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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엑스


(ɔ) Ed Ford, World Telegram staff photographer from



미국의 급진적 흑인인권운동가. 본명은 말콤 리틀(Malcolm Little)이며 무슬림식 이름은 '엘 하지[1] 말리크 엘 샤바즈(الحاجّ مالك الشباز‎, El-Hajj Malik El-Shabazz)'.[2]

Contents

1. 성장 과정
1.1. 유년기
1.2. '이션 오브 이슬람'에서의 인권 운동
1.3.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의 결별, 그리고…
1.4. 암살
2. 평가
3. 마틴 루터 킹과의 비교
4. 영화
5. 자서전
6. 어록

1. 성장 과정

1.1. 유년기

네브래스카주 동부 오마하(Omaha)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 역시 흑인들은 아프리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흑인인권운동에 참여했다.[3] 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박해를 당하면서 자랐으며, 아버지가 사고로 죽고[4] 어머니[5]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엑스의 어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루이즈 리틀(Louise Little)과 아버지 얼(Earl).

그래도 보호시설에서 학교를 다니며 그럭저럭 착실히 학교생활을 했고, 반의 수석이자 반장이 되는 인간 승리를 이룬다. 머리 하나는 타고났던 모양. 이런 면모 때문에 학교 선생에게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가 선생에게 "현실적으로 생각하거라. 목수가 되는게 어떠니?"[6]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1939년, 열네 살에 학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백인들에게 박해당하면서 자라온 그의 이런 경험은 뒷날 인권운동노선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백인이었던 강간범 외조부 때문에 그는 머리가 붉은 빛이었고 어릴 적엔 Detroit Red라 불리기도 했다. 몇 안 되는 컬러사진이다.

청소년기에는 뉴욕, 시카고, 보스턴 등의 미국 북동부를 전전하며 두닦이, 샌드위치 판매원 등의 막일들을 하며 소일[7]했고, 마약 밀매나 강도, 포주에도 손을 대며 백인 처녀 두 사람과 동업해서 총기 강도 범죄를 저지르던 끝에 체포되어 절도범으로 징역 8년을 선고받고 매사추세츠에서 복역했다. 이 형량에 대해 본인의 자서전에는 당시 배심원들이 감히 선량한 백인여성을 나쁜 길로 사주했다는 일종의 괘씸죄가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도리어 역으로 그가 이들의 권유로 이런 일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여성은 쉽사리 훈방되었다. 이것이 1945년의 일이다.

이 교도소에서의 삶이 그의 인생 전환점이 되었는데, 독학으로 공부한 동료 수감자 존 빔비라는 사람의 권유로 그 역시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 당시 흑인민족주의 종교단체였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The Nation of Islam)'[8]을 알게 되고 그 조직의 지도자인 일라이저 무하마드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9] 그리고 1952년에 가석방되었을 때 무하마드를 만나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가입하고 왕성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 무렵에 그는 리틀이라는 성을 버리고 '엑스(X)'로 성을 바꿨는데, X로 한 이유는 '리틀이라는 본래 성은 백인 악마, 백인 노예주가 붙인 성이므로, 알 수 없는 아프리카 조상의 본래 성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한다. 뿌리 찾기/뭔가 톰 마볼로 리들이 생각난다 이런 식의 이름은 당시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서 권장하던 방식이기도 하다.

1.2. '이션 오브 이슬람'에서의 인권 운동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몸담으면서 뛰어난 수완과 연설 실력을 발휘해서 1952년 5백여 명에 불과했던 작은 종교조직을 1963년 무렵 2만 5천에 달하는 거대조직으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자처했기 때문에 FBI의 중요시찰 인물이 되기도 했다.

당시의 유명한 인권운동가인 마틴 루서 킹의 운동노선과는 반대로 그의 인권운동노선은 이른바 '흑인민족주의에 기반한 흑백분리'로 압축될 수 있다.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면 또다른 차별만이 있을 것이니 흑인들이 실력을 길러서 백인들 사회에서 분리된 사회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 또한 선동적이고 과격한 연설로 당시 흑인 하류층의 분노를 고발하고 백인 주류 사회의 모순을 직설적으로 비판하여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다. 그렇기에 그 과정에서 백인과의 공존과 타협을 지향한 킹 목사의 인권운동노선 역시 강력하게 비난했다. 오히려 흑백통합노선의 인권운동을 "백인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특히 1957년의 힌튼 존슨 사건은 그를 크게 유명하게 만들었는데, 존슨이라는 흑인 이슬람교도가 뉴욕 경찰에게 폭행을 당하고 감옥에 갇혔다. 이 사실을 안 흑인 8백여명이 경찰서 앞에 집결하여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경찰 측에서 엑스와 접촉을 했다. 말콤은 교섭 끝에 존슨을 치료할 것과 폭행한 경찰을 처벌할 것을 약속받고 이를 경찰서 앞에 모여있던 흑인들에게 전달하고 흑인들을 순식간에 해산시켰다. 기적이다! 이 장면은 그 유명한 영화 <Malcolm X>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러나 당시 흑인인권운동노선의 대세가 백인과 흑인의 통합이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흑인과 백인 모두에게 공격받는 상황이 되었으며, 그가 인기를 끈 이유도 흑백분리 주장 때문이라기보다는 당시 백인 주류의 미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 때문인 면이 더 강했다. 말하자면 "저 사람 말빨 쫌 쩌는 듯", "내 속이 다 시원하네"란 의미가 더 강했다는 것.

1.3. '네이션 오브 이슬람'과의 결별, 그리고…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자 이에 대해 "자업자득"이란 식으로 고인드립발언했다가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논란이 되자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지도자 일라이저 무함마드(Elijah Muhammad)는 엑스에게 근신처분을 내렸고 이듬해 1964년 엑스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한다고 선언했다.

사실 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 사건이고 엑스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한 것에 대해서는 1. 무하마드가 엑스의 명성과 능력을 시기했다는 것과 2. 네이션 오브 이슬람이 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무하마드가 탐탁치 않게 여겼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3. 무하마드의 도덕적 이중성, 특히 성적 문란 의혹에 대해 엑스가 실망했던 것 등 여러 원인이 겹쳐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무하마드의 아들이 엑스에게 그런 말을 했고, 무하마드 역시 공개석상에서 부하들에게 금욕을 강조하면서 뒤에서는 문란한 성생활을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11].

말콤 엑스는 이슬람교를 제대로 이해한다며 중동 지역으로 메카 성지순례 여행을 떠났는데 이 여행을 전후해서 그의 종교신앙과 인권운동노선은 크게 변화했다. 사실 이전까지 그가 몸담고 있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은 이슬람교의 용어만 차용해 왔을 뿐 교리는 이슬람과는 큰 연관이 없었다. 종교보다는 차라리 SF 소설과의 연관점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으며, 흑인 우월주의를 강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니파 정통 이슬람교'를 접하고 말콤 엑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백인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이 섞인 무슬림과 함께 성지 메카를 여행하면서 자신이 주장했던 '백인은 무조건 악'이라는 사상의 한계를 인정했다. 성지순례를 계기로 무슬림식 이름인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로 개명하고,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떠나 수니파 무슬림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말콤 엑스의 가족들은 '샤바즈'를 성으로 쓰고 있다.

다른 인권운동단체와의 연대를 꾀했으며 도시흑인빈민들의 주택, 교육문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도 눈을 돌렸다. 또한 흑인들의 단결을 위해 아프리카계 미국인 단결기구(OAAU)를 창설했으며 해외 여러 나라를 방문하며 흑인의 동포애와 인종간 평화를 역설했고 백인의 박해로부터 적극적인 자기방어를 주장했다. 킹 목사와 선거권 문제에서 연대하면서 그 유명한 "투표권 아니면 총알이다!"를 외친 것도 이 때이다.

하지만, 이런 시련과 깨달음으로 한단계 더 성숙해진 말콤 엑스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4. 암살

그러나 네이션 오브 이슬람을 탈퇴한 이후 무하마드와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네이션 오브 이슬람 조직원들의 전화 협박 등에 시달렸고 급기야 1965년 2월 14일 집에 방화가 일어났다. 이 때 가족들은 무사했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이미 그때, 그는 죽음을 예감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매일 매일 준비하고 있었겠지만.

그 1주일 후 1965년 2월 21일, 뉴욕 할렘가의 오두본볼룸에서 연설을 시작하기 직전이었다. 당시 청중 4백여 명이 모여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남자가 "검둥아! 내 주머니에서 손을 빼!"라고 외쳤다. 장내가 소란스러워지자 엑스는 진정을 시도했으나, 그것이 유언이 되었다. 그 남자가 주머니에서 샷건을 꺼내 엑스를 저격했고, 엑스가 쓰러지자 두 남자가 나와서 엑스에게 연속해서 총을 발사했다. 당시 무려 16발의 총알을 맞았고 콜롬비아 장로교회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사망한 뒤였다.

암살범들은 체포되었다가 1980년대에 두 명은 석방되었으며 마지막 한 명은 2010년에 석방되었다. 이들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 소속 조직원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마틴 루터 킹과 마찬가지로 엑스의 암살에 대해서도 배후가 있다는 등 많은 음모론이 뒤따르고 있다. 말콤 엑스 본인도 죽기 전, 아니 탈퇴하는 그 순간부터 자신들을 네이션 오브 이슬람 조직원과 높으신 분들이 노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의미심장하게도 네이션 오브 이슬람 조직원들의 수법은 자신이 알지만 자신을 노리는 자들은 그 이상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2. 평가


맛있쪙?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이 사진 말고도 무하마드 알리와 함께 찍은 사진은 꽤 많다.


마틴 루터 킹과 함께 50~60년대 미국의 흑인인권운동을 대표하는 사람이지만, 어째 킹에 비해 대접을 좀 못 받는(?) 편. 백인과 흑인의 통합과 공존을 주장하여 오늘날까지도 인종을 초월해서 존경받는 킹에 비해 엑스는 흑인민족주의에 기반한 흑백분리론을 주장했던 탓이 크며, 무슬림이자 급진파로서 다소 과격한 성향을 띄고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다.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킹에 비해서 엑스는 상대적으로 이루어진 연구도 적은 편이다.

그의 급진론은 여러 흑인 무장투쟁 단체에 영향을 많이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흑표당이 있다.

게다가 백인 주류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흑인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총체적이고 대국적인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했으며 블랙이슬람운동의 순수성에 집착한 것 때문에 민주주의 사회에 부합하는 사람이 맞는가 하는 비판도 있다. 그나마 성지순례를 다녀온 후 어느 정도 인권운동 노선에 변화가 생기기는 했지만,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기에는 그의 남은 생에 주어진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말콤 엑스는 열등감과 패배주의에 젖어있던 흑인들에게 흑인민족주의 사상을 통해 흑인은 열등한 인종이 아니라는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고 대도시 빈민가 흑인의 관점에서 미국 사회의 모순에 대해 지적했다는 의의가 있다. 말콤은 20세기 초반 부터 소수의 흑인 신비주의 계열 지식인들이 간접적으로, (제한적인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고도 남지만) 어설프게나마 이슬람과 접촉하면서 발달시켜 온 북미 흑인 민족주의를 본격적으로, 흑인 대중에게 설파하며 북미 흑인이 스스로를 본격적으로 또 하나의 민족, nation으로 자긍심을 불어 넣어주었다. 이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이런 전통의 지난 시대의 제한된 정보에서 비롯 되었던 사이비 신비주의적인 면을 완전히 벗겨내고 실제로 하나의 성숙하고 자각심 있는 사회적 집단으로서 흑인 무슬림들이 더욱더 성장할 가능성이 충분했는데 그놈의 요절이... 또한 킹의 후반기 운동이 더 적극적이 되는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현대에 와서 두 인물 양쪽 다 각자의 방식으로 걸출한 위대한 민권 운동가이자 해방자였다고 공론이 이루어지면서 킹과 말콤의 차이점 보다는 오히려 양쪽 다 말년에 갈수록 서로 공감하고 어느 정도 노선을 공유하게 되는 공통점에 더 주목을 두고 있다. 말년의 킹은 민주 사회주의자로서 자신의 이념을 확고히 하며 비폭력적이만 확실하게 미국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물질주의적인 면과 단절하는 사회적 혁명을 주장했고, 말콤 엑스 또한 단순한 백인에 대한 증오가 아닌 전인류적 인종간의 연대를 부르짖었다.

영화배우 오시 데이비스는 추도사에서 엑스는 "빛나는 검은 왕자"라고 표현했으며, 유명한 복싱선수인 무하마드 알리가 말콤 엑스가 펼친 이슬람 운동에 영향을 받고 감화받아 이름을 무슬림식으로 바꾼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시민의 경우 자신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차별의 한계에 너무 높이 날아간 "검은 이카루스"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3. 마틴 루터 킹과의 비교


1964년 워싱턴 의회 입구에서 만난 흑인 인권운동의 두 거인. 이것이 두 사람의 유일한 만남이다.

출신이나 성장과정, 인권운동 노선이 달랐던 탓에 여러 모로 킹 목사와 비교되기도 하고 라이벌로까지 몰아가기도 하며 두 사람은 서로 인권운동노선에 비판을 많이 가하기도 했지만, 정작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적은 단 한 번밖에 없다. 그나마도 단 5분도 되지 않았으며 키배 진지한 토론을 한 것이 아니라 서로 인사하고 허허 웃으며 사진을 찍은 것 정도가 전부다. 높으신 분들은 다 그런 것인가

어쨌든 당대의 맞수로 몰아가기도 했고, 서로 비판을 많이 가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운동노선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 영향으로 인해 말년에는 각자의 노선 방향의 한계를 인식하고 다른 인권운동노선을 모색하고 서로 단결 노력을 하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킹 목사는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적극적인 투표권 운동과 구조적 빈곤의 문제를 지적하기 시작했으며 그에 비례해 고분고분한 인권운동을 원하던 백인들의 미움을 사기도 했지만 말콤 엑스도 백인을 무조건 적으로 대하는 자신의 생각을 고치고 킹목사의 인권운동을 비난하지 않게 되었다. 애당초 방향은 달랐지만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목표는 같았으니 당연한 결과라면 결과일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죽음조차 3년의 차이는 있지만 암살로 같았다. 말콤이 보이는 것과 달리 네 살이 더 많기에 둘다 만 40세가 되기 직전에 죽었다.

말년의 엑스 역시 그런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나의 운동과 킹 목사의 비폭력 운동은 접근 방식은 다르지만 목표는 항상 같다. 그 목표는 백인이 무방비상태의 흑인에게 저지르는 만행과 죄악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다. 이 나라의 이런 풍토에서, 흑인 문제에 대한 '두 극단적 접근방식'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 - 즉, '비폭력'의 킹 목사인지, 이른바 '폭력적'이라는 나인지는 -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묘한 부분에서 극명한 대비를 보이기도 하는데, 엑스는 사생활이 깨끗했던 데 비해서 마틴 루터 킹은 간음등 여자관계에 대한 루머가 좀 있었던 편이다. 그래서 파이크 리 감독영화 <말콤 X>에서는 엑스와 그 아내의 통화 내용을 도청하던 FBI 요원들이 킹 목사에 비하면 성인군자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부분이 있다. 이런 부분 말고도 서로가 대상으로 했던 흑인 내부 집단 또한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킹 목사는 전통적인 대규모 농업 중심으로 먹고 살고, 노골적으로 같은 화장실, 식수대, 버스 좌석도 못 쓰게 하던 인종 차별 법안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던 남부의 흑인들을 대상으로 활동했으며, 그에 따라 그가 선택한 방식도 자연스럽게 여전히 남부에서 인종을 초월하여 짙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복음주의 기독교였다. 반면 말콤 X는 소수라지만 한창 미국의 공업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수 많은 흑인들을 끌어 모으며, 그 중에서 적게나마 교육 받은 중산층도 존재 했고, 여전히 인종차별이 심하긴 했지만 남부 처럼 대놓고 같은 화장실도 못 쓰게 법으로 적어 놓지는 않았던 필라델피아, 뉴욕, 보스턴, 시카고, 디트로이트 등 북부의 도시 노동자 흑인들을 대상으로 당시 전세계를 휩쓸던 좌파 혁명론과 접목 된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마틴 루터 킹 비교 분석한 서적으로는 제임스 콘이라는 미국의 신학자가 지은 <말콤 엑스 VS 마틴 루터 킹>(원제: Martin & Malcolm & America)이 읽어볼 만 하다. 킹과 말콤의 일생과 인권운동을 함께 서술한 평전이라서 킹 목사와 엑스의 일생과 사상, 미국 흑인인권운동 이해에 도움이 된다.

또한 소설 뿌리의 작가이자 말콤 X의 자서전을 구술한 렉스 헤일리가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흥미있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당시 헤일리는 엑스의 측근으로 간주될 정도로 그와 가까운 사이였고, 인권운동 관련 사안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만날 기회도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데, 킹 목사는 헤일리를 만날 때 마다 '말콤 형제가 나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고 물어보았다고 하며, 엑스 역시 헤일리가 킹 목사를 만나고 돌아오면 항상 '킹 목사가 나에 대해서 뭔가 한 이야기 없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좋은 츤데레다. 알렉스 헤일리에 의하면 활동 후반기의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의 행동에 큰 영향을 주고 받고 있음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양 쪽 모두 상대방을 호의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4. 영화

인물이 인물인지라 영상화 구상은 여러번 되었다. 최초의 작품은 1981년 TV 드라마인 <Death of a Prophet>으로 모건 프리먼이 말콤 역을 맡았다. 처음 나온 시나리오는 시나리오이기 보다는 시나리오의 탈을 쓴 철학적 고백록이었고 이후 영화에 걸맞게 대폭 수정되었다. 물론 마지막 부분을 보면 원작의 지루함을 느낄수 있다

이 새로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제작한 스파이크 리 감독, 덴절 워싱턴이 주연한 1992년 영화 <Malcolm X>가 유명한데, 기본적으로 젊은 시절의 워싱턴이 워낙 엑스와 닮은데다 명배우이다보니 정말 실제 엑스와의 미칠 듯한 싱크로율과 환상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성지순례를 갔을 때 쿠란의 파티하 장을 암송하는 장면은 꼭 보자. 런닝타임이 세 시간이 넘어가서 상당히 긴 영화이고 보기에는 지루한 영화일 수도 있지만 한 사람의 전기를 읽는다고 생각하고 보면 몰입해서 볼 수 있다. 이 영화가 말콤 엑스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서 방황기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에 대해 한 번 훑어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내레이션은 영화배우 오시 데이비스가 말콤 엑스의 장례식 당시 실제로 했던 추도사이며, 영화 속의 내레이션 목소리 또한 데이비스의 목소리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넬슨 만델라가 깜짝 출연하여 흑인 어린이들에게 엑스의 정신에 대해 말해 준다.

원래는 노먼 주이슨이 감독할 예정이었으나, 리가 강력하게 자신이 감독하고 싶다고 나서며 주이슨을 찾아가 설득하는 통에 리가 감독하게 되었다. 도중에 제작비 문제로 제작에 차질이 있자 흑인 유명인들에게 호소하여 제작비를 얻어 기어코 완성했는데, 이 때 제작비를 대준 유명 흑인에는 마이클 잭슨이나 마이클 조던 같은 전설적인 인물도 있었다고 한다.

5. 자서전

이 영화의 토대가 된 말콤 엑스의 자서전은 그의 구술자료를 바탕으로 집필 당시로서는 무명 작가인 알렉스 헤일리[12]1965년 엑스가 사망한 뒤 출간한 것이다. 헤일리는 해안 경비대 출신이고 그때부터 습작을 했으며 엑스와 함께 자주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느날 엑스가 흑인 이슬람국의 높으신 분들과 싸우고 와서(...) 의견 대립에 대해서 화풀이를 할때 기분 전환으로 우연찮게 던진 당신 어머님에 대해서 말씀해주실수 있으십니까?에 필 받아서 구술 회고록을 남기게 되었다.

말콤 엑스는 헤일리에게 "이거 출판될 때 나 살아 있을까요?"라고 농담을 던졌다고 하는데 정말로 출판되기 전에 암살당해 버린 것. 헤일리 역시 말콤 엑스에게서 얻었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으로 유명한 걸작 뿌리를 완성하였다. 후기에 나온 자서전판에서는 엑스의 자식들의 아버지에 대한 느낌. 엑스 암살 전후에 대한 헤일리의 소고 등이 실려 있다. 뿌리만큼이나 헤일리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창작과 비평사에서 상, 하로 나눈 번역판이 출간되었는데 초판이 1978년이라는 너무 오래 전 책이라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가 어렵다. 읽어 보고 싶은 사람은 헌책방을 한 번 수소문해 보거나 인터넷을 통해 알아보자. 아니면 지역 도서관에 비치되었을 수도 있다. 다만 한국판은 번역도 좀 미흡하고 원작에 등장하는 구질구질한 욕설같은 맛이 전혀 없다. 영어가 되신다면 원작을 보기로 하자. 실제로 감정이 격해지는 부분에서는 자서전에 육두문자가 그대로 노출된다. 여기서 실존 인물인 말콤 엑스의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상스러운 말은 걸러서 듣자.


6. 어록

"나는 어떠한 아메리칸 드림도 보지 못하고, 아메리칸 악몽을 봅니다."[13]

"여러분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평등과 정의, 그 외 어떤 것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인간이라면, 스스로 쟁취해야만 합니다."[14]

"무슨 수를 써서라도!"[15][16]

"기독교가 미국에서 이룬 가장 위대한 기적은 흑인들을 전혀 폭력적이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2300만의 흑인들이 압제자에 맞서 분연히 궐기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예수가 지금 여기 미국에 있었더라면 백인으로 오지 않았을겁니다. 백인은 압제자입니다. 그는 탄압받는 자들로 왔을 것입니다. 그는 비천한 자들로 왔을 것입니다. 그는 하찮은 자들로 왔을 것입니다. 무시받고 경멸 받는 자들로 왔을 것입니다. 이른바 미국의 흑인으로 왔을 것입니다!"

"나는 누가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 비인간적인 대접을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하나의 범죄라고 믿고 있다. 만일 기독교 철학이 그렇게 해석되고 간디의 철학이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바라면, 나는 그것들을 범죄의 철학이라고 부르겠다."

"백인은 악마다! 그렇다. 그 악마는 우리의 적이다!"

"투표권이 아니면 총알을!"[17][18]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날 때마다 또 하루를 빌렸구나 하고 생각한다."[19]

(흑인에 도움된 백인이 정말 없냐는 질문에) "굳이 말하면 두사람이 있는데, 히틀러스탈린이다."[20]

"백인이 흑인에게 "나를 증오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강간범이 강간당한 사람에게, 또는 늑대에게 "나를 증오하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우리의 선조가 못된 에게 물렸고 나 자신도 사악한 뱀에게 물려서 내 아이에게 뱀에게 물리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데, 바로 그 뱀이란 놈이 나더러 증오를 가르치는 자라고 비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예 시절의 우리 선조들이 이른바 "흑백통합"을 주장했다면 아마 목이 잘렸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흑백분리"를 주장하자 백인들은 우리를 증오를 가르치는 파시스트라고 비난한다.

"오늘날 엉클 톰[21]은 머리에 터번을 두르지 않았다. 이 현대적인 20세기 엉클 톰은 이제 크모자[22]를 쓰고 있다. 그는 옷도 잘 입고 교육도 많이 받았다. 세련된 교양의 소유자일 수도 있다. 때때로 예일이나 하버드 악센트로 말을 한다. 교수님, 박사님, 판사님, 목사님이거나 무슨무슨 주교님에 박사님을 더할 수도 있다.[23] 그들은 흑인 몸뚱이에 백인 머리를 달아 놓은 친구들이다."[24]

"우리는 당신보다 더 단호하게 '격리'를 거부한다. '분리'와 '격리'는 명백히 다르다. '격리'는 강한자가 약한자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리'는 평등한 둘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400년동안이나 백인은 우리의 등에 긴 칼을 꽂아두었다가 이제 그 칼을 반쯤 뽑기 위해 흔들어대고 있다. 우리더러 감지덕지하라고? 어림없는 소리! 칼을 다 뽑아 낸다고 해도 상처가 남을 것인데!"

마지막 순간의 발언은 감동적이다.

"나는 과거 '양심적인 백인은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없다!'라고 대답한 것을 후회한다. 흑인 조직에 가담하고 싶어하는 백인들은 현실 도피로 자신의 양심을 위로하면 안된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양심을 증명해야 하는 곳은 흑인 사이에서가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에 사로잡힌 동료 백인 사회 속이다. 나는 양심적인 백인들에게 말한다. 우리 함께 일하자; 각자가 자신의 인종 속에서..." # 출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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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الحاج, 메카를 성지순례한 무슬림에게만 주어지는 칭호이다.
  • [2] 샤바즈(شباز)는 아랍어로 '사람'을 의미하는 شعب(sha‘b)와 '영광'을 의미하는 عز(azz)가 합쳐진 조어라고 한다.
  • [3] 단, 아버지는 독실한 개신교(침례교) 목사였고, 도리어 이런 아버지의 죽음이 백인에 대한 증오로 그를 몰아간 감도 있다. 당시 흑백분리 운동을 주도한 마커스 가비 목사는 흑인이 꼴도보기 싫은 백인들의 암묵적 지원을 받고 있었다. 세대차 때문이기도 하고.
  • [4] 암살 의혹은 있지만 사고라고 한다. 참고로 보험사기(…)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신빙성은 없다.
  • [5] 외할아버지는 백인이다. 즉 외할아버지가 흑인 가정부를 검열삭제해서 태어난게 엑스의 어머니, 엑스가 백인과 비슷한 붉은 머리색을 가진게 이런 이유이다. 엑스는 평생 이 백인 외조부를 증오했고 강간자이자 "붉은 머리의 악마"라고 불렀다. 사실이 그랬고.
  • [6] 사실 이 때 선생이 한 말은 "뭐? 검둥아. 니가 변호사가 되겠다구? 흥!"이란 식의 말투까진 아니고 당시 흑인의 대우를 상기시키며 "꿈은 크다만 현실적으로는..."란 완곡한 어감에 더 가까웠다고 한다. 거기다가 엑스가 학창 시절 가장 인간적으로 여겼던 교사였다는 것이 더 충공깽. 그리고 이 당시 진로상담을 온 백인 학생들은 대부분 '농부가 되고 싶다'는 등의 소박한(?) 꿈을 말했는데, 정작 그들에게 이 선생은 "꿈은 더 크게 가지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설교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말이 큰 상처가 되었는지 뒷날 엑스는 "그 때 선생이 격려해줬으면 난 성공한 변호사가 되었을 텐데"라고 회상했다. 다만 그가 성공한 변호사가 되지 않은 대신 흑인 인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죽어서도 역사를 움직이고 사람들에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의 말 한마디가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걸 학교 선생은 모두 알고 한말이었다든가
  • [7] 이 무렵에 1940~50년대의 유명한 흑인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와도 알고 지냈다고 한다. 그녀와 식사도 같이 하고 사진도 찍은 적이 있다고.
  • [8] 이슬람아랍어에서 단어만 빌려 왔을 뿐, 정통 이슬람교와 연계가 없는 미국의 흑인우월주의적 종교단체. KKK단 주장 중 백인과 흑인을 서로 바꾼 듯한 극단적인 흑인우월론을 펼쳤다. 몇십만 년 전에 일련의 과학자 집단이 선한 흑인을 유전자 조작으로 창조했다는 등 SF 소설 내용을 보는 듯한 교리가 특징적이었다. 이 때문에 나중에 교단이 교리를 수정하려는 계기가 되었다. 해석하면 이슬람의 국가지만, 나중에 등장하는 막장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인 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와 절대 헷갈리지 말 것.
  • [9] 근데 사실 미국도 19세기이집트는 흑인을 다스리는 백인 왕조가 통치했다는 인종주의 개드립 학설이나 믿던 걸 보면 그냥 정도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그런 사람이 없는 게 아니고...그리고 생각보다는 아프리카의 역사가 현재도 무시되고 있는게 사실이다. 오리엔탈리즘 참조.
  • [10] 이런 주장은 에이브러햄 링컨 등도 하던 주장이었고, 실제로 라이베리아 건국 과정에서도 이런 논리가 뒤따랐다. 물론 "분리"된 흑인들이 본토 아프리카에서 노예출신 자유흑인>>본토출신 흑인이란 물론 뭘보고 배웠겠냐만 깽판을 벌였다는 것은 흑역사.(항목 참조)
  • [11] 말콤에게 저렇게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언질을 놓은 워리스 딘 무함마드는 솔직히 흑인 민권 운동에 참여했다는 공로만 빼면 사이비 교주에 가까웠던 본인의 아버지에 비해서는 훨씬 더 개념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아버지 사후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직설적으로 말해 사이비 흑인우월주의적인 면을 청산하고 순수하게 북미의 흑인 무슬림들을 위해 봉사하는 주류 수니 이슬람의 교리를 따르는 단체로 개혁하려고 했고, 실제로 한때는 그렇게 성공한 적도 있었으나 루이스 파라칸이라는 오히려 엘라이자 무함마드의 상호 이해와 대화보다 증오와 원망을 강조하는 메세지, 뒤가 구린 사생활, 흑인 우월주의를 설파하는 사이비 교리, 반유대주의적 발언 등 안 좋은 점만 쏙 빼닮은 양반이 단체를 먹튀해서 아예 딴 살림을 차려 버렸다. 현재 네이션 오브 이슬람이란 명칭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쪽은 이 파라칸이란 양반이 먹고 나른 쪽이고, 워리스 딘이 주류 수니 이슬람으로 재편입 시킨 쪽은 별개의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 [12] 뿌리로 유명하다
  • [13] "I don't see any American dream, I see an American nightmare."
  • [14] "Nobody can give you freedom. Nobody can give you equality or justice or anything. If you're a man, you take it."
  • [15] "By any means necessary!"
  • [16] 흑인들이 단결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의를 실현하며 '자기방어'를 해야 한다는 뜻으로 했던 말이다. 영화 말콤 엑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사.
  • [17] "The Ballot or the Bullet!"
  • [18] 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liberty or death!)"에 빗대 확실한 흑인 투표권(남부 몇개 주에선 주어지지 않았고, # 연설 전문 말마따나 북부에선 그저 백인들의 대결이었을 뿐이다.)을 주장한 연설이다. 여기서 총알은 무장봉기를 의미한다. 이 연설이 있었던 1964년 다음해, 그가 죽은 이후 미국 법원은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주법은 위헌이라고 판결하였다.
  • [19] 죽음을 예감하며 남긴말. 그 뒷 부분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마도 '이슬람'의 일원에게, 또는 어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에게, 아니면 그들에게 고용된 무지한 흑인의 손에 죽음을 당할 것이다. 나는 지금 매일 하루의 목숨을 빌리고 있는 것처럼 살고 있다. 백인들은 그네들의 언론에서 나를 '증오'의 상징으로 이용했던 것처럼, 죽은 나를 이용할 것이다. 두고 보라. 나는 '무책임한' 흑인이라는 딱지가 붙을 것이다. 하지만 백인들이 '책임감 있다'고 치는 '흑인지도자' 치고 흑인을 위해 무언가를 성취하는 자는 없다. 나는 백인들이 나를 적대시하고 더 세차게 공격할 때마다 내가 미국의 흑인을 위해 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신념을 더욱더 확고히 느낀다.만일 내가 미국이라는 몸에서 '인종차별주의'라는 악성 종양을 도려내는 어떤 계기를 마련하고 죽을 수 있다면, 미약하나마 진리의 빛을 드러내고 죽을 수 있다면, 그때 모든 공로는 알라에게 돌려져야 하고, 오직 과오만이 나의 것이다."
  • [20] 이들이 벌인 제2차 세계대전냉전에 의해 울며 겨자먹기로 백인들이 위산업, 특히 사무직전문직에 흑인을 고용했다는 냉소. 할렘가의 주인, 숙집 주인조차 백인이던 시절이었다.
  • [21]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유래한다.
  • [22] 엉클 샘의 상징.
  • [23] 이미 흑인 판사는 1930년대에 나온 상황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항목 참조.
  • [24] 마틴 루터 킹같은 중산층 흑인들 중심의 민권운동을 비판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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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30 01:4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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