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미야모토 무사시

last modified: 2015-04-13 13:59:19 by Contributors

miyamotomusashi.jpg
[JPG image (30.38 KB)]

가장 유명한 일화인 간류지마의 결투

Contents

1. 개요
2. 간류지마(巖流島)
3. 오륜서
4. 예술가로서의 일면
5. 허구성
6. 그 외
7. 대중문화 속의 무사시
7.1. 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7.2. 태합입지전5
7.3. MUSASHI -GUN道-
7.4. 기타


宮本武蔵
(1584? ~ 1645.06.13)

1. 개요

일본의 유명한 검호. 두 자루 칼을 쓰는 이천일류(二天一流, 이도류의 일종)의 시조다. 간류섬에서 사사키 코지로와 겨룬 이야기로 유명하다. 소설,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등 각종 대중문화 매체에서 수 없이 등장해 대중에게 친숙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에도 시대의 실존했던 유명한 검호라고는 하나 그 명성에 비해서는 공적인 지위에 오른 적이 없고, 동시대 관동 지역의 강호들과는 겨룬 적이 없기 때문에 허구나 과장이 많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오륜서에서 무사시가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60여 회 실전을 치렀다고 한다. 이 시절에는 아직 대결에서 호구와 죽도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실전이란 목검이나 진검으로 싸워서 둘 중 하나가 대갈통이 터지거나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혹은 죽어야 끝나는 혹독한 승부를 뜻한다. 만약 이런 것을 실제로 60회나 한 번도 지지 않았다면(거기다가 치명적인 부상도 입지 않았을테니) 대단한 실력가였을 것이다.

당시 일본의 한 검술가는 "무사시의 검술은 귀신의 검술이며, 다른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미야모토 무사시에게서 나온 유파로 엔메이류(円明流), 니텐이치류(二天一流)와 분파인 니텐류(二天流)가 존재했으며, 엔메이류는 젋었을 때 자기 검술을 자처하고 다닐 적에 쓰던 이름이고, 니텐이치류는 늙어서 다시 정리해서 세운 유파이다. 엔메이류는 계보가 끊어지고 관류등에 일부 남아있지만 니텐이치류는 아직 계승되고 있다. 니텐류도 계승자가 있으나 대외적으로 활동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왼손잡이라서 후학을 길러내지 못 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무사시 본인도 끝내 이도류를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사실 말년에 저술한 오륜서를 살펴보면 '이천일류는 긴 대도로도 이기고, 짧은 소도로도 이긴다. 따라서 대도의 길이를 이렇다 저렇다 정하지 않고, 어떠한 무기로도 이길 수 있다는 정신이 이천일류의 도인 것이다'는 내용이 있으며, '병법에서는 무기의 효용을 알아야 한다'라는 식의 항목이 있는 점에 미루어 이천일류는 이도류를 고집하기보다는 상황과 상대에 맞춰 무기를 사용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올바르다.[1]

2. 간류지마(巖流島)

미야모토 무사시와 간류(사사키 코지로)의 대결로 유명한 간류지마(巖流島) 결투 역시 실제로 존재는 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과정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무공전(미야모토 무사시의 전기. '이천기'의 원사료)에 따르면 미야모토 무사시는 승부의 시간을 알리는 파발꾼이 계속 와도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서는 천천히 아침밥을 먹고서는, 유유자적 노를 깎아 목도를 만든 후(...)에야 비로소 결투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칼집을 버렸으니 넌 진거나 다름없다'라는 패기를 시전해주시고는 간류를 패죽였다(...)고 한다.

한편 동시대의 부젠국(豊前国)의 코쿠라한(小倉藩:당시에는 호소카와(細川)씨)가문의 장로, 모지성(門司城)대리인 누마타노부모토(沼田延元)의 문서『누마타가기(沼田家記)』의 기록은 이것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는 무사시와 간류의 제자 사이에 어느쪽의 병법이 짱먹는가 입배틀을 벌이다 싸부끼리 현피시켜서 누가 짱인지 대보자로 결판나서 무사시와 간류가 맞붙게 되었는데, 간류가 결투에서 패배한 후에 무사시의 제자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적혀있다.

누마타가기는 전국 시대의 실존 가문인 누마타가(沼田家)에 관한 기록이므로 그 신빙성은 비교적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간류지마 결투와 간류(사사키 코지로)의 실존에 대해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는 것.

만약 이 기록을 따른다면 의문스러운 점은 엄연히 일대일 결투에서 간류는 혼자 나타난 데 반면해 미야모토 무사시는 혼자 오지 않고 제자들이 같이 왔다는 점, 스승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자들이 간류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없다는 점, 게다가 미야모토 무사시가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섬의 이름이 간류지마가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관해서 간류지마가 있는 시모노세키 지방에는 한 가지 색다른 일화가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

"무사시는 제자를 여러 명 거느리고 먼저 후나지마로 건너갔습니다. 다수에 혼자, 혼자서는 당해낼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나 간류는 이렇게 말하며 억지로 후나지마로 건너갔다.

"무사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굳게 약속한 이상, 오늘 건너가지 않는 것은 무사의 수치, 만약 다수로서 나를 치려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사시다."

어부가 말했던 대로 무사시의 제자 4명이 가세해, 마침내 간류를 죽였다. 그러나 간류를 말렸던 어부들이 간류의 의로운 마음에 감동해 묘를 세웠고, 지금처럼 간류섬이라 부르게 되었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정확한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정도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

3. 오륜서

무사시가 검객보다는 전술가에 가까워서 그렇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억지로 분명 무사시가 남긴 병법서 오륜서는 현대에도 교본으로 통하는 명저이긴 하다. "천千일의 연습을 단이라 하고, 만萬일의 연습을 련이라 한다. 이 단련이 있고서야만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같은 문구 등을 보면 현시대에서도 배울 만한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병법서라고 해서 무사시를 손자 오자 같은 병법가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가 말하는 병법은 일본에선 군략(軍略)[2]이라고 한다. 따라서 무사시가 무술가가 아닌 전술가에 가까웠다는 주장은 아예 틀린 것.[3]

한데 미야모토 무사시의 시대에 이르게 되면 세키가하라 전투를 끝으로 더 이상 대규모의 항쟁 즉, 무사인 병법가가 군대를 지휘하여 싸우는 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고로 전쟁 전반을 아우르던 병법이 이제는 일개 개인의 수신修身의 방도로 전용되는 것이다. 바로 이 고민이 오륜서에 나타난다. 즉,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방략인 병법이 어떻게 개인의 단련을 위주로 하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수신서로 귀결되느냐를 보여줌으로서 이제는 전쟁터가 아닌 도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무사의 신분 변화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4. 예술가로서의 일면

검객뿐만 아니라 화가나 예술가로도 유명하여, 무사다운 패기가 넘치는 직선적인 그림체로 일본 미술계에서는 '니텐(이천)'이라 불리며 추앙받고 있다. 수묵화를 잘 그렸으며 그림이 장기였다고 한다. 불상을 조각했다는 말도 있다.

5. 허구성

무사시의 불분명한 행적과 석연치 않은 주변 상황 때문에 소설로 인해 지나치게 신격화된 검객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일본에서 안티도 꽤 많은 편.

이런 근거는 간단하면서도 치명적인데, 우선 무사시는 이미지에 걸맞는 관직에 오른 적이 없었다. 일설로는, 50대가 되었을때 호소카와 집안의 쿠마모토 번에서 50석의 녹봉을 받는 검술 사범이 된게 관직의 전부라고.[4][5] 그렇게 유명한 검객이었다면 당대의 다이묘들이 앞다투어 모실 만도 한데, 몇번 입질만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 아무도 무사시를 쓰지 않았다.[6]

또한 관서 지방에만 틀어박혀서 당시 검술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관동의 유명한 검객들과는 검을 겨루지 않았다는 부분도 흠이다. 특히 관동 제일의 검호이자 막부의 검술사범으로서, 자타가 공인하는 명실상부한 전국구 네임드 검객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를 대표로 한 야규 신카게 계열의 검호와도 겨루지 않았고, 야규 신카게류와 함께 당대 양강이라고 할 수 있는 같은 막부의 검술사범이었던 노 타다아키를 대표로 한 일도류와도 한번도 겨루지 않았다. 아니 사실 관동 이외 지역의 유명 검객들과도 검을 겨루지 않았다. 규슈의 카게류 계열 타이사 류의 마루메 나가요시라던가, 야규 무네아키, 시현류의 토고 시게타다, 중조류의 토다 시게마사 등...

그나마 미야모토 무사시가 이긴 유명 검호래봐야 요시오카 일문과의 대전 정도뿐. 더구나 요시오카 가문은 당대에도 그 전에도 단 한번도 전국구급인 적은 없었다. 요시오카 세이쥬로는 연배상 1573년에 멸망해서 이후 모리 가문으로 도망간 그리고 이후 은거한 아시카가 가문의 사범이 될 수 없을테니 본인은 확실히 아시카가 가문의 검술사범이 아니었고, 아버지인 요시오카 나오타카가 아시카가 요시테루,아시카가 요시아키,호소카와 후지타카의 스승이던 츠카하라 보쿠텐이 노환으로 인한 휴양 목적으로 관동으로 떠나면서 일시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검술 지도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요시오카 가문이 쇼군가의 공식 검술 사범인것 처럼 그려진 것. 아버지인 요시오카 나오타카야 그래도 어느 정도 실력있는 검호이자 지역 네임드였던건 확실하지만 아들인 요시오카 세이쥬로는 별 다른 유명 인사를 가르친 적도 없고 유명 다이묘의 검술사범이 된 적도 없는, 강했다는 증거래봐야 아버지가 쇼군가의 검술사범이었고 교토에서 도장을 열고 있으니까 강하지 않았겠냐 정도 -,-;.. 인 인물이었다. 특히나 무사시와의 대전 이후에는 그나마 아버지 빨로 어느 정도 나가던 도장이 아예 망해 버려서, 이후 요시오카 가문은 교토에서 염색 집으로 전직한다... 비참...

다만 이천기(二天記)에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요시오카에 완승한 것으로 나와 있는 반면 요시오카전(吉岡傳)에서는 이와 반대로 미야모토 무사시가 결투에 나오지도 않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등 수많은 기록이 있으나 전부 상반되는 주장을 하고 있으며, 고로다화와 본조무운소전의 기록에 따르면 무사시와 요시오카의 승부는 무승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실제로는 아마 대등한 시합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다만 요시오카 측 기록에 의하면 이후 무사시와 무승부를 기록한 뒤 제자 중 염색에 뛰어난 자가 있어 일문이 염색업으로 전직함 이라는걸 보면 아무래도 요시오카 쪽이 밀린 승부이긴 했던 모양. 다만 당대에도 승패에 관한 논란이 있었던 듯한 기록이 있는 등 요시오카의 제자 수십명을 무찌르고 아예 멸문시켰다는 것은 확실히 후세의 창작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게다가 무사시에 대한 자세하고 정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 전해지는 이미지는 후대에 재창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이 무사시는 일본의 정식 역사서에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으며, 무사시의 행적에 관해 기록한 이천기(二天記)를 비롯한 여러 자료들은 모두 사후 수십년 뒤에야 나온 것들 뿐이라 신뢰도가 떨어진다. 다른 사료와 불일치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사시를 추켜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도 많다.

무사시 필생의 라이벌로 각인된 사사키 코지로가 정작 무사시의 저서 오륜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현재 전해지는 오륜서 역시 원본이 소실된 상태로 다수의 사본만이 존재하는 실정이며, 이마저도 내용에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또한 오륜서에는 버젓이 하리마(播磨)국 출생이라 적었는데, 미마사카(美作)국 출생이라는 다른 기록도 있다. 요시카와 에이지가 <미야모토 무사시>에서 그린 미야모토 마을은 바로 후자를 채택한 것.

일단 본래 이름은 후지와라 하루노부(藤原玄信) 또는 히라타 무사시(新免武蔵)라는 얘기가 있으며, 바뀐 이름에서 성은 미야모토 혹은 신멘(新免)으로 아명은 벤노스케(辨助), 이름은 武藏-'무사시'와 '타케조'로 읽을 수 있다. 이 이름을 읽는 것은 요시카와 에이지 소설의 영향력으로 무사시로 굳어진 듯하다. 또한 이름이 마사나(政名)라는 주장도 있다. 호는 이천(二天) 또는 이천도락(二天道樂).

양자 이오리가 세운 비문에 따르면 신멘 무니가 아버지였다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오리가 도마라 신사에 봉납한 표찰의 기록에 따라 덴쇼년간 사망한 신멘을 무니라고 보지만 실은 이 사람, 멀쩡히 살아있었다. 에도 시대 후기에 정립된 가계도에서는 신멘 무니노스케의 양자였다는 기록이 있어서 무니를 양부로 보는 시각도 있다. 혹은 도리류(当理流)의 무예가인 미야모토 무니노스케 후지하라 가즈마라는 설도 있다. 간단한 신상명세조차 이 모양이니, 실제 행적을 추적하려면 카오스가 따로 없을 지경이다.

6. 그 외

일본에는 미야모토 무사시와 츠카하라 보쿠덴이 싸운 적이 있다는 일화가 있고 그 일화를 다룬 그림도 존재하지만 실제로 이 2명은 아예 태어난 시대가 다른 인물이다.[7]

시구루이의 저자 야마구치 타카유키는 무사시의 성공(?) 비결은 오륜서 등의 저술 활동으로 자기 PR에 힘쓴 점이라고 애둘러 꼬집은 바 있다.[8]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카시 테루즈미의 휘하에서 참전했다고 한다.

무사시의 실력을 현대 검도 기준으로 분석해 보니, 강삼약사-3단을 주자니 강하고 4단을 주자니 약하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거구였기 때문에 검술보다 체격으로 이긴 점이 많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하지만 사진 한 장 없는 인물의 체격과 실력을 논한다는 점에서 영 신뢰성이... [9]

명성황후를 시해한 낭인이 무사시의 자손이라는 루머가 있지만 헛소리다. 무사시는 양자만 있었을 뿐 친자식은 없었다.

7. 대중문화 속의 무사시


요시카와 에이지 소설은 간류섬 대결에서 끝을 맺지만, 사자와 사호의 소설은 정치에 뛰어들거나 아마쿠사성 토벌에 참가하는 등 무사시 말년의 일도 그렸다. 국내엔 요시카와 에이지 작품과 사사자와 사호 작품을 한데 묶어서 출판한 개념상실작(...)도 있으니 구입시 반드시 작가명을 확인하자. 사사자와 사호 작품을 보다보면 -본격!미야모토 무사시 플래그 메이커!라는 느낌이다.유부녀쿠노이치유녀원수애인,심지어는 비구니까지 세워진다. 다르게 정리하면 유부녀는 도도함이요, 쿠노이치는 보이쉬며, 기녀는 병약하고, 유녀는 섹시하고 열녀, 원수의 애인은 얀데레에, 비구니는 보케다.(…)

시바 료타로가 쓴 미야모토 무사시가 가장 그의 성격과 모습을 잘 묘사했다는 평이 있다. 제일 가까운 캐릭터라고 하면 2의 전국 바사라의 모습 정도.

오시이 마모루가 원작, 각본을 맡아 미야모토 무사시에 대해 다룬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미야모토 무사시 - 쌍검으로 달리는 꿈'이 2009년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미야모토의 본질에 탐구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도류에 대해서 마상에서 장군으로서 싸우고 싶었던 결과 만들어진 검법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7.1. 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Example.jpg
[JPG image (18.56 KB)]

미야모토 무사시

노부나가의 야망 혁신에서는 통솔 27 무력 102 지력 53 정치 11로 검호들이 그렇듯이 무력만 높고 고유 전법 난전을 가지고 있다. 예외 아닌 예외가, 무력과 통솔이 합쳐졌던 노부나가의 야망 창천록 때 능력치 뿐으로, 이 때는 검호나 닌자 출신 무장들도 통솔치가 매우 높았다(대신, 정치가 바닥을 기던 경우가 대부분).

7.2. 태합입지전5

KOEI사의 게임 태합입지전5에선 마지막 시나리오인 1598년 태평의 장에서만 15세로 등장. 태합에서 사범들 능력치가 그렇듯이 무력을 제외하면 초라한 능력치. 그래도 무력95는 시나리오내에서 3위이며(1위 이토 잇토사이98 2위 야규 세키슈사이96) 94를 찍은 사사키 코지로에 한끝차 우위인데 실제 코지로는 전용검 모노호시자오(무력+2)를 가지고 있어서 코지로가 우위다. 단 칭호를 가지게 될 경우엔 칭호에 붙는 부가무력이 보통 검들 따위는 찍어누르니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무사시로 직접 플레이할 경우 전용 루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꽤나 재미있다. 요시오카 가문의 첫째, 둘째를 베는 것부터 시작해서 전설의 백인베기(세이브 없이 적들이 5번 연속으로 등장한다. 지혈을 배워두지 않았다면 매우 어렵다.)를 해내고 중간에 시시도 바이켄도 베고 마지막으로 간류섬에서 코지로와 대결하는 것까지인데 여기까지 끝내면 무사시 전용엔딩을 볼 수 있고, 아니면 계속 플레이하는 것도 가능하다.

7.3. MUSASHI -GUN道-

괴작 MUSASHI -GUN道-의 주인공 미야모토 무사시. 성우는 나미카와 다이스케로, 전국 바사라에서도 미야모토 무사시 역을 맡았다(...)

리볼버를 쌍권총으로 '나류(おいら流)'의 GUN道(건도 - 총으로 근접전 및 사격전을 펼치는 총기 무술. 건카타)를 사용하는 건도사로 나이는 16세이지만 건도의 실력은 상당히 뛰어난 편이다. 1인칭은 오이라(おいら). 좋아하는 음식은 히츠마부시(장어덮밥)이다.

직업은 시로토리(城盗り, 성털이)로, 30채 이상의 성을 털었다고 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싫어하여 사람을 상대할 때는 전기검이나 수면탄으로 상대한다. 이전에 사사키 코지로와의 결투에서 패한 적이 있어 사사키 코지로를 엄청 싫어하며 무사시 앞에서 이름만 언급해도 분노하기 시작한다. 또한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답게 작붕 피해자의 한 축을 구성한다. 사실 어떤 얼굴이 원래 얼굴인지를 모른다...

7.4. 기타

MBC 사극 '돌아온 일지매'에서는 왕년의 액션 스타 황정리가 무사시 역을 맡아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이노우에 다케히코배가본드에선 주인공으로 나온다.

야마다 후타로의 소설과 만화에서 가끔 얼굴이 나온다. 검귀 라마블에서 한번 나오고 마계전생에서는 악역으로 나온다. 평생동안 검만 인생을 바친 것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과 이어지지 못한 것 때문에 후회를 하여 마인으로 전생을 하게 된다.

지상 최강의 남자 류에서는 예수가 부활시킨 인류 최강의 두 명 중 하나로 등장한다.
----
  • [1] 오륜서의 땅의 서에 보면 각 무기가 쓸모있는 상황과 장소를 써놓는다. 예로 창과 나기가타는 넓은 곳에서 강하지만 좁은 곳에서 불리하다던가, 단도는 좁은 곳에서 유리하다던가.
  • [2] '군략'이라는 단어 자체는 일본식 한자어가 아니고 한국과 중국에서도 쓰인 한자어다.
  • [3] 이러한 오류가 생긴 것은 무사시 시대 즉,에도 바쿠후 초기의 시대상을 간과한데서 생겨난다. 즉,일본의 병법兵法이란 무구 즉, 병기를 다루는 기술이며 서양의 MARTIAL ARTS 즉, 무예와 정확히 대응한다. 다만 일본의 병법은 철저히 무사계급에만 한정된 것이며, 개인으로 봐서는 무예가인 사무라이가 전쟁에 임하여서는 중급 내지 상급 지휘자로 전투를 지휘하게 된다. 그럼에 일개 병기의 운용법인 무예를 넓은 의미를 아울러 병가兵家의 전반을 아울러 생각하여 병법이라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 [4] 알려진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봉록이어서 일본인들도 싸움질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일본인들 스스로 말하기도 한다(아이다 유지, <일본인의 의식구조>)
  • [5] 야규 무네노리는 무려 1만석, 사이토 카츠히데는 일왕으로부터 판관직 =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받았던 벼슬. 마루메 나가요시는 전쟁에서 헛짓해서 주군 가문을 멸망시키고도 시마즈 가문에게 등용되고, 츠카하라 보쿠텐은 행차를 마치 다이묘처럼 하고 다니고,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는 호죠가문의 딸을 후처로 받고 쇼군으로부터 이세 수호직까지 받는 등 당시 검호들은 실력만 있다면 매우 높은 대우를 받았다. 실력만 있다면 말이다.
  • [6] 한 드라마에서는 세키가하라 당시 서군 출신이었던 이력 탓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요새 조사로는 동군 출신으로 쿠로다 칸베 밑에서 오토모 가문과 싸웠다는게 거의 확정적이다. 특히 아버지인 신멘 무니가 세키가하라 전에 쿠로다 가문에 사관했다는 기록과 본인도 오토모가와의 싸움에서 분전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 [7] 보쿠덴은 1489년에 태어나 1571년에 죽었고 무시시는 오륜서 내용 기준으로 1584년에 태어나 1645년에 지바성 저택에서 죽었다. 참고로 그냥 늙어 죽었다.
  • [8]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이름없이 스러져간 여타 검객들에 비해 그 점에서 유독 뛰어났다는 이야기.
  • [9] 게다가 이 분석은 무사시가 실전에서 이도류를 사용했다는 가정 하의 분석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무사시가 실전에서 정말로 이도류를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4-13 13:59:19
Processing time 0.2558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