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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last modified: 2015-04-10 14:08:52 by Contributors

  • 발해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두 반도로 둘러싸인 바다를 뜻한다. 발해만 이라고도 부른다. 육지 깊숙히 들어와 있어서 해류의 소통이 나쁘고 현재에 와선 요동, 요서 일대의 공업지대에서 오폐수를 마음껏 방류하여 수질이 매우 나쁘다고.
  • 이하 내용은 고대 국가 발해에 대한 것이다.

한국의 역사
wikI:"삼국시대(한국사)"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후삼국시대
통일신라 / 발해

공식명칭渤海
위치대동강원산만 이북,요동반도에서 만주,연해주 일대[1]
인구대이진시절 약 200~250만 명[2][3]
수도모산 오동성경현덕부상경용천부
경용원부상경용천부
정치체제군주정
국가원수可毒夫,王
언어발해어,고구려어,말갈어 등
종족족,족,말갈족,거란
종교불교,도교,토착신앙 등
존속기간698년 12월~ 926년 1월 14일 (228년)
성립 이전고구려
멸망 이후고려,요나라,여진(금나라)

Contents

1. 설명
2. 역사
3. 멸망
3.1. 멸망 원인
3.1.1. 백두산 분화설
3.1.2. 지배층의 내분설
3.1.3. 거란 급습설
3.1.4. 말갈과의 대립설
3.2. 멸망 이후의 정세
3.2.1. 발해 멸망에 대한 고려의 반응
3.3. 발해부흥운동
4. 정치/사회상
4.1. 정치와 행정, 군사
5. 지리
5.1. 영토
6. 문화
6.1. 발해 문학
6.2. 융합된 문화
7. 한·중 역사 논란
7.1. 건국 주체 문제
7.2. 역사 주체 문제
8. 참고문서


1. 설명

고구려 멸망 후, 말갈인과 고구려인들이 지금의 중국 지린성 일대에 세워져 한반도 북부, 만주 및 러시아연해주 지역을 장악했던 나라. 건국자는 대조영최수종. 을 '가독부(可毒夫)'라고 칭했는데 이는 발해 말의 음차라고 한다.[4] 상경성 제2궁전지가 당나라 황궁인 함원전보다 더 컸다고 한다. 현재 상경궁 유적지는 중국 정부에서 비공개 작업중이며 사진조차도 공개되지 않았다. 오직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발행하는 잡지에 실린 짤막한 발해 비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震)이라 칭하다가 발해로 바뀌었다. 진이라는 국호는 《신당서》의 내용에 의거해 측천무후걸걸중상걸사비우를 회유하기 위해 각각 내린 진국공(震國公)과 허국공(許國公)이라는 작위에서 유래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대조영 세력이 먼저 자칭한 이후 당이 나중에 이걸 인정한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그 후 당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하게 되어 발해를 국명으로 사용하게 된다. 참고로 조공-책봉 체제에서 발해국왕으로 승진(?)한 것은 762년의 일이다.

2. 역사

발해의 건국자는 대조영이다. 대조영은 《삼국유사》에 고구려의 구장(舊將)이라고 나와 있으나[5] 그의 사망 연도(719)를 볼 때 고구려 멸망(668) 후에 태어났거나 당시에 아주 어린 나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조영의 아버지는 걸사비우와 더불어 반 당 항쟁을 주도한 걸걸중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를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당나라평양성을 함락시킨 이후 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고구려를 통치하였으며, 유민 수십 만을 영주(營州)로 이주시켰다.[6] 영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과 말갈 사람들[7]은 각자 걸걸중상과 걸사비우를 지도자로 하여 영주를 탈출, 고구려의 고토를 향해 이동했다. 그러자, 보통 당나라라고 하지만 사실은 주나라였던 중국의 신성측천황제가 군대를 일으켜 이를 추적했다.

이 과정에서 걸걸중상은 먼저 사망하는데, 걸사비우가 당나라 군대와 전투를 벌이는 도중에 대패하고 전사하면서 대조영이 고구려-말갈 연합 세력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후 대조영 집단은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동모산(東牟山)에 이르러 마침내 나라를 세운다.

나라 이름은 처음에는 진국(震國)이라고 했지만 713년 당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이래 발해라는 이름이 동아시아 세계에 통용되었다. 북한 학계에서는 발해라는 명칭에 대해 발해만에 대한 진출 의지가 담겨 있다고 주장한다. 다만 스스로는 고려(高麗)[8]라고 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는데 이는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수록된 문왕의 국서에서 자신을 고려왕으로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9]

고왕은 최초 근거지의 주변 지역을 장악해 나갔는데,구체적인 세력 범위는 알 수는 없으나 일단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과 북만주에 대한 영토는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건국 초기 신라는 대조영에게 겨우 대아찬 관등을 수여하며 우호 관계를 다지기도 했다.[10][11] 하지만 발해가 문왕 때부터 고구려의 후계 국가임을 자처하면서 신라와 관계가 악화된 것으로 파악되며, 특히 721년에 신라가 강릉 방면에 장성을 쌓은 일은 발해를 경계한 행동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무왕 때는 흑수말갈의 귀속 문제를 두고 당과 갈등이 심화되고 이로 인해 발해 국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온건론자인 발해왕의 동생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긴장이 고조되다 결국 당나라를 침공하는 데 이른다. 무왕은 산동의 제1 교역항 등주(登州)에 장문휴(張文休) 제독을 보내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의 목을 베었다. 단 1회성 습격이기 때문에 곧바로 회군했다. 또 무왕은 해(奚)족과 연합해 요서 일대를 공격하였으나 당군의 방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회군했다.

이에 당은 신라와 함께 연합으로 발해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이 때 신라군은 겨울에 북정(北征)을 감행한 탓에 교전은 하지 못하고 퇴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애초에 발해는 신라 방면으로 본격적으로 확장 의지를 보인적이 없기 때문에, 이전까지 당과 대립하다 발해의 등장으로 겨우 화해한 신라 입장에서는 본격적으로 공격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당과 접전을 벌이는 한편으로 이 시기부터 발해의 당 문화 수용이 본격화되었고 지방 통치도 일원적인 주부현제로 편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문왕 사후 약 30년간 4대 국왕인 폐왕부터 9대 국왕인 간왕까지 왕이 6번 바뀌는 혼란기가 이어지다가 10대 국왕인 선왕이 즉위함에 따라 혼란기가 진정되었다. 선왕 자체가 고왕 대조영의 직계가 아니라, 그 동생 대야발의 후손이다. 발해 왕위 계승이 얼마나 복잡하고 치열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어째 고구려의 초기[12]와 쇠퇴기[13]가 생각난다.

그 손자 대이진의 대에 이르러 다시 국력이 융성하여 주변국에게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다. 이 시기에 흑수말갈이 비로소 발해의 세력권에 들어왔으며, 학자에 따라서는 요동 지방을 지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이때 신라와 국격을 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신라는 이전까지 당 중심의 천하관에서 넘버 2를 자처했는데, 사신의 대우, 빈공과 합격생 수나 수석 문제 등에서 발해에 밀린다는 인상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밑에 나오는 최치원의 글도 그런 문제로 나온 것이다.

발해의 주요 교역로

우리가 흔히 발해의 지방제도에 대해 배울 때 보게 되는 5경 15부 62주의 행정체제도 이 때 완성된다. 그러나 행정제도의 완비가 고구려, 말갈인들의 완전한 융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갈인들은 심지어 841년 일본에 파견된 사신에도 말갈추장으로 추정되는 대수령 65인[14]이 따로 동행할 정도로 독립적인 활동을 펼쳤으며 둘은 발해 멸망까지 끝내 융합하지 못했다. 실질적인 행정구역을 의미하는 주현의 정확한 규모는 전해지지 않으나 일부 남아있는 이름으로 추정해 보건대 62주 아래에 약 200~250여개 현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840년대부터 그 국력이 다시금 쇠퇴하기 시작해서, 위구르를 멸망시킨 키르기즈 족보다 그 대접 수위가 아래로 내려간 수모를 겪기도 했다. 결국 10세기의 1/4을 간신히 넘기고는...

3. 멸망

발해는 9세기 들어 당(황소의 대반란, 874~884)과 신라(후삼국 분열)의 몰락 분위기에서도 큰 쇠퇴 징후를 보이지 않지만 15대 왕을 끝으로 갑작스럽게 파탄난다. 단 15일만에 요(遼)나라 황자 야율요골(耶律堯骨)이 이끄는 기병대에 상경(上京)이 함락된 것. 다음은 《요사》의 발해 멸망 관련 부분이다.

12월 을해일에 조서를 내려 말했다. "이른바 두 일 중에 하나는 마쳤지만, 발해와 대대로 원수 진 것만은 설욕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안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병력을 일으켜서 발해를 대대적으로 친정했다. 황후, 황태자, 대원수 야율요골이 모두 따랐다.

- 윤월 임진일에 목엽산(木葉山)에서 제사를 올렸다.
- 임인일에 오산(烏山)에서 푸른 소와 흰 말을 잡아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
- 기유일에 살갈산(撒葛山)에 머물렀는데 귀전(鬼箭)을 쏘았다.
- 정사일에 상령(商嶺)에 머물렀는데 부여부를 포위했다.

- 천현(天顯) 원년(926) 봄 정월 을미일에 흰 기운이 해를 꿰뚫었다.
- 갑신일에 부여성을 손에 넣고 그곳의 수비하던 장수를 죽였다.
- 병인일에 석은(惕隱) 안단(安端), 전북부(前北府) 재상 소아고지(蕭阿古只) 등에게 명령을 내려서 1만 기를 선봉으로 삼았는데, 대인선 측 늙은 재상[老相]의 병력을 만나서 깨뜨렸다. 황태자, 대원수 야율요골, 남부(南府) 재상 야율소(耶律蕭), 북원(北院) 이리근(夷離蓳) 야율사녈적(耶律斜涅赤), 남원(南院) 이리근 야율질리(耶律迭裏)가 그날 밤에 홀한성을 포위했다.
- 기사일에 대인선이 항복을 청했다.
- 경오일에 홀한성(忽汗城) 남쪽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 신미일에 대인선이 흰 옷을 입은 채 새끼줄로 몸을 묶고 흰 양을 끌며 관리 300여 명을 데리고 나와서 항복했다. 황제는 두터운 예로 대하고 그들을 풀어줬다.
- 갑술일에 발해의 군현에 조유를 내렸다.
- 병자일에 근시(近侍) 강말달(康末怛) 등 13명을 성 안으로 들여보내서 무기들을 수색하도록 했는데, 수비병에게 해를 입었다.
- 정축일에 대인선이 다시 모반해서 그 성을 공격해서 깨뜨렸다. 성 안에 행차했다. 대인선이 말 앞에서 죄를 청했다. 명령을 내려서 경비병들로 하여금 대인선 및 그 족속이 나가도록 했다. 제사를 올려서 천지에 알렸다. 다시 군중으로 돌아왔다.

- 2월 경인일에 안변(安邊), 막힐(鄚頡), 남해(南海), 정리(定理) 등의 부 및 여러 도의 절도사, 자사들이 내조하자,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 보냈다. 얻은 재물을 장병들에게 내렸다.
- 임진일에 푸른 소와 흰 말을 잡아서 천지에 제사를 올렸다. 대사령을 내리고, 천현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사신을 보내 발해 평정한 일을 당에 알렸다.
- 갑오일에 홀한성에 행차해서 창고의 물건을 검열하고 따른 신하들에게 차등을 두어 내렸다. 해(奚)의 부장 발로은(勃魯恩), 왕욱(王郁) 및 회홀(回鶻), 신라, 토번(吐蕃), 항(項), 실위(室韋), 사타(沙陀), 오고(烏古) 등이 정벌에 따라서 공이 있었기에, 후한 상을 내렸다.
- 병오일에 발해국을 동단(東丹)으로, 홀한성을 천복(天福)으로 개칭했다.

十二月乙亥,詔曰:「所謂兩事,一事已畢,惟渤海世讎未雪,豈宜安駐!」乃舉兵親征渤海大。皇后、皇太子、大元帥堯骨皆從。閏月壬辰,祠木葉山。壬寅,以青牛白馬祭天地于烏山。己酉,次撒葛山,射鬼箭。丁巳,次商嶺,夜圍扶餘府。天顯元年春正月己未,白氣貫日。庚申,撥扶餘城,誅其守將。丙寅,命惕隱安端、前北府宰相蕭阿古只等將萬騎為先鋒,遇諲譔老相兵,破之。皇太子、大元帥堯骨、南府宰相蘇、北院夷離斜涅赤,南院夷離迭裏是夜圍忽汗城。己巳,諲譔請降。庚午,駐軍於忽汗城南。辛未,諲譔素服,稿索牽羊,率僚屬三百餘人出降。上優禮而釋之。甲戌,詔諭渤海郡縣。丙子,遣近侍康末怛等十三人入城索兵器,為邏卒所害。丁丑,諲譔複叛,攻其城,破之。駕幸城中。詔以兵衛諲譔及族屬以出。祭告天地。複還軍中。二月庚寅,安邊、頡、南海、定理等府及諸道節度、刺史來朝,慰勞遣之。以所獲器幣諸物賜將士。壬辰,以青牛白馬祭天地。大赦,改元天顯。以平渤海遣使報唐。甲午,複幸忽汗城,閱府庫物,賜從臣有差。以奚部長勃魯恩、王郁自回鶻、新羅、吐蕃、項、室韋、沙陀、烏古等從征有功,優加賞賚。丙午,改渤海國為東丹,忽汗城為天福。
『遼史』卷2「本紀」第二 ‘太祖’下

"병인일…포위했다" "기사일…항복"에 주목. 0병인, 1정묘, 2무진, 3기사, 딱 사흘 걸렸다.

발해의 허망한 멸망은 한국 고대 사학계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힌다. 발해에 대한 기록 자체가 별로 남아있지 않기에 강성했던 발해가 그리도 허망하게 망했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그 큰 나라가 단지 보름만에 멸망한 것을 두고 불가사의라 여겼는데, 일단 중앙 귀족층의 분열과 요의 기동성을 이용한 수도 공격을 이유로 삼았으나 사료 부족 등의 문제와 겹쳐 명확한 규명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멸망하기 수 년 전에도 빼앗겼던 요동 지방을 되찾는 등의 모습으로 보아 귀족층의 분열보다는 갑작스러운 수도 공격에 더 무게가 실리는 편이다.

국가 존속기간이 228년으로, 한국 역사에서 큰 축을 가진 국가들 중에선 존속기간이 짧은 편이다. 고려를 제외하면 5백년 이상 지속되었기 때문. 고려도 거의 500년이고.

3.1. 멸망 원인

3.1.1. 백두산 분화설

이 설은 일본에서 화산학자들이 일본의 지층을 조사하다가 백두산의 화산재를 발견하면서 이에 대해 연구하면서 제기된 학설이다. 한때 학계에서는 몰라도 고대사에 관심 있는 일반인 수준에서는 꽤나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가설이다. 발해의 멸망 시기와 백두산의 대폭발 시기가 맞물린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힘을 얻기 시작했다. 실제로 발해의 5경이 모두 백두산에 인접해 있어 백두산 폭발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과 당시의 백두산 대폭발은 비공식적으로 역사시대 이래 최대의 화산폭발로 추정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15] 실제로 백두산 서부에서 대규모의 화산쇄설류가 이동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의 땅을 통치하지 않고 폐현시킨 것도 파괴의 정도가 심각하여 땅을 버린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아서 이 학설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해 사실상 기각되었다. 가장 큰 반론은 동아시아 3국 어디의 사서에도 아무런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거란의 역사서인 <요서>는 정복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이기 때문에 은폐했을 확률이 높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 정도 규모의 화산폭발이 발해 이민을 받아 준 고려의 역사서인 고려사에 전혀 기록이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백두산 폭발이 발해 멸망 전에 일어났더라도 실제로는 발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주장도 있다. 연구에 의하면 백두산 대폭발은 겨울에 발생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겨울에는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화산재 대부분이 동해와 일본으로 날아갔고 상경용천부 또한 백두산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를 입기에는 거리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최근 백두산의 화산재와 기록이 존재하는 일본 고대 화산의 화산재와 시간대 비교를 통한 연구에 의하면 발해 멸망이 926년 1월에 발생했는데 백두산 분화는 969년(±20년)에 일어났다고 추정되어 이 학설은 더욱 힘을 잃었다. 이로 인해 화산호(천지)가 형성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어쨌거나 발해 멸망 후 백두산 근방의 발해 잔여 세력들이 부흥운동을 열심히 펼쳤다는 점에서도 발해 지배층의 장악력이 결정적으로 와해된 것이 아님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몇 차례의 부흥운동이 모두 실패하면서 그 뒤로 동만주에서 새 나라가 일어나기까지는 200여 년의 시간이 걸린 것도 화산 폭발과 관련 있지 않나 하는 추측도 있다. 실제로도 강제 이주에 의한 것이든 자연 재해을 피한 것이든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다.

3.1.2. 지배층의 내분설

발해 왕들의 기록이 안습하기 때문에 추정에 그칠 따름이지만 왕가를 포함한 귀족층의 내분도 멸망 원인으로 충분히 생각해볼 만하다. 발해 이전에 거의 나라가 망한다기보다는 세계 멸망을 맞이한 듯한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나라 공격 한참 전부터 고위층을 비롯한 망명 행렬이 이어지고 있음이 나타나는데, 이를 요동 전역이 장기간 유지된 후유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3.1.3. 거란 급습설

이 역시 가장 유력한 설, 제1 방어선으로서 발해의 전력이 집중된 요동 전선을 우회하고 발해 중심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부여부를 급습, 함락시킨 다음 발해의 정규군이 전력을 정비하기 전에 상경용천부로 진격하는 속전속결 방식으로 그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 개전부터 대인선의 항복까지 소요된 기간을 감안해 보면 제일 그럴 듯한 이론이다.

고대의 동아시아의 전쟁은 '국경에서 수도까지 직선 전진' 형태로 자주 벌어졌기 때문에 방어 측의 병력 집결이 늦으면 그대로 끝나는 일이 왕왕 있었다. 단적으로 고구려나 백제 멸망 때의 나당 연합군도 수도인 사비, 평양으로 어택땅 하는 경향을 보인다. 거란은 이 전술을 고려와의 전쟁 때도 써먹는다. 단 이러한 전략은 중앙 정부에게 이른 시간에 항복을 받아낼 수 있는 대신 대다수 귀족층이나 지방 세력이 그대로 남아 점령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복국 운동 또한 자주 벌어지게 되는 문제점이 있는데, 실제로 발해의 유민들은 멸망 후 200년에 가까운 장구한 세월 동안 이른바 부흥운동을 펼쳐 나갔다.[16]

3.1.4. 말갈과의 대립설

발해가 고구려 유민+말갈+기타 민족들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에서 나온 설.발해 말기 이들이 들고 일어나 안그래도 혼란한 발해 내부의 혼란을 가중시켜 최종적으로 발해 멸망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는 설이다. 말갈이 끝끝내 발해에 융합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 설. 다만 이 말갈을 국가내의 하부층으로 인식해서 내부 분열로 보느냐, 아니면 사실상 소화불량에 걸려서 자력으로 이탈한 흑수말갈로 이해해서 배후의 위협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국가 구성 자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3.2. 멸망 이후의 정세

3.2.1. 발해 멸망에 대한 고려의 반응

고려는 거란 침입에 따른 발해의 구원 요청을 무시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발해와 고려가 적대적 관계를 맺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당시 고려 태조 왕건은 견훤에게 밀리고 간신히 휴전 조약을 맺은 상황이었므로 발해에 군사를 파견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는 934년 발해의 마지막 세자(혹은 태자)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바 있다. 다만 이들은 공짜 국력증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 대광현은 고려에서 맹활약하며, 그의 아들인 대도수도 거란과의 전쟁에서 활약한다. 얄궃게도 대도수는 이 전쟁에서 거란군에게 포로로 잡혀 옛 발해 땅으로 압송되어 버린다. .

때문에 발해와 고려는 경쟁관계에 있다기보다는 고려가 발해에게 도와줄 여력이 없었거나, 혹은 데면데면한 관계였을 것이다. 마치 친하지 않은 남매들 끼리는 특정휴일이 아니면 서로 보지도 않고 서로 연락하는 일 조차 거의 없는것 처럼말이다. 발해 멸망 이후, 발해 부흥 운동에 대해서 고려 내부에서는 도와주자는 의견과 무시하자는 의견이 서로 대립하는 등 통일되지 않은 성향을 보인다. 고구려의 정통성 승계문제에 현실적 국제역학질서, 심지어 내부의 고구려계와 신라계의 대립 등 여러 문제가 얽히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에서는 스스로를 고구려를 이었다고 하여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를 원수처럼 보았다. 이는 고려 태조 때 거란의 사신이 가져온 낙타들을 다리 밑에 매두고 전부 아사시키고, 사신들은 전부 유배보낸 것으로 극명히 표출되었다. 물론 이는 표면적 명분이고,실제로는 고려에 유입된 발해 유민 여론을 생각해 그랬을 확률이 높다.

발해는 북방의 이민족인 거란에게 멸망하였고, 스스로 남긴 역사서가 없기 때문에,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記)》 등에 언급된 것을 제하면 한반도 국가의 관찬, 사찬 사서의 서술 범위 밖에 있다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조명되다가 조선 후기 학자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의 《발해고(渤海考)》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한국사의 영역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3.3. 발해부흥운동

발해 멸망 후 발해 부흥 운동을 일으킨 지역이 몇 군데 있었지만 얼마 안 가 대부분 진압당했다. 한편으로 이 점은 요가 중앙부터 공격해 발해를 무너뜨렸다는 근거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이후로도 200년간 부흥운동이 벌어진다는데 의의가 있다. 항목 참조.

4. 정치/사회상

4.1. 정치와 행정, 군사

발해는 관제를 편성함에 있어, 당나라의 3성 6부제도를 모방하였으나, 그 명칭을 바꾸어 그들만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각 관부의 기능은 실제로 당나라의 것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우선 3성으로는 정당성(政堂省), 선조성, 중대성이 있다. 정당성은 당의 상서성에 해당하는 곳으로 발해의 모든 정령(政令)을 집행하는 최고의 행정 서무 기구였다. 3성이 형식상 분립되어 있지만, 정당성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3성은 기능상 평등하게 분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성의 수장인 대내상(大內相)을 중심으로 당의 상서령에 해당하는 선조성 수장인 좌상(左相)과 중대성 수장인 우상(右相)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좌우평장사와 좌우사정사가 있고, 좌사정과 우사정이 그다음에 있었다. 그 밑에 좌사정은 충부/인부/의부를 거느리고, 우사정은 지부/예부/신부를 거느리는 업무 분담이 이루어졌다. 발해 6부의 명칭은 충, 인, 의, 지, 예, 신 등 5행의 덕목명을 따른 것이다.

중정대(中正臺)는 발해의 감찰기구로 수장은 대중정(大中正) 1인이다. 그 다음은 소정(少正) 1인이다.

주자감은 귀족 자제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었으며, 항백국은 왕실 후궁의 명령 전달 및 호위, 일상생활의 시중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항백국의 수장은 상시(常侍)로서 환관만을 임명하였다.


발해의 지방 조직은 5경(상경/중경/동경/남경/서경) 15부(상경용천부/중경현덕부/동경용원부/서경압록부/남경남해부/부여부/동평부/막힐부/철리부/정리부/회원부/안변부/안원부/솔빈부/장령부/) 62주와 3개의 독주주로 구성되었다. 주 아래에는 100여개의 현이 있어 부-주-현의 3단계 행정관리체제를 갖추었다. 부에는 도독을 두었고, 주에는 자사를 두었으며, 현에는 현승을 두었다. 발해의 이러한 지방 행정 관리체제는 당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발해의 군사조직은 당의 16위제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각 위가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또한, 구체적인 중앙군사조직의 역할과 그 운영원리에 대해서도 뚜렷한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재 발해의 군사조직은 신당서 발해전의 기록 해석의 차이에 따라, 좌맹분위,우맹분위,좌웅위,우웅위,좌비위,우비위,남좌위,남우위,북좌위,북우위로 이루어졌다는 10위설과 남좌우위,북좌우위를 각각 하나로 보고 8위제였다고 보는 견해로 나뉘어졌다. 맹분위,웅위,비위가 궁성의 숙위를 담당하고, 남북의 좌우위가 각각 남위금병,북위금병의 역할을 담당했으리라고 추측된다. 각 위에는 대장군 1인, 장군 1인씩을 지휘관으로 두었다. 각 위의 장군 아래에는 다수의 지휘관이 있었다.

지방군사제도에 대해선, 촌장인 수령을 지휘관으로 촌락민을 병사들로 삼는 군사조직이 촌락을 단위로 조직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5. 지리

5.1. 영토

발해의 여러가지 지도. 사료가 부족하여 정확한 영토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치 않다.
무엇을 믿을지는 너 꼴리는대로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은게, 실제 발해사와 얽혀있는 남북한중일러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에 맞는 지도를 채택하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만 봐도 발해 연구사 초기에는 자신들의 땅인 연해주-시베리아와 겹치는 발해의 동북방 영역을 넓게 인식했으나 근래에 들어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연해주-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의 역사를 발해보다 높게 평가하려는 의도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꼭 러시아만 그런게 아니라 동북공정을 마무리한 중국, 자신들의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해사를 연구했던 일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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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지도는 중국,러시아의 일부에서 지지. 의외로 중국에서는 발해의 동북이 넓게 그려진 지도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발해의 동북이 러시아 방면으로 광범위하게 뻗쳐 있는 지도를 사용하곤 하는데 그 이유가 발해를 당의 도독부 정도로 보아서(…)이다. 중국은 어차피 발해를 말갈과 동류로 인식하며 말갈이 러시아방면까지 넓게 퍼젔으니 발해도 도찐개찐이라는 식이다. 중국에서 제작한 지도를 보면 알수있다. 위 지도는 일본에서 제작되었지만 저런 지도가 일본의 주류는 아니고, 일본에서는 주로 아래 지도에서 요동과 서북한을 제외한 지도가 주류이다. 일본의 교과서나 역사책을 보면 알수있다. 일본은 남북한과 함께 발해를 한국사로 여긴다. 그 기저에는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깔려있기는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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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이 현재 한국 교과서에 실려있는 지도. 일부는 요동과 서북한 지역을 무주공산이라 하기도 하지만 국사교과서를 위시하여 대체로 발해의 요동과 서북한 지역 지배를 인정하는 추세이다. 실제로 요동과 서북한 지역을 무주공산으로 설정하면 당과 신라의 진격이 막힌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특히 요동 지역은 주요거점이기 때문에 당, 발해, 후의 거란이 치열하게 군사적 대립을 벌인 지역이다.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현재의 서북한 지역,아무르강 유역을 직접 통치하지는 못했다는 것으로 일치되는 양상을 보인다. 다만 요동에 대해서는 교과서에서도 그렇고 선왕 이후로는 발해의 통치하에 들어간 것으로 보는것 같다.

무엇보다도, 발해의 정확한 영토를 판단할만한 사료가 없기도 하지만 당시의 발해가 근대국가와 같은 확고한 국경선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 자체가 매우 낮다. 특히 발해가 위치한 지역의 인구밀도 자체가 워낙 낮아서... 당장 해당 지역에서 중국과 러시아간의 국경조약이 맺어진 것도 청나라 시대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즉, 발해의 영토는 현대와 같이 선으로 구별되는 배타적인 면 형태가 아니라 중심부로부터 파급되는 지배력이 변경으로 갈수록 약해지는 형태였을 것이다. 사료가 발견된다고 해도, 명확한 국경 개념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해석하는 사람 편한대로 그을 수 있는 셈. 다만 최근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이 발견되면서 영토 범위에는 큰 혼란이 따른다.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의 위치가 아무르강너머의 블라고베셴스크 주변에 있기 때문.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발해인들이 서아무르 유역 까지 진출했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으므로 아무르 너머까지 지배범위가 성립될수도 있다.

6. 문화

6.1. 발해 문학

발해가 ‘북국(北國)’이라면 신라는 ‘남국(南國)’이라 할 수 있다. 두 나라가 함께 있는 시대를 ‘남북국시대’라고 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17] 발해와 일본이 주고받은 국서는 일본에 많이 보관되어 있으며, 당나라 유학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중 당나라 문인이 발해인에게 준 시 등도 소중한 자료로 연구되고 있다. 발해는 당나라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일컬을 정도로 번영을 누리고 한문학의 수준을 자랑했지만, 거란족의 침공으로 문헌자료가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현재 남아있는 발해문학 관련 사료는 외국에 전해진 시문과 고고학 발굴의 성과뿐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발해에도 한자를 이용해 자국어를 기록하는 방법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구당서>에서 발해에는 “자못 문자 및 서기(書記)가 있다”라고 한 말이 그 증거이며, 한자를 이용해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어 쓴 것이 거의 확실시되나[18][19] 아직 해독되지 못했다.

발해문인 중 오늘날까지 작품이 남아 전하는 경우는,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가 일본 문헌에 수록되어 전하는 것들이다. 일본에 간 발해문인들은 자리잡기 시작한 일본 한문학에 상당한 자극과 영향을 미쳤다. 양태사, 왕효렴, 배구, 배정 등의 시가 남아 있다.

사신의 일행에 동참한 승려들의 시도 몇 편이 남아 있다. 발해문학작품이 국내에 남은 것은 2편의 비문(碑文)뿐인데, <정혜공주묘비>와 <정효공주묘비>이다. 이 비문은 변려문의 형식을 갖췄으며, 감각과 표현을 최대한 세련되게 갖춘 귀족문학의 기풍을 아주 잘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두 비문은 고유명사나 숫자 따위만 다르고, 다른 대목은 거의 같았다. 고정된 격식을 마련하고 필요한 대목만 고쳐 썼음을 알 수 있다. Ctrl-c, Ctrl-v 의 폐해 아름답게 표현하는 격식을 너무 존중한 나머지 창의력을 잃고 쇠퇴하는 폐단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20][21]

우리나라 문학사를 연구하는 교수들 중에서 발해문학을 우리나라 문학사로 다루는 이는 조동일 교수가 거의 유일하며, 그 이외는 발해문학을 다루지 않거나 제외하고 있다. 이것은 발해문학의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발해문학 자체가 동아시아 전체의 문화사에 편입된 공동문학권이라고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6.2. 융합된 문화

발해는 고구려 문화의 토대 위에서 당의 문화를 수용했으며, 말갈인의 토착 문화를 존중하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발해만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발해의 수도 상경은 당의 수도 장안을 본떠 건설하였는데, 외성과 내성, 주작대로를 갖추었다. 그 안에 궁궐과 절을 세웠는데 궁궐터에서 발견된 온돌 장치, 절터에서 나온 벽돌과 기와 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무덤을 보더라도 고구려와 당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정혜 공주 묘는 굴식 돌방무덤 양식으로 고구려 고분에서 보이는 모줄임천장 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보다 늦게 만들어진 정효 공주 묘는 벽돌무덤으로 당과 고구려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데, 내부의 벽화는 당에서 유행하던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한편 발해 초기의 흙무덤과 출토 유물을 통해 말갈의 전통도 알 수 있다.

발해에서도 통일 신라와 당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성행하여 주요 도시에 절을 세웠다. 수도 상경에서는 무려 10여 개의 대규모 절터가 발견되었고, 상경과 동경의 절터에서는 많은 불상이 나왔으며, 탑과 석등도 볼 수 있다. 탑은 당의 양식을 따라 벽돌로 만들었으며, 그 중엔 무덤 위에 세운 것도 있어 발해만의 특색을 보여준다. 절에 세운 석등 중에는 높이가 6m가 넘는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는 도 있어 발해인의 힘찬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신라에서는 발해의 이러한 말갈적 특성을 영 좋지 않게 보았던 모양이다. 삼한일통의 자부심이 컸던 신라로서는 고구려의 사직 역시 신라로 통합되었다고 생각했고[22], 발해에 대해서는 고작해야 오랑캐와 섞인 반(半)야만의 무리, 고구려 조정을 참칭하는 세력 정도로만 여겼다. 화이(華夷)적 세계관의 당대 동아시아에서, 발해와 신라 양국 간 동족 의식은 거의 미미하였던 듯. #

7. 한·중 역사 논란

7.1. 건국 주체 문제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흔히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식으로 건국 세력이 고구려의 유민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발해의 족원(族源)을 따지는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여러 사서에 대조영이 말갈 출신임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의 기록은 이렇다.참고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
渤海靺鞨大祖榮者 本高麗別種也

신당서(新唐書) 발해전의 기술은 이렇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덧붙여진 자로서, 성은 대씨이다.
渤海 本粟末靺鞨 附高麗者姓大氏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대조영 등은 고구려인이 아닌 속말말갈 출신으로 나중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된 집단에 속하는 것이 된다. 한국에서는 흔히 신당서의 기록을 인정하지 않는데, 그것은 구당서의 기록과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즉 구당서에는 "말갈족이 주축이 된 나라지만 건국자는 고구려인"이라고 사실에 충실하게 기록한 반면 신당서에는 "말갈족의 나라이며 지배층도 말갈인" 이라는 식으로 일관성을 지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구당서와 신당서 중 구당서 쪽이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구당서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 사학계의 일반적인 입장이다.

하지만 중국 사학계는 구당서의 문장이 대조영을 '고려인'이라 하지 않고 '고려 별종'이라고 지칭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즉, 그냥 '고구려인'이라면 굳이 '별종'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국 사학계는 '별종'을 '다른 종족(異種)'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라고 반박한다. 백제나 고구려를 부여 별종이라고 한 것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오히려 고구려에 대한 계승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수서에서는 백제를 고구려 별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고고학적 연구 결과로도 충분히 증명되거니와 건국 설화 등을 볼 때 고구려 지배 세력이 부여에서, 백제의 지배 세력이 부여 혹은 고구려에서 나왔다는, 최소한 아주 강한 친연성을 가진 일족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별종'으로 표현한 이유가 고구려와의 차별성을 강요하기 위한 표현이 아님은 확실하다.

하지만 구당서의 찬자가 대조영을 고구려의 '본류'로 생각하지 않고 일종의 '방계'로 취급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대조영에 대해서는 단순한 계승을 나타내는 표현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본래(本)' 고려 별종이라고 하여 건국 이전부터 대조영이 고구려와 분리시켜서 볼 수도 있는 어떠한 집단의 소속임을 강하게 시사하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구당서의 같은 기사에서 대조영이 나라를 세운 후 모여든 고구려 유민에 대해서도 '고려 별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최치원이 쓴 글이다. 최치원은 당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 "발해(渤海)가 신라의 윗자리에 거함을 불허함을 사례하는 표(謝不許北國居上表)" 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참고자료[23]

臣謹按渤海之源流也。句驪未滅之時。本爲疣贅部落。靺羯之屬。寔繁有徒。是名栗末小蕃。嘗逐句驪內徙。其首領乞四羽及大祚榮等。至武后臨朝之際。自營州作孼而逃。輒據荒丘。始稱振國。
발해(渤海)의 원류(源流)는 고구려(高句麗)가 망하기 전엔 본시 사마귀만한 부락(部落)으로 말갈(鞅鞨)의 족속이었는데 이들이 번영하여 무리가 이뤄지자 이에 속말(粟末) 소번(小蕃)이란 이름으로 항상 고구려를 좇아 내사(內徙)하더니, 그 수령 걸사우(乞四羽) 및 대조영(大祚榮) 등이 무후(武后) 임조(臨朝) 때에 이르러, 영주(營州)로부터 죄를 짓고 도망하여 문득 황구(荒丘)를 점거하여 비로소 진국(振國)이라 일컬었나이다.

비록 이 글에서는 고구려의 일원이었다는 것도 분명히 밝히고 있지만, 최치원이 발해의 원류를 '말갈'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강조하는 국내의 발해 연구자들은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각각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라는 다른 계통으로서 각자 자기 계통의 유민들을 이끌었다고 해석하고 있는데, 최치원의 글에서는 이들이 모두 같은 부족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강조하는 국내의 발해 연구자 중에서도 대조영이 말갈'계'[24]라는 것 정도는 굳이 부인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고 하긴 그렇다. 원체 연구자가 없으니). 다만 이를 인정한다면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을 강조하는 측에서 부정한 신당서의 기록에 반대한 이유가 거의 사라지게 된다.

여기까지 의문을 제기했으니 우리측의 근거도 제시하기로 하자. 발해를 고구려인이 세운 나라로 기록한 역사서 중에서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삼국유사이다.[25][26]참고

三國史云,儀鳳三年高宗戊寅 高麗殘?類聚 北依太伯山下.國號渤海.開元二十年間 明皇 遣將討之.又聖德王三十二年玄宗甲戌 渤海靺鞨越海侵唐之登州.玄宗討之.又新羅古記云 高麗舊將祖榮大氏 聚殘兵 立國於太伯山南 國號渤海.
삼국사에서 말하기를, 의봉 3년 고종 현술에 고려의 남은 세력들이 서로 모여 북쪽의 태백산 아래 의지하였다.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개원20년 경에 명황이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다. 또한 성덕왕 32년 현종 갑술, 발해말갈이 바다를 건너 당의 등주를 침범하였다. 이에 현종이 토벌하였다. 신라고기에 말하기를 고려의 옛 장수 조영은 대씨이다.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발해라 하였다.

여기에서 신라고기가 언급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최치원의 글이 발해에 대한 신라의 일반적인 인식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이외에도 제왕운기에서 발해를 한국사의 영역으로 간주하고 있다.

자 이젠 희망적인 이야기도 약간 더해보자. 우선 지배층인 고구려계가 소수이고, 피지배층인 말갈계가 다수였다는 식의 기록은 기본적으로 일본사서인 유취국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유취국사중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또 재당학간승 영충 등이 덧붙여 보낸 글을 받들어 전하였다. 발해국은 고려의 옛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천명개별천황7년 고려왕 고씨가 당에게 멸망 되었으며, 그 후 천지진종풍조부천황 2년 대조영이 비로소 발해국을 세웠다. 화동 6년에 당에서 책립받았다. 그 나라는 사방 2천리이며, 주.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촌리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은 적다. 모두 토인이 촌장이 되었으며, 대촌에는 도독, 다음에는 자사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토지는 극도로 춥고, 논이 마땅치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
又傳奉在唐學間僧泳忠等所附書, 渤海國者高麗之故地也. 天命開別天皇七年, 高麗王高氏爲唐所滅也. 後以天之眞宗豊祖夫天皇二年大祚榮始建渤海國, 和銅六年受唐冊立. 其國延? 二千里, 無州縣官驛, 虛虛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日都督, 次日刺史, 其下百姓皆日首領, 土地極寒, 不宣水田,俗頗知書.

사실 이 부분을 단순하게 봐서 그렇지, 이 부분만 봐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어느 시대의 이야기인지, 영충은 발해에 대해서 얼마나 알았는지, 어느 길을 지나서 왔는지[27]등이 문제가 된다. 현재까지는 이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지 못한 감도 없지 않다.

때문에 고구려유민의 구성비도 대조영 시기, 문왕과 무왕 시기, 흑수말갈을 흡수한 이후 등을 모조리 고려해야 한다. 또한 고구려 멸망 이후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추측해야 한다[28]. 이 단계로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유취국사 내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

여기에 말갈의 존재가 또 문제가 된다. 애초에 말갈이라는 말이 당대인들이 자신들을 일컬어 사용한 말이 아니라, 부르는 쪽에서 편한대로 지어 부른 것이어서, 범칭, 비칭 등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다. 심지어 고구려내부에서도 동화가 약한 이들에 대해서 말갈이라고 칭했다는 이야기가 있을정도로 그 근거와 배경이 약하다. 그래서 최치원이 사용한 발해말갈이라는 표현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는 평이 있다. 애초에 최치원이 쓴 글이 발해와 신라 사이의 자리 뺐기 논쟁 속에서 쓰여진 '사불허북국거상표(발해에게 높은 위치를 인정하지 말라는 이야기)'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발해를 깔고 들어갈 필요가 있기도 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영향력 속에서 움직인, 그래서 고구려인과 구별할 수 없는 이들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도 상존한다.

다만, 영주 탈출 시에 걸걸중상이 말갈족장인 걸사비우와 동등한 위치에 있으면서(진국공과 허국공으로 작위 수준도 같다) 각각 고구려유민과 말갈 유민을 인솔하였는데, 이 걸걸중상을 순수 말갈인으로 본다면 이 역시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도 발해는 우리나라로 보는 입장에서는 희망적인 이야기.[29]

이상에서 소개한 한중 사학계의 쟁점과 본 항목이 확장되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발해는 역사 자체보다 귀속 여부에 더 관심을 받는 나라가 아닌가 싶다.

고로 러시아 사학자들은 발해를 중국사나 한국사에서 분리시켜 말갈족의 역사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얼핏 보면 중립적인 듯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렇게 해야만 자국(연해주)의 역사에 포함시키는 것이 가능할 테니 말이다. 발해에 대한 연구 성과를 가장 활발히 내놓고 있는 나라는 오히려 영토와는 관련없는 일본인데, 중국 다음으로 발해와 활발한 교류 관계를 가진 나라[30]라는 점도 있겠지만 얘네들도 은근히 발해가 일본의 조공국이었다는 일본 고대 사서의 기록에 자극받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조공국일 확률은 거의 없다. 분명히 발해와 일본의 관계중 더 적극적인 입장은 발해였지만, 이는 육지로 당과 신라의 국경선을 접하는 발해와 바다라는 장벽을 통해서 한 발 떨어진 일본의 입장차이 정도였다.

무엇보다 당시 고구려 멸망 후 이주해 온 말갈 세력으로서 말갈 세력이 원래 중국에 붙었다 고구려에 붙었다 했지만 고구려에 속해 있었다. 고대 국가라는 게 그렇듯이 왕은 귀족 연합을 대표해주는 대표에 지나지 않았고 후기에 왕권이 강화되기 전까진 대표자 성격이 강했다. 애초에 고구려인, 말갈인 나누는 게 웃긴 게 원래 하나였다가 합쳐진 것이다. 흑수말갈이야 지들이 떨어져 나간 것이고... 애초에 한국 국사 시간에 잘 못 가르친 것이 화근이었다.

2005년부터 중국은 옛 상경성터 출입을 통제하고 발해의 궁성(宮城)을 복원하는 작업을 실시했는데, 2008년 복원이 완료된 상경의 궁성이 발해 궁성인지 장안성(長安城)의 궁성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실제로 발해의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는 장안의 주작대로(朱雀大路)를 모델로 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장안성의 구조나 건축양식은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 것이었고 발해의 유물들 또한 당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드러나기 때문에 당의 문화가 일부분 드러나지만, 상경의 복원수준은 독자적으로 당풍(唐風)을 수용했다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장안성과 똑같이 해놓은데다가, 안내판에 대놓고 발해는 당의 지방정권이라고 쓰고 있다.

심지어 2012년 1월에 중국 CCTV는 발해가 당의 지방정군이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으며, 이 다큐멘터리는 대조영이 당나라의 도독으로 당 중앙정부에서 발해군왕 책봉을 받으며 무릎을 꿇는이뭐병 스러운장면까지 넣었다.

결론은 망했어요/우린 안될거야. 인가?...

7.2. 역사 주체 문제

동북공정 항목 참고



8. 참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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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발해의 강역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 [2] 더 자세한 이야기는 발해 인구 고찰 참고.
  • [3] 발해 초기의 인구는 구당서에 적힌 50여만 명정도로 추정된다
  • [4] 한편으로는 '황상'이라는 표현(정혜공주 묘비)과 '황후' 묘비로 보아, 고려처럼 외왕내제였을 것이다.
  • [5] 덕분에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연개소문의 말단 부하->고구려의 청년 장수->발해의 건국왕으로 그려진다.
  • [6] 다만 이라고 칭했던 유력자들은 장안이나 서북지방으로 이주시켰다. 이정기는 이쪽에 포함되는 인물이다. 영주는 일종의 기미주로 이민족 집합소와도 같은 곳이었다.
  • [7] 말갈은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고조선~발해까지 북방에 있었던 나라들에 동화되지도 않고, 심지어는 백제 기록에도 등장하는 등. 이후로는 아는 대로, 여진-만주로 이어진 분파가 금나라청나라를 세웠다.
  • [8] 한국의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주몽이 세운 나라가 끝까지 고구려라고 칭했고, 고려는 왕건이 나라를 세우면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고구려 스스로가 장수왕 즈음부터 정식으로 고려를 칭했다는 설이 상당히 인정 받고 있다. 그 때부터 중국측 기록에 '고구려'가 사라지고 '고려'로만 기재되기 시작했고, 장수왕 때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주고구려비(또는 원고구려비라고도 부름)에도 국호가 분명히 '고려'로 기재돼 있다. 그리고 궁예가 나라를 처음 세웠을 때 이름을 흔히 '후고구려'라 하지만 실제로는 '고려'라고 했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한 것은 사실 원상 복구인 셈이었다. 아무튼 '고려'는 왕건이 왕이 될 때 느닷없이 처음 등장한 이름이 아니다. 왕건의 나라를 고려, 궁예의 나라를 후고구려, 고주몽이 세운 나라를 고구려라고 구분해서 부르는 관습은 고려시대 중에 확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용은 태봉 참고.
  • [9] 단 이 '고려왕' 칭호는 발해가 당에 대해서, 그리고 아마도 신라에 대해서도(다만 신라측 기록에는 전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음) 스스로를 고려라고 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일본 측 기록자가 임의로 삽입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당시 일본은 자신들의 소중화적 세계관에서 '고(구)려=일본의 제후국', '고(구)려 왕=덴노의 신하'라고 인식했는데(당연히 국제 외교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일본만의 인식이었지만...) 그러한 군신 관계가 유지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었다는 것. 반면에 '천손'을 자처한 것이 광개토왕비나 《삼국사기동명성왕조에서 보이는 '추모=천제의 아들(또는 손자)'이라는 의식과 연결되므로 자칭이 맞다는 의견도 있다.
  • [10] 단, 이 내용은 최치원의 '사불허불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북국=발해에게 윗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는 표문)'에만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 [11] 사실 이 대아찬이라는 직위도 재미있는 것이, 6두품의 승진 상한이 6관등 아찬을 넘어서는 진골의 품계라는 점이다. 고구려 부흥 운동 시의 고구려 왕족에게 진골의 골품을 준 것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 [12] 차대왕~신대왕
  • [13] 안자왕~평원왕
  • [14] 다만 이들을 편입과 이탈을 반복하며 발해 멸망 후 여진족으로 재편성된 흑수말갈로 이해한다면 이에 대한 이해는 달라질 수 있다.
  • [15] 당시 분출된 화산재는 한반도 전역을 1m의 두께로 덮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고 한다. (출처:<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소원주))
  • [16] 패망후 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고구려와 백제도 이와 비슷하다.
  • [17] 위의 글은 조동일 교수의 책을 참고한 것이며, 어디까지나 현대적인 해석이다. 당시에 발해나 신라, 혹은 당에서 두 나라를 남국과 북국으로 대응되는 것으로 인식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최치원 등이 발해를 북국으로 칭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현대적 해석을 배제하면 사실 단순히 북쪽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남국인 신라에 대응되는 북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이유가 없는 것. 또한 발해 입장에서 신라를 남국으로 칭한 근거 역시 찾기 어렵다.
  • [18] 발해 집터를 발굴했을 때 출토된 기와 등에 문자가 발견되었다
  • [19] 또한 중국 사료에는 당현종 시절 발해가 보낸 외교문서를 당 조정이 해독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다가 이태백이 겨우 해독해냈다는 기록도 있다.
  • [20] 여기까지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제 4판, 1권 참고
  • [21] 다만 대상이 묘비란 것은 좀 문제가 있다. 실제로 묘제는 극도로 보수적이고, 그게 시대적 차이가 없고 왕족 수준의 고위층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 [22] 고구려 왕족 안승이 망국 후 신라에 망명하여 높은 관직과 국성인 김(金) 씨를 하사받았다. 그 외에도 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귀부하였다. 종종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넘어가자
  • [23] 이 글은 최치원이 쓰기는 했는데, 신라왕이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국서의 형식이다. 때문에 일반인이 보낸 편지 하나 정도로 뭐하네 정도로 이해하면 안된다.
  • [24] 백산말갈이나 속말말갈 같은 부류는 고구려 말기 사실상 고구려에 흡수된 상태였다. 고구려에 귀부한 속말말갈계 3세 정도 되면 이걸 말갈계로 치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애초에 고구려가 다민족 국가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하고.
  • [25] 대조영이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라고 하는 것도 주로 삼국유사를 근거로 한다.
  • [26] 하지만 삼국사기의 발해관은 그렇게 깔끔하지는 못하다. 희망적인 부분은 삼국사와 신라고기를 인용한 부분 정도로, 표제글이나 합산부분은 말갈, 말갈, 말갈이다. 단적으로 쓰여진 부분 자체가 말갈발해조이다. 덕분에 오히려 말갈비칭설(말갈은 종족명을 가리킨 것만이 아니라 유목민족을 낮추어 부른 것이다라는 학설)이 힘을 얻기는 했다.
  • [27] 단적으로 발해의 수도인 상경 용천부와 일본으로 직행하는 항구를 잇는 일본도는 과거 흑수말갈 지역을 관통한다. 상경 용천부 자체가 과거 흑수말갈 지역 인근의 안정화를 위해서 세운 계획수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발해 무왕 시대 정도에 이 길을 통과했다면 동연히 보이는 것은 점령지인 흑수말갈 부족 뿐이다.
  • [28] 중국의 동북공정의 연구보고서는 고구려 인구를 거의 모조리 당으로 잡아가서 과거 고구려 영역이 무주공산 지경으로 변했다 수준으로 표현하고 있다.
  • [29] 다만 이 부분은 논란이 있다. 구당서에서는 걸걸중상과 걸사비우가 각각 망명자 무리를 이끌고 달아났다고만 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걸걸중상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들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났다"고 되어 있다. 이를 종합해서 해석한 것이 걸걸중상은 고구려 유민들을, 걸사비우는 말갈족을 이끌었다는 것. 아직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
  • [30] 다들 알다시피 신라는 발해랑 별 교류가 없었다.
  • [31] 지금까지도 내려오는 얼마 안 되는 발해의 전설이다. 영화 무영검의 모티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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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0 14: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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