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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

last modified: 2015-04-14 01:15:29 by Contributors

Contents

1. 조선 중기의 무장
2. 한국의 종교인
2.1. 정치적 발언들
2.2. 종교인으로서
2.3. 저서

1. 조선 중기의 무장

朴泓(1534~1593). 울산 출생.

임진왜란 발발 당시, 경상좌도수군절도사로 재직하다 왜군의 갑작스런 대규모 기습을 받아 경상좌수영 진포 태반이 쓸려나가며 제때 대응하지 못했고 이후 동래성으로 향했으나 압도적인 병력 차이에 동래성 구원을 포기하고 한양으로 후퇴했다. 이후 좌위대장에 임명되어, 임진강 방어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패했다. 그 뒤로 여러 전투에 참가 하였다.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귀향하다 병사하였다.[1]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병조참판이 추증되었다.

야사에서는 능력 없고 비겁한 장수라는 오명도 가득하지만 미처 예상 못한 대규모 침략[2]으로 경상우수영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적은 경상좌수영의 태반이 쓸려나가는 상황[3]에서 어찌어찌 병력을 소집해서 어떻게든 싸우려고 했다는데서 알 수 있듯이 아주 무능하거나 겁쟁이는 아니었다.

박홍이 도망치고 난 뒤 병사와 마을 주민 25명은 끝까지 남아 싸웠다고 하는데 이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 옛 좌수영터에 있는 25의용단이다. 이 분들에 대한 제사는 일제시대때에도 지내졌으며, 90년대 무렵까지만 해도 안내문에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망치자...'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그 부분이 삭제되었다.

80년대 각종 책자에선 겁쟁이 장군으로 너무 자주 나오곤 했다. 1981년 삼성당출판사에서 낸 이순신위인전 만화책에선 겁에 질려 배를 불태우고 달아나는 것만 나오며, 1982년에 나왔던 만화책 《성웅 이순신》에선 더 겁쟁이로 나와 배를 불태우고 서둘러 달아나는데 왜군들이 보고 "저런 비겁한 놈 다 봤나?" 하면서 비웃기까지 한다. 1986년 한국일보 연재소설 임진왜란에서는 장수 이일과 더불어 찌질이로 나온 바 있듯이 오랫동안 겁쟁이 장군으로 자주 나왔다. 박홍에겐 꽤나 억울한 평가인데 세계적으로 졸장으로 알려져있다.

이일이 조선 백성을 죽여 왜군으로 위장시켰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일은 상주에서 병사들을 한창 수습하던 차에 왜군이 쳐들어온다고 사방에 떠들어대며 병사들의 사기를 바닥에 떨어뜨린 백성을 참수한 적은 있어도 조선 백성을 죽여 왜군으로 위장한 적은 없다. 그리고 이 참수에 관해서는 이일이 정당하다 할 수 있는데, 최초의 지상군 소집이 있었던 대구는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함락되면서[4] 흩어져 버렸고 상주에서 현장모집을 통해 간신히 방어선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정식 보고 절차를 거치지 않고 훈련도가 부족한 병사들 사이에 그런 말을 퍼뜨렸으니 당시 군법상 죽어도 할 말은 없다. 실제 조선인을 죽이고 적으로 꾸미는 짓을 한 지휘관은 원균, 우복룡 등이다. 이일도 박홍처럼 억울한 오명을 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나온 '해전의 모든 것'(휴먼 앤 북스) 128쪽을 보면 박홍은 왜군의 공격 소식을 듣고 겁먹고 배와 기지를 불태우고 달아난 졸장으로 소개하면서 원균과 같이 조선 수군을 망친 졸장으로 나와있다. 지은이들이 미국과 영국 해군 교본집필에도 참여한 해군학 전문가들로 이순신을 엄청나게 호평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아무래도 임란 초기 최전방을 맡은 것[5]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싸우다 전사한 것 때문에 크게 비교될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대다수가 도망가거나 패해서 후퇴했고[6] 박홍에게 이들보다 훨씬 깊은 죄를 뒤집어 씌우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실제 평양에 도착한 후 탄핵되기는 했으나 죄를 공으로 씻으라고 봐 주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박홍의 평가는 임란 초기 도망갔다가 다시 전투에 나선 많은 장수들 중 하나로 봐도 될 것이다.

2. 한국의 종교인


당신 주사파지?

1941년 2월 27일 생. 가톨릭 신부로 전 서강대학교 총장이자 전 서강대학교 이사장. 90년대에는 신부가 아닌 다른 의미로 유명해진 인물. 별명은 빠콩. 자칭 하느님의 안기부장. 초창기의 딴지일보가 이르길 데이비드 카퍼필드 같은 마술사. 여기서는 바콩이라는 폄칭을 쓴다.

2.1. 정치적 발언들

나름대로 자신을 보수반공주의의 화신으로 생각하는지 90년대 들어 반공 운동가로서 활동했다. 그런데 그 활동이라는 것이 보수 입장에서 봐도 골때리는 게 많아서 문제. '북한 간첩이 자기를 암살하려고 왔는데 자신의 설교에 감화되어 눈물을 흘리며 자수했다'[7] 같은 말을 하니 무조건 실드쳐주기도 애매한 것이다.

"사회 각계각층에 주사파가 몇만 명이고 그 중에 자신이 회개시킨 사람이 수백이며, 예수께서도 일찍이 성전 앞의 환전상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셨다."
환전상들과 주사파가 무슨 상관인지는 묻지 말자
자본주의 까는것도 아니고
얼마 후 실제로 대학생들중 상당수가 주사파로 밝혀졌다

1994년 8월 25일에는 그 유명한 주사파 발언이 나오게 된다. 이 발언 전까지는 당시 운동권에 대한 몇 안 되는 이해자중 한사람으로 인식되었고[8], 당시 운동권에서조차 자신들의 편(주님의 벗)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발언이 더더욱 화제를 일으킨 것. 당시 이 발언을 했을 때만 해도, 운동권 측에서 "저런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닌데...", "틀림없이 정권에서 모종의 협박이 있었을 거야..." 등등의 반응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주사파를 구체적으로 거명하라는 질문들에 대해서는 박홍은 "스스로 나타나기 바란다"고 말했으며 증거가 있냐는 물음에 대해선 "증거 묻는 사람이 바로 주사파"라는 심오한 답변으로 모두를 아연실색케 했다. 조지프 매카시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라고 써있었지만 박홍은 고해성사때 들었다고 언급 했기 때문에 증거와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명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기보다 고해성사의 내용은 원칙적으로 절대 발설해선 안되고 따라서 주사파가 있다는 것을 고해성사에서 들은 것이라고 말해서도 안된다. 실제로 이때문에 고해성사 비밀 누설죄로 고발당했다. 물론 무혐의) 그래도 증거 묻는 사람이 주사파란 소리가 맞다는 소린 아니다.


이 사건이 커지게 된 것은 조중동, 특히 조선일보가 여과 없이 그의 발언을 진실인 양 써제꼈기 때문. 근거가 있냐는 물음에 '강도가 나타났다고 외쳤는데 강도는 안 잡고 강도가 나타났다는 증거를 대라고 한다'는 병신스러운 논리를 사설과 칼럼란에 배설하였다. 증거도 없는데 강도 나타났다고 신고하면 공무집행방해 이후 박홍은 조선일보에게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박홍은 조선일보가 자신을 외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다른 언론에 하소연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학법에는 '사학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려는 것은 사회주의화 교육을 하자는 것이고 공산주의화하자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건 전형적인 연쇄반응의 오류. 자칭 우파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21세기 들어서는 발언이 조 모 씨에 비해 약해진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진중권김지하 관련 발언에 개 짖는 소리라고 밝혀 자신의 영향력을 새삼 발휘하고 있다. 한편 조선일보TV조선에서는여전히 추앙받고 있다.진보의 적 당시엔 실제로 주사파가 많이 있긴 했다 카더라 주체사상을 연구한다던지 지금도 이적단체가 된 한총련 출신이라던지 소수긴 하지만 대학내에 종북세력이 아직도 있다 하지만 소수며 진보쪽이 전부 주사파라고 믿으면 심히 골룸하다.

2.2. 종교인으로서

주요 인사가 전반적으로 깨끗한 한국 천주교 입장에서는 골치아픈 분이다. 어쨌든 간에 서강대학교 내부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엘리트에 속하는 사람인데다가 한국 천주교회는 정치적인 견해에 있어서 중립을 지키려 하기 때문에, 답답하긴 해도 공개적으로 박홍을 비판하는 천주교 내부 인사는 드문 편이다.[9] 박홍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싶은 사람은 강준만 교수의 저서 <레드 콤플렉스>와 진중권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책을 읽어보도록 하자. 이분의 망언을 까는 유머집도 나왔는데, 주책없는 언변이나 행동을 까는 맛이 일품이다. 심지어 서강대학교 로욜라 도서관 인문학 도서 서가에 비치되어 있다.

이분은 의외로 가톨릭 내에서는 회원이라는 것만으로도 엘리트로 인정받는 예수회 소속이다. 예수회 자체가 보수적인 가톨릭에서도 특히나 강경하고 근본주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단체이다. 가톨릭은 과거 공산주의의 대척점에 섰던 종교이므로 가톨릭 신부가 이런 성향을 보이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10]

서강대 주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박홍은 대단히 술고래에 골초라고 한다. 결혼을 하지 않고 가정을 꾸리지 않는 탓에, 신부들이 은근히 골초나 주당이 많다고 한다. 심지어 주교회의에서도 그러한데, 주교들의 모임 후에 청소를 해 보면,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두룩하다고... 여기에 어느덧 나이가 70대에 들어선 것을 포함해서, 현재는 여러모로 건강이 좋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4년 8월 서강대 동문회측과의 접견에 따르면 수년 전에 심장수술을 받았고, 매주 3차례의 신장 투석치료를 받고 있을 정도.

2.3. 저서

<레드 바이러스>라는 책이 있다. 제목은 '레드 콤플렉스가 생기는 것은 레드 바이러스, 즉 주사파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드 콤플렉스를 운운하기 전에 레드 바이러스부터 따져야 한다'라는 의도로 지은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본인이 저술한 내용은 없고 관련 자료를 짜깁어놓은 자료집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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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일부 사전의 예: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전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는 병사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
  • [2] 임진년 이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은 예상했지만 적의 규모나 침공루트에선 좀 더 규모가 큰 왜구 정도로 생각했지 수십만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을 동원한 민족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선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보면 당시 조선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 건 이상할 게 없다.
  • [3] 부산포, 다대포, 서생포 등이 후퇴하지 않고 싸운 것으로 보아 이게 기본 방침인 듯하며 박홍이 동래성에서 집결한 것 역시 병사 이각과 울산성의 병력이 집결한 걸 보아 제승방략에 따른 기본 방침인 듯하다.
  • [4] 이것은 왜군의 진격이 기형적으로 빨랐던 탓이지 이일이 늦장을 부려서는 아니다.
  • [5] 바다에서 막지 못 했다는 것도 크지만 중세까지 해전에서 초기에 요격한 예는 없다고 봐도 되며 그에 따라 경상좌수영도 육군화 된 것으로 보인다.
  • [6] 경주성을 탈환한 박진도 후퇴했고 진주대첩으로 유명한 김시민도 김성일이 부르기 전까지는 산에 숨어 있었다. 사실 끝까지 맞서 싸운 장수는 모두 전사했다.
  • [7] 정작 이 간첩이라는 인간이 간첩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북한에 가서 백두산 권총 몇번 쐈다는 말이 근거의 전부라고... 그리고 이 간첩에 대해 독일 교포들 사이에서 안기부 장학생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국내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유학 당시,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면서, 돌아가면 신변의 위협을 받을 것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이 부분은 김구의 백범일지에 나오는 걸 베낀 것으로 백범일지도 자길 죽이러 온 암살자가 차마 못 죽이고 권총을 바쳤다고 한다. 물론 백범일지도 이광수가 윤문한 신뢰성이 제법 낮은 책이다(…).
  • [8] 실제로 전태일이 분신으로 사망하자 추모미사를 집전하다가 중앙정보부끌려간 적도 있다
  • [9] 다만 사적인 자리에서 '저분 왜 이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답함을 토로하는 분들은 꽤 많다. 물론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면전에서 따지는 경우는 없다.
  • [10] 서강대학교도 예수회 후원금으로 세운 학교로,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운영하는 가톨릭대학교와는 계통이 다르다. 문과계열이 강세인 서강대와 의대 중심인 가톨릭대의 통합 떡밥이 오래전부터 나왔지만 번번히 무산된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 이제는 시기를 놓쳤다는 게 중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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