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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last modified: 2015-03-28 23:59:45 by Contributors

明宗

동북아시아에서 군주에게 붙이는 묘호나 시호의 하나.

밝을 명자와 달리 이 묘호나 시호를 가진 군주는 어째서인지 대부분 바지사장이다. 조선 명종은 권력이 없던 건 아니지만 통치기 내내 어머니에게 눌려 있었고, 후당 명종과 원 명종은 원 명종은 이름 명이라서 황제 노릇을 별로 하질 못했다(...). 안습.

목차

1. 고려 명종 왕호
1.1. 소개
1.2. 기타 창작물
2. 조선 명종 이환
2.1. 소개
2.2.
2.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3. 오대십국시대 명종 이사원
4. 원 명종 보르지긴 쿠살라

1. 고려 명종 왕호

고려의 역대 국왕
18대 의종 왕현 19대 명종 왕호 20대 신종 왕탁

묘호 명종(明宗)
시호 명종황명광효대왕
(明宗皇明光孝大王)
왕(王)
호(晧)
지네딘 지단(之旦)
배우자 광정왕후(光靖王后)
아버지 왕해(王楷)
어머니 공예왕후(恭睿王后)
생몰년도 음력 1131년 10월 17일 ~ 1202년 11월 17일
양력 1131년 11월 8일 ~ 1202년 12월 3일 (71세 25일)
재위기간 음력 1170년 9월 기묘일 ~ 1197년 9월 계해일
양력 1170년 10월 13일 ~ 1197년 11월 4일 (27년 23일)

고려 제19대

1.1. 소개

고려 제17대왕 인종아들이자 고려 제18대왕 의종의 동생이다. 의종에게 아들들이 있었고, 의종 다음으로도 대령후 경이 있었기에 순번상 왕위계승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는데..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살육하고 의종과 태자를 몰아낸 다음 유약한 성격인 그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약간은 조선 중종과 비슷하지만 쿠데타 세력의 성격이 매우 달랐다.

사실상 무신정권허수아비 임금이었다. 게다가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문신들을 죄다 족쳐버린데다가 그 무신들도 결국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이고이의방이 죽이고 이의방정중부가 죽이고 그 정중부는 경대승이 죽이지만 계속 권력자가 교체되었으며 여기에 민중봉기도 자주 터지는 등 이래저래 사회가 막장이었다.

또한 유약한 성격은 물론이고 심각한 애처가딸바보적인 성향도 있는데, 애첩인 순주가 죽고 1년도 되지 않아[1] 1180년에 명춘마저 죽어버리자 우울증에 시달려 공예태후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다 들을 정도로 울어댔다고 한다. 그리고 심지어 후궁들 중에서 마음을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며 이미 시집간 둘째 딸인 수안궁공주를 측근으로 삼아 자신에게서 밤낮으로 떨어지지 못하게 한다음 밤에는 품에 끼고 잠을 자기도 했고 이 기간은 무려 5 달 가까이 되었다.[2]

그러다보니 결혼한지 1년만에 독수공방을 하게 된 사위가 분통을 터트리며 파혼을 요청하기에 이르었고, 그렇기에 명종은 결국 사위를 수창궁(壽昌宮)의 동쪽 태후(太后) 행궁(行宮)에 거처(居處)하게 하고, 공주를 보내 남편을 위로하게 했고 결국 5달만에 딸을 집으로 돌려보내주었다.

그리고 순주와 명춘 및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궁내에 불러들여서 화려한 오색 옷들을 입히고 놀기 바쁘다보니 궁 내가 하도 시끄러워서 자연히 군주로서의 권위는 저 너머로 떨어졌고, 경대승 정권 당시임에도 무관들이 전부 마음 속으로 명종을 비난하고, 수군거리며 탄식했다고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경대승 정권 이전의 정중부 정권 당시에는 음악이나 여색 등에 빠지는 것을 정중부 정권에서 제재했기 때문에 의종처럼 마음대로 노는 것도 못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중부 일가가 경대승에게 몰살당한 후에는 자유로워진 명종은 이런 방탕한 행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과연 의종의 동생이다.

그리고 경대승이 죽은 후 아주 잠시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당시 경주로 낙향했던 이의민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여[3] 임금 스스로 이의민을 불러서 관직을 제수함으로써 기회를 차버렸다. 그 때문에 고려의 무신정권기간이 길어지게 만든 인물이라서 심하게 까이기도 하는 왕이다.

사실 그가 이의민에게 권력을 넘겨준 것도 무신정변이라는 비정상적인 쿠데타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군부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 때문에 문벌귀족들 보다는 군부세력이 자신을 옹호할 세력이라고 판단하였고 이의민을 불러올린 것이다.

결국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에 의해서 명분을 세우기 위해 폐위되었고[4] 최충헌은 그의 아우 신종을 왕으로 세웠다. 명종은 그 후 이질에 걸렸지만 의원의 치료를 거부해 죽었다. 그 때 한 말이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였다. 실제로 사망 나이가 72세로 당시의 기준으로는 결코 단명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후사는 그에게 이어졌으니, 신종의 뒤를 이은 신종의 아들 희종이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폐위되자 명종의 아들 강종이 왕이 됐고 그 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그의 자손이 왕이 되었다. 덧붙여서 공양왕의 경우 부계로는 신종의 7대손이지만, 모계 쪽으로는 그의 후손이 된다.

1.2. 기타 창작물


고려명종.png
[PNG 그림 (12.38 KB)]
징기스칸 4 일러스트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 시나리오 1의 고려 국왕으로 등장하고 마치 무인정권을 통해 등극한 인물인양 설정되어있으나, 능력치나 수명은 안습이다. (무장들을 규합하여 쿠데타로 정권 잡았다며.. 이게 뭐야;;) 고려 왕 중 두 번째로 장수한 임금인데도[5] 십중팔구 얼마 못 가 병사해 버려 컴퓨터가 플레이시 거의 수하 장수로 있는 최충헌이 후계자가 되어 "최씨 고려"가 되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연회를 해서 빨리 자손을 만들어야 한다. 거기에 정발판에서는 얼굴이 그나마 한국 왕 답지만 일본판에서는 무슨 왕서방으로 등장, 지못미. 그래도 사실 역사적 행적으로 봐도 그다지 좋은 능력치를 받기는 어려울 테니, "등장했다"는 데 의의를 둬야 할지도.

무인시대에서는 여러 사극에서 출연한 김병세가 배역을 맡았는데 배우빨로 어울리지 않게 간지를 내뿜으며, 고려를 걱정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그래봤자 명종이지만 심지어 경대승 때는 경대승이 충신으로 그려지면서 경대승을 의심하고 견제하는 수준의 기믹으로 올랐다. 결국 그 때문에 왕실 권위 살리기도 실패했지만[6].

다른 무인집권자들도 그 힘에 억눌리다가 힘을 잃으면 바로 버리고 사정없이 내치는 면모도 보였다. 물론 다음 집권자가 권력을 쥐고 정국을 장악하면 다시 힘없는 군주의 모습으로 돌아오지만, 최충헌은 이런 명종의 처신을 경계해 페위시키는 것으로 그려진다.

2. 조선 명종 이환

조선의 역대 국왕
12대 인종 이호 13대 명종 이환 14대 선조 이연

묘호 명종(明宗)
시호 조선 헌의소문광숙경효대왕
(獻毅昭文光肅敬孝大王)
공헌(恭憲)
환(峘)
대양(對陽)
출생
사망장소 한성 경복궁 양심당
배우자 인순왕후(仁順王后)
아버지 이역(李懌)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
생몰기간 음력 1534년 5월 22일 ~ 1567년 6월 28일
양력 1534년 7월 3일 ~ 1567년 8월 7일
재위기간 음력 1545년 ~ 1567년 6월 28일
양력

조선 제13대 왕.

2.1. 소개

중종문정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왕이 되기 전에는 경원대군(慶原大君)이었으며, 인종이 즉위할 때까지만 해도 그저 전왕 중종의 아들이자 현왕인 인종의 이복동생일 뿐이었으나 인종이 즉위한지 8개월만에 급사함으로서 왕이 되었다. 어릴 때 양눈에 안질이 있었다는데 인종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자신의 생명의 위협을 느낀 윤임이 대군은 안질 때문에 눈이 안보이니 왕을 못한다는 핑계로 그를 후계 선상에서 제외시켜보려 했지만 이언적 등이 대군의 승계를 지지하고 문정왕후가 강력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포기하게 된다. 만약 성공했으면 처음으로 방계가 보위를 잇게 되었을 것이다. 뭐 그래봤자 다음대엔 선조 때 방계친이 이었지만.

따라서 생모인 문정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을사사화재역 벽서 사건으로 대윤의 대신들과 사림들이 대거 숙청되었고, 권세를 얻은 소윤(왕의 외숙부 윤원형) 일파의 부정부패는 엄청나서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덤으로 보우를 통한 불교중흥은 유학자들의 반감을 샀다! 그야말로 사대부 입장에서는 외척 + 사화 + 불교 + 여자의 막장 4종 세트. 그래서 그런지 유명한 의적(?) 임꺽정의 활약도 바로 이 명종 재위 기간이었다.

20세가 되어 문정왕후가 스스로 수렴을 거둠으로 친정이 시작된다. 야사에선 문정왕후의 간섭이 심하였으며, 심지어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는 일까지 있었다고 하며 또 명종의 행동을 궁녀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여 조금이라도 자신을 욕하는 말을 하면 곧바로 불러 야단을 쳤다고도 하는데 이건 뭐 그냥 야사다. 아들 순회세자의 죽음 이후론 신하들 없는 곳에선 상당히 성격이 괴팍해져서 실록에서는 명종이 조울증홧병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록의 '사관 논평'에 나온 말이라서 문정왕후를 비하하는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위의 기록이나 야사 때문에 마마보이 임금이라고까지 비하하기도 하지만 정사상으로는 근거가 없다.

실제로 문정왕후의 권한이 막강하긴 했지만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정치에 크게 개입은 하지 않았다. [7] 명종의 정책에 문정왕후가 크게 제동을 건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중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을 크게 중용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문정왕후는 이의를 전혀 제기하지 않았다. [8] 그 뒤로 손꼽히는 개입이라 해봐야 명종이 윤원형을 지칭하여 "외척이 대죄를 입으면 어찌해야 하는가?"라고 말하자 명종을 불러 "주상, 이 어미와 외숙이 없었으면 왕이 됐을 것 같습니까?"라고 나무라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런데 일이 상당히 공교롭게 돌아갔는데 윤원형, 이기, 정순붕, 임백령, 최보한, 허자 등 소윤 일파의 좌장들 중에서 윤원형과 이기를 제외한 소윤들은 윤임이 자기를 죽이려한다는 환상에 시달리다가 명종 즉위 3년도 못되어 다 죽고 말았다. 유일한 생존자 허자의 경우는 윤원형의 심복인 진복창을 탄핵했다가 윤원형의 미움을 사서 숙청당했다. 윤원형급의 세도를 누린 이기는 이상하게도 그 존재가 윤원형에 묻혀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사람은 대윤 유인숙, 유관 등을 죽인 명종 집권의 주역 중의 주역이다. 그는 77세까지 장수하며 권세를 누렸는데 그도 명종의 친정 전에 죽었다. 명종이 본격적으로 무엇을 해본 시점에서 남은 사람은 윤원형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명종은 윤원형을 이량을 등용해 견제하는 등 권세를 이미 문정왕후가 죽기 전에 많이 약화시켜놓았다.

굳이 마마보이라고 불릴 만한 이유를 들자면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다고 했을 때 울며불며 사양했고 "대신들은 뭐하는가! 어머니를 말리지 않고!"라며 징징댄 모습 정도. 문정왕후가 청정을 거둔다고 한 해인 1553년에 명종은 20세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저건 일상적인 수렴 거부의 쇼이고, 저 모습과 달리 막상 친정을 시작한 후에는 딱히 모후의 간섭을 받지 않고 나름대로의 정치를 펼쳐 나갔다. 다만 재정은 어려움이 많았다. 외척의 득세도 득세이지만, 친정을 시작한 1553년 경복궁정전만 남긴 채 편전과 침전 구역이 모두 소실됐다.

어쨌든 그에 대한 반동인지 명종은 주로 내시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문제는 명종이 앓고 있는 조울증에 따라 총애하는 내시가 툭하면 바뀌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외아들 순회세자를 일찍 잃은 이후로 더 심해졌다. 단순히 총애의 정도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서 하옥시키고 국문하고 내시들이 신하들에게는 성군이면서 자신들에게는 나 다름 없다고 투덜거렸을 정도라고....

1555년 왜구가 전라도 서남해안에 대규모로 침입하여 영암, 장흥, 강진, 진도 일대를 휩쓸며 약탈과 살인을 자행했는데 이게 묘왜변이다.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남치훈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전주부윤 윤경을 파견하여,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영암에서 적을 크게 파하여 그들을 몰아내었다. 이 때 생겨난 비상기관인 비변사임진왜란 이후 상설정치기구화하게 된다.

잘 안알려진 사실이지만 을묘왜변 이후 조선은 해군력을 크게 강화하게 되고 판옥선의 도입, 총통의 개량, 수군의 정비, 권관제의 도입 등의 개혁을 추진하고 이는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을 뒷받침하게 된다.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자 명종은 윤원형 일파를 모두 숙청하고 억불 정책에 돌입하는 등 정치가 안정되나 1567년 명종도 34세의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다. 자신의 정치는 물론 후사를 구상하기에도 너무 짧은 2년이었다.

한편, 계속된 사화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방에서 힘을 기르던 사림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등의 척신들이 자리를 비우자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때는 성종 때처럼 훈구파도, 연산군 때처럼 반사림적인 임금도, 중종 때처럼 신진 사림을 제어할 세력도 없었기에 그야말로 사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렇게 조정을 가득 채운 사림은 조광조 일파처럼 왕도정치를 구현하고자 했고, 자연스레 성종 시절의 따박따박이 부활하게 되었으므로 명종은 이래저래 힘을 쓸 수 없었다. 교과서나 일반적인 서적에는 사림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고 명종은 그것을 지원한 것으로 나와있지만, 그것이 명종 자신의 색깔인지 아니면 주위에 휘둘린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9] [10]

외아들 순회세자[11]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기 때문에[12] 다음 왕위는 중종의 7번째 아들인 덕흥대원군[13]의 셋째아들이자 조카뻘인 하성군이 이었다. 명종이 후사 없이 죽어 직계가 끊겼기 때문. 안습한 점은 이미 명종의 병세가 사경을 해멜 정도로 위독할 때까지 후계자가 없어 그의 의지가 아닌 중전의 의지로 중종의 서손인 하성군이 선택 되어 즉위했다는 것이다. 여하간 그가 조선의 첫 방계 임금인 선조다.

참고로 이 사람의 어릴 적 친구가 정철. 하지만 꼬장꼬장한 정철의 성격 때문에 사이가 나빴다고 한다.

2.2.


Example2.jpg
[JPG 그림 (98.27 KB)]


능은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강릉(康陵)으로 중전 인순왕후 심씨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태릉선수촌과 한국체육과학연구원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 문정왕후의 이 위치해 있고 이 능의 오른편에는 삼육대학교가 있다. 임진왜란때 왜군에게 도굴당한 선릉정릉과 달리 강릉과 태릉은 워낙 단단해서 도굴에 실패했다고 전한다. 또 2007년까지는 비공개 능역이었지만 2008년에 40년만에 부분 개방제로 바뀌었다. 매주 금요일, 토요일 오전 9시~11시, 오후 2시~4시까지 하루 두 차례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단 주의할 점은 7월과 8월, 12월~2월까지는 산불 예방과 관람객 안전을 위해 개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강릉을 가려면 한여름과 한겨울은 피해서 방문해야 한다.

2.3.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신상옥 감독의 영화 내시에서는 후궁을 밤마다 갈아채고 경복궁 지하에 고문실을 운영하는 사직동 대공분실?! 변태 폭군으로 나온다. 배우는 남궁원. 역사 고증과 무관한데 대비가 보우고승이랑 가까왔다그래서 임신크리설정과 대비와 주상이 억울한 선비들을 도륙했다. 을사사화는 설정 및 갑자기 죽어서 세자 없이 다른 종손이 이었다는 설정을 넣기 위해서 일부러 명종으로 하였다. 남궁원이 내시감으로 나온 이두용 감독의 리메이크에서는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명종이 아닌 가상의 조선 왕 길용우로 설정한다.

3. 오대십국시대 명종 이사원

867~933

이극용의 양자. 나이는 고작 열두살 차이지만 927년 살해 된 이극용의 장자 이존욱(장종)의 뒤를 이어 나이 예순에 황제에 올라 6년 간 명군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사후 3년 만에 후당은 멸망.

4. 원 명종 보르지긴 쿠살라

몽골 제국의 역대 대칸
12대 자야야투 투그 테무르 칸 13대 쿠살라 후트그투 칸 14대 린칠반 칸
원의 역대 황제
8대 문종 투그 테무르 9대 명종 쿠살라 10대 영종 린칠반

묘호 명종(明宗)
시호 익성경효황제(翼聖景孝皇帝)
칸호[14] 쿠살라 후트그투 칸(ᠬᠦᠰᠡᠯᠡᠨ ᠬᠤᠲᠤᠭᠲᠤ ᠬᠠᠭᠠᠨ)
(和世㻋 忽都篤汗 / 화세랄 홀도돈한)
보르지긴(ᠪᠣᠷᠵᠢᠭᠢᠨ)
(孛兒只斤 / 패아지근)
쿠살라(ᠬᠦᠰᠡᠯᠡᠨ)
(和世㻋 / 화세랄)
연호 천력(天曆) : 1329년
생몰기간 1300년 12월 22일 ~ 1329년 8월 30일
재위기간 1329년 2월 27일 ~ 1329년 8월 30일


몽골 제국의 제13대 카간이자 의 제9대 황제. 시호는 익헌경효황제(翼獻景孝皇帝).

무종 카이샨의 장남으로, 문종 투그 테무르의 이복형이다. 휘는 쿠살라(和世剌). 영종 린칠반과 원혜종 토곤 테무르의 아버지.

천순제가 즉위한 직후 투그 테무르와 그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쿠살라는 수도 라코룸에서 멀리 떨어진 중앙 아시아에 있었다. 이복동생이 승리해 황제로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쿠살라는 많은 수의 군사들을 모아 라코룸로 향한다. 이 소식을 들은 투그 테무르는 형에게 양위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사해, 문종이 복위했다. 이에 대해 문종과 엘 테무르가 명종을 독살한 거라는 가설이 있다.

투그 테무르 사후에 차남 린칠반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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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거의 반년 정도였다.
  • [2] 자기 마음을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며 시집 간 딸을 불러들여서 하루종일 자신의 옆에만 있게 하고 잘 때는 끼고 잔 것이다.
  • [3] 이의민은 경대승이 두려워 경주로 도망갔었다. 이에 대해서는 수도의 군부 세력을 제어하고자 하였다 보는 시각이나, 경대승 잔당에 대한 문제 등이 추측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이의민은 선왕을 시해한 자인데다 천민 출신으로 그나마 만만한 상대이기도 했기에.
  • [4] 정중부 일당이 세운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 [5] 1위는 25대 충렬왕으로 73세
  • [6] 다만, 명종이 경대승을 견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작중에서도 그렇고 고려사의 기록을 봐도 그렇고 경대승이 정권을 잡으며 내걸었던 명분이 '무신정변 이전으로의 복귀' 였는데, 이것과 '명종에 대한 충성' 은 서로 완전히 모순된다. 실제로, 학계 일각에서는 만약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하지 않았더라면 경대승에 의해 의종이 복위되었을 거라고 주장하기도.
  • [7] 만약 그랬다면 개입한 예를 문정왕후를 까기 위해 사관들이 안 실었을 리가 없을 것인데 그런 기록은 없다.
  • [8] 근데 이량은 하라는 견제는 안 하고 스스로 부패하여 전횡을 부리며 다른 외척들을 해치려다가 열받은 명종에게 윤원형보다도 먼저 숙청당했다.
  • [9] 일례로, 당시 관료들은 진정한 현자를 등용하면 나라가 안정될 것이라고 보고 대학자 이황을 등용하기를 줄기차게 간청했는데, 나중에는 '뭐 적당한 자리 있음 알아보든가'라는 식으로 나왔다고 한다.
  • [10] 하지만 나중에는 '현자를 초대하나 오지를 않는구나'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라고 한 적이 있다. 불러도 오지않는 이황에 대한 섭섭함=사림 지원으로 볼 여지는 있다.
  • [11] 그의 부인이었던 공회빈 윤씨는 남편이 일찍 죽어 그 후 30여년을 청상과부로 살아야 했다. 그는 임진왜란 이전에 죽었으나, 선조가 수도를 버리고 피난 갈 때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후원에 가매장했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왔을때 왜군에 의해 가매장한 무덤은 파헤쳐져 있었고 시신은 없었는데 궁궐이 불에 탔을때 같이 탔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병자호란때는 종묘에 있던 신주마저 없어진 불행한 여인이었다.
  • [12] 외아들 순회세자가 죽고 아들을 보기 위해 노력을 했는데 꿈 속에 한 노인이 어느 여자를 얻으면 아들을 볼 수 있다고 했고 그 여자를 후궁으로 삼았다. 하지만 끝내 아들을 보지 못했다.
  • [13] 추증된 것이며 어머니는 창빈 안씨
  • [14] 몽골식 군주 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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