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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last modified: 2015-01-26 20:14:38 by Contributors

Michelangelo Buonarroti

이탈리아의 예술가. 1475년 3월 6일 출생해 1564년 2월 18일 사망했으니 만 89세(정확히는 88세 11개월)로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장수했다. 풀 네임은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이다.

미켈란젤로의 초상화, 마르첼로 베누스티, 1535년,
캔버스에 유채, 36 x 27cm, 피렌체 카사 부오나로티

Contents

1. 개요
2. 어린 시절
3. 대표작
3.1. 조각
3.1.1. 피에타
3.1.1.1. 피에타의 대명사
3.1.1.2. 테러에 대한 보호
3.1.2. 다비드
3.2. 회화
3.2.1. 시스티나 천장화
3.2.1.1. 조각가의 프레스코화
3.2.1.2. 율리오 2세와의 관계
3.2.2. 최후의 심판
3.3. 건축
3.3.1. 성 베드로 대성당
3.3.1.1. 미켈란젤로 이전의 상황
3.3.1.2. 그리스 십자가 평면
3.3.1.3. 반구형 돔
3.3.2. 캄피돌리오 광장
3.3.3. 그 외
4. 죽음
5. 사생활 및 개인사
6. 종합 아티스트
7. 다른 예술가들과의 관계
7.1. 다 빈치와의 관계
7.2. 라파엘로와의 관계
8. 작품에 숨겨진 비밀
9. 개신교도?
10. 기타


1. 개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조각가,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으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산치오와 함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대 거장 중 한명이다.[1]

유럽도 예술가에 대한 세간의 대접은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는 그냥 환쟁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위에 언급한 대로 망한 귀족 가문이라도 귀족이라는 자부심이 있던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조각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엄청난 반대를 했을 정도. 하지만 이후 르네상스 시대 중세 문명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으며, 그리고 여러 재능들이 발굴되며 예술가의 위상이 조금씩 올라갔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예술가의 위상을 올리는 전투에 있어서 첨병 역할을 한 세대 중 한 명이다. 물론 미켈란젤로 혼자서 이런 일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그 전 세대부터 이런 발전의 토양이 만들어져 왔지만 한번에 과실을 맺은 것은 미켈란젤로와 이후 세대이며, 그 과정에서 미켈란젤로는 예술가 중에서는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한 인물 중 한 명이고 미켈란젤로만큼 예술가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에 한 몫한 예술가는 있어도 능가하는 예술가는 없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2]

그리고 미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상 최강 남성 근육 덕후였다. 물론 그만이 유일한 근육덕후 작가는 아니었다. 후세의 루벤스를 비롯한 다른 작가들도 덕력을 과시하긴 했지만, 미켈란젤로 수준의 집착과 연구 그리고 예술적 과장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다시 재현해낼 수 없는 덕력이었다. 시스티나 천장화를 보면 여성마저도 남성적으로 그려놓았다. 또 여성의 신체를 균형미가 없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여성을 비하했다기보다 미켈란젤로 본인의 미적 감각이 남성의 신체적 미를 더 선호했다는 편으로 이해하자.[3] 미켈란젤로 본인이 남긴 로맨틱한 시를 보면 괄괄한 성격의 거장이 의외로 여성에게는 수줍은 면이 많았다는 걸 알 수 있다.츠, 츤데레?

2. 어린 시절

1475년 3월 6일에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시골에 있는 유모의 집에 맡겨졌는데, 유모의 남편은 세티냐노의 석수장이였다. 이 사실은, 그가 후에 조각가로서의 재능이 가장 두드러지게 되는 데에 분명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 본인도 후에 자신의 글에서 어렸을 때부터 조각용 끌과 망치를 갖고 노는 게 가장 즐거웠다고 했다.

불행히도 그의 소년 시절은 생각 외로 그렇게 순탄치 못했다. 피렌체에서 공부하던 때에는 아버지가 미켈란젤로를 예술가로 키우는 걸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젊은 시절에는 유럽의 예술가들도 취급이 딱히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몰락 귀족이라도 귀족이라는 자존심이 있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에 굉장히 분노했다.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고[4] 여러 차례 혼나고도, 미켈랄젤로는 자신의 예술혼이 불타오르는 걸 억누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허락으로 당시에는 굉장히 유명했던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가지만, 1년 만에 나오게 된다. 이유는 스승의 능력이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기를란다요의 능력이 떨어졌다기보다 미켈란젤로가 너무 뛰어났던 거다. 또 알다시피 미켈란젤로 본인이 회화보다 조각에 더 흥미를 가졌던 것도 있다.

이후 기를란다요는 예술 역사에서 손에 꼽는 천재를 잠깐이나마 제자로 둔 덕분에 자신의 작품이 미켈란젤로와 철저히 비교당하는 굴욕을 두고두고 겪고 계신다. 그래도 1년이나마 스승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회화가 기를란다요에게 영향을 받은 게 조금 보인다. 미켈란젤로와 비교당해서 그렇지 기를란다요 역시 세련되고 뛰어난 화가다. 미켈란젤로와 비교만 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기를란다요의 화방을 나오지만 곧 그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문의, 정확히는 당시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초빙에 의해 미켈란젤로는 15살에 팔라초 메디치에서 공부하게 된다.

폭군에 독재자라는 시각도 있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는 예술을 사랑했고 젊은 예술가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는 걸로 유명했다. 그는 자기 저택 정원에 '대리석 정원'이라는 걸 갖추어 놓고, 젊은 조각가들이 맘껏 공짜로 대리석에 솜씨를 뽐내도록 해주었다. 현재의 대리석 가격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한 대인배이다. 다만 몇몇 역사가들은 이런 씀씀이 때문에 메디치 가문이 기울었다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연습작들을 몇 개 만드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판의 얼굴과 큐피드(혹은 에로스)이다. 이 두 가지 작품은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하지만 기록에 남겨진 묘사를 보면 어린 미켈란젤로의 담대함과 미숙하지만 재능있는 실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판의 얼굴조각은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의 눈에 들게 되는 가장 큰 계기인데, 로렌초가 이 작품을 보고 미켈란젤로를 크게 칭찬하면서 '판은 나이가 들어서 이가 성하지 않을텐데'라고 중얼거리자 미켈란젤로는 기뻐하면서 다시 한번 끌로 뭔가를 조각했다. 로렌초가 무얼 또 수정하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바로 판의 이에 충치를 조각해서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흠좀무. 큐피드 작품의 경우, 미켈란젤로가 가장 아끼는 작품중 하나였다. 작품을 나의 자식, 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렌초의 배려로 메디치 가에서 몇년 동안 지내게 된 소년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및 그의 아들들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파격적인 우대를 받았다. 로렌초의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해 초빙된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학자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수준 높은 토론을 경청했으며, 라틴어·문학에 대해서도 굉장히 수준 높은 소양을 갖추게 된다. 특히 그는 단테신곡을 좋아한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조각과 회화 뿐만이 아니라 (사실 저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도 굉장한 거지만) 건축, 시 등 그의 예술 작품 전반에 걸쳐 자신의 예술작품에 고통과 순교, 그리고 구원의 주제를 늘 나타냈다.

그러나 로렌초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에로 데 메디치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고, 미켈란젤로는 직감적으로 떠나야 할 때임을 알았다.

3. 대표작

3.1. 조각

3.1.1.1. 피에타의 대명사
피에타, 1498~1499년, 대리석, 174 × 195cm,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성모의 얼굴 부분
그리고 24세에 그는 '피에타'로 순식간에 거장의 반열에 올라서버린다. 지금도 이 작품은 모든 피에타에 관한 조각들 중 최고로 평가받는데, 심지어 미켈란젤로 자신의 다른 피에타들도 이걸 능가하지 못했다. 리즈시절이 너무 이르게…? 다만 이건 피에타 상에 국한된 이야기이고, 이후에도 조각으로 뛰어난 작품을 수도 없이 남겼다.

이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의 아름다움과 예수죽음을 슬프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실제 크기는 2미터 이상으로, 굉장히 크다. 이 성모상은 비례학적으로 볼 때 전혀 맞지가 않는데, 이는 예수의 시신을 들고 있으면서도 조각의 중심이나 표현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미켈란젤로가 일부러 어머니 성모의 모습을 실제의 비례보다 2배 정도 크게 조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2미터에 달하는 높이와는 달리 옆면의 두께는 1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옷자락 주름의 입체감 때문에 깊이 있는 공간감이 효과적으로 나타났다.

이 성모상은 재미있는 점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그의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미켈란젤로가 이 조각으로 일약 스타가 되고 나서도, 사람들이 이 조각을 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별로 관심을 안 갖자 열받아서는 밤에 몰래 성당으로 가서 자신의 이름을 조각했다고 한다. 성모의 옷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레이스 옷깃을 자세히 보면 라틴어"MICHAEL. AN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들었다)"라고 조각되어 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너무나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고 한다. 조각에 그 누구도 자신 스스로의 사인을, 그것도 성모의 옷깃에 조각하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다행히도 이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행으로 그친다.

일화에 의하면, 그렇게 피에타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고 밤중에 길을 나섰는데 밤하늘을 보자 너무 아름다웠다고 느꼈단다.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생각하기를 세상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드신 하느님은 자신의 작품 어디에도 자신의 서명을 넣지 않았는데 자신은 고작 조각 하나에 오만하게 자신이 만들었음을 자찬하는 서명을 넣은 게 너무 부끄럽게 느껴져서, 그 이후 다시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을 넣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자신이 만든 피에타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기대와는 달리 피렌체에 대한 언급 없이 로마 또는 롬바르디아 출신 예술가의 작품일 거라는 평가를 듣자 화가 나서 한밤중에 대성당에 몰래 들어가 이름을 새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두 가지 일화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조각상에 새겨진 철자를 보면 처음에는 'ANGLVS'라고 새겼다가 'E'를 빠뜨려서오타 'G' 안쪽에 'E'를 작게 새긴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나치게 젊고 아름다운 성모[5]에게서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나 보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동정녀인 성모 마리아는 속세의 나이에 많은 영향을 받지 않기에, 일부러 젊고 아름답게 조각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예수의 모습은 그저 힘없이 축 늘어진 인간의 모습이다. 삼위일체를 믿는 교회에선 불만이었을지도.

3.1.1.2. 테러에 대한 보호
현재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내 오른쪽에 전시되어 있다. 혹시라도 바티칸에 들른다면, 시스티나 소성당을 거치고 나서 바로 갈 수 있으니 꼭 들러볼 것. 그러나 현재는 방탄 유리안에 굉장히 멀리 전시해 놓았기에 관람에 불편한 점이 없잖아 있다. 그 이유는 이 조각을 혹시 모를 테러등의 위협에 대비해 보호하기 위해서다.

테러 직후, 1972.5.21 파괴된 성모의 코와 왼팔
1972년 5월 21일,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던 호주 국적의 헝가리인 지질학자 라슬로 토트(Laszlo Toth)가 크로우 바로 이 조각의 얼굴을 때려 박살내는 테러를 한다.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던 토트는 "내가 바로 예수다, 우리 어머니는 저렇지 않다"며 테러를 했다. 토트는 범행 후 1년간의 재판끝에 이탈리아 정신병원에서 2년의 강제수용 치료처분을 받은 후 호주로 추방당했다. 이 사건으로 성모의 가 날아가고, 왼팔을 비롯한 몇몇 부위가 박살나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피에타가 박살나서 사방팔방으로 파편이 튀자 구경꾼들이 조각들을 주워가버렸다. 그래서 회수한 부위는 파손된 전체부위의 43퍼센트에 불과했고 코는 통째로 회수하지 못했다. 결국 1976년에서야 이탈리아 당국은 결국 피에타를 거의 완벽하게 복원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사건 이후에는 아크릴 방탄판으로 보호하고, 관람에 제한을 두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품들은 대개 이렇게 이중삼중 보호를 받으니 이해하도록 하자.

피에타를 첫 작품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잠깐 음지에서 활동했는데, 일부러 가짜처럼 만든 '바쿠스'가 사실상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6]

근육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 묘사는 너무나 뛰어났고 이 과정에서 불법으로 해부를 했다가 콩밥을 먹을 뻔한 (...) 기록도 남아 있다. 사실 미켈란젤로의 묘사는 사실적이진 않다. 오히려 사실적인 해부학 표현은 다 빈치가 더 뛰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도 해부를 일삼은 만큼 몰라서 이렇게 한 게 아니라, 미학을 위해 극적인 과장을 일삼았다. 대표적인 예가 피에타로 잘 살펴보면 피에타는 성모 마리아가 비정상적으로 거대하다. 하지만 이를 한 눈에 보고 눈치채기는 쉽지 않다. 시스티나 천장화의 인물들 역시 한 눈에 보면 눈치채기 힘들지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자세를 취하고 있거나 불가능할 정도로 비대하게 발달한 근육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있다.

하지만 앞서 눈치채기 힘들다고 말한 것 처럼, 미켈란젤로는 이를 사람들이 '이상한데?' 라고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눈을 속이는 기술이 뛰어났다. 사실 미켈란젤로가 이 기술에 뛰어났다기보다 본격적으로 이러한 기법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고 하는 게 어울릴 듯. 그 이전의 예술가들도 이런 과장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의 스승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그림에서 느껴질 수 있듯이 의도적인 게 아니라 그냥 인체 비례를 잘 못 맞춰서 이런 경우도 있고, 도나텔로의 다비드에서처럼 앞쪽의 곡선미를 강조하다가 뒷 쪽의 사실성을 포기해 버리는 등 미켈란젤로만큼 능수능란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미켈란젤로는 이런 과장을 통해 당대에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인체의 역동성에 대한 표현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한다. 바로 이 점이 미켈란젤로가 미술사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이기도 하다. 그 이전의 회화들, 그리고 그와 동시대의 회화들을 본다면 미켈란젤로의 그것만큼 인체의 역동성을 살린 작품은 없다.

3.1.2. 다비드

© Rico Heil (User:Silmaril) (cc-by-sa-3.0) from
다비드, 1501~1504년, 대리석, 5.17m,
피렌체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
피에타의 유명세 덕분에 20대 초반의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미켈란젤로는 1501년 8월 16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오페라 델 두오모)로부터 성당의 부벽에 올려 놓을 다비드를 조각해달라는 주문을 받고 계약서에 서명했다. 거인 골리앗을 물리친 다비드를 통해 압제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쟁취한 피렌체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담긴 작품이었다.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진 대리석 덩어리는 1464년부터 다른 조각가들이 작품을 만들려고 착수했지만 도중에 번번이 작업이 중단된 채 창고 구석에 방치된 상태였다. 1475년에 조각을 맡았던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초벌 작업으로 돌을 다듬어놔서 다비드가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있는 전통적인 자세를 나타내기에는 대리석의 여유분이 모자랐고, 이에 따라 미켈란젤로는 골리앗을 향해 새총을 쏘려는 자세를 선택했다. 밤낮 없이 매달려 작업에 매진한 결과 1504년 높이 5m가 넘는 다비드 상이 완성되었다.

다비드 상이 세상에 공개되자 세간의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다. 화가이자 <예술가 열전>의 저자인 조르조 바사리는 다비드 상을 가리켜 "고대와 근대, 그리스와 로마의 그 어떤 조각상보다 뛰어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다른 조각가의 작품도 볼 필요가 없다"고 극찬했고, 당초 기대치를 능가하는 결과물이 나오자 이렇듯 장엄한 걸작을 성당 부벽 같은 곳에 갖다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오페라 델 두오모는 다비드 상이 새롭게 놓여질 장소를 정하기 위해 위원회를 소집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같은 거장들도 참여했는데 토의 결과 시뇨리아 광장에 있는 피렌체 시청 베키오 궁전 앞에 놓기로 결정했다.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비드 상은 도나텔로가 제작한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청동상을 대체했고, 400년 가까이 광장에 우뚝 서 있던 다비드는 공해로 인한 훼손을 막기 위해 1873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긴 뒤 복제품을 설치했는데 미술관측이 다비드만을 전시하기 위한 특별실을 건축할 정도로 대우가 남달랐다. 원래 다비드는 성당 부벽을 장식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아래에서 보는 관람자의 시선을 고려해 머리를 더 크게 만들었고 얼굴 표정도 과장되게 표현했다. 한편 다비드의 성기가 가려지지 않고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에 다이애나비가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는 30cm 길이의 무화과나뭇잎 석고 조각을 준비해 국부를 가렸다고(…).

3.2. 회화


3.2.1. 시스티나 천장화

3.2.1.1. 조각가의 프레스코화
© Michelangelo (cc-by-sa-3.0) from
시스티나 천장화, 1508~1512년, 프레스코, 40.5 x 14m,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그 이후의 그의 업적은 저명한 미술사가 언스트 곰브리치 교수가 한 말이 가장 간단하고 명확하게 나타난다. 미켈란젤로의 업적은 인류가 천재의 정의에 대해, 그 역량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못생기고, 왜소한 예술가가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을 4년, 다비드 상을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그것도 남들을 훨씬 능가하는 자질을 보이며 끝내니 주변의 반응은 흠좀무. 시스티나 천장화를 4년에 끝낸 게 어느 정도로 위대한 일이냐 하면, 보통 화가들은 그 10분의 1의 크기인 벽화도 3년 동안 그렸다. 거기에 벽화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천장화였다. 더군다나 그는 스스로를 조각가로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는 걸 계속 거부했었다. 교황의 계속된 협박 끝에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시스티나 소성당을 끝낸 것이다.

하지만 이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 때가 미켈란젤로 입장에서 가장 우울한 때였을 거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일단 그가 회화라는 장르 자체를 싫어하는 데다가 하필 천장화. 조금만 잘못 하면 회반죽이 떨어지기 일쑤에다가 그림을 그리려고 자세를 잡는 것 자체가 힘들고 전체적인 구도를 살피는 것도 어렵다. 설치해야 할 장비들도 많다. 거기에 교황은 돈을 제때 입금하지 않았고 예술가로 사는 것을 반대하던 아버지는 돈은 언제 들어오냐며 깽판을 부리니 혈압이 치솟을 만하다. 거기에 그는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아버지 못지 않은 망나니여서 돈을 요구하며 형의 속을 긁었고 그가 가장 아꼈던 동생은 이 때 건강이 안 좋아서 앓으며 다른 방향으로 형의 속을 태웠다.

작품의 제작 과정에도 우여곡절이 있어, 1508년 작업에 착수하고 처음 1년 동안 제법 빠르게 진도를 나가 1년 만에 50%를 완성하는 흠좀무한 결과를 이뤘지만, 교황청이 제대로 봉급을 지급하지 않아 조수들이 몽땅 피렌체로 떠나버렸다. 이 때문에 미켈란젤로도 본의 아니게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교황청이 다시 급료 지불을 시작한 1511년 10월에야 새로운 조수들을 고용해 작업을 재개, 1512년 9월까지 약 11개월에 걸쳐 나머지 절반을 완성해 천장화 전체를 완성시켰다. 그러니 실제 작업 기간은 약 2년인 셈. 게다가 후반기의 약 1년 동안은 새로 고용한 조수들이 영 상태가 좋지 않아 결국 미켈란젤로 혼자서 거의 다 작업을 맡아 했다고 한다. 레알 흠좀무. 천재는 역시 일반인과 뭔가 다르긴 다른가 봐

이처럼 하드코어하다 못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작업을 끝내니 나타난 것은 인류의 유산. 본인은 정말 하기 싫어했던 작품이 후대에는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았다. 다비드, 피에타가 있긴 하지만 역시 미켈란젤로라 하면 시스티나 천장화를 떠올리게 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애초에 시스티나 천장화라는 일거리 자체가 그와 사이가 안 좋았던 건축가 브라만테의 함정이라는 사람도 있다. 조각을 전문으로 하는 그이기에 회화를 맡기면 망신만 당하고 말 거라는 계산에 브라만테가 교황을 부추겨 최고의 '조각가'인 그에게 회화 작품을 맡겼다는 것. 물론 물적 증거가 없는 정황 증거만을 놓고 한 추측이긴 하지만[7][8]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인류는 소인배 브라만테에게 감사해야 할 듯 하다.

3.2.1.2. 율리오 2세와의 관계

반면 성격 역시 개차반…까지는 아니어도 꼬장꼬장해서 교황에게까지 대든 것은 유명한 일화다. 그는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오만했고,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깎아내리는걸로 유명했다. 당시 교황이 지금처럼 실권이 없는 때도 아니었고, 오히려 후대의 평가로는 아마 교황의 권력이 가장 강했던 때라고 한다. 게다가 미켈란젤로가 대든 교황은 여러번 군사 원정도 나가고, 당할자 없다던 영웅 체자레 보르지아를 한순간에 몰락시켜 버린 권모 술수의 대가인데다가 성격 더럽기로는 유럽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인, 황제전쟁 교황이라는 별명을 가진 율리오 2세였다. 그런 교황에게…. 흠좀무.

싸움의 원인은 다름아닌 시스티나 천장화. 언제 그림이 완성되냐고 묻는 교황의 말에 미켈란젤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제가 끝낼 수 있을 때, 그림이 끝나겠지요라고 이죽거렸고, 그 이죽거림에 화가 난 교황이 지팡이로 한 대 치자 기분이 상해 로마에서 짐 싸들고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가 버렸다. 당연히 화가 머리 끝까지 난 교황이었지만 당시 이탈리아에 그만한 실력자가 없기도 했고 피렌체 대사가 간신히 미켈란젤로를 설득하는데에 성공해 두 사람은 화해했고 시스티나 천장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당시 대사가 미켈란젤로를 돌려보내며 교황에게 쓴 편지에는 성하, 한번만 그를 용서하시고 일을 맡겨 주소서. 이 피렌체의 천재는 세상이 놀랄 작품을 남길 것이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이 츤데레 교황과 예술가 둘은 계속 툭탁댄다. 나중에 교황이 당장 그림을 보여주지 않으면 비계[9]에서 밀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 미켈란젤로는 자기 작품을 중간에 보여줄 수밖에 없었고[10]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성급함이 자신의 작품을 망쳤다고 한탄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완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결국 1511년 8월 11일에 교황이 그림 봤다고 자랑하는 선언이 있었고, 그해 10월에 마침내 이 대작은 완성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율리오 2세는 자기가 주문한 이 대작을 고작 4개월밖에 못 즐기고 사망했다.

한 가지 웃긴 건 시스티나 천장화를 보면 율리오 2 세의 얼굴을 모델로 선지자 스가랴를 그리고 그 뒤에 아기 천사가 손가락 욕을 날리고 있다. 물론 링크된 것 처럼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고 있는 건 아니다. 검지 손가락을 말고 있는 건데 이게 당시 이탈리아의 손가락 욕이었다고 한다. 뒤의 최후의 심판에서의 일화도 그렇고, 레아의 일화도 그렇고 그는 의뢰인의 의뢰로 만드는 당시의 풍토를 따르는 한 편 몰래몰래 예술 작품에 자신의 노골적인 심경을 자주 담아내었다.

재미있는 것은 원래 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지시한 그림은 12사도였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구상한 결과 아무리 노력해도 12사도라는 주제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 위에 만족스럽게 그려질 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천지창조에서 노아의 방주, 모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성경의 이야기를 시스티나 천장에 그리기로 결심한다. 당연히 작업 규모는 당초 예상보다 배는 더 커졌고 율리오 2세는 어이없어하면서도 주제의 전환을 허락해 준다.

또 이게 율리오 2세가 아주 근거도 없이 미켈란젤로에게 맡긴 작업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근거란 게 참 빈약하긴 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예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피렌체 시청인 베키오 궁전을 장식할 벽화 대결을 벌인 적이 있다. 이 때의 작품은 남아있지 않지만 미켈란젤로가 양피지 위에 습작을 그린 것은 남아 있다. 그 습작으로 미루어 보아 미켈란젤로의 회화 실력은 시스티나 천장화 이전에 이미 수준급이긴 했고 아주 백지부터 시작해 그런 대작을 그려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벽화와 천장화는 수준이 다른 이야기인 건 확실하고 완성하지도 않은 벽화 의뢰를 한 번 받았다고 천장화를 맡긴 율리오 2세가 예술에 대해 몰이해를 보인 것은 사실. 또 시스티나 천장화 이전에 회화 그리는 법을 알았다고 해도 작업을 시작했을 때에는 한 구획 그리는 데에 3개월이 걸렸던[11] 미켈란젤로가 4년 후 작업 막바지에는 불과 40일이 걸렸다는 걸 보면 그가 다 빈치에 필적하는 우주구급 굇수였음은 확실하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회반죽 위에 스케치를 안 하고 그저 양피지 위에 연습만 몇 번 한 뒤 천장에 올라가 곧장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ɔ) Michelangelo Buenarroti (1475-1564) from
(ɔ) from
율리오 2세 영묘 설계안 스케치 모세, 1513~1515년, 대리석, 2.35m, 죽어가는 노예 반항하는 노예
1505년 초안(이후 세 차례 설계 수정) 로마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1513~1516년, 2.5m, 대리석,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율리오 2세는 죽은 뒤에도 미켈란젤로에게 족쇄로 남는다. 당시 신축중이던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에다가 본인의 무덤을 피라미드 형태로 짓고 미켈란젤로에게 이걸 장식할 조각 40개를 완성하라 명령했던 것. 파라오냐; 이 계약은 미켈란젤로에게 평생 부담으로 남지만 시스티나 천장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무덤은 초반에는 그가 원했던 일이었다. 조각 한 개에 3년 남짓 걸리는 걸 생각해 보면 40개면 120년이니 훌륭한 노예 계약이지만 그걸 지적한 지인에게 그는 원형 탁자에 대리석 6개 올려 놓고 돌아가며 조각하면 1년이면 돼. 뭐 한 7년 하면 다 완성하겠지.라고 대답했다 한다.(…) 시스티나 천장화로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진짜 그렇게 했을 것 같아 무섭다, 이 분은. 달리 표현하면, 율리오 2세는 시스티나 천장화를 의뢰한 것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기 무덤을 갖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말년에는 이 계약이 발목을 잡아 그가 하고 싶은 일들을 못하게 되고 족쇄로 남게 된다. 율리오 2세 사후에도 유족들이 계속해서 보수를 지급했기 때문. 다행히 미켈란젤로에게 다른 작업을 맡기고 싶었던 후임 교황이 율리오 2세의 유족과 협상해서 원래의 계획보다 크게 축소시키는 걸로 타협점을 찾은 덕분에 그는 자유의 몸이 되어 평생 하고 싶은 조각들을 하며 살게 된다. 계약이 바뀌기 전에 완성해둔 조각상이 넷 있는데 하나는 바로 걸작 모세 상으로,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다. 모세 상이 완성되었을 때 감격한 미켈란젤로가 망치로 조각의 무릎을 치면서 "왜 말을 못 해?"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며, 유월절마다 유대인들이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을 찾아 모세 상에 경배를 올리기도 했다. 나머지 둘,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 상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 마지막 하나 '승리의 정신' 상은 피렌체 베키오 궁전에 있다.(단, 승리의 정신 상은 율리오 2세 무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그 외에도 4개의 미완성 노예 상이 남아있다.#

예로니모의 오역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에 모세 상의 머리에 작은 뿔 두 개가 솟아 있다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시스티나 예배당의 비밀>의 저자인 벤저민 블레흐와 로이 돌리너는 다른 견해를 제기했다. 원래 이 조각상은 피라미드 모양의 영묘 윗부분에 설치될 예정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 모세가 신으로부터 십계를 받은 후 얼굴에서 빛이 났다는 표현을 보다 현실감 있게 재현하기 위해, 모세의 얼굴을 무두질한 가죽으로 윤이 나도록 문질렀고 아래쪽에서 바라봤을 때는 시야의 제한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에 작은 뿔 두 개를 조각해 대성당의 지붕에서 쏟아지는 빛이 모세의 머리에 반사되어 성서에 적힌 것처럼 빛나도록 한 무대적 효과를 노렸다고. 하지만 원래의 계약보다 대폭 축소되어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훨씬 작은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설치하게 되자 미켈란젤로는 처음 의도했던 빛의 반사를 위해 자신이 아꼈던 모세 상에 수정을 가해서 모세의 얼굴을 왼쪽으로 90도 가까이 돌려놓고 성당 벽면에 작은 구멍을 뚫어 빛이 모세의 얼굴과 뿔에 반사되도록 했다. 유감스럽게도 나중에 성당측이 그 구멍을 폐쇄하는 바람에 지금은 그가 연출했던 환상적인 효과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율리오 2세와는 지겹도록 싸웠고 때론 율리오 2세가 도에 지나치게 미켈란젤로를 착취했으며 때론 미켈란젤로가 월권을 시도했다. 이토록 치고박고 싸워대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이니 둘은 서로 증오하는 사이였을 것 같지만, 율리오 2세는 전쟁 시에는 자신의 적으로 돌아서기까지 한 이 예술가를 용서해 주고 당시 예술가의 지위로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건방진 일을 해도 다 용서해 주었다. 미켈란젤로 역시 자신을 착취하고 항상 힘든 요구만 하는 교황을 만나러 갔더니 바쁘다며 안 만나주길래 삐져서(…) 가출하는 등 여러모로 애증의 관계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시발데레의 정점을 달리는 영국의 어느 형제의 관계 정도랄까.

3.2.2. 최후의 심판

최후의 심판, 1534~1541년, 프레스코, 13.7 x 12m,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시스티나 천장화 뿐만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역시 굉장한 작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로 쳐들어와 탈탈 털었던 사건(사코 디 로마)으로 인해 엄청난 트라우마를 받은 당시 교황 레멘스 7세가 그 열폭 분노를 후세에 남기고자 기획, 1535년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한 작품이다. 상당한 규모의 기획이었던지라 클레멘스 7세는 계약서에 서명을 한 직후 심판을 받으러 하느님의 곁으로 가고(…) 그 다음 교황인 바오로 3세 때에 가서야 완성을 보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바오로 3세는 1535년 9월 1일, 그를 '교황청의 최고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임명하는 포고령을 반포하며 예우했다.

사실 시스티나 천장화보다도 이쪽을 더 걸작으로 치는 사람들도 많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도저히 당시 성당에 그려 넣을 만한 그림은 아니다. 사람의 가죽을 벗긴 과격한 묘사, 근육을 드러내며 나체의 미를 뽐내는 수많은 나신들, 예수라기보다 아폴론에 가깝게 묘사된 예수 등등. 이처럼 과격한 화풍은 상술했다시피 사코 디 로마로 인한 분노 보정이 반영된 까닭이 크다.

사실 현대에 남아 있는 그림은 일종의 '수정본'에 가깝다. 원래는 예수고 성모 마리아고 모두 완전한 누드였다. 이는 처음부터 미켈란젤로가 의도한 것. 이 때문에 그림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 엄청났다.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적절히 쉴드쳐 줬지만, 교황조차도 최후의 심판의 지나친 나체의 향연에 질겁한 나머지 결국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니엘레 다 볼테라에게 원작 위에다가 나체와 성기 부분을 가리기 위한 천과 옷들을 그려 넣으라고 명령한다.[12] 자존심 강한 미켈란젤로에게 이는 굉장히 아니꼬운 처사였을 것이다. 자신의 미술작품이 모욕당하는데 그 누가 기분이 좋겠는가.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제자가 자기 원작 위에 덧칠하는 걸 보면서 교황에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교황 성하, 이 그림 고치는 일 따위는 아주 쉽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건 제가 할 수도 있으니, 성하께서는 세상을 바로잡는 일이나 해주시옵소서."

르네상스의 말기에는 홀로 생존해 90세까지 활동한 신에 가까운 노장으로 진화했다.[13] 시인 루도비코 아리오스토가 그를 가리킨 별명이 '일 디비노(Il Divino)', 바로 성스러운 이였다.

3.3. 건축

그는 건축가로써도 재능이 있었다. 그의 건축 양식의 특징을 들자면 현대의 미니멀리즘과도 일맥상통하는 (물론 당시 기준으로) 심플함. 사실 미켈란젤로만 그런 게 아니라 당시의 뛰어난 건축가였던 브라만테 역시 최소한의 기하학적인 미학을 가하는 심플한 미학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에게 다 빈치 저리가라 할 정도로 사이가 안 좋은 라이벌이었으나,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능력은 인정했다. 그리고 아래의 성 베드로 대 성당에도 나오겠지만, 브라만테의 사후 이리저리 변질된 설계를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초안을 최대한 살리는 쪽으로 정리했다.[14]

3.3.1.1. 미켈란젤로 이전의 상황
교황 율리오 2세는 교황청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506년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로 결정하면서 콘스탄티누스 1세 때 세워졌던 붕괴 직전의 옛 건물을 남김없이 파괴했다. 사상 유례없는 대역사가 시작되면서 도나토 브라만테, 줄리아노 다 상갈로,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 산치오, 발다사레 페루치, 안토니오 다 상갈로 등 당대의 내로라 하는 예술가들이 참여했으나 공사 규모가 너무 컸기에 이들 모두 자신의 설계안이 현실에 반영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해당 건축가가 사망하면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임명하는 방식으로 수석 건축가를 인선했기 때문에 후임자는 전임자의 설계안을 갈아엎고 자신만의 설계안으로 수정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 결과 공사가 시작된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성당 건물은 각종 설계안이 두서없이 혼재되고 말았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도나토 브라만테는 성당의 평면 구조를 그리스 십자가로 설계했고 라파엘로 산치오는 브라만테의 설계안을 수정해 라틴 십자가 평면으로 바꿨으며, 발다사레 페루치는 라파엘로의 설계안을 수정해 다시 그리스 십자가 평면으로 돌아갔는데,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전임자들의 설계안에서 이것저것 가져와 자신의 설계안에 합쳐 놓은 것이 바로 미켈란젤로가 수석 건축가로 임명된 1546년의 상황이었다.

3.3.1.2. 그리스 십자가 평면
평면도/횡단면도 교황 비오 4세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모형을 보여주는 미켈란젤로,
도메니코 크레스티, 1618~1619년, 캔버스에 유채, 236 x 141cm,
이탈리아 피렌체 카사 부오나로티
1546년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사망하자 교황 바오로 3세는 일흔을 넘긴 고령의 미켈란젤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책임을 맡겼다. 임명 초 내키지 않아 하던 미켈란젤로는 곧 마음을 바꿔 정력적으로 공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가 젊은 시절 로마에 왔을 때 봤던 유서 깊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바란 율리오 2세의 의지 때문에 확실한 설계안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철거되었고, 공사는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사코 디 로마로 교황청의 위신이 곤두박질친 것과 맞물려 폐허와도 같은 풍경의 공사 현장은 가톨릭의 위기를 나타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고대 로마의 건축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미켈란젤로는 판테온을 모델로 돔을 설계하고 싶었지만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과 같은 형태로 지어 이교도의 성전을 능가해야 한다고 바란 교황의 의지 때문에 자신의 뜻을 접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구상을 교황청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설계에 반영했다. 돔 지붕을 받칠 원통형 기단부만 완성된 상태에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었는데, 그동안 구조에 변형이 생겼나 확인하려고 측정한 결과 기단부의 지름이 판테온의 지름보다 46cm 작게 되어 있었던 것. 이 때문에 성 베드로 대성당은 판테온 다음으로 직경이 큰 돔이 될 수밖에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보기에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설계안은 열주와 벽체가 장식적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가톨릭의 총본산에 어울리는 권위와 웅장함이 부족했다. 그래서 브라만테의 그리스 십자가 평면을 기본적인 구조로 잡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설계안을 창조했는데, 불필요한 군더더기 장식을 과감하게 쳐냈으며 내부 공간을 나누는 구획도 단순화해 장중한 분위기를 극대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미켈란젤로가 상갈로 지휘 하에 대성당 공사를 맡았던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고, 설계에 관여하고 싶어하는 건축 위원회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할 일은 공사 비용이 도둑맞지 않게 자금을 잘 관리하는 것뿐'이라며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한 상갈로파 관계자들은 미켈란젤로가 노망이 났다며 수석 건축가 자리에서 몰아내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결국 교황 바오로 3세가 나서서 공사에 관한 모든 전권을 미켈란젤로에게 위임하고 건축 당국은 그의 설계대로만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못박으면서 미켈란젤로는 전임자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얻게 되었다.

3.3.1.3. 반구형 돔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 있어서 건물 중심부에 을 얹는 것은 브라만테의 설계안 때부터 이어져온 것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돔을 설계하기 위해 피렌체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꼭대기까지 올라가 그 구조를 파악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설계한 돔은 두 겹의 벽돌 외피로 된 타원형 모양이며, 두 겹으로 늘어선 기둥들이 돔을 지지하는 드럼을 둘러싼 형태였다. 정작 미켈란젤로는 돔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드럼 부분만 완성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구조역학 및 미관상의 이유로 돔의 높이가 몇 미터 정도 높아진 것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는 그의 설계가 반영되었다.

3.3.2. 캄피돌리오 광장

고대 로마 시대에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성지로 여겨졌으나 중세 이후 버려졌던 공간이다. 르네상스가 도래하면서 1537년 미켈란젤로가 이곳을 재개발하기 위해 광장의 설계를 맡았다. 그가 재개발에 참여할 당시에는 언덕에 세나토리오 궁전과 콘세르바토리 궁전(Palazzo dei Conservatori)만 있었는데 균형과 대칭을 위해 콘세르바토리 궁전 맞은편에 누오보 궁전(Palazzo Nuovo)을 세우고, 건물 세 채가 자리잡으면서 생긴 광장의 형태는 사다리꼴로 잡은 후 중앙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청동 기마상을 옮겨놨다. 광장 입구에는 포로 로마노에서 가져온 카스토르와 폴룩스 조각상을 배치했고, 언덕으로 올라오는 계단인 코르도나타 계단은 위로 갈수록 폭을 넓게 만들어 아래쪽에서 보면 가파르지만 위쪽에서는 완만하게 보이는 착시 효과를 연출했다. 일설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말을 타고 캄피돌리오 광장까지 올라오도록 하기 위해 계단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설계했다고도 한다.

3.3.3. 그 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와 반구형 돔이 그의 건축가로써의 업적으로는 가장 유명하지만 그 외에도 그가 건축에 참여한 작품은 많다. 메디치 예배당의 설계와 그에 딸린 조각들, 로렌치아나 도서관,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등.

4. 죽음

론다니니의 피에타, 1552~1564년, 대리석, 195cm,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 미켈란젤로의 무덤, 피렌체 산타 크로체 대성당
노년에 접어들어 시력이 약해져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시각이 아니라 촉각에 의지해서 죽기 직전까지도 새로운 피에타[15] 작품에 매달려 있었으며, 그 기세는 대단했다고 한다. 흠좀무하게도 그의 유언은 "이제야 조각의 기본을 조금 알 것 같은데 죽어야 한다니…."였다. 대체 뭘 만드시려고 했을까 사후 로마에 묻혔다가 고향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대성당에 이장되었다. 유해를 로마에서 피렌체로 빼돌려 대대적으로 장례를 치를 때 후배 예술가들이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관을 열었는데, 사후 20여일이 지났는데도 부패하지 않고 몇 시간 전에 죽은 것 같은 상태였으며 훗날 미켈란젤로의 후손인 필리포 부오나로티[16]의 요청으로 18세기에 다시금 관뚜껑을 열었을 때도 부패의 징후가 없이 온전한 시신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무덤에 새겨진 라틴어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MICHAELI ANGELO BONAROTIO
E VETVSTA SIMONIORVM FAMILIA
SCVLPTORI. PICTORI. ET ARCHITECTO
FAMA OMNIBVS NOTISSIMO.
LEONARDVS PATRVO AMANTIS. ET DE SE OPTIME MERITO
TRANSLATIS ROMA EIVS OSSIBVS. ATQVE IN HOC TEMPLO MAIOR
SVOR SEPVLCRO CONDITIS. COHORTANTE SERENISS. COSMO MED.
MAGNO HETRVRIAE DVCE. P. C.
ANN. SAL. CIC. IC. LXX
VIXIT ANN. LXXXVIII. M. XI. D. XV.

5. 사생활 및 개인사

르네상스 삼대 거장의 다른 두 명을 보면, 다 빈치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성관계를 질색하는데다가 여자를 경멸했지만 언변이 능했고, 잘생긴데다가 패션 및 박학다식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샀다. 그래서 그의 주변에는 늘 그를 숭배하는 젊은 청년들이 따라다녔다. 라파엘로는 다 빈치처럼 꼬장꼬장한 면이 없이 고용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데다가 잘생겼고 본인 역시 여자를 좋아했기에 수 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그 덕에 젊은 나이에 죽기도 했지만.

반면 미켈란젤로는 기본적으로 못 생긴데다가, 본인도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전혀 없어서 길거리로 나올 때에도 작업 중 지저분해진 몰골 그대로 다녔다. 거기에 라파엘로처럼 원만한 성격도 아니고 다 빈치처럼 꼬장꼬장하긴 해도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독설을 자제하지 않았고, 이 항목에 여러 번에 걸쳐 나오지만 수틀리면 교황에게도 대들거나 도망가는 등 위의 두 사람과 달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천재의 이미지였다.

또한 사보나롤라와 개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매우 금욕적이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문학 작품이 단테의 신곡이라는 데에서 그의 성향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술도 거의 하지 않았고, 소식가였고 여자는 다 빈치 마냥 경멸했던데다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아서 지출이 많았지 본인의 사치를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교황에게 돈 안 준다고 보챈 것도 돈을 밝힌 게 아니라 율리오 2세가 줄 돈을 안 줘서 그런 것이다. 아무리 예술혼에 불타고 있어도 먹고는 살아야 할 것 아닌가. 오히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맡게 되며 자신의 전임자였던 상갈로 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돈 욕심이 나서 그러지?' 라는 비방을 받자 빡쳐서 무보수로 일 할 것이라 천명하기도 했다. 사실 지금 기준으로 보아도 장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금욕적인 생활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대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예술에 쏟았고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동시대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역동적이다. 기실 현재 각종 패션쇼, 사진촬영에서 모델들이 과장되게 뒤틀린 포즈를 취하는 것의 시발점은 이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이전까지의 회화를 보면 모델들이 이렇게 인체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포즈를 취한 적이 없다. 회화에 있어서 미켈란젤로의 업적을 한 마디로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긴 하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의의를 꼽으라면 역시 인체의 역동성을 하나의 미학으로 발견한 것을 들 수 있다. 비단 이런 역동성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스케일이 거대하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스케일, 최후의 심판의 스케일과 그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미켈란젤로의 작풍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 그야말로 활화산과 같았던 예술인. 단순히 스케일만 큰 게 아니라, 남긴 작품도 상당히 많다.

뭐 미켈란젤로도 사람인지라 모두와 척을 지고 산 것은 아니었다. 못생긴 외모, 괴팍한 성격, 금욕적이기까지 한 일상 생활을 가진 그였지만 인류사에서도 이름을 영원히 남길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실력 자체만으로도 카리스마가 있었다. 거기에 금욕적인 생활이 더해지니 어떤 사람들은 그를 마치 현자처럼 우러러 보기도 했다. 바꿔 말하면 그는 수평적인 인간 관계는 별로 없었다. 항상 그를 찍어누르고 고용하는 - 율리오 2세 사람들 아니면 그를 일방적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소수의 친구밖에 없었다.

6. 종합 아티스트


다재다능한 천재로 추앙받는 다 빈치와 달리 미켈란젤로에게는 그러한 주목도가 좀 덜한데, 아무래도 남긴 기록이 적다보니 그런 감이 없지 않다. 사실 다 빈치와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 역시 다재다능했고 이건 모든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특징이다. 르네상스 시대 당시의 조각가들은 돌을 조각하느냐, 나무를 조각하느냐에 따라 다른 역할을 수행하곤 한다. 미켈란젤로처럼 돌 조각을 하는 조각가들은 석공으로서 건축가의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나무조각가들은 가구제작자. 그렇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조각 작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디자인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겸한다. 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다만 그 와중에서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만큼 모든 분야에 통틀어 이 정도의 업적을 남긴 예술가는 정말 세 손가락에 꼽고 그렇기에 르네상스 삼 대 거장으로 불리우는 것이다. 건축에 있어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 [17] 회화에 있어서는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성당, 조각에 있어서는 다비드, 피에타. 대중이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 한 두 가지만 꼽아도 이 정도다.

거기에 그의 사후 그가 흠모했던 귀족 부인, 비토리아 콜론나[18]에게 써서 보냈던 시가 몇 편 발견되었는데 그것을 보면 시인으로서의 재능 역시 상당했다고 한다. [19]

7. 다른 예술가들과의 관계

7.1. 다 빈치와의 관계

다 빈치에 비해선 한 세대 아래의 인물로 젊었을 때는 대선배인 다 빈치에게 경쟁심을 불태우는 루키 포지션이었다. 다 빈치와 피렌체 베키오 궁전 벽화 대결까지 벌였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 완성되었다면 미술계의 영원한 보물이 되었겠지만 두 사람 다 완성시키지 못한다.[20] 특이하게도 이 선의의 대결에서 두 사람은 모두 서로 부담감과 특이한 호기심으로 탐색하는데 그쳤다. 실제로 몇몇 그들의 당시 스케치는 서로의 스타일을 반영해보려고 흉내낸 티가 보이기도 했다.

그 뒤에도 이 둘의 라이벌 관계가 유지되었다. 미켈란젤로는 회화를 사람의 눈을 속이려 드는 수작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조각만 못하다고 깎아내렸고[21], 다 빈치는 조각가의 모습은 마치 머리에 빵가루를 잔뜩 뒤집어쓴 제빵사 같다고 했다. 조각가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상 평상시에도 조각하다 씻지도 않고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는 미켈란젤로를 겨냥한 말.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는 20살이 넘게 차이가 났는데도 자신보다 연상인 다 빈치를 존중할 줄 몰랐던 미켈란젤로의 싸가지, 스무 살이나 어린 친구를 좀 관대히 대하지 못하고 맨날 놀려먹으며 기를 쓰고 이기려 들었던 다 빈치의 유치함이 합쳐져 저 둘은 초등학생들처럼 유치하게 싸우며 살았다. 본격 소인배 배틀 사실 유치하다고만 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예술가라는 직업은 결국 지금의 프리랜서와 비슷한 개념이었고, 조금 더 실력이 있고 명성이 높은 쪽이 더 좋은 계약을 따내게 되어 있다. 미켈란젤로도 연상에 대한 존중을 챙길 상태가 아니었을 테고 다 빈치 역시 연하에 대한 관대함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싸가지 & 속좁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는데, 잘생긴 외모와 언변으로 인기가 많았고 젊은 추종자를 많이 이끌고 다녔던 다빈치에게 어느 날 광장에서 추종자 한 명이 단테의 시에 대해 모르는 걸 물어보았다. 다 빈치는 마침 그 때 미켈란젤로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항상 패션에 신경을 쓰던 다 빈치와 달리 넝마같은 옷을 입고 대리석 가루를 뒤집어 쓴 미켈란젤로를 보자 곯려주고 싶었는지 "저 젊은 친구가 나보다 더 잘 알거요."라고 했다.

사실 한 번 봐도 늬앙스를 이해할 수 있듯이 '쟤 한테 물어봐'라기보다 '저기 쟤 옷 입은 꼴 좀 봐. 단테를 알긴 지가 쥐뿔 알겠어?'에 가까운 놀림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나와 있듯이 로렌초 공방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높은 수준의 교양을 쌓게 했고 더군다나 단테는 미켈란젤로가 가장 좋아하는 문인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다 빈치의 추종자들은 미켈란젤로의 몰골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자기 무시하면 교황한테도 대드는 미켈란젤로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사실 다 빈치는 지뢰를 밟은 정도가 아니라 그 위에서 점프를 해 댄 셈.

당연히 미켈란젤로의 성질머리는 폭발했는데 그는 다빈치에게 "당신이 알려줘도 되잖소? 뭐 당신이란 인간은 밀라노에서 만들던 동상도 완성하지 못하고, 뭐든지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인간이지만!"[22] 하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말하다가 화가 더 났는 지 2차로 폭발해 극딜하길 "그 동상을 완성시킬줄 알고 네놈한테 일을 맡긴 그 밀라노 놈[23]은 천하에 둘도 없는 돌대가리야!" 라고 했다 한다. 다 빈치는 그말에 대꾸도 못하고 입만 뻐끔뻐끔 했다고. 애초에 다 빈치에게 이 따위로 말을 뱉을 수 있는 인간은 별로 없었다.

이 일화 말고도 두 사람 사이의 키배 및 분쟁에 관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앙기아리 전투로 서로 경쟁할 당시에는 사이좋게 쌍욕을 면전에서 교환할 정도로 사이가 최악이었다고 한다.

일례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성당 부벽을 장식할 '다비드'의 조각을 맡을 사람을 물색하다가 당시에는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미켈란젤로에게 그 일을 맡겼을 때 다 빈치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나마 만들다가 망하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막상 태어난 건 걸작이니 분노는 두 배. 위에도 써 있지만 이 다비드 상의 질이 생각보다 너무나 좋자 성당 측은 '이걸 부벽이나 장식하려고 놓는 건 낭비다' 라는 판단 하에 새로운 거치 장소를 물색하고자 회의를 여는데, 이 회의에는 다 빈치 역시 끼어 있었다. 그리고 다 빈치가 '그냥 구석탱이에 처박아두죠' 라는 늬앙스로 말한 것 역시 유명한 일화. 당연히 미켈란젤로의 뇌 속에서 다 빈치에게는 영원이 떼어지지 않을 '혐' 마크가 붙어 버렸다.

하지만 동족혐오였는 지 둘 사이에는 공통점도 많다. 둘 다 동성애자 의혹을 받고 있다. 일단 미켈란젤로는 남성의 근육미에 집착한 것도 그렇고, 평생 독신으로 산 데다가 미청년들과의 편지 왕래도 있다. 물론 비토리오 콜론나라는 부인과 깊은 교류를 하기도 했으나 비토리오 콜로나는 남성적인 여성이었다 하고 이 조차도 정신적인 교감이었지 육체 관계는 없었다. 다 빈치가 여자를 혐오했고 동성애 혐의로 피소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거기에 둘 모두 자신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릴 줄 몰랐다. 다 빈치도 미켈란젤로도 교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으로 해부를 해 댔으며 사실상 그들의 재능이 교황 등 윗줄에서 인정받고 소중히 여겨지지 않았다면 엄벌을 받았을 것이다.

미완성작이 많은 것 역시 공통점. 다만 미켈란젤로는 다 빈치와 비교했을 때에 완성품이 더 많기도 하다. 애초에 미켈란젤로가 미완성작이 많은 건 다 빈치처럼 하나 만드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집중을 못 해서가 아니라 젊은 시절 자신의 기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되도 않게 계약을 많이 잡아서 그렇다. 미켈란젤로가 수락하고 완성못한 프로젝트는 율리오 2세의 영묘를 위한 40 개의 조각, 12 사도 조각, 앙기아리 벽화 등이 있다. 미켈란젤로 특유의 엄청난 작품 제작 속도를 감안해도 하나에 1년이 걸린다 치면 이거 다 만드는데 53 년이 걸린다.

7.2. 라파엘로와의 관계

또다른 3대 거장인 라파엘로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라파엘로가 처음에 먼저 경의를 표했다고 하는데, 미켈란젤로가 후배 대접은 커녕 자신의 경쟁자로 생각하고 까칠하게 대하자 이후 라파엘로도 미켈란젤로를 싫어하게 되었다고.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보면 아테네 학당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비관론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얼굴로 써먹기도 하고, 여러 그림에서 미켈란젤로 화풍의 불끈불끈 근육질 캐릭들이 찌질한 모습으로 죽거나 꼴불견이 되는 모습을 넣어 미켈란젤로를 은근히 조롱하며 깠다.

한번은 바티칸에서 라파엘로가 귀족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것을 본 미켈란젤로가 "귀족 도련님처럼 찬미자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를 가나?" 하고 묻자,[24] 라파엘로가 "그럼, 당신은 사형집행인처럼 혼자서 어디를 그렇게 가시나요?"라고 응수했다.

그래도 라파엘로의 그림 실력만은 인정했는지, 라파엘로에게 그림을 의뢰해 돈을 지불한 귀족이 너무 비싼 값을 치렀다며 투덜거리자 "그 돈은 그림에 그려진 사람의 무릎 값밖에 되지 않는다"라며 비웃은 적도 있었다.[25]

8. 작품에 숨겨진 비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다빈치 코드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아서 그렇지 미켈란젤로 역시 찾아보면 그림에 이스터 에그같이 숨겨둔 요소가 굉장히 많다. 하지만 이 중 몇몇 개는 5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다보니 확실히 그가 숨겨둔 건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다.

당장 시스티나 천장화만 하더라도 수많은 이스터 에그 추정 요소들이 많다. 아담의 탄생으로 유명한 구획은 잘 보면 뇌의 단면도로 추정되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어깨 관절의 모습이 숨겨진 무녀의 다리, 폐와 기관지의 모습이 숨겨진 이브, 콩팥의 단면도를 나타낸 형상과 뇌의 생김새를 묘사한 목 부분 등등 찾아보면 수도 없다.[26]

물론 미켈란젤로가 '이건 이거다'라고 하고 가진 않았으니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이런 식의 인체 해부도와 유사성을 가진 구도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는 점, 그가 근육 묘사에 광기에 가까울 정도의 집착을 보여주었으며 해부를 직접 해 보지 않았으면 모를 정도로 인체에 통달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상당히 유력한 추측이다. 습작으로 그린 그림 중에는 피부를 없애고 근육을 직접 그려낸 그림도 있었다. 당시 허가받은 사람 외에 해부를 하는 것은 중죄였지만 미켈란젤로가 해부를 어떤 경로로든 했다는 것은 이제 미술학계에서도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27]

최후의 심판에서는 이런 이스터 에그가 조금 더 노골적이다. 그림을 잘 보면 전체적으로 해골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살가죽에는 미켈란젤로 본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작업이 진행되는 도중, 교황청 의전관이었던 바지오 체세나 추기경은 (예수를 비롯한, 모든 유명한 성인들께서 나체로 벌거벗고 있으니) 그림이 불경하다며, 이 그림이 가장 어울릴 만한 장소는 창녀촌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 마디 하자 그림 구석에 그를 지옥의 왕, 미노스로 묘사해 그려 넣어 복수했다.[28] 이 악마 그림을 발견한 추기경이 대노하며 교황 바오로 3세 앞에 엎드려 울면서 자길 지워달라고 애원했지만 바오로 3세는 "미안하네, 연옥에 있다면 내 어떻게 해보겠네만, 지옥에 있는데 내가 자넬 어떻게 구해주겠나"라면서 미켈란젤로의 소인배 배틀 승리를 선언했다. 사실 애초에 이걸 그리게 된 취지가 사코 디 로마 사건에서 입은 상처를 기억하고자 감정 쩌는 입장에서 기획된 것이니,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것도 그리 이상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시킨[29] 바오로 3세 역시 미켈란젤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기[30] 때문에 교황이 미사를 볼 때 신자들의 시야로는 그의 머리가 그림의 지옥의 입구에 걸리도록 해 놨다.

추기경보다도 예술가를 선택한 교황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황송한 처사를 내려주었음에도 애초에 마음에 안 든다고 미켈란젤로는 그런 교황에게도 좋은 대접을 해주진 않았던 것이다.

9. 개신교도?

피렌체 대성당의 피에타, 1547~1553년, 대리석, 253m,
피렌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그가 개신교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의견이 있는데, 말년에 자선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교회의 조각상과 그림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지만, 율리오 2세의 무덤에서 자선을 통한 구원을 상징하는 레아 상을 제작을 의뢰 받았다. 할 수 없이 그는 레아 상을 만들되, 반대쪽에 있는 사색을 통한 구원을 상징한 라헬과는 달리 자선을 통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구원에 이르는데 빛을 밝힐 수 있다는 의미로 오른손에 횃불을 들고 있는 상을 만들었다. 또한 중앙의 율리오 2세의 상은 그 동안 그의 하청업자가 만든 것으로 여기어질 정도로 볼품없는 형상을 가지고 있는데, 전투교황으로 묘사되는 율리오 2세의 모습이 연약한 패배자로 묘사되어있다. 이는 황제의 권위를 내놓아야 비로소 하나님에게 전념할 수 있다는 의미로 여기어 진다. 이러한 사상은 그와 교류가 잦았던 비토리아 콜론나의 편지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으며,[31] 스피리투알리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기어진다.

그는 그 당시 카톨릭 내에서 개혁을 주장하던 스피리투알리의 멤버였다. 스피리투알리는 카라파 가문의 바오르 4세와 대립관계가 있었던 레지널드 폴을 중심으로 그와 의견을 같이 하던 시인과 예술가들을 포함해서 비토리아 콜론나 그리고 미켈란젤로 등이 속해있었던 단체로, 이들은 그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고, 자선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는 의견에 동감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이 단체의 성명에 동참했다. 따라서 이들은 보수적인 바오르 4세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1표 차이로 레지널드 폴이 교황에서 낙선한 후, 바오르 4세가 교황이 되자마자 스피리투알리의 대부분의 멤버는 조사를 받게 되었고 레지널드 폴은 영국으로 떠났다. 이때 위기감을 느낀 미켈란젤로는 자서전에서 레아의 왼손의 횃불을 거울이라고 묘사하였고 그는 무사할 수 있었다.[32]

한편으로는 그가 죽기전 제작한 피렌체 대성당의 피에타에서도 약간의 그의 성향을 확인 할 수 있는데, 이 피에타에서 예수를 안고 있는 사람은 마리아가 아닌 그의 얼굴을 새겨넣은 니고데모이다. 니고데모는 밤에만 예수를 찾은 바리세인인데, 자신의 사상을 떳떳이 밝히지 못하는 미켈란젤로 자신을 형상화 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10. 기타

  • 1530년 카를 5세의 군대에 피렌체가 침공당했을 때(가비나라 전투)에는 방위 대책 위원 중 한 명으로 뽑혀 성벽 건축을 맡기도 했다.[33] 간혹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약간 황당한 성벽을 이 때와 연결시켜 그가 방위 대책 위원으로 훌륭하진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성벽은 다른 때에 설계한 성벽이다. 오히려 임기응변으로 양가죽을 이어만든 천을 이용해 대포 공격을 막는 등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기발한 방위대책 위원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그가 몸담은 피렌체는 결국 졌다. 그나마 제국군을 상대로 7일씩이나 버틴 것에 의의를 둬야 할 듯

  • 그는 당시 유럽에서 상당한 추남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생긴 거는 아니다. 그의 외모의 가장 큰 특징은 크게 비뚤어진 코인데, 어린 시절 공방 제자 시절에 다른 공방학생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했다가 원펀치를 안 면에 얻어맞고(…) 코가 부러져 이렇게 되었다. 그 뒤로 미켈란젤로는 남을 까는것에 대해 많이 신중해졌다고 한다. 물론 옛날에 비해서 말이다. 예술가 생활 중반기 쯤에 오면 미켈란젤로의 예술가로서의 지위가 자기 깐다고 죽빵을 날릴 수 있는 위치의 인물은 절대 아니었기에 다시 독설이 독해지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조금 유해진 경향이 있다.

  • 미켈란젤로의 또다른 유별난 행동은 자신의 스케치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 남아있는 스케치들도 확실하게 미켈란젤로 것인지 알수있는 것들은 매우 적다. 위작으로 판명난 것도 굉장히 많은 편. 정확히는 모든 작품에 스케치를 하기는 했지만, 작품이 끝나고 혹은 말년에 대부분 다 모아서 불태워버렸다. 미켈란젤로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상 보기에 별로 좋지 않았던가, 그런 흔적들 따위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듯싶다. 다빈치가 스케치북과 노트를 몇십권이나 남겨 놓은 것에 비해 대비된다.

  • 베네치아의 화가인 티치아노의 그림(다나에)을 보고 한마디 하기도 했다. "우아한 양식을 터득했고 생생한 기법을 구사하지만 데생의 기본을 배우지 않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훈련이 부족한 것 같다. 만일 그 단점만 보완한다면 완벽한 화가가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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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참고로 이중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는 모두 교황을 위해서 일하면서 명성을 드높였다. 다빈치만은 그 깐깐한 성격으로 너무 유명해 아예 교황이 부르지도 않았다고 한다. 사실 교황 입장에서 미켈란젤로도 썩 고분고분한 피고용인은 아니었다. 라파엘로를 뺀 나머지 두 명의 성격은 꼬장꼬장하기로 드높았다.(미켈란젤로를 영입한 것도 "라파엘로는 한다는데?"라는 말로 미켈란젤로를 도발했기 때문.) 실제로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다가 힘들다고 여러번 도망가서 상당히 애먹었다고 한다. 성격이 너무 더러워서 조수도 없었고, 거의 혼자 작업하다시피 하니까. 바티칸 시국 입구에는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조각상이 서 있다. 한번 눈여겨 볼 것.
  • [2] 미켈란젤로 뿐만이 아니라 이 당시 모든 예술가들이 워낙에 정신 나간 괴물들이었기에, 위상은 굉장히 높아졌다. 미켈란젤로는 살아있을 때 '신'이라고 불릴 지경이었고, 다빈치는 예술가로서는 죽을 때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직접 와서 지켜봐줄 정도였다.
  • [3] 사실 이 같은 경향은 미켈란젤로만의 태도라고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미술에서 여성 누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오래되지 않았으며, '육체미'와 같은 표현들은 어디까지나 남자들에게 적용 되는 것이었다.
  • [4] 그의 아버지는 굉장히 개차반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심지어 미켈란젤로가 자기 아버지를 절도죄로 직접 고소한 적이 있다!
  • [5] 확실치 않은 정보지만, 이 성모의 얼굴이 미켈란젤로 어머니의 얼굴이라는 말이 있다.
  • [6]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친구가 장난삼아 흙에 파묻었다가 꺼내가지고 어떤 추기경에게 그리스 시대의 고전조각이라고 사기쳐 팔아치웠었다. 추기경은 자기가 사기당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고대 조각상에는 없는 인물의 생기와 생생한 표정 변화가 있어 깨달았다고 한다. 물론 고대 조각상의 얼굴 표정이 한결같이 무표정하다는 편견은 이후 발견된 '라오콘의 군상'이 발견된 이후 깨지게 되었지만- 두 가지 일을 가장 먼저 한다. 하나는 이 사기꾼을 잡아 족치는 것과 두 번째는 이걸 조각한 예술가를 찾아내는 것.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를 가장 맨처음으로 미술계에 발들이게 해줬다.
  • [7] 저런 추측이 별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의 사이는 안 좋았고 브라만테의 성격 역시 소인배스럽고 음흉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라만테 역시 괴수급 건축가였으니 재능은 참 얄궂게 주어지는 듯.
  • [8] 정황을 첨언하자면, 당시 브라만테는 시스타나 소성당 개축하는 일을 맡았었는데, 그만 천장이 쩍 하니 갈라지고 만다. 그 결과 대충 은하수 그림으로 가려놓고 외부벽에 축대를 대 건물이 무너지는 것은 막았지만, 교황의 분노를 산건 당연지사. 이를 떠넘기기 위해 미켈란젤로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회화를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조각가로서 이름을 날렸었다. 그래서 대충 미켈란젤로에게 덮어씌워 그가 잘 처리해도 좋고, 만약 잘 처리하지 못해도 죽는건 미켈란젤로일가 될테니.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를 싫어한 이유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향 출신에 천재로 이름 높았던 라파엘로를 밀어주기 위해서 라고도 한다. 다만, 브라만테가 라파엘로를 단순히 동향 출신이라서 밀어준건만은 아니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당대 예술가들은 한 가지 분야가 아니라 여러 분야를 넘나들면서 활동했는데, 브라만테와 미켈란제로는 건축분야에서 라이벌이었다. 즉, 정적을 쳐내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는 것. 라파엘로도 건축가로서 활동했지만, 브라만테와는 연배가 40년이나 차이가 나고, 그에따라 자연스레 활동시기에도 차이가 났기 때문에 경쟁관계가 아니라 후계자로서 밀어줬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라파엘로는 브라만테 사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최종책임자가 된다. 결국엔 71세의 미켈란젤로가 맡게 되지만.
  • [9] 천장화를 그리기위해 설치한 사다리 같은 지지대. 한국 업계 용어로는 아시바.
  • [10] 그는 이 작품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몰래몰래 보면서 그의 스타일을 순식간에 흡수….
  • [11] 이것도 말도 안 되게, 무지막지하게 빠른 작업 속도다. 보통 화가들은 미켈란젤로가 한 구획으로 잡은 공간을 천장화가 아닌 벽화로 그리는 데에 1년에서 3년을 잡았다. 물론 미켈란젤로만 못한 퀄리티로.
  • [12] 제자 입장에서도 스승의 작품에 손대는 게 좋았을리는 없겠지만 볼테라는 최대한 원작을 보존하면서 나체를 적절히 가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볼테라에게는 현대까지도 기저귀 화가'라는 굴욕적인 별명이 따라다니고 있다.
  • [13]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가장 장수했다! 여담으로 다빈치가 왕의 품에서 죽고, 미켈란젤로도 편히 그냥 나이 들어서 돌아가신 것인데, 라파엘로만은 죽음이 가장 지저분했다. 추운 날 여자랑 검열삭제를 너무 격렬히 하다 독감에 걸린 게 화근이 되어 사망. 그때 그의 나이가 37세에 불과했으니 더더욱 안습이다.
  • [14] 거기에 그는 이 과정에서 전임 설계자 상갈로 휘하의 사람들을 대거 잘라 버렸는데, 미켈란젤로와 상갈로는 생전에 사이가 절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브라만테에게 대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상갈로가 사망하기 이전에 이미 상갈로의 설계도를 보고 '구려.' 라고 평한 탓에 사이가 벌어졌다고.
  • [15] 로마 론다니니 궁에 있었기 때문에 '론다니니의 피에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는 밀라노 스포르체스코 성에 소장.
  • [16] 정확히 말하면 미켈란젤로 동생의 후손인데, 프랑스로 건너가서 프랑스 혁명에도 가담한 사상가였다.
  • [17] 그 외에도 캄피돌리오 광장과 같은 여러 건축물들을 설계했다. 또 다른 뛰어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와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미켈란젤로도 그의 재능은 인정했다. 다만 그 특유의 강마에적인 까임의 대상에 브라만테도 들어갔기에 문제였다. 당연히 브라만테는 열폭. 브라만테와 사이가 안 좋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다. 브라만테가 건축을 하며 이익을 남기기 위해 재료를 빼돌렸고 미켈란젤로가 이를 지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확실한 것은 둘 다 성격은 별로였다는 것.
  • [18] 그러나 아름답진 않고, 남성적인 면이 강했던 귀족 과부였다고 한다. 둘의 관계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관계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닐정도로 폐인이 됐다고 적혀 있다.
  • [19] 그는 생전에 이것들을 친구들에게만 낭송하거나 혼자서 재미로 하는 정도로 했었다. 후에 그의 조카, 작은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인물이 이 시들을 모아서 시집으로 출판한다.
  • [20] 다 빈치는 자신이 개발해서 칠한 니스의 성분 문제로 거듭되는 실패에, 미켈란젤로는 특유의 변덕스러움과 교황의 부름에 의해 끌려나갔다. 그나마 남은 흔적들조차 전란 중에 사라져버린다. 다만 레오나르도의 작품의 경우엔 라파엘로가 모사한 스케치가 남아있다. 그리고 2012년에 들어와 베키오 궁전에서 다 빈치가 그렸던 '앙기아리 전투'의 흔적이 발견되어 고고학계를 진동시켰다.
  • [21] 미켈란젤로의 조각 사랑은 말년에 최후의 심판을 하기 전까지 계속 된 듯 싶다. 그의 이런 성격은 너무나 유명했기에,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화를 강요한 교황에게 얼마나 큰 반감을 가졌을지 상상이 간다. 그래도 말년에 그는 조각과 회화를 서로 비교하며 우위를 가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 [22] 다빈치는 현대 정신과의 ADHD 진단 기준에 전부 들어맞는다고 한다….
  • [23] 밀라노의 영주 스포르차를 지칭한다.
  • [24] 라파엘로는 매우 사교적인 성격으로 유명했고, 미켈란젤로는 그 정반대로서 유명했다.
  • [25] 비슷한 일화는 다빈치보다도 선배격 예술가인 도나텔로도 가지고 있다. 스폰서였던 코지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의 중개로 의뢰를 받아 청동상을 만들었는데 의뢰인이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자 '너 따위의 의뢰를 받느니 콩이나 파는 게 낫겠다'고 말하면서 청동상을 내던져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의뢰인도 후회하고 코지모도 다시 만들어달라고 권했지만 도나텔로는 듣지도 않았다나.
  • [26] "미켈란젤로 미술의 비밀"이란 책에서 이걸 매우 자세히 설명하고있다, 그림 화질도 뛰어나고, 소소하고 재미난 이야기도 간간히 들어있어 미켈란젤로를 알고 싶은 위키페어리들에게 추천한다.
  • [27] 물론 당시 사회가 해부학을 금기하기는 했지만,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같은 경우는 허락받으면 연구용으로 정식기증을 받아 해부할 수도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더 빠르고 편하게 어둠의 경로로 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중죄처벌을 받는 경우도 빈번했다. 여담이지만, 미켈란젤로도 이 시체 해부 때문에 재판에 회부된 적이 있다! 어떤 젊은 남자 시체를 찾아서 해부했는데, 알고보니 유력한 귀족 자제의 시체였던 것. 당연히 그 집안은 발칵 뒤집혀서 난리가 났고, 미켈란젤로에게도 이 불똥이 튄다.
  • [28] 길쭉한 당나귀 귀에, 거대한 뱀이 그의 몸을 휘감은 것으로 그렸다. 자세히 보면 그 뱀이 미노스의 성기를 물고 있다!
  • [29]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분명 어느 정도 기쁜 마음으로 이 일에 임했다. 원래 벽에 있던 예술가의 프레스코 벽화를 구식이라고 늘 욕해왔던 그이기에, 이걸 대치하고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건 큰 기쁨을 주었을 것이다.
  • [30] 바오로 3세는 해당 항목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듯이, 누나가 알렉산데르 6세의 애첩이어서 그 빽으로 추기경이 된 사람이었고 교황위에 오른 후에는 카톨릭의 보수반동화에 앞장선 사람이었다.
  • [31] 그가 죽기 전 대부분의 문서를 태워버린 까닭에 카라파의 추종자들의 입수한 편지 중에 있었다.
  • [32] 이 속임수는 이탈리아 사학자가 자세히 조사해보기 전까지 400년 동안 통했다.
  • [33] 우습게도 이 피렌체를 침공한 카를 5세와 교황은 한 편이었다. 교황은 사코 디 로마에서 로마를 털린 이후 결국 자존심을 굽히고 카를 5세와 화해해 같은 편을 먹었다. 한 마디로 이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의 고용주를 배반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에서 피렌체가 패망하고 카를 5세가 승리해버렸기에 사형당할 수도 있었지만, 교황이 앞장서서 미켈란젤로를 그냥 용서해주고, 다시 일하라고 독려한다. 다만 이 교황도 나름대로 뒤끝은 있던지라, 과거 로마를 털었던 카를 5세에게 여전히 앙금이 있어서 그 분노를 담아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로 하는데 그 적임을 다름아닌 미켈란젤로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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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1-26 20: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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