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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중상설

Contents

1. 개요
1.1. 배경
1.2. 현실
2. 결과
3. 타국의 사례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


독일어 : Dolchstoßlegende
영어 : Stab-in-the-back myth
한국어 : 배후중상(背後中傷)설
일본어 : 背後の一突き

1. 개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에서 돌던 개드립음모론.

간단하게 말해서 독일은 사실 전투에서 안 졌으나 유대인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병역기피, 탈영, 파업선동, 간첩질 때문에 전쟁에서 졌다!는 괴담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잘 되면 내 덕! 망하면 네 탓!"[1]임은 어디서나 있는 말이라 색다를 것도 없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나치당 집권으로 이어진 데 이것의 역할이 크다. 이 도시전설은 반유대주의, 나아가 히틀러나치당이 정권을 잡아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원동력이었다.


구체적인 어원은 전범리히 루덴도르프가 전범 체포를 면하기 위해 해외로 망명해서 가졌던 미국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그는 1차대전 당시 독일 육군참모차장이자 군수총감으로 실질적인 독일군의 최고 지휘관이자, (무려!) 상관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황제 빌헬름 2세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경제 사회 전 분야에서 독재자로 전권을 휘둘렀던 사람이다.

당시 기자가 취재를 마치고 최종적으로 인터뷰 내용을 확인하며 "그렇다면 이것은 등 뒤에서 칼에 찔렸다(Stab in the back?)는 뜻입니까?"라고 하자 루덴도르프가 "내 말이 바로 그거요!"라고 한 대답이 널리 퍼지면서 정착(?)되었다.

1.1. 배경

이 전설이 나온 까닭은 제1차 세계대전의 성격 때문이었다.

당시 동부전선은 오스트리아 헝가리러시아 제국에 개박살이 나면서 붕괴 직전이다가 탄넨베르크 전투로 한숨을 돌렸고 이후 1915년부터는 전과를 확대해서 오히려 러시아제국 깊숙히 진격했다.

또한 서부전선은 독일군의 초기 전과로 프랑스, 벨기에 영토 안에서 전선이 형성되었다.[2] 서부전선이 답도 없고, 끝도 없는 지옥같은 참호전으로 변해서 4년을 질질 끌면서 독일내 모든 물자가 바닥나고, 1917년 1918년 겨울에는 아침 점심 저녁 순무만을 먹는 안습한 상황이었어도 독일 본토는 여하간 전쟁터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독일 국민들은 어쨌든 "독일 안에서 전투가 없네?? 우리가 아직 지지 않았군"이라고 김성모스런정신승리를 시전중이었다.

독일제국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동부전선을 마무리 짓고, 여기서 빼온 예비부대와 자원으로 1918년 서부전선에서 5번에 걸쳐서 대공세[3]를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하고 오히려 미군 병력이 본격적으로 들어오자 압도적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한계에 달한 독일군은 1919년 9월 발칸전선에서 동맹국 불가리아가 붕괴해도 속수무책(...) 동부전선의 오스만 투르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전쟁을 포기했고, 서부전선도 군데군데 숭숭 구멍이 나면서 탈영병이 속출(...) 최후의 방어선으로 여긴 '힌덴부르크 라인'까지 무너지면서 군부는 민간 내각에 연합국에 휴전을 요청해달라고 통보한다.(사실상 항복)

당시 군부독재 체제였던 독일은 정보가 통제받던 탓에 내각총리조차 막장테크 탄 9월에 가서야 이런 상황을 보고받았다. 그 전까진 러시아의 항복 덕에 전쟁에서 이긴다라 생각했다(...) 연합국은 휴전 요청을 사실상 항복으로 받아들이고, 휴전 협상 선결 조건으로 전쟁이전 독일 국경까지 군대를 자진해서 퇴각하며 전범으로 찍힌 군부빌헬름 2세 대신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은 민간 내각하고만 협상하겠다라 통보했다. 황제는 퇴위하고 공화정을 선포했으며, 전쟁 전 선거에서 의회 다수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졸지에 군부가 싸놓은 똥을 치우는 역할을 맡았다...

독일 국민들은 전황이 좀 나빠졌지만 독일 내부상황이 아직 버틸 만하다라 생각했고, 휴전요청에 갑자기 혁명이 일어나면서 정부가 바뀌어 우리가 졌다. 항복 선언하겠음ㅇㅇ이라고 나오니 국민들은 '이게 무슨 소리냐'며 반발했다. 국민들은 패배를 부정했고 내부의 배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사태를 만들었다고 아우성이었다. 사회민주당 안에서도 국민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리고 민간정부 내각이 이후 어떨지 심각하게 우려했고 사회민주당 당수였던 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정파의 이익보다는 독일을 위해 고민 끝에 이 역할을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연합국의 실수도 한몫했다.

1918년 11월11일 휴전을 발효하고 나서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군대는, 휴전 협상 뒤 평화협정을 하기 전 독일이 딴 마움을 못 품도록 북해 항구를 봉쇄하고 지상군은 라인강까지 진격했으며 소련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했다. 전쟁이 끝났지만 1918~19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사이 독일국민들은 휴전 이전처럼 극심한 경제난을 겪어야 했고 곳곳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부르주아 체제라며 거부하고 소비에트사회주의 체체 수립을 주장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봉기와 이를 진압하려는 집권 중도좌파 사회민주당과 우익민병대(태반이 제대군인)들이 내전을 벌이면서 나라꼴은 개막장이었다.

베를린에서 공산주의자의 봉기을 진압한 직후 1919년 1월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중도좌파)-가톨릭 중앙당(우파)[4]- 독일민주당(우파)의 흑적황 좌우 대연정은 85%의 지지를 얻으면서 독일에서도 민주공화체제가 정착한 듯했지만[5] 1919년 6월 베르사유 조약의 조건을 통보하면서 전 국민적인 반발이 터져나왔다.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이 못 갚을 만큼 지나친 상금을 요구하자 독일에서는 물론 연합국이었던 영국미국에서도 "이건 좀 심하다"는 의견이 나와갔다. 독일 국민들은 휴전이라고 해서 프랑스에 알자스-로렌 정도 떼주고 합리적인 수준의 평화안을 체결하리라는 희망을 품었는데 프랑스벨기에에의 영토할양도 모자라서 전쟁의 당사자도 아닌 폴란드, 체코, 덴마크 등에도 영토를 바치는 데다가 모든 전쟁책임을 독일에 몰아붙이고, 독일을 거덜내며 몇 세대에 걸쳐 갚아도 모자랄 천문학적 수준의 배상금이 나오자 그만 정신줄을 놔버렸다.

사실 전쟁기간 사이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들이라면 몇 년을 해상봉쇄로 대다수 국민들이 순무만 먹고 살며, 어린이들은 의약품 부족으로 죽어가고 전선의 병사들은 영양실조로 스페인 독감에 걸려 픽픽 쓰러졌으니 독일이 못 이김을 잘 알았다 장군들조차도 진지하게 이 전설을 안 믿었지만 휴전 직후 패전 책임을 묻기 위한 법정을 열려는 시도를 의회에서 제기하자 힌덴부르크가 직접 "우리는 전선에서 안 졌었다. 전쟁에서 패한 까닭은 오직 후방의 반란 뿐이었다"고 주장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여 법정의 성립을 무산시켰다. 게다가 베르사유 조약에서 전범 800명 인도 조항에 황제와 군부인사들이 들었는데, 전쟁책임이 컸던 군부 인사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러 배후중상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여기에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으로 정신줄을 놔버린 일부 독일인들이 연합국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이 군부인사들을 영웅으로 띄어준다.

그리고 정치계에선 우익세력이 독일 정치의 큰 축이었던 사회민주당(중도좌파)를 공격하려는 수단으로 썼다는 평가가 유력하다. [6] 전쟁 이전 구체제에서 주류였던 우익세력들은 민중봉기로 제국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들어서자 찬전/반전 논쟁 시기 이전에 독일 공산당과 같은 정파였던 사회민주당에게 초록동색이라고 몰아붙였다. 이 때 힌덴부르크 등의 군부 지도부나 보수파들은 헛소문에 휘둘린 쪽이 아니라 소문을 주도한 쪽이다. 사실 군부의 수뇌부인 이들이 전황을 모르고 전설에 휘둘렸다는 것부터가 개소리이다. 실제로 힌덴부르크는 백일 전투 직후 독일군에게 재기의 여력이 없었음을 잘 알았다. 다만 군인으로서 항복과 전쟁책임을 지기 싫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각에 사실상 항복인 휴전 요청도 부관인 그뢰너 장군을 시켰다.

실제로 독일은 1차 대전 이전에도 사회주의가 성행했고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독일이 항복하는 계기인 칼 군항 수병들의 반란은 농민들과 결합하면서 사회주의적 성향이 셌다. 독일 혁명까지 시도했던 독일 공산당의 전신 스파르타쿠스단의 칼 리프크네히트나 여성 사회주의자로서는 가장 유명한 축인 로자 룩셈부르크 등이 이 시기의 인물이다.[7] 결국 이들에게 전쟁의 원인이자 패전의 주역으로 몰릴 위기였던 보수우익들이 오히려 사회주의 세력에 건 역공이 바로 '등 뒤의 칼' 이론이고 이 시기 거대 자본은 초기에는 전통적 보수파인 힌덴부르크를, 이후에는 나치를 지원하면서 좌파사회주의 세력을 제거하러 노력한다. 애초에 좌파세력 자체도 급진파(독립사회민주당, 공산당)와 온건파(사회민주당)로 나뉘어서 온건파가 세력을 쥔 뒤 급진파들을 무력으로 탄압하면서 사회주의 혁명을 저지하던 시점이라 효과는 만점이었다.

이 결과 1920년에 열린 총선에서 흑적황 좌우대연정의 지지율은 반토막 이상이 나 버렸다. 85%->38%! 당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사회민주당은 첫 총선에서 40%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으나 이후 20%대의 정체한 득표율에서 왔다갔다한다.

1.2. 현실

지금에서야 누구나 알지만 세계 넘사벽 경제력 1위 미국이 참전(2위 독일 3위 영국 5위 프랑스를 더한 것보다 컸다)하면서 전쟁은 거의 끝났다고 봐야 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증원병력과 물자가 쏟아지고 동부전선에선 러시아를 패배시켰지만 동맹국들이 몽땅 털리면서 독일이 이길 방법은 아예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 특히 프랑스는 엄청난 인력 손실에 재정적으로도 나라가 거의 거덜이 났지만 미국 덕에 배는 안 곯았고 영국도 전비는 바닥이 났어도 미국 참전 전에도 이미 재정적으로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영국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영연방 국가와 인도 등의 해외식민지에서 병력과 물자를 충원하였고, 프랑스도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식민지 등에서 무제한적으로 병력과 물자를 징발해서 본국의 손실을 메웠다.

반면에 독일은 해외 식민지는 얼마 없었고 그나마도 영국이 제해권을 장악했으니 식민지에서 독일 본토로의 인력과 물자 수송은 도 꾸기 힘들었다. 그나마 있는 식민지가 아프리카 지역, 토고 카메룬, 나미비아, 탄자니아, 태평양 섬 몇으로 식민지에서 뽑아먹는 것보다 유지비가 더 나갔다.

거기에 독일 특유의 안습한 외교력은 독일의 고립을 심화시켰고 그나마 친구였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은 상태가 나빴으며 이탈리아는 배신까지 때렸다.

사방이 고립된 상태에서 장기간의 전쟁으로 독일의 식량 사정은 나날이 나빠져 전국민이 굶주렸고, 공업 생산은 한계에 달한 데다 극심한 병력 소모와 사기 저하로 군은 붕괴 직전이었다. 사실 일부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들의 전쟁이라면서 전시 협력을 거부하고 탈영 데모 파업을 했지만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미미했다. 무엇보다도 좌파사회주의 세력의 중심인 사회민주당은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예산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이런 행위를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짓고 로자 룩셈부르크 등 강경파들이 뛰쳐나왔으나 대중적인 영향력은 적었다.[8]

독일 11월 혁명의 도화선인 킬 군항의 반란은 이런 상황에서 승산도 없으면서 상층부에서 내려진 자멸적인 출격 명령에 일선 수병들이 반발하고 여기에 굶주린 노동자들이 결합하여 난 사건이었다. 만일 독일인들이 아직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 사건은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그냥 진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지역의 반란이 겨우 이레 만에 전국을 휩쓸고 황제가 도망갔다. 11월 4일 킬 군항 수병 반란. 11월 7일 전국적인 공화국 선언. 11월 9일 빌헬름 2세 퇴위 네덜란드 망명. 불과 1주일 만에 자연발생적으로 독일 전역이 뒤집혔다.

이미 전쟁에 건 일반 독일 국민들의 분노가 차올라서였다. 즉 극도로 피폐한 생활을 연명하던 독일 국민들은 전쟁에서 졌다는걸 이미 알았다는 이야기이다. 아무 것도 모르던 순진한 독일 국민들이 배후 중상이라는 도시 전설에 속아서 넘어갔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조작이며, 독일 국민 스스로가 단체로 정신승리를 시전한 자기최면이다.

(ɔ) The Reich Association of Jewish Veterans from
(배후중상설에 대응한 유대인 단체의 포스터)
유대인들이 병역기피와 후방에서 뒷총질했다는 괴담도 사실과 다르다. 등 뒤에서 중상에 해명으로 독일내 유대인 단체에선 독일 국민 평균보다 유대인의 참전율 전사율이 더 높다고 홍보했지만[9] 그런 사실은 음모론자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10] 히틀러 같은 인간은 "히브리인 1만 2천에서 1만 5천을 일찍 목 매달았다면 100만명의 독일인은 피를 안 흘렸을 것"이란 정신나간 소리로 화답했다.

2. 결과

종합하자면 독일 국민들이 집단으로 현실을 무시하고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은 정신승리법을 구사한 대표적인 사례다. 인지부조화도 이만하면 대단하다고 볼 수준. 그리고 이 문제는 단순한 정신승리법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해보면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 독일 국민들의 믿음으로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이 나는 큰 원인으로 작용한다.

2차대전 때는 연합국이 독일에서 헛소리가 다시 안 나오게 휴전협정을 거부했고 무조건 항복을 강요했으며, 많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독일 영토 전역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독일 국민들은 자신들의 고향과 국토가 불타 황무지로 돌아가고 가족과 이웃들이 적군의 군홧발에 짓밟히고 무참히 살해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직접 보고나서야 자신들이 그동안 정신승리 상태였다는것을 자각했으며,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무조건 항복을 한 후 국가를 재건하고 오늘날의 독일을 세웠다. 아무래도 미친개에게는 몽둥이가 약인 듯

3. 타국의 사례

재밌게도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에게 6주만에 완패한 프랑스도 '배후 중상'을 믿었다. 즉 독일군의 승리가 군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반란[11] 때문이라 생각했고, 1942년 패전 책임을 묻는 재판정에 선 사람들이 모두 정치인이나 지식인이었다고.

제2차 세계대전 뒤의 일본이 제1차 세계대전 뒤의 독일과 비슷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몰락 작전을 펴기 전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일본이 항복하면서 결론적으로 일본 본토에는 연합군이 상륙하지 않았기 때문. 실제 일본내에서도 1차대전 이후의 독일과 2차대전 이후의 일본이 '패전의 실감이 없는 패전'으로 유사하다는 분석이 있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계속되는 장기불황극우화 경향이 1930년대 독일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관련기사

다만, 이쪽은 엄밀하게 말해서 좀 상황이 다르다. 1차대전의 독일 제국의 경우, 전선이 독일 영토 밖에서 형성되었고, 독일의 열세로 인해 전선이 뚫리기 전에 이미 전쟁이 끝났다.[12] 이 때문에 비록 독일도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적, 경제적 피해는 입었지만, 정작 독일 본토 자체는 전쟁의 참화를 비켜가는 데에 성공했다. 특히 프랑스가 본토를 참호전의 무대로 고스란히 내어줌으로써 독일과 나누어야 했을 막대한 서부전선의 참화를 벨기에를 비롯한 몇몇 나라들과 함께 여과없이 겪어야 했다. 공습의 경우도 당시의 공군은 아직 실험단계였기 때문에 폭격 피해도 주목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게다가 독일 제국은 비록 전쟁에서 열세였지만 어쨌든 독일인 자신들의 혁명으로 멸망했고, 곧이어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가 들어서서 실권을 쥐어 가혹한 패전조약을 맺었으나 일본의 GHQ와 같은 실권을 쥔 외국군의 점령기관이 없었다.

이와 달리 일본은 도쿄 대공습과 원폭 투하 등의 엄청난 공습으로 본토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오늘은 어디어디 도시를 폭격할 것입니다, 민간인들은 대피하세요"라고 여유로운 폭격 사전예고까지 하면서 그걸 그대로 실행하는 미국의 압도적인 힘에 저항의 의지까지 잃어가며 처절하게 짓눌렸다. 특히 네이팜탄이나 원자폭탄의 무자비한 위력을 직접 겪은 일본인들의 연합군에의 공포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이 때문에 연합군에의 완패는 일본 내부에서 상하귀천을 가리지 않고 완전히 인정했으며, 궁성사건과 같이 항복을 거부하는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아무도 안 따랐고, 일본 정부는 GHQ에게 별다른 저항없이 실권을 내주었다. 말하자면 워낙 깔끔한 자국 상황에 전쟁의 피해를 실감하지 못해서 "이거 아무래도 우리가 진짜 실력으로 안진 듯한데?"라는 헛소리까지 통하던 독일과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게다가 내부의 적에게 책임을 돌리기에는 일본군이 너무 못 싸웠다. 전후에 드러난 일본군병크가 워낙 심각하다. 도조 히데키를 시작으로 삼간사우, 삼대오물 등등…. 어쨌든 반성 못하는 건 1차 대전직후 독일이랑 똑같지만.(...)

그래서 주로 보이는 모습은 미국에게 진 것은 인정하되 나머지는 아니다라는 모습이다. 그래서 서양에는 굽히고 주변국에게는 고자세인 특유의 태도가 나왔다. 아시아 국가를 멸시함은 메이지 유신 이래 국가적 방침이었던 탈아입구 정신의 영향이 크다는 설도 있는데,[13] 현대 일본의 태도에는 이런 탈아입구의 잔재도 있겠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일본에게 당한 피해국들은 유럽과는 달리 일본과 비등하지 못했던 약소국들이 절대다수라서다.[14] 당장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서자 중국에게만큼은 이전처럼 큰소리를 치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거나 '대등한 맞수'로 인정하며 전력으로 상대하려는 행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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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사회과학에서는 지각(perception, 知覺)과정에서의 '귀인의 오류'로 자존적 편견(self-serving bias)라고 함
  • [2] 다만 알자스-로렌 일부 지역은 전쟁 초기에 프랑스가 점령했다.
  • [3] 일명 덴도르프 대공세.
  • [4] 전후 중도우파 기독교민주연합을 만든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가 이곳 소속이었다.
  • [5] 1919년 1월 선거는 남녀 보통선거였다. 제2제국에서 선거권의 제한으로 노동계층의 정치참여가 매우 제한적이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다. 영국은 이 당시 남녀 차별 선거권(남성 21세, 여성은 30세 이상), 프랑스는 1945년에야 여성투표권을 인정할 만큼 선진적이었다.
  • [6]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에베르트가 1918년 군수공장 파업에 연루된 의혹을, 반전세력인 공산당은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 [7] 당시 독일 공산당은 찬전/반전 갈등으로 사회민주당(SPD)에서 갈라져 나왔고 소련 코민테른의 지시와 무관한 독자노선이었다.
  • [8] 이 지점이 좌파의 역사에서 폭력혁명반대, 의회 선거를 통한 정권장악, 점진적 변화, 사유제/시장경제 인정 등을 내건 중도좌파와 여전히 민중봉기, 거리정치를 통한 전면적 혁명 노선을 고수하는 극좌파가 완전히 갈라서는 계기다. 2차대전 이후 중도좌파 세력은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폐기하고 케인즈경제학에 기반한 수정자본주의, 복지국가 노선으로 가게된다. 시간이 흘러서 상당수 극좌파 그룹들도 의회선거에 참여하면서 개량화 된다.구호는 급진적이지만. 끝까지 선거를 거부하고 혁명을 주장한 극소수는 1970년대 이후 테러조직이 되면서 사실상 망했어요.
  • [9] 독일의 인구 1% 미만인 60만 인구로 10만명이 참전해 1만 2천명이 전사했고 78%가 전방에 갔다.
  • [10] 더구나 독일 제국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프로이센 왕국에서는 유대인은 장교입대도 불허했고 병사입대만 허용했다.
  • [11] 아주 일부 정신나간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 동무와 동맹 맺은 히틀러 군대를 위해서 후방에서 이적행위를 펴긴 했다.
  • [12] 독일 국경 내로 연합군이 진입하긴 했지만 이는 독일의 사실상 항복 이후의 일이었다.
  • [13] 다만 일본의 이런 경향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뻑했던 탓도 있다. 쉽게 말해서 "독재 인권탄압이나 저지르는 나라 주제에 니들이나 잘하세요"라는 식.
  • [14] 독일은 상대국들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하나같이 독일이 1:1로도 상대하기 버거울 만큼 쟁쟁한 세계 최강국들 뿐이었다. 반면 일본의 상대국들은 서구 연합군을 빼면 하나같이 당시 일본군에게 한주먹거리로도 아니던 약소국들 뿐이었으며, 그나마 중국이 일본보다 전체 GDP에서 앞서는 정도였다.(물론 인프라 차이는 천지차이) 현대 들어와서도 일본의 피해국들은 중국을 빼면 일본에게 맞서는 시늉조차도 내기 어렵게 열악하며, 이것이 일본이 마음놓고 큰소리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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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3-28 20:3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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