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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역사

last modified: 2015-04-10 14:32:53 by Contributors

Contents

1. 개요
2. 독립까지의 역사
3. 프런티어 개척이라 쓰고 원주민 학살이라고 읽는다.
4. 남북전쟁
5. 세계 최강이 되다
6. 2차 대전부터 6.25 전쟁까지(부제: 민주당 행정부 20년)
7. 미국 현대사
8. 인종차별 문제

1. 개요

미국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2. 독립까지의 역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식민지가 건설되었으나 결국 자체 소멸(…)했고 1607년 영국이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에 건설한 식민지가 현 미국의 모태가 된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영국의 군사 기지에서 자기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존심에 거슬렸는지 1620년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도달한 청교도[1]들이 건설한 식민지[2]를 보통 역사의 시초로 잡는다.[3]

이후 계속된 식민 사업으로 미국 동부 13개 주의 기초가 되는 식민지들이 세워진 상황에서 여러 요인들로 인한 본국(영국)과의 불화가 생겨난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 재정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영국이 치안 유지비를 식민지들에게 부담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유렵에 갖다 박아도 모자란 군대로 전쟁까지 치뤄줬는데 세금을 한푼도 안 내려고 하는 식민지가 어이없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미국이 아무리 개겨봤자 영국 입장에서는 태평양전쟁때 미국한테 주제모르고 시비 깐 일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식민지 밀수업자들(아직은 미국인 아님)이 영국의 재정 적자를 악화시킨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처음엔 관계 개선을 원하였을 뿐 독립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식민지 출신 온건파들의 주된 입장은.

"의무(세금)을 지우면 권리도 주시죠?"

정도로. 프랭클린의 "대표 없는 곳에 세금도 없다."라는 유명한 발언이 이런 의견의 연장선이었다. 하지만 영국 본토는 그런 의견 따위는 상콤하게 무시해 주시고[4] 인지세를 걷고 식민지의 공업성장을 억제하여 식민지를 영국의 시장정도로 유지하려 드는등 삽질을 거듭했다.

따라서 점차적으로 급진파가 여론을 장악하면서[5] 렉싱턴 전투를 기점으로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1775~1783). 이에 영국은 식민지 독립을 막기 위한 군대를 대대적으로 파견하게 된다.

그에 맞서서 독립 분자(Patriot)들은(아직도 미국인은 아니다) 조지 워싱턴을 사령관으로 대륙군(Continental Army)을 결성, 자발적으로 참여한 민병대 등과 함께 독립전쟁에 나선다. 당시 세계최강이던 영국군의 세력 탓에 한동안 영국에 유리하게 전황이 흘러갔으나, 결국은 프랑스 등과 동맹을 맺은 미국인들이 영국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거둔다. 이 와중에 프랑스는 너무 많은 전비를 사용해 훗날 혁명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 역시 문제는 돈. 독립 전쟁 직전에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있었는데, 이 사건 때문에 미국인들은 홍차 대신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카더라.

결국 영국은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미국의 독립과 미시시피 강 동쪽의 영유권을 승인하였고, 1787년 미국은 헌법을 제정하게 된다.

여담으로, 미국의 국기에 줄이 13개 그려져있는이유가 바로 이 시대에 연방에 가입한 주가 13개 였기 때문.[6]

3. 프런티어 개척이라 쓰고 원주민 학살이라고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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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듯한 영토 확장

그 후 미국은 1803년 212만㎢에 이르는 루이지애나를 프랑스로부터 거의 무료로 구입하였다. 그후 'Manifest Destiny(명백한 운명)'이란 사상 아래 1848년에는 멕시코와의 전쟁[7]으로 멕시코 북부를 싸그리 뜯어갔다. 1867년에는 러시아 제국와의 협상으로 알래스카를, 1898년에는 하와이 공화국 합병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100년에 걸쳐 영토를 서쪽으로 마구 넓히게 된다. 여담으로 이 때 금을 찾아다닌 것을 골드 러시라 한다.

이런 영토 확장을 미국인들이 '프런티어 정신'이라고 포장하지만, 실상 파고보면 유럽의 제국주의와 다를 바 없다. 19세기 내내 미국은 유럽의 아메리카 대륙 문제 불간섭(먼로 독트린)과 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 식민지화 대신 통상 위주의 외교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러 '서부개척'이 완료되어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더이상 확보할 땅이 없게 되자 곧 180도 태도를 바꾸어 태평양 너머의 하와이를, 미국-스페인 전쟁을 통해 1898년 필리핀푸에르토 리코를 접수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카츠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명시한 거중조정(조약 당사국이 위험에 처하면 도와주기) 조항을 간단히 엿바꿔 먹으며 일본한국을 넘기는 데 일조했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이주민과 소위 '인디언'으로 불리던 북미 원주민들 간의 전쟁이 계속된 끝에 원주민들은 거의 멸망하고, 살아남은 일부 후손들은 보호구역(Reservation Area)에 갇혀 사는 꼴로 전락하고 만다. 어느 나라나 어두운 역사가 있지만, 자유와 민주주의의 나라라는 곳에서 벌어진 이런 사태는 현재 미국인들 중에도 반성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꽤 있다. '인디언'이라는 명칭이 좀더 이들을 존중하는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으로 대체된 것도 그러한 맥락 가운데 하나.[8]

그들이 겪은 비극적인 역사에 대해 반성하는 뜻에서 미 정부는 그들에게서 어떠한 세금도 걷어가지 않으며 지역에 따라 지원금을 주기도 한다. 지금도 원주민 보호구역은 유지되고 있으며, 그럼에도 교육 수준이 낮고 미국 사회와 교류가 거의 없는 폐쇄성 때문에 원주민 중에 부유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 황량한 벌판에 카지노 세워서 부유하게 된 몇몇이 있는 정도? 불만 해소 차원에서 식량과 , 카지노를 마음껏 지원해주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 문제를 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원주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선거권이 없다.

미국 정부는 주 여럿이 힘을 합쳐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연방주의(federalism)을 기초로 한다. 식민지들로부터 계승된 첫 13주를 시작으로 차츰 북아메리카의 영토가 다양한 형식으로 주로 변형되 흡수한다. 텍사스의 같은 경우는 특이하게 지역 주민들이 멕시코로부터 텍사스 공화국으로써 독립을 한 뒤 자발적으로 미합중국의 일원이 된다. 물론 그 과정에는 미국의 농간이 있었다.

4. 남북전쟁

한편으론, 남북전쟁 전까지 미국에서는 이런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힘싸움이 항상 있어왔다. 건국 초기에는 알렉산더 해밀턴의 연방주의를 주축으로 강한 연방정부로 조금 더 유럽적인 국가체재를 갖추려고 했지만 토마스 제퍼슨의 견제로 지방자치는 그 형태를 유지한다. 각 주들은 연방정부에 동등한 권한을 요구하고 심지어 "여차하면 탈퇴해서 다른 나라에 붙는다?"는 위협도 서슴치 않았는데. 이것이 결정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 참혹한 전쟁을 겪은 그 다음이었다.

노예제에 대한 갈등을 표면적 이유로 한 경제정책 갈등은 결국 남부가 CSA(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남부 연합)로 독립하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결국 전쟁(1861.4~1864.4)이 터지고 만다. 초기에는 로버트 E. 리가 지휘하는 남군이 여러가지 열세에도 불구하고 계속 승리를 거둬 독립을 쟁취할 것처럼 보였지만 율리시스 S. 그랜트와 매클래런 등이 앤티덤 전투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북진하는 남부군을 물리치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승리는 북부에게로 돌아갔다.

5. 세계 최강이 되다



이후 에이브러햄 링컨부터 공화당그로버 클리블랜드민주당 8년을(그나마도 연이어진게 아니었다) 제외하고 44년을 해먹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영토는 해가 갈수록 팽창되었고,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였던 탓에 이민자들에게 비교적 관대해 아일랜드나 다른 유럽 국가 등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이니 인구도 날로 증가했다. 그 세력이 나날이 강대해졌다. 내연기관을 바탕으로 한 제2차 산업혁명의 중심지도, 토머스 에디슨 등의 발명가가 활약한 곳도 모두 미국이었다. 이렇게 꾸준한 발달로 19세기 즈음에는 고립주의 성향으로 정치적 영향력만 없다 뿐이지 경제적으로는 이미 유럽 전체는 쌈싸먹을 정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 당시의 사회상은 마크 트웨인의 풍자소설 '도금 시대' 등에도 잘 나타나 있고, 특히 이 즈음부터 에디슨의 제너럴 일렉트릭이나 테슬라 등 지금도 잘 알려진 기술발전의 상징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유럽은 이렇게 성장한 미국을 의식하지 않거나 애써 무시하고[9] 자기들끼리의 싸움에만 열중하다가 2차대전 이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자유방임주의가 극한으로 치닫는 시기이기도 했다. 거대 기업집단(러스트)의 등장으로 앤드루 카네기, 데이비스 록펠러, 헨리 포드, 피어포트 모건 등의 유명한 사람들이 나타난 것도 이 때였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 전에 100층이 넘는 고층빌딩들을 세우고 했던 것을 보면 그 국력의 레벨이 가늠이 잘 안 된다.

다만 이 시기 노동자들의 근무 환경은 꽤나 악명이 높아서[10] "사회주의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발현할 것이다"라고 많은 이들이 예견했으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국민정서나 기존 정당들의 간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사실 다른 나라에 비교해 보면 그렇게 나쁜 근무 환경도 아니였고 때에 맞는 적절한 개선이 있어줬기 때문이다.

동시에 식민지였던 주제에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 각지를 식민지화 하는 꼴을 보더니 위기감을 느끼고 제국주의를 발동하여 갓 독립한 필리핀을 대통령이 받은 '신의 계시'로 식민지화 하고, 하와이를 합병해 버리고, 청나라[11]일본을 영국과 같이 군함을 몰고 가 개국시켜버린다. 신미양요도 남북전쟁 직후에 일어났다는 걸 상기하자.[12]

필리핀을 합병하게 된 계기인 미국-스페인 전쟁은 미국의 팽창노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전쟁이었으며, 스페인의 식민지 지역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대신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미국의 대외 팽창이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이루어진 원인은 미국의 빠른 해군력 증강과 이때부터 쇼미더머니 영국의 대서양 철수에 있다. 영국은 신생 독일 제국을 강하게 의식해서, 노골적으로 어그로를 끄는 빌헬름 2세의 팽창을 막기 위해 미국을 견제할 수 있는 대서양 해군 전력들을 독일을 포위하려고 차출해 버렸다. 영국이 대서양 해군을 유럽으로 철수시키면서, 라틴아메리카는 사실상 미국의 안마당이 되었다.

미국 밖에서 무슨일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는 고립주의 노선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무너지게 된다.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조지 워싱턴이 유럽에서의 전쟁에는 휘말리지 말라고 하던 유언도 어기고 끌려나온다.[13] 허나 마음에도 없던 감투라고 윌슨 대통령이 고생해서 차린 UN의 전신격인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참가를 의회에서 부결해버리고 다시 국제무대에서 버로우 탄다. 그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로부터 촉발된 공화당의 분열로 잠시 8년간 정권을 잡았던 민주당은 다시 쫓겨나고 대공황까지 12년간 공화당이 집권한다. 이 때가 미국의 제1차 황금기인 이른바 '아메리카니즘' 시대이다. 금주법이 실행되어, 불법 주점 등으로 갱단과 마피아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벌게 해주는 등 삽질을 하던 시절도 이 시기. 그러니 사회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 특수로 비약한 생산력을 내수에 쏟아부으며 중산층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이들 중산층의 삶을 윤택하게 한 것은 이른바 '할부 판매'로 당시로서는 고가의 도구였던 세탁기[14], 라디오[15], 자동차를 쉽게 장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비의 한계[16]와 여러 가지 요인으로 결국 1929년 세계 대공황을 맞게 된다. 항목 참조.

이후 세계 대공황때 좀 갈팡질팡 했으나, 어떻게든 넘어간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딜 정책으로 대공황을 극복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최근에는 그 효과가 과연 있었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되는 등, 여러 가지 이론이 대두되고 있다. 여튼 1930년대 초반은 미국 역사에서 드물게 고통스러운 시기였으며, 이 시기에야 비로소 현재 미국의 상징 중 하나인 '사회 보장 제도'가 도입되었다(1933년). 농민들의 경우는 도시의 노동자들보다 좀 더 긴 시간을 고통 속에 보내야 했는데, 하필이면 이 시기 중서부를 휩쓴 몇 년간의 가뭄이 오클라호마를 중심으로 한 중서부 평원 전체를 황폐하게 만들었고 (이 시기의 황무지를 특별히 황진지대(Dust bowl)라고 부른다) 수많은 농민이 빈민이 되어 그나마 날씨 좋은 서부 해안으로 새 삶을 찾아 떠났다.[17] 이 시기를 배경으로 다룬 소설로 분노의 포도가 유명하다. 한편 1930년대 후반을 거치며 가뭄도 잦아들고 경제는 상당히 회복되었는데, 이후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불길이 치솟자 미국 경제에는 다시 호경기가 찾아오게 된다. 현대사에서 전쟁이란 얼마나 화끈하게 국력을 소비해버리고도 버티느냐를 의미한다.

그리고 외교적으로 미국은 다시 한 번 고립주의와 간섭주의 양쪽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결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유럽에서 대혼란이 일어나면 결국 미국에도 악영향이 온다"라고 강력히 주장하여, 영국을 돕기 위해 막대한 물자를 수송해 줬으나 자본가들의 환호성이 들린다 미 의회의 강력한 견제로 이 때만 해도 본격적으로 전선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이미 경제규모로는 대영제국을 1870~1880년대에 따돌리고,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국력이 대영제국을 추월해서 1차대전 이후부터 미국으로 옮겨져 가던 세계의 중심이 완전히 대영제국 시절의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음이 드러났다.고 쓰고 세계의 중심을 영국으로부터 뺐어왔다고 읽는다.[18]

그러나 일본중국에서 온갖 삽질을 계속하다가 석유 수출을 끊어버린다는 미국의 협박에 위기감을 크게 느끼고, 미국을 한번 세게 치면 이걸 내가 어찌 이겨 볼수 있지 않을까 하는 뜬 구름 잡는 마음진주만 공습을 실행하여 멋대로 전쟁을 건다. 일본군의 최대의 성공작이자, 이후 패망의 확실한 기초를 다진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은 크게 격분했으며, 그 분노가 인류 역사상 유례 없는 것임을 일본은 끝끝내 몰랐다.

6. 2차 대전부터 6.25 전쟁까지(부제: 민주당 행정부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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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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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매우 '모순적인' 전쟁을 치렀다. 미국은 글자 그대로 '세계적 차원의' 전쟁을 치른 유일한 참전국이었으나 전쟁수행을 위한 국가적 동원의 정도에 있어서는 동맹국이나 적국의 '총력전' 수준에 한참 모자랐다.[19]
- Dennis Showalter, "Global Yet Not Total : The U.S. War Effort and Its Consequences", Roger Chickering, Stig Förster and Bernd Greiner(Ed.), A World at Total War : Global Conflict and the Politics of Destruction, 1937-1945(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p.109

미국이 엄청나게 분노한건 당연한 현상이다. 해군 기지가 하나 제대로 얻어터지고,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당했으니[20] 당연하지?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과 국민들은 대대적으로 전시체제에 들어가 유럽과 태평양 양쪽에서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으며, 쇼미더머니를 쳐갈기며 더 많은 양의 물자와 더 많은 양의 무기를 동맹국에 제공했다. 진주만 침공 소식을 들은 윈스턴 처칠은 이제 전쟁에서 이겼다며 씨익 웃었다고 한다. 반면 나치 독일에겐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불과 2~3년 사이에 각종 항공기와 차량을 수십만 대씩 뽑아내는 기염을 토하며 심지어 리버티쉽이라 불리는 양산형 수송선의 경우 2분에 한 척씩 만들어졌다는 믿지 못할 통계마저 있다.[21] 뉴딜 정책이 약발이 점차 떨어져 가던 마당에, 무한정 소비를 보장하는 이런 전시체제는 미국에게 한줄기 구원의 빛과 같았다.

또한 랜드리스 계획으로 피폐한 동맹국에게 물자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전 기간동안 같은 물량대국으로 평가되는 소련도, 전차나 야포와 같은 전투병기에 예산을 쏟을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미국의 랜드리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병사의 피복이나 식량은 미국의 랜드리스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고, 소련의 제파식 전술의 기반이 되었던 군트럭도 미국에게 지원받은 트럭이었으며 대부분의 화차 또한 미국제였다. 전차나 항공기 등도 지원받았으며, 우방국 영국 또한 미국의 랜드리스가 없었다면 전쟁수행에 어려움이 많았을 만큼 연합 우방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치는 매우 컸다. 그러면서도 자기 것은 다 챙긴 것을 보면...

결국 전쟁은 대승리였으며, 이때 유럽 열강들이 전쟁의 피해로 초토화된 것을 계기로 이후 세계의 맹주로 급부상한다. 한때 소련과 자본주의 진영,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냉전의 주축이 되기도 했으며, 그리스에서 공산파 게릴라와 정부 간의 내전이 발발한 것을 보고 개입해 공산 게릴라와 싸운 직후, 미국에서는 공산 세력이 득세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이후 우리 나라에서 북한의 침공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UN에서 적극 항의하고 UN군 결성과 파병을 건의한다. 때마침 중국과 대만 중 누가 상임이사국이 되느냐로 싸우다가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을 거부한 상태라 소련을 제외한 전 상임위원국들이 찬성하여 기적적으로 UN군 파병이 이뤄진다.[22]

참전 초기에는 스미스 특임대가 오산에서 캐발살나고 24사단이 대전에서 패퇴하는 등 고전했지만 인천 상륙작전으로 결국 전세를 역전시키고, 이후에도 공산군과의 교전에서 주력 역할을 하는 한편 한국에 대한 막대한 물자 지원으로 한국전쟁 무승부(…)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한편, 90년대 이후에 당시 미군이 저지른 오폭이나 민간인 학살 등의 의혹에 대해서도 꾸준히 연구가 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의 전체 사망자 중 민간인 비율은 80%에 이르는데 이는 당시 미군이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도 무차별 폭격을 자행했던 것에 기인한 면이 크다. 미군의 공습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의 대표적인 사례는 노근리 사건. 여기 참조 (#)
사실 갓조국 형님들은 자질구레한 것들은 신경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신대륙의 기상

7. 미국 현대사

전쟁과 함께 한 민주당 20년 정권을 지내보니, 슬슬 고인 물은 썩는다고 부정부패가 이어졌다. 결국 한국 전쟁을 끝내겠다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승리로 민주당 20년은 종식되고 만다.

여하간 이 민주당 20년이 끝난 이후 미국 경제는 1차 대전이 끝나자 대공황이 일어나듯이 추락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계속 성장, 미국의 쇠퇴와 그에 따른 소련의 독주를 기대하고 있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예상을 가차없이 깨버린다(이미 죽어버렸지만..). 동시에 미국은 마셜 플랜이라는 막대한 경제 원조로 서유럽 경제를 되살리고 아시아권 반공 국가들(대표적으로 대만, 일본, 한국 등)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엄청난 전후 호황기를 누리던 미국 시장은 그야말로 상품의 블랙홀이었고 전후 빈곤에 허덕이던 서방 국가들은 대미 수출길이 열리며 부흥을 이루게 된다. 이 시기가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이다.

하지만 이런 사정은 1960년대에 들어가서 달라지게 되는데, 밖으로는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날리고, 니키타 흐루쇼프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니마니 하면서 맞먹으려고 들게 된다. 이에 존 케네디린든 존슨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행정부는 아폴로 계획을 세우고,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는 등 공세적으로 나섰으나 도리어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게 된다. 내부적으로는 천민 자본주의적 소비문화 범람에 반발, 도덕주의가 득세하며 히피를 비롯한 뉴웨이브 운동이 득세했고 호황으로 인한 사회적 기회 확대로 대규모 흑인 공민권운동 등이 일어나는 등 격동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것은 리처드 닉슨 때의 일로(아폴로 계획의 결실인 달 착륙도 이 때 따 먹었다), 동시에 소련과 각을 세우던 중국과 우호적 관계를 가지는 데탕트를 앞세우고 재선에도 성공하지만 그 직후 워터 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게 된다. 이후 승계한 포드 대통령을 거쳐 인권 외교를 표방한 지미 카터의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섰지만 이란에서의 이슬람 혁명 등으로 취약성을 드러내며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게 정권을 내주게 된다.

로널드 레이건의 공화당 행정부는 "레이거노믹스"라고 일컬어지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스타워즈"로 대비되는 군비경쟁을 펼치면서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영국과 함께 보수주의 시대를 연다. 우연인지, 아니면 군비경쟁 정책의 결실인지 조지 부시 행정부에 들어가면 사회주의 진형의 붕괴에 따라 미국은 완벽한 절대 강자의 자리에 오르며, 걸프전으로 엄청난 지지도 상승을 이루지만 점차 레이거노믹스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경제는 맛이 가기 시작했다.(심지어 80년대 말까지는 미국이 일본에게 추월당한다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economy', stupid!)를 구호로 내세운 빌 클린턴의 민주당이 정권을 잡게 된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대영제국 이후 새로이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던 소련까지 붕괴하면서 미국은 넘사벽의 천조국이 된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이 대영제국과 소련에 이은 새로운 도전자라는 게 함정. 근데 이것도 현 중국의 상황을 보면 아직까진 중국이 미국 추월할 걱정은커녕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는 것도 어느정도 지켜봐야 할 듯. 거기다가 메이드 인 차이나의 저력까지 본다면 아직 우린 안될거야 아마.

민주당 정부는 3차 산업을 바탕으로 일본을 여유있게 따돌렸으며, 화이트 게이트가 불거지긴 했지만 재선에도 성공하여 미국의 황금시대를 구가한다. 하지만 2000년 대선에서 앨 고어가 석연치 않게 조지 W. 부시에게 패하면서 슬슬 황혼이 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부시 재임 내내 부시 행정부의 무능함이 만천하에 떨쳐짐에 따라 자연히 공화당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는데, 9.11 사태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라크 전쟁의 연이은 병크로 부시 행정부는 전 세계적인 반미감정을 초래했으며, 그럼에도 계속 일방주의로 나가다가 벼락을 맞고 만다.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최근 10년간 서브프라임으로 세계의 돈을 주워 모아서 자국 서민들에게 '잠시 동안' 집을 마련해 주었지만, 부시 정권과 금융 관리 당국의 호흡이 맞지 않아 금리를 올리는 바람에 대량의 수금 불가 상태의 대출이 발생했고 동시에 부동산 값도 내려가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 전 세계적 금융 위기를 불러올 것으로 우려되었으나 현재는 어느 정도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 폴 크루그먼 가라사대, "재정 적자가 대공황의 벼랑 끝에서 세계를 구했다." 물론 근본적인 해결이 되었는가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당시 공화당은 맥케인과 페일린을 후보로 내세우면서 부시의 이미지를 지우려고 안달했지만 이 사건이 결정적 타격이 되었다. 결국 2008년 11월 4일, 민주당의 버락 후세인 오바마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23]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공화당은 부시의 족적이 워낙 큰지라 큰 위기에 밀렸으나 색깔론과 건강보험을 바탕으로 다시 지지율을 높이고 있는 형편이다.

8. 인종차별 문제


1976년에 찍힌 사진이다. 사진 제목은 "The Soiling of Old Glory" 이 사진을 찍은 Stanley J. Forman은 1977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1900년대 초까지 서부 개척 붐이 있었는데, 이후 서부와 동부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서부의 영토들이 주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노예로 유입된 흑인들에 대한 차별은 미국 내에서 큰 문제로 떠올랐다.

이는 주 정부가 연방정부의 간섭을 최대한 받지 않는 미국 통치체계의 특징이 낳은 결과로 주 정부는 연방헌법에 위배된다거나 하는 법 제정이나 행정을 하지 않는 한 뭐든지 자신들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으며 연방 정부가 권한이 약했을 때에는 연방정부가 제제를 걸지 않으면 정말 여러가지 이상한 법들을 만들었다. 게다가 남북 전쟁 이후 흑인들과 함께 사는 걸 원하지 않았던 백인들은 크로 법[24][25]이라 불리는 인종차별법을 제정했고 이 법을 근거로 남부 주들은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이런 주정부의 독립적 성향과 비백인에 대한 차별 의식은 리틀록 위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1957년 9월, 아칸소 리틀록 교육위원회는 센트럴 고등학교에서 흑백 통합 교육이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1954년에 있었던 미국 대법원 판결 347 U.S 483 (Brown vs Board of Education of Topeka, 1954)에 의한 것으로,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1896년 자신들이 Plessy vs Ferguson (163 U.S 537)에서 내렸던 결정을 뒤집어, 학교에서의 흑백분리가 미 수정헌법 제 14조에 위반하며, 따라서 학교에서의 흑백분리는 폐지되어야한다고 판결한다. 하지만 이 판결은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제시하지는 않았고, 대법원이 방안을 제시하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하지만, 남부의 주민들은 이 판결을 결코 환영하지 않았고, 결국 리틀록에서 사건이 터진 것 이다.

사건은 불만을 품은 한 백인 주민이 지방 법원에 명령 정지 신청을 내면서 시작되었다, 대법원 판결따위는 씹어버리는 또라이 같은 지방 판사는 이를 받아들여 정책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자 연방 정부에서 개입을 하기 시작했는데, 연방 법원은 이에 대해 지방 법원의 명령은 무효이며, 따라서 교육위원회는 정책을 계속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이는 그해 9월 3일부터 흑백 통합 교육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주는 법적인 근거가 되었지만, 아칸소 주지사 오벌 포버스는 9월 2일, 주 방위군에 명령을 내려 학교를 포위, 흑인들의 등교를 강제로 막았다. 그는 이게 시민들의 폭력적인 대응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둘러댔으나, 사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결국 교육위원회는 연방 법원에 도움을 청했고, 법원은 계획대로 추진하라고 명령했으나 주 방위군은 그 명령을 무시한다. 9월 10일에는 법무 장관 등이 아칸소 주지사에 대한 직무정지 명령을 연방 법원에 신청하는 단계까지 가고 만다. 9월 20일의 법원 명령으로 간신히 주 방위군은 철수 했지만, 9월 23일 학교 문을 다시 열자 이번에는 백인 군중들이 흑인 학생들을 막고 강제로 집으로 끌고가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이때부터 백악관의 개입이 시작되었다. 그날 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리틀록에 "어느 누구도 정의를 방해하지 말라."라는 포고문을 발표했고, 이튿날 아침 리틀록 시장과의 협의에 따라 아이젠하워는 아칸소 주 방위군을 강제로 연방군에 편입시켜 주지사의 손에서 군 통수권을 빼앗음과 동시에, 정규군을 리틀록에 투입시켰다.

연방 법원의 명령은 회복되었고, 흑인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갔지만, 1958년 6월 한 학년이 끝날 때까지 연방군은 근처에서 흑인 학생들의 보호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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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공중강습사단 병사들의 호위하에 등교하는 흑인 학생들

자세한 것은 여기 (소넷(sonnet)의 블로그 - a quarantine station)

당시 흑인들이 어떤 차별을 받았는가에 관해 이런 농담이 있다. 남부에 살던 어느 흑인이 투표를 하기 위해 투표장을 찾자 백인 관리들이 그 흑인에게 투표할만한 지적 능력이 있는지를 검사하겠다고 제지했다. 이것부터가 불법 관리들은 흑인에게 미국의 역대 대통령이나 역사적인 지식이나 철학, 과학에 관련된 어려운 문제를 던졌고 흑인은 그 모든 문제를 척척 맞추었다. 그러자 약이 오른 관리들이 당연하지만 한자로 적힌 중국의 민일보를 주면서 "이 신문을 읽을 수 있다면 투표권을 행사하게 해주겠소."라고 했다. 흑인은 그 신문을 받아보더니 "내용은 모르겠지만 헤드라인은 읽을 수 있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당연히 한자를 못 읽을것이라고 생각했던 관리들이 경악하여 "헤드라인을 읽을 수 있다고?"라고 반문했다. 흑인은 차분한 목소리로 신문을 읽었다. "여기 투표권을 행사못하는 흑인이 있다."(...) 부당하게 자신의 투표권 행사를 방해한 백인 관리들을 재치있게 조롱한 것이다. 그래봐야 투표는 못했다

한편 흑인들도 이러한 차별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흑인들은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서 계속 목소리를 높였으며 1940, 50년대 들어서는 점점 흑인들도 백인 사회나 문화권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50년대 들어서는 연방 법원이 헌법을 근거로 인종차별 관련 법안들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리기 시작했으며 1955년 로자 파크스라는 여성이 몽고메리 버스에서 체포당한 사건을 계기로 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흑인 사회가 품고 있던 불만을 한번에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이에 백인들도 KKK를 부활시켜 흑인들을 테러하는 등 점점 미국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26].

이후 1950~1960년대는 Civil Rights Movement가 절정에 달해, 1963년에 일어난 March on Washington for Jobs and Freedom과 Birmingham Movement를 기점으로 마침내 1964년 마침내 린든 존슨 대통령이 Civil Rights Act of 1964에 서명하면서 흑인들은 드디어 법적으로 완전한 평등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이 법은 의회를 통과하면서 효력이 많이 약해져서, 법의 통과 이후에도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결국 1965년에 앨러배마[27]의 Selma라는 도시에서 흑인들의 투표등록과 통합에 반대해 백인들이 평화시위를 하고있던 흑인들을 공격, 흑인 한명이 사망하는 큰 사건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후에도 존슨 대통령의 Civil Rights Act of 1968과 Voting Rights Act of 1965로 1964년의 법을 보완하면서, 흑인들은 법적인 권리를 완전하게 되 찾게 된다.

지금이야 흑인 대통령이 선출되는 등 여러 면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많이 개선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여전히 미국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세력이 WASP라는 사실은 변함 없다. 거기다가 백인들만 인종차별을 하냐면 그것도 아니고 또 아시아계는 아시아계대로 백인 이외의 유색인종(중에서도 특히 흑인)은 깔보는 등 인종간의 불화는 여전히 남아있다. 하지만 관련 법령도 잘 되어 있고 오랜 시간에 걸쳐 인종차별을 죄악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인종을 가리지 않고 이러한 차별 의식을 실제로 체감할 일은 거의 없다. 깜둥이 따위의 소리를 지껄이면 웬만한 백인도 상당히 좋지 않게 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차별이 없느냐면 또 아니다. 대놓고 흑인이라서 멸시하는 일은 없지만 흑인의 다른 신체적 특징을 핑계삼아 채용을 거절한다던가 하는 경우는 흔하며 가장 유명한 케이스로는 의도적인 왕따가 있다. 소위 흑인 가족이 이사를 오면 기존의 백인 주민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그 마을에서 하나 둘 다른 마을로 떠나며, 이 과정에서 흑인은 백인 주류 사회에 편입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격리되는 것이다. 이건 대놓고 인종차별을 하는 게 아니라 은근슬쩍 배척하는 거라 법원에 호소하기도 힘들고 여러 가지로 골치.

March on Washington for Jobs and Freedom에서 마틴 루터 킹은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은 I Have a Dream이라는 연설을 했다. 이후, 그의 연설 녹취본과 대본은 미국 의회도서관에 영구보존 되어 있다.

"......자유의 종이 울리게 될 때, 이 자유의 종 소리가 모든 마을, 모든 촌락, 모든 주, 모든 도시에서 울리게 될 때 우리는 신의 자손으로서 흑인이건 백인이건, 유대인이건 아니건, 개신교이건 가톨릭이던 모두가 손에 손을 잡고 옛 흑인 영가를 함께 부르는 날을 향해 나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나 자유 얻었네! 나 자유 얻었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자유 얻었네!"

"......When we allow freedom ring, when we let it ring from every village and every hamlet, from every state and every city, we will be able to speed up that day when all of God's children, black men and white men, Jews and gentiles, Protestants and Catholics, will be able to join hands and sing in the words of the old Negro spiritual, "Free at last!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we are free at last!"

From Martin Luther King Jr's 'I Have a Dream' Speech

지금은 전세계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모범으로 미국을 삼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런 민주주의 또한 피로 물든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은 인종간 편견이나 마찰이 미묘하게심하다. 대놓고 차별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공립 학교 학생 배정을 백인/유색인종 이렇게 나누지는 않지만 특정 학교에만 백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부촌을 배정하는 등 교묘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차별을 한다. 물론 이런 분위기 자체는 기나긴 차별의 역사 때문에 의도하였든 아니든 고착화 된 감도 없지 않아 있고 이에 대한 반발인식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꾸준히 개선하려는 노력은 계속 나오고 있다.
뭐, 물론 교회는 말할 것도 없다. 몰몬교같은 교회를 보면 백인들이 80% 넘게 차지하고, Black Church도 따로 있을 정도.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유명한 블랙쳐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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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Puritan인데, 이들을 청교도라고 부르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좀 의문이 많다. 영국역사에서 청교도는 국교회에 대항해서 개혁운동을 벌인 이들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들처럼 영국국교회를 버리고 이탈한 이들에 대해서는 분리주의자Separatist라고 부른다
  • [2] 제임스타운에서 북쪽으로 수백km 떨어진 곳에 위치
  • [3] 다만 이들이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운이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소상공인들이라서 낚시대 하나 챙겨간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황무지 개척에는 능력이 없었다. 그 결과 제임스타운의 전례를 밟기라도 하듯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12월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메이플라워호가 다시 영국으로 떠난 이듬해 4월에는 거의 절반인 54명만 살아남아 있었고, 그나마도 절반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이들이 살아남은 이유는 순전히 인근에 거주하던 원주인들의 호의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나마도 2번이나 유럽인에게 납치당하고 노예로 팔리는 등의 고생을 하다가 겨우 메이플라워호 도착 1년 전에 돌아왔다가 2년 후에 역병으로 사망한 티스콴툼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이 사람만 영어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표류인들? 이 사람들은 티스콴툼이라는 발음도 못해서 스콴토라고 불렀다.
  • [4] 식민지인들에게 참정권을 주면 어느 순간엔가 그 세력이 대책없이 커져 버린 식민지가 본토를 누르고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될것을 우려했다는 설도 있다. 현재 미국과 영국의 내수경제 규모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땅따먹기도 능력껏 하자
  • [5] 이 과정에서 토마스 페인의 팜플릿 '상식'이 큰 역할을 했다.
  • [6] 첫번째로 가입한 주는 델라웨어. The First State라고 불린다.
  • [7] 전쟁이라고 보다는 거의 땅따먹기 수준이었다. 멕시코는 이 때 국토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다. 어느 정도로 억지였냐면 심지어 전쟁을 지휘하던 율리시스 S. 그랜트마저도 옳지 못한 전쟁이라고 할 정도였다. 그나마 미국 내부에 양심적인 사람들이 "이 전쟁은 미국에게 두고두고 좋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는데, 과연 오늘날 멕시코 등 남미 히스패닉계들이 미국의 남부로 대거 이주하고 있다.
  • [8] 그러나 아직도 인디언이라는 호칭은 매우 많이 쓰인다. 대표적으로 대놓고 인디언이라고 한 야구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팀이름을 바꾸라는 여론이 아직도 거세다.
  • [9] 예컨대 코난 도일셜록 홈즈 시리즈에는 미국이 의외로 자주 등장하는데, 신흥 부자가 된 신도시 깡촌 쯤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 [10] 하루 12시간 근무에 점심시간 30분만 휴식, 그나마 지급되는 것은 빵 두 조각에 사과 반 알 정도였다고 한다.
  • [11] 청나라의 경우는 영국과 미국, 프랑스, 러시아가 같이 합세해서 불평등조약을 맺었다.라고 쓰고 삥뜯기 시작했다고 읽는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 [12] 제네럴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가 서로 원인과 결과이면서 그만큼 시차가 나는 가장 큰 이유이다.
  • [13] 하지만 경제에서는 전혀 달랐는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전에 전쟁 당사국들에게 자국의 무기를 팔면서 전쟁국들이 발행하는 국채을 사는 등 실속은 다 챙기고 있었다. 이 때문에, 1차대전 종전 직전에 영국의 최대 채권국은 미국이 되어버렸다.
  • [14] 지금도 여러 가지 발명 중 주부의 삶에 가장 혁명적인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 [15] 현재의 TV의 위상과 맞먹으며, 대단히 고가의 물건이었다. 특히 채널 돌리기가 쉽지 않아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지하실에 4개의 라디오를 동시에 갖다 놓고 각각의 방송에 채널을 맞추어두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 [16] 1927년경부터 제조업 각 분야에서 이미 악성 재고가 늘어나고 있었다.
  • [17] 캘리포니아 사람들은 이들이 어디에서 왔건 무조건 오키(Oki)라고 불렀는데, 오클라호마 출신 뜨내기란 뜻.
  • [18] 이미 1890년대 ~ 20세기 초반에 미국과 대영 제국의 국력을 넘어서기 시작했음이 드러났고, 역전한 계기는 제 1차 세계대전과 세계 대공황이었다. 이 때부터 미국은 천조국이 되었다.
  • [19] 이걸 쉽게 해석하면, 2차대전 당시 미국의 사기적인 물량도 미국의 전체 국력과 비교해 보면 별로 크질 않았다는 뜻이다(…).
  • [20] 사실, 그 당시 일본 해군 사령관인 야마모토 제독은 선전 포고를 제대로 하고 나서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선전 포고문을 담은 암호의 해독이 늦어져서, 일본 대사가 미국 장관에게 선전 포고문을 전달한 시점에는 이미 진주만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이 장관에게 전해진 후였다. 어쨌거나 선전포고 없이 기습한 셈이고, 이미 공격해 버렸으니 변명도 못 한다. 이런 판이라 이 소식을 들은 야마모토 제독도 엄청나게 분노했다고 한다.
  • [21] 독일의 U보트로 대표되는 무제한 잠수함작전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가 이거다. 결국 독일은 전쟁말기에도 교환비율을 1대1까지 찍어내면서 분전했지만, 미국의 물량은 그정도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었다.
  • [22] 그런데 계속된 연구로 밝혀진 그 당시 기록에 따르면, 소련의 불참은 전쟁 발발의 책임을 회피하고, 미국이 한반도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에 국력 회복 및 유럽에서의 공산화 작업을 위해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한다.
  • [23] 케냐 흑인 아버지와 미국 백인 어머니에게서 난 혼혈인이기 때문에 흑인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실제로 미국 흑인들 중 백인 피가 섞여있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하버드대 헨리 루이스 게이츠 교수에 의하면 자신이 흑인이라고 응답한 미국인의 약 58%가 12.5% 이상의 백인 피가 섞여 있으며, 약 1%가 50% 이상의 백인 피가 섞여 있다고 한다. 그 1% 역시 약38만9천명정도로 적지 않은 숫자다. 사실 흑인이라고 치더라도 오바마는 혈통이 일반적인 흑인과 크게 다르다. 미국 흑인은 조상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부분 서아프리카 출신이지만 오바마는 동아프리카니까. 부계로 치면 이민 2세밖에 안 되기도 하고.
  • [24] separated but equal 분리하지만 같은 대우를 하면 차별이 아니라는 내용으로 흑백 차별을 정당화했다. 그런데 이게 말만 좋지, 버스에 흑인좌석을 두고, 백인좌석을 두면 합법. 교육에 있어서도 백인 학교와 함께 흑인 학교가 존재하면 역시 공평하니까 합법, 뭐 이런 식이었다. 이런 일이 가장 최근까지 벌어졌던 곳이 바로 남아공...
  • [25] 참고로 짐 크로란, 미국의 한 백인 코메디언이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바보 같은 흑인 흉내를 내면서 춤추고 노래불렀던 캐릭터이다. 존재 자체가 흑인에 대한 멸시가 강한 법률이었다.
  • [26] 이 시기 활동한 인물이 본문에도 언급되는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이다.
  • [27] 전쟁영화 크림슨 타이드에서는 흑인 부함장과 백인 함장의 대립에 인종대결적 요소를 넣기 위해서 일부러 핵잠수함의 이름으로 앨러바마를 선택할 정도로 인종문제에 있어서는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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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0 14:3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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