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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림답부

last modified: 2015-10-05 22:27:08 by Contributors

고구려의 국상(國相)
기록 없음 명립답부
(166년 ~ 179년)
기록 없음.[1]

明臨答夫
(67년 ~ 179년 9월)(?)[2]

명림답부는 고구려 사람으로, 신대왕 때 국상을 지냈다. 한나라 현도군 태수 경림이 큰 군사를 일으켜 우리를 치려 하니,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싸울 것인가 물었다. 여럿이 의논하여 말하길, “한나라 병사는 우리가 약함만을 믿고 있으니, 만약 나가 싸우지 않으면 저들은 우리가 자기들을 겁낸다 여기고 빈번히 쳐들어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야말로 한 사람만 지키고 있으면 만 명도 그를 당해내지 못하는 곳입니다. 한나라 병사가 아무리 많다 하여도 어찌 우리를 이기겠습니까. 군사를 일으켜 막기를 청하옵니다.” 답부가 말하길, “그렇지 아니하오. 한나라는 크고 백성이 많은데다 지금 강한 병사들이 멀리 싸우러 왔으니, 그 칼날을 당해낼 수 없소. 또 병사가 많으면 마땅히 싸우고 병사가 적으면 마땅히 지키는 것이 병가지상사요. 지금 한나라 사람들은 천리 밖에서 양식을 가져 왔으니, 능히 오래 견디지 못할 것이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게 파고 보루를 높게 쌓은 뒤, 청야로써 기다리면 저쪽은 반드시 몇달 내에 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이니 그때 우리가 굳센 병사로 들이치면 뜻을 이룰 수 있소.” 왕이 그러하게 하여 성을 덧대고 굳세게 지키자, 한나라 사람들은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군사들이 굶주려 이끌고 돌아갔다. 답부가 수천 기병을 동원해 뒤쫓아 좌원에서 싸우니 한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대왕이 기뻐하며 답부에게 좌원과 함께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15년 가을, 9월에 향년 113세로 죽으니 왕이 몸소 찾아와 슬퍼하며 7일간 조회를 파하고 예로써 질산에 장사지내 무덤지기 20 가를 두었다.
삼국사기 제45권 명림답부 열전

Contents

1. 개요
2. 일생
2.1. 출신
2.2. 정변을 일으키다
2.3. 한나라군을 격퇴하다
2.4. 죽음
2.5. 평가
3. 의문점

1. 개요

고구려의 재상.

고구려 역사상 최초로 국상 벼슬을 지냈던 인물이다.(삼국사기) 이름의 앞글자인 '명림(明臨)'은 성이며, 명림씨는 연나부에 소속되어 있던 성씨라고도 한다.[3]

차대왕이 폭정을 일삼자 99세의 나이에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살해하고 신대왕을 왕으로 옹립하였으며, 이후로 고구려 최고위직인 국상 벼슬까지 지냈을 뿐만 아니라 나라 군의 침입까지 격퇴한 그야말로 노익장의 표본.

또한 태조왕과 함께 본격 웰빙 장수 고구려 전설의 시작을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2. 일생

2.1. 출신

명림답부의 출생과 초기 일생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명림답부는 본시 연나부(椽那部)[4]출신이었다는 기록만 남아있을 뿐이다.

본래 명립답부는 연나부에서 조의(皂衣) 벼슬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 조의는 고구려의 관등 체계에서 가장 낮은 선인(先人) 바로 위에 위치하며 밑에서 두번째(…)였다. 고구려는 어느 정도 봉건 부족제 속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명립답부는 연나부에서 소속된 중간 관료 급의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2. 정변을 일으키다

당시 고구려 왕이었던 차대왕은 전왕인 태조왕의 아우였는데 본래 용맹하고 위엄이 있어 많은 공을 세웠으나 인자하지 못하므로 큰 권세틀 틀어쥐고는 태조왕을 압박하여 왕위를 물려받고 태조왕의 아들들을 살해하였다.

이후 차대왕이 폭정을 일삼으므로 마침내 165년 10월에 명림답부는 백성들이 그 가혹함을 견디지 못하는 것을 이유로 삼아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시해하고 그 아우인 백고(伯固)를 신대왕으로 옹립하였다. 이 때 명림답부의 나이가 무려 99세였다.

이듬해인 166년 정월에 명립답부는 신대왕의 명에 의해 고구려에서 가장 높은 직책인 국상(國相)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여기에 패자의 벼슬까지 받았고, 병권까지 담당하게 되었으며 거기에다가 양맥의 부락을 거느리게 되었다. 명림답부는 고구려에서는 최초로 국상 벼슬을 지낸 사람으로, 명림답부 이전에는 좌,우보의 직책이 고구려에서 가장 높은 직책이었다. 이는 곧 명립답부가 사실상 국가의 정권을 장악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2.3. 한나라군을 격퇴하다

172년 11월, 한나라 현도군의 태수였던 경림[5]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이에 신대왕은 군신들을 불러모아 이를 막을 계책을 의논하였는데, 고구려의 군신들은 모두가 밖으로 나가 적과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명림답부만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명립답부는 신대왕에게 한나라 군사가 수가 많고 강해서 정면으로 싸우기 힘드니 적의 양식이 떨어질때까지 고랑을 파고 보루를 쌓아 방어하는 한편, 들의 곡식을 모두 거두어가며 방어할 것을 건의하였다. 고랑을 파고 보루를 쌓는 다는 것은 요새를 증축한다는 뜻이며 들을 비운다는 대목은 곧 적이 약탈할 양식을 모두 거두거나 태워버리자는 뜻이다. 신대왕은 이를 받아들여 청야전술을 펼치며 지구전을 벌였다.

결국 한나라 군대가 명립답부의 계책에 휘말려 굶주림에 지쳐서 퇴각하기 시작하자 명림답부는 직접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그 뒤를 추격하여 좌원에서 격파해 끝내 고구려를 지켜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 전투에서 한나라 군대가 한 필의 말도 살아돌아오지 못했을 정도로 크게 패하였다고 전한다. 이때 그의 나이 106세였다.

이에 신대왕은 크게 기뻐하며 명립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주어 명림답부의 식읍으로 삼도록 하였다.

2.4. 죽음

이후 명립답부는 179년 9월에 죽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나이가 113세였다. 신대왕은 크게 슬퍼하며 스스로 영구에 이르어서 통곡하였고 7일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또한 명립답부를 질산에 장사지내고 수묘(守墓)[6] 20가호를 두어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에 신대왕 또한 죽었다.

명림답부의 수명이 워낙에 길다보니 삼국사기태조왕 - 차대왕 - 신대왕 형제설이 매우 그럴듯하게 보이는 효과가 있다(…).

2.5. 평가

명립답부가 일으킨 쿠데타는 여러모로 고구려 역사에 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래 고구려 5부 중에서 왕족인 고추가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부족은 당시 고구려의 왕족이었던 계루부와 과거에 왕을 배출했다는 소노부[7] 뿐이었다. 그러나 연나부 출신인 명립답부가 차대왕을 제거하고 신대왕을 옹립하며 국정을 장악하면서 이후로 연나부는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는 왕비족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그 세력이 강성해졌고 기존의 왕족이었던 계루부, 소노부 등과 더불어 고추가의 칭호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볼 때 고구려가 외적에 맞서 청야전술을 구사한 기록은 사실상 명림답부의 경우가 최초라고 볼 수 있다. 이후로 청야전술은 대대로 고구려가 외침에 대항하는 기본 전술로 자리매김하였는데 이를 최초로 도입한 명립답부의 존재감은 실로 크다고 할 수 있다.

3. 의문점

일단 상식적으로 볼때 명림답부가 지나치게 오래살았다는 것부터가 문제점이다(...). 명림답부의 수명은 매우 긴데, 이는 동시대에 살았던 태조왕, 차대왕 등과 비슷하다. 당시 고대 고구려인들의 수명 치고는 너무 오래 살았다.

때문에 태조왕차대왕의 긴 수명이 후에 잘못 기록되었다거나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일단 왕의 수명에 억지로 맞추기 위해(...) 명림답부의 수명도 길게 늘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기록을 보면 명림답부는 쿠데타를 일으키기 직전까지 조의 벼슬을 지냈었는데, 그때 명림답부의 나이는 99세였다. 명림답부가 실제로 당시에 나이가 99세였다고 쳐도 그렇게 나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그때가지 벼슬을 하고 있었는지도 의문점이 제기되는 점이다.

만약에, 예를 들어 명림답부의 나이가 99세였다는 기록이 일주갑인상(一周甲引上)으로 조작된 나이라면, 99세에서 60년을 빼서 39세에 쿠데타를 일으킨 걸로 하면 이 쪽이 합리적일 것 같긴 한데... 에라이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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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한대 건너 을파소가 국상직에 임명되었다.
  • [2] 삼국사기 기록.
  • [3] 후의 역사기록에 등장하는 같은 성씨인 명림홀도도 연나부 사람이었기에 일리가 있는 말이다.
  • [4] 고구려 5부 중 하나
  • [5] 한사군의 하나인 그 현도군이 맞다. 하지만 비교적 초기에 한반도에서 이치되어서 국내성 인근으로 갔다가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이번에는 요동지역으로 옮겨진 이후였다. 요동으로 옮긴 이후 현도군은 요동지역의 패자인 공손씨의 아래에 들어가는데, 단적으로 160년대 중후반 고구려 및 부여와 전쟁을 벌인 현도 태수는 공손역이었다. 이후 경림을 살짝 거쳐서 공손도로 이어지는데, 이는 적어도 120년대에는 요동을 장악한 공손씨와 고구려 사이에 벌어진 긴 항쟁의 일부이지 한나라 조정에서 고구려를 공격하겠다고 나선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 [6] 고대에 귀인의 무덤 곁에서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 [7] 비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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