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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공방전


모스크바를 사수하자!

"동부전선의 병사들이여, 동지들이여 오늘 결정적이고 위대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된다."[1]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전반전: 독일군의 진격
3.1. 양측의 병력배치
3.2. 독일군의 초기진격
3.3. 주코프 등판
3.4. 라스푸티차:진흙의 바다
3.5. 동장군의 도래
4. 후반전:소련군의 반격
4.1. 주코프의 역습
4.2. 무더기 파면
4.3. 스탈린의 무리한 반격계획과 소강상태
5. 결과와 의의
6. 기타

1. 개요

War Thunder: "Победа за нами" / "Victory is ours"/워썬더 모스크바 공방전 73주년 기념영상[2]

모스크바 공방전을 상징하는 군가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

1941년 10월부터 1942년 1월까지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를 둘러싸고 나치 독일과 소련이 생사를 걸고 싸운 전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전쟁에서 소련나치 독일의 진공을 저지한 첫 전투. 그리고 무적의 독일 기갑부대가 처음으로 패퇴한 전투이기도 하다.

양측의 동원된 병력만 해도 당시에는 유래가 없을 정도로 대규모(독일군 190만 명, 소련군 125만 명.)였고 양측의 사상자 숫자만 해도 독일군 40만, 소련군 100만에 육박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전체를 통틀어도 매우 큰 전투에 속한다. 하지만 독소전쟁에서는 큰 전투가 앞으로도 여러번 벌어지잖아?

2. 배경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북부(레프 원수), 중앙(페도르 폰 보크 원수), 남부 집단군(룬트슈테트 원수)으로 나뉘어 세갈래로 진격했다. 각각의 목표는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였다. 그중 주공은 중부집단군이었고, 그 선두에는 제2기갑군(하인츠 구데리안)과 제3기갑군(헤르만 호트)가 서 있었다. 작전이 시작되자마자 중부집단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개전 시작 1달여만에 모스크바 바로 앞의 몰렌스크에 도달했다. 북부집단군도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면서 목표를 이뤘지만, 남부집단군은 고전했다. 이는 전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인 주코프(당시 총참모장)가 재직 당시 엄격한 훈련으로 좋은 부대를 많이 양성했으며, 개전 초기에 소련군 배치가 남부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의 진격을 일단 정지시키고 제2기갑군을 남부집단군을 원조하는데 돌린다. 제2기갑군 사령관 구데리안은 이에 대해 매우 항의했으나,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의 자원이 더 중요하다"며 키예프 공략의 선봉에 설 것을 명령했다. 구데리안은 이것이 패인이라고 전후에 펴낸 자신의 회고록 "기계화 부대장"에 기록해놨으나, 현재 전쟁사가들의 의견으로는 당시 중부집단군은 격전으로 소모가 엄청났기 때문에 재편없이 모스크바에 대한 공세를 계속하기는 힘들었다는 의견이 대세다.

8월에 남부로 전출된 구데리안군은 남부집단군을 도와 9월 26일에 끝난 예프 공방전에서 포로를 60만명이나 잡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이 전투 또한 격전이었기 때문에 구데리안군도 보급 및 재편을 위해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니 상당기간 동안 진격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남부가 평정되자 히틀러는 다시 중부집단군의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계속하기로 했다. 북부집단군에서 제4기갑군(회프너 상급대장)까지 중부집단군으로 전출시켜 '태풍(타이푼) 작전'을 실시하기로 했다.

독일군이 목표로 했던 모스크바가 가지고 있던 중요성은 전쟁에 대한 문외한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로 지대했다. 우선 소련의 수도라는 상징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또한 모스크바는 소련 각지에서 온 병력 및 물자를 시베리아 횡단철도 등을 통해 운송해서 전선에 배치하는 가장 중요한 거점이자 생산지였다. 따라서 모스크바를 점령할 경우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 및 수행 의지를 크게 꺾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였다.

지상전이 벌어지기 한참 전인 7월 말에 헤르만 괴링의 주도로 모스크바에 대한 대규모 공중 폭격을 감행했다.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런던 폭격처럼 수도 모스크바를 파괴해서 소련의 의지를 꺾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폭격 작전은 의외로 튼튼한 모스크바의 대공 방어로 인해 실패하였다. 결국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지상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3. 전반전: 독일군의 진격

3.1. 양측의 병력배치

태풍작전에 참가하는 독일 중부집단군은 총병력 190만, 전차 1,700대, 각종 대포 14,000문, 그리고 전투기 549대의 대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전격전의 주역인 세개의 기갑군(2, 3, 4)을 보유하고 있었다. 선봉이 될 전차군은 2전차군(구데리안), 3전차군(호트), 4전차군(회프너) 여기에 일반 야전군인 2군(바이흐스), 4군(클루게), 9군(슈트라우스)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때문에 초반에 700여만명의 어마어마한 병력손실(80만 전사, 300만 포로, 300만 부상)을 보았고, 전차와 전투기 또한 각각 2만대씩 잃는 등 예비병력까지 모두 소진한 상태였다. 소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에 서부에 290만명의 병력을 배치했고, 이후 작전이 경과하면서 추가로 500만명을 동원했으나 이 병력을 모조리 날린 처참한 결과를 얻었다. 설상가상으로 가장 가까이 있었던 대규모 병력 집결지인 키에프가 함락되면서 앞서 말했듯이 병력 손실만 포로 60만명을 포함한 100만여명 및 다대한 장비손실을 보았기 때문에 당장 모스크바 전면에 투입할 병력과 장비가 모자란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 방위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병력 125만, 전차 1,000여대, 대포 7,000문, 전투기 900여대로 전투기를 제외하고는 양으로도 독일군에 못 미쳤을뿐 아니라 질 또한 절망적으로 뒤져 있었다.

3.2. 독일군의 초기진격

독일군의 목표는 특유의 양익돌파(Pincer and Claw 또는 Keil und Kessel) 전법으로 모스크바 정면의 소련 서부집단군과 남방의 브랸스크 전선군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었다. 소련군은 모스크바 주변에 3중 방어망을 형성하고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뱌지마를 향한 독일군의 제3, 제4 전차군은 서부전선군을 양익돌파하여 포위했으나, 여름이나 가을과는 달리 소련군은 포위되어도 대규모로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며 저항했다. 그리하여 독일군은 예비병력을 이들을 섬멸하는데 써야 했다.

한편 구데리안의 2기갑군과 바이흐스의 제2군은 남방에서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으며 여기서도 브랸스크 전선군은 예상과는 달리 엄청난 저항으로 독일군을 애먹였으나 대체로 타이푼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3.3. 주코프 등판

스탈린은 위기를 느끼고, 모스크바 방위를 담당한 서부전선군의 사령관인 세묜 티모셴코로는 도저히 독일군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 함락 직전의 레닌그라드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주코프 대장을 10월 10일 모스크바로 불러들여 신임 서부전선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동무, 정말 모스크바를 사수할 수 있겠는가?"고 물었고 주코프는 "예비병력만 충분하다면 가능합니다"이라고 답했다. 주코프는 당시 참모차장이었던 바실레프스키 중장과 함께 방위작전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이때 소련군 참모총장은 포슈니코프 원수였으나, 그는 노환과 지병으로 인해 모스크바 방위전에는 그다지 관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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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상황을 전해오는 텔레타이프를 읽는 서부전선군 사령관 주코프 대장 (모스크바 전투 당시) 그 왼쪽은 불가닌 정치장교(후에 국방장관,원수), 그 왼쪽은 서부전선군 참모장인 소콜롭스키 중장(후에 소련군 총참모장, 원수).

엄청난 대패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신속히 전시체제로 전환하고 있었으며, 우랄산맥 근처에 건설해 놓은 공업지대에서는 우선적으로 무기를 미친 듯이 뽑아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후방에서는 계속 새로운 사단이 창설되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에 있는 간첩 리하르트 조르게가 일본이 소련 대신 미국을 공격하려고 한다는 정보를 보내왔는데, 이미 조르게는 바르바로사 작전 몇달 전에 독일의 침공이 6월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소련에 알렸으나, 스탈린은 "조르게란 놈은 엉터리 정보만 보내온단 말야"고 씹었다가 된통 당했으므로(...) 조르게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 상태. 따라서 당연하게도 조르게의 정보에 따라 극동에 배치된 정예병력을 서부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이 사단들은 특히 시베리아의 혹독한 겨울에 단련되어 동계작전에 능했다.

3.4. 라스푸티차:진흙의 바다

일단 이 시점까지 독일군의 진격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10월 둘째주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군 장성들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이것은 러시아 특유의 가을장마였다. 러시아의 비포장도로는 진흙탕이 되었는데 이 시기를 러시아어로 라스푸티차(распу́тица)라고 하며 뜻은 '진흙의 계절'일 정도라서 일반 진흙탕이 아니라 한번 빠지면 차량을 크레인으로 들어야 탈출할 수 있을 정도의 진흙늪이 된 상태였다. 당연하게도 독일군의 기갑부대는 빠르게 전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때부터 전선에 대규모로 나타나기 시작한 소련의 T-34전차는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뿐만 아니라 소련내의 포장도로들도 전차들과 장갑차들이 수없이 지나간 지라 완전히 너덜너덜해졌고, 이런 장마철에는 보급품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기도 어려워질정도로 도로 사정이 나빠졌기 때문에, 독일군은 진격뿐만 아니라 보급에도 차질을 빚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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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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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에 빠진 독일군의 3호 전차


이렇게 전선에 나타나기 시작한 T-34 전차의 성능은 좋았지만, 급박하게 공장을 뜯어다가 시베리아에 옮긴 다음에 급하게 생산한 물건인지라 스펙과는 달리 잔고장 및 기능 부조화가 두드러졌으며, 결정적으로 소련군의 전차운용이 한심했기 때문에 구데리안의 제2기갑군은 이를 작전과 전술로 물리치며 계속 전진할 수 있었고, 이 시기에 소련군은 거의 50만의 병력손실을 보았다. 이것은 당시 전 소련군 병력의 41%에 달했다. 바실레프스키는 모자이크스에 강력한 방어선을 가까스로 구축했고, 마침 10월 10일부터는 주코프가 전선지도를 담당했으므로 그가 직접 방위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패배가 잇따르자 스탈린은 모스크바 방위에 비관적이 되었고, 10월 13일에는 소련 정부의 모든 부서를 볼가강 하류의 쿠이비셰프(현대의 러시아 사마라 시)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또한 모스크바에 위치한 외국의 외교 공관들에게 모스크바에서 탈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렇게 되자 모스크바 시민들은 패닉 상태가 되어 피난가려는 사람과 약탈하는 사람, 또는 절망하는 사람으로 무질서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고 사수하겠다는 선언을 했고, 다른 정부요인들은 모두 도피시켰으면서도 스스로는 모스크바 공방전 내내 크레믈린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NKVD 부대들이 시내에 들어와 치안을 맡으면서 모스크바 시내는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일단 이 부대들은 약탈자들을 잡는 족족 현장에서 즉결처형하겠다고 공표했고, 진짜로 그렇게하면서 이름 값을 했다. 이 덕분에 어쨌든 소련군은 모스크바만은 반드시 지킨다는 굳은 결의를 가지고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군 뿐만 아니라 소련의 모든 기관(당과 정부)은 병사들과 국민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소련은 25만명의 민간인들을 동원해서 도시를 요새화 하고 각종 진지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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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동장군의 도래

10월 13일까지 구데리안의 제2 기갑군은 모자이스크 방어선에 도달했다. 이곳에는 9만명의 소련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방어선을 뚫으며 계속 전진하였으나, 진흙뻘로 변한 도로사정이 너무 나빠지는 바람에 진격속도가 둔화, 2주가 지난 10월 26일에야 툴라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곳을 돌파하려고 했으나 소련군과 민간인 지원병들의 맹렬한 저항에 진격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10월 29일에 독일군의 진격은 저지되었다.

11월 7일, 스탈린은 독일 공군의 공습 위협에도 불구하고 군과 민간인들의 떨어진 사기를 보양하기 위해 붉은 광장에서 10월 혁명[3] 기념 군사 레이드를 강행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퍼레이드에 참석하는 각 부대에는 퍼레이드가 열리는 당일에야 이 사실을 알렸고,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 붉은 광장에는 의료진들이 대기했다.
다행히 눈보라가 날리는 등 기상 상태가 나빠지면서 독일 공군의 공습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탈린은 기념 연설에서 "우리의 대의는 정의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 혁명후 금기시 되었던 러시아인의 애국주의에 호소했다. (스탈린의 당시 연설 전문) [4] 이와 함께 많은 군가를 작곡한 것도 애국주의를 고취시키기 위함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
이를 통해 사기는 어느정도 고양되었고, 이것을 본 스탈린은 주코프나 바실레프스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담한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독일군에게 격퇴되었고, 소련군의 에비병력만 소모시킬 따름이었다. 그 즈음에서 독일군은 수적으로는 2:1, 질적으로도 소련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용의주도하게 그 동안 구축된 다중방어망에 포진하고 있었고, 지형상으로 10월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기온은 점점 떨어지면서 영하 20도 근처로 급강하했다. 땅은 얼어붙어서 독일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전차가 드디어 움직일 수 있다고 좋아했으나, 여름 군복만 입은 독일군 병사들은 추위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차량 등의 중장비도 부동액이 없는 등의 이유로 인해 점차 엔진을 거는 것도 힘들게 되었다.

구데리안은 "신속히 동복을 보급 바람"이라고 중부집단군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사령부는 "앞으로는 이러한 불필요한 요청은 하지 말 것"이라는 답변만 보내올 뿐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10주만에 소련을 정복하겠다는 작전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미처 동복을 준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아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고 바르바로사 작전이 성공하더라도 일단 겨울을 소련에서 보내야 하므로 나름대로 월동장비를 장만했지만 수량이 부족한데다가 소련의 혹독한 겨울을 반영하지 않은 빈약한 장비였고, 결정적으로 광궤를 사용한 소련의 철도설비를 제대로 표준궤로 개궤하지 못해서 연료와 탄약, 식량같은 기본 보급물자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월동장비가 아직 폴란드에 못박혀 있었다. 그래서 독일군은 점점 거세지는 소련군의 저항 외에도 이런 동장군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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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군복을 입은 독일군 포로들

동계장비가 부족한 독일군은 수십만명의 동상환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작전지로 서부 유럽만을 고려한 독일군의 무기들은 이런 혹한 때문에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전차의 조준경은 얼어붙었고, 소총과 권총 역시 얼어붙어 방아쇠를 당기기도 어려웠으며, 윤활유는 굳어버려서 트럭은 1시간 동안 예열시켜야 했고, 포신 안에도 얼음이 달라붙어 포격이 불가능해졌다. 보급 용도로 여전히 다수를 이용했던 군마도 상당수가 얼어 죽었다. 독일군의 유일한 희망은 전사한 소련군 장병의 시신에서 동복을 벗겨내는 것이었으나, 동복도 시신과 얼어 붙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심지어는 톱으로 시신의 팔다리를 자르고 솥에서 끓인후(..) 장갑이나 장화를 벗겨냈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모스크바 중심부에서 30km위치까지 진격할 수 있었으며, 독일군 정찰부대는 망원경으로 크레믈린 궁전의 첨탑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은 독일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크레믈린이었다. 12월 5일 구데리안은 정지를 명령했고, 다른 방면의 독일군도 진격에 한계에 이르러서 멈추게 되었다.

4. 후반전:소련군의 반격

4.1. 주코프의 역습

주코프는 섣불리 반격에 나서지 않고 동부로부터 계속 도착하는 예비병력을 집결시켜 역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렇게 집결된 병력은 110만명에 이르렀으나, 이는 독일군에 비해 조금 많은 정도였다.

구데리안이 멈춰버린 12월 5일에 드디어 주코프는 공세로 나왔다. 소련군 부대는 동계장비를 완비하고 있었고, 더구나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공세로 나왔기 때문에, 헐벗고 굶주린 독일군은 도저히 이를 막아낼 수가 없었다. 독일은 이미 소련의 예비병력이 소진되었다고 생각했으나, 거대한 물량을 동원한, 그때까지 비교적 무명이었던 주코프의 공세는 통렬했고 독일군의 전선은 곳곳에서 돌파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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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복과 동계위장복을 완벽히 갖춘 소련군부대

여기서 강조해야 할 점은 소련군의 승리는 독일군 장군들의 회고록이나 냉전논리아래서 씌여진 전쟁사[5]들의 이야기처럼 단순히 날씨와 히틀러의 병크 때문만은 아니었고, 물량의 우위와 치밀한 작전, 그리고 소련인들의 승리에 대한 의지로 이뤄낸 것이었다.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참패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누적된 인구소모가 극심해서 한계에 부딪친 독소전쟁 말기를 제외하면 독일보다는 인적 자원면에서는 모자람이 없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군에 지원하는 비율도 높았다.

모스크바 근방까지 도달한 독일군은 패주하기 시작했고, 후퇴명령을 내린 구데리안과 제2기갑군이 배속된 상급부대였던 제4군의 클루게는 전화로 크게 싸웠다. 이 때문에 결투 직전까지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에도 두사람은 견원지간이 된다. 이것은 동부전선 최초의 독일군의 전략적 패퇴였다. 히틀러는 후퇴를 엄금했으나 12월 14일 총참모장 할더와 4군 사령관 클루게는 히틀러 허락없이 공식적으로 후퇴명령을 내렸다. 독일군은 모스크바로부터 100-200km 밖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4.2. 무더기 파면

히틀러는 중부집단군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고 후퇴하자 엄청나게 화를 냈다. 모스크바로부터 1,500km밖에 있는 동프로이센의 기지에서 지도만 보고 있으면, 최후의 목표인 모스크바로부터 마지막 30km만을 남겨둔 채 후퇴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독일군은 도저히 공세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진격이 멈춘 지역은 도시나 마을이 아닌 허허벌판이라 추위를 막을 시설이 하나도 없었고 월동시설을 건설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지휘관들은 환상 속에 있는 히틀러의 지시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후퇴를 했다.

히틀러는 자기 말을 안 듣고 후퇴한 지휘관들을 무더기로 파면했다. 12월 25일 구데리안, 회프너, 슈트라우스는 바로 파면되었고, 중부집단군 총사령관 보크는 히틀러의 압력에 못 이겨 건강을 핑계로 자진사임했다. 독일 육군 총사령관이었던 터 폰 브라우히치는 이보다 이른 19일에 해임되었는데, 그 후임자를 두고 독일군에서는 여러명을 물망에 올리고 있었으나, 히틀러는 충공깽으로 스스로 육군 총사령관을 겸임하겠다고 나섰다.

이것으로 프로이센 장교단에 대한 히틀러의 우위는 결판났으며, 히틀러를 제어할 수 있다고 믿고 히틀러의 집권을 은근히 도왔던 독일 장교단은 오스트리아 출신 예비역 상병의 손아귀에 노는 꼭두각시가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4.3. 스탈린의 무리한 반격계획과 소강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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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전투를 그린 스탈린 우상화 그림. 스탈린이 간지나게 최전선에서 지휘하는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 그는 크레믈린 궁에서 전황을 보고받을 뿐이었고, 방어전의 실질적인 총지휘는 주코프가 맡았다.[6]


스탈린은 개전 이래 처음으로 승리다운 승리를 맛보자, 더욱 대담한 계획을 세우는 병크를 저질렀다. 주코프와 바실레프스키는 아직도 취약한 소련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무리한 공세는 독일군처럼 역관광을 당할 수 있다고 계속 말렸으나, 강철의 대원수는 그런거 없었다. 독일군이 히틀러에 끽소리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련군 내에서 스탈린을 말릴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탈린은 더욱더 대담한 작전을 폈으나, 공군의 운용은 비교적 혹한에 강했기 때문에, 독일 공군은 날씨와 별로 상관없이 막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고, 제공권 없이 전진하는 소련군은 이런 독일공군의 폭격 때문에 큰 피해를 입었다. 이러자 소련군의 반격도 무뎌졌고, 결국 1942년 1월 7일 마침내 소련군도 공세를 멈추었다. 이래서 전선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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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름 포위에 착륙한 독일군 수송기

이 결과 홀름 포위망에는 사단급의 독일군이, 데미얀스크 포위망에는 군단급의 독일군이 소련군에 의해 고립되었으나, 제공권을 이용한 공군의 보급으로 봄까지 버틸 수 있었고, 결국 봄에 다시 반격해 온 독일군에 구원되었다. 이 때문에 히틀러와 괴링은 공중보급으로 포위된 부대를 구출할 수 있다고 과신하게 되었다. 이 과신은 1942년 후반기의 스탈린그라드 전투때 30만명의 병력을 가진 포위된 제6군을 공중보급할 수 있다는 과대망상에 빠지게 했고, 그 결과는 독일군 역사상 최대의 참패라는 참극으로 끝났다.

한편 독일군의 후퇴는 르줴프에 거대한 돌출부를 형성했고, 이 돌출부는 독일군의 교두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대한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1942년 11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독일군을 일소하기 위한 토성작전과 함께 실시한 화성작전은 이 르줴프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으나, 소련군은 큰 피해를 보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전투는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서방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이는 한국 밀덕후들에게 주코프의 흑역사로 운운되기도 하나 이 설은 데이비드 글랜츠의 개인적인 설이기 때문에 아직 학계의 정설은 없다. 그러나 어쨌든 화성작전 이후 독일군은 이 돌출부에 소련의 주공이 집중될 것을 우려하여 후퇴로 물러났다.

5. 결과와 의의

소련군은 독일의 진격을 막는 데는 성공했다. 히틀러가 야심차게 추진하였던 바르바로사 작전은 1941년까지 모스크바를 탈취한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모스크바 공략에서만 40만[7]에 이르는 사상자를 낸 채 실패했다. 소련군의 피해도 매우 극심했는데 사상자 수가 독일의 두배를 넘었으며[8] 모스크바를 수호하기 위해 도시를 요새화하는 등의 과정에서 시민들은 통행의 부자유, 거주지 상실 등의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은 1942년 봄에 레닌그라드 방면에서는 안드레이 블라소프가 지휘하는 공세가, 하르코프 방면에서는 세묜 티모셴코가 지휘하는 공세가 시작되었으나, 모두 패퇴하면서 소련군의 방위망에 오히려 구멍을 내버렸다. 특히 주코프는 모스크바 전투에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중부집단군을 완전히 밀어내기 위해 르제프에 주둔한 9군을 4면에서 포위,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지휘 하에 제1차 르제프 전투가 시작된다. 그러나 소련군에게 여러 모로 유리했던 동계 전투였음에도 9군의 신임사령관 발터 모델의 공세적 방어에 휘말려 오히려 소련군이 괴멸적 피해를 입으며 1943년 봄까지 주코프와 이반 코네프가 직접 지휘하는 소련군 주력 부대가 르제프 고기분쇄기(Rzhev Meatgrinder) 전역에서 말 그대로 갈려버렸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전투에서 소련의 잠재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1942년의 대대적인 독일군 반격에 고무되어 더욱 대담한 블라우 작전을 펼쳤다. 스탈린의 성급한 역공 때문에 남부 전선에서 소련군의 전력이 약해지고, 히틀러의 작전 때문에 독일군은 남부전선에서는 한동안 승승장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진격은 마침내 어떤 도시에 이르면서 멈추게 되는데...

모스크바 공방전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승장구하던 독일 육군에게 처음으로 대규모 패배를 안긴 전투[9]이다. 소련은 모스크바를 끝끝내 사수하는 데 성공하면서 기사회생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를 통해 독일 육군도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소련군도 깨닫게 되어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면서 사기가 크게 고양되었다.

주코프는 후에 독소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가 어떤 전투였냐는 기자들의 물음에 자신은 쿠르스크 전투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아닌 모스크바 공방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모스크바는 정치, 경제, 군사, 철도 등 어느 부문에서나 그 중요성이 큰 도시였고 철도의 경우 모스크바가 함락되면 유럽 러시아의 모든 보급이 끝장날 지경이였다. 더욱이 모스크바 공방전은 질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독일군에 뒤져 절망적이었던 상황에서 소련군이 거둔 승리였고, 그리고 연전연패하던 소련군에게 심리적으로는 자신감을 주었다는 점에서 이 전투의 중요성은 쿠르스크나 스탈린그라드 전투 못지 않다. 1945년 5월 9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소련군의 승리로 이어지는 길을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 기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러시아에서 매년 11월 7일에 이 모스크바 전투를 기념하고 있다. 위에 언급했듯이 11월 7일 10월 혁명 군사 퍼레이드를 마친 장병들이 독일군과 싸우기 위해 붉은 광장에서 바로 전선으로 떠났던 것을 기념하는 소규모 군사, 민간 합동 퍼레이드가 열린다. 2010년 11월 7일 퍼레이드. 원래는 공산혁명을 기념하기 위한 퍼레이드였으나, 공산주의가 몰락한 현재는 현재는 순수히 모스크바 수호기념 퍼레이드이다.

모스크바 전투의 참전 용사인 마르크 리샨스키가 작사하고, 이삭 두나예프스키가 작곡한 모스크바 찬가 «Дорогая моя столица»(«Моя Москва>>) (사랑하는 나의 수도(모스크바)여)도 바로 이 모스크바 공방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듣기)
노래의 3절의 가사가 다음과 같다.

Мы запомним суровую осень,우리는 혹독했던 가을을 기억하네
Скрежет танков и отблеск штыков, 전차 소리와 대검의 그림자를
И в веках будут жить двадцать восемь 28명의 영웅[10] 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네
Самых храбрых твоих сынов, 그대의 아들들 중 가장 용감했던

바로 이 노래가 위 동영상의 퍼레이드에서 러시아 국가 다음에 연주되는 노래이다.
이외에도 위 동영상 34:08부터 모스크바 공방전을 상징하는 군가라고 할 수 있는 모스크바 방위군 행진곡이 연주되는 것을 들을 수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 20군을 이끌고 독일군의 전선을 돌파, 주코프 버금가는 역할을 하여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지로부터 "모스크바 수호자"로 칭송을 받았던 안드레이 블라소프는 이듬해 봄에 독일군에 포로가 된후 전향하여 반동 러시아군을 이끌고 나치에 부역한다. 그러나 결국 전쟁이 끝난후 소련에 체포되어 반역혐의로 처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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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모스크바 공방전을 앞두고 히틀러가 병사들에게 한 말
  • [2] 모스크바 공방전 자체를 묘사한 것은 아니다. 영상에 나오는 티거, IS-2 전차 등은 모두 모스크바 공방전이 끝난 뒤인 1943~44년에 실전 배치하였다.
  • [3] 왜 '10월' 혁명인데 행사를 11월에 하는지는 해당 항목 참조.
  • [4] 원래 소련시절에는 볼셰비키혁명을 기념하여 11월 7일에 모스크바에서 군퍼레이드를 했으나, 이후 소련이 망하고 볼셰비키주의가 몰락한 후 러시아연방이 성립되었어도 이 모스크바 방위전의 승리 기념의 명목으로 계속 11월 7일에 퍼레이드를 한다.
  • [5] 한국에서는 육군사관학교가 펴낸 "세계전쟁사"가 이런 식의 기술을 하고 있다.
  • [6]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현대전에서 일국의 최고권력자가 최전선에서 전선을 통제하며 직접 지휘한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다.인디펜던스 데이 같은 경우도 있기야 하지만 그건 픽션이다 그야말로 소련의 스탈린 우상화가 어디까지 갔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림. 그렇다고 해서 스탈린이 모스크바를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도주하거나 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 인정받아야 할것이다. 근데 히틀러는 스탈린을 따라했다가 결국은 포위당해 스스로 요단강 너머로 갔다. ~~그런데 히틀러는 도망갈 데도 없었잖아?스탈린은 이론상으로 두고두고 도망칠 수 있었는데
  • [7] 1941년 11월: 145,000명, 1941년 12월: 103,600명, 1942년 1월: 144,900명
  • [8] 데이비드 글랜츠의 저서 '거인들의 전쟁'에 의하면 소련군은 방어 국면에서만 658,279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이후 1월 7일까지의 반격국면에서 또다시 370,955명의 손실을 냈다.
  • [9] 독일군 최초의 대패는 영국 본토 항공전이다.
  • [10] 모스크바 공방전에 참전했던 이반 판필로프 소장 휘하 제316소총병 사단 1075소총병 연대 2대대 4중대 소속 병사들로, 4시간의 전투 끝에 18대의 독일군 전차를 파괴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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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3 23: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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