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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부흥운동

last modified: 2015-03-13 12:35:48 by Contributors

渤海復興運動


Contents

1. 개요
1.1. 약사
1.1.1. 프롤로그 - 발해의 멸망
1.1.2. 정안국
1.1.3. 흥료국
1.1.4. 에필로그 - 대발해국의 실패와 금나라의 건국
1.2. 평가
2. 발해의 후계 세력들

1. 개요

926년 거란요나라발해의 부여부와 상경용천부를 타격하여 발해를 붕괴시킨 이후 만주 전역에서 요나라에게 저항적인 발해계통의 세력들이 등장한 것을 일컫는 용어.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자칭 황제국들이 등장한 시기(....)

1.1. 약사

1.1.1. 프롤로그 - 발해의 멸망

1.1.2. 정안국

928년 국내성(國內城) 지역에서 정안국(定安國)이 건국되었다. 정안국은 후발해(後渤海)라 불리기도 했으며 나름대로 세력을 갖췄으나 결국은 요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결국 986년 요가 고려에 대한 침략(여요전쟁)을 계획하면서 중간에 끼여 있던 정안국은 장애물 없애는 겸해서 없어지고 만다. 항목 참조.

1.1.3. 흥료국

세월이 지나 발해 왕족이었던 연림(大延琳)은 1029년 8월 3일. 요동의 동경(東京) 당연히 일본이 아니다 료국(興遼國)을 세워 발해부흥운동을 벌였다. 여진, 고려와 힘을 합쳐 요나라에 저항했었는데 태사인 대연정은 여진 군사를 이끌고 요나라를 공격하기도 했었다. 9월에는 흥료국은 대연정을 보내 고려에 건국 사실을 알리고 지원병을 요청하자 고려는 군사를 보내 요나라를 공격했지만 실패.

자꾸 공격만 받게 된 요나라는 10월에 본격적으로 흥료국을 공격했다. 12월에는 또 대연정을 고려에 보내서 지원병을 요청했지만 고려는 원군파병을 거절했다. 1030년 정월에는 고길덕(高吉德)을 보내 또 고려에 원군 파병을 요청했지만 고려는 또 거절했다. 하지만 흥료국은 건재했었는지 3월에는 요나라가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해 준비를 할 정도였다. 8월에 비장 양상세(楊詳世)가 몰래 요나라에 항복했으며 밤에 몰래 남문을 열어 요나라군이 성을 점령하여 흥료국은 건국한지 1년만에 망했다. 흠좀무

1.1.4. 에필로그 - 대발해국의 실패와 금나라의 건국

이후 1116년 원국(大元國)이 세워지는 등 발해 부흥 운동이 몇 차례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요 반대 운동 정도의 수준에 그쳤다. 그나마 좀 성공한 운동으로는 "대발해국"이 있는데, 1116년 1월에 고영창이 8천명으로 동경 용양부를 점령하고 스스로 대발해국 황제에 즉위했으며, 건국 10여일만에 요동의 50여주를 지배하는 기염을 토했지만.... 금나라와의 협상에서 황제를 고집하다가 건국 5개월 만에 멸망해버린다(...) 내분도 겹쳤다.

발해인들의 정체성은 주로 요나라시기에 일어났고 지속되다가 말갈이 바탕이 된 금나라의 건국과 함께 발해 유민들을 포용하면서 사라졌다고 보는게 통설이다. 마지막 부흥운동인 대원국이 요말금초에 있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이는 완안아골타가 "발해와는 본시 동일한 집안"이라고 말한데서 근거하나, 이런 포용은 금태조 때만 있었다. 더구나 대발해국 운동이 터져버려서(...)

금 건국 이후 부흥운동이 사라진 것은 금이 건국시에는 발해 유민을 북송 공격군의 선봉으로 활용하다가[1] 이후 맹안모극 집단에서 배제하여 거란, 여진과 달리 한족과 동일 취급하고 산동으로 내몰면서(1141년, 금희종 신유년) 차츰 정체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2] 금세종 때도 한족과 함께 발해인의 형사취수를 금지하고 년상을 강요하며 양자 제도를 불허하는 등 철저하게 한족 취급했다.

1.2. 평가

발해부흥운동을 거처서 부여-고구려-발해라는 굵직한 줄기로 이어지는 계의 역사가 소멸한다고들 하는데 막상 따져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게, 당장 발해부터가 이 융합된 국가라서.... 썰듯 나뉘는게 아니다. 다만 대원국의 경우에서 보 듯 200년 뒤까지도 발해 귀족의 정체성은 남아있는 것은 의의.

희한하게도 후발해나 정안국처럼 비교적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고 오래 지속되었던 세력들에 대한 기록은 눈물나도록 희박하지만, 단발성으로 일어난 올야국이나 대연림의 난요국 고영창의 난원국은 그 전개과정이 꽤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흥요국이나 대원국이 짧은 존속기간에 비해 그 반란영역과 성과는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를 자처하고 외교에서 고립되어 그냥 亡... 길고 가늘게 혹은 짧고 굵게

한국 국사 교육에서는 여요전쟁에서 정안국을 살짝 언급하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교육되지 않는데 이는 사실상 고려후삼국시대 통일과 발해 유민들의 다수 투항으로 고려를 실질적인 한국사의 통합으로 보기 때문이다. "곁가지" 격이었던 발해 유민들은 대다수 요동, 만주,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기에 특별히 더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합리적인 취지로 보인다. 사실 나오면 괜히 외우느라 고생
그래서 발해부흥운동에 대해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물어보면 "엉? 발해도 부흥운동이 있었어?" 라는 반응이 많다.

2. 발해의 후계 세력들

란국(926년~936년)[3]1대 10년(혹은 6년)
발해(928년?~938년?)1대? 10년
정안국(938년?~986년?)2대 48년
야국(995년~996년)[4]2대 1년
요국(1029년~1030년)1대 1년
발해(원국)(1116년 1월~5월)1대 4개월

  • 발해 부흥운동에 대한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遼史
    •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金毓黻, 화문서국華文書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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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는 거란 때부터 그랬다. 여진과 발해인이 원수였기 때문이다(거란국지 1116년 기사).
  • [2] 물론 금 건국 이후에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듣보잡이긴 하지만 딱한번 일어나기는 했다. 발해의 옛 정리부에서 항쟁을 일으킨 적이 있다.
  • [3] 요의 괴뢰국이라는게 통설이다.
  • [4] 兀惹國. 꼴랑 1년 간 지속되었지만 그래도 2대는 갔다(...) 발해계 귀족 소경이 발해의 고도가 위치한 상경 용천부 주변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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