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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

last modified: 2015-04-10 01:52:50 by Contributors

宮﨑 駿 / Hayao Miyazaki

일본을 넘어 세계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하나

Contents

1. 이력
1.1. 데뷔 이전
1.2. 데뷔 초기
1.3. 지브리 설립
2. 성향
2.1. 작업스타일
2.2. 토미노와의 관계와 비판
2.3. 픽사와의 관계
2.4. 한국과의 관계
2.5. 좌우 성향 논란
2.6. 영토분할, 공동소유 주장 논란
2.7. 기술자 옹호, 제로센 찬양 논란
2.8. 아이패드 비난 논란
2.9. 기타
3. 감독 작품 목록

1. 이력

1.1. 데뷔 이전

宮﨑 駿. 한국식으로 읽으면 궁기 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가 맨 처음 정발될 적에는 표지에 한국 한자음대로 작가 궁기 준(...)이라고 적힌 채로 나왔다.

1941년 일본 도쿄에서 출생했다. 가업이 비행기 제작사 '미야자키 항공흥학'이었다. 이 회사는 나카지마 비행기(中島飛行機) 사의 하청으로 군용기의 부품을 생산을 하기도 했는데 나카지마사는 제로센을 만들기도 하였다. 주변에 고급 기술자와 군인이 득시글대는 독특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이런 배경이 작품세계 전체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주변이 군인천지였던 탓인지 일본이 옆나라에서 무슨 짓을 하며 다녔는지 자랑처럼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던지라 어릴 적부터 일본을 싫어하며 자랐던 듯 하다. 심지어 일본 노래가 부르기 싫어 러시아 민요를 부르고 다녔을 정도라고.

집안이 당초에는 군수공장이었고, 전후에는 나라 전체에 물자가 부족했던 상황에서 생필품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업종을 전환한지라 상당히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릴 적에 몸이 약해 운동에는 소질이 없었지만, 대신 그림 그리기와 독서에 열중했다. 고등학생 시절에 도에이 동화의 《백사전》을 보고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대학은 가쿠슈인 대학 정경학부(정치경제학)로 진학했다.

대학 재학 기간 당시 일본은 한창 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던 시절이었으나, 가쿠슈인은 대표적 부르주아 교육기관(귀족학교)이라 학생운동의 무풍지대였다. 일본이 학생운동으로 요동치던 무렵에도 무풍지대로 있었던 대학이 대표적으로 세 곳 있다. 가쿠슈인과 혼 대학, 그리고 이오기주쿠 대학이다. 니혼은 대표적인 우익대학으로 우익 이사회와 그 수족인 체육계열 학생회의 폭압에 의한 공포정치로 장악되어 있는 탓이었으나 가쿠슈인은 학교 분위기 자체가 "학생운동? 그게 뭐임? 먹는 거임? 우걱우걱우걱…" 식이었다. 그때문에 니혼 대학이 나중에는 피어린 학내분규를 거쳐 초강성 동꿘대학(…)으로 탈바꿈했던 데에 비해 가쿠슈인은 끝까지 학생운동과는 무관한 대학으로 남았다. 그리고 게이오는 부자학교라서(...). 덧붙이자면 니혼은 토미노 요시유키의 모교이다. 가쿠슈인은 1884년 황족 교육기관으로 처음 설립되어 문부성이 아닌 궁내성 관할이었다. 일반인도 받긴 했지만 소수였고 2차대전 패전이전까진 대부분 재벌, 정치인 자제들뿐이었다. 귀족과 황족을 위한 교육기관인 관계로 학풍이 굉장히 보수적이고 학과도 많지 않다. 그런 이유로 황족이면 예외없이 들어가는 원칙이 최근 깨지게 됐다. 문학, 이학, 법학, 경제학 4개 학부밖에 없는 관계로 다양한 전공을 원하는 황족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기때문. 천황 아키히토의 손녀가 국제기독대학으로 진학했고 장손인 히사히토도 3년제 유치원을 원한 부모로 인해 오차노미즈 부속 유치원으로 진학했다.

결국 미야자키는 대학 재학 시절 내내 학생운동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고 꿈꾸었던 만화서클도 학교에 없었기에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아동문학 동호회에 가입하여 인형극등을 연출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1.2. 데뷔 초기

1963년, 대학을 졸업 후 토에이 동화에 입사하여 본격적으로 애니메이터로서의 길을 가게 된다. 이 때 토에이 동화에서 선배로 만난 사람이 타카하타 이사오이다.

미야자키는 토에이 동화에서의 생활 초기엔 애니메이터로서의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며 만화가 쪽을 더 꿈꾸었으나, 소련의 애니메이션 《눈의 여왕》을 본 이후 애니메이션 쪽으로 완전히 자신의 길을 결정했다.

당시 토에이 동화의 환경과 처우문제로 노조가 결성되고 미야자키도 노조에 가입했는데 이때 노조활동을 하면서 타카하타 이사오와 친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노조활동의 성과로 토에이 동화 노조는 자신들의 주도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되는데 바로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이다. 후에 미야자키는 토에이 동화에 왜 입사했느냐는 질문에 "미제국주의 디즈니에 맞설 애니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미야자키가 데즈카 오사무를 싫어하는 이유는 데즈카가 디즈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이건 카더라에 가깝고 미야자키가 데즈카를 싫어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데즈카 작품 특유의 밑도 끝도 없는 염세성 때문이라고 본인이 밝혔다. 어릴 적에는 데즈카의 만화를 매우 좋아했었는 데, 그 당시 그린 그림에도 그 영향이 진득하게 배어 있어 주위 사람에게 데즈카 짝퉁 취급을 받았던 경험이 트라우마로 작용된 듯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지브리의 미국 배급은 디즈니 산하의 '브에나비스타'가 맡고 있다.

타카하다 아래에서 참여한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에서부터 미야자키는 애니메이터로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토에이 재직 당시 일본 공산당의 청소년지 "소년소녀신문"에 필명을 사용하여 "사막의 백성"이라는 만화를 게재하기도 했다. 다만 작품내용은 SF를 가장한 공산주의 선전물이라 질적으로도 떨어져 본인도 그 사실을 밝히기를 꺼린다고 한다.

이후 참여한 '장화를 신은 고양이'는 미야자키가 감독을 맡은 작품은 아니지만, 클라이맥스의 추격전 등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작품이다.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은 작품성에선 인정을 받았지만 상업적으론 실패하여 결국 타카하타와 함께 토에이 동화를 떠나 A프로덕션(현재의 신에이 동화)으로 자리를 옮겨 루팡3세 애니메이션에 참여했다.

그후 타카하타와 함께 니혼 애니메이션으로 자리를 옮겨, 타카하타가 감독을 맡은 작품이자 세계명작동화 시리즈 중 실질적인 첫 작품인 《프스 소녀 하이디》에 장면 설정, 레이아웃으로 참여, 하이디의 인기에 이바지했다.

타카하타가 두 번째로 감독을 맡은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인 《마 찾아 삼만리》에서도 장면 설정, 레이아웃으로 참여해서 능력을 보였고, 《엄마 찾아 삼만리》를 이은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인 미국 너구리 라스컬에선 원화로 참여한다.

이렇게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에서 두각을 드러낸 결과,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의 번외편 비슷하게 만들어지게 된 애니메이션인 《미래소년 코난》의 감독을 맡게 되었고, 코난은 시청률은 높지 않았지만 완성도 면에선 높은 평가를 받았다.

타카하타 아래에서 다시 장면설정.레이아웃으로 빨강머리 앤에 참여하던 도중, 니혼 애니메이션을 떠나 루팡 3세 - 칼리오스토르의 성을 감독을 맡았다. 칼리오스토르의 성은 미야자키의 특징과 장점이 빛나는 애니메이션이었지만 전체적인 스타일 면에서 기존 루팡3세 시리즈와 다른 점도 있고 해서 흥행에선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 시기 일본은 공전의 SF붐이었고 이 작품은 유행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물론 나중에 명작이라는 재평가를 받게 되지만..

칼리오스토르의 성이 흥행에서 재미를 못보고 미야자키는 나우시카 때까지 명탐정 홈즈를 제외하고는 애니메이션 감독을 맡지 못하게 된다. 명탐정 홈즈마저도 중간에 나우시카 제작을 위해 퇴사해서 감독이 미쿠리야 쿄우스케로 교체되었다. 단 퇴사한 후에도 일부 화에서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마녀 배달부 키키》가 히트 치기 전까지 미야자키는 항상 스폰서들의 압박 속에서 작업에 임해야 했다.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에게 언제나 감사한다고 한다.

1.3. 지브리 설립

1980년대에 이르러 미야자키는 본격적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해나갔다. 아니메쥬에 연재중이던 자신의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도쿠마 쇼텐의 지원으로 1984년 극장판으로 만들어 선보였고 성공을 거두면서 다카하타와 함께 "스튜디오 지브리"를 창설하게 된다.

1986년작 《천공의 성 라퓨타》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름으로 나온 첫 극장용 애니메이션이었다.

두 작품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의 입지는 생각만큼 크지 못했다. 《천공의 성 라퓨타》 이후 10여년을 구상해온 《이웃집 토토로》를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가 도쿠마 쇼텐에 건의를 했으나 쇼와 30년대의 도깨비 이야기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말을 듣고 거절당한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다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의 묘"와 동시상영을 하는 것이었다. 도쿠마 쇼텐 측은 이 건의를 듣고 진짜 화가 났다. 도깨비도 모자라서 묘지라니...그러다 신초샤에서 "반딧불의 묘"의 지원을 결정하자 도쿠마 쇼텐 역시 토토로의 아이디어를 허가했다.

이 때, 지브리는 두 출판사로부터의 엄청난 압박속에서 토토로팀과 반딧불팀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듯 2년간 죽어라 일하게 된다.

마침내 1988년, 두 작품은 공개된다. 흥행은 고만고만해서 다음 작품이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면 스튜디오 지브리는 문을 닫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1989년 《마녀 배달부 키키》의 흥행으로 겨우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라퓨타 77만 명, 토토로/반딧불의 묘 80만 명이었는데 마녀 배달부 키키는 265만 명이었다.

1992년 《붉은 돼지》를 발표했다. 미야자키의 애니들은 나올때마다 일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고 미야자키는 흥행보증수표가 되었다. 물론 미야자키의 신작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져서 좀 문제가 되기도 했지만.

이후 1997년 《모노노케 히메》를 발표해 일본 박스오피스 사상 최다관객동원 기록을 세웠다. 물론 이 기록은 타이타닉이 깨버렸지만, 이후에 다시 미야자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깨버렸다. 모노노케 히메를 발표하면서 은퇴를 선언했지만, 미야자키가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했던 "귀를 기울이면"의 도 요시후미가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다시 현역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2001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금곰상을 공동수상하면서(또 하나는 《블러디 선데이》) 미야자키를 거장으로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어서 미야자키는 이런저런 압박을 받아야 했다. 당초 젊은 스탭들을 육성할 목적으로 기획하고, 호소다 마모루가 제작하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새로 선임된 도쿠마 쇼텐 회장의 분노로 엎어버리고 결국 미야자키가 맡아야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분노한 이유는 2002년작 《고양이의 보은》이 그 해 흥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흥행"하지 않았다는 것... 최종 흥행 수익이 50억엔이나 되었지만 신임 사장은 센과 치히로 정도의 수익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온 2004년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빠듯한 일정속에 만들어졌고 미야자키 감독답지 않게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센과 치히로의 성공으로 어스시의 마법사를 영화화 해도 좋다는 허락을 어슐러 K. 르 귄에게 받았지만, 막상 만들려고 했을 때 갑자기 맡게 된 하울의 움직이는 성 제작 일정과 겹치는 바람에 하야오가 감독을 맡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이에 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가 미야자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에게 하야오가 만든 계획안과 원안을 주고는 스토리 보드를 그려보라는 요청을 했고, 고로의 스토리 보드를 본 스즈키 프로듀서가 고로가 감독을 맡아야 한다고 추천했다고 한다. 이 때 미야자키와 다른 사람들은 그가 그 전까지 영화 제작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결국 고로가 감독을 맡아 게드전기를 만들었다. 이 영화가 흥행은 어느정도 했지만 실망스런 완성도, 특히 원작파괴로 비난을 받았다. 원작의 팬이기도 했던 미야자키는 게드 전기를 관람하다 '중간에 나가버리는' 사건마저 발생한다. 당시 NHK 미야자키 관련 다큐멘터리에도 실제 그 광경이 등장(...)

이 때 상업 제작사인 지브리를 자신을 정점으로 한 개인 기업화하려 했고 그 일환으로 족벌 체제구축을 위해 문외한인 아들에게 연출을 맡기는 무리수를 두다 실패했다는 지적을 받았지만(타카하타 이사오가 99년 이래로 11년간 단 한편의 신작도 연출하지 못했던 현실이 이를 반증한다는 시각이 있다.), 인터뷰 등을 보면 고로더러 감독하라고 한 건 미야자키가 아니라 스즈키 프로듀서다. 게다가 미야자키는 나름대로 후계자 양성에 적극적이었고, 고양이의 보은 등을 젊은 감독에게 맡겨 후계자를 양성하려는 노력도 꾸준히 한 편이다. 오히려 제작사 측에서 미야자키라는 흥행보증수표의 이름값 때문에 감독을 강요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위에 언급 된 고양이의 보은처럼 신진 감독들이 맡은 작품들에 대해 제작사 측에서 만족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2008년 《벼랑 위의 포뇨》를 내놓았다.《포뇨》를 제작중일 때만 해도 체력의 한계로 마지막 장편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영화 개봉 이후에는 신작에 대한 의욕이 생겨났다고.(스즈키 토시오 프로듀서에게 72세에 죽으려고 하는데 이제 5년 남았으니 앞으로 하나 정도밖에 못만들 것 같다라고 했다고)

2010년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미야자키가 3년내에 2편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내놓을 구상으로 현재 스탭들과 논의중이라고 한다. 이 중 바람 불다가 2013년 여름 개봉.

그리고 2013년 9월 1일 공식은퇴 발표가 떴다. 그런데 후계자는? 9월 6일 베니스 국제영화제 공식 기자회견에서 은퇴의 이유로 나이를 들었다. 벼랑위의 포뇨에서 바람 불다가 나올때까지 5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더이상 작품을 만들기가 버거워서 은퇴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몇번 은퇴선언후 번복하긴 했지만 이번엔 진심이다라고 주장했다(...) 은퇴 이후에는 운전이 가능할때까지 매일 지브리 미술관에 다니면서 쉴 예정이라고. 하지만 후계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일 줄 알았는데!!

2014년, 연초부터 은퇴 번복의 기미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12월 31일 도쿄FM 라디오 인터뷰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감독의 절친한 친구이자 지브리 스튜디오의 수장인 스즈키 토시오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자원봉사 차원이라면 영화를 만들어도 좋다"고 밝혔다. 진행자가 은퇴철회를 시사하는거냐고 묻자, 스즈키 프로듀서가 애매한 한마디를 던진다. 원래 은퇴 기자회견에서도 자유롭게 산다고 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들 자유도 있다 일각에서는 미야자키의 은퇴선언이 지브리 경영자들과 충분한 교감없이 내지른것이거나, 혹은 미야자키 은퇴후 구도에 대한 우려때문에 은퇴번복에 대한 압박이 나오는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있다. 일단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직접 말하기 전까지는 두고봐야 하겠지만, 그가 복귀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듯 하다. 그러고보니 붉은 돼지 후속편이라는게 안나왔네

2014년 7월에 지브리 해체설이 불거지고 추억의 마니가 최악의 시작을 보이면서 결국 미야자키가 은퇴번복하고 다시 돌아오는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슬금슬금 나오는 중이다.

그런데 추억의 마니 제작진들에게 이것저것 제안하기도 하했는데 제작진이 이번에는 미야자키에서 벗어나서 우리끼리 해보자라고 했다고.# 은퇴했다는 양반이 저러는걸 두고 젊은 사람들 못믿고 간섭하려드는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작품은 좆망

미야자키가 복귀한다고 해서 지브리의 위기가 해소될지는 의문. 바람불다에서 밋밋하고 재미없는 전개를 보여준 미야자키가 복귀한들 저런데서 벗어날까라는 회의적 시각도 많다.

2. 성향

2.1. 작업스타일

성장 환경 덕에 상당한 수준의 비행기 덕후로 그의 상당수의 작품들에는 비행기와 비행이라는 요소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의 그러한 성향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준 작품이 바로 붉은 돼지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작중 등장하는 비행기를 전부 그가 디자인했다.

또한 페미니스트로서 주인공을 비롯한 여성 캐릭터들을 강인하고 지혜롭게 그리는 경우가 많다. 그 예로 나우시카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 또 주인공의 조력자나 조언자 포지션에 있는 할머니 캐릭터 역시 자주 등장한다.

1957년에 만든 소련 애니메이션 눈의 여왕을 보고 주연인 게르다보단 조연인 이름없는 산적 소녀에 매료되어 그의 여자 캐릭터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여성이지만 칼을 뽑고 맹활약하며 겁이 없는 그리고 얀데레/하드, 진짜 이 항목에 이 소녀가 있다 이 소녀는 종전 애니메이션에서 나약하던 여성 이미지랑 상반되어서 잊을 수가 없다고 직접 밝힌 바 있다.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주인공 소녀에게 치마를 입히는데, 캐릭터의 펄럭이는 치마를 현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온종일 길거리 카페에 앉아서 지나가는 여성들의 치마를 스케치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판치라가 많이 나온다. 그래도 이를 오덕 성향의 작품들의 판치라들과는 의도가 다르다고 하는 평론가들도 많은듯. 일단 이런 점들 때문에 그가 사실 로리콘이 아니냐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오시이 마모루 왈, 미야자키 감독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데 미야자키 감독이 '12살 소녀와 연애를 하는게 뭐가 나쁘다는거야!!!'라고 소리를 질러댄 적이 있다고(…).잡았다 요 로리콘 철컹철컹

사람이 달리는 장면을 그릴 때 진짜 빠르게 그리는 경향이 있다. 동작에서 중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오래 달려도 페이스가 느려지지 않는다! 미래소년 코난같은 작품이야 만화적 과장이라고 치더라도, 바람이 분다같은 작품에서조차 100미터 10초 끊을 기세로 달린다.

그리고 음식을 맛있게 그린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음식,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음식 등 미야자키가 감독한 만화영화의 음식은 죄다 위꼴사 수준. 음식의 차짐이 느껴진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에는 그의 젊은 시절의 세계명작동화의 스타일이 녹아들어 있고 악한 캐릭터라고 해도 미워할수 없는 매력적인 악당을 그린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구제불능의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카리스트로의 성'에서 라살 카리스트로, 코난의 레프카, 라퓨타의 무스카가 그러하다. 다만 이 셋은 사실상 동일인물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캐릭터성이 일치한다. 미야자키의 악역에 대한 관점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리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계속 이어진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적 태도는 노년의 작품에 이르러서는 자연으로의 귀환으로 발전한것으로 보인다. 젊은 시절에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마르크스주의는 점차로 아나키즘으로 변한듯 하다.

작업스타일은 대단히 독특한데 시나리오가 없이 미야자키 감독이 직접 기획서를 쓰고 콘티를 짜며 그 콘티를 바탕으로 미야자키 감독 본인이 레이아웃까지 잡은 원화까지 그리는 스타일이라 거반 혼자서 애니메이션을 다 만드는 별종이라고 불린다.(...) 사실 이래서 체력에 한계가 있는 노년으로 갈수록 힘들어질듯 하지만. 현대카드 컬쳐프로젝트 일환으로 유치된 스튜디오지브리 레이아웃전에선 미야자키 감독의 진짜 레이아웃을 가져다 전시했는데, 작화지 한 장에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사물들은 작화지 3-4장을 테잎으로 고정하여 통으로 사용하는 거대한 스케일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거대한 레이아웃 작품도 일부 있다.(...) 일본에서 콘티집을 시중에 발매한 최초의 애니메이션 감독이 미야자키라고 하니 말 다한 듯.

위대한 거장으로 불리는 감독이며 스필버그 같은 헐리웃 감독들의 존경도 받고 있다. 아카데미에서 이들의 추천으로 공로상을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작업 스타일때문에 후계자를 키우지 못하는게 아닌가라는 분석도 있긴 하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제작 당시 참여했던 안노 히데아키미야자키가 다 해먹어서 난 할일없었어여(...)라고 회고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미야자키가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스타일때문에 젊은 스탭들이 참여해서 기량을 성장시킬 여지가 부족한게 아닐까 싶다.너무 천재여도 문제 콘티와 레이아웃을 디테일하게 그리는것도 그런데. 사실 작화가들에게 선택권과 기회를 많이 부여하려면 어느정도 콘티를 느슨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이런 작품들의 경우 적당히 테두리만 쓱쓱 그려놓거나 심하게는 '액션'이라고만 적어놓기도 하는 경우도 있다.

2.2. 토미노와의 관계와 비판

하지만 거장이라고 해도 스타일상 비판을 받기도 한다. 미야자키와 가장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은 역시 토미노 요시유키로 봐야 할것 같다.

토미노는 안노 히데아키와의 대담에서 "그 인간은 자기가 로리콘이라는 걸 솔직히 인정해야 해!"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로리콘 취미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로리콘인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비판.
여기서 안노는 "토미노 선생님의 작품은 토미노 선생님께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자x를 덜렁거리며 춤을 추는 느낌이라 존경한다. 하지만 미야자키 선생님의 작품은 '나 지금 벌거벗었다~'라고 외치면서도 하반신에는 멋드러진 팬티를 입고있는 느낌"이라고 비유했다(…). 역시 안노는 변태야

두 사람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지나치게 체면을 차리면서 멋부리고 있는 느낌이라 꼴불견이라는 것. 다만 이 대담에서만큼은 안노가 폭주하며 미야자키를 까고 토미노는 오히려 미야자키를 옹호하는 느낌이었다. 동년배인만큼 그 기분만큼은 전부 이해를 한다고. 오히려 머리도 좋고 기술도 있으며 센스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기까지. 로리콘 취향에 관한 부분만 빼고(…).

또한 토미노 요시유키와 개인적으로 모르는 사이는 아닌 것 같다. 실제로 몇몇 작품들에서 함께 일한 적도 있다(두 사람의 마지막 공동작업은 미래소년 코난 21화였다고 한다.). 어떤 강연에서 토미노가 미야자키를 대놓고 언급하면서 '미야자키 본인에게 말해도 괜찮다. 아는 사이이므로'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토미노가 미야자키와 의도적으로 대척점에 서는 이유에 대해선 미야자키가 테즈카 오사무 사후 한 인터뷰에서 테즈카로 인해서 리미티드 기법이 유행했고 낮은 제작비가 관행이 되었다고 비판한 것으로 인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하지만 테즈카 오사무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미야자키 또한 미래소년 코난등의 작품을 리미티드 기법으로 제작한 바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함으로써 원화는 별로 줄지 않았는데 비해 동화는 팍 줄어버린 셈이 되어 약간의 타격을 받았긴 했다. 그 외의 파트들은 이에 별 상관없이 먹고는 산다. 허나 이것이 동화가들을 영세하게 만든게 아니라 제일 중요한 이유는 제작회사의 마인드다. 현재 한국 동화 단가가 1000원이 평균인데, 1500~2000원대로만 진입해도 회사는 적자는 면하면서도 동화가들을 살릴 수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회사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2.3. 픽사와의 관계

미야자키 하야오는 놀랍게도 픽사와는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자랑하고 있다. 미야자키는 그의 큰 팬인 픽사의 수장 존 라세터와 친한 사이다. 그 분은 에머리빌에 있는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센과 치히로》나 《하울》 등의 작품의 영어 더빙감독도 픽사의 수장 존 라세터와 그의 동료와 제자 감독들이 맡기도 했다. 참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깡총거리며 뛰는 전등이 나온 적이 있었는데 픽사의 룩소 주니어오마주라고 한다. 한편 그에 대한 보답인지 2010년에 개봉한 토이스토리 3에서는 토토로 인형이 나오기도 했다.

2.4. 한국과의 관계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종주의자에 한국을 싫어한다는 루머가 90년대에 하이텔 애니동을 비롯한 애니메이션 동호회에 계속 돌면서 정설처럼 자리잡기 시작했고, 이런 내용이 온라인을 넘어서 퍼져가는 데는 모 밀리터리 소설에서 쓴 부분도 한몫을 했다.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며, 당시 일본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만들어진 헛소문이다.

그런데 미야자키가 한국을 싫어한다는 말은 예전에 한국 쪽에 하청을 줬다가 그 완성도에 실망했었던 일에 대한 표현이 와전 과장되면서 생긴 것으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혐한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한국 쪽에 하청 주는 걸 꺼리는 것도 이전 예전 이야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제작하던 시기에 스튜디오 지브리는 촉박한 스케줄 속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한국의 DR무비 쪽에 하청을 넘겼는데, DR에서 만든 결과물에는 미야자키도 크게 만족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후 DR무비는 고양이의 보은 등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10억 받고 하청했다는데, 자세한 사항은 내부 기밀이다. 그래도 따지고 보면 10억은 많이 받은 게 아니다. 32분 정도면 5만컷 정도가 동화로 들어가는데, 애니메이션은 동화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이후에 클린업, 채색, 이펙트, 디지털 CG 등도 포함되기에 최종적으로 분배되는 단가는 그리 많지 않다.

거기다 최근작 "벼랑위의 포뇨"에서 직접 한글 로고를 쓰기도 했다. 이는 한국에서만 유일하게 한 것이라고.

2.5. 좌우 성향 논란

인종차별자라든가 혐한론자라는 의혹과 상반되게, 노조 활동이나 공산당 신문의 연재 이력 때문인지 무정부주의 좌파라는 얘기도 듣고있는데, 그런 색깔이 강하게 나타나는 작품으로는 반파시즘적인 색깔이 확연한 붉은 돼지, 반전 메시지가 강한 미래소년 코난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있다. 미래소년 코난의 경우 주제가 단순한 반전에서 머무는 수준이 아니라, 공산주의 공동체 하이하바와 자본주의 경제체제 인더스트리아를 의도적으로 대립/비교시키고, 삼각탑을 통한 지배-피지배 구조 및 피지배 계층의 봉기로 멸망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등, 공산주의적 색체가 매우 강한 작품이다. 서슬퍼렇던 5공 시절에 이런 "대놓고 좌익"인 만화가 미성년자의 키스신(수중 인공호흡)을 포함해서 버젓이 6시 황금시간대에 방영된 걸 보면 지금도 신기하다. 이 작품 하나만 놓고 본다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확실히 좌익이다.

그리고 가쿠슈인 대학 재학 중에 직접 공산당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좌익을 지지하는 글을 투고했다고도 한다.

다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좌익세력은 일관되게 군국주의와 천황제에 반대하는 세력이었고, 극좌라고 할 수 있는 북한 또는 일본 적군파와는 전혀 노선이 다르다는 점이다.

정치적 발언의 기피로 우익이라는 오해를 받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우익성향을 나타냈다기보다는 정치적으로 파장을 부를 수 있는 민감한 발언을 삼갔다고 보는게 맞다. "나우시카" 개봉 당시 영화잡지 '키네마준보'에 나우시카가 은연중에 가미가제 특공을 미화하고 있다는 비평이 게재되었을 때 이에 반론하지 않은 것으로 오해를 산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떻게 발언을 해도 좌익과 우익에서 공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예 민감한 대답을 피한 것이다. 이 일은 1980년대에 있었던 일인데, 그 당시조차 일본의 참전자 단체나 우익야쿠자들이 공공연히 백주에 테러를 저지르던 시기였기때문.

마찬가지로 그가 한국을 2000년대 초반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당시 이슈가 되고 있던 위안부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저는 그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고 대답한 바가 있는데, 이것도 한국 네티즌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바로 그 기자회견에서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근친성을 강조하면서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덕분에 역시 좌파 운동권 출신의 오시이 마모루에게는 두고두고 까인다.(항목 참조) 안노 히데아키 또한 비슷한 의견을 개진한 적이 있고 심지어 미야자키의 작품은 "데이트 무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극언을 붉은 돼지 공개 직후 한 적도 있다.(인터뷰집 스키조 에반게리온 참조)

하지만, 나우시카 이외에 미야자키의 작품에서 우익 논란이 있었던 작품은 거의 없으며, 그의 대부분의 작품 성향으로 볼 때, 서구적 좌파가 그의 지향점으로 생각된다. 다만, 중국이나 북한, 베트남과 같이, 공산주의 사상이 동양에 들어오면 민족주의와 묘하게 결합하는 경향이 있으며, 서구에서는 민족주의가 자본가의 수탈을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악용된 반면, 동양에서는 자본가에게 맞서 싸울 노동계층을 결집시키는 이념으로 이용되는 경향이 강해(대개의 동양 국가들이 외세의 침략과 수탈을 받았으니...), 동양에서는 우익=민족주의/좌익=공산주의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게 되는 점이 있으며, 미야자키의 경우 초기에는 일본적 전통 및 일본적 민족의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됨에 따라, 좌파적 색채와 서구적 묘사가 공존하는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모노노케 히메 이후로는 그가 확실히 일본적 전통을 긍정하게됨에 따라, 초기의 좌파/서구 지향의 색채가 등장인물의 생김새 외에는 거의 사라졌다.

또한 이러한 우익적으로 보이는 연출이 미야자키 본인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었을 가능성도 높다. 키네마준보에서 지적한 카미카제 논란에 대해서는, 미야자키 본인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다가 정곡을 찔려서 아무 대답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비슷한 예로, 홍콩의 오우삼 감독이 본인의 대표작인 "영웅본색" 시리즈와 "첩혈쌍웅"에서 남자 주인공들의 관계가 동성애적 코드로 해석이 가능하다는 미국 평론가의 지적에 대해 "나는 그렇게 의도하고 연출한 것이 아니지만,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그렇게도 보인다."라고 수긍한 적이 있다. 작품이 작가의 구속에서 탈출한다고도 하는데 이런 경우로 보는 쪽이 타당할 듯.

그런데 애니판의 논란과 달리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코믹스의 경우 우익 논란 따위는 쏙 들어가버리게 할 정도로 엄청나게 무정부주의적이고 반(反)전체주의적인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사실 미야자키의 최대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나우시카 코믹스를 보면, 미야자키는 일단 좌익 쪽에 기울어져 있지만 현실에서 나타난 공산주의 체제의 모습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이며 특히 좌우파를 막론하고 나타난 전체주의(스탈린주의와 파시즘 양쪽 다)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좌익 논란을 떠나서, 적어도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굉장한 관심을 가진 건 틀림없어 보이며, 그런 경향의 작품으로는 미래소년 코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벼랑위의 포뇨 등등이 있다.

그런데 바람 불다 개봉을 앞두고 공개된 시놉시스가 루리웹에서 논란을 불렀다(참고). '신화로 변한 제로센의 탄생'이란 표현이 문제시 되는 부분. 다만 해당 작품에서 전쟁묘사나 사상관련의 이야기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로 호리코시 지로와 제로센에 관한 이야기 밖에 묘사되지 않는다고.

2013년 7월에 미야자키가 쓴 칼럼이 공개됐는데, 미야자키가 본인의 사상적인 문제에 대해 이렇게 분명히 밝힌 적은 여태껏 없는 일이었던지라 화제가 되었다. 참고.

해당 칼럼에서는 '일본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주변국들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논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어째서 이런 글러먹은 나라에서 태어나버린 것일까'라는 생각까지 했었다고. 30대가 되어서 일본을 좋아하게 되긴 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로서가 아닌 '일본이라는 섬'으로 좋아하게 됐다는듯. '일본은 인간만 없으면 정말로 아름다운 땅이다'라며, 일본 정치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안고 있으며, 아베 정부의 헌법9조 개정 문제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아베노믹스도 조만간 망할게 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변명과는 반대로 정작 일본내에서도 바람 불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영화 개봉 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데 일본 문화과학부 문화부장 출신 프로듀서 데라와키 켄은 2013년 8월 13일 기자회견에서 "한마디로 말해 미야자키 감독은 역사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잘라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미야자키 감독은 그런 반응이 있건 말건 개의치 않고 2014년 2월 TBS 라디오에서 방송된 인터뷰에서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은 지배되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 자신들이 제국주의를 흉내냈다. 결과적으로 300만명의 사망자를 낸 전쟁을 했고, 원폭이 두 번이나 떨어지는 일을 당했다. 주변국의 원한은 없어지지 않는다. 법적으로 해결한다 해도 감정이 풀리고 남아 있지 않다."라며 일본이 침략전쟁으로 주변국들에게 피해를 줬으며 일본 정부가 법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해도 주변국들의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라며 일본이 "어떻게든 해야 한다." 라는 소신 발언을 그치지 않았다. 또한 단세포적인 아베 총리를 비판하면서 일본이 헌법을 수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사참조

2.6. 영토분할, 공동소유 주장 논란

독도, 센카쿠 열도, 쿠릴 열도등의 주변국들과의 영토분쟁에 대해서는 반으로 나누든가 공동관리를 제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조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양국간의 견해차를 좁히는게 중요하다는 입장이라는 옹호도 있으나, 일본과 영토문제를 겪고 있는 한, 중, 러 국민들은 물론 일본인 입장에서도 좋게 받아들이기는 힘든 발언이다. (참고)

2.7. 기술자 옹호, 제로센 찬양 논란

(이하 내용은 바람 불다의 '일제 미화 논란' 부분도 함께 참조바람)

일본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제로센은 상당히 호감가는 위치에 있고, 특히 일본 밀덕에게는 중심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수준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위에서의 링크도 일본인에게서의 제로센의 위치에 한 문단 전부를 길게 할애하고 있다. 현대에는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워낙 위치가 확고한지라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제로센은 전범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로망'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제로센이 한참 로망을 달리던 시기를 청춘으로 보내고, 성장했기에 제로센에 대해서 양면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참고) 이 부분은 위의 인터뷰에서도 나타난다.

'Q : 전쟁을 비판하는 한편으로, 제로센이라는 무기에 애착은 갖는다. 모순되지 않습니까?
A : 모순 덩어립니다.'

이런 면에서 미야자키의 말을 살펴보아야 된다.

제로센 관련으로 악명높은 카미카제 자살특공대를 '그들은 구식이라 별 역할을 한 게 없다' 라고 표현한 것을 지적하여 제로센 찬양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인터뷰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원문은 (카미카제 피해자인 한국인에 대한 책임에 대해)'호리코시 지로가 만든 제로센이란 전투기는 구식이라 가미가제 특공대가 활동할 때 유용하게 쓰이진 않았다. 그가 잘했다고는 할 수 없다.'로, 제로센의 개발자인 호리코시 지로가 카미카제를 돕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를 제로센과 관련된 것은 미화하거나 옹호, 축소하려 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미야자키하야오는 반전주의자로 단순히 전쟁미화로 비난을 하긴 어렵다.

2.8. 아이패드 비난 논란


지브리가 발행하는 소책자 '열풍' 2010년 7월호에 실린 인터뷰에서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그 게임기 같은 것을 이상한 손놀림으로 문지르는 행동은 나에게는 어색할 뿐이며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 혐오감만 줄 뿐이죠. 전철 안에서 이상한 손놀림으로 자위행위를 하는 것처럼 (아이패드를) 문지르는 사람들이 늘겠죠."라는 말로 아이패드를 비판했다.

한국 네티즌들 반응은 대체로 "그럴 수도 있다.", "아직 아이패드의 활용성을 잘 모르셨을뿐..."이거나 일부에서는 "타블렛과 어도비 포토샵 왜 안 까는가?"로 논리 빈약을 문제 삼았지만 뭐 대충은 공감이 간다는 사람들이 많다. 다른 쪽에서도 "스티브 잡스가 없으니까 저렇게 하는 거지 과연 본인 앞에서 저렇게 할 자신있는가?"라고 의문을 가졌을 정도도 있었지만 격앙된 반응은 별로 없었으나...

문제는 자국인 일본 네티즌들은 뼈가 가루가 되도록 깠다. 중에는 신상품 하나 들고 있다고 스스로 창조적인 사람이나 된듯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고 반성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창조적인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오만한 발언"이라거나 "새로운 세계를 거부하는 옛 사람 고집"이라는 비판도 이어졌다.

이는 일본 웹에선 애플 유저의 발언력도 크기때문이다. 일본에서 애플 제품 쓰는 사람들은 주로 올드비가 많기 때문에 2ch등지에서도 많이 서식하는 편.

2.9. 기타

분명한 건 타인이 오덕을 자처하는 언동을 싫어한다는 점으로 이는 지브리 작품에 참여한 적이 있는 안노와의 에피소드에서도 알려져 있고, 아소 타로 전 총리의 오덕 행적에 대한 질문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한 것을 보면 이런 행동에 대해 별로 안 좋게 생각하는 듯 하다(그런데 아소와 미야자키 하야오는 가쿠슈인 졸업동기다.(...)).

다만 본인은 상당한 실력의 모델러이자 중증 밀덕후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좌파적 언동에도 불구하고 만드는 프라모델이나 모형지 "모델 그래픽스"를 통한 단편 만화들의 주인공들은 창작물을 제외하고는 전부 추축국 병기들이다. 이 때문에 이 양반도 마츠모토 레이지처럼 그 시절에 대한 어렴풋한 동경을 갖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건 전쟁이나 혹은 무기 등에 대한 이상이 아니라 과거의 도시화/산업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시절에 대한 동경에 가깝다. 출생 대목을 다시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어릴 때부터 비행기나 군인들을 많이 보면서 자란 탓이다. 무기나 군인 복장 등을 그리게 되면 아무래도 어릴 때부터 보아 익숙한 양식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드러나게 되는듯하다.

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해 사실이라 보기는 힘든데, 그의 작품에서 시종일관 등장하는 거대 국가체제에 대한 묘사 등을 볼 때 이러한 말들은 거의 의도적인 비방에 가깝기 때문이다. 미야자키는 그의 강연에서, 자신은 비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이랬으면 좋겠는데"라는 것을 늘 만들고 싶어하며, 그런 것밖에는 만들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인한 바 있다. 한편 그는 일본인들이 겪었던 전쟁의 고통을 일본이 한국과 중국, 필리핀,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저지른 여러 학살 및 갖가지 일들과 비교하면 역시 일본인 전체는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고 분명히 하고 있다. 요컨데, 미야자키의 영화에 담겨 있는 이상주의는 전쟁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개인적인 희망들의 응집체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 중에는 뭔가 이상할 정도의 유쾌함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붉은돼지에서 꼬마 아이들이 공적단의 인질이 되어 잡혀가고 있는데 이상할 정도로 유쾌한 점을 그 예로 들 수 있겠다. 이런 일은 현실에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지금같이 후덕한(?) 애니들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도 미야자키나 토미노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들의 업적은 이후 안노 히데아키오시이 마모루가 이어받는다.

오시이나 안노 등과 같이 거론되는 경우가 많은데, 오시이와는 서로 자신의 의견을 두고서 티격태격 하면서도 인정하는 사이인듯 하다. 안노 히데아키의 경우 같이 해외 여행을 다녔다든가, 안노 모요코와 결혼할때 중매를 하고 결혼식에서는 주빈이었다든가 하는 얘기들을 보면 좋은 스승과 제자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는듯.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게임으로 제작된 적이 있는데, 이 게임의 내용이 나우시카가 건십에 탑승하여 벌레들을 학살하는 내용의 게임이었던지라 게임이라는 존재를 싫어하게 됐다고 한다. ……는 도시전설이 정설처럼 떠돌고 있으나, 해당 게임은 평화적인 교섭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벌레는 피해다녀야지 죽이면 감점을 받거나 게임이 일찍 끝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항목을 참조.

코라의 전설의 백합 엔딩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자세한 것은 사토 아사미(코라의 전설) 참조
항목을 넘어가기 싫은 위키니트를 위해 설명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소년과 소녀가 함께 한다고 꼭 커플로 이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서로 존중하며 발전해나가는 관계를 그리고 싶다" 라고 말한것에 영감을 얻어
"그럼 소녀와 소녀가 연인이 못될껀 없다!" 라고 생각한 제작진이 둘을 이어버린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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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0 01: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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