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 D R , A S I H C RSS

바이마르 공화국

last modified: 2015-08-17 03:30:53 by Contributors

© (cc-by-sa-3.0) from


Contents

1. 개요
2. 바이마르 헌법
2.1. 선진적 헌법
2.2. 정부 형태
2.3. 문제점
2.4. 몰락 - 수권법, 비상대권의 완성판
3. 인기 없는 공화국과 민주주의
4. 역사
4.1. 안정, 번영기
4.2. 혼란과 몰락
5. 역대 총리와 대통령
5.1. 역대 총리
5.2. 역대 대통령
6. 행정구역과 지방자치제도
7. 평가와 반성

1. 개요

Weimarer Republik 혹은 Die Republik von Weimar. 정식 명칭은 Deutsches Reich(독일국)이다.

번역이 어려운 라이히라는 단어 때문에 잘못 옮기면 "독일 제국"이 되는데, 사실 이 국호는 카이저 시대의 독일 제국(소위 '제2제국')의 국호와 일치한다.[1] 라이히 항목 참조.

1919년 2월 본격 수립되어 나치 제3제국(제3라이히)의 히틀러에 의해 망한 1933년까지 존속한 독일공화국 체제. 독일 11월 혁명 이후 빌헬름 2세독일 제국이 붕괴한 자리에서 독일 사회민주당(SPD, 독일 사민당)의 정치인인 리프 샤이데만(초대 총리)이 1918년 11월 9일 의사당 발코니에서 선포했다.[2]

바이마르 공화국은 일종의 별명으로 헌법이 만들어진 도시인 바이마르(오늘날 독일 중앙에 있는 튀링겐 주에 있다)의 이름을 따 훗날 붙여진 것이다.[3]

독일 사회민주당(SPD), 가톨릭 앙당(Zentrumspartei), 일 민주당(구 진보당, DDP) 세 정당이 공화국 수립을 주도했다. 이른바 독일 국기가 상징하는 흑(중앙), 적(사민), 황(민주) 연합이다.[4]

2. 바이마르 헌법

2.1. 선진적 헌법

나치에게 무너진 바이마르 공화국이었지만,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헌법인 바이마르 헌법을 보유하고 있었다. 독일인들은 (법상으로) 가장 민주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나치의 경우에서 보듯 좋은 제도가 반드시 민주주의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바이마르 공화국이다.

원래부터 만드는 데는 철저하기로 이름난 독일인들답게 각국의 헌법의 좋은 점만 따서 바이마르 헌법을 만들었다. 지방자치가 보장된 기존 독일 제국 헌법에 영국내각제수상제, 스위스국민투표제 등등이 모두 헌법에 들어왔다.

바이마르 헌법이 얼마나 선진적이었냐면, 당시 웬만한 서방나라에서 여성에겐 투표권이 없었으나[5] 바이마르 헌법은 여성의 투표권과 참정권을 보장하였다. 게다가 "론의 자유"와 "회의 자유", "정당결성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없이 구속 금지, 전화 도청이나 편지 사찰 금지, 검열로부터의 자유가 있었다. 이 때가 1920년대 이전이란 걸 기억하자…. 오히려 현재의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보다도 나은 부분조차 있을 정도[6].

문제는 이런 민주주의를 위한 조항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세력에게 악용되었다는 점이다. 즉 나치당은 이런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으나, 결국 나치에 의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몰락하게 된다.

물론 그런 치명적인 약점과 모순점도 있었지만 이런 좋은 점 때문에 2차대전 이후에 생긴 신생국들의 헌법은 바이마르 헌법을 모델로 했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

2.2. 정부 형태

정체는 의회(하원, 독일의회)을 바탕으로 한 의원내각제였다.

일반적인 의원내각제와 달리 대통령의 권한이 매우 강력했는데 제국 시절 황제가 쫓겨나고 대통령의 역할을 선출 되는 황제로 대체한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제국 헌법은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긴 했지만 매우 권위적인 체제로 패전이후 연합국의 강요로 민주체제로 이행했지만 옛 시절의 전통과의 단절보다는 계승을 선택한 것이 원인이었다. 대통령은 총리 임명권, 의회 해산권은 물론이고 원내 과반수가 나오지 않을 경우 의회 기능을 정지하고 대통령 비상대권으로써 긴급명령으로만 국가를 통치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결국 대통령의 권한은 의회권력이 작동하지 않을 때만 작용했기 때문에 결국 평소 정치형태는 내각제였다. 막강한 권력과 비상 권한과는 별개로, 대통령은 내각을 직접 통솔하는 것이 아니었고 바이마르 후기 '대통령내각(Präsidialkabinett)'[7]에서도 정치 권력의 중심은 총리였다. 총리가 사회경제적으로 필요한 정책을 의회 결의 대신 대통령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요청해서 통치 하는 것이었지 대통령이 직접 정치 일선에 나서는것이 아니었다. 힌덴부르크 노인은 결국 사인 셔틀인 셈

결국 대통령내각과 의회 내각의 가장 큰 차이는 대통령의 비상대권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대통령은 총리를 임명한 이상 비상대권을 계속 부여해야하고 이견이 생길 경우 총리는 사임해야겠지만, 총리직을 바지저고리 갈아입듯이 자주 갈아 치울 수 없기 때문에 거의 전권을 총리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다. 총리는 입법부 대신 헌법상 대통령 비상대권에 의거하여 통치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부는 대통령 임기가 아닌 총리의 교체로 구분하고 체제의 종말은 히틀러의 총리 취임으로 보는 것이다.

이원집정부제의 대표적인 경우로 바이마르 공화국과 현재 프랑스 공화국으로 소개 하는 경우가 많으나,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정은 현재 프랑스의 이원집정부의 운영과는 큰 차이가 있다. 프랑스의 경우 대통령과 총리가 있고 대통령이 외교,국방 외치를 총리가 경제를 비롯한 내치를 맡도록 구분 되어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평시에는 대통령은 국가 수반으로의 의전상 역할이고 내치 뿐만 아니라 외교, 국방 업무까지 국정의 책임이 총리에게 있었다.

그럼에도 같이 이원집정부제로 엮이게 되는 이유는 학자들마다 이원집정부 혹은 이원정부, 준대통령제의 정의가 다르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헌법을 이원정부로 보는 학자들은 평시에는 총리와 내각에, 비상시에는 대통령에게 권한이 있다하여 이원정부로 분류하기도 한다.[8]

2.3. 문제점

그런데 바로 그 부분이 실수였다. 헌법상 비상대권은 평소에 간편하니 자주 써먹으라고 만든 의도가 아닌데 바이마르 공화국은 비례대표제에 따라 의회(하원) 내에서 의석 수가 고만고만하게 분산되는 특성이 있었고, 노선 차이로 좀처럼 연립이 구성되지 않으면 헌법상 대통령의 권한이 가동되었던 것.

헌법상 대통령 권한(임기 7년, 재선 가능)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 군 통수권(형식상)[9]
  • 53조 - 제국 총리 임명권 내각 장관 임명권 (내각구성원은 총리가 추천하나 임명권은 대통령이 가진다)[10]
  • 25조 - 제국 의회 해산권 (단 60일 이내 재선거를 해야 한다)[11]
  • 48조 1, 2항 - 대통령 긴급 명령권 (내란 상태나 주정부 마비등의 경우를 상정, 의회 동의 없이 긴급명령으로 의회제정 법안을 대신하여 통치할 수 있다).
    3항 - 단 의회는 60일내 과반수 의결로 대통령 명령을 무효화 할 수 있음.
  • 48조 2항 - 국가 비상사태시 대통령의 비상대권(헌법상 기본권[12]을 제한할 수 있다). [13]

결국 이러한 권한을 바탕으로 의회제 국가에서 내각이 구성되지 않을 경우 무제한의 권력 행사가 가능했다.[14]

이렇게 대통령의 능력이 극대화 된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정당명부제 탓이 크다. 국민의 의사를 잘 반영하려는 취지로 비례대표제를 지나치게 보장해서 온갖 군소정당이 난립하게 되었던 것. 이는 의회에서 여러수의 원내정당이 출현하고 연립정부를 구성하더라도 과반수의석이 나오기 어렵게 해서 정치혼란이 발생했고, 또 정당간 노선이 대립되면 금방 정부가 깨지는 악순환이 거듭되었다. 무엇보다 바이마르 시대엔 하원이 신임을 철회할 경우 총리와 장관들은 즉각 사임해야 했다(바이마르 헌법 제54조). 장관 역시 개별 불신임이 가능했다.

대통령의 권한이 너무 강하다는 것을 고려하여 의회에는 1. 대통령이 임명한 '대통령내각'의 총리에 대한 내각 불신임, 2. 대통령 긴급명령을 무효화할 수 있는 권한(각각 과반동의)이 있었지만 발휘 될 수 없었으며[15], 또한 공화국에 적대적인 세력이 원내 과반수면 과반수 원리에 따라 스스로 체제를 끝장내야하는 자기 파괴적 모순을 간과했다.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0~1932년 반공화국세력의 약진에 따라 총리 임명권에 바탕한 '대통령내각'[16]과 긴급명령권으로 통치되다가 히틀러의 총리 취임으로 종말을 고한다. 아래에 약사도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프란츠 폰 파펜, 파울 폰 힌덴부르크, 괴벨스 항목 등을 참조.

2.4. 몰락 - 수권법, 비상대권의 완성판

결국 대통령 비상대권은 히틀러 정권때 수권법으로 상설화(?) 되는데 히틀러 정권이 출범하고 그동안 대통령 비상대권이 너무 오래 자주 지속되다보니 의외로 수권법은 통과시에는 무덤덤한 반응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학자들이 수권법 통과시점을 근거로 독재체제의 완성으로 보지만 이미 2년 동안 의회는 아무 기능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히틀러가 정권 출범 후 비상대권이 일시적으로 새로운 법안마다 나올 것이 아니라 의회는 어차피 기능을 못하니깐 [17] 원쿠션 쳐서 대통령 사인 받아 가느니 그냥 행정부에 맡겨버리자는 식으로 나온 것이다. 물론 이런 발상에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반발했지만, 가톨릭중앙당을 비롯한 다른 중도, 자유주의 정당에서 (협박이 있기도 했지만) 일리가 있다고 보고 찬성하게 된 것이다(...)

요약하면 민주 정치의 의회 기능이 헌법상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다시 수권법으로 마무리 된 것이다. 힌덴부르크 노인은 자기 집 노이데크 농장에 자주 갈 수 있어서 대환영했다. 야! 신난다~

3. 인기 없는 공화국과 민주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실패한 주요 원인 중의 하나는 공화국이라는 체제가 승전국에 의해 강요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독일인은 배후중상설이란 음모론을 믿었고, 군주정이 무너지자마자 항복을 수락한 공화국과 민주주의 정치인들을 "외세와 손잡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조국을 배신한 세력"이라며 증오했다.

이는 공화국과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제2제국의 기득권층과 서방세계에 적개심을 가진 대부분의 독일 국민들은 [18] 이들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살아남아 바이마르 공화국을 체제에 대해 비협조적이었으며 민주주의를 체제에 대해서 회의적이었고 군주제로 복귀하거나 군국주의 체제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훗날 온건 우파들이 몰락하고 대공황 이후 정파들이 극단성향에 치우치면서 극좌와 극우의 병림픽이 벌어졌고 결과적으로 극좌와 극우세력의 짬뽕인 나치당[19] 히틀러는 이들은 대중적 인기가 없던 보수층과 타협으로 합법적으로 정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기묘하게도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 체제를 지탱해야 할 세력들이 도리어 그 체제를 증오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실패는 예정되어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증오하는 두 축은 바로 공화국의 수호자가 되어야 할 군부와 법조계였다.

프로이센 출신 귀족들이 지배하는 군부는 이들은 대체로 군국주의자이자 왕당파였으며, 민간정부의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여 국가 안의 국가라고 불릴 때가 많았다. 그러나 프로이센 군부의 전통적인 성향은 민간정부는 전시에 군부에 작전의 자유를 보장하는 대신 '정치 불간섭'이라 딱히 체제를 뒤엎을만한 실행을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민병대 출신 카프장군의 쿠데타를 폰 젝트 장군이 진압하는등 정치에 딱히 나서려는 성향은 없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외적으로 정치불개입처럼 보이는 행태도 사실 그 막후사정이 있는데, 초기에는 베르사이유 조약과 그 이행을 감시하는 연합국들의 감시의 눈이 번득이기 때문에, 후기에는 군부에 어마어마한 권위를 가졌던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직접 정부를 전복하고 군사정부를 세우지 못한 것이다.

사실 군부의 가장 큰 불만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보다는 베르사유 체제의 군비 제한이었다. 민간 정부에서 조차 베르사유 조약을 개정하고 군비 제한을 위해서 제네바 군축회의[20]로 독일이 현재의 군사력 무장해제 다시 어느정도 일어 서려면 외교적인 노력을 하기 위해서라도 민간정부는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이 되고나선 민간 내각이 군부의 영향을 끼치는것을 최대한 배제하는데 주력하여 군 지휘권을 대통령에게 귀속 시켰고, 이후 프로이센 전통 군부와 다른 시각의 군국주의자 이며 바이마르 정부 최후의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바이마르 체제를 이용하여 장기적으로 민간과 군부가 타협하여 권위적인 국가 통치를 시도할 정도를 했다.

이것들을 종합해보면 군부가 민간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지만 독일 내 민간 정부도 군부가 국방군을 스스로 인사권을 행사하는것에 대해서 전혀 태클이 없었던 것처럼 이전 까지 국가에 중심이 되어온 군의 역할에 대해 현실적으로 전통을 인정을 했었고, 민간정부와의 따로 노는것도 군이 직접 정치에 나서지 않고 민간 정부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공화국을 증오하는 다른 세력은 법조계였다. 법조계는 특성상 어느 나라건 기득권 세력 출신으로 이루어질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고, 좌익 쿠데타나 폭동에 대해서 엄격한 판결을 내린 반면 같은 체제 전복행위에 대해서도 우파세력에게는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법부는 우익집단의 정치적 테러에 대해 애국심을 감경사유로 자주 인정해줬다. 따라서 테러나 살인도 애국심만 주장하면 못할짓이 없었다는 것. 맥주홀 폭동을 일으킨 히틀러는 원래대로라면 15년이상형의 판결을 받아야하지만 고작 금고 5년형을 선고 받았다가 [21] 란츠베르크 요새에서 겨우 9개월 살다가 나왔고, 그나마 그게 그가 가장 크게 받은 처벌이었다. 또한 원칙적으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인이며 독일 국적이 없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되어야 하지만, 히틀러는 자신은 독일인이라고 생각한다고 강하게주장하여 독일에 잔류될 수 있었다.

기존 독일 제국의 법관들은 혁명 이후에도 변함없이 판사로 있었다. 바이마르 제국의 법원은 우파에게 관대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18년에서 1922년에 걸쳐서, 좌익 계열의 암살은 22건이었으며 범인들 이 가운데 17명은 중형, 10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우익의 암살은 354건이었으나, 이 가운데 단 1건만 중형을 선고 받았고 사형은 아니었다.[22] 이렇게 법조계는 우익편향적인 판결을 냈으며, 이런 판결 하에서 우파들은 처벌의 두려움 없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었다.

물론 법조계 전체가 이렇게 비양심적이고, 반공화국적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라서, 어떤 법조인들은 양심에 따라 공화국을 수호하려고도 했다. 대표적으로 히틀러와 나치가 정권을 잡기전 깽판을 칠때 중앙정부 검찰과 프로이센 검찰이 반란죄로 기소 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정치인들 압력 때문에 무산되었다. 나치 집권 후 사당 방화 사건에 대해서도 사법부는 단독 범인을 제외하고 나치 정권이 엮어서 체포한 외국 공산주의자들을 전부 무죄 석방시켰다. 또 극좌파세력에 대한 처벌은 이들이 나치급으로 깽판을 벌인 것도 크다.[23] 극좌파도 판결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치적 테러를 벌인데다가 독일과 국제공산당 조직의 도움(?)으로 해외로 튀었다가 조용해지면 다시 국내잠입하는등 극우 테러집단의 행태와 큰 차이점이 없었다. 법관들도 나치 정권 하에서 불법적인 '보호 구금'에 대해 소신있는 판결을 내린것도 보수적인 법관들이었고 나치가 전쟁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그래도 형식적인 법치국가를 표방했기 때문에 사법부의 보수성이 나치의 병크질을 막지는 못했어도 한동안 독일의 양심과 독재정권에 태클을 걸어준 측면은 있다.

공화국을 지탱해야 할 두 세력인 군부와 법조계를 포함한 지배층의 반동성향은 강력한 군국주의 국가였던 프로이센 때부터 전통이었으며, 결정적인 계기로는 1848년 혁명이 실패한 것에서 비롯된다. 부르주아들의 정치참여가 막히자 이들은 경제계나 해외로 눈을 돌렸고[24], 1871년 독일제국 성립 후에 프로이센 관료에 의한 통치가 효율적으로 정착되어 사회 체제가 변혁이 어렵도록 견고해졌기 때문이다. 군부는 오랜 전통에 따라 신과 국왕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기조[25]를 유지했으며, 독일 제국 헌법상 군이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군부는 독자 정치세력으로 자리잡았으며, 의회의 예산권도 자주 침해했다.[26] 결국 사실상 군대가 정치세력이 되어 국가를 소유하게 돼버린 상황이었고, 이것이 단절되지 않은 것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결정적인 문제점이었다. [27]

한편 로자 룩셈부르크 등의 뒤를 이은 일 공산당(KPD) 세력도 부르주아 공화국을 타도하고 체제를 전복 시킨다는 목표에서 우익 세력과 별 차이가 없었다. 이들 극좌의 주장이 설득력이 없었던게 바이마르 헌법이 이전 독일제국과 달리 부르주아들의 제한적 투표권도 아닌 남녀 보통선거권에 노동자의 조합결성이나 정치참여도 잘 보장 되어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1919년 폭동이 군부와 연합한 사회민주당 정부에 의해 제압당하고[28] 당 중심 인물을 잃자 초기 독자 노선에서 스탈린에 조종받는 처지로 전락했고 모스크바의 원격지시에 따라 활동했다.

이후 더 과격성에 물들어 바이에른 정부를 일시적으로 전복하고 6개월동안 소비에트 체제를 수립했다가 정부에 진압당하기도 하고 작센 주에서는 합법적으로 성립된 정부를 공산당과 사회민주당 과격파가 합작하여 무너뜨리련는 시도도 있었고[29] 크고 작은 폭동중에 하노버폭동 쾰른 폭동등에서는 프로이센 무장경찰과 총격질을 하며 시가전을 했고 암살질을 빈번하게 시도했던것도 공산당 정치 깡패 계열 이었다. 이들은 나치 돌격대가 등장하기전 독일 내에서 가장 세력이 큰 정치깡패 집단 이었다.[30]

물론 제 나름대로는 사회민주당이 전쟁도 찬성하더니 혁명을 포기하고 부르주아지 세력, 군부와 손잡고 공산혁명을 진압했다며 '사회주의파시스트' 배신자라고 몰아세웠다. 이것은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지령을 따른 것으로, 공산당은 좌파 노선을 독일공산당으로 일단 정리해야 했기 때문에 우파성향 민족주의자와 군부, 나치보단 사회민주당을 주적으로 여겼다.

결국 체제 전복을 공공연히 주장하던 공산당은 꾸준하게 10%내외의 득표를 보이다가 경제위기가 심화되고나선 13%로 더욱 약진했으며, 결과적으로 소원대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멸망에 혁혁한 공로를 세우고 만다. 자기들도 제거 된 게 문제였지만

4. 역사

4.1. 안정, 번영기

수립 직후부터 계속 혼란을 겪었다. 제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연합국들은 막대한 배상금을 독일에 요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민주화가 되었지만 국민의 여론은 공화국을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배상금을 찍어내면서 금보유량이 바닥나면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렌텐마르크 참조. 여기저기서 몰아세우는 상황이 되자 사회민주당은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계속된 혼란이 이어졌다. 그것은 어느 정권도 2년 이상 집권하지 못한 것에서 드러난다.

그래도 초기 리더십은 아주 최악만은 아니었다. 초대 대통령 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쿠데타를 막아내고 흑적황 연정을 85%의 지지로 출범시켰으며, 화폐개혁으로 전후 벌어진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잠재웠다(1923년). 또 같은 해 프랑스석탄 인도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으로 루르지역을 점거하자 파업으로 맞서는 등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31]

그러나 에베르트는 흑-적-황 연정의 큰 공신이기도 하지만 정작 1920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표를 대거 잃었고, 이후에는 보수적 외교정책을 지지하면서 자기 당인 사회민주당을 디스하는 바람에(...) 흑-적-황 연정을 붕괴시키기까지 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삽질 덕에 사회민주당은 여당으로 오랫동안 복귀하지 못했고 물론 덕분에 경제는 좋아졌지만 독일 정치의 불안정성은 결국 나치의 출범에 기여했다. 무엇보다 대선 직전에 재임 중 사망했다.

사실 총리가 단명하는 것보다 중요한건 내각의 장관이 제대로 된 인물로 들어서는 것이고, 이 측면에서 기존의 흑적황 연정과 이후의 거국 내각의 효율은 대공황 이전까지는 그럭저럭 유지중이었다는 것이 정평이다.

잠깐 반짝하던 때도 있었는데, 우스 계획(Dawes Plan, 도스 안案)[32]으로 배상금은 내려가고, 미국의 차관이 대량으로 들어오게 된 시기였다. 이 시기(1924년~1929년)에는 노동자들의 봉급이 올라가고 많은 문화시설이 세워지는 등 황금기를 누렸다. 헬름 마르크스와 한스 루터 등 경제인 출신의 중도보수 정치인들이 안정된 국정을 이룩해나갔다.

1920년대 후반엔 외교적 성과도 상당했다. 일 인민당 출신의 스타프 슈트레제만 총리는 거국내각의 총리로는 고작 3개월을 재임했지만, 그 뒤에 외교부 장관으로서 국제연맹 가입과 공동 평화안보조약인 카르노 조약 등의 업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힌덴베르크의 10년 임기 가운데 호황 5년 간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4.2. 혼란과 몰락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세계 대공황과 독재를 견디는데 황제적 대통령과 거국내각은 매우 치명적이었던 것.

1928년 사회민주당이 대승을 거두고 르만 뮐러가 다시 총리에 올랐지만, 대외적 문제가 재발하며 국정은 좌우의 대립속에 혼란에 빠졌다. [33] 애초에 뉴욕증시 폭락이 시작된 1929년 바로 전해인 이때부터 실물경기는 전세계적으로 꼴아박고 독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대공항이 본격 시작되자 미국의 단기 자금에 의존하던 바이마르 공화국에 이후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인 대혼란이 몰아닥쳤다. 헤르만 뮐러 내각이 무너지고 의회 다수에서 수립된 내각이 아닌 헌법상 대통령 비상대권에 의한 '대통령내각'이 등장하면서 의회정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치러진 1930년 총선은 연정을 거부하고 공화국의 붕괴를 외치는 나치당공산당이 각각 18.3%(107석/577석)와 13.1%(77석/577석)로 약진한 가운데 좌우, 여야 모두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불안정한 정국을 안겨주었다. 연정에 참여하지 않는 군소정당이 25%가 있는 상태에서 31%의 반 공화국 세력은 연정성립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

이때 사회민주당의 방조 아래 등장한 것이 사상 초유의 '대통령내각' (가톨릭 중앙당) 브뤼닝 정권이었다. 온건우파 가톨릭 중앙당 출신이지만 반공 성향이 강했던 브뤼닝 정권은 나치와 공산당에 맞서 힌덴부르크와 손을 잡고 최대한 의회주의를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거듭된 경제실적 악화로 인해 아무에게도 지지받지 못하고 결국 사임하고 만다. 통치는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이뤄지는 개막장 상황이었고, 의회에서 통과가 가능했던 법안마저 절차적 간편함 때문에 긴급명령으로 대체하였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이미 이 시점에서 의회정치는 끝났다.

1932년 집권한 사람들은 힌덴베르크와 친밀한 게 유일한 특기인 하찮은 '남작 나으리' 프란츠 폰 파펜과 정권기반이라곤 국방부가 전부인 '정치군인' 똥별 르트 폰 슐라이허 이었다. 군부와 귀족들은 대중적으로 인기가 없었고, 나치와 공산당은 바이마르 공화국이 멸망할 때까지 성립된 모든 내각에 대해서 비협조적이었다.[34] 결국 두 번의 의회 해산과 총선 속에 (힌덴부르크를 포함한) 모두가 지쳐버렸다.

결국 군부는 대중적 지지를 받던 히틀러를 이용해서 권위적인 통치체제로 권력을 이어나가려 했지만 오히려 그 콧수염에게 역관광을 당한다(...) 히틀러에 정권에서 취임 한달만에 공산주의자의 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헌법상 기본권 제한에 힌덴부르크가 동의 하면서 원래 히틀러에게 대통령 비상대권을 주지 않으려던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계획(?)은 물건너 갔고 3월 선거 후 수권법으로 최종 마무리 되는것이다

애초에 바이마르 체제를 부정했다는 점에서는 군부나 구제국 기득권층, 나치의 생각은 일치했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드디어 불신하던 나치에게 적극 협조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끝장이 나게 된다. 1934년 힌덴부르크가 고령으로 죽자 히틀러는 총리인 상태에서 형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대통령직을 계승하고 총통이 되었다.

학자들에 따라선 다수설로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한 시점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최후로 보는 사람도 있고, 나치가 과반을 확보한 1933년 3월 총선과 같은달 통과된 수권법(기본권을 제한하는 비상 포고령)을 기준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심지어 힌덴부르크가 살아있었던 1934년까지는 바이마르 공화국 상태였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사실 따지고보면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이 히틀러 시대인 제3제국에 공식적으로 폐지된 바는 없다. 4년간 한시법인 수권법을 계속 연장했을 뿐이다.[35] 이렇게 따지면 바이마르는 제3제국과 함께 망한 셈이 되네?


5. 역대 총리와 대통령

5.1. 역대 총리

이름 임기시작 임기종료 재임기간 정당
필리프 샤이데만 1919년 2.13 1919.6.20 127일 사회민주당
구스타프 바우어 1919.6.21 1920.3.26 279일 사회민주당
헤르만 뮐러 (1차) 1920.3.27 1920.6.8 73일 사회민주당
콘스탄틴 페렌바흐 1920.6.25 1921.5.4 313일 중앙당
요제프 비르트 1921.5.10 1922.11.14 1년 197일 중앙당
빌헬름 쿠노 1922.11.22 1923.8.12 263일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1923.8.13 1923.11.30 109일 독일인민당
빌헬름 마르크스 (1차) 1923.11.30 1925.1.15 1년 47일 중앙당
한스 루터 1925.1.15 1926.5.12 1년 117일 독일인민당
빌헬름 마르크스(2차) 1926.5.17 1928.6.12 2년 27일 중앙당
헤르만 뮐러 (2차) 1928.6.28 1930.3.27 1년 272일 사회민주당
하인리히 브뤼닝[36] 1930.3.30 1932.5.30 2년 62일 중앙당
프란츠 폰 파펜 1932.6.1 1932.11.17 169일 중앙당
쿠르트 폰 슐라이허 1932.12.2 1933.1.28 57일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에 올랐다.

5.2. 역대 대통령

대수 이름 임기시작 임기종료 재임기간 정당
1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37] 1919.2.11 1925.2.28 6년 20일 사회민주당
대행 한스 루터 1925.2.28 1925.3.12 13일
대행 발터 지몬스 1925.3.12 1925.5.12 62일
2대 파울 폰 힌덴부르크[38] 1925.5.12 1934.8.2 9년 133일

6. 행정구역과 지방자치제도

© kgberger (cc-by-2.5) from


© User Korny78 on de.wikipedia (cc-by-sa-3.0) from

1925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방제도.

지방제도는 독일 제국 시대와 크게 바뀐건 없다. 자잘한 공국들이 있던 지역이 튀링겐 주로 바뀐 정도. 높은 수준의 지방자치에 따라 각 주는 주의회를 구성하고 이 주의회에서 구성된 정부가 치안(경찰)능력까지 맡았다.

일개 주인 프로이센이 여전히 구 프로이센 왕국에서 프로이센 자유주가 되어 전체 독일 면적(63%)과 인구의 2/3를 차지했다. 수도베를린을 포함한 프로이센 주정부는 나치당이 선거에서 의석을 늘리는 와중에도 여전히 사민당이 주의회 다수당을 차지하여, 돌격대를 금지하는 등 지속적으로 나치를 견제하였다. [39] 그러나 결국 주의회 선거에서 사민당이 참패하고(그래도 원내 1당은 차지했다) 그 이후 1932년 파펜 총리와 나치, 공산당의 합작으로 "로이센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주 정부가 해산되고 경찰권 역시 총리가 직접 장악하게 된다. 이 과정은 괴벨스 항목 참조.

국가 상원은 이 기관은 국가의 입법과 행정에서 주들을 대표했다(바이마르 헌법 제60조). 각 주의 투표권수는 해당 주의 크기와 인구에 비례해서 배정되었다(바이마르 헌법 61조 1항). 단 프로이센의 크기가 너무 컸기 때문에, 크기와 상관없이 전체 의석의 40%(2/5)를 가질 수는 없다는 조항이 추가되었다(61조 제1항의 4). 이 조항에 따라 프로이센은 전체 66표 중 26표(39.4%)만을 배정받았다. 원래라면 80%(53석)까지 차지가 가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두번째로 많이 받은 주는 바이에른으로 1/6에 해당하는 11표를 배정받았고, 나머지 29석을 전체인구의 20% 이하를 차지하는 작은 주들이 나눠가졌다. 물론 상원이 가진 힘은 하원 법안에 대한 거부권 밖에 없었다.

2차대전 전후 프로이센은 동부지역은 폴란드로 영토가 대거 넘어갔고, 동서독 분단에 따라 갈라졌다. 서독에서 구 프로이센은 여전히 절반 이상의 영토를 차지했으나, 6개 주로 나눠지면서 독일의 가장 큰 주는 바이에른이 되었다(현재도 동일). 한편 동독은 전국토를 14개구로 갈갈이 나눠버렸다. 일 통일 이후에는 베를린/베를린가 하나로 합쳐지고, 구 동독 지역이 베를린 시와 5개 주로 재편되었다. 이 동독 5개주 가운데 원래부터 프로이센에 쭉 속했던 주는 2개 주이므로, 오늘날 프로이센은 8개주와 베를린으로 갈라진 셈이 되었다.

7. 평가와 반성

나치 패망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 원인을 직접민주주의 요소와 절대적(다수결이 절대적 원리로 작용), 상대적[40] 민주주의의 성격을 가진 바이마르 헌법에서 찾는 움직임이 있었다. 무엇보다 헌법상으로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항이 합법적으로 독재에 이용된 것이 치명적이었다.

현재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헌법)[41]에선 바이마르 공화국 제도의 취약점을 다음과 같이 반성하고 있다.

기본법 1조 1항에 인간 존엄은 불가침이다.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 권력의 의무이다. 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며 이하에 조항에서도 생명권을 비롯한 신앙 양심 종교등 인권에 대해서 절대로 제한할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혼란을 막고 극단주의 정당의 원내 진입을 방지하기 위해 정당득표 5% 미만 정당은 비례대표에서 의석수 없이 퇴출되도록 했다.[42]

의회 해산시에도 내각이 유지가 되며[43], 해산 시 필수적으로 다음 정부에 구성에 대한 합의가 필요한 것으로 바뀌었다. 즉 내각불신임안을 제출하려면 다음 정부(내각)에 대한 구성안을 같이 제출해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런 제도 덕에 아직 내각불신임안이 발의된 적이 1949년 주권이 회복되고나서 64년동안 단 두 번(1972년, 1982년)이었고 불신임안이 가결된건 단 한차례다(1982년). 대통령 비상 대권도 폐지 되었고 연정 구성이 어려울 경우 의회에서 뽑힌 대통령이 정당 사이에서 조정 역할만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방어적 민주주의 이론을 채용하여 공화국을 반대하는 위헌정당은 폐지가 가능해졌다. 이것이 독일 연방헌법수호청이다. 그래서 나치 같이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정당은 해산시킬 수 있다. (1950년대 네오나치 정당과 공산당을 해산판결 한 경험이 있다.) 또한 전후에 서독 정부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망가뜨리는데 일조하고 나치의 집권을 도왔던 전후 군부세력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전범들을 철저히 공직에서 배제했으며, 서독 국방군은 나치 시절의 독일국방군으로부터만 아니라 모든 구 독일 군대(즉, 제국 군대)와의 전통 단절을 선언했다.

물론 무조건적인 반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 통일이 이루어진 90년대 이후 바이마르 헌법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바는 있다.

----
  • [1] 사실 이 국호는 심지어 나치 독일의 '제3제국'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의회(Reichstag, 라이히스타크)도 제국의회로 번역하는 경우가 잦다. 아이러니 한 것은 과거에도 이 의회가 있긴 있었는데, 독일 제국 하에서는 이 의회가 의미가 없어서 별로 안쓰이다가 이때 자주 등장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국의회(...), 제국의원이라는 이상한 표현이 나오게 된다.
  • [2] 사회민주당이나 정부의 승인 따위는 없었다. 애초부터 엘리트적인 민주주의였다는걸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부분. 샤이데만은 4개월만에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해 사퇴했다.
  • [3] 베를린의 혼란을 피해서 안전한 바이마르에서 헌법 제정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헌법이 국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 의해 서명된 곳(법적 효력을 가지게 된 곳)은 바르츠부르크였다.
  • [4] 정확하게는 1848년 이후 독일제국 성립 이전까지의 독일연방기였고, 오늘날의 독일연방공화국 국기이기도 하다. 오늘날도 역시 기민당-독일 사민당-독일 자민당은 흑적황이다.
  • [5] 영국에서는 여성 투표권이 30세 이상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어졌고(남성은 21세), 미국도 비슷했다. 프랑스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이 되어서야 여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으며 스위스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소련은 당시엔 여성투표권이 주어졌으나 시간이 갈수록 현실은 시궁창(...)
  • [6] 물론 이 나은 부분이란 헌법 수호에 따른 정치적 기본권 제한 등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역시 기본권 제한은 빈번했으니.
  • [7] 의회 다수의석 정당들이 내각을 선출하지 못 할 때,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성립한 이하 헌법상 대통령 권한에서 총리 임명권이 가동된 것이다.
  • [8] 여담으로 대통령 중심제이면 부통령이 있고 내각을 통솔하는 총리를 두지 않는게 일반적-이라기보다는 대통령제의 시초가 된 미국에서 부통령제를 채택했기 때문에-이라서 우리나라 처럼 대통령-국무총리가 모두 있으면 내각제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 중심제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 [9]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 일때는 군부가 통제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장관을 냈고 1925년 육군원수 출신 힌덴부르크 당선 후에야 기어 오르진 못하고 말 좀 듣는다.1926년 힌덴부르크가 당선되고 한스 폰 젝트 장군의 군제 변경으로 육군 최고 사령관과 해군 최고 사령관은 대통령 직속이다. 제국시절 황제가 육해군 최고사령관을 맡아서 군부가 '행동의 자유'를 누렸기 때문에, 민간인에 불과한 총리와 내각의 통제를 받아야하는 국방부에서 떨어 뜨려놓은것.
  • [10] 대통령은 내각 장관을 직접 고를 권한이 없다. 즉 총리가 추천한 장관에 대해 사실상 거부권만 있다. 힌덴부르크가 히틀러와의 협상에서 외교와 국방장관은 자신이 직접 뽑겠다고 하자 히틀러가 "그건 헌법 위반이오"하는 개념 찬(?) 비판을 했다.
  • [11] 이 조항은 문제 될 것이 없어보이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몰락에 일조한다. 60일이후에도 재선거를 안하면 어떻게 될지, 또한 정부와 의회 권력의 공백에 대해서 아무런 장치가 없다. 이것을 이용해서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슐라이허 장군은 일단 의회를 해산하고 정치혼란과 정부구성 미비를 근거로 장기적으로 재선거 없이 비상대권에 의존한 통치를 검토하기도 했다.이것이 검토에 그친것은 사회민주당등이 제기 할 위헌 논란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나치돌격대와 공산당의 폭동 우려 때문이었다.
  • [12] 신체의 자유, 주거의 자유, 서신/우편/전화의 비밀유지,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소유권의 자유.
  • [13] # 헌법 48조에 대한 전문과 자세한 설명 위키백과 영문판, # 위키백과 독일어판.
  • [14] 한편 이 제한들은 주정부 레벨에서도 가능하긴 했다. 다만 역시 대통령과 의회에 의해 무효화가 가능했다. (48조 4항)
  • [15] 한번 발휘 된 적이 있긴 한데, 1932년 공산당과 나치당이 합작하고 벌인 짓이라(...) 파펜 내각이 쫓겨나고 정국 혼란이 더 심해졌다.
  • [16] 의회에서 다수당 또는 연립으로 성립된 내각과 대비해서 헌법상 대통령 임명권으로 성립된 내각을 지칭함.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통치되기 때문에 의회 과반수 의석이 필요 없고 불신임만 면하면 비상대권으로 의회 의존 없이 통치가 가능했다. 더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일반적인 의원 내각제와 달리 총리와 장관이 의원자격이 없어도 지명이 가능했다.
  • [17]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헤르만 괴링이 그 당시를 이렇게도 발언했다. "우리는 의회를 없애버렸다. 왜냐하면 전혀 쓸모가 없으니까~"
  • [18] 영국의 역사학자 Paul Johnson(폴 존슨)은 20세기 역사를 다룬 저서 '모던 타임즈'에서 19세기부터 20세기 초 독일 내 지성인들의 성향이 영국 프랑스식을 지지하는 '서방파'와 민족주의 계열의 '동방파'가 맞섰는데 1차 대전후 서방파는 완전히 몰락하고 동방파 중에서도 극단 성향이 힘을 얻었다고 본다
  • [19] 나치당내 극좌 노선은 사회 혁명용 돌격대, 또다른 좌파(이쪽은 오히려 온건파)로는 그레고어 슈트라서 오토 슈트라서 형제와 카를 카우프만, 나치당 초기 고트프리트 페더등이다. 정치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주류 우파에 합류괴벨스도 성향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에서 사회주의 우선을 우위를 주장한 좌파쪽이다.
  • [20] 스위스 국제연맹이 있는곳에서 군축회담이 진행되었는데 각국은 비대한 군축을 독일이 연합에 가입하고나선 군비제한을 어느정도 풀어주느냐를 계속 협상했다.
  • [21] 반란죄이기 때문에 라이프치히 제국법정에서 재판해야 하지만 알게 모르게 바이에른 정부의 높으신 어른들이 나치와 내통하거나 방관한게 드러날까봐 약식 바이에른 인민재판소에서 한 원인도 있다. 당시 판결 주임법관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나치 집권 후 바이에른 대법원장직을로 보답받는다.
  • [22] 바이마르 문화 (피터 게이, 1969, 조한욱 번역)
  • [23] 애초에 무식한 깡패들로 구성된 공산주의자 폭력 조직은 나치 돌격대와 동질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후에 나치 돌격대로 대거 합류한다. 괴벨스 항목 참조.
  • [24] 내부갈등을 돌리기 위해서 국가에서도 이런 흐름을 방조했으며, 해군 대함대 건설이나 소소한 식민지는 부르주아들이 오히려 주도했다.
  • [25] 기독교적 윤리(프로이센의 미덕)와 황제나 제2제국 여러 왕국 제후국 군주에 대한 기사도적 충성.
  • [26]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 군부로부터 민간 정부의 우위를 이뤄내고 수십년간 유지한 것만으로도 그의 정치력은 증명된다고 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
  • [27] 이런 군부우위 제도를 그대로 따라 배운게 메이지 유신 당시의 일본. 일본군은 민간 내각의 영향 밖의 천황직속 이었고, 결국 군벌이 형성되게 된다.
  • [28] 베를린 폭동 진압 후 10여일 뒤 선거에서 사회민주당과 온건우파정당 연립정권은 85%의 지지를 받았다.
  • [29] 1923년 히틀러의 뮌헨 맥주집 폭동은 작센에서의 좌파 쿠데타와 베를린에서의 우익계열 자유군단 카프의 쿠데타에 편승해서 급작스레 시도했다
  • [30] 인원수는 철모단이 더 많았다고 하나 이들은 참전자들 배나온 아저씨들이 주축
  • [31] 하지만 이 총파업이 실업자를 양산했다는 비판도 많았다. 빌헬름 쿠노 총리와 같은 경제인 출신의 비정당 총리도 경제적 업적을 많이 남겼음에도 총파업에 소극적으로 찬성한데 휘말려 9개월만에 불신임을 받고 물러났다.
  • [32] 미국 재정장관 찰스 G. 도스의 이름을 딴 것이다. 1924년 8월 16일 체결.
  • [33] 때마침 1929년 10월 슈트레제만이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 [34] 파펜은 스스로 "로이센 쿠데타"로 사민당이 장악한 프로이센 주정부(공화국의 3/5 차지)를 무너트렸는데, 이때도 공산당과 나치당이 합심했다. 파펜 내각의 내각불신임안은 나치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고 통과시켰다. 슐라이허 내각에 대해서도 비협조는 마찬가지. 국공합작 심지어 1932년 11월엔 동맹파업에 나선 적도 있다.
  • [35] 수권법도 모자라 2차대전 발발 후엔 '총통 지령'도 의회에서 만든 법률로 인정한다.
  • [36] 이때부터 의회에서 구성된 내각이 아닌 헌법상 대통령 비상대권에 임명된 이른바 대통령내각이다
  • [37] 7년 임기중 사망한다
  • [38] 1925년 7년 임기로 뽑히고 1932년 재선에 성공하고 1932년 5월 5일부터 새임기가 시작 1934년 임기중 사망한다
  • [39] 실제로 나치의 기반인 바이에른(두번째 큰 주, 전공화국 인구의 11% 차지)에 비해 프로이센의 나치의 지지도는 높지 않았다. 특히 베를린에서는 공산당을 포함한 좌파가 극 강세였다. 이건 지금도 그렇지만
  • [40] 다수결을 통해서라면 체제를 위협하는 행위, 정책을 포함한 모든 사항을 결정 가능
  • [41] 독일의 최고법은 헌법 대신 기본법이라고 부른다. 이는 통일 이전까지만 최고법의 명칭을 헌법 대신 기본법으로 하기로 한 독일연방공화국의 결의에서 비롯된 것인데, 오히려 통일이 이뤄진 이후에도 개정과는 별개로 기본법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
  • [42] 전문용어로 봉쇄조항이라 칭한다. 독일법을 베낀 일본법을 한번 더 베낀 대한민국 또한 이러한 조항이 있다. 다만 좀 느슨하게 3퍼센트로 맞추고 지역구 5석 이상은 예외로 정해놓았다.
  • [43] 이렇게 강력한 독일의 내각 제도를 두고 "내각 우위 내각제"(독일식 내각제)라고 한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5-08-17 03:30:53
Processing time 0.2844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