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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작전

last modified: 2015-09-06 23:32:54 by Contributors


1941년 6월 25일. 독일 주간뉴스

Contents

1. 개요
2. 배경
3. 준비
3.1. 독일군
3.2. 소련군
4. 전개
5. 결과

1. 개요

Unternehmen Barbarossa.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독소전쟁의 개시를 알린 작전. 단일작전으로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인력을 동원한 군사작전이었다.

2. 배경

소련나치 독일은 대전 초에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나중에는 폴란드를 서로 사이좋게 나눠먹었다. 하지만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는 관계는 결국 언젠가 무너질 운명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이 살아 있으면 독일 제국은 무너질 것이라고 여겼고 물론 나중에 그렇게 되긴 했지만 슬라브족을 유럽 러시아에서 몰아내고 그 곳을 독일 민족의 생활 공간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침공이 끝나고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마치면서 다음 목표를 소련으로 돌렸다.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 본토가 불타오르자 히틀러는 자신감이 넘쳐나 참모들이 "[[슐리펜 계획|아직 영국이 항복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소련 때리면 전선을 두개로 만드는 미친 짓]."이라며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공격을 감행한다. 헌데 이미 서부에서 육군전선은 소멸해있었고 항공전만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딱히 양면전선이라고 보기 힘들기도 하다.[1][2]

당시 히틀러의 생각은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도 군수시설에 피해를 입었으니 한동한은 리타이어 → 피해를 복구하는 동안 영국놈들은 소련이랑 미국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음 → 근데 우리가 소련에게 선전포고해서 영국에게 신경 못 쓰게 만들어놓음 → 동맹국 일본이 우릴 도와서 소련을 공격여기서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한다[3] → 그러면 소련군 병력이 한쪽으로 쏠리는 일은 없을 것 → 적당한 시점에 조약맺고 미국의 귀를 막아버리면[4] → 동맹국을 잃은 영국이 울고불고 하겠지 → PROFIT! 그런데 일본은 소련이 아닌 미국을 공격했다. 망했어요

물론 소련도 히틀러가 공격할지 모르고 당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전 세계에 산재한 소련 간첩망은 독일이 언젠가 거하게 소련을 공격할거니 대비해야 한다는 정보를 계속 보냈다. 독일에는 히틀러 집권 전에 공산당원이 수백만이 있었고, 그 위성국들과 동맹국 내에도 상당수의 동조자들이 있었다. 독일 정부 내에도 신분을 위장한 간첩망이 엄연히 존재했다. 이들은 1년 전부터 계속 소련에 독일의 전쟁준비 징후를 알려왔다. 특히 일본 제국에서 신문기자로 위장하고 있었던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본 주재 독일무관으로부터 들은 침공 몇개월 전에 6월 22일이 개전일이라는 것까지 알려왔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를 씹어버렸다. 다만 티보셴코 국방장관이나 주코프 총참모장은 계속 스탈린에게 경계령을 내려줄 것을 상신했으나, 스탈린은 이것이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계속 막았다.

스탈린은 설마 히틀러가 아무리 또라이라도 영국이 아직 버티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우릴 치는 미친 짓을 하겠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시했는데, 사실 상식적으로 보면 스탈린의 판단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에겐 불행히도 스탈린은 히틀러가 역사에서 다시는 보기 힘든 또라이였다는걸 몰랐다.

3. 준비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동부전선
독일소련비율
사단수 1661901:1.1
총병력 4,306,8003,289,8511.3:1
각종포 42,60159,7871:1.4
전차 및 자주포 4,17115,6871:3.8
전투기 4,38911,5371:2.6

보다시피 병력 수는 독일군이 많고, 장비는 소련군이 많다. 독일군은 2년간의 실전경험으로 장비 수는 밀리지만, 그 운용법은 이미 만렙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소련군의 장비는 독일군에 비해 그다지 뒤떨어지지는 않았으나, 기습을 당한데다가 실전경험이 없었고, 경험많은 장교들이 숙청되어서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3.1. 독일군

독일군 주요 지휘관들인 할더, 구데리안, 룬트슈테트 등등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양면전쟁의 참혹한 기억 때문에 이 침공에 회의적이었지만, 히틀러의 의지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리하여 불만이 있지만 대부분 히틀러의 명령에 따랐다. 또한 군부 내 회의론자들도 잇따른 히틀러의 도박들이 연이어 운 좋게 성공했기 때문에 은근히 자신감이 붙어있던 상황이였다.

작전목표를 둘러싸고 독일군 수뇌부 사이에 의견충돌이 있었는데, 할더 총참모장을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는 순식간에 정치적 수도이자 교통의 중심인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히틀러는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석유가 풍부한 캅카스 지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군부와 히틀러는 타협하여 침공군을 북부, 중앙, 남부 집단군 세갈래로 구성하기로 했다.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중앙집단군은 모스크바를, 남부 집단군은 키예프를 목표로 구성되었다.[5] 그리고 독일군과 함께 루마니아군, 헝가리군, 이탈리아군, 및 핀란드군이 참전하기로 하면서 총 병력은 390만명에, 4600여대의 전차, 4389여대의 항공기, 46000여문의 각종 포가 동원되었다.

독일군의 주요 전법은 'Keil und Kessel'이라고 불리는 양익포위였다. 소련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일단 적의 주력을 패퇴시키더라도 후방으로 도주하면 섬멸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동원가능한 병력이 많은 소련군이 시간이 갈수록 유리해지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보병이 먼저 선제공격을 가해 정면의 적을 고정시킨 후, 기갑부대가 양익을 돌파하여 적의 주력을 포위하는 전법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는 이렇게 포위되면 대체로 섬멸전을 벌일 필요도 없이 수십만의 대규모 항복이 나왔으나, 포로에 대한 잔혹행위가 소련군에 알려지자[6] 이후에는 포위된 소련군도 격렬한 저항을 하면서 독일군의 예비병력을 소모시켰다.

  • 육군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 원수
  • 총참모장: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

  • 북부집단군(동프로이센 주둔), 29개 사단, 총사령관 헬름 폰 레프 원수
    • 16군 (른스트 부쉬)
    • 4 전차군 (에리히 회프너)
    • 18군 (게오르그 폰 퀴흘러)
    • 1 항공함대 (알프레드 켈러)

  • 중앙집단군(폴란드 주둔), 49개 사단, 총사령관 페도르 폰 보크 원수
  • 남부집단군(남폴란드, 루마니아 주둔), 41개 사단,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 17군 (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 슬로바키아 의용군 (페르디난트 카틀로스)
    • 헝가리 군단 (벨라 미클로시)
    • 1 전차군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11군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
    • 이탈리아 군단 (조반니 메세)
    • 6군 (발터 폰 라이헤나우)
    • 루마니아 3군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 루마니아 4군 (탄크레드 콘스탄티네스쿠)
    • 4 항공함대 (알렉산더 뢰어)

3.2. 소련군

소련군은 1938년에 벌어진 대숙청에서 사단급 이상의 단위부대에서 반이 넘는 군 지휘관들이 처형되는 큰 혼란을 겪었다.

최근 들어 대숙청에서 날아간 인물들 중에 상당수가 정치적으로 출세한 무능한 인간들 또는 현대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사라진 후, 전문적이고 현대적인 교육을 받았던 유능한 40대 지휘관들이 전면에 나설 기회를 제공해서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는 반론도 있다고 하지만 대숙청이 적어도 겨울전쟁과 독소전 초반까지 큰 혼란을 야기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대규모 회전에 대한 소련군의 실전경험은 적백내전 이후로 겨울전쟁까지 거의 없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았던 장성들은 있었으나,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 성격에다가 산악지형에서 치뤄진 보병간의 회전이었던만큼 여기서 쌓은 전훈이 대평원이었던 소련에 적용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작정하고 대규모로 전면전을 벌이는데는 교리, 즉 종심작전이론이라는 선진적인 교리가 투하체프스키 등의 선구적인 이론가들에 의해 확립되어 있었으나 이 이론을 개발한 이는 물론이고 스페인에서 그나마 실전경험을 쌓았던 인물들도 대숙청으로 상당후가 저승으로 갔다. 특히 만주에서 일본군과 싸워본 공군 참전자들이 숙청된 결과 소련 공군은 초기에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같이 기동전의 개념을 제안한 유능한 장성들까지 처형되었는데다가 이론까지 폐기되어서 나머지 사람들은 숙청될까봐 투하체프스키의 '투'자도 못 꺼냈다. 투하체프스키가 제시한 기동전은 독소전쟁 도중 소련에서 다시 부활하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대숙청이 도움이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도 납득이 안된다면 독소전쟁의 영웅인 게오르기 주코프도 대숙청 와중에 저승갈뻔 했다. 다행히 전공을 세워서 칼날을 피했지만.

지시없이 훈련했다고 장교나 장성이 저승가는 이런 미친 피바람 속에서 안 그래도 훈련부족인 소련군은 더욱 더 경직되어갔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군사교리 또한 답보상태였고 그 대가는 2900만명의 사망자라는 피의 대가로 치뤄졌다. 이중 600~800만이 개전 6개월만에 날려먹은 병력이다. 이 기간동안 전차전투기의 손실은 각각 2-3만대에 이를 정도의 엄청난 것이었다.[7] 현재 한국군의 10배 병력을 6개월만에 날려먹고도 소련이 결국 승리를 했으니 대륙의 기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이겨내는데 활약을 한 소위 40대 지휘관들도 전쟁 초기엔 감각이 없기는 마찬가지라서 주코프마저도 독소전쟁 초기엔 수십만명의 병력을 날려먹는 등. 소련군은 계속 얻어터지면서 독일군 교리를 학습하여 이를 극복해 나간 것이다. 훗날 소련군의 명장에 드는 로코소프스키, 코네프, 예료멘코 등도 개전 초기에는 실전경험 부족 때문에 계속 참패했고, 후퇴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원래 연대장이나 여단장급 인물들이 군단장이나 사단장을 맡고 있었으니... 다만 이 당시의 독일군은 2년간 계속 폴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영국, 유고, 그리스군 등등을 상대로 실전을 치뤄봐서 만렙에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군이 졸전을 벌였다기보다는 독일군이 워낙 잘 싸웠다고 보는게 더 맞는것 같다. 다시 말해 당시 독일군은 규모, 전술에 있어서 최강이었던 것이다.

군부에 대한 통제와 전쟁지휘만 본다면 독소전쟁에서 소련은 스탈린이 있어서 이긴게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이긴 것이다.[8]

초반의 대패 때문에 소련군이 전혀 준비를 안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소련은 1920년대부터 강력한 국방정책을 밀어붙였다. 특히 1930년대 성공한 공업화 때문에, 전투기 수, 잠수함 수, 전차 수는 1940년 당시 세계 1위였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현대적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를 운용법은 탁상머리 이론에 그치고 있었는데다가, 그나마 대숙청 같은 정치적 문제가 생겨 이론가들이 자주 숙청되었다. 그러다보니 계속 운용사상이 바뀌는 바람에 부대들은 해체와 재편을 반복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침략적인 의도를 내비치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군은 병력을 두배로 늘렸으나, 갑자기 몸집이 커지자 대숙청에서 기인한 부작용과 함께 장교 부족이라는 큰 문제가 벌어졌다. 상급장교도 부족했지만, 하급장교는 절망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대학생들에게 속성으로 몇주 교육을 시킨 다음에 바로 소위계급을 달아주는 식으로 장교를 양성하였다.

1938년에 끝난 스페인 내전에서의 전훈[9]으로 전차부대들을 모두 여단급 이하로 축소재편했다가, 1940년 독일군의 전격전의 대성공을 보고 다시 군단급으로 재편하기로 했다. 이 와중에서 독일군의 침략을 받았으니 결과는 뻔한 일. 공군에도 숙청의 올가미가 덮쳐서 유능한 지휘관 상당수가 "항공사고가 너무 잦다.[10] 이건 사보타지 아닌가"는 NKVD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결과적으로 공군도 몇년간 발전이 크게 지체되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소련군이 핀란드군을 상대로 졸전을 벌이다 겨우 승리한 1939-40년의 겨울전쟁 때의 교훈은 헛되지 않아서, 무능한 보로실로프가 물러나는 것 외에도 소련군의 이후 월동장비나 동계작전능력이 대폭 향상되었다. 후에 겨울에 발생한 모스크바 전투 때 겨울전쟁에서 붉은군대 병사의 피값으로 체득한 전훈들은 유용하게 사용되어 소련군은 동장군을 이용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가까스로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승진한 릴 메레츠코프알렉산드르 노비코프는 후에 소련군의 중추가 되었고, 보로실로프를 대신해 국방장관이 된 티모셴코는 군개혁을 조용히 이끌었다.

소련군의 문제는 1920년대부터 구축한 '스탈린 방어선'(소련-폴란드 국경)을 포기하고 1939년에 독소 불가침조약에 의해 새롭게 생긴 소련-독일 국경을 방어선에 전진배치되어 방어선을 새로 구축하는 도중이었다는 것이다. 1년만에 구축한 방어선이 10여년간 준비한 방어선보다 제대로 구축될 리가 없었으므로 소련군 부대는 거의 맨몸으로 독일군의 전차군을 막아내야만 했다. 거기다가 스탈린은 히틀러가 영국을 꺽기 전에는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11] 히틀러에게 침략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독일군의 월경 정찰활동마저도 무대응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독일군에 속속들이 노출된 방어진지 때문에 나중에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 국방장관 세묜 티모셴코 원수[12]
  • 총참모장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

  • 북부전선군(핀란드 접경 주둔), 총사령관 마르키안 포포프 중장
    • 14군(무르만스크에 사령부)
      • 제 14 소총병 사단[13]
      • 제 42 소총병 군단
        • 제 104 소총병 사단
        • 제 122 소총병 사단
      • 제 52 소총병 사단
      • 제 1 기갑 사단
      • 104 직속 포병연대
      • 제 23 무르만스크 요새화 군단
      • 제 1 혼합 공군 사단
      • 기타 소부대
    • 7군(수오야르비에 사령부)
      • 제 54 소총병 사단
      • 제 71 소총병 사단
      • 제 168 소총병 사단
      • 제 237 소총병 사단
      • 541 직속 곡사포병 연대
      • 제 26 소르타발라 요새화 군단
      • 제 55 혼합 공군 사단(페트로자봇스크 주둔)
        • 제 153 전투기 연대
        • 제 72 폭격기 연대
      • 기타 소부대
    • 23군(쿠사에 사령부)
      • 제 19 소총병 군단
        • 제 142 소총병 사단
        • 제 115 소총병 사단
      • 제 50 소총병 군단
        • 제 43 소총병 사단
        • 제 123 소총병 사단
      • 제 10 기갑 군단
        • 제 21 전차 사단
        • 제 24 전차 사단
        • 제 198 차량화소총병 사단
      • 101, 108, 519 직속 곡사포병 여단
      • 573 직속포병 여단
      • 제 27 븨보르크 요새화 군단
      • 제 28 켁스골름 요새화 군단
      • 제 5 혼합 공군사단
      • 기타 소부대
    • 그리고 여러 독립 소부대들

  • 북서전선군(발트해 연안 주둔) 34개 사단, 총사령관 표도르 쿠즈네초프 중장
    • 8군
      • 제 10 소총병 군단
        • 제 10 소총병 사단
        • 제 48 소총병 사단
      • 제 90 소총병 사단
      • 제 11 소총병 군단
        • 제 11 소총병 사단
        • 제 125 소총병 사단
      • 제 12 기갑 군단
        • 제 23 전차 사단
        • 제 28 전차 사단
        • 제 202 기계화 사단
      • 제 47 군단 포병 연대
      • 제 51 군단 포병 연대
      • 제 74 군단 포병 연대
      • 제 9 대전차포 여단
    • 11군
      • 제 16 소총병 군단
        • 제 5 소총병 사단
        • 제 33 소총병 사단
        • 제 188 소총병 사단
      • 제 29 소총병 군단
        • 제 179 소총병 사단
        • 제 184 소총병 사단
      • 제 3 기계화 군단
        • 제 2 전차 사단
        • 제 5 전차 사단
        • 제 84 차량화 사단
        • 제 15 오토바이 여단
        • 포병 여단
        • 공병 대대
    • 27군
      • 제 22 소총병 군단
      • 제 24 소총병 군단
      • 제 16 소총병 사단
      • 제 67 소총병 사단
      • 제 3 독립 소총병 여단
      • 2개 포병 연대
      • 2개 대전차 연대
    • 해군 북방함대, 발트함대 포함

  • 서부전선군(벨라루스 주둔) 45개 사단, 총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14]
    • 3군
      • 제 4 소총병 군단
        • 제 27 소총병 사단
        • 제 56 소총병 사단
        • 제 85 소총병 사단
      • 제 21 소총병 군단
        • 제 24 소총병 사단
      • 제 11 기계화 군단
        • 제 21 전차 사단
        • 제 33 전차 사단
        • 제 204 기계화 사단
    • 4군
      • 제 28 소총병 군단
        • 제 6 소총병 사단
        • 제 42 소총병 사단
      • 제 14 기계화 군단
      • 제 49 소총병 사단
      • 제 75 소총병 사단
      • 제 62 요새화 군단
    • 10군
      • 제 1 소총병 군단
        • 제 2 소총병 사단
        • 제 8 소총병 사단
      • 제 5 소총병 군단
        • 제 13 소총병 사단
        • 제 86 소총병 사단
        • 제 113 소총병 사단
      • 제 6 기병 군단
        • 제 6 기병 사단
        • 제 36 기병 사단
      • 제 6 기계화 군단
        • 제 4 전차 사단
        • 제 7 전차 사단
        • 제 29 기계화 사단
      • 제 13 기계화 사단

  • 남서전선군(우크라이나 주둔) 45개 사단, 총사령관 미하일 키르포노스 중장[15]
    • 5군
      • 제 15 소총병 군단
        • 제 45 소총병 사단
        • 제 62 소총병 사단
      • 제 27 소총병 군단
        • 제 87 소총병 사단
        • 제 125 소총병 사단
      • 제 22 기계화 군단
        • 제 19 전차 사단
        • 제 41 전차 사단
        • 제 215 기계화 사단
      • 2개 요새화 군단
      • 7개 포병 연대
      • 2개 NKVD 연대
      • 1개 공병 연대
    • 6군
    • 12군
    • 26군
    • 그외 여러 부대들

  • 남부전선군(흑해 연안 주둔) 26개사단, 총사령관 미하일 툴레예프 중장
    • 9군
    • 18군
    • 해군 흑해함대 포함

  • 예비전선군(중앙방면) 스탈린의 직접명령을 받는 부대
    • 16군
    • 19군
    • 20군
    • 21군
    • 22군
    • 24군

전쟁이 시작되자 7월에 이 조직은 개편되어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3개 집단군으로 재편된다. 이른바 "원수 VS 원수의 빅매치"

4. 전개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동맹군까지 합쳐 3개 집단군, 총 305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소련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만일을 대비해 국경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했지만, 그런 조치는 오히려 개전 초반에 소련군이 독일군에 기습에 큰 타격을 입고 반격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린다. 기술의 발전으로 전장 환경이 바뀌었으나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유능한 장교들이 전부 쓸려나간 게 특히 한 몫을 했다.

독일군은 3개 집단군으로 나뉘어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북부집단군은 시가전을 피하기 위해 레닌그라드를 포위했고 남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도 계속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소련의 반격이 거세지자 독일은 중부집단군이 남부집단군을 지원하게 했고 이것 때문에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진격이 늦춰지는 동안 가 내리면서 러시아 전역이 악명높은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독일은 보급 차량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단기 결전을 계획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군한 상태였고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징집을 시작해 독일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해 반격을 시작하면서[16] 안 그래도 느린 진격은 더더욱 더뎌질 수 밖에 없었다. 독일군은 마지막으로 태풍 작전으로 모스크바 점령을 시도했지만 소련군의 반격을 받았고 겨울이 되어 러시아의 강추위가 몰아치자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2자리수의 거리를 남겨두고 공격을 포기했다.

한편 소련은 독일이 침공하면서 서쪽에 있던 공업 지대를 동쪽으로 이동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필요한 무기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공장이 필수적이였기 때문에 독일군이 빠른 속도로 진군해 오고 있음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한 끝에 공장의 설비들을 동부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공장 지대는 이후 대전 내내 소련군이 싸우는 무기를 공급하는 원동력이 된다.

한편 독일군은 히틀러가 나폴레옹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모스크바에 병력을 올인하지 않고 키예프, 레닌그라드에 병력을 나눠 투입하였는데 당시 모스크바는 시베리아 철도가 지나가는 중심 도시라 점령당하면 유럽 러시아 일대는 철도망이 마비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였으며, 점령지 주민들은 소련의 탄압을 받던 소수민족들이라 처음에는 독일군을 해방자로 맞이하였는데[17] 전투부대는 점령지 주민들과 사이가 괜찮은 부대도 존재했으나 역시 나치의 인종 차별 사상 때문에 점령지 주민들은 소련 시절처럼 차별대우를 받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나마도 전투부대가 떠나고 아인자츠그루펜 등 인종말살부대가 진주하면서 지옥이 시작되었다.

5. 결과

결국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원래 목표로 했던 유럽 러시아 지역 점령에 실패했다. 엄청난 전과를 올렸지만, 작전 자체는 목표달성에 실패한 것이다.[18]

러시아의 영토는 독일의 예상보다 너무 광활했고, 자연환경도 너무 혹독했다. 대륙의 기상 게다가 독일의 예상과 달리 소련군은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고 처절하게 저항했다.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수많은 소련군 장병들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인간방패가 되어 저항했고 이 과정에서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거기에 독일군은 인종주의를 철석같이 믿어 점령지 주민들에게 가혹한 정책을 펼쳤고 동부전선에서 계속 게릴라에 시달리게 된다. 결국 독소전쟁은 예상과 달리 장기화되기 시작했고 독일의 파멸을 부르게 된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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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여기에는 프랑스가 6주만에 허무하게 무너진 것도 한 몫 했다. 그러나 사실 프랑스의 붕괴는 구태의연한 제1차 세계대전의 보병전술을 고수한 프랑스 군부의 병크와 함께 운이 잘 따라줬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 [2] 그 때가 스탈린의 대규모 숙청으로 인해 소련군 전체가 반고자였기 때문에 오히려 히틀러가 개전 날짜를 잘 잡았다는 견해도 있다.
  • [3] 독일이 알고 있었는지 모르나 정작 일본은 할힌골 전투에서 주코프가 이끌었던 소련군에게 박살난 이후 1941년 4월에 소-일 불가침 조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건 1941년 6월(...) 일본 군부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에도 이 불가침 조약을 깨지 않았다. 우리들이 먼저 불가침깨고 공격했으니 저놈들도 같이 불가침깨고 공격하겠지(...) 어, 안 해?
  • [4]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주변인들이 상기시켜줬지만 히틀러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자 좋다고 같이 선전포고(...) 그럼에도 끝까지 불가침을 유지
  • [5] A-A선 참조 바람
  • [6] 히틀러는 정치장교는 포로로 인정하지 말고 체포하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알려지자 병사들의 독전임무를 맡은 소련군 정치장교를 자극하여 오히려 전투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 [7] 소수의 견해지만 4000만명 이상으로 잡는 경우도 있다.
  • [8] 앞의 2가지 요소를 제외한다면 스탈린의 공로가 상당하다. 특히 공업화정책. 근데 앞의 2개를 너무 거하게 말아먹어서...
  • [9] 스페인의 산악 지형에서 전차는 무용지물이었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의 보고 + 기갑덕후 투하체프스키의 숙청으로 이렇게 멍청한 병크를 저질렀다.
  • [10] 이건 소련의 항공산업의 신뢰도가 낮아서 추락사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 [11] 근데 사실 이렇게 판단하는게 상식적으로 맞는 판단이다. 돌아이가 아니고서야 전선을 마구 넓히는 짓을 하겠는가? 당장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양면전쟁으로 갔다가 망했다는걸 생각해보자. 문제는 히틀러는 진짜 돌아이였다는거. 스탈린이 아니라도 영국과 프랑스의 수뇌부도 히틀러가 돌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했다가 빅엿을 먹기도 했으니(...)
  • [12] 이하 모든 소련군 계급은 한국식으로 환산함.
  • [13] 소련군에서 소총병은 보병을 뜻한다.
  • [14] 7월에 스몰렌스크에서 구데리안에 대패하고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처형.
  • [15] 키에프 전투때 포위된 부대들을 지휘하다 전사.
  • [16] 전쟁 초에 독일은 소련군이 180여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추정했고, 작전 초에 이 병력들이 모두 궤멸당하면서 독일군은 소련군이 완전히 소멸됐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독일군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소련군 360여개 사단과 마주쳐야 했다.
  • [17] 동유럽 나치들 어찌고 저찌고 하는 뉴스가 나오면 100% 동유럽 전선에 나치 독일편을 들어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꼭 나온다. 평가가 극심하게 갈리는데 볼세비키 군대에 대항한 독립투사들이냐 아니면, 인종청소(유대인) 독일 파시스트들의 앞잡이였나로 갈린다.
  • [18] 이점에 있어서는 바르바로사 작전은 진주만 공습과 다를게 없다.
  • [19] 물론 모든 독일군이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실제로 주로 이런 짓을 저지른 놈들은 전투부대가 아닌 인종말살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이나 디클레방어 같은 또라이 사단들이다. 그러나 라루스 초토화 작전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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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9-06 23: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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