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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 라미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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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매니 라미레즈 (Manuel Aristides "Manny" Ramirez Onelcida)
생년월일 1972년 5월 30일
국적 도미니카 공화국/미국
출신지 산토 도밍고
포지션 좌익수/우익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1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3위
소속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93~2000)
보스턴 레드삭스(2001~2008)
로스앤젤레스 다저스(2008~2010)
시카고 화이트삭스(2010)
탬파베이 레이스(2011)
이다 라이노스(2013)

2004년 월드 시리즈 MVP
조시 베켓
(플로리다 말린스)
매니 라미레즈
(보스턴 레드삭스)
메인 다이
(시카고 화이트삭스)

Contents

1. 개요
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
3.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4.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과 그 이후
5. 대만 진출
6. 시카고 컵스 시절
7. Manny Being Manny
8. 평가


1. 개요

아메리칸리그를 대표하는 돌+I강타자이자 보스턴 레드삭스가 밤비노의 저주를 깨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선수이며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강타자였다.

통산 타율 0.312, 출루율 0.411, 장타율 0.585, 555홈런, 1831타점을 기록했고 30홈런 - 100타점을 12번 기록했다.

하지만, 약물 복용검사에서 2번이나 걸리며 약물 복용자로 희대의 약쟁이로 몰락하며 흑역사가 된 선수.

2.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절

1991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13번으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지명을 받은 매니 라미레즈는 1993년 확장 로스터에 포함되며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기 시작했고 1994년에는 91경기를 뛰면서 17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신인왕 투표 2위에 오른다.

1995년부터 우익수로 본격적인 주전으로 활약한 라미레즈는 곧장 31홈런, 107타점을 기록했고 1996년에는 33홈런, 112타점을 기록했는데 이 기록은 주로 6, 7번타자로 뛰면서 세운 기록이다.짐 토미가 8번을 치던 시절[1] 기량을 인정받은 라미레즈는 1997년부터 인디언스의 중심타선에 포진되었고 인디언스의 타선을 이끌어나갔다.

1999년에는 165타점[2][3]을 기록하며 무시무시한 타점본능을 보여준 라미레즈는 2000년에는 118경기에만 출장하면서도 122타점을 기록한다.

인디언스에서 매니 라미레즈는 타율 0.313, 출루율 0.407, 장타율 0.592, 236홈런, 804타점, 4번의 실버 슬러거 수상과 올스타전 출장을 기록한다.

그러나 당시 인디언스는 매니를 붙잡을 만한 페이롤을 보유한 팀이 아니었다. 인디언스는 7년간 연평균 1700만달러를 제시했지만 매니를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매니 라미레즈는 FA시장으로 나온다.

3.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2000년 12월, 8년간 1억 6000만달러라는 계약금을 받고 매니 라미레즈는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했고 입단 회견에서 "뉴욕 양키스의 독주에는 질렸다."라는 말을 남기며 타도 양키스를 밝힌다.

타력에 비해 수비력[4]이 부족했기 때문에 라미레즈는 레드삭스의 좌익수로 활약한다.그러나 수비에서도 안타제조기 스프링캠프에서는 크게 부진하며 먹튀가 되나 하는 우려를 받았지만 이적 첫해부터 곧장 41홈런과 125타점을 기록한 라미레즈는 2번째 시즌에는 타율 0.349를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타율 1위를 차지한다.

2003년부터는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트레이드로 온 뚱띵이와 공포의 중심타선을 형성[5]했고 2004년에는 지긋지긋한 밤비노의 저주를 깨면서 월드시리즈 MVP를 받는 등의 큰 역할을 한다.

비록, 수비에서는 약점을 많이 노출했지만[6] 그것을 커버해주고도 남는 타력이 있었고, 특히 라미레즈는 포스트시즌에서 더욱더 강력한 타자가 되었다.양키스에서 포스트시즌만 되면 방망이대신 삽을 드는 누군가는 각잡고 반성해야 할듯. 근데 걔도 이미 약쟁이로 판명되었잖아?

매니 라미레즈는 레드삭스에서 8년간 있으면서 타율 0.312, 출루율 0.411, 장타율 0.588, 274홈런, 868타점을 기록했고 6번의 실버 슬러거 수상과 8번의 올스타전 출장을 기록했다.

4.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과 그 이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다저 스타디움 좌측 파울라인 쪽에 매니우드라는 것까지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활용했지만 매니가 약빨다 걸리고 성적까지 시들시들해지자 결국 치워버렸다.(...) 그리고 나중에 저 등번호는 어떤 반도의 좌완 뚱띵이가 쓰게 된다.

매니 라미레즈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어 2008년 6월 5일, 탬파베이 레이스 전에서는 팀 동료 케빈 유킬리스와 다투고 7월에는 라미레즈가 직접적으로 레드삭스를 비난하는등 결국 매니는 7월 31일, 보스턴 레드삭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LA 다저스의 삼각 트레이드를 통해 다저스의 유니폼을 입게된다.[7]

그런데 사람이 달라졌다.

강력한 파이팅으로 라미레즈는 다저스의 팀 분위기를 이끌었고 스스로도 불방망이를 휘두르며[8] 다저스의 타선을 이끌어나갔다. 다저스는 이에 감복하여 매니와 2년 $45M의 연장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2009년 5월 7일 약물검사에서 배란 억제제 사용이 걸리며 50경기 출장 정지를 받으면서 몰락이 시작되었다.[9]

50경기 출장 정지후 돌아왔지만 이후, 예전만큼의 기량은 보이지 못했고 2010년에는 시즌 도중,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트레이드되었으나 또다시 부진.

2010년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선수로 시장에 나온 후에는 탬파베이 레이스와 계약, 레드삭스시절 팀 동료였던 동굴맨과 한 팀에서 뛰게 되었지만 또다시 약물검사에서 걸렸다. 첫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자 항소를 했는데, 변호인 측에서 참관한 가운데 실시한 검사에서도 양성 반응이 나오자 데꿀멍. 그에 따라 100경기 출장 정지를 받은 라미레즈는 결국 2011년 4월 8일, 기자회견을 열고 서둘러 은퇴한다.

다시, 메이저리그 복귀를 희망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지만...... 아내 폭행으로 다시 신문기사에 이름이 오르는등 복귀는 영영 물건너간듯. 메이저리그에서 다시 뛰려면 일단, 100경기 출장 정지 채우고 탬파베이 레이스에 몇년 무료 자원봉사뛰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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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최근 사진을 보면 한때, 우리가 알던 그 매니 라미레즈가 맞나 싶을정도로 말라깽이가 되어있다. 본인은 메이저리그에 복귀하지 못하면 일본프로야구 진출까지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몸이 이래서야... 아무리 전성기의 활약이 약빨이었다지만 이건 심봉사의 Before & After보다 심하다(...)

결국 2011년 오프시즌 플로리다에서 일본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입단 테스트까지 참가했지만 당연하게도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안습. 그리고 다시 메이저리그 복귀를 노리고 있었는데 이미 기량이 떨어진 매니를 잡으려는 팀이 드물며 설혹 복귀를 한다 하더라도 100경기 출장 정지부터 채워야 하기때문에 현실적으로 매니의 복귀는 불가능에 가까울 줄 알았는데…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그가 한 시즌을 쉬었음을 감안하여 실은 그냥 선수노조와 싸우기 싫어서라 카더라 출장 정지 경기 수를 50경기로 경감해 줬고, 2월 20일에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그를 연봉 50만 달러에 영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오클랜드로서는 그냥 싼 복권 긁는 셈. 한 때 1억불의 사나이가 약물 때문에 최저연봉 수준의 선수로 추락했다. 안습. 그런데 애슬레틱스에선 매니의 자리가 없었는지 징계가 풀린 이후에도 메이저리그에 올라오지 못했고 매니가 구단에 FA를 요청하면서 결국 방출당했다.

5. 대만 진출

미국 ESPN이 3월 7일까지 매니가 팀을 구하지 못하면 대만 프로야구 리그로 가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고 결국 대만으로 가는 것이 확정되었다. 팀은 EDA 라이노스[10].

이따 EDA는 매니의 요구에 따라 대형 빌라를 임대해주었으며, 자동차, 운전기사와 경호원 그리고 특유의 헤어 스타일을 관리할 수 있게 전속 미용실까지 제공하는 등 특급 대우를 보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2013년 3월 27일 슝디 엘리펀츠와의 개막전에서 지명타자로 출전했으며, 4월 4일 퉁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즈와의 접전에서는 대만 진출 첫 홈런을 뽑아냈다.(덤으로 CPBL 7000번째 홈런의 주인공이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한물 간 슈퍼스타이지만 2013년 CPBL의 흥행 보증수표 역할을 했다.(2013년 4월 4일 기준으로 매진경기가 17회 중 총 3회 있었는데 이 중 두 경기가 이다 라이노스의 경기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매니 라미레즈 보려고 야구 보러 온 사람이 늘었다는 소리인 셈.) 대만에서의 매니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의 선전과 더불어 매니 영입으로 인한 시너지 효과로 대만 프로야구 평균관중이 무려 300%(!)나 상승했다고...

하지만 매니는 기본 3개월 단위의 단기계약인 기존 계약 내용에 따라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3개월만 뛰고 대만을 떠나기로 했다. 소속팀인 EDA는 이미 리그 최고 연봉자인 매니에게 파격적인 연봉인상을 제시하는 등 매니를 붙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매니 측에서 거절했다고... 매니는 CPBL 통산 49경기에 나와서 타율 0.352 출루율 0.422 장타율 0.555 8홈런 43타점을 기록했다.

이후 6월 텍사스 레인저스 산하 마이너리그팀과 계약을 맺고 마이너리그 경기에 출장했으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8월 방출되었다.

6. 시카고 컵스 시절

2014년 5월 말에 시카고 컵스가 산하 트리플A팀인 아이오와 컵스의 플레잉코치로 영입했다. 아직 매니가 메이저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어서 코치보다는 선수로 더 뛰지 않겠냐는 게 중론이었지만 아리스멘디 알칸타라, 하비에르 바에즈, 호르헤 솔레어 등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타격코치로 좋은 능력을 보였다[11]. 매니를 영입한 테오 엡스타인도 이 정도로 해줄 줄 몰랐다며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무릎부상으로 마이너리그 일정이 끝나기 전에 아이오와 컵스에서 나왔다. 앞서 언급했듯이 매니는 선수 생활에 미련을 갖고 있어 컵스의 기대처럼 코치로 남아 선수들을 지도할지는 미지수다.

일단 테오의 부름에 타격 컨설턴트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시카고 컵스로 돌아왔다.

7. Manny Being Manny

원래부터 똘끼가 있긴했지만 레드삭스 시절 특유의 빛(?)을 발했다.

2002년 취임한 테오 엡스타인 단장은 매니가 훌륭한 타자이긴 하나, 수비 실력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오버페이가 심하다고 봤다. 그러다보니 매해 웨이버 공시(하지만 연봉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클레임을 거는 팀이 없었다.)나 트레이드 시도를 했고 그에 대한 반항으로 똘끼 분출이 시작되면서 상당한 화제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팬들은 Manny Being Manny라는 피켓을 들고 매니를 옹호하게 되었다. 번역하자면 '매니(의 똘끼)는 원래 그래요.', '매니를 좀 내버려 두세요.' 정도.

마이페이스인 매니의 기행 몇가지를 소개한다.

1994년 4월 4일, 원바운드로 담장을 넘어간 타구를 홈런인줄 알고 그냥 홈까지 내닫다가 3루심에게 제지. (원칙적으로 원바운드로 담장을 넘어가면 2루타)

2001년 12월 10일, 레드삭스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해서 레드삭스가 독립된 인터뷰실을 만들도록 함. (그러나 쓰지 않음)

2002년 9월 17일, 타석등장시 나오는 노래를 대마초 사용에 관한 가사를 담은 "Good Times"로 바꿈. (가사는 무삭제로)

2003년 8월 29일에는 뉴욕 양키스에서 뛰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그 다음날에는 몸이 좋지 않아 경기에 나설 수 없다고 이야기했지만 친구와 함께 호텔 바에서 함께 있었던 장면이 찍힘.

곧이어 9월 1일에는 감독의 대타 출장을 거부.

2004년 7월 21일에는 팀 동료였던 중견수 자니 데이먼의 송구를 중간에서 컷하려고 불필요한 다이빙 캐치를 시도하다 인사이드 파크 홈런을 허용. 이젠 홈런제조기라고 불러다오.

2005년 8월 24일에는 1사 만루에서 땅볼을 치자 1루로 뛰지않아 병살을 당했고 결국 팀 패배에 일조.


투수 앞 땅볼을 치고 산책(?)하는 매니.


그 외에도 공수 교대 타임에 그린 몬스터 안에 들어가서 전화를 한다든가 안에서 점수판 조작하는 직원[12]과 노가리를 깐적도 있다.


매니가 미겔 카이로의 홈런성 타구를 잡아내는 모습. 수비에서는 몸개그로 유명하지만 가끔 이런 것도 잡아준다.


대만에서도 한껏 개그본능을 발휘하는 매니. 하여간 누가 매니 아니랄까봐...
매니의 개그슬라이딩

8. 평가

역사상 최고의 타자중 한 명으로 놓아도 될 정도로 빼어난 기량을 보여준 타자였다. 특히 포스트시즌에서 더욱더 강력한 모습을 보였고 레드삭스가 밤비노의 저주를 깨고 우승을 두 번이나 하는데에 있어 일등공신이었다.

물론, 경기장 내외에서 여러 기행을 보이기는 했고 수비력에서 문제점이 노출되기는 했지만 그걸 덮어주는 타격이 있었다. 더구나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매일 6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는 등 눈에 보이지 않게 철저한 자기관리는 타인의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약물검사에서 2번이나 걸리면서 그의 이미지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쿠퍼스타운에 가기는 글러버린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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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당시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타선에는 50홈런, 140타점을 기록한 알버트 벨, 3000안타 - 500홈런을 기록한 에디 머레이, 공포의 8번타자, 나중엔 중심타선으로 이동했지만짐 토미, 전성기로 달려가던 오마 비스켈, 최고의 테이블 세터로 뽑히는 니 로프턴, 백업 포수로 나서면서도 10개의 홈런을 때린 디 알로마등이 포진한 살인타선이었다.
  • [2] 단일시즌 13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지만 이 위의 기록들은 대부분 1920 ~ 1930년대에 나온 기록들이다.
  • [3] 그 당시 핵 윌슨의 단일시즌 타점 기록을 깰 선수로 매니와 후안 곤잘레스를 주목했다.
  • [4] 우익수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깨는 강했다. 하지만 집중력이 많이 부족했다.
  • [5] 그러나 실제로는 매니보다 오티즈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된 상황
  • [6] 그래서 입단 초기에는 지명타자로 많이 뛰었지만 1루수비도 못하는 약쟁이가 온 이후로는 어쩔수없이 좌익수로 붙박이 출장을 해야 했다.
  • [7] 대신 레드삭스가 매니 대신 얻어온 좌익수는 제이슨 베이.
  • [8] 다저스 이적 후 타율 .396 17홈런 53타점 ops 1.232 (...) 참고로 불과 53경기동안의 기록이다
  • [9] 이후 7월에 뉴욕 타임즈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03년 비공개 도핑테스트에서 걸린 104명의 메이저리거 중 매니의 이름도 올라 있었다고 한다.
  • [10] 2012년 시즌 후 싱농 불스를 인수하여 구성한 팀이다.
  • [11] 특히 바에즈의 경우에는 그의 가족들과도 친해질 정도로 애착을 뒀다고 한다.
  • [12] 펜웨이 파크는 아직도 수동으로 점수판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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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01 0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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