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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협정

last modified: 2015-04-11 15:44:59 by Contribu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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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영국 수상 체임벌린, 프랑스 총리 달라디에, 독일 총통 히틀러, 이탈리아 수상 무솔리니, 이탈리아 외무장관 치아노[1]

체코슬로바키아는 영국과 프랑스를 적대국으로 만들면서 독일과 전쟁을 시작하느냐, 아니면 침략자에게 항복하느냐의 선택에 직면해 있다.
- 에드바르트 베네시(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영국 총리가 독일에서 명예로운 평화를 들고 돌아왔습니다.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for our time)라고 믿습니다.[2]
- 네빌 체임벌린

우리들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패배를 보았다.[3]
- 윈스턴 처칠

목차

1. 개요
2. 배경
3. 전개
3.1. 1938년 9월 이전
3.2. 9월
4. 뮌헨 회담
5. 영프는 왜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었나?
6. 결과
7. 여담
8. 녹색 작전
9. 관련 문서
10. 관련 항목

1. 개요

히틀러의 관광시리즈 1
제2차 세계대전을, 부정적인 의미에서 1년 늦춘 유럽 열강국가간의 야합.[4][5]

그리고 21세기 현재까지 분쟁중인 국가간의 (한쪽의 항복 협정이 아닌) 평화 협정 결정을[6] 절대로 신뢰하지 않게 만들어버린 원흉 of 원흉.[7]

뮌헨에서 합의되었기에 뮌헨 협정이다. 뮌헨 회담으로도 부르나 이는 4국 정상간의 회담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 결과물이 뮌헨 협정이다.

2. 배경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민족자결주의베르사유 조약 사이의 모순에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이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한 이후로[8] 역사상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최초의 독립국가였다.[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민족자결주의에 의거,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도 독립과 함께 국가를 건설하게 된 것인데 사실 이렇게만 보면 당연한 일이자 참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던 나라를 독립시키자니 국경선이나 영토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는 졸지에 다민족국가가 되었다. 당장 국가의 핵심인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이 다른 민족이었으며, 남슬로바키아와 테니아 지방의 헝가리인과 톄신 지방의 폴란드인, 동부 끝자락의 우크라이나인 등이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국가 내 최대 소수민족은 바로 300만에 달하는 주데텐란트의 독일인이었다.

중부 유럽은 오랜 기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를 받아왔고, 때문에 제국 내부의 행정구역상 구분만 있었지 국가 및 민족간의 확고한 경계선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그리고 연합군은 의도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해체하고 독일을 약화시키기 위해 그 주변국을 좀 크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이것이 다민족국가 체코슬로바키아의 탄생이었고, 이는 베르사유 체제가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를 전면적으로 역행하는 일이었다.

3. 전개

3.1. 1938년 9월 이전

1938년 3월,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논리로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이 국민투표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여 양국이 하나가 되자, 게르만 민족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대두했다. 폴란드[10], 리투아니아[11], 체코슬로바키아, 이탈리아 등에 나뉘어진 게르만인들은 강력한 하나된 독일이라는 히틀러의 구호에 열광하며 독일로의 합류를 강력히 희망했다.

이 중 이탈리아쥐트티롤[12] 지방은 베니토 무솔리니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하는 대가로 티롤 지방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지 말 것을 히틀러에게 요구했고, 히틀러는 이를 수용했기 때문에 독일의 병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티롤을 제외한 지역들에 대해 히틀러는 실제로 병합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우선시되는 곳은 독일인 인구가 가장 많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였다.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노리고,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이 소요를 일으키자 당장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간에 상호 비방이 잇달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5월 20일 예비군을 소집하고 국경지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2개의 군사동맹국 프랑스소련 중 훨씬 믿음직한 프랑스에 지원을 요청했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 문제는 양국만이 아니라 전 유럽의 주목을 받는 문제로 비화되었다.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사동맹국으로서 유사시 지원을 할 의무가 있었다. 애당초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 동맹은 독일의 성장을 막고 프랑스를 수비하기 위한 것으로, 유사시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에 돌입할 경우, 체코슬로바키아가 후면을 쳐서 양면전선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나서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공언한 영국도 끌려나오게 되었다.

3.2. 9월

위기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9월 13일, 주데텐란트의 독일인들이 집단 봉기했으나 하루만에 진압되었다. 히틀러는 전군에 전쟁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이는 협박용이었으며, 실제 전쟁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 본인이 서방과 전쟁을 벌이는 것이 자충수라는 걸 잘 알았다.[13] 프랑스는 예비군 동원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영국군도 일제히 비상이 걸렸다.

프랑스는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한 발자국이라도 넘을 경우 즉각 개입할 것임을 천명했으나 정부 안에서는 갑론을박에 휩싸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체코슬로바키아는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유사시 프랑스가 자신들을 위해 독일과 싸울 것이라 기대했지만, 프랑스는 반대로 독일과의 전쟁이 벌어지면 체코가 후방을 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에 동상이몽인 관계였다. 한마디로 말해 서로간에 상대방을 구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고, 유사시 상대방이 도와줄 것이라고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프랑스가 먼저 동맹을 제의했기 때문에 프랑스가 동맹의 의무를 지켜야 할 당위성이 더 높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맞붙기 싫은 프랑스는 당장 전쟁을 안 할 구실만을 찾았다.[14] 일단 프랑스의 군부는 독일 국경선에 구축된 지크프리트 선 돌파에 상당한 시간 및 희생이 걸릴 거라는 암울한 보고를 했지만, 정작 지크프리트 선은 서류상에만 있던 존재로 기초 공사도 제대로 안 된 상태였다. 프랑스 정부에서도 전쟁이냐 협상이냐를 두고 치열한 논쟁이 오갔고, 프랑스 총리 달리디에는 독일이 먼저 행동해야만 프랑스도 움직일 거라고 못을 박았다.

위기가 고조되던 9월 15일,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전격적으로 뮌헨을 방문하여 히틀러와 회담했다. 히틀러는 끝까지 주데텐란트를 요구했고,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을 제외한 다른 소수민족의 분리는 안 된다는 조건을 제시, 양자가 합의했다. 즉, 이 순간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이미 배신당했다.

체임벌린은 뒤이어 주민투표에 의한 병합에 반발하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설득하기 위해 주민투표 없이 우리끼리 잘 영토를 넘겨주자는 참 편리한 방법까지 생각해내고, 프랑스는 여기에 동의했다.

동맹국들이 자기를 배신하자 열받은 체코슬로바키아는 다른 동맹국인 소련에게 지원 의사를 타진했고, 소련으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9월 21일,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에 최후통첩을 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9월 21일 정오에 이 통첩을 수용했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히틀러가 뒤통수를 쳐서 9월 15일의 합의를 파기했다. 히틀러는 이 시점에서 판돈을 올려 체코슬로바키아의 완전한 해체를 시도한 것이다. 9월 21일, 제2차 체임벌린-히틀러 회담은 아무 소용없이 종료되었다.

9월 23일, 견디다 못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총동원령을 선포했으며 다음날인 24일, 프랑스가 동원령을 선포했다. 9월 26일, 히틀러는 대규모 군사행동을 예고하며 유럽은 전쟁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영국이 프랑스에게 전쟁이 나더라도 프랑스가 개입하면 그건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며 프랑스를 만류하고 있었다.

9월 28일, 또 다른 열강국가가 나타났다. 이탈리아베니토 무솔리니가 각국에 자제를 촉구하며 중재를 할 용의가 있음을 선포했고, 히틀러가 이에 화답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동의하면서 뮌헨 회담이 개최되었다.

4. 뮌헨 회담

회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합의안이 도출되었다.

  • 주데텐란트는 독일에게 양도된다.
  • 치에신 지방은 폴란드에게 양도된다.
  • 루테니아와 남슬로바키아는 헝가리에게 양도된다.[15]
  • 회담 참여국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안전과 독립을 보장한다.


회담 이후의 국경선 변화.

여기서 영국과 프랑스가 받아낸 양보는 10월 1일 주데텐란트를 모두 접수하겠다는 독일의 요구를 타국 참관 하에 10월 10일까지 하는 걸로 바꾼 것 뿐이다. 즉, 말이 좋아 양보지 한 건 아무 것도 없다.

이 협상으로 명백한 독립 국가 체코슬로바키아는 버려졌다. 자국의 의사는 단 한 줄도 반영하지 못하고 영토를 주변국들에게 강탈당했다. 더군다나 군사 동맹국이던 프랑스는 이 과정에서 돕긴 커녕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는데 협조했다.

이제 체코슬로바키아는 당장 독일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독일과의 국경지대인 주데덴란트가 병합당했고 그 곳에 건설된 강력한 요새선이 독일의 손아귀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5. 영프는 왜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었나?

  • 여론 :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국민들이 가진 전쟁에 대한 공포였다. 이 시기 양국의 여론주도층이라 할 수 있는 3~40대 남성들은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였다. 끔찍하기 그지없는 참호전독가스를 경험했던 이들은 그런 악몽같은 전쟁이 자기들의 살아 생전에 다시 벌어지고, 아들 세대가 그것을 경험하기를 결코 원치 않았다. 민주주의 국가인 양국의 정치권은 그런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 달라디에 총리의 경우는 본인부터가 1차대전 참전용사였다.

  • 군사 : 일단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준비가 거의 안 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뮌헨 협정 1년 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도 전쟁준비가 불완전한 상태였다. 그래서 선전포고만 하고 약 8개월간 전쟁준비 겸 눈치도 볼 겸 가짜 전쟁 사건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당시 영프 양국은 세계 대공황의 늪에서 막 빠져나오던 참으로 군사력 정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더하여 영프 양국은 독일측의 군사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이는 괴벨스의 작품으로, 독일의 군사퍼레이드와 선전영화 등에 통채로 낚여서 영프는 독일의 군사력을 실제 이상으로 과대평가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만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더욱이 체코와의 군사동맹의 의무를 지켜야 할 프랑스는 위의 문제로 영국의 참여 없는 대독 단독개전을 두려워하고 있어 외교적으로 영국에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여기에 폴란드헝가리도 이 틈을 타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를 얻기 위해 독일에 동조하고 있었다. 특히 폴란드의 경우, 체코슬로바키아와 함께 프랑스의 군사동맹국으로서 유사시 동부전선에서 독일과 싸워야 하는 나라였으나 영토 욕심에 체코슬로바키아 압박에 합류하여 프랑스의 전쟁 계획을 망가뜨렸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프랑스는 독일뿐만 아니라 막강한 폴란드군까지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16]

  • 외교 : 독일은 외교적 명분론에서도 민족자결주의를 등에 업고 있었다.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압박엔 반대하면서도 주데텐란트 요구에 대해서는 같은 민족이니 당연하지.라는 반응을 가진 영국-프랑스인들도 상당했다. 민족과 국가가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외교협상을 주도한 영국은 체코와의 이해관계가 적었고[17], 체코를 옹호해야 할 프랑스는 군사문제 부분에서 설명하였듯 외교적으로 영국에 끌려다니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포기했다.

6.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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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 연도 내용
1 1938년 10월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흡수된다.
2 1938년 10월 2일 치에신이 폴란드에 합병된다.
3 1938년 11월 2일 헝가리 민족이 거주하는 국토는 헝가리에 흡수된다.
4 1939년 3월 카르파티아 산맥에 존재하는 루테니아인 거주 지역은 헝가리에 병합된다.
5 1939년 3월 체코의 나머지 국토는 전부 독일의 직할 보호령이 된다.(보헤미아,라비아가 보호령으로 전락.)
6 슬로바키아는 독립국으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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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데텐란트로 진군하는 독일군을 나치식 경례로 환영하는 독일인들.


평화를 지켰다며 열렬한 환영을 받은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 들고 있는 종이는 "독일은 더 이상 영토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히틀러 친필서명이 담긴 서약서이다. 이 종이를 흔들며 체임벌린은 "여기 우리 시대의 평화가 있습니다!"라고 외쳤지만... 이로부터 6개월 후,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완전히 병탄하여 이 문서는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시킨 결과 유럽은 고작 6개월 동안 평화를 맛보았다. 6년도 아니고, 6개월이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협박해서 체코를 통째로 먹어치우고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슬로바키아를 독립시켜 괴뢰국으로 만들었다. 서방 연합국으로부터 배신당한 충격에다가, 막강한 방어시설이 구축되어 있던 주데텐란트, 300만에 달하는 인구를 잃은 체코슬로바키아는 저항할 의지조차 없었다.

이 사건은 소련의 외교방침에도 매우 큰 영향을 끼쳤는데, 소련은 당시 체코와 공동방위조약을 맺고 있었고, 막심 리트비노프 외교부 장관의 주도로 이를 확대하여 프랑스-영국-폴란드를 아우르는 집단안보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탈린은 영프의 방관 속에 체코가 공중분해되는 것을 보자 영프를 믿지 못하게 되었고, 영프 쪽에서도 매우 소극적이었으며, 폴란드는 소련과 방위조약을 맺는 것을 극력 거부해서 결국 히틀러와의 협상을 모색하게 되었다. 히틀러도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해 스탈린에게 접근했고, 이 결과가 바로 독소 불가침조약.

당시에는 윈스턴 처칠을 제외하면 아무도 그런 생각은 안 했으나, 1년 후에는 누구나 이 협정이 외교실패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1938년 3월의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묵인했던 영국-프랑스는 1년 후에도 히틀러에게 똑같은 수에 당했고, 체코를 희생시킴으로써 그를 달래보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여기에 만족하기는 커녕 또 똑같은 수법으로 폴란드를 협박했고, 폴란드가 체코처럼 굴복하지 않자 무력 침공한다.

여담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서 불똥이 튄 정도가 아니라 바가지로 거하게 받아 먹은 제 3의 피해자가 엉뚱하게 서쪽에 있는 스페인이었다. 이 당시 스페인 내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는데 내전 초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열강들이 모여 비동맹, 불간섭을 원칙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대놓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친파시스트 진영에게 돈과 무기, 병사를 다스로 퍼다주고 있었고, 소련도 반대 쪽에서 공화파 진영에 지원을 주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좌파 민 전선출신의 레옹 블룸의 프랑스 정부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가까운 공화국에게 지원을 주려고 했으나, 동맹국인 영국의 강력 반대로 인하여 좌초되어, 내전 내내 프랑스는 피레네 산맥 바로 아래 대대적인 이념 전쟁이 벌어지면서도 손가락만 빨고 있다가 공화국을 도와 줘야 하지 않겠냐며 영국 측에 불평 불만을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 그러나 이 회담에서 이미 프랑코 진영의 승세가 유력해지는 걸 영국 측에서 스페인에 대해서는 자신들은 손을 놓았다고 주장하면서 전쟁 내내 공화국이 추구하던 외교적 승리의 관에 못을 박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예언하고 경고한 윈스턴 처칠은 영국 수상의 자리에 올라 히틀러에 맞서 싸우게 된다.

7. 여담

뮌헨 협정에 관련된 국가들과 인물들과 단체들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사이 좋게 야합에 참여한 댓가를 치루지

  • 영국 : 폴란드와 군사동맹을 맺으며 뒤늦게 독일 타도를 외쳤으나, 정작 군사력이 너무 부족해서 폴란드가 망할 땐 도와주지도 못했다. 그리고 체임벌린은 1940년 5월에 노르웨이 전역의 패전을 계기로 실각했다. 본토도 폭격당한 건 덤. 그나마 국가가 존속한 상태로 독일과 맞서 싸웠고, 본토가 전쟁에 크게 휘말리지도 않았으며, 결국 전쟁에서 이겼으니 그나마 사정이 나은 경우다. 하지만 경제난은 피할 수 없었고, 결국 식민지를 하나 하나 독립시키면서 지역강국으로의 몰락 수순을 밟고 있다. 현재는 아예 미국에 붙을까 고민 중.
  • 프랑스 :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결국 항복을 선언하고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뮌헨 회담에 참석했던 달라디에 총리는 정치범으로서 수용소에 끌려갔으며 프랑스 국민들은 독일의 인적·물적 자원 약탈로 지독한 물자난과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다. 다행히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덕택에 주권을 되찾았고 빠르게 복구하여 강대국의 대열에 들어서긴 했지만, 이후에도 이 때의 패전에 따른 불명예는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큰 상처로 남았다. 물론 식민지는 다 독립시켜야 했고, 역시 지역강국으로 몰락했다.
  • 나치 독일 : 체코슬로바키아를 집어삼키는 데 성공한 뒤 세력 확장을 더 하고자 폴란드를 공격했으나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영국과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맞아 2차 대전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소련에 대한 침략으로 결국 사방에 적을 만든 끝에 양면전쟁을 다시 치르게 되었고 결국 패망, 영토를 대거 잃고 나라가 둘로 동강났다가 통일되는 초유의 경험까지 겪어야 했다. 그나마 인구와 경제력을 기반으로 유럽 제1강국으로 올라섰지만 여전히 제약이 많다.
  • 폴란드 : 체코-폴란드 국경 지역의 작은 영토 치에신을 얻고자 체코를 말아먹는데 기여한 폴란드는 약 1년후 똑같은 일을 독일에게 당했고, 결국 독일에게 점령당했다.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덕택에 주권은 되찾았지만 2차대전의 주요 전장으로 독일과 소련에 여러차례 정복, 재정복당하며 영토는 다시 한번 큰 변화를 겪었다. 결국 소련의 위성국으로 40여 년을 지내는 신세가 되었으며, 민주화 이후로도 한동안 중진국 신세를 면치 못하다 2000년대 이후에야 지역강국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래도 뮌헨 협정으로 뺏어먹었던 체코 영토들 중 주데텐란트 전역을 전후 체코에게 다시 반환한 독일과 달리 이 쪽은 뺏어먹었던 치에신을 전쟁 후에도 국경선 재조정으로 일부 지역이나마 유지하는데는 성공한다.
  • 헝가리 : 영토는 좀 얻었지만 결국 독일의 동맹국으로 전쟁에 나서다 신나게 털리고, 소련군에게 영토가 초토화되었다. 이후 얻은 땅 도로 토해내고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폴란드와 비슷한 신세. 역시 90년대까지 중진국이었다가 뒤늦게 지역강국 지위를 얻었다.
  • 체코슬로바키아 : 독일이 2차대전에서 패망한 덕택에 주권을 되찾긴 했으나 뒤이어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고 냉전 체제가 무너지면서 아예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라가 각자 분리 독립해버렸다. 공산 체제의 후유증으로 인해 민주화 이후로도 15년이 지나서야 겨우 중진국 신세를 벗어났다.
  • 주데텐란트 : 국가는 아니지만… 독일에 병합된 이후 열광적으로 히틀러를 지지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영유권이 체코에게 다시 넘어갔고 전후 체코인들의 분노에 찬 보복을 받았다. 상당수가 매국노로 간주되어 소련군과 새로 들어선 체코 정부가 제지에 나설 때까지 린치 내지 학살당했고[18], 이후 추방령이 내려져 결국 대부분의 주데텐란트 거주 독일인들은 재산은 한푼도 못 가지고 정든 고향을 떠나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떠나게 된다. 어느 모로 보아도 독일인들의 자업자득. 참고로 이들의 존재와 관련, 독일과 체코의 입장이 많이 다른데 독일 정부는 체코 영토로 인정하면서도 독일인 실향민들이 고향으로 가거나 소송을 거는 것 자체는 막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나, 체코인들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분노한다.
  • 스페인: 회담의 주된 주제도 아니고, 중부 유럽의 문제에 실려 논의된 수준에 불과했지만 37년 5월 이후 정치적, 군사적 전선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대한 반파시스트 국제 여론을 통한 외교적 승리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공화파의 희망을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히틀러가 어디서 어떻게 깽판쳐도 막을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메세지를 통해 완전히 박살냈고, 소련의 대 공화파 지원이나 프랑스의 비정기적이고 간접적인 지원 또한 끊어버렸다. 뮌헨 협정의 회담을 보고 전쟁이 가망이 없다는 판단을 한 공화파 지도부는 곧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제 여단 의용병들을 해산하고 각각의 조국으로 보냄으로서 실질적인 패전이 확실시되었다. 이후 몇달 후인 1939년 봄 마드리드는 함락당하고, 민주 스페인 공화국의 시체 위에 프랑코는 파시스트 국가를 건설하여 그 체제가 나머지 유럽은 전쟁이 끝나고도 30년이 넘은 1975년까지 유지된다.

덤으로 비회원국에게 회원국을 팔아먹는데도 침묵한 국제연맹도 망했다. 물론 국제연맹은 이전부터 지침을 대놓고 무시하는 국가들 때문에 식물연맹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어느 정도의 기능이나마 회복한 건 국제연합(UN)으로 재창설된 이후. 이전과 달리 안보리 상임이사국 제도 등을 도입해 더욱 강력해진 UN이었으나 냉전 당시의 국제연합의 위세는 압도적이지 못했고 최근에 와서야 제법 나아진 추세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을사조약을 을사늑약으로 부르듯 이 조약을 뮌헨의 배신(Mnichovská zrada) 혹은 뮌헨의 강요(Mnichovský diktát)라고 한다(우리식으로 따지면 뮌헨늑약쯤 된다). 한편 처칠이 뮌헨 협정을 반대하고 결국 전쟁을 이끌어 체코슬로바키아를 해방시켜준 은인이기 때문에 체코 및 슬로바키아에서는 처칠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단 처칠 한정. 기존 서유럽 강대국에 대해서는 불신이 팽배하며, 독일이라면 아예 이를 간다. 프랑스나 네덜란드 등 다른 피해국과 급이 다른 수준. 심지어 독일과의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폴란드나 프랑스보다 더 싫어할 정도. 아마 러시아 정도가 체코슬로바키아와 비슷한 급으로 독일을 싫어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체코, 슬로바키아 모두 러시아랑 독일 둘 다 싫어한다는게 함정

이처럼 욕을 엄청 먹었고, 뒤에 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문을 열어제낀 협정이지만 당시에 협정 조인 때만 보면 성공적인(?) 협정이었다. 독일은 히틀러가 원하던 독일 민족의 영역을 거의 신성 로마 제국 시절까지 회복했다.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자기가 원해서 한 것은 아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일단 전쟁을 피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거기서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고 프랑스와 영국의 양보가 계속되자 상황을 오판하고 더 날뛰었다.

2차 대전 이후 독일이 점령했던 주데텐란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반환되었으며, 헝가리가 점령했던 남슬로바키아도 반환되었다. 다만 폴란드에게 점령되었던 치에신은 국경 도시로나마 국경 재조정을 거친채 전후 폴란드 영토로 남았으며 러시아계 민족이 살고있던 테니아는 헝가리의 점령에서 벗어나 소련의 우크라이나에 편입되어 독립된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일부인 자카르파탸 주(Zakarpattia Oblast)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에서는 한동안 슬로바키아 고유의 상징인 쌍십자에서 나치시절 괴뢰정권이 연상된다 하여 금지시키고 불꽃모양(이 불꽃모양은 1944년 나치 괴뢰정권에 반발해 일어난 봉기를 상징한다고 한다)으로 한동안 대체했다가 민주화 이후에야 쌍십자 상징이 부활했다. 물론 종교적 상징물을 부정하는 공산정권 눈에 십자가가 아니꼽게 보인 탓도 있었다.[19]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쿠바에 대해 해상 봉쇄 등 온건책을 펴기로 하자 선제 핵공격 등 강경책을 주장하던 커티스 르메이가 이 사건을 언급하며 온건책을 비판한 적이 있다. 문제는 이게 르메이의 단순한 비판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 존 케네디의 아버지인 조셉 케네디는 협정 당시 영국 주재 대사로 활동하면서 체임벌린 정권의 대독 유화책을 지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커티스 르메이는 케네디에게 "뮌헨 협정 당시 당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도 저들에게 유화책을 쓸 참인가?"라고 깐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케네디의 심정이 어땠을 지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0]

8. 녹색 작전

대전 후 사학계의 주류 학설은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무력 침공하고자 했으나, 뮌헨 협정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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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무솔리니의 사위.
  • [2] 출처.
  • [3] 출처.
  • [4] 왜 부정적인 의미냐면 이런 조약없이 바로 독일을 손 봐줬다면 아돌프 히틀러도, 홀로코스트도, 그리고 수많은 죽음도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평화를 위한 것이 오히려 더 큰 전쟁을 불러온 예. 물론 체코슬로바키아 입장에서는 1년 먼저 시작된 비극이었을 뿐이다. 덕분에 찍 일어난 전쟁처럼 만약 뮌헨 협정이 결렬되었다면 하는 소재로 나온 대체역사 작품도 나온 적이 있다.
  • [5] 그러나 바로 독일을 손 봐줬다면이란 가정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가정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뮌헨 조약 이후 소련의 독촉으로 소영프 3국간 회담을 열었는데, 이 자리는 소련이 독일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동맹의 확답을 얻어내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그 시점에서도 당장 동원 가능한 병력이 고작 4개 사단이라는 어이없는 대답을 하면서 영국의 전쟁동원능력의 현실을 드러내보였다. 그리고 여기에 열받은 소련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실제로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에도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준비가 되지 않아서 가짜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독일에게 선전포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동원할 병력이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근 8개월간 전투가 전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 [6] 사실 평화 자체도 해당된다.
  • [7] 실제로 평화 협정 떡밥이 나오면 항상 나오는 반론 사례가 뮌헨 협정이다. 히틀러가 외교적인 판을 제대로 깨뜨린 덕분에 오늘날까지 국가간의 불신을 낳고 벼랑끝까지 싸우게 만들어버린 원흉.
  • [8] 서슬라브족 중심의 대 모라비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 [9] 예컨대 16세기 이전까지 헤미아 왕국이 영향력을 미치던 보헤미아 외 모라바(모라비아), 실레시아(슐리지엔)를 포함한 영토가 곧 체코가 된다. 아예 제대로 된 본체도 없었던 슬로바키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기에 보헤미아 지방(라틴어 명)을 부르던 원어명인 체히, 체코를 사용하는 건 체코의 다른 지방에겐 약간 불만이 되는데, 어느 순간 부정적으로 여겨지던 '체스코'란 단어가 매스미디어에 의해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10] 단치히 지방. 결국 이게 문제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 [11] 메멜 지방. 1939년 3월에 결국 삥뜯었다.
  • [12] 정확히는 오스트리아에 속한 티롤 3지방 가운데 중부인 보첸 현. 이탈리아가 1차대전 승전 대가로 얻어냈다.
  • [13] 독일의 전쟁 준비는 이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폴란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이 일어날 당시까지도 완비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 [14] 프랑스로서도 할 말은 있는 것이, 1936년 라인란트 재점령 당시에는 프랑스가 공세적으로 나가려 했으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가 프랑스의 선제공격에는 양국간 군사조약이 발효되지 않는다며 발을 빼버린 적이 있다.
  • [15] 루테니아는 독립 국가로 건설될 예정이었으나 한 달만인 11월에 수도 우주호로트를 포함한 남부의 대부분 영토가 독일과 이탈리아의 배상협정에 의해 헝가리로 넘어간다. 이후 2차대전 때 추축국에 가담한 헝가리에 의해 나머지 전부가 날아갔다.
  • [16] 이렇게 막강한 폴란드군 이미지는 1921년 소련-폴란드 전쟁에서 소련군이 개관광타면서 생겨났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후 경제력 등의 문제로 인해 시대의 급격한 발전을 따라잡지 못했다. 거기다가 1934년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으로 프랑스가 폴란드를 독일의 동맹국이 된거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했다.
  • [17] 당시 영국 정치권은 체코가 없어도 프랑스가 있으니 상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영국은 백만 대군을 보유한 유럽에서 손꼽히는 육군대국인 프랑스에 큰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정작 프랑스는 영국 없이는 전쟁도 없다는 내부방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2차대전 개전 이후 프랑스군을 시찰한 처칠은 프랑스 백만대군은 허구였다며 크게 개탄했다.
  • [18] 참고로 다른 지역에 살던 독일인들은 이렇게 혹독한 대우는 받지 않았다. 체코에 살던 이들처럼 열성적으로 병합을 추진하는 등 매국행위를 한 건 아니었기 때문. 물론 소련 측의 방침으로 결과적으로는 이들도 대부분 독일로 떠나야 했지만 그래도 과정에서 차이가 있다.
  • [19] 비슷한 이유로 헝가리도 공산시절에는 십자가 상징을 금지시키고 방패형으로 생긴 헝가리 국기에 밀 이삭이 둘러진 상징을 사용했다.
  • [20] 케네디는 뮌헨 협정 당시 하버드대 학부생이었는데, 대독일 유화책을 지지했던 아버지와는 달리 졸업 논문을 통해 유화정책을 강력히 비판한 바 있었다. 그의 논문은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어 큰 명성을 얻기도 했다. 때문에 케네디 입장에서는 자신이 유화주의자라는 비난은 더더욱 모욕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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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1 15:4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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