 자신의 능을 건설하면서 비석을 세웠는데, 신하들의 상소로 역대 황제들의 비를 전부 세우게 되었다. 당시 황제의 비문을 지을 수 있는 건 후대 황제 뿐이었는데, 가정제가 귀찮아서 스킵. 덕분에 가정제 이전 전대 황제 7명의 비석은 모두 글자가 없는 무자비가 되었다. 후대 황제들 중에서도 가정제의 선례(!)를 따라 무자비를 택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만력제의 무자송덕비도 이런 전통을 따른 것이라는 견해다.

게다가 조정의 크고 작은 일들은 최종적으로 결재할 사람 없이 산더미처럼 밀려 신하들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행해져야 했으므로, 간신히 현상유지만 될 정도로 제국 내부는 점점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그나마 황제가 지적장애라도 있었으면 그걸 핑계삼아 뒷방에 가둬놓고 일을 처리하겠는데 유감스럽게도 옥좌에 앉은 게으름뱅이는 명백한 정상인이었으니 그것도 불가. 말년에는 사르후 전투 등의 대삽질로 제국 동북방의 군사적 요충지 요동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때 상실한 요동지역은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되찾지 못했다.

어쨌든 이렇게 태업하는 동안 명제국이 겉으로는 그럭저럭 굴러갔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30년동안 어떠한 제도 개선이나 사회개혁이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 이 시기 동안 장거정의 개혁정치, 동림당의 등장, 양명학의 발흥 등 부분적인 개혁운동이 발생하긴 하였으나, 이것도 황제가 받아들여 정치에 포함시킬 때 의미가 있는 것. 황제 스스로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 그저 민간차원의 운동으로 흐지부지 끝나버려야만 했다. 조선 왕조 중반기 중종이 조광조의 개혁운동을 제도정치에 받아들이거나[15] 선조가 붕당정치를 도입하는 등 왕조 내내 어떤 식으로든 현상타파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던 것과는 대조된다. 물론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긴 했지만 만력제처럼 아예 아무것도 안 한 것과, 나름대로 시도를 한 것이 똑같은 기준으로 평가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반적으로 망군들이 사치나 음란, 잔인성 때문에 나라를 멸망시킨 것과 달리 아무 것도 안 해서 나라를 멸망시켰다는 것이 색다른 점이다. 본인도 자기가 아무짓도 안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어서 말년에는 스스로 "무위의 도로 다스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이 정도면 청 아이신기오로 씨 입장에서 자손만대 만력제 제사 지내줘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 누르하치: 땡큐 만력

5. 막대한 낭비

5.1. 제발 한국인이면 만력제 좀 응원합시다

전통적인 견해로 30년 휴무만큼이나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그의 낭비벽. 물론 세금을 많이 거두기도 했다. 낭비가 그냥 낭비도 아닌게 전비 지출에다 무덤 공사에 자녀들 결혼비용까지 추가되었다. 그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게 임진왜란.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지지했다고 한다. 사실 이 무렵의 전근대적인 사고관을 생각해보면 명나라의 영토가 아직 공격 받지 않은 시점에서 조선까지 병력을 보내서 도움을 주는 것은 기묘할 정도로 강렬한 조선보호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병력만 파병한 것이 아니라, 조선 백성들이 왜적 때문에 수확을 못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은 만력제는 명나라 재정을 털어 곡창인 산둥 성의 쌀을 백만석을 매입해 조선백성을 위해 원조했다. 말이 100만석이지, 1석이 89kg이므로 100만석이면 약 9만톤이다. 9만톤을 전근대적 수단으로 황해를 건너 옮긴다는게 얼마나 힘들지는 명약관화다.

지난해에 왜적의 변란 때문에 때맞추어 수확을 못하였고 겨울이 깊어서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야 비로소 추수를 했는데, 지금 파종기에 미쳐 모 한 포기 없으니 사람이 모두 절망하였다. 벼의 종자 값이 백미와 같았다. 민간이 궁하고 곤란하여 기아가 날로 심했다. 계사ㆍ갑오년에는 공가와 사가에 아직도 창고에 간직한 것이 있어 매매할 길도 있었으나, 오늘은 사변이 난 지 3년이 되어 곡식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없고, 분탕은 너무 심하여 황폐한 땅이 천리인 데다, 더욱 길가의 곡식은 전부 왜적이 거두어 가니, 인민이 죽음에 임박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늘과 같은 황은(皇恩)을 힘입어 산동성의 소미 백여만 석을 우리 나라에 운송하여 각처에 나누어 구제 하게 되니, 전라의 고금도ㆍ전주ㆍ남원 같은 데는 각 역참에 온 쌀이 수천여 석이라 굶주린 백성이 많이 의지하여 생 명을 연장하였다. 다음 가을에 대미(大米)로써 갖추어 바친 까닭에 이름을 환대미(換大米)라 하였다. (조경남, 난중잡록(亂中雜錄))

아무튼 조선 정부나 조선 백성들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긴 하지만, 본래 명나라 국내 내치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도 없이 수십년 동안 놀고 자빠졌던 황제(…)라는걸 생각하면 이 신속한 대응은 거의 기묘하게 느껴질 정도.

이 때문에 조선 후기의 군담소설 임진록에서는 조선 사신의 정성에 감동했다고 하기도 하고, 꿈에서 삼국지의 관우가 나와서 조선왕이 장비의 환생이고 만력제가 유비의 환생이라고 한 바람에 '나는 유비, 선조장비'라고 철석 같이 믿었고 군사를 보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에 중국의 관우 신앙이 조선으로 전래되었는데 그것의 영향으로 보인다.

또다른 설은 명나라에 파견된 사신을 수행하던 조선의 역관 홍순언이 명나라 관원들의 접대를 받아 연경의 초호화 기방에 갔는데, 거기 접대하러 나온 기녀가 누명을 쓰고 몰락한 명문가 딸인것을 알고, 그녀와 즐기는 대신 가진 돈을 털어 건네 주고 그냥 나왔다고 한다. 그 기녀는 그 돈으로 부모의 장례를 치르고 나중에 병부상서였던 석성(石星)의 애첩이 되었는데, 그때 받은 고마움을 갚기 위해 석성에게 계속 조선에 출병해달라고 졸랐고, 석성은 애첩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다른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파병을 주장. 다만, 이는 야사인 연려실기술에 실린 내용이라, 학계에서는 대체로 부정되고 있다.

만력제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조선에서는 상당한 추종자들이 생겨났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만동묘가 숙종 대에 조선 땅에서 세워지게 된다. 나중에는 성리학 일방통행 주의자들 덕분에 삼정승 위에 만동묘지기라는 말이 나올 만큼 세도를 부리게 되는데, 결국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시범타로 철폐된다. 곧 복귀되긴 하지만

이 때문에 자국내에서도 고려천자(高麗天子)라는 별명이 붙어버릴 정도.

심지어 일제시대에서도 만력제에 대한 제사는 계속 행해졌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까지인 1937년까지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5.2. 만력삼대정

임진왜란 외에도 지방의 이민족들을 억누르기 위해 군사를 많이 움직였는데, 이 중 큰 3가지를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이라 한다.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묶어 만력동정(萬曆東征)으로 부르는데, 이 기간에 다른 두 정벌도 연달아 일어났다.
  •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에는 오르도스(鄂爾多斯)의 보바이가 반기를 들었고,
  • 정유재란이 일어난 1597년에는 귀주(貴州)·번주(播州, 지금의 사천성)의 세습 된 선위사(宣慰使) 양응룡(楊應龍)이 반란을 일으켜 1600년에 진압당했다.

이로써 장거정이 땜빵해 놓은 북로남왜는 부활해버렸다.

5.3. 그외의 낭비

하지만 만력삼정 진압에 든 모든 비용이 만력제의 무덤 건설 비용[16]보다 쌌다. 깊이 67m, 총 면적 1,200평방미터나 되었으니.[17]

자녀에겐 더 후했다. 아들인 복왕 주상순을 장가 보내는데 은자 2,400만 냥을 쓴 적도 있다는 기록도 있다. 그것도 임진왜란 직후이자 양응룡의 난이 진압되지도 않은 1599년에. 이쯤 되면 만력삼정 쯤은 핑계로 보인다. 나는 차가운 대명의 천자, 하지만 내 자식들에게는 따뜻하겠지

이러한 낭비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라는 반론도 있는데, 만력제 말기의 명나라의 재정은 수년간 흑자를 기록했다는 것이 그 이유. 뒤에 보면 태창제가 그 넘치는 자금을 써먹기도 하고.
하지만 그 풍부한 재정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세금 증액 때문일 뿐이었고, 은광에 부여된 '광세(鑛稅)의 화'로 그 결과 소주(蘇州)와 산동의 임청(臨淸) 등지에서 민란이 잇달아 일어났다는 점에서 낭비도 큰 문제가 맞다. 물론 황제의 태업으로 이 낭비를 막기 위해 어떤 정치적 노력도 없었다(…).[18]
심지어 누르하치를 대비하기 위한 군비가 모자라 황제 개인계좌인 내탕금에서 이를 충당하자는 신하들의 의견[19]까지도 거부. 한마디로 낭비한 게 맞다.

6. 와병설

핑계가 아니라 진짜 아파서(…) 그랬다는 의견도 있다. 비만이나 척추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데 실제로 유해를 조사한 결과 등이 심하게 굽어 있었다고 한다. 혹은 아편에 중독되어 무기력증에 걸렸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후술되듯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 유해가 훼손되면서 더 이상의 연구는 불가능한 상황이다.

척추손상이나 다리 부상으로 고통을 받았다면 아편에 중독되는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편은 진통제로서 효과가 있기 때문.(사실상 전근대 사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유일하게 효과적인 진통제다.) 현재로서는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부상->아편->비만->무기력화 테크를 탓다면 태업이 어쩔 수 없는 '환자'였던 셈이다.반대면 그냥 개막장

7. 기타

  •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셋째아들 복왕 주상순은 명나라 말기에 이자성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자성 군대가 투실투실 살이 찐 그를 붙잡아 연회를 열고 삼겹살 사슴고기와 섞어 술안주로 삶아 먹었다. 살해당한 복왕의 몸에서 나온 기름도 술에 섞어 마셨다고 한다. '사슴 록(鹿)'과 '복 록(祿)' 자가 발음이 같은 걸 노린 언어유희로 '이놈이 누리던 복록을 우리가 누리자'란 생각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한다.[20]

  • 만력제의 묘인 정릉 [21]은 1956년 발굴된다. 당시 발굴을 주도한 사람은 베이징 부시장 우한(吳晗)이다.[22]

  • 당시 정릉에서 발굴된 부장품의 일부와 만력제, 효정현황후 왕씨, 후비들(공각황귀비 정씨, 공순황귀비 이씨)의 유골은 봉건의 잔재로 규정되어 홍위병들에 의해 바위로 찍혀 부숴지고 불태워진다.[23] 원래 발굴 의도가 정말 만력제가 아파서 30년간 정사에 나오지 않았는지를 검증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 때 그가 한쪽 다리가 짧다는 사실과 아편 중독자였다는 사실은 밝혀졌지만 구체적인 질환에 대한 연구가 한창 진행되던 중에 유골과 부장품이 모두 불타버리면서 정확한 진상은 오늘날에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신뢰성 있고 자세한 기록이 발굴되지 않는 이상 진상은 영원히 미궁 속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만력제의 유골은 오늘날 남아있지 않다.[24] 안습.

    그러나 발굴이 제대로 진행되었어도 아마 심각한 훼손을 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중국은 정릉과 같은 대형 무덤을 발굴조사할 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능 안에 있던 유물들은 놀랍게도 거의 원형으로 보존되어 있었지만 명 황실의 비단은 탈수보존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으며 냉동실 하나 없어서 많은 유물들이 복원 불가능한 상태로 훼손되고 말았다. 그래서 정릉은 지금까지 발굴보고서가 단 한 부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조성한 무덤이 이런 비참한 꼴이 된 것을 보면 천벌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무령왕릉 발굴조사가 막장이었다지만 여기에 비하면 양반이다.

  • 복왕의 아들 주유숭이 명나라 멸망 후 남명 정권의 초대 황제인 홍광제가 되면서 복왕도 황제로 추존되었다. 결국 만력제가 은근히 바라던 대로 사랑하던 아들이 황제가 됐으니 소원성취(…)는 했는데 문제는 나라가 무너지고 북경이 황폐화 되고 결국 홍광제도 무능한 관계로 겨우 1년 만에 청군에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 신종 만력제의 재위 기간은 조선 선조(재위 1567∼1608)와 광해군(재위 1608~1623)의 재위 기간과 겹친다. 특히 선조의 재위 기간은 일본역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스리던 시기이니 이때는 한중일 3개국 모두가 잘못 돌아가던 시대(특히 임진왜란 시기)였다. 무리한 전쟁으로 국가를 피폐하게 만든 도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명군이라 하기는 어렵다.

  • 만력 44년인 1616년 중국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인 남경교안이 일어난다. 흔히 교안하면 청조말 서구의 유입후라고 생각하지만 이 시기 부터 시작한다. 꽤 이름에도 불구하고 중국사 최초의 기독교 박해는 아닌데, 이미 당대의 불교 박해때 경교(네스토리우스파(이단) 크리스트교)가 꼽사리 끼어(...) 박해 당했기 때문이다.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웹툰 호랭총각에서는 동물 애호가로 묘사하고 있다 카더라.[25][26]
  • 베르나르 베르베르 3권 말미에서 호랑이국의 황제와 그 제국이 묘사되는데 자세히 보면 진시황과 만력제를 섞어 놓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나 기계로 된 황제를 세워뒀는데도 국가가 시스템에 맞게 잘돌아간다며 거대한 구심력[27]에 의해 국가가 활력을 잃고 경직화 되어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2015)에서도 출연했는데,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쳐들어올 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듣고 자기가 갖고 놀던 사슴벌레로 맞서겠다고 할 정도로 현실 감각이 없다. 거기에 후궁들과 내기를 하면서 은을 퍼다주기까지. 그야말로 암군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담으로 만력제를 연기하는 배우인 장태성씨는 전작 정도전에서는 천민 황천복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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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농담이 아니고 실제로 이랬다.
  • [2] 물론 이 양반에 대한 은혜를 갚는답시고, 재조지은이니 해서 병자호란을 불러온 간접적인 원인이 되긴 해도 그건 청나라를 지나치게 자극한 조심스럽지 못한 외교와 함께 이괄의 난때문에 조선의 방위군이 무너진 결과지 이 양반의 문제는 아니다.
  • [3] 재위 기간 2위는 바로 가정제 주후총. 무능한 인간 2명이 명나라 280년에서 100년을 해먹었다.나라가 안 망할 수가 엄써
  • [4] 밑에서도 언급되는 만력제의 생모, 궁녀 출신이었다.
  • [5] 당시 조선의 사신으로 갔던 조헌이 당시의 만력제를 보고 '이번 황제는 훌륭한 군주의 자질이 보인다'면서 사행기에 칭찬을 써놓기도 했다, 후일의 만력제를 생각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한 평가(...)
  • [6] 황제가 구속영장(…)을 발부하기도 전에 환관들이 이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저택을 개미새끼 한마리도 들어가지 못하게 봉쇄하는 바람에 십수명이나 굶어죽었다.
  • [7] 이 해석에 따르면 장거정 일파의 한 축이었던 명장 척계광 또한 군사적 업적은 대단하나 사생활에서는 뇌물취득, 공금횡령, 축첩 등으로 부패한 관료였다고.
  • [8] 이것 때문에 척계광도 매우 싫어하여 그의 사표를 받아주지 않고 바로 파직한다. 문제는 이때 몽골과의 전쟁이 한창이라서 명장인 척계광이 필요한데도 그걸 생각도 안하고 파면한 것이다. 더 한심하게는 몽골군한테 명군이 깨져서 하남도어사 부광택이 제발 척계광을 기용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오히려 부광택에게 화가 나서 그의 두달 월급을 뺏아버리는 병크를 터뜨렸다.
  • [9] 다만, 장거정은 평소에 주변사람들이 자신을 '곽광'과 '이윤'과 같은 명신에 비유해 아부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이들은 확실히 명신이었지만, 자신의 주군이 정치를 게을리한다는 이유로 주군을 제위에서 내쫒은 신하들이다. 군주의 입장에서는 '역신'이었던 것. 아래 설명에서 언급되었다시피 동생이 황제가 되었어야 했다는 협박을 듣고 자란 만력제가 이 사실을 들었을 때 느낀 배신감은 상상할 수 있다. 물론 장거정은 아부를 좋아했을 뿐이고, 실제 만력제를 내쫒을 생각은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차라리 내쫒았다면 명나라의 수명은 길어졌을 지도 모른다.
  • [10] 황제의 명으로 3년상을 면제 받고 벼슬을 계속하라는 것. 원래대로라면 고향에 물러나 3년상을 치뤄야 했다. 당연히 이 탈정이 순수한 황제 본인의 뜻이라고 보는 사람은 당시나 지금이나 아무도 없다(…).
  • [11] 노왕 주익류(朱翊鏐)는 자성 황태후의 둘째아들로 만력제의 동복동생이었다.
  • [12] 정치적 무관심 항목 중 굴절적 무관심 참조.
  • [13] 신하들이 모여 땡볕에서 직무 복귀 데모를 벌이고 픽픽 쓰러져 나가는 이까지 속출했기에 환관들이 물과 얼음, 얼린 오이라도 주려고 했으나, 황제는 쿨하게 "물은 셀프"(…)라며 방치했고 결국 신하들은 나가떨어졌다. 한편 만력제는 매일 만 수천건 쏟아져오는 상소를 방치하고 그 위에서 잤다고 한다.
  • [14] 하도 어이없는 사건인데다가 태자가 최대 수혜자였기에 동림당과 태자 측의 자작극이라는 설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방종철의 대처 역시 어이없긴 마찬가지.
  • [15] 실상 명분에만 치우치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이 많지만.
  • [16] 800여만 냥, 2년간 전국 토지세 총 수입에 맞먹는다고.
  • [17] 다만 이러한 부분은 조심스럽게 해석되어야 하는데, 황제의 무덤을 크게 건설한 것이 만력제 한 명뿐인 건 아니다. 무덤 건설 자체가 제국의 성세를 과시하는 목적도 있긴 하다. 근시안적이지만 효과적인 전시행정이니까.
  • [18] 심지어는 금은이 생산되지 않는 지방에도 광세가 물려졌다. 그러나 1602년(만력 30) 만력제가 지병으로 죽을 지경까지 가자 무슨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광세를 모두 폐지하고 쫓겨난 이를 모두 복권 시킨다는 어명을 내리면서 풀리나 싶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쾌차해서 그 계획을 뒤집어 엎는다. 심지어 황제를 도와 광세를 물리던 환관들도 반발했으나 거기에 더해 건청궁과 곤녕궁을 확대중건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런 개판인 상황이니 난이 일어나지 않는 게 이상하겠지.
  • [19] 황제 개인이 가난했으면 신하들이 이런 의견을 내지도 않는다. 만력제 개인 재산이 명나라 국가예산을 웃돌았다는 사실을 신하들이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의견이 나오는 것이 가능했다.
  • [20] 사실 복왕 주상순은 탐학질이 심했기에 이자성이 그를 생포해서 백성들 앞에 이놈을 어떻게 처리할까라고 묻자 백성들이 하나같이 씹어먹을 기세로 죽이라는 말만 했다. 주상순이 끔살되자 백성들은 매우 기뻐했을 정도이니 얼마나 탐학질이 심했다는 것을 짐작할수 있다.
  • [21] 명 13릉에 가면 흔히 지하궁전이라는 곳을 가는데 그 지하궁전이 바로 정릉이다.
  • [22] 후일 그가 쓴 희곡이 바로 해서파관. 그리고 이 희곡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마오쩌둥을 가정제로 비하한 내용이라 해서 공격받고, 우한 자신도 죽게 된다. 가정제에 비교했으니 죽을만 하네, 아니 가정제보다 백성들 더 고생시켰으니 가정제가 노한건가
  • [23] 그 날 폭우가 쏟아졌기 때문에 그나마 남아있던 재도 사라졌다.
  • [24] 머리카락의 일부만 남아 있다.
  • [25] 웹툰 초반에 나대용을 등장시킨 점을 봐서 기본적으로는 임진왜란 직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듯. 그리고 황후가 '조선 황제' 드립도 날린다.
  • [26] 사실 작가도 말했지만 호랭총각뎐의 배경은 딱히 조선의 어느 한 시기로 고정되있지 않다. 단편 에피소드들을 살펴보면 영조 때 활동했던 박문수가 등장하는데 박문수가 탄생 시기는 병자호란도 끝난지 한참 지나서. 거기에 K-bob 스타 편에서 나오는 한류 설정은 조선 통신사에서 모티브를 따왔을 가능성이 높고, 이건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국교 수복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다시말해 이 만력제를 패러디 한 듯한 황제가 나올때의 배경은 임진왜란 직전 쯤이라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에피소드에 따라 임진왜란 전이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인물이나 설정이 등장 하는걸로 볼 때 애초에 작가의 말대로 이 만화에서 구체적인 시대를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 본인도 필요에 따라 인물을 등장시킬 수 있는거고.
  • [27] 다만 책에서 의미하는 구심력 - 원심력의 관계와 실제의 관계는 전혀 다르다. 자세한건 구심력 항목 참고. 베르나르 베르베르도 구심력 항목에 적혀있는 원심력↔구심력의 오류를 범한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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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2-02 18: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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