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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고르바초프

< 1987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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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 코라손 아키노[1]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8 - 위기에 처한 지구

< 1989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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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 위기에 처한 지구 미하일 고르바초프 1990 -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 1990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ɔ)

Photograph: JonathunderMedal: Erik Lindberg (1873-1966)

from
1989 - 달라이 라마 미하일 고르바초프 1991 - 아웅 산 수 지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어린시절 및 출세가도
2.2. 집권
2.3. 개혁정책
2.4. 개혁의 좌절과 소련의 해체
2.4.1. 문제점
2.4.2. 소련의 해체
3. 지도자로서의 평가
4. 개인적 특징
5. 이것저것


소련 공산당 서기장
콘스탄틴 체르넨코 (1984.2~1985.3) 미하일 고르바초프(1985.03~1990.03) 소련 해체

소련 공산당 서기장 1985년 3월 11일 ~ 1990년 3월
소련 대통령 1990년 3월 ~ 1991년 8월 (쿠데타로 정지)
1991년 8월 ~ 12월 25일


(ɔ) White House Photo Office from
1987년 2014년의 모습. 늙기도 늙으셨지만 더 후덕해지셨다(...)
하지만 이마에 그려진 한반도는 여전하다.

1. 개요

노어
카자흐어
타지크어
야쿠트어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타타르어 Михаил Сергей улы Горбачёв
벨라루스어 Міхаіл Сяргеевіч Гарбачоў
에스토니아어 Mihhail Sergejevitš Gorbatšov
오세트어 Михаил Сергейы фырт Горбачёв
우크라이나어 Миха́йло Сергі́йович Горбачо́в
아르메니아어 Միխաիլ Սերգեևիչ Գորբաչով
우즈베크어 Mixail Sergeyevich Gorbachov
아제르바이잔어 Mixail Sergeyeviç Qorbaçov
리투아니아어 Michailas Sergejevičius Gorbačiovas
영어 Mikhail Sergeyevich Gorbachev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1931년 3월 2일 ~


"농업 상황이 처참한 지경입니다. 1917년부터 말이지요."[2]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처음이자 마지막 대통령. 소련이 붕괴한 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당선되지 못했다.

인류 역사상 자국민한텐 엄청난 비난 세례를 받으면서 정작 자신의 출생 지역과 반대 지역인 서구 지역에서 찬양 받는 몇 안되는 위인

2. 생애

2.1. 어린시절 및 출세가도

캅카스 근처의 스타브로폴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러시아에 속해 있지만 성격상 여러 인종이 모여 살던 곳이었으며, 그의 외가는 코사크인과 러시아인의 혼혈 집안이었다. 공산국가에서 중요시되는 출신성분은 농민으로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집단농장에서 일을 하는 농부였고 그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도와 콤바인을 모는 등 농장에서 일을 하였다. 이렇게 일을 열심히 해서 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도 열심히 했고, 공부도 잘한데다가 출신성분도 우수했기 때문에 최고명문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할 수 있었고, 1955년 법학 학위를 받는다. 재학시절 소련공산당에 가입했고, 이후 고향인 스타브로폴에서 관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진출했고, 중앙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아 안드로포프 같은 사람들 눈에 띄어 여러 모로 비호를 받으며 초고속 출세를 했다. 사실 고르바초프는 당대의 러시아 당원치곤 술을 멀리하고 아첨을 할 줄 몰랐다.[3] 이점이 당대 소련에 많았던 술고래 관료들을 몹시 한심하게 생각한 안드로포프에겐 오히려 플러스로 작용했고, 하루에 10시간 정도의 일은 전혀 불평 없이 해내던 근면한 근무 자세로 이와 같은 단점을 커버하고 있었다.

1980년대에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최연소 정치국원이었으며, 브레즈네프 이후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각각 고령으로 인해 얼마 못 가 사망하자 정치적 안정을 위해 상당 기간 집권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했던 소련 공산당 내에서 가장 젊은 그가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에 그는 기대를 한몸에 모았다.

2.2. 집권

앞서 보듯 그가 서기장이 되기 전에 소련에서는 세 명의 서기장이 1년마다 한 명씩 노환으로 사망 하는 혼란기에 접어들어 있었는데, 때문에 당시 서기장 후보 중 가장 젊었던 그가 고작 54세의 나이로 서기장이 된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역사상 최초러시아 혁명 이후에 태어난 서기장이다. 바꿔 말하면 처음부터 소련인이었다는 것.[4]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시작된 소련의 개혁/개방 운동이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체제에 들어서 정체되다가 그의 시대에 다시 활성화되고 정점을 맞은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2.3. 개혁정책

소련공산당 정치국 농업식량 담당 서기로 있다가 1985년에 당 서기장이 되었다.
취임하면서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면서 당시 침체에 빠져 있던 소련에 대대적인 변화를 예고하였다. 그야말로 임기 매년를 뉴스와 역사의 소용돌이에 빠트렸던 인물이다. 타임지 선정에서도 볼 수 있듯이.

대외적으로는 사상 최초로 서방세계와의 군비 축소와 평화 무드를 만드는 업적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며, 무엇보다도 냉전을 종식시켰다.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던 아프가니스탄에서 1989년 철군했다.[5] 1989년 5월에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하여 덩샤오핑을 만나 1960년대 수정주의 논쟁 이후 격렬하게 대립하던 중국과 화해했다.

1989년에는 브레즈네프 독트린[6]을 폐기하고 동유럽 공산주의권 국가의 변화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10월 27일), 이는 곧바로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 등으로 이어지면서 대다수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같은 해 몰타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조지 부시와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냉전의 공식적인 종결을 선언하였다. 한마디로 2차대전 전후 수십 년간 이어오던 공포의 시대에서 평화의 시대로의 물꼬를 튼 인물. 이러한 업적으로 서방세계로부터 이 사람이 확실히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결국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2.4. 개혁의 좌절과 소련의 해체


2.4.1. 문제점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개혁에는 아주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물론 개혁이 필요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개혁안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사회 및 경제가 안정화될 시간이 없었던 게 문제였다.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안을 추진한 덩샤오핑의 개혁이 성공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특히 내부적인 개혁의 실패가 가장 큰 문제였는데,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계획경제와 과도한 국방비 지출에 따른 경제 침체를 탈피하고자 급진적인 시장경제 도입과 정치체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1990년 공산당 일당독재를 폐기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여 다당제와 의회 제도,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그러나 전면적 시장경제 도입은 침체에 있던 경제를 오히려 더욱더 으로 몰아갔다. 수십 년간 공산당 지시로 결정되던 상품가격을 갑자기 수요-공급에 따른 시장자율 가격으로 대체하니 대혼란이 닥치면서 모든 유통 시스템이 붕괴해버린 것.[7]

여기에 급속히 진행 된 정치 개혁으로 군부와 관료 등 기득권층들이 대거 반발하면서 사실상 이들을 컨트룰 할 힘을 잃게 되고, 더욱이 강압적인 통치체제 하에 잠재되어 있던 사회 각 분야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면서 말 그대로 혼돈의 카오스가 벌어졌다. 또한 군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것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글라스노스트는 언론의 자유를 통해 기존 소련 체제 내부의 문제점들을 좀더 투명하게 드러내서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오히려 언론의 자유를 통해 억눌려있던 민족주의적 열정이 터져나와서 소련체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특히 우크라이나 같이 러시아의 역사와 깊은 연관관계를 맺어왔던 나라에서도 독립열기가 치솟은 것은 소련 지도층을 경악시켰다.

2.4.2. 소련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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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걸 조금 열어주...)

결국 1991년소련 보수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미 민심이 다 달아난 상황에서 이들의 거사는 별 의미가 없었다. 러시아 SFSR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보리스 옐친이 주도하는 급진 개혁파 세력의 반격으로 쿠데타는 실패했고 이후 고르바초프는 소련 공산당 해체 및 민주 국가로의 소련 개헌이라는 마지막 연방 유지 방안을 제시하나 각 공화국들의 연이은 독립 선언을 막는 데 실패함으로써 결국 1991년 12월 소련은 해체된다.

이후 잠시 블라디미르 푸틴이 당선된 2000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도 나갔으나 지지율이 1%도 안 나왔다... 2011년 선거를 겨냥하여 2008년 9월에 레베데프와 함께 중도 성향의 러시아 민주당 창당을 발표하면서 12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는데, 그가 맡은 건 당 고문역이라 실질적인 힘은 그리 크지 않았다.

고르바초프가 일생 동안 겪은 위상 변화를 그의 이름이 점점 짧아지는 것으로 그려낸 만평도 있다.

집권 초기(1985년)엔 "고르바초프!"
집권 중기(1988년)엔 "고르비!"[8]
하지만 최후(1991년)엔 "고!"(GO! 꺼져!)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사실 서방 세계에선 냉전의 종결자, 평화민주주의의 사도 등 대단히 높게 평가해서 노벨 평화상까지 주었지만, 정작 러시아 입장에서는 강대한 조국 소련을 미국에 갖다바친 천하의 개쌍놈일 뿐이다. 실제로 고르바초프가 덩샤오핑과 달리 무리한 개혁 정책을 강행함으로써 소련이 빠르게 망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라 변명의 여지도 별로 없다.

소련 국민들이 기나긴 줄로 상징되는 생필품 부족과 KGB의 감시 속에 살긴 했지만 교육, 의료, 주택 등 기본적인 삶의 질은 보장되었고 [9], 소련은 미국과 함께 세계 최고의 군대, 과학 기술, 스포츠, 예술을 보유한 초강대국이었기에 소련인들은 국가에 대해 충분히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 해체 이후 모든 게 산산조각나면서 어느 순간 러시아는 3류 국가가 되고,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조차 힘들 정도로 사회 시스템이 붕괴해버린 것이었다. 군대의 경우, 서방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던 소련군이 건재할 당시에는 병력이 500만[10] 이상이었고 실전 투입 가능한 장비도 1만~2만이 넘을 정도였고 특히 규모로는 미군을 압도할 정도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의 러시아군은 병력수가 120만으로 쪼그라들고 군용물자도 줄고 그나마도 노후화되어 고장난게 태반이다. 러시아를 포함한 일부 국가는 독립 이후 그 보다 더한독재자가 집권하기도 하고. 물론 이 모든 게 고르바초프 혼자만의 잘못은 당연히 아니고 소련 체제의 본질적인 문제가 컸지만 어쨌든 중국은 온건하고 점진적인 개혁안을 추진한 덩샤오핑의 개혁이 성공했고 기득권층의 반발을 사서 이를 통제할 힘을 잃게 된것도 분명한 사실이라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이젠 사람들이 재평가해 주겠지' 하고 나선 2000년 대선에서 지지율이 1%도 안 나온 걸 보면(…)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사람들이 김영삼 대통령에 대해 느낀 감정을 생각해 보자. 게다가 이 시기의 한국은 원래부터 그리 강한 나라가 아니었으며 몇 년 마이너스를 찍은 뒤에는 다시 성장을 재개했지만(현재의 쇠퇴는 외환위기보다는 국제 경제 위기와 고령화 탓이 크다) 당시 소련은 미국과 쌍벽을 이루던 초강대국이었다. 그런 나라가 몇 년 만에 안습이 되었으니…

세계적 공로(?)가 하나 더 있다면 집권 중이던 1986년에 터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북극해안의 핵 폐기물 문제를 세계에 공개한 점이다. 고르비 자신도 이 일을 통해 개혁 추진 속도를 더 낼 수가 있었다.[11] 체르노빌 사고 처리 과정에서 경직되고 비효율적인 관료주의 체제의 한계를 절감해서 급진적인 개혁을 밀어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그의 인기에 타격을 준 일이 바로 보드카 판매와 소비를 규제한 정책이다. 이 정책으로 알콜 중독에 시달리던 많은 러시아인들의 평균 수명을 한시적이나마 연장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그의 정치적 인기는 줄어버렸다. 게다가 술은 규제한다고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며 러시아인들 스스로 정신 차려야만 해결 가능한 문제니 결국 고르바초프가 밀려난 뒤 알콜 중독은 더욱 심해진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다. 반푸틴 진영을 지지하며 푸틴과 대립각을 여러번 세웠다. 고르바초프는 푸틴이 독재자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 당연히 러시아의 집권 여당통합 러시아당과의 사이도 좋지 않다. 통합 러시아당 국회의원들이 소련 붕괴의 책임을 물어 고르바초프를 고발 한 적도 있다. 다만 2014년 부터 갑자기 푸틴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3. 지도자로서의 평가


그 사람 똑똑해 보이는데, 직접 만나 이야기해보니 멍청하더군...- 덩샤오핑 - [12]

한편 일부는 그가 미국에서 보낸 첩자거나 희대의 무능아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중국공산당처럼 개발독재를 펼치지 않고, 신자유주의로 무제한 개방을 펼쳤기 때문에 소련이 무너졌다는 것. 왠지 설득력 있다?[13] 농담이 아니라 그는 2000년대 중국 공산당이 개최한 회의에 초청되어 자신이 너무 정치개혁에 성급했다고 인정하고, 중국공산당의 길이자 유리 안드로포프의 길이 더 바람직한 길같다며 뒤늦게 후회하기도 했다. 중국 관영 언론 인터뷰에서는 중국에 대해 ‘민주화’를 용납치 말라는 충고와 더불어 소련 해체 과정에서 공산당이 영도력을 잃었던 부분에 대한 후회를 밝혔다.

그는 “내가 중국의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충고는 ‘민주화’와 관련된 어떤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라며 “(민주화를 용납하면)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소련말기는 경제사정이 상당히 안좋기는 했지만, 덩샤오핑이 정권을 잡은 문화대혁명 직후보다야 훨 사정이 나았으며, 고르바초프나 소련 공산당이 잘 수습했다면, 민주제도는 몰라도 현재의 중국식의 체제를 이뤄 국민의 경제생활을 훨씬 윤택하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개혁은 둘다 박살냈고, 현재는 민주제도를 가장하고 독재를 휘두르는 푸틴의 기형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어 냈다.

덩샤오핑의 경우는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과 같은 급진책을 남발다가 국가를 재앙에 빠뜨리는 것을 자신이 직접 목격했기 때문인지, 어떤 정책이라도 경험적으로 검증하며 조심스럽게 접근했고,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어 중국을 재건할 수 있었다. 이런 느린 접근도 덩샤오핑이 워낙 혁명가나 행정가로서 명망이 높았기 떄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고르바초프는 덩샤오핑 같은 권위는 가지고 있지 못했기 떄문에 이런 방법을 사용해도 결국 보수파와 개혁파의 갈등속에 흐루쇼프처럼 실각했을 가능성이 많다.[14] 중국이나 소련이나 사회주의 경제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지속가능이 불가능했고, 양쪽 모두 개혁과정에서 반발은 엄청났으나, 중국은 덩샤오핑이 가졌던 엄청난 권위로 반발을 억누르면서 조심스럽게 당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경제개혁을 추진해서 성공을 거두었고, 소련은 경제개혁 초기의 반발을 해결하지 못해서, 조급하게 정치개혁까지 손댔다가 초가삼간을 다 태웠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동유럽에서도 냉전시절의 동유럽 공산정권들은 소련의 위성정권으로서 규탄되고 있지만, 그 와중에서도 조심스럽게 경제개혁을 추진해서 시민생활을 향상시킨 폴란드의 고무우카나 헝가리의 카다르 야노시같은 지도자들은 민주화 이후 점점 평가가 높아지고 있다. 고르바초프도 덩샤오핑, 위성국들의 예를 귀감으로 삼아 경제의 자유도는 높이는 대신 정치개혁의 속도를 조절했다면, 소련을 유지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어찌되었든지간에 러시아는 소련 해체후 10여년간 헤메다가 2000년대 중반에야 엄청나게 오른 유가 덕분에 어느정도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자원에 의존하는 경제체제는 자원가격에 민감한 법이라 2014년 유가가 급락하자 러시아는 다시 혼란의 도가니로 빠지고 있다. 결국 이것도 알고보면 고르바초프의 개혁 실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4. 개인적 특징

김일성크고 아름다운 혹으로 유명하듯 이분도 머리에 있는 흉터로 좀 유명하다. 만화 같은 그림에서 이분을 묘사하면 열의 아홉은 저 흉터를 빼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시사 만화에선 '반점이' 라고 나오면서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묘사도 있었다. 그러나 서기장 취임 이전 사진에는 수정이 가해졌기 때문에 그의 반점이 없다.

5. 이것저것

  • 1997년에는 러시아가 경제위기를 맞았을 때 이를 돕기 위해 피자헛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다(피자헛 광고)[15]. 그리고 2007년에 그는 소외층 어린이를 돕기위해 루이비통 광고에 출연했다(기사). 은근히 폭풍간지다.

  • 여담으로 서구권의 어떤 바보들은 적극적인 유화 정책을 펼친 고르바초프조차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를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사람들은 그 근거로 고르바초프의 이마에 있는 붉은색 점이 용의 문양이고 성서에 나오는 짐승의 표식이라고 했다. 이런 논란이 계속되자 통계학자 로버트 페이드(Robert Faid)는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과연 적그리스도인지를 수학적으로 규명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온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적그리스도일 확률은 710,609,175,188,282,000 분의 1.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어쨌건 이 통계학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93년 이그노벨상을 수상했다.(수학 부문)

  • 어떤 이들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시점으로 다른 사람으로 바뀐거라는 음모론을 내놓기도 한다. 그때 전후로 머리의 반점 모양이 달라졌다고...근데 나라면 맨 처음에 그 반점부터 똑같게 만들었겠다 실제로 그때를 기점으로 고르바쵸프의 정책은 결과론적으로 미국에 도움이 도는 정책을 많이 내놓았기도 했다.

  • 한편, 이오시프 스탈린화성인과 싸운다는 정신나간 게임(…) <스탈린 VS 마샨>의 OST 중에는 러시아에 자유를 가져온 그를 찬양하는 헤비메탈 곡이 삽입되어 있기도 하다.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를 찾아보면 좀 짱이다(…).


19금
뮤직비디오 맨 마지막에 하늘에서 코카콜라와 함께 떨어지는 노란색덩어리는 트윙키라 불리는 일종의 크림빵인데 굉장히 달고 기름진걸로 유명하다. 한 번 단종된 적이 있었으나, 인수합병을 거쳐 다시 생산되기 시작했다.

  • 심슨가족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과 출연하여 개그를 하기도 했다.

  • 풀 메탈 패닉에서는 이 사람이 죽으면서 소련의 탈공산화가 실패하여 소련이 남아있게 된다는 냉전 지속 시나리오가 기본 설정으로써 나온다. 상당히 가능한 이야기다..

  • 스트리트 파이터 2 장기에프가 베가를 쓰러뜨리면 헬리콥터를 타고 내려와 공로를 치하하며, 고국으로 돌아간 뒤 수행원들과 함께 코삭 댄스를 춘다. 스트리트 파이터 제로 2의 엔딩에서도 나타난다. 이때는 장기에프가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린다.

  • 뿌요뿌요 시리즈로 유명했던 컴파일의 게임 중 '고르비의 파이프라인 대작전'이라는 작품이 있다. 당시 페레스트로이카로 주목을 받고있던 고르비를 주인공으로 일본에서 모스크바까지 파이프라인을 연결한다는 스토리의 낙하물 퍼즐 게임. MSX와 패미콤(토쿠마쇼텐 발매), FM-Towns로 발매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mcQ308E3Rs]

  • 태양계의 4행성이 상당히 커서 대기가 있으며, 푸른 별이라고 해서 미네르바라 불리는 화성에는 생명체가 문명을 이루고 산다는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The World of Difference》에서는 취임 후 9개월 만에 뇌졸중으로 사망해서 스탈린주의화 된 소련이 나온다. 극중 소련 우주비행사들의 대사로 봐서는 고르바초프의 사망은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설정. 독살당했나?

  • 이것은 좀비입니까?유클리우드 헬사이즈는 재채기를 할때 고르바초프라는 소리를 낸다

  • 위의 인물의 이름을 딴 보드카도 있다! 사실 이 인물과는 관계없이 Leontowitsch Gorbatschow라는 러시아의 귀족이
    러시아 혁명을 피해 외국으로 망명을 가서 1921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 것. 러시아산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베를린,
    독일산 보드카이다. 베를린에서는 마트나 24시간 매점 등에서 9유로 정도에 700ml 풀 보틀과 미니어처를 흔하게
    사먹을 수 있다.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마치 러시아에서 생산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실상은 독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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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필리핀의 피플파워 운동을 주도한 민주화운동가. 86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 [2] 체르넨코 정권 시기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과 회담장에서, 농업부 장관 역임 중 남겼던 말.
  • [3] 스타브로플 서기장 시절에 남들보다 매우 적극적으로 중앙에서 내려온 금주 조치를 실천한 까닭에 '광천수 서기'라는 별명마저 붙었을 정도였다.
  • [4] 사실 러시아의 인물들을 보면 소련 탄생과 종말을 다 볼 뻔한 사람이 좀 된다. 일반인 중에서는 진짜 소련보다 오래 산 사람도 꽤 많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한 나라의 역사. 이런 농담도 있다고 하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페트로그라드(1914~1924)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레닌그라드에서 죽는 줄 알았는데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되더라..."
  • [5]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러시아미국2001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제2의 베트남 전쟁이 될 거라고 미국에 경고했다. 당시엔 모두 무시했지만 지금 보면 정확한 판단이었다. 예상대로 미국은 아프간에서 삽질을 반복하다가 현재 빠져나오기 위해 탈레반과 교섭하고 있으며 미국 철수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구 북부동맹 출신 군벌 일부가 재무장을 시작했다.
  • [6] 사회주의권 전체의 이익이 개별국가의 주권보다 중요하므로 특정 국가가 사회주의 체제에서 이탈하거나 독자행동을 한다면, 무력 개입도 정당하다는 주장.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프라하의 봄을 바르샤바 조약군이 탱크로 깔아뭉개면서 브레즈네프 당시 서기장이 선언했다. 즉, 이는 동유럽 공산권이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가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독트린이다.
  • [7] 덧붙여 이 때부터 북한의 경제도 마이너스 성장기에 접어들며 지상지옥이 시작되었다.
  • [8] 그의 애칭이었다. "'고르비'라는 함성이 울리면 자유도 울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 [9]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보장되었으며, (신혼부부는 배정받는데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대부분의 시민은 국가소유의 임대주택에 세들어살며 월소득의 10% 이하의 임대료를 냈다. 고급 정부관료나 당간부와 같은 공산귀족들은 이보다는 훨씬 안락한 생활을 하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붕괴 이후의 불평등은 거기에 비교하는게 굴욕일 정도로 심각하다.
  • [10] 이 숫자는 지금의 미국군, 중국군, 인도군의 병력을 합친 것과 비슷한 숫자다.
  • [11] 훨씬 이전인 1957년 예카테린부르크 근처 첼랴빈스크-40에서 약 800㎢ 정도 면적의 땅에 7600㎥ 규모의 방사능 폐기물이 쏟아져 우랄 강이 삼도천으로 변했을 적에, 24개 마을을 불도저로 쓸어버리고 거주민 1만 명을 강제 이주시켰을 때는 정보 통제로 철저히 묻었다.
  • [12] 고르바초프를 만나고 나서 수행원들에게 저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사
  • [13] 물론 고르바초프도 1990년대 초반에 이르면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그가 통제권을 행사하기에는 모든 게 늦어 버렸다. 게다가 그 후계자인 옐친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고르바초프와 달리 끝까지 정신을 못 차렸다가 러시아를 말 그대로 말아먹는다.
  • [14] 당장 체르넨코 사망 직후의 정치국원들의 나이와 경력만 봐도 고르바초프가 큰 권위는 갖기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장관회의 의장 니콜라이 티호노프, 외무장관 안드레이 그로미코 등이 있다.
  • [15] 고르바초프가 피자헛에 등장하자 모든 사람이 고르비를 욕하다가 "그래도 저 양반 덕분에 피자헛 먹잖아" 라고 누가 말하면서 분위기 급반전, 모두 고르바초프에게 감사를 표한다는 훈훈한(!) 이야기. 그러면서 깨알같은 셀프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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