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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 세르베투스

last modified: 2015-07-21 14:01:46 by Contributors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는 스페인 출신의 의사이며 사상가, 장 칼뱅에게 화형당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Contents

1. 소개
2. 업적
3. 사상
4. 생애
5. 영향
6. 저작

1. 소개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는 스페인 출신의 의사이며 사상가이다. 인쇄업자, 지리학자, 점성가로도 활동하였다. 장 칼뱅에게 화형당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어로는 미쉘 세르베(Michel Servet), 스페인어로는 미구엘 세르베토(Miguel Serveto). 스페인 출신이지만 실제로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였다.

여러가지 직업에서 보다시피, 세르베투스는 매우 지적이고 온갖 지식에 통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모두까기 성향(…)이 있어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닥치는 대로 비판하였고, 이러한 성향이 화가 되어 죽음을 맞게 되었다.

2. 업적

의사로서 세르베투스는 혈액의 폐순환을 발견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이미 13세기 아라비아에서 이븐 안나피스가 이미 기록한 바가 있어, 세르베투스는 이 연구를 도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3. 사상

세르베투스는 당시 유행하던 라스무스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세르베투스의 종교관은 매우 극단적이었다. 유아 세례를 부정하였으며, 특히 삼위일체를 부정하였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는 가톨릭은 물론이고 새롭게 일어난 개신교 종단에서도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이단적 주장이었다. 그는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의 조화를 주장하였다.

점성술을 믿었다. 파리 대학 의학부에서 마찰을 일으킨 적도 있는데, 그 이유가 점성술을 용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 생애

스페인과 프랑스의 접경인 나바라 지방 출신의 의사 세르베투스는 10대에 프랑스로 나와서 의학을 공부하고 유럽 각지를 순회하였는데, 이 시기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있었고 세르베투스는 종교개혁자들과 친분을 가지면서 종교개혁에 공감하게 되었다.

1546년, 세르베투스는 칼뱅에게 자신의 책을 많이 보내며 의견을 요구했다. 칼뱅은 친구에게 "세르베투스가...장황하게 똥을 써서 보내왔다. 내가 동의한다면 이곳(제네베)에 오고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가 이곳에 온다면 나에게 권위가 있는 한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1553년, 세르베투스는 프랑스 서부의 비엔나의 가톨릭 자선 단체에서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 때 그는 "기독교 회복"을 MSV라는 이니셜로 간행하여, 예수는 오직 인간이라는 것을 성경을 근거로 주장하였다. 이에 칼뱅의 친구인 기욤 드트리가 세베르투스를 리용의 가톨릭 종교 재판소에 고발해버렸다. MSV가 미카엘 세르베투스 빌라노바다누스를 나타내는 것을 지적하고, 세르베투스의 죄를 입증하기 위하여 칼뱅에게 보낸 편지를 포함한 자료를 제출하였다.

이해 4월에 세르베투스는 투옥되었으나, 탈옥에 성공하였다. 각지를 전전하며 종교재판을 피하여 도망쳤는데, 왜일까 최종적으로 칼뱅이 머물고 있던 제네바로 들어섯다. 본래 이탈리아를 목표로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세르베투스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한 제네바로 들어선 이유는 알 수가 없다.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세르베투스가 칼뱅에게 논쟁을 걸어보려고 제네바에 들어선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결국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으며, 스티니아누스 법전에 의거하여 사형을 선고받았다. 칼뱅과의 논쟁은 시도해보지도 못했다. 단지, 칼뱅은 간단히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결국 화형의 판결을 받고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세르베투스의 처형은 아주 처참하였다고 전해진다. 목을 밧줄로 몇겹이나 감기고, 몸은 쇠사슬로 화형대 기둥에 묶이게 되었다. 화력이 약하여 서서히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세르베투스를 보다 못하여 구경꾼들이 마른 풀을 던져서 불길을 돋우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5. 영향

세르베투스는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칼뱅의 이미지는 피에 굶주린 독재자(…) 정도로 추락하였다.

특히 여기에 주목한 것은 장 칼뱅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출신의 신학자였던 바스티안 카스텔리오였다. 카스텔리오는 세르베투스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설사 세르베투스가 이단적인 주장을 하였다 하여도 그로 인하여 죽어서는 안된다는 요지로서 종교의 관용을 논리적으로 주장하였다.

당시 기준에서 세르베투스는 가장 극단적인 이단이었으나, 그러한 이단 조차도 종교적인 이유로 죽여서는 안되고 사회적으로 포용하여 받아들이고 공존하여야 한다는 관용 정신이 나타난 것이다.

사후 350년 뒤, 세르베투스는 명예를 회복하였고 제네바 시민들은 속죄 기념비를 세웠다.

6. 저작

  • 삼위일체론의 오류(1531) :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의 조화를 주장하였다.
  • 기독교 ​​회복(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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