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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알 카다피

(ɔ) U.S. Navy photo by Mass Communication Specialist 2nd Class Jesse B. Awalt/Released from


목차

1. 이름 표기
2. 개요
3. 생애
3.1. 성장과정
3.2. 집권과정
3.3. 미국과의 악연과 범아랍주의
3.4. 몰락
3.5. 최후
4. 업적
5. 가족관계
6. 그 외


1. 이름 표기

معمر محمد القذافي(Mu'ammar Muhammad al-Qadhāfī).

아랍어라틴 문자로 옮겨쓰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아랍어권 국가·지역마다 발음이 똑같은 게 아니라서 그의 이름을 'Gaddafi', 'Kaddafi', 'Qadhafi' 등으로 통일되지 않게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카다피 본인이 자기 이름이 라틴 문자로 어떻게 적히길 바라는지 따로 공표하지도 않은 듯. 아래 그림에서와 같이 무려 112개의 서로 다른 표기가 가능할 지경.


한국의 경우 03년 12월 55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국립국어원은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 Qaddafi)'로 규정했다. 관련 글. 밥 알아즈지야에서 발견된 그의 여권에서는 'Al Gathafi'로 적혀 있었다.

2. 개요

리비아의 전 독재자이자 중동판 리콴유가 될 수 있었으나 말년의 자국민 학살 및 탄압으로 최후를 맞이한 자. 비록 쿠데타로 권력을 잡긴 했지만 엄연한 전근대 사회였던 리비아를 근대화시킨 인물이라는 평가와 2011년 민주화 운동 당시 자국민을 무차별 학살, 탄압하고 결국 그 국민들의 손에 죽은 학살자라는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최후의 막장 짓거리만 보면 김정일과 동급이지만, 그 전만 해도 적어도 제3세계권에서는 괜찮은 지도자라는 평이 많았다. 물론 한국에서는 주로 영미권 언론에 의해 기행만 중점적으로 보도되고[3], 이것이 친미성이 강한 밀덕계 서브컬쳐에 알려지면서 그쪽에서는 이디아민이나 김정일류로 알려져 있었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이 수주한 대수로 공사때문인지 한국의 보수언론에 의해서도 석유가 아닌 미래를 보는 지도자로 칭송받았다.

1970년부터 스물 여덟의 나이로 리비아의 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었으며 동시에 리비아의 국가원수 겸 국가평의회 의장(=국회의장)까지 다 해먹었다. 과거 중동 일대에서 초강경 반미성향 지도자로 악명을 떨쳤으며 그 극단적인 언사와 기행으로 인해 서구권으로부터 사막의 미친개, 아랍의 망나니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으로 불렸으나 미국과 관계 회복을 어느 정도 이루어내서 많이 사그라들었다. 2009년 UN 연설 때 말한 것처럼 자신을 아프리카의 왕중왕으로 자칭했다. 리비아 내의 타민족 간의 통합 및 한국 건설회사[4]를 통한 대수로 건설[5] 등 경제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해당 과정에서도 특정 민족을 더 우대하고 가족들을 요직에 배치하며 세습제 국가를 만들려는 시도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반서구권 언행을 줄이고 가족들에게 정권을 이양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적절선에서 은퇴했다면 세간의 평가가 그나마 나아졌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외골수처럼 고집을 부리다가 아래처럼 반대 세력의 분노를 폭발시켜 버렸다.

2011년,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으로 반대세력의 저항에 직면했다. 전차와 전투기를 동원한 살육으로 맞대응했으나 이때문에 서방세계의 공격을 받고 내전이 벌어졌다.(리비아 내전)

2011년 10월 20일 그의 고향이자 마지막 거점인 시르테(Sirte)에서 시민군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끝내 사망하였다.

3. 생애

3.1. 성장과정

1942년 유목민인 베두인족의 일파인 카다파(Qadhadhfa) 부족 출신으로 카다피라는 이름도 부족 이름에서 딴 것이다. 사막 한가운데 천막에서 태어나 그 후 리비아 남부지역인 페잔에서 전통적인 베두인식 이슬람 종교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났다. 1952년에 나세르가 이집트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하자 여기에 영향을 받아 아랍세계를 통일해 기독교 세계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63년 벵가지의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벵가지의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재학 당시부터 동료 생도들과 왕정타도를 목표로 하는 자유장교단을 조직했다. 1965년 사관학교를 졸업, 육군 통신소위 임관과 동시에 1년 간 영국으로 유학 겸 파견근무를 하게 되었고 귀국 후 첫 보직으로 통신부대 장교로 부임하였다.

3.2. 집권과정

꾸준히 진급하며 경력을 쌓던 육군 대위[6] 카다피는 1969년 9월 1일 동료 장교들과 함께 수도 트리폴리를 공격하면서 기습적으로 쿠데타를 감행했다. 해외 순방차 터키에 체류 중이던 국왕 이드리스 1세는 객지에서 그대로 퇴위당해 터키로 망명했고 국가의 중추기관도 유혈사태 없이 간단히 제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카다피는 쿠데타 직후 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1월에 잠정헌법을 공포한 이후 신생 리비아 공화국의 최고정치기구인 혁명지도평의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1974년에는 정치이론을 연구에 전념하여 혁명평의회의 의장 권한을 2인자에게 잠시 위임하였고 다음 해 그의 정치이론을 집대성한 책이 나왔으니 이것이 녹색서(The Green Book)[7]이다. 1977년 소위 '인민주권확립선언'을 공포한 후 초대 전국인민위원회서기장에 취임했으나 1979년에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대신 오로지 혁명지도자라는 명예직함만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의 국가원수이자 리비아의 모든 국가 업무는 카다피의 지도하에 돌아가고 있다.


3.3. 미국과의 악연과 범아랍주의

(ɔ) Photographer working for al-Ahram (newspaper majority owned by the Egyptian government) from
1969년 이집트에서 나세르 대통령과 함께. 왼쪽이 카다피.

집권 이후 철저한 반미를 외치며 미군 기지를 철수시키고 옛 종주국인 이탈리아 사람들을 강제추방시켰다. 외국의 석유 메이저 또한 모두 내쫓고 석유를 국유화해 그 이익을 독점하였다.[8] 자신의 정치 사상을 관철시키기 위해 완전무결한 이슬람 국가 건설을 위한 일대 혁명을 주도했는데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음주 금지, 아랍사회주의에 따른 직접민주주의 제도를 구상하였지만...야당이 있어야지.

자신의 우상인 나세르처럼 범아랍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기 때문에 중동북아프리카에 걸친 광대한 지역의 중동 전체를 아우르는 이슬람 국가들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시도도 했다. 그 결과로 1972년 이집트, 시리아와 함께 아랍 공화국 연방(Federation of Arab Republics)을 구성에 합의, 그 해 7월 공식 출범했지만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평화정책을 추진하면서 1977년 7월에 해체되었다. 그리고 열불이 나서인지 이집트 국경에 상당한 규모로 공습을 가했지만 이집트군의 역습으로 되려 리비아군이 압도적으로 패했다. 1980년에는 시리아와의 합방을 선언했으나 곧이어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고 시리아에서도 그다지 반기지 않아서 합방은 무산.

제3세계 비동맹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기니비사우, 앙골라, 모잠비크, 나미비아, 짐바브웨, 우간다, 말리등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국내에 대한 철권 독재, 각종 인권 탄압, 테러, 실험 등의 의혹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특히 유럽, 미국, 이스라엘에 대한 각종 초강경 테러를 지원한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으며, IRA를 지원한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1988년 크리스마스에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여객기가 폭발해 270여 명의 사망자를 낸 팬암 103편 폭파 사건을 들 수 있다. 카다피가 테러의 용의자를 인도하는 것을 거부하자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카다피를 '테러리스트', '미친 개'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며[9] 경제제재를 시행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유화한 석유로 이미 막대한 재원을 확보한 그를 막지는 못했다.

카다피의 이러한 행각에 빡친 미국은 카다피에게 겁을 줘서[10] 테러 지원을 끊기 위해 소규모 공습을 벌였고, 그 결과 그의 양녀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단, 양녀 사망에 관해서는 단순히 선전용 조작이라는 말도 있다. #기사 참고.

그 영향으로 미국의 공격을 받거나 암살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아랍계 테러 조직에 대한 지원을 중지하고 잠시 데꿀멍하기도 했다. 이때 데꿀멍한 것은 카다피 뿐만이 아니라 잡다한 테러 조직들도 마찬가지였다. 이후로 친소련주의를 강화하면서 러시아제 무기를 많이 도입했다. 하지만 이 당시 우라늄이 가득한 지역을 두고 이웃 차드와 영토분쟁을 일으켰으나 또다시 되려 차드군에게 밀린 바 있다. 이른바 토요타 전쟁. 그래서 차드에 대해선 직접적인 무력 간섭을 삼가하는 대신 흑인계 앙헬 족과 백인 및 아랍계 혼혈에 가까운 투아레그(Tuareg)족의 무장을 서로 지원하여 차드를 내전 상태로 만든 것에 다른 미국 및 유럽 나라들과 같이 기여했다.

이후로는 조용히 지내고 있다. 심지어는 9.11 테러 이후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이 북한이란에 마구 적의를 뿜고 있을 때 데꿀멍하는 모습을 한 번 더 보여주어 부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기도 했다.(...) 오오 그거슨 狂宗 폐하의 위엄 2003년 공개적으로 반미정책 중단과 함께 모든 대량살상무기를 자진폐기하고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겠다고 공언하게 된다. 사실상 GG 선언. 그리고 2004년 팬암기 테러 용의자를 미국으로 인도하면서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시켰으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미국도 2006년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줬다. 또한 과거 이탈리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한 것에 대해 사과[11]하고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 사과도 받아들였다. 이러면서 그래도 나름대로 균형은 잡겠거니 싶었는데...

3.4. 몰락

나는 무력으로 이 혁명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무력에 의해서가 아니고서는 내가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여러분은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 1975년 5월 벵가지 Gharyounis(Garyounis) 대학에서 한 카다피의 사망 플레그연설

2011년 1월 그러니까 저 말 한지 36년 뒤 튀니지에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나면서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열풍이 리비아에도 불어닥치면서 상황은 예기치 않게 돌아가게 된다. 초기에는 작은 시위였고 벵가지 일대에 한정되는 것 같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확 불타오르기 시작해 2011 이집트 혁명 즈음엔 카다피의 고향인 시르테 등 일부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에서 카다피를 타도하자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게다가 수도 트리폴리에서도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2월 22일에 가진 국영TV를 통해 "공식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물러나 줄 수도 없다. 나는 영원한 혁명의 지도자이며 내 조상의 땅에서 '순교자'로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리비아 민주화 운동은 너 죽고 나 죽자라는 최악의 국면으로 흘러갔다.

2월 23일에 나온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지에 의하면 측근에게 '리비아를 되찾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리비아소말리아로 만들어버리겠다고 말했다 한다. 그리고 이건...누구도 날 막을 수 없어. 네 놈이건, 미국이건, 유럽이건, 그 누구도! 리비아를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테다!!! 이어 국민을 상대로 내전을 선포했다.


TV 연설에서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57년이나 왕위에 있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왜! 나! 카다피는 종신집권을 할 수가 업서!!"나 "알 카에다가 시위대에 마약을 주고 있습니다. 시위대는 마약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등의 망언개드립을 시전하면서 정신 상태마저 의심받고 있는 처지에 몰렸다.#

3월 20일 시작된 다국적 연합군의 오디세이 새벽 작전에 총력으로 맞서겠다고 큰소리 쳐놓곤 부랴부랴 UN오바마에게 공격을 멈춰달라고 애원했다.#

2011년 7월 2일 뉴스에서 "나토 공습 중단 안하면 유럽 공격"할 것이라며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 광장에 모인 수천 명의 지지자들에게 이같은 내용의 육성 녹음을 방송했다고 한다. 유럽이 아무리 천조국보다 못하고 반전여론 등으로 인해서 전쟁이 쉽지 않다지만 진짜로 한 번 손대면 말 그대로 뼈와 살이 분리될 수도 있을 텐데...#

한국 시각으로 2011년 8월 22일 수도 트리폴리가 반군의 손에 들어갔고 아들들도 반군에게 붙잡혔다.

한편 현지 시각으로 8월 29일 카다피의 아내 사피아 파르카시와 딸 아이샤, 두 아들인 무하마드와 한니발이 알제리로 도망쳤는데 여기가 최종목적지가 아닌 중간경유지일 가능성도 제기되기도.[12]

그리고 9월 7일 리비아 반군이 카다피 원수를 포위했다. 잡았다 요놈!#

3.5. 최후

트리폴리가 함락된 8월 21일, 카다피는 측근과 경호원 10여명과 함께 트리폴리에서 남동쪽으로 80㎞ 떨어진 산악지대 타루나와 카다피 지지세력이 포진한 바니 왈리드를 거쳐 시르테로 갔다. 무타심이 시르테가 누구도 생각하기 어려운 마지막 도피처라는이유로 도피할 것을 주장했다. 카다피의 사촌으로 리비아 인민수비대 사령관 만수르 다오 이브라힘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카다피와 함께 하고 있었다.

이브라힘을 비롯한 측근들은 카다피에게 해외 망명을 건의했지만, 카다피는 "여기가 내 나라다. 나는 1977년에 국민들에게 권력을 넘겨줬다언제?."고 말하며 반대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카다피는 시르테에 고립되었다. 카다피 일행은 빈집을 피난처로 삼았고 나토의 공습을 두려워하여 2,3일 마다 위치를 옮겼다. 컴퓨터가 없어 인터넷을 쓸 수도 없고, 전기마저도 자주 끊어졌으며 물도 없었다.

카다피 지지자들은 카다피가 최전선에서 전투를 독려하고 있다고 선전했으나, 카다피는 전투에 나서지 않았으며 총 한 발 쏘지 않았다. 주로 코란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으며, 외부와는 성전화로만 연락을 했다. 카다피는 시리아 방송에 결사 항전을 독려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 위성전화는 나토의 정보망에 파악되어 카다피의 위치는 추적되었다.

나토의 공습으로 카다피가 은신해있던 집에 포탄이 떨어졌으며, 경호원 3명이 부상당했다. 요리사가 다친 이후로 카다피 일행은 직접 음식을 만들어먹었는데, 민가에서 구한 파스타와 쌀 정도 뿐이었다. 이브라힘은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시민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카다피는 20일 은신처를 옮기려 했다. 자신이 태어난 생가 근처의 주택으로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초에는 40대 이상의 차량을 이용해서 오전 3시에 빠져나가려 했으나, 친위대의 집합이 늦어져 오전 8시가 돼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카다피는 SUV 차량인 도요타 랜드 크루저를 타고, 이브라힘과 경호대장, 친척 한 명, 운전사와 함께 탔다. 카다피는 이동하는 내내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나 출발 30분 후 나토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카다피의 최후. 시체 사진이니 혐짤 주의.
조선일보에서 CG로 재구성 한 그림. 그런데 시민군의 복장이 FPS 게임 카운터 스트라이크의 테러리스트 진영 복장이다.#

10월 20일(현지 시간), 농성을 하고 있던 고향 시르테에서 도주하다가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날 아침에 나토에서는 대규모 차량이 운집하는 상황을 정찰중이던 영국군의 토네이도 전투기[13]가 포착하고 미군에 알렸다. 카다피는 이때 시민군의 공격을 피해 도시 중심부를 탈출하고 있었다. 카다피를 태운 차는 호송차 100여대와 함께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나토는 일단 카다피가 타고 있는지 확신못했지만 여러 대의 차량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상황이 카다피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미군은 시칠리아 기지에서 무인기를 출격시켜 헬파이어 미사일을 발사해 차량 행렬을 공격했고 프랑스의 라팔 전투기도 출동하여 차량 행렬을 폭격했다. 이 공습으로 100여대의 호송 차량 중 기관총을 실은 트럭 15대가 파괴됐고 카다피 친위대 50여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카다피의 측근 이브라힘은 이 때 공습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시민군에 생포되고 병원에서 깨어났다.

카다피와 친위대원들은 차량에 내려 도로 밑의 배수관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하수구에 숨어있던 카다피에게 시민군이 다가왔고 결국 생포되고 만다.

두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채 생포되었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근데 다음 보도에서는 머리에 총상을 입어 죽었다고 나왔다. 미국 정부는 사실확인이 되지 않았다며 사망을 부정했으나 이후 사망한 것으로 최종확인했다. CNN 속보를 통해 시르테에 있던 리비아 시민군 병사가 휴대폰으로 찍은 카다피 시신 동영상까지 보도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쏘지 마시오."# 그래도 자기 목숨 아까운 줄 아네 자신이 전범재판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나본데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알 아라비아 방송에 나온 카다피 체포 영상을 보면 발견 당시 두 다리가 절단에 가까운 심각한 외상을 입은 상태였다. 체포 당시에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는 상태였고 의식이 있었기에 시민군들이 부축해서 차에 그를 실었지만 부상이 심한 탓에 후송 도중에 사망했다.

하지만 또 다른 보도에 의하면 부상이 아니라 흥분한 과도정부군들이 그를 집단 구타한 뒤 누군가가 머리를 향해 9mm 권총을 쐈고 그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또 집단 구타하는 도중에 누군가가 카다피의 엉덩이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프레임 컷이 발견되었다.#

위 프레임 컷에 등장하는 병사는 이후에도 앰블런스를 기다리면서 다 죽어가는 카다피의 엉덩이에 저 이물질을 계속 집요하게 삽입하려 시도하다가 시민군 장교한테 호통을 들은 뒤에야 그만뒀다고 한다.# 푹찍!! 으아아 왜찌르는거에요! 나쁜 독재자구나!!

참고로 다음의 링크는 패러디. 카디피가 청년막 뚫리기 전에 만들어진 패러디물이지만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찰지구나

10월 22일, 카다피의 사망 원인은 복부에 입은 총상 때문이었다고 공식발표되었다. 시민군들의 분위기는 그 당시에 축제 분위기였다. 완벽한 천하의 개쌍놈 레이드 성공 이 정도면...

카다피의 시체는 매장된다고 발표되었으나 그 전에 미스라타에 있는 정육점의 냉동창고에서 일반인들에게 전시되었다.

그리고 25일 카다피의 시체가 묻혔다. 매장 지역은 기밀로 처리된 데다 사막 한가운데 있기 때문에 영원히 찾지 못할 것이라 한다. 이래서 국민을 탄압한 독재자의 부귀 영화만큼 허황된 게 없는 거다 일각에서는 그렇게 본인이 생전에 주장하던 대로 리비아 땅에 뼈를 묻었으니 아주 잘 됐네라며 비꼬았다.

하지만 그가 죽은 이후 리비아가 내전에 휩싸이면서 전근대 사회로 복귀하면서 부분적으로는 재평가를 받는 추세에 있다. 자신이 죽으면 알카에다와 근본주의자들만 좋아할 것이라던 그의 절규는 어찌 맞아떨어졌다. 실제로 데르바, 시르테 지역에선 알카에다를 뛰어넘는 미치광이들이 몰려왔다.

4. 업적


리비아는 다른 중동국가처럼 왕가가 독점하는 오일머니를 이용해 전반적인 복지제도를 실시했다. 물론 카다피 일가가 이를 삥땅치고 상당히 사치로운 생활을 산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중동의 왕가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 그의 치하 하에서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가 실시되었다. 또한 카다피식 사회주의를 내세워 이슬람 근본주의를 억눌렀다. [14] 이슬람권에서는 드물게 남녀평등, 남녀공학이 실시되었으며, 무상교육뿐만 아니라 학용품, 식비까지 모두 무료인데다가 해외유학비도 국가에서 지원할 정도.

또한 장래 석유가 고갈될 때를 대비하여 오일머니로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수로 공사를 실시, 리비아에 농업을 확충하여 농업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했다. 이 공사의 1단계는 한국이 수주했으며, 이 공사를 위해 리비아와 한국과 직항편이 설치될 정도였다. 북아프리카는 로마시절만 해도 곡창지역이었다. 기후가 변하면서 사막이 되었지만, 관개만 제대로 된다면 토질은 상당히 좋은 편이니 이게 공상적인 계획은 아니었다.

반미를 내세우면서 아프리카의 대동단결을 모색했다.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1980년대 초반, 서방국가들이 ANC를 이끌던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며 외면할 때 유일하게 지원한 지도자가 카다피이다. 만델라는 항상 이에 대해 카다피에 고마움을 표해왔고, 남아공 대통령이 된 후 서방국가들과 리비아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을 정도.

5. 가족관계


  • 무하마드 : 장남
  • 세이프 알-이슬람 : 차남. 영국에서 유학한 엘리트. 카다피 재단 이사장이며 후계자 1순위. 8월 21일 생포되었다...고 알려졌는데 며칠 뒤 지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건재함을 과시했다. 아버지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후 복수를 다짐하는 메세지를 보내고 니제르 쪽으로 빠져나가려다 2011년 11월 19일 체포되었다.
  • 알 사디 : 삼남. 축구광. 무슨 이유에서인지[15] 허접한 실력임에도 불구하고 세리에 A까지 진출했는데 우스꽝스런 일화만 남기고 되돌아왔다. '아무도 막지 못한 선수'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지만 못 막을 만큼 강해서가 아니라 아예 막아볼 기회조차 없어서 그랬다고. 야, 웃기지 마. 8월 21일 생포되었다. 하지만 도망쳤으며 니제르에 도피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니제르 정부의 보호를 받고 있으며 인터폴이 그를 수배하고 송환 요구를 함에도 불구하고 니제르 총리가 송환하지 않겠다고 했다.
  • 무타심 : 4남. 2011년 10월 20일 아버지와 같은 날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 한니발 : 5남. 장남인 무하마드와 함께 알제리로 도망쳤다고 한다.
  • 사이프 알 아랍 : 6남. 나토의 공습으로 전사했다.
  • 카미스 : 7남. 카다피의 친위대 격인 카미스 특수 여단의 사령관. 트리폴리가 함락될 때 시민군과 전투를 벌이다 전사했다.
  • 아이샤 : 장녀. 변호사이며 사설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소박한 이미지를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모두 쇼. 사실은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것이 정권붕괴 후에 밝혀졌다.
  • 밀라드 : 카다피의 양자. 사실은 카다피의 조카이다.
  • 한나 : 카다피의 양녀.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사실은 생존해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6. 그 외

  • '국가평의회 의장' 직함 다음으로 카다피가 자주 불리는 호칭은 '대령'이었다. 카다피가 권좌에 오른 이래 국가원수란 개념을 계속 인정하지 않았지만 리비아 사람들은 이미 '대령'을 국가원수의 고유명사로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이 나라 사람이 아닌 정상적인 타국 사람들은 한 나라의 국가원수라는 양반이 고작 대령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에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왜 굳이 혁명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령이란 명칭을 고집했는지 여러가지 추측이 있었으나 일단은 나세르 빠돌이 설이 우세하다. 대위였던 카다피가 숭배하는 아랍권 지도자인 가말 압델 나세르이집트 대통령이 왕정붕괴 쿠데타를 일으킬 당시 계급인 대령을 따라 진급한 뒤 그 이상의 계급으로 진급하는 것을 스스로 거부했다는 설. 여기에 대령에 진급한 이후 혁명 당시의 초심을 잃지 말자는 다짐[16]으로 그렇게 했다고하는데 민주화 시위를 자초한 요인으로 봐선...

  • 현명하게도 독재자 킬러인 지미 카터를 만나지 않았다. 덕분에 사신의 마수를 피해갈 수 있었지만 오디세이 새벽 작전 때의 미군 사령관 이름이 '카터 햄'이다. 안습. 카터는 폭풍을 몰고온다

  • 뉴스위크지에 따르면 혼자서 40개의 훈장을 자신에게 수여했다.(...)

  • 1990년 아프리카 정상회담에서 알제리 대통령 라바흐가 카다피에 대해서 '본인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 결과가 어떤 건지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언행을 일삼는 어린애 같은 양반'이라고 비꼬는 발언을 하였다. 여기에 한술 더 떠 짐바브웨 대통령 무가베는 '생각없이 말하는게 꼭 뇌가 없는 것 같다'면서 맞장구를 쳤었다. 같은 독재자들 사이에서도 이미 노란 싹수로 분류된 셈.(...) 하지만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고 내전이 벌어지자 무가베는 카다피를 적극 지지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간적으로 좋게 본 것은 결코 아니지만 같은 독재자 입장에서 카다피가 반대 세력이나 서방세력에 의해 무너질 경우 선례가 남을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 카디피의 경호원들은 대개 여성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찌라시 언론들의 이야기처럼 3천궁녀나 기쁨조를 구성한 것은 아니고, 여성들의 충성심이 남성들보다 좋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여성으로 경호원을 조직했다고 한다.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마찬가지로 그의 건강을 돌보던 우크라이나 출신 간호사가 있었으나 리비아에서 소요사태가 벌어지자 카다피의 허락을 받았는지 고향으로 무사히 귀국했다.

  • 2009년에 집권 후 처음으로 UN 총회에 나타나서 음모론을 1시간 반 넘도록 떠들다 내려갔다. 처음에는 UN 창설 뒤 터진 65차례 전쟁을 해결하지 못한 무능함을 질타한 데 이어 5개 강대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안전보장이사회 체제를 신랄하게 까버렸다. 여기까진 좋았는데 뜬금없이 "UN 본부를 뉴욕에서 리비아로 옮기자"라고 말하더니 본회의장에서 헌장을 찢어서 던져버렸다.(...) 이날 남긴 말만 해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핵무기를 조사하려다 암살됐다.", "신종플루는 백신을 팔아먹으려는 제약회사들의 수작이다. 안예모 회원?", "아프리카 식민지배 피해 배상금으로 7조 7700억 달러를 내놓아라.", "오바마는 아프리카 혈통이니 우리 아들, 영원히 대통령 해먹어야."라는 등의 각종 개드립의 향연이 벌어졌다. 이때 1인당 20여분으로 제한되어 있는 연설 시간을 무시하고 거진 2시간 동안 혼자 마이크를 잡고 떠드는 바람에 그곳에 있던 국가 대표들이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아닌지라 사람들이 꽤 나갔다. 문제는 그 후가 이명박 대통령의 연설 순서였다.(...) 이 전후사정을 모르던 네티즌들은 꽤 사람들이 빠진 회의석을 보고 'UN이명박을 싫어한다!'라고 오해하게 되었다.

  • 해외 순방할 때마다 유목민식 천막을 공수해와 넓은 공터에 쳐놓고 지내는 기행도 자주 벌였다. 2009년 당시에는 그렇게 하려다 주변 주민들이 반대 퍼레이드를 벌였고 결국 도널드 트럼프의 사유지에다 천막을 치고 지내다 돌아갔다.

  • 권투가 야만적이라는 이유로, 국가적으로 금지를 시켰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야만스런 짓은 자기가 직접 했다는 것이 유머.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리비아는 과거 아프리카 내에서도 알아주는 권투 강국 중 하나였다. 결국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되고 난 뒤부터 권투는 다시 활성화가 되기 시작했다. 위 내용의 신문기사

  • 서구권 시각에서는 패션 센스가 괴악한 것으로도 꽤나 빈축을 샀다. 위의 여성 경호원 관련 블로그에 가보면 그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 '아프리카의 왕중왕(King of Kings of Africa)'이라고 자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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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비꼬는게 이 벽화. 아랍어로 '아프리카 원숭이 중 최고봉'.

  • 2002년 한국의 모 대학에서 명예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에 와서 받은 것은 아니고 총장이 직접 리비아로 건너가서 줬다. 이유는 카다피가 콩고 분쟁 등 아프리카 지역의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애써왔고 1999년 아프리카연합 창설을 주도하는 등 북아프리카의 발전에 기여했으며 아랍민족주의를 제창해 아랍권 통합에 앞장선 공로를 평가했다나. ...

  • 자신의 이름을 딴 카다피 인권상이 있다. 역대 수상자로는 넬슨 만델라, 피델 카스트로, 우고 차베스 등이 있다. 2010년 수상자는 터키 총리 타이이프 에르도안. 아마 터키 구호선이 가자에서 이스라엘군에게 공격받은 일 때문인 듯 하다.

  • 제9회 한국 불교인권상 수상자다. #. 최후의 오명때문에 이것을 흑역사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최후의 전까지는 그런대로 나라를 운영했다. [17]



  • DJ로서의 재능도 탁월했던 것 같다 일명 젱가젱가송. 이스라엘의 음악가 '노이 알루셰'가 만든 영상.[18] '젱가'는 '골목길'[19]을 의미한다 카더라. 이거 어째 어떤 필수 요소가 떠오르는데? 이거슨 합필갤의 세계화

  • 이 세상에서 가장 지저분한 독재자가 더욱 더 지저분하게 보이는 순간(...) 소리가 참 찰지다

  • 북미에서 발매된 NES용 메탈기어에서 아우터 헤븐의 지도자 이름은 '버몬 카타피(Vermon CaTaffy)'(...)

  • 카다피 본인은 '자신이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지금도 그러고 있다' 고 주장(리비아에 가보면 지금이 아프리카의 중심이라며 자기 사진 속에 아프리카 나라들 국기가 크게 배경으로 자리잡은 홍보판이 여기저기 있었다고 한다)했지만 실제로는 아랍권의 분열의 상징이었다. 그가 아랍권을 통합하려고 한 행위는 오히려 독이 되어 아랍권에서도 리비아가 배척되게 만들었다. 사실 위에서 본 카다피의 정신 상태라면 저렇게 되는 게 당연하지만.

  • 미국 재무부가 처음 카다피의 자산을 동결했을 때에는 미국 내에 약 1억 달러 정도가 예치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조사 결과 297억 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이 동결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제재는 미 재무부가 실시한 경제 제재 중 역대 최대 규모이자 리비아 전체 GDP의 절반에 맞먹는 엄청난 액수이다. 천하의 개쌍놈 이렇게 많은 액수가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동결될 수 있었던 건 카다피가 특정 은행에만 돈을 몰아서 예금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잘못을 했기 때문이라고. 통장 쪼개기와 분산 투자라는 개념을 설명할 때 예시로 쓰일 듯하다.

  • 서양에서 article|default 패션 테러리스트로 불리기도 했다.

  • 카다피는 오사마 빈 라덴을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20] 일부 친미 밀덕들이 카다피와 빈라덴이나 IS를 동일시 하는데 이것은 반미라는 입장에서만 그럴뿐, 나름 국가의 근대화를 추친했던 카다피에게는 대단한 실례다.


  • 시위대의 여성들을 성폭행하라고 군대에 비아그라를 지급했다. 이쯤 되면 막장 중의 개막장. 공포심과 폭력으로 사람을 지배하려는 그야말로 현대 사회에서는 북한 등 극히 일부 지역에서나 통용되는 수준의 원시적인 철권 정치를 생각한 듯하다. #

  • 리비아 반군에 의해 점령된 카다피의 요새 안에서 미국 前 국무부장관 콘돌리자 라이스의 사진첩이 발견되었다. 어!?# 이후 카다피가 콘돌리자를 짝사랑했다는 사실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기사도 있다. # '흑인 여왕' 이라고 호칭하면서 일종의 이상상처럼 여겼다고 알려졌다. 카다피 본인도 이러한 사실을 거의 숨기지 않았고 콘돌리자 라이스가 리비아를 방문했을 때 그녀의 해외 외교영상들을 짜깁기해서 만든 '기괴한' 동영상을 감상시켜줬다고. 콘돌리자의 말에 따르면 기괴하긴 했으나 성적인 느낌은 없었다고 한다. 덕분에 미 정부는 콘돌리자의 방문 일정을 리비아 쪽과 외교 협상을 하는 줄다리기 카드 중 하나로 써먹었다. 대량살상무기 사찰 때라든가... 콘돌리자가 처음 카다피와 대면하기 전 미 대사는 갑자기 이상한 짓을 할 수가 있는데 당황하지 말고 냅두면 좀 있다가 회복된다 라고 귀띔해줬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기자들이 철수하고 곧 고개를 전후로 흔들며(...) 앞뒤가 맞지 않는 발언에 이상한 떼를 쓰기 시작했는데 콘돌리자가 자기 요구를 거부하자 투정을 부리며 그 자리에서 통역관 두 명을 잘라버리는 등 기행을 보였다고 한다. 원래 정신 나간 장광설을 늘어놓다가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오는 대화 스타일을 갖고 있었다.

  • 카다피는 몰락 이전에 정권 안정을 조건으로 서방 세계에 개방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안전할 거라 믿었지만 혁명이 시작되자 돌아온 건 공습. 결과적으로 다른 제3세계 독재자들에게 서방을 믿을수 없다는 교훈을 주었다. 국민대의 북한전문가 드미트리 란코프(러시아인) 교수는 북한 또한 카다피를 보고 절대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그리고 시민군에게 체포될 당시 황금 도금 권총을 갖고 있었으며 위 항목에서 그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는 물건이 바로 이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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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색인 데다가 독재자의 애장품이었다니... 어?!! 믿으면 골룸[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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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놀랍게도 김정일태어난 해(1942년)세상을 떠난 해(2011년)가 같다. 복숭아나무 아래서 형제가 되기로 맹세라도 한 모양이다 (...) 단 날짜는 다르다.
  • [2] 196cm이던 빈라덴이나 190cm던 후세인처럼 상당한 장신이었다.
  • [3] 영미권 언론이 항상 그렇듯이 상당히 악의적인 보도가 많았다.
  • [4] 그 건설회사중 하나가 동아건설인데, 이 놈들은 나중에 부실공사로 한강 다리가 붕괴되게 만든다 동아건설의 모기업인 동아그룹은 IMF 외환위기때 부도가 나서 해체되었다. 그 동아그룹의 계열사중에는 한 택배회사가 있었다.
  • [5] 전성기인 1984년에는 2만명의 인부가 건설에 참여해 무려 37억 달러, 당시 GDP의 3%를 따내기도 했다. 77년부터 한국이 따낸 건설 수주만 총 366억 달러로 지금 GDP로도 넉넉히 1/7이 되고 1984년 GDP로는 30%나 된다. 동아건설, 대우건설, 동아건설의 최원석 회장,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과도 친했다. 최회장은 카다피를 카선생이라고 불렀고 카다피는 그와 만난 자리에서 서투르지만 한국어로 헤잔님(회장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 정부는 좀 배은망덕이란 드립이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러시아, 중국도 반카다피 과도정부를 인정했는데 그들도 배은망덕? # 관련기사
  • [6] 미국이나 한국의 경우 일개 중대장 나부랭이 보직 정도에 불과한 계급이지만 군대 규모가 크지 않은 영세국가나 군대 규모가 크더라도 사단 및 군단 같은 대단위 부대 편제를 유지하지 않아 장군 보직의 필요성이 낮은 국가에서는 위관급 장교들이 영관급에 심하면 장성급에 준하는 권한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비슷한 사례로 남미 같은 경우에는 중사 출신 독재자들도 있다.
  • [7] 1982년에 한국어 번역판이 나왔는데 사회학자 김동춘이 당시 김성근이란 가명으로 번역했다
  • [8] 이 부분이 미국과 틀어지고 현재 중동이 석유로 한 가닥 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차 오일쇼크의 가장 큰 이유인 동시에 OPEC의 탄생 배경이다. 카다피가 중동권에서 먹어줬던 이유기도 하고. 후세인도 그렇고 카다피도 그렇고 독재자라도 한 가닥 능력은 있다.
  • [9] 당시 헐리우드에서도 백 투 더 퓨쳐에서 리비아가 핵무장을 노리는 테러국가로 나온 바 있다.
  • [10] 죽일 생각이었다면 더 많은 공군을 투입하여 관저까지 확실히 날려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원복조선일보에 90년대에 연재한 시사 만화에선 당시 미국은 150만 달러 이상을 주며 어느 용하다는 점쟁이에게 점을 쳐서 그 위치를 폭격했다는 게 군감사에서 드러났다고 엄청 비꼬았다!?
  • [11] 물론 말로만 사과했을 뿐이다. 이탈리아에서 이에 대하여 반발도 있었지만 식민지 시절의 땅과 여러가지를 거저 먹고 남은 것들이라 예전처럼 돌려줄 일은 없어보인다.
  • [12] 기사 참고
  • [13] 조선일보 기사에는 "영국 공군 차세대 전투기 토네이도"라고 되어있다. 조선일보에서는 토네이도가 차세대 전투기 입니다!
  • [14] 그리하여 그가 사라진 이후 리비아는 시리아 내전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 [15] 사실 카다피도 축구광으로 알아준다. 그래서 유벤투스를 완전 인수하려다가 실패했지만 2011년 현재까지도 유벤투스 구단 지분 30%를 바로 카다피가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프로축구계에 뭔 떡밥을 던져주었는지 몰라도 2002년 세리에 A 슈퍼컵에 유벤투스가 참가하면서 바로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열리기도 했다.
  • [16] 하지만 라이베리아나 여러 나라에선 독재자가 소령으로 멈춰선 채로 권력을 차지하던 것도 있다...
  • [17] 뭐 이런 경우는 꽤 있다. 남베트남의 독재자인 응오딘지엠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한 이승만 정권의 일은 이승만 지지자들이 숨기고 싶은 과거이며 악랄한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반소적 정책을 취했다는 이유로 샤를 드 골이나 리처드 닉슨이 혁신적인 지도자라고 찬양했던 일도 있다. 더 심한 경우는 아돌프 히틀러가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적까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이 이겼으면 히틀러가 노벨평화상을 탈 뻔했다.
  • [18] 그런데 이스라엘과 원수진 나라들에서도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하긴 사우디 아라비아나 여러 아랍 나라들도 카다피를 질색했으니.
  • [19] 연설 내용은 "골목길을 구석구석 뒤져서 시위대를 찾아 죽이겠다" 뭐 이런 거였다고... 하지만 2011년 10월 시민군이 리비아를 구석구석 뒤져서 카다피를 잡았다
  • [20] 그런데 오사마 빈 라덴이 몸 담았던 탈레반이나 알 카에다 자체가 원래부터가 이슬람 군부 독재자들에겐 원수지간이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탈레반에겐 군부 독재자도 타도할 적이었기에 탈레반이나 알 카에다가 군부 독재자 편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이니까.
  • [21] 사실 황금 무기는 아랍 군주들이나 독재자들이 많이 가지고 있다. 사담 후세인도 황금으로 도금된 AK-47가 있었고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에게도 미국에서 도금 총기를 선물해준 적이 있다.
  • [22] 김정일 경호원 출신의 탈북자에 따르면 은빛으로 도금된 AK를 지급받아 근무한다고 한다. 총 자체도 원 오브 사우전드라고... 는 하는데 원 오브 사우전드라는 말 자체가 허황된 거라 단순(...) 은 도금 AK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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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4 14:5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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