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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명왕

last modified: 2015-01-30 23:21:44 by Contributors

고구려의 역대 국왕
20대 장수왕 고거련 21대 문자명왕 고나운 22대 안장왕 고흥안

시호 문자명왕(文咨明王) / 명치호왕(明治好王)
고(高)
나운(羅雲) / 개운(个雲) / 고운(高雲)
생몰년도 음력 ? ~ 519년
재위기간 음력 491년 12월 ~ 519년(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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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1. 소개
2. 최대 영토의 주인공?
3. 기록
3.1. 삼국사기 기록


고구려의 제21대 .

1. 소개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하는데,옆나라의 명치천황과는 다르다삼국유사 왕력편에는 명리호(明理好), 개운(个雲), 고운(高雲)이라는 이름도 전하고 있는데, 개운, 고운은 고나운의 변형으로 보인다. 명리호는 문자명왕의 별호인 명치호왕에서 고려 6대 임금인 성종의 이름 治를 피휘한 것이다. 명왕이란 말은 태왕이나 성왕처럼 고구려에서 국왕에게 붙여주던 존호이지만, 문자명의 끝자와 명치호의 앞자가 겹치는 것을 보면 원래 시호는 문자명치호왕(文咨明治好王)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장수왕의 아들인 고추대가[1][2] wkik:"조다"고조다(高助多)의 아들이다. 장수왕이 너무나 오래 산 나머지 아들이 먼저 죽어버려서(...) 손자인 나운이 그 뒤를 잇게 되었다.

2. 최대 영토의 주인공?

일반적으로 문자왕대에 북부여를 흡수하여 최대의 영토를 일구었다고 보기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닌 단순히 물길의 침략으로 쫓겨난 부여의 유민을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 그리고 영양왕 때 고구려의 영토가 동서 육천리에 달해 초기 천리~이천리 수준의 수배의 달하는 당대 최대였다는 떡밥도 있지만, 이는 문자명왕때 영토라고 알려진 강역보다 넓었는지는 알 수 없다.[3]

어쨌든 고구려의 전성기가 문자명왕의 치세까지 유지되었다. 하지만 물길에게 북쪽 변방이 쓸렸고, 나제동맹과 일전일퇴를 거듭하는 지루한 전투를 계속했다. 북위와는 장수왕대에 이어 대체로 친선 외교를 지속했다. 허나 거란의 기병을 이용하여 북위의 변방을 약탈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죽자 북위 영태후는 동당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하라구로

장수왕의 후광에 미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한 것은 많지 않다. 절을 좀 세우기는 했다. 평양 대동강변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들을 배출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북한 학자들은 금강사가 아마도 청암리 사지에 있는 절과 동일할 것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3. 기록

492년 3월 위나라 효문제가 고구려 왕으로 임명하다.
6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보내다.
8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을 하다.
10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다.
493년 10월 지진이 일어났다.
494년 1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다.
2월 여왕과 처자가 나라를 들고 항복하다.
7월 신라군과 살수 들판에서 싸웠다. 신라가 패했지만 백제 원병으로 우리 군사가 물러났다.
제나라 황제가 정동장군 낙랑공으로 책봉했다. 이에 사신을 위나라로 보내 조공했다.
10월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495년 2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크게 가물었다.
5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월 왕이 남쪽을 행차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왔다.
8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쳤다. 신라의 지원군이 와 우리 군사가 돌아왔다.
496년 제나라 황제가 왕을 거기장군으로 삼았다. 사신을 제나라로 보내 조공하였다.
7월 군사를 보내 신라 우산성을 쳤다. 군사가 패해 돌아왔다.
497년 8월 군사를 보내 신라 우산성을 공격해 빼앗았다.
498년 1월 왕자 흥안을 태자로 삼았다.
7월 금강사를 창건하였다.
8월 위나라에 조공하였다.
499년 백제 백성들이 굶주려 2천명이 투항해왔다.
500년 8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01년 1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02년 4월 양나라 고조가 즉위하여 왕을 거기대장군에 삼았다.
8월 메뚜기때가 나타났다.
10월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자가 많았다.
11월 백제가 국경을 침범했다.
12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했다.
503년 11월 백제가 달솔 우영을 보내 군사 5천을 거느리고 수곡성으로 쳐들어 왔다.
504년 4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06년 8월 왕이 용산 남쪽으로 사냥하다 5일만에 돌아왔다.
9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1월 장수를 보내 백제를 쳤으나 병사들이 동상에 걸려 돌아왔다.
507년 10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장수 고노를 보내 말갈과 백제의 한성을 치게 하였으나
백제가 반격해 물러났다.
508년 양나라 고조가 조서를 내렸다.
5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09년 5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0년 윤6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2년 3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 백제를 침략해 가불, 원산 두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천명을 사로잡았다.
513년 1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4년 11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5년 10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6년 4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7년 4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8년 2월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19년 왕이 죽었다.


조공기록이 전체의 절반이다. 다만 이걸 가지고 '문자명왕은 고구려의 자존심 같은 건 내던져 버린 건가요?' 라고 하면 곤란한데, 삼국시대에는 외교사절도 조공사절이라는 이름으로 파견했기 때문으로, 조공을 많이 바쳤다는 건 그만큼 외교에 적극적이었다는 뜻이 되고. 상위 항목에서 장수왕의 뒤를 이어 북위와 친선관계를 계속했다는 부분이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4]

3.1. 삼국사기 기록

一年 문자왕이 즉위하다
一年春三月 북위 효문제가 왕의 즉위를 축하하다
一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一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一年冬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三年春二月 부여가 항복해오다
三年秋七月 신라·백제와 전투를 하다
三年 남제가 문자명왕에게 벼슬을 주다
三年 북위에 조공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날씨가 따뜻하여 꽃이 피다
四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春二月 큰 가뭄이 들다
四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秋七月 남쪽 바다에 제사를 지내다
四年秋八月 백제를 공격하니 신라가 백제를 돕다
五年 남제가 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五年秋七月 신라 우산성을 공격하였으나 니하에서 반격을 당하다
六年秋八月 신라 우산성을 빼앗다
七年春一月 흥안을 태자로 책립하다
七年秋七月 금강사를 창건하다
七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八年 백제인이 기근으로 투항해오다
九年秋八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一年秋八月 농작물에 병충해가 발생하다
十一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 사상자가 발생하다
十一年夏四月 양 고조가 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十一年冬十一月 백제가 침입하다
十一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二年冬十一月 백제가 수곡성을 침략하다
十三年夏四月 사신이 북위를 방문하여 황제를 면담하다
十五年秋八月 사냥을 하다
十五年秋九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五年冬十一月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눈과 추위로 인해 실패하다
十六年冬十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六年 백제를 공격하다
十七年 양이 조서를 보내 문자명왕의 벼슬을 올려주다
十七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七年冬十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八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九年夏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十九年冬十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一年春三月 양에 조공하다
二十一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一年秋九月 백제 가불· 원산 두 성을 빼앗다
二十二年春一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十二年夏五月 북위에 조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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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고구려때의 직위로 일반적으로 태자가 맡았던 것으로 추측
  • [2] 고구려가 오부족 체제였을 때, 왕족인 계루부와 전왕족인 소노부, 왕비족인 절노부의 수장을 고추가라고 해서 별도의 조직을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계루부의 최고 수장은 당연히 왕이니까, 정통 계승자가 고추가의 자리를 차지했다. 신라의 갈문왕이나 백제의 길사와 같이 왕권버금세력의 흔적이다.
  • [3] 이 당시 고구려는 이미 양원왕 때 백제와 신라에 의해 한강 유역을 빼앗긴 상황이고, 이후 영영 되찾지 못했기에 영양왕 때의 영역이 문자명왕 때의 영역보다 넓었다고 보기에는 다소 부정적이다.
  • [4] 애초에 조공은 소국이 대국을 섬긴다기 보다는 동아시아 특유의 상호무역체제로 보는 것이 현 학계의 중론이다. 대대로 중국의 북방을 위협했던 흉노와 돌궐과 같은 유목민족 역시 표면상으로는 중국의 왕조와 조공관계를 맺었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중국의 역대 변방국들 역시 중국의 왕조들과 조공관계를 맺었고 국력이 강성했던시기에는 말이 조공이지 상대적으로 대등한 취급을 하거나 아예 상전노릇을 한 경우도 있었다.하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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