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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추이코프

last modified: 2015-02-22 03:33:17 by Contributors

(ɔ) Unknown from

계급장과 훈장을 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때 찍은듯.. 얼굴만 봐도 울상인데 스탈린그라드 전투겠지
피어스 브로스넌??

1900.2.12~1982.3.18

풀네임은 바실리 이바노비치 추이코프(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уйко́в). 2차대전에서 주로 활약한 소련군의 지휘관이다.

Contents

1. 생애
2. 주요 서훈


1. 생애

1900년 모스크바 남부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고, 1918년 4월 붉은 군대에 입대했다. 1918-1920년에는 투하쳅스키가 지휘하는 제5군의 일원으로 적백내전에 참전했고, 여기서 맹활약한 공로로 적기훈장을 받는 등 군공을 쌓으면서 스무 살의 나이로 연대장까지 승진했다. 1921~25년에는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고급장교 교육을 받았고, 1936년에는 기계화 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기계화 여단장으로 승진했고, 제4군 사령관에 부임해 2차대전 초기의 폴란드 침공겨울전쟁에 참전했다. 1940년부터 1942년 3월까지는 중국에 파견되어 장제스의 군사고문을 맡았다.

독소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중국에 있었지만, 이후 소련으로 돌아오자마자 1942년 5월부터 제1예비군 사령관이 되었다. 이 부대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제64군으로 개칭되어 투입되었는데,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이었던 료멘코는 8월에 스탈린그라드 시내를 수비하게 된 제62군 사령관 안톤 로파틴이 너무 패배주의적이라고 해임하고 그 자리에 추이코프를 앉혔다.

추이코프는 이 전투에서 독일군의 장기인 제병협동의 화력과 공중 지원을 무력화하기 위해 포병의 지원 하에 독일군에 바싹 붙어 공격하는 근접 전술을 펼쳤다. 이 전술은 좁은 구역에서 진행되는 시가전에서 적은 병력으로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고, 스탈린이라는 이름에 편집증적인 집착을 보인 히틀러는 퇴각은 커녕 시를 점령하기 위해 예비 부대를 쏟아붓는 병크를 저질렀다. 이 와중에도 추이코프는 시내에서 결사적으로 방어전을 벌였지만, 11월 초에는 거의 볼가강 유역까지 밀려났다. 하지만 추이코프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까지 독일군을 물고 늘어진 덕에, 독일 제6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하고 수많은 병력을 잃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한창일 때 작전을 구상 중인 62군 지휘부. 오른쪽부터 정치장교 쿠즈마 구로프 중장[1], 추이코프, 참모장 니콜라이 크릴로프 소장[2]. 당시 추이코프는 신경성 습진 때문에 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이렇게 추이코프가 독일군의 주의를 끌며 사투를 벌이는 동안 소련군 최고사령부는 스탈린그라드 양익에 은밀하게 병력을 집중시켰다가 총공격을 퍼부었고, 시내에 못박힌 독일 제6군을 포위해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 공적으로 추이코프는 상장(한국군 식으로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제8친위군으로 개편된 62군을 종전 때까지 계속 지휘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성과에서 보듯이 추이코프는 시가전에도 능했지만, 원래 전공인 기동전에도 능해서 1944년의 바그라티온 작전[3] 때는 벨로루시에서 폴란드까지 하루에 100km 이상을 전진한 적도 있었다.

1945년 4월의 베를린 전투 때는 주코프가 지휘하는 제1벨로루시 전선군에 소속되어 베를린 공략의 주공을 맡았다. 경쟁자인 코네프보다 먼저 베를린을 점령하려던 상관의 우격다짐 때문에 젤로 고지 전투에서는 삽질을 하기는 했지만, 결국 베를린으로 먼저 진입해 베를린 방어 총사령관 헬무트 바이틀링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종전 후에는 주코프와 콜롭스키 휘하에서 독일 점령 소련군 부사령관으로 근무하다가 1949년 4월에 개편된 독일 주둔 소련군의 사령관이 되어 1953년까지 재임했고, 이후 소련으로 돌아와 키예프 군관구 총사령관을 맡았다. 1955년에 소련 원수로 최종 진급했고, 1960년부터 1964년까지는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을, 1961년부터 1972년까지는 소련 민방위 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뒤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명예직인 국방부 총감이 되었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도 역임하였다.

1970년대 후반 들어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적백내전 당시 왼팔에 입은 상처가 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추이코프는 이 부상 때문에 평생 왼팔을 제대로 쓰지 못했지만, 용맹한 군인으로서 얻은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했는지 일부러 치료를 거부하고 내버려 두었다. 결국 이 상처는 1981년에 패혈증으로 악화되었고, 9개월 동안 투병하다가 모스크바에서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다른 소련 원수들은 사망 후 모두 크렘린 벽의 묘지에 묻혔지만, 추이코프의 유해는 볼고그라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기념관인 마마예프 쿠르간에 묻혔다.

주코프와 성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동족혐오 서로 사이가 매우 나빴고, 주코프의 회고록에서는 자신의 전선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았음에도 추이코프의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조급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은 전후에도 계속 이어져서, 지상군 총사령관 시절이었던 1961년에 지지부진했던 신형 전차 연구 상태를 보고 빡쳐서 T-62의 양산을 빨리 하라고 지시한 에피소드도 있다.[4]

배경이 베를린 전투인 영화 몰락에도 잠깐 등장한다. 휴전 교섭을 하려고 자신의 사령부에 찾아온 독일군 육군참모총장 크렙스와 갑작스럽게 회견하게 되자, 유일한 민간인이라 교섭에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던 마트베이 블란테르[5]를 옷장에 쑤셔박는 장면이 일품. 유튜브에서 필수요소에 등극했다. 참고로 이거 실화다.

1949년에 만들어진 소련 영화 "베를린 함락"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부터 베를린 전투까지 가장 비중있는 장성으로 등장한다. 마지막에 스탈린이 함락된 베를린에 강림할때 이를 영접하는 이도 추이코프고, 스탈린은 "추이코프 동지 수고했소"라고 답례한다. 원래대로라면 주코프가 가장 부각되어야 할 장성이었지만, 주코프는 영화 제작 당시 지나친 자만심 때문에 스탈린의 미움을 받아 후방 군관구 사령관으로 좌천된 상태였으므로 추이코프를 대신 띄워준 것으로 보인다.

스타트렉에 나오는 엔터프라이즈호의 승무원 파벨 체코프는 추이코프가 자신의 조상이라고 말한다.

2. 주요 서훈

  • 소비에트연방영웅 2회 (1944, 1945)
  • 레닌훈장 9회 (1943, 1944, 1945, 1950, 1960, 1970, 1975, 1978, 1980)
  • 10월혁명훈장 (1968)
  • 적기훈장 4회 (1920, 1925, 1944, 1948)
  • 수보로프훈장 1급 3회 (1943, 1944, 1945)
  • 적성훈장 (1940)
  • 동독 조국공로훈장 금장 2회
  • 동독 인민친선의 별 훈장 대십자장
  • 폴란드 그룬발트 훈장 2급
  • 폴란드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 금십자장
  • 폴란드 부흥훈장 3급
  • 몽골 수흐바토르 훈장
  • 미국 수훈십자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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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1901-1943, 전투 후 병사했다. 지휘권에 간섭하지 않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62군의 사기를 계속 유지시켜 정치장교로서 이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
  • [2] 1903-1972, 전투 후 5군 사령관으로 부임했고, 극동 군관구와 레닌그라드 군관구,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 전략로켓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재임 중이던 1962년에 소련 원수로 최종 진급했다.
  • [3] 그러나 1943년 7월에 있었던 사상 최대의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아마도 스탈린그라드에서 62군이 너무 소모되어 그 때까지도 병력과 물자 보충 등 개편 작업이 덜 끝난 듯 하다.
  • [4] T-62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포신안정장치 그딴 소리 집어치워! 돼지 위에 얹어놓고 그걸 전차라고 우겨도 상관없으니까 당장 115밀리 포 전차를 내놔!"라고 개발진을 갈궈댔다공밀레
  • [5] 그 유명한 카츄샤의 작곡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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