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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last modified: 2015-12-06 13:43:30 by Contributors

한국의 역사
원삼국시대 삼국시대 남북국시대
고구려 / 백제 / 신라

  • 백제한국고대 국가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의 하나이다. 남부여(南扶餘)라고도 한다. 건국설이 2가지가 있는데, 이로 인해 온조 백제와 비류 백제로 나뉘기도 한다.

공식명칭百濟, 남부여(南扶餘)[1]
위치황해남도 동남부, 한강 유역과 현재의 강원도 남부, 충청도, 전라도 일대[2]
인구380만명 (76만호)?[3]
수도위례성[4][5]위례성웅진사비
정치체제군주정
국가원수鞬吉支,大王
언어제어, 마한어 등
종족족,족,(韓)족,(漢)족 등
종교불교,도교,토착신앙 등
존속기간기원전 18년[6] ~ 660년 7월 18일 (678년)
성립 이전마한
멸망 이후통일신라, 후백제

Contents

1. 국호
2. 백제의 역사
2.1. 건국과 발전
2.2. 위기 및 혼란
2.3. 중흥기
2.3.1. 북위와의 전투
2.4. 멸망
2.5. 멸망과정에 관련된 논란
2.6. 이후의 소백제
3. 사회
3.1. 중앙 관제
3.2. 행정구역
3.3. 언어
3.4. 경제
3.5. 연도
4. 문화
4.1. 한학
4.2. 국사편찬
4.3. 시가
4.4. 종교와 사상
4.5. 건축
4.6. 예술
5. 평가
6. 백제의 인물들(시대순)
7. 참고 문서
8. 백제를 소재로 한 작품


1. 국호

백제건국 시기에 관해 다양한 해석이 있다. 백제의 건국 설화 자체가 다양하기 때문인데, 일반적으로《삼국사기》기록에따라서 기원전 18년에 부여, 고구려의 이주민들이 한강 유역의 토착민들과 결합하고, 이주민들이 지배층을 형성하여 건국된 것으로 본다. 초창기 백제의 국명은 십제(十濟)였으며 이후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친다.

국명이 왔다갔다 해서 백제 말고도 응준(鷹準), 나투(羅鬪) 등으로 불리고, 나중에는 아예 부여로 나라이름을 바꾼다. 백제를 부여의 계승국으로 생각한다면 "남부여"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이 호칭은 성왕 시절에만 잠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견훤이 백제를 부흥한답시고 국명을 백제(후백제)로 지었고, 이 지역을 계속 백제로 부르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는 쿠다라라고 부르는데,[7] 이에 대해서 여러가지 학설이 공존하고 있다. 역사스페셜에 출연한 일본의 모 교수는 유력한 학설 중 하나로 '큰 나라'라는 한국말이 쿠다라의 유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웅진(熊津)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얼추 쿠다라와 곰나루의 발음이 비스무리한 거 같기도 하다.[8] 한편 과거 백제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배가 출항했을 장소로 여겨지는 하구 지역이 해당 지역의 노년층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최근까지도 구드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니, 이 또한 연관이 있을 공산이 없지는 않다.

2. 백제의 역사

2.1. 건국과 발전


백제의 건국자는 주몽의 재취처인 소서노아들온조라 하는데,《주서》를 비롯한 중국사서 등에는 시조로서 "우태" 혹은 "구태"라 하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9] 삼국사기 등의 건국 전설에 의하면 온조가 비류와 함께 남으로 내려와 각각 미추홀과 위례에 도읍을 세웠는데, 미추홀에 건국한 비류는 결국 자결하여 나라를 동생인 온조에게 내주었다고 한다.[10] 또는 신채호의《조선상고사》에 보면, 소서노가 건국했다고도 한다.

그 외, 혹은 구태, 도모가 건국했다는 구태설화도 전해져 온다.

확실한 것은 백제를 세운 지배계층이 그 지역 토착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향후 백제가 보여주는 국제적인 감각과 국력을 보면, 이 지배계층이 단순한 이주 세력이 아닌 국제적인 커넥션이 있는 세력임을 알 수 있다.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언어가 달랐다는 떡밥도 있지만 분명하게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건길지 항목 참조.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간에 상당한 단절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토착세력은 결코 지배계층으로 진출할 수 없었으며, 지방관은 왕족이나 이에 준하는 귀족이 중앙에서 직접 파견되었다.

삼국사기》를 제외한 사료에서 백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와 마찬가지로《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며, 여기서는 "伯濟"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국외 사료에서 처음 등장하는 왕명은 그보다도 100여 년이 지난 근초고왕으로서, 370년에 최초로 중국동진왕조 및 열도와 수교를 맺었다고 하며,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칠지도는 바로 이 시기에 백제에서 열도로 넘어간 것이다. 이 때문에, 고이왕 이전의 왕들에 대해서는 계속적으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데, 한국사학계에서는 풍납과 몽촌 양 토성의 발굴로 인해 고이왕 이전의 백제사에 대해서도 긍정하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11]

하지만 분명한 것은 초기부터 강성한 국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12]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시기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유역을 포함한 곳은 마한의 영향권이고, 마한지역에서 목지국[13]이 그 패권을 쥐고 있었는데, 목지국의 왕은 삼한에서 가장 강하다고 해서 그 왕이 진왕[14]으로까지 불리기도 했다. 백제는 마한과의 대립경쟁 속에서 성장했다.

초기엔 한강 유역에 머물렀으나 점차 팽창하며,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차례로 정복. 흡수해 나갔고 고이왕 때 율령반포 및 중앙집권이 이루어졌고, 침류왕 때 불교를 수용한다.

백제의 최대전성기는 근초고왕(재위 346년~375년) 시대다. 근초고왕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371년) 황해도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마한 지역을 공격하여 목지국을 정복(396년)하는 등 전라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15] 일본과도 국교를 맺고 칠지도와 칠자경을 보내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16] 또한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근초고왕 만년에는 국력의 쇠퇴가 시작되어 고구려로부터 빼앗았던(369년) 수곡성[17]소수림왕의 침공으로 다시 빼았겼고(375년), 신라의 국력이 점점 강해져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주민들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을 때(373년)도 바라만 볼 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2.2. 위기 및 혼란

근초고왕의 사후 이어지는 근구수왕, 진사왕, 아신왕대를 거치면서 국세가 현격히 약화되었다. 근성의 사나이 아신왕(재위 392년~405년)은 광개토대왕을 상대로 먼저 여러차례 싸움을 걸었다가 도리어 수도 한성이 함락되고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을 꿇고 군신관계를 맺었다(396년). 하지만 이후에도 복수를 위한 전쟁 준비가 계속되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징접을 피해 왜, 신라 등으로 도망가서 군대를 구성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러 결국 고구려 정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아신왕은 일본과 교류를 적극 지원해서 일본과의 관계가 매우 돈독해졌는데, 태자를 일본으로 보내 장기체류시키기도 했다.[18]

이후 장수왕(재위 412년~491년)으로 이어지는 5세기의 고구려의 전성기 동안 백제는 계속해서 어린왕이 즉위했다가 젊은 나이에 죽는 일이 반복되면서[19] 잦은 섭정과 이를 둘러싼 권력 암투 등으로 왕권이 약해지고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21대 개로왕(재위 455년~475년) 때, 개국 이래의 수도였던 한성이 다시 함락되고 개로왕과 왕족들이 고구려군에게 처형되는 등 거의 파멸상태에 이른다(475년).[20]

나제동맹에 있던 신라지원군과 백제귀족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한성이 함략되었기 때문에[21] 신라에서 지원군을 얻어 돌아오던 문주[22]는 지원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웅진에 새로 도읍을 정하고 문주왕(재위 475년 ~ 477년)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고 어수선한 상황속에서 재위 2년 만에 암살된다. 이후 삼근왕(재위 477년 ~ 479년)의 짧은 집권을 거쳐 동성왕[23](재위 479년~501년)이 즉위하면서 국가의 재건에 나선다. 실추된 왕권을 다시 강화하려고 시도했고,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의 일부를 다시 수복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토목공사와 향락으로 인한 불만이 커지는 와중에 동성왕은 좌평이었던 백가에게 암살당하고, 일본에서 태어난 동성왕의 이복형제가 무령왕(재위 501년~523년)으로 즉위하였다.

전통적으로 삼국 중 제일 국왕의 힘이 약했던 국가로 평가받는다. 전반적으로 고대 삼국의 왕권은 고려나 조선과 같은 전제왕권만큼 강하지 못했는데, 특히 백제는 왕권과 귀족 및 지방 세력의 대결이 끝이 없었던 국가였다. 잘나갈 때 발목 잡는 것은 기본이지만, 나라가 망할 지경일 때도 대립 양상이 해소되지 않았다. 개로왕 때 수도 한성이 함락당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도 백제의 귀족지원군은 늦장을 부리다 출동해 신라지원군보다도 늦게 한성에 도착했다. 장수왕에게 밀려서 천도한 웅진시대에도 반란이 잦아서 "문주왕-삼근왕-동성왕"의 초기 왕들이 모조리 변란으로 사망했고, 멸망 시기에도 이 대립이 결정타가 되었다.[24] 때문에 국왕들은 조금만 국력이 회복되면 왕권 강화를 시도하였고,[25] 지방 세력 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몰아내는 데 더욱 신경을 썼다. 그래도 백제 부흥 운동이 신라에 큰 위협이 될정도로 크게 벌어지는 데는, 지방에서 백제의 여력이 상당부분 남아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을 단순히 콩가루 집안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콩가루 집안이었으면 백제는 진작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런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도 백제가 끝까지 잘나갔다는 것은, 단순히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기보다는 그만큼 지배계층이 유동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란 중에서 토착민중들의 참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즉, 피지배층들은 외지에서 건너온 지배층들이 지들끼리 뭔짓을 하든 신경쓸 일이 없었던 것이다.[26]

그리고 전지왕의 경우 일본에 있다가 돌아와서 왕이 되었는데, 볼모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진짜 볼모라기보다는 백제 국제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해외유학을 보내놓은 것에 가깝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김정일이 김정은을 유학보낸 것과 비슷한 거랄까... 태자를 맡길 만큼 백제왕과 일왕과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음도 알 수 있다. 물론 백제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볼모라고 생각될 정도로 안습한 상황이었으니..

2.3. 중흥기

백제의 상징 칠지도
동성왕(재위 479년~501년), 무령왕(재위 501년~523년)과 성왕(재위 523년 ~ 554년)으로 이어지는 5세기 말 ~ 6세기 중반기는 백제의 중흥기였다. 동성왕, 무령왕 때는 다시 한강 유역까지 치고 올라가기도 하고,[27][28] 동성왕마한 세력을 완전히 점령하여 전라남도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성왕시기에는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겨 왕권 강화와 수도의 방어력 강화를 꾀하며 동쪽에서 침범해 들어오는 신라의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가야연맹의 재건을 꿈꾸었으나, 결국 신라의 대가야 유화정책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으며, 신라 진흥왕이 한강 하류 유역을 장악[29]하여 나제동맹이 결렬되면서 성왕 스스로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지금의 거창지역에서 신라의 노비[30]에게 참수당하는 비운을 겪는다.[31] 이 때문에 좌평 4명과 3만여명의 군사가 죽고, "말 한 마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32]

성왕을 계승한 위덕왕, 혜왕 시기에는 왕권의 축소로 인해 내정이 상당한 혼란기에 들어가며, 이것이 회복되는 데는 7세기 초반의 무왕을 기다려야 했다. 무왕과 그의 아들 의자왕 시기에는 신라를 외교적, 군사적으로 압박하면서 한 때는 신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간다,

2.3.1. 북위와의 전투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이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전투가 중국연안지대에서 일어난 것인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난다.[33] 이 전투가 성립하려면 한쪽이 바다를 건너서 병력을 보내야 하는데, 북위 쪽에서 한반도로 병력을 보내기도 힘들고, 백제가 중국으로 병력을 보내기도 힘든 상황이다. 연안항로로 이동한다면 북위가 고구려를 지나 백제를 공격했다고 보는 쪽으로 약간 기울겠지만, 연안항로가 아니라 쌩으로 바다를 건너게 된다면 양쪽 다 무리수가 되기 때문에 어느 쪽인지 확실치 않아진다.

백제는 동성왕 때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내다가 고구려에게 저지된 적이 있는데, 이것이 연안항로를 타고 가다가 일어난 일이라면 고구려의 해역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백제의 제해권을 의심할 만한 사건은 아니다. 번번이 저지 당한 게 아니라면 그냥 예외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전공중에서는 큰 배를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게 북위의 도해공격으로 이해하는 큰 근거가 된다.[34]

그냥 아예 위나라가 아니라 고구려의 공격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굳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라는 명칭을 안 쓰고 특별히 "위로"라는 표현을 써서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도 좀 이상해서 확답이 되기 힘들다.[35][36]

어쨌든 대체적인 의견은 이 전투가 중국대륙에서 벌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쪽으로 기우는 편이다. 중국대륙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해도 백제가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했다기 보다는 모종의 동맹세력을 지원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2.4. 멸망

7세기 백제는 무왕의자왕이 신라에 적극적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의자왕 2년에 의자왕은 신라의 수도 경주 금성의 핵심적인 방어 요새인 대야성 등 신라의 성 40여개를 정복하였으며 이는 신라에 중대한 타격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백제의 강력한 공세에 위기에 몰린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백제를 막으려고 연합을 시도하였으나 고구려와의 회담은 성사되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결국 신라는 바다 건너의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었으며, 당나라와 함께 공격을 가하여 백제를 멸망시킨다.

의자왕이 당나라로 압송되고 백제는 멸망하였으나, 백제 부흥 운동 세력은 각지에서 나라와 신라에 항쟁하였다. 그러나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구 백제 영토는 신라에 완전히 복속된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말년에 향락을 누렸다는 기록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향락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간에 지배층의 향락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백제의 의자왕이 특별히 과도할 정도의 향락과 사치에 빠졌다는 근거도 충분치 않다. 오히려 의자왕은 즉위 직후부터 신라에 지속적으로 맹공을 가한 전형적인 전쟁군주였다. 백제사에 의자왕처럼 많은 전쟁을 일으킨 왕이 없을 정도다. 백제가 멸망을 하기 고작 5년 전인 655년에도 의자왕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하여 33개 성을 깨트리고, 멸망하기 직전인 659년까지도 신라에 대한 공격을 재개할 정도였다. 다만 과도한 전쟁으로 인해 민생이 피폐해지고 원성이 높아진 것은 문제였다. 또 연이은 전쟁에 국내 귀족세력들이 반발하여 이탈하는 등의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 멸망의 한 원인이 되긴 하였다. 그렇지않아도 지방귀족들의 세력이 강해서 끊임없이 왕권과 귀족이 마찰이 많았던 백제였는데 의자왕의 지속적으로 군사 동원령을 내리자 귀족들은 나중에는 의자왕의 명령에도 군사를 내놓지 않았고 이는 나당연합군이 침공했을 때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패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당나라가 오늘날의 미국처럼 워낙 강력했고[37], 또한 당나라와 신라의 기습에 당한 것이 크다. 백제의 멸망은 초강대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지, 딱히 백제가 멸망을 할 정도로 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고구려가 연이은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국력 소모 때문에 내부적으로 망해가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의자왕이 패배한 후로도 백제에서 지속적으로 저항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의자왕만 제거한다고 백제라는 나라가 한방에 무너지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백제상태가 여러 지배계층의 연합세력이기 때문에 그 중 가장 큰 백제왕을 제거했다고 일이 끝나는 건 아닌 것이다.[38] 사실 백제는 2백년 전에도 이 때와 비슷하게 국왕이 전사하고 수도가 털린 경험이 있었지만 그 때 백제가 망하지는 않았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백제 멸망 때 백제 왕족과 귀족층의 상당수가 일본으로 도일했다. 귀족계층만 건너간 건 아니고 딸린 노비들도 같이 데려갔기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의 규모는 수만명 내지 수십만명 규모로 추산되기도 한다.[39] 대부분의 귀족들이 일본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남아있던 귀족들도 천민으로 강등당하지 않고 신라 5두품 귀족에 편입되었다.

2.5. 멸망과정에 관련된 논란

흔히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왔을 때 백제에는 5천명의 군대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계백은 남은 군사를 전부 이끌고 황산벌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참고한 것이다. 사실 신라본기에도 5천명이 백제군의 전부였다고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라본기 태종무열왕편에는 의자왕계백에게 5천명의 군사로 신라군과 싸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뿐 그 외에 비성이 함락될 때까지 백제군의 저항은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런 해석도 가능했다.

그러나 당서 및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구당서 소정방전(참고문서)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강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고, 이에 상륙작전을 벌여 백제군을 격파해서 수천 명을 죽였으며, 당군이 그 후 수륙 병진으로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백제는 나라를 기울여 저항하여 대전투가 벌어졌고 이 때 다시 백제군을 격파하여 만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더구나 여기에는 백제군의 전멸을 암시하는 말('살아 돌아간 자가 거의 없었다' 등)이 없으므로 실제 백제군의 규모는 최소 몇만 명 수준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의 싸움에 5천명밖에 동원하지 못한 것은 주력이 당군을 요격해야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40]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에도 동일한 기록이 실려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도 구당서의 내용이 신뢰성이 있다고 본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태조왕에 대한 기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기록이 우리의 기록과 어긋나는 경우에는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1]

문제는 이런 전투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마지막 전투 당시의 백제군의 작전에 대한 설명은 남아있지 않으며,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세울 때의 논의 내용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때 흥수는 당군과 신라군을 각각 좁은 길목인 기벌포와 탄현에서 막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의자왕 및 백제수뇌부는 당군과 신라군이 좁은 길목을 통과한 직후에 공격해서 섬멸시키자는 작전을 채택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에는 신하들의 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와서 흐름에 따라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서 소로를 따라 말을 정렬할 수 없게 한 다음 군사를 놓아 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당 중에서 어느 쪽과 먼저 싸울 것인지는 결정하지 못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작전내용과 실제로 요격하는데 동원한 군대의 규모를 고려해 보면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물론 그 이외의 해석도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백제군은 내선의 이점을 살려 먼저 계백이 소수의 군사로 신라군을 저지하는 동안 전력을 기울여 당군을 격파하고 군을 돌려 다시 신라군을 격파하자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당군을 요격한 백제군의 숫자가 신라군을 저지한 계백의 부대의 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단, 이 해석대로라면 수도 가까이에서 결전이 벌어진 것은 백제의 작전대로였다는 의미가 되므로, 계백이 출전할 때는 아직 그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처자식을 죽여야 할 정도로 비관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두 번째는 반대로 백제군이 당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먼저 신라군부터 격파할 작전을 세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라군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탄현을 넘은 것과는 달리 당군은 강어귀에서부터 백제군의 요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백제군은 강어귀에서 당군을 저지하려는 시도를 실제로 했던 것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백제의 원래 계획과는 달리 당군이 백제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오히려 신라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격해왔기 때문에 백제군의 작전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셈이다. 그렇다면 백제군은 신라군과의 일전을 준비하다가, 신라군의 위협은 그대로 남은 상태에서 다시 당군과의 갑작스러운 전투에 휘말려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본기 의자왕편에 의자왕이 당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주장과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주장 중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된 점도 설명가능하며, 계백이 황산벌로 출전할 때 이미 처자식을 자기 손으로 벨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과도 부합된다.

또다른 의문점은 당군이 어느 강을 거슬러 올라갔는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의자왕과 신하들이 작전을 논의할 때는 당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올 것으로 예상하고 기벌포를 막을 것인가를 논의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기벌포에서 백제군과 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구당서 및 백제본기에는 '웅진강' 입구에서 상륙작전으로 백제군을 격파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나오며, 상륙한 곳은 강의 동안(東岸. 당서에는 좌안(左岸)으로 표기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웅진강과 백강이 같은 강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강인가 하는 점이다. 강 이름의 차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웅진강과 백강을 서로 다른 강으로 생각한다면, 백제측은 당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올 것을 예상했는데 당군이 실제로는 웅진강을 선택함으로써 백제군의 의표를 찔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통설은 백강과 웅진강은 모두 같은 금강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는 신라본기에서 기벌포를 언급하고 있으며 기벌포는 금강 하구의 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42] 그런데 통설을 따르는 경우 금강 하구에서 강의 동안은 기벌포와는 반대편인 군산 방면이라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아직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백제 부흥 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한 백강 전투와 관련하여 백강이나 웅진강을 금강이 아닌 동진강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참고로 일본서기 제명기에는 당군의 상륙지점이 미자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미자진이 곧 기벌포인지 혹은 어디를 의미하는지는 불명이다.

당군이 신라군과 합류한 시점도 논란의 대상이다. 구당서나 삼국사기는 신라군이 합류한 것이 백제와의 결전 이전인지 이후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군이 당군과 합류한 다음날 사비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황산벌 전투 이후 사비성 함락까지는 백제군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백제군과의 결전 부분에 당군만이 언급될 뿐 신라군에 대한 언급은 없으므로, 신라군의 합류는 백제군과의 결전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전이 벌어진 곳이 사비성에서 불과 20~30리 떨어진 곳이었으며 당군이 후퇴하는 백제군을 추격해서 곧 사비성에 입성했다고 기술된 점에서 신라군이 그 전에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군의 합류시점이 백제와의 결전 이후라면, 당군은 백제의 주력을 격파하고 약속한 날짜에 도착했는데 신라군은 계백의 별동대의 저항을 처리하지 못해서 날짜를 지키지 못한 셈이 되므로 소정방이 격분해서 신라 독군의 목을 베겠다며 날뛴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2007년 새로운 유적의 발굴로 새로운 떡밥이 투척되었다. 예식진 항목 참조. 그리고 2009년 괵왕 이옹과 그의 부인 합장묘가 발굴이 되어 큰 화제가 되었는데 화제의 이유는 그녀의 성이 '부여' 백제 왕족이라 멸망한 이후의 백제에 새로운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의자왕의 시도가 실패한 후 부여풍(풍왕)이 과 함께 부흥운동을 전개하지만, 갈등 끝에 당군과 신라군의 협공 속에 지원 온 와의 백강 전투를 끝으로 멸망한다. 진도독부의 도독이자 괴뢰국으로서 부여융(융왕)이 백제의 왕을 자처하지만 신라의 나당전쟁 과정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소백제만을 남긴다. 이로서 백제는 완전히 멸망한다. 흔히 부흥운동의 마지막은 흑치상지가 투항한 후 존성수신이 패배하면서 끝으로 본다.

2.6. 이후의 소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은 끌려온 유민들을 모아 당에게 인정받은 자치정부이자, 당의 괴뢰정부이기도 한 웅진도독부를 옛 고구려지역의 건안성에 건립한다. 당나라에서 부여융에게 내린 작위는 대방군왕, 옛 백제왕들과 같은 동일한 직위였다. 약 150여년 지속된 이 소백제를 기반으로 백제의 옛 왕족은 당나라에서 귀족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입지를 가질 수 있었다.

당의 역사서 구당서는 이 건안성이 발해에게 흡수된 것을 백제의 멸망이라고 본다.

3. 사회

백제의 문화, 언어나 풍속, 의복 등은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와 비슷하여 크게 차이가 없었다. 상무적인 분위기가 강하여 승마쏘기를 즐겼으며, 형벌은 엄격한 점에서 고구려와 유사하다.

백제의 형벌은 엄격하여, 반역자, 전쟁터에서 도주한 군사, 살인자는 참수에 처했다. 도둑귀양을 보내고 훔친 물건은 2배의 값을 치뤄서 배상하게 하였다.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종신형에 처하고, 3배의 값을 치뤄서 배상하도록 했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 부여씨와 대성8족이라 불리는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성8족은 왕실과의 혼인이 허락되어 외척이 될 수 있는 비족이다. 당대의 왕비를 배출하면 '길사'라고 하며, 왕권에 버금가는 세력이 된다.

백제의 귀족층은 중국과 교류가 빨랐으며, 중국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다. 이들은 중국의 고전 서적을 즐겨 읽었으며,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바둑, 장기 등의 오락을 즐겼다.

3.1. 중앙 관제

백제의 관제는 분화되어 발전하였는데, 크게 내관 12부와 외관 10로 나누어져 도합 22부가 있었다.

내관은 왕실, 궁내의 업무를 다르는 관서이다. 전내부(前內部)·곡부(穀部)·육부(肉部)·내경부(內部)·외경부(外部)·마부(馬部)·도부(刀部)·공덕부(功德部)·약부(藥部)·목부(木部)·법부(法部)·후궁부 등이 있었다.

외관은 일반 정무를 담당하는 관서이다. 사군부(司軍部)·사도부(司徒部)·사공부(司空部)·사관부(司冠部)·점구부(點口部)·외사부(外舍部)·조부(綢部)·일관부(日官部)·시부(市部)가 있었다.

각 관서의 장은 3년 마다 교체되었는데, 귀족 가문 사이에서 돌려먹기 세력 균형을 의도한 거이거나, 원시 사회에서 군장을 선출하던 풍속이 잔존한 것으로 보인다.

3.2. 행정구역

백제의 지방 행정은 방위로 표시하였다. 수도는 5부로 구분되었으며, 전국을 5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부족제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지방 5방 아래에는 10군을 둔다. 각 방에는 방령과 방좌를 두었다. 방령은 방의 장관, 방좌는 방의 차관 격이다. 그 아래의 군에는 군마다 3인의 군장을 두고, 700~1,200명의 군인을 거느리게 한다. 각 군이 지방 지배 거점이 되었다.

전국 22개 주요 읍(邑)에는 왕자나 왕족이 거주하게 하였으며, 지방통치 권한을 가졌는데 이를 '담로'라고 불렀다. 담로 제도는 군을 거점으로 하는 제도가 정비되기 전의 일이다.

3.3. 언어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초기 고구려계 유이민들의 영향으로 부여계 언어를 썼을 것이고, 후대로 갈수록 마한계 언어적 성향이 짙어졌을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중국의 사서인 주서(周書)에 의하면, 백제의 귀족들은 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불렀고 백성들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것을 이유로 백제의 지배층들은 부여계 언어를 사용했고 백성들은 한(韓)계 언어를 사용했으므로, 백제는 지배층들과 백성들의 언어가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조선 시대 신하들은 왕을 주상, 전하로 불렀고 백성들은 나랏님, 임금님으로 불렀으므로 왕을 일컫는 어휘로 다르다고 속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백제인들의 인명, 백제의 지명을 통해 백제어를 유추하기도 한다, 하지만 지명으로 그 나라의 언어를 연구하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다.[43]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백제 목간이 발견되어 학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 그 중 향찰 표기가 눈에 띄는데 백제의 향찰 표기가 신라보다도 이른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3.4. 경제

백제는 농압 발전이 빨랐다. 백제가 성립되기 이전인 삼한 시대에 이미 농사를 지었으며, 수리시설이 발달하였다. 경제력이 좋고 중국에서 선진 문화 도입이 빨라서 공업도 빠르게 발전하였다. 직조술·염색술 등 수공업이 발전하였으며, 금속공업도 발달하여 무기·금관·금은 장식품·불상 등이 고유한 양식으로 제조되었다.

토지제도는 국유를 원칙으로 삼았다. 토지 측량방법은 두락제를 썼다.

조세제도는 조를 로, 세(인두세)로 , 혹은 비단의 실과 , 곡물인 쌀을 거뒀다. 농사가 풍작, 흉작이냐에 따라서 조세에 차등을 두었다.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외무역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겨 여겨진다. 전통적으로 남조 국가가 번영하던 중국 남부와 일본과 교역을 나눴다. 백제와의 무역을 통하여 일본은 다양한 문물을 도입했다고 여겨진다. 백제 시기의 주요한 무역항으로는 영암과 당항성이 있다.

3.5. 연도

백제는 일반적으로 연호를 써서 년도를 표기하던 다른 국가들과 달리 12간지로 연호를 표기했다. 《한원(翰苑)》에서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에서 "(百濟)其紀年 無別號 但數六甲爲次第"라는 기록이 남아있고 후에 발견된 『사택지적비』에도 "甲寅年正月"로 12간지가 사용되었다.

4. 문화

4.1. 한학

백제의 국가 관직으로 오경박사·의박사·역박사 등이 있었다. 이러한 박사 직위로 보아 백제 한학은 수준이 높았다고 여겨진다.

472년(개로왕 18년)에 백제가 북위(북조 국가)에 보낸 국서가《위서》에 실려 있는데, 백제에서 한문과 한자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증거로 여겨진다. 541년(성왕 19년)에 양나라사신 육허가 와서 <예론>을 강의하였다.

백제는 일본에 한학을 전파하기도 했다. 근초고왕 때 아직기, 근구수왕 때 왕인이 일본에 가서 한학을 전파하였다.[44] 백제 무령왕 때는 단양이, 고안무 등이 일본에 가서 학문을 전파했다.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왕 523, 왕비 526)은 해서체로 되어 있으며, 사택지적비는 사륙변려체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금석문에서 한문학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4.2. 국사편찬

375년(근초고왕 30년)에 고흥이《서기》를 편찬하였다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있었던 것으로, 백제의 학문 수준이 높고 자국의 역사를 인식하는 정통성 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백제기》,《백제본기》《백제신찬》등의 역사책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현재는 전해지지는 않는다. 일본서기에 실린 기록이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의 기록을 많이 참고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4.3. 시가

작자·연대가 미상인, 현존 유일의 백제 노래 읍사악학궤범에 전해지며, 고려사 <악지>에 제목만 등장하는 《지리산가》《무등산가》《방등산가》《선운산가》 등이 있다.

4.4. 종교와 사상

백제는 낙랑군, 대방군의 한족과 접촉하면서 일찍부터 중국 문명을 받아들이며 유교를 수용했다. 유교를 국가적으로 장려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 시기에 역사서〈서기(역사서)〉가 편찬되었으며, 오경박사를 둘 정도로 흥성했다.

백제는 불교를 전파받았고, 불교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으로 숭상하고 장려하였다. 국가에서 건립한 사찰도 많았으며 규모도 매우 거대했다. 600년(법왕 2년)에 착공해서 634년(무왕 35년)에 완성된 왕흥사(王興寺)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384년(침류왕 1년), 출신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을 통하여 전래한 것이 기록상 최초의 불교 전파이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였고, 385년에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이 거처하도록 했다.

599년(법왕 1년), 불교 사상에 심취한 법왕은 불교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다. 민간에서 기르던 매를 야생에 풀어주고, 고기잡이와 사냥을 하는 도구들을 불태우도록 했다.

백제불교는 계율 연구가 활발했다. 백제 승려 겸익은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백제의 유물인 제금동대향로에서, 백제에서 도교신선사상이 발달하였다고 추정된다. 경문전이나 사택지적비에서도 도교의 영향이 발견된다.

특이한 점으로 백제 지방에서는 미륵 신앙이 많이 발전했었는데, 이게 후삼국시대에 대히트를 치게 된다.

4.5. 건축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남아있는게 거의 없다. 안습. 정황이나 역사 기록을 보면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이나, 많은 일본의 사찰이 백제인들의 손으로 지어졌다고 하기에 삼국시대 국가 중에서도 상당히 뛰어난 건축기술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과 정황 외의 근거는 거의 없다. 백제 건축양식을 모방해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호류지시텐노지 등을 통해 그 모습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백제의 건축은 절터, 탑, 고분으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데 상당히 장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는다. 백제의 사찰은 목조 건축물이었으며 전란에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익산에 있는 미륵사지를 비롯한 절터, 절에 세워져 있었던 석탑 만이 현존하고 있다.

백제 시대에 대표적인 세워진 절터로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백제 최대 사찰 미륵사지가 있다.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탑의 형식을 모방한 거대한 석탑으로 유명하다.

림사지 오층석탑은 안저감을 주는 우아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이 있어 삼국시대 석탑 가운데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제 양식의 탑은 통일신라의 석탑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백제 석탑에 기초한 양식은 고려 중기까지도 계속 지어졌다.

백제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은 백제의 수도로 비정되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초기 수도 위례성으로 추정), 공주시, 부여군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이 가운데는 고구려와 유사한 신도가 그려진 것도 있어 두 나라가 공통된 문화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하게 한다. 후기의 고분은 중국 남조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축분(벽돌 무덤)이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백제의 장례 양식은 독특한 측면이 있는데, 시체를 한 번 가매장한 다음 일정한 기간이 지난 다음 파내며, 그 를 깨끗하게 씻고 장례 의식을 행한 뒤 다시 매장하는 복장 형식이었다. 이러한 복장이 가능한 석실묘 전통과 현실을 다루는 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된다. 후기에는 중국 남조와 유사한 전실 고분의 형태까지 받아들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고구려, 중국 남조와의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한성 백제시대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돌무지 무덤이 대표적이다. 돌무지 무덤은 고구려 초기 고분(졸본 부여 시기)과 유사한 양식이다. 웅진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공주시 송산리에 있는 여러 고분들[45]은 백제 중기를 대표하는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후기의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 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무령왕릉은 연화문(연꽃무늬) 벽돌로 아치를 쌓은 아치형 벽돌무덤으로, 무령왕릉에서 도굴출토된 유물로는 금관, 금은 장신구, 석수(돌짐승), 동자상, 청동거울, 도자기, 지석 등이 있다. 무령왕릉에서 있었던 대규모 발굴 덕분에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남조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등 나라의 상호 간에 문화교류, 각국 문화의 특수한 점과 공통되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문화의 이해라는 측면에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고분이다.

조경 면에서는 도교식 인공 정원을 당나라로부터 수입하여, 무왕남지를 만들고, 백제인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비슷한 것을 만들어준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안압지도 여기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4.6. 예술

백제 시기의 그림 예술 역시 남아 있는 것이 얼마 없다. 능산리 고분에는 연화문(연꽃 무늬), 운문(구름 무늬), 사신도를 그린 벽화가 있으며, 송산리 고분가 있다. 백제 시기에 이름이 알려진 화가로는 아좌태자, 등이 있다.

서예 작품으로는 '사륙변려체'로 쓰여진 사택지적비, 해서체로 쓰여진 무령왕릉 지석 등이 있다.

백제의 음악은 어느 정도 수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에는 고·각·공후·쟁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하며, 5∼6세기에 중국 남송(남조 조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의 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악사가 일본에서 음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7세기 초 백제 사람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 음악을 배워서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유명하다.

조각으로는 불교와 관련된 불상 조각이 유물로 남아 있다.

건축이 유명하여 신라가 선덕여왕 시절 황룡사를 건축할 때도 백제의 장인들을 초빙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상업 교류 외에도 문화적 교류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5. 평가

삼국 중에서 영토가 광대한 고구려, 삼국통일을 한 신라에 비해 관심도가 좀 떨어지는 편이다. 사료도 상당히 부족하여 연구에 엄청난 차질을 겪고 있다.

고구려에 비해 작은 영토로 그토록 상당한 국력을 보여준 것을 단순히 충청·전라지방의 비옥한 평야의 힘으로만 볼 수는 없다.[46] 전라지방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보면 백제가 한창 잘나가던 시기에도 호남지방에는 독자적인 마한 호족이 있었다. 백제가 전라지방과 강하게 유착되는 것은 고구려에 패하여 수도를 남쪽으로 옮긴 후다.[47]

백제의 국력은 바다의 세력이 크게 뒷받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자료가 너무 없어서 이것을 정확하게 재구하기는 힘들지만,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 신라나 가야, 왜에 전파하는 대신 외교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48]는 것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백제가 '해상 무역' 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학계에서는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49], 무엇보다도 백제가 뭘 사고 팔았는지에 대한 사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은 삼국사기나 중국측 사서에 엄청나게 많이 보이지만, 그것도 그냥 '조공을 바쳤다' 라는 식이지 뭘 얼마나 바쳤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 또한 한반도 내의 고대 유적지 가운데 돌로 포장된 도로. 즉 상업용 도로가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는 것 역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즉 백제의 경제적 기반은 어디까지나 농업에 있었으며, 백제문화제 같은 데에 가면 볼 수 있는 '해상왕국' 이라는 말도 중국의 문화를 바다를 통해 받아들이고 일본 등에 전해주었다는 의미에서라면 맞는 말이지만 '활발한 해상 교역' 어쩌고 하는 소리는 무시해도 좋다.

생산력면에서 고구려와 비교할 경우 백제 당시 호남평야가 농경지로 개발되었다는 근거는 아직 없다. 고구려의 송화강 유역(부여),두만강 유역(옥저)이 농경지로 괜찮았다는 기록에다 고구려와 중국의 농경 수준이 비슷했다는 기록(생산력이 비슷했다는게 아니라 농업기술)이 있다. 고구려에는 송화강 유역,두만강 유역만 있는것도 아니고 요하 유역과 대동강 유역의 농경지까지 있다. 인구면에서 알려진 백제 인구는 76만호, 고구려는 69만 호(당사의 기록)[50] 그러나 당나라가 집계한 고구려,백제 멸망당시 호구 기록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만은 어렵다고 할 것이다. 남아있는 유민 기록을 보면(출처요망) 당나라가 고구려에서 긁어간 평양 인구가 중산층 이상만 20만인데 반해 백제 사비에서 긁어간 인구는 백성 1만2천 87명이 있고, 여기에 대신과 병사 88명과 왕자 3명에 의자왕과 태자 2명이다. 물론 고구려와 백제 멸망 당시의 지리적인 위치나 상황 등이 다르므로 유민 등만으로 인구문제를 논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보다 더 나아간 논의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역사적`고고학적 연구성과에 기반한 자료가 필요할 것이다.

이 나라에 대한 대표적인 떡밥으로는 백제가 요서 지역에 영토를 두었다는 요서경략설이 있는데, 이는 송서 등 중국 사서의 기록을 주된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설은 당시 요서를 관장하던 북조계 사서에 전혀 기록이 없고, 이 지역에서 백제 계통이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심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백제가 아닌 어떤 세력(그러니까 낙랑이나 부여)의 진출 내지 다른 세력을 백제로 오기하며 빚어진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51] 경략이라기 보다는 후대의 청해진의 활동에 더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백제는 국왕의 힘이 절대적이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나 신라 등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한강 유역을 잃은 시기 전후로 이런 현상이 유난히 심했다.(물론 가야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이것을 단순히 국론분열로만 보면 안 된다. 어차피 과거 삼국시대의 국가들은 죄다 여러 세력의 연합체였고, 그 연합도 매우 느슨했다. 그니까 원래 국론이 분열되어 있는 나라들인 것이다. 반란이 일어나 왕이 시해되는 것은 세력 간이 조율이 잘 안 된 결과인 것이지, 단순히 신하가 왕을 시해했다고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사실상 삼국시대의 왕들은, 조선왕조의 왕 같은 게 아니라, 여러 세력집단의 대표자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게 낫다.[52] 따라서 각 세력은 자신의 세력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당연했다. 오늘날과 같은 민족국가 개념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백제에 있던 세력이 백제가 마음에 안 들거나 일이 잘 안 풀리면 일본으로 건너갈 수도 있고, 중국으로 건너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걸 오늘날 감각으로 반역이나 배신 같은 걸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다.

의자왕이 패배한 후에도 백제 전토가 제압되지 않고 계속 당과 신라와 전쟁을 벌인 것도 의자왕이 여러 세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더이상 백제가 부흥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각 세력은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중국이나 신라로 소속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일본과는 그냥 친한 정도가 아니라 혈맹관계로 역사 관련 창작물 등에 떡밥을 많이 뿌린 국가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의 파격적인 부흥운동세력 지원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진다. 사이메이 일왕이 661년에 급서했는데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가 즉위식도 미뤄가면서 부흥운동 지원에 전력을 다했을 정도였다. 이 당시 일본이 백제부흥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했는 병력의 규모는 자그마치 400척(!!)[53]에 4만2천명의 병력을 지원했다.[54] 다만 문제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비교적 깡촌이였던 일본의 400척 대함대가 당시 전세계 최강이였던 원조 천조국 당나라 군대 170척에게 백강 전투에서 궤멸당했다는 것... 전투경과는 비록 일본함대의 참패로 끝났지만 이런 파격적인 지원은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였는지를 알려준다. 오늘날의 한일관계와 비교해본다면 천지차이. 문제는 당시 일본의 파격적인 지원을 일부 몰지각한 후손들이 "백제는 일본의 꼬봉이라서, 일본이 그렇게 정성껏 지원해준거라능!!"이라는 식으로 왜곡시킨다는것. 조상 얼굴에 똥칠하는 놈들

어쨋든간에 백제와 일본의 혈맹관계는 매우 친밀하여 관서 지역-특히 오사카-에는 지명 이름부터 해서 백제라는 이름이 정말 많이 남아 있으며 잘 찾아보면 그 외에도 백제에서 넘어간 것으로 추측되는 문물이 매우 많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백제의 여러 유력씨족들은 신라 밑에 있기보다는 우호가 깊던 일본으로 이주하는 길을 택하여 양잠기술 등 고급기술을 지닌 씨족이나 학문, 과학 분야의 씨족 등이 대규모로 일본으로 떠났고, 야마토 조정은 이 횡재를 맞아 이들을 여러 지역으로 분산시키고 그 능력을 흡수하여 국력과 왕권을 강화시켰다. 고구려 유민 일부도 이러한 길을 걸었다.

개소문 번역글이나 일본어 위키백과를 보면 일본 혐한&재일화교(대만인 포함)들이 백제 지배층이 만주에서 내려온 고구려계 유민세력이라는 점과 왕을 가리키는 말이 지배층과 백성들이 서로 달랐다는 몇가지 문구를 왜곡하여 중국 동북공정 내용을 버무려 백제인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식의 헛소리를 하고 있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심상치 않은 내용을 담은 백제의 목간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어서 학계에 자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 신라 금속공예술의 기원이 백제라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흔히들 지역주의자들이 경상도 신라놈, 전라도 백제놈 하면서 서로 싸우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55][56] 사실 백제 시대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개념이 없었다. 즉 고대국가를 현대의 행정구역에 억지로 끼워 맞춘 것.

굳이 따지자면 백제의 수도는 서울 - 공주 - 부여로, 서울특별시 - 청남도 중부 - 청남도 남부였다. 물론 충남 부여군은 전라북도 익산시와 맞닿아 있긴 하다. 또한 충남 남부와 전북은 백두대간으로 막힌 영호남과는 달리 평지로 연결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방언도 같은 권역이다. 어쨌든 백제 역사 중 초중기의 영토는 경기도와 황해도, 충청도 북부 지역에 국한되었으며, 충청도 남부 지역과 전라도 지역에는 4세기 넘게 지국을 비롯한 마한의 소국들이 존재했다. 백제가 전라남도 지역까지 완전히 편입하는 데는 오랜 전투를 통한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걸렸고 정벌 후에도 전남은 백제에 상당히 배타적인 지역이라 다루기도 심히 곤란해했다. 물론 전라도가 백제에게 중요한 지역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으나,[57][58] 백제의 영토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위까지 뻗어있다. 오히려 후백제 쪽이 전라도에 기반을 두었다. (수도인 완산주는 지금의 전주다)

즉, 백제=전라도 인식은 전라도에 거점을 둔 후백제에 의해 생긴 것. 애초에 백제의 남진 이전에는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동부가 변한-임나,가야의 영역으로 서로 같은 공동체였다! 백제의 영역은 700여년이라는 세월에서 500여년간 경기도+충청도+전라도 북부(익산 포함)에 머물렀고 전라남도까지 완전히 지편입하게 된건 200여년 남짓. 그러니까 지역감정을 머나먼 고대까지 끌어올리는건 무리수. 사실 고려 이전에는 전라도, 경상도 개념이 아예 없었다. 차라리 남북갈등이라면 모를까...(지역감정의 경우 '만들어진 현실'을 비롯한 사회학적 연구성과들이 나와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참고하면 좋을 듯하다)

6. 백제의 인물들(시대순)

이름순에 따른 일람은 백제의 인물들 문서 참고.

  • 백제의 왕
  • 1세기
    • 비류 ( ? ~ ? )
    • 소서노 ( ? ~ ? )
    • ( ? ~ ? )
      개국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공신 중 한 명.
    • ( ? ~ ? )
      개국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공신 중 한 명.
    • 흘우 (? ~ 48년)
    • 진회 ( ? ~ ? )
      다루왕 때의 대신. 8개의 힘있는 성씨인 대성팔족 중의 하나인 진(眞)씨 출신. 진씨 중 가장 처음 나오는 인물. 흘우가 좌보가 되자 그가 우보를 이어받든다.

  • 2세기
    • 여질 ( ? ~ ? )
      왕족. 기루왕의 아들.
    • ( ? ~ ? )
      신라 귀족으로, 아찬을 지냈다. 15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백제로 망명한 것을 개루왕이 받아줘 대접해줬다. 이 일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배신할 지도 모르는 길선을 받은 개루왕이 어리석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다음 백제왕인 초고왕 시기에는 길선의 송환 문제로 신라와 백제는 감정의 골이 파이기 시작했고, 신라가 백제를 쳐서 많은 인명피해가 나기도 했다.

  • 3세기
    • 보과부인 ( ? ~ ? )
      책계왕의 왕비. 대방군(帶方郡) 태수의 딸.

  • 4세기
    • ( ? ~ 327)
      비류왕의 배다른 동생. 321년에 내신좌평에 임명되었으나 결국 327년 북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토벌되었다.
    • 목라근자 ( ? ~ ? )
    • 막고해 ( ? ~ ? )
      371년에 있었던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등장. 백제에 패배한 고구려 고국원왕이 도망가자 "뒤쫓지 마시고 여기서 만족하며 돌아가죠"라는 뜻으로 도덕경을 인용한다. 백제가 도교가 전파되었던 국가임을 알 수 있는 근거 중 하나.
    • 고흥 ( ? ~ ? )
    • 직기 ( ? ~ ? )
      학자. 일본에 처음 말을 전파하고,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된다. 후에 왕인을 추천하여 왕인이 일본으로 오게 된다.
    • 왕인 ( ? ~ ? )

  • 5세기
    • 도미 ( ? ~ ? )
      미설화의 주인공.
    • 도림 ( ? ~ ? )
    • 증걸루 ( ? ~ ? )
      고구려의 장군. 실은 백제 귀족으로, 고구려에 망명을 했다. 장수왕의 명령으로 백제를 침략하여 개로왕을 잡은 뒤 먼저 절을 한 후 다시 얼굴에 침을 뱉고 목을 배었다고 한다.
    • 이만년 ( ? ~ ? )
      고구려의 장군. 실은 백제 귀족으로, 재증걸루와 같이 행동했다.
    • 협만치 ( ? ~ ? )
      목례만치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이 죽은 뒤 조미걸취와 함께 태자 문주를 모시고 남으로 피난간다. 그리고는 문주를 문주왕으로 옹립하여 웅진 시대를 연다. 그리고는 기록이 없다.
    • 해구 ( ? ~ 478)
      문신. 병관좌평.(최고위 관직인 좌평의 하나로, 군사업무 관장) 해(解)씨는 8개의 힘있는 성씨인 대성팔족 중의 하나. 해구는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권력자였다. 왕이었던 문주왕을 살해했을 정도. 이후 삼근왕을 옹립하였고, 훗날 478년에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관광 당해 처형당했다.
    • 곤지 ( ? ~ ? )
      왕족. 문주왕의 동생이며, 내신좌평(왕명의 출납을 관장)이었지만 해구에게 살해당했다.
    • ( ? ~ ? )
      좌평. 진로와 함께 해구의 반란을 진압했다. 진로와 함께 대성팔족 하나인 진(眞)씨 출신 귀족.
    • 진로 ( ? ~ 497)
      병관좌평. 진남이 왕명으로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진압하려 갔지만 이기지 못하자 진로가 5백명으로 해구를 제압한다. 원래 덕솔(4등급)이었으나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고 482년에 병관좌평까지 올라갔다.
    • ( ? ~ ? )
      은솔(3등급). 대성팔족(大姓八族) 중의 하나인 연(燕)씨. 해구가 문주왕을 살해한 이후부터 쭉 국정을 맡다가 해구와 같이 반란을 일으킨다. 해구가 잡혀 죽자 혼자 고구려로 도망갔지만, 가족들은 잡혀서 웅진 시장에서 처형당했다.

  • 6세기
    • 겸익 ( ? ~ ? )
      승려. 성왕 시기인 531년에 인도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
    • 리사치계 ( ? ~ ? )
      달솔. 승려. 백제 성왕 시기인 552년에 일본에 불교 전파해준 인물이다. 일본서기에만 등장.
    • 아좌태자 ( ? ~ ? )
    • 강중광 ( ? ~ ? )
      57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593년에 시텐노지를 세운 세 명의 목수 중 하나. 그의 자손들은 곤고구미를 세워 대대손손 시텐노지를 보수한다.

  • 7세기
    • 화공주 ( ? ~ ? )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무왕의 왕비인 동시에 동설화의 히로인. 그러나 미륵사에서 발견된 기록 때문에 실존했다는 것이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실존했다는 설에 의하면 무왕의 첫째 부인이다.
    • 택적덕 ( ? ~ ? )
      좌평. 사택왕후의 아버지. 미륵사 탑의 기록에서 나온 인물.
    • 택왕후 ( ? ~ ? )
      사택적덕의 딸로, 무왕의 왕비.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의 어머니가 642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택왕후가 의자왕의 어머니라는 가정을 하면 642년에 죽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미륵사 관련 기록 때문에 선화공주에 이은 두번째 부인이라는 추정이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사택왕후가 실존한 것은 사실이다. 미륵사 탑의 기록에서 나온 인물.
    • 사택지적 ( ? ~ ? )
      대좌평. 642년 일본에 갔다 왔으며, 654년에 은퇴. 642년의 일본 방문이 의자왕이 부여교기를 쫓아낸 것과 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존재.관련링크. 말년에 사택지적비를 세운 인물.
    • 여교기 ( ? ~ ? )
      의자왕의 동생. 642년에 (누군지는 정확히는 몰라도) 아버지 무왕의 왕비가 죽자 의자왕은 부여교기와 그를 따르던 신하 40여명을 일본으로 추방한다. 일설에 의하면 부흥군의 풍왕이 이 부여교기였다는 말이 있다.
    • 성충 ( ? ~ 656)
      문신. 상좌평. 성은 부여. 일명 정충. 백제 3충신.
    • ( ? ~ ? )
      장군. 642년 신라의 대야성등을 빼앗음.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를 살해. 그가 부여씨이며, 성충의 동생이라는 것과 누명을 쓰고 파직되어 홧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다.
    • 비지 ( ? ~ ? )
      건축 엔지니어. 645년에 신라로 건너가서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했다.
    • ( ? ~ 660 )
      백제의 장군. 의자왕 시기인 647년에 신라를 쳐서 전공을 세우다가 희대의 먼치킨 김유신과 붙어서 패배한다. 이듬해인 648년에 신라를 쳐서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으나 옥문곡으로 진격하다가 김유신에게 또 걸려서 대패하였다. 김유신이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자 김춘추는 이들과 자신의 딸과 사위의 유골을 교환하였다. 훗날 좌평이 되어 660년에 나당연합군과 기벌포에서 2만명을 이끌고 싸우다가 소정방의 13만에게 패해 전사하였다. 운이 좀 부족했던 인물...(...)
    • ( ? ~ ? )
      문신. 성충과 함께 의자왕에게 정신 좀 차리라고 하다가 유배. 백제 3충신.
    • 계백 (612 ~ 660)
    • 예식진 (615 ~ 672)
      장군. 의자왕을 당나라에 바친 매국노.
    • 풍왕 ( ? ~ ? )
    • ( ? ~ 661)
      승려. 부흥군이었으나 복신에게 제거당했다.
    • ( ? ~ 663)
      왕족. 성은 부여. 부흥군으로 유명하나, 도침과 반목하다가 도침을 죽인다. 결국은 풍왕까지 제거하려다 역관광당하고 잡혀서 목이 베인다. 의외로 풍왕이 믿고 의지했었는지 복신의 처형을 망서렸다는 기록이 있다.
    • 집득 (? ~ ?)
      달솔. 풍왕을 모시는 부흥군의 한 명. 복신이 풍왕을 죽이려다가 역으로 잡혔는데, 풍왕이 마음이 약해서 복신을 죽일지 망설이자 덕집득이 죽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고 "이 썩은 개 못난 노예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 흑치상지 (630 ~ 689)
    • 충상 (? ~ ?)
      좌평. 김유신 열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인물로 황산벌에서 계백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20여명의 부하와 함께 항복하였다. 후에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자 길앞잡이 노릇을 하며 출전하였다가 패배하였고 이로 인해 문책을 받았다.
    • 융왕 (615 ~ 682)
      왕족. 성은 부여. 웅진도독으로 왕을 자처하나 실패로 끝났다.
    • 수신 ( ? ~ ? )
      임존성의 부흥군. 배신한 흑치상지 등이 당나라 편에 붙어 공격해오자 포기하고 고구려로 망명갔다.
    • 타상여 ( ? ~ ? )
      백제부흥군에 속해 있었으나 흑치상지와 함께 부흥군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당나라에 붙었다.

8. 백제를 소재로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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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남부여'라는 명칭은 성왕대에 잠시 사용했기 때문에 공식명칭으로 좀 애매하다. 더구나 보통 제대로된 국호에는 방위명을 붙이지 않는다는 점, 부여와 백제의 연계성, 외교활동에서의 사용 빈도 등으로 미루어, 공식 국호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남부여'라는 국호는 일시적인 이벤트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 [2] 5세기 후반에 황해남도 동남부와 한강 유역, 강원도 남부 지역 등을 상실한다.
  • [3] 인구에 관한 기록이 없는건 아닌데 전성기 호수가 15만 2300호(약 75만 명) 남짓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부터 멸망했을때 호수가 76만호(약 380만 명)에 이른다는 서의 기록, 백제의 멸망시기에 기록된 대당평백제비는 아예 한 텍스트에 호수는 25만(약 125만 명)이면서 인구수는 620만이라고 스스로 헷갈리고 있는 지경이다. 이에 대해서는 통일신라의 사례를 감안해 호당 10명으로 계산해도 약 250만 명. 인구수가 620만 명 이라는 이어지는 기록에 맞추기 위해 124만호의 오기라는 주장도 있다. 인구에 대한 기록이 적게는 70만부터 많게는 600만까지 일관성이 전혀 없고 하나같이 들쑥날쑥해서 세밀한 추정이 어렵다. 대당평백제비의 기록은 25만호라는 기록이 620만명이라는 기록보다 실제 인구에 근접할 확률이 높다. 25만호는 전성기에서 멸망할때까지의 자연증가를 감안했을때 삼국유사의 15만호와 자연스레 맞아떨어지는 흐름이 있기 때문. 참고로 정말 백제 인구가 620만이라고 하면 백제의 3배 이상에 이르는 땅을 갖고있던 고려보다도 많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 백제인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실시한 것도 아니고, 백제인들이 우루루 일본으로 몰려간 것도 아니고, 사실 620만은 대륙백제까지 합친 인구였다, 아니다. 대륙백제는 무슨. 환빠냐? 백제별종 야마토의 호수까지 합친거다.... 상식적으로 백제 인구가 원 침입 이전 고려의 인구보다 많을 이유가 없다.
  • [4] 하남 위례성에 해당하는 지역이 서울 동남부의 풍납토성 일대인 건 분명한데 처음에 온조가 자리잡은 지역은 여기서 동북으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있는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 [5]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난 후의 반격에 대비하여 옮긴 이도로 현재의 경기도 광주 일대가 한성백제의 수도 중 하나인 한산으로 유력시된다. 고려 시기에도 이 지역을 한산이라고 부른 기록이 나온다.
  • [6] 다만 건국년도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건국"항목 참조.
  • [7] 요즈음은 교과서 등에서 음독하여 ひゃくさい/はくさい(햐쿠사이/하쿠사이)등으로 적는 경우도 있으나, くだら 쪽이 옛날부터 써 오기도 했고 지금도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오사카쪽 지명에 百濟(쿠다라)를 쓰는 경우가 많다.
  • [8] 일본어로 곰을 쿠마라고 부르고, 나루의 옛 발음은 나와 루 둘 다 똑같이 아래아로 되어 있다.
  • [9] 이강래의 삼국사기 주석에 따르면 구태는 부여왕 위구태를 말하는 것으로 북쪽의 부여와 백제의 다른 이름인 남부여를 혼동하여 기록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오래된 떡밥은 우태=고이왕 설이다.
  • [10] 인천 광역시의 수돗물은 미추홀 참물이란 이름을 공식 브랜드로 달고 있다. 비류가 시망한 이유가 미추홀의 짠 바닷물 때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흠좀무.
  • [11] 그렇지만 아직까지 고이왕 이전시기에 대한 백제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의 발굴결과도 중국계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건국년도는 약간의 오차가 있는 고구려를 제외한 신라와 백제는 신뢰도가 많이 떨어지는 편이기 때문에 발굴 조사에 의존할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발굴결과들은 백제의 기원전 건국설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는 실정이다.
  • [12] 이는 신라도 마찬가지다.
  • [13] 현재 충청남도 천안에서 전라북도 익산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
  • [14] 진왕이 백제 고이왕이라는 설도 있다. 이 경우라면 목지국은 백제의 다른 이름이 된다.
  • [15] 근초고왕의 마한 진출은 명확치 않다. 기록이 불분명하지만 정황상 근초고왕 시기에 마한이 백제에 복속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다만 무령왕 시절에 다시 마한을 정복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근초고왕 시절에도 마한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한 것으로 추정되며 근초고왕 사후 백제가 급속히 쇠퇴기로 접어들자 마한 세력이 다시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 [16] 근초고왕 시절 중국의 요서와 산동에 진출하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는 불확실하며 산동 운운하는 부분은 완전한 오류다. 요서경략설 문서 참조.
  • [17] 현재 서울과 평양 사이 지역으로 추정
  • [18] 볼모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황상 볼모라고 보기는 어렵다.
  • [19] 고구려 장수왕 재위기간(412년 ~ 491년) 동안 백제는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을 거쳤다.
  • [20] 일본서기에는 이때 백제가 멸망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 [21] 백제귀족지원군보다 신라지원군이 먼저 도착하는 안습한 상황이 벌어졌다.
  • [22] 개로왕의 동생 또는 아들로 추정된다.
  • [23] 문주왕의 형제인 곤지의 아들 모대
  • [24] 계백에게 주어진 군대 숫자가 5천명밖에 안된 이유로 제기되기도 한다. 다만 대다수 군대를 당군과 싸우게 하다보니 남은 군대가 5천명밖에 없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백제가 왕과 지방 세력간의 대립이 이 당시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심각한 수준이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 [25] 단적으로,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죽을 때, 문주왕이 이끌고 온 군대의 주력은 백제 귀족들의 군대가 아닌 신라군이었다. 다시 말해 신라로부터 원군 1만을 거느리고 한성 위례성에 도착하였으나 백제 귀족의 응원군은 오지 않은 채 수도가 점령되고 부왕은 시해 크리. 흠좀무. 웅진시대에 국력 회복이 어느 정도 된 동성왕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왕권 강화를 시도했고, 결국 측근세력으로 보았던 백가를 중심으로 한 세족들의 반란으로 사망. 의자왕 역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결과 백제 귀족들의 지원은 뜨뜻미지근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실제로 의자왕의 사망 역시 그 짧은 시간에 배반에 의한 것이 었으니.
  • [26] 그런데 고대 권력다툼에 민중이 참여하는 경우 자체가 드물다. 원래 왕과 귀족은 크고 작은 부족장에서 시작하고, 왕권이 약한 고대 국가에서 귀족의 탈을 쓴 부족장들은 말이 좋아 귀족이지 사병을 거느린 봉건제후나 마찬가지이고, 왕비를 독점한 대성8족 정도 되면 거의 왕에 근접한다. 이들을 얼마나 빨리 때려잡느냐가 진정한 왕권강화인 동시에 중앙 집권화가 된다. 참고로 왕권 버금세력이 사라진 것이 확실한 처음 시기는 왕비족이 사라지는 신라 무열왕 대부터, 분권의 상징인 사병이 완전히 혁파되는 것은 조선 태종시기는 되어야 한다.
  • [27]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때의 전장으로 추정되는 장소들이 북한강 중상류, 예성강 유역까지 뻗어있다. 무령왕이 한성을 순시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 미루어 보면 과거 전성기 시절까지의 영토에 근접하는 수준까지 회복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때 고구려가 북위에 보낸 사신에 의하면 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빼았겼다는 말이 있다. 심지어 장수왕의 한강유역 점령 자체가 한강남부까지 완벽하게 확보한 것이 아니라 한강 이북지역까지였고 동성왕 대에 이미 한강을 중심으로 대치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백제의 웅진시대 중 동성왕 이전은 왕들이 금새 죽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고구려가 한강을 확보했다는 것 자체를 의문시하기도 한다.
  • [28] 고구려가 한강 이남까지 내려온 것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증명된지 오래되었다. 일단 몽촌토성에서는 고구려 토기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대전 인근에도 고구려 요새와 토기들이 발견 된 상황이다. 참고로 고구려 토기와 백제 토기는 상당히 달라서 원저계가 주류인 백제와 달리 고구려 토기는 평저가 주류를 이루며 대상파수 또는 교상파수라고 불리는 손잡이는 고구려 토기의 특징이다.(이 파수는 지금의 항아리에도 남아있다) 다만 사비기 백제토기의 경우 4~5세기 고구려계 토기가 갑자기 6세기 백제 수도에 등장하는데, 이는 최근 들어 무령왕 또는 성왕대의 영토회복 과정에서 고구려 지배하에 있던 백성들을 사비 건설을 위해 사민정책을 펴면서 이런 토기들이 나오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참고로 남부여라고 국명을 고친 것도 사실 이런 주민들을 흡수하기 위한 성왕의 계책이 아닌가 생각되기도한다
  • [29] 임용한의 해석은, 백제의 고질병인 왕실과 지방세력 간의 분규로 인해 지방 세력이 왕권을 강화해줄 것이 뻔한 한강 유역을 개발하는 데 협조하는 것을 거절했고, 여기에 북쪽의 고구려와 남한강의 수운을 업은 신라의 양측의 압박을 받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성왕이 철군하자, 신라 진흥왕이 '잘 먹겠습니다'하고 한강 유역을 접수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한성을 버렸다"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백제가 한강 유역을 정말로 '포기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 [30] 성왕의 목을 벤 도도는 삼국사기에는 비장 고간 도도라고만 되어 있으며 노비라는 언급은 없다. 노비라는 것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표현인데, 정확하게는 도도가 노비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로잡힌 성왕이 도도를 꾸짖으면서 천한 노비라고 부른 것이므로, 노비라는 표현이 꼭 도도의 실제 신분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 [31] 참고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군의 패배의 결과로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왕이 사로잡혀 처형당했기 때문에 백제군이 무너진 것이고 그 전의 전황은 백제가 우세했다. 소규모의 기병을 거느리고 직접 전선을 시찰(혹은 적진을 기습)하다가 신라의 김무력이 이끌고 온 원군과 마주쳤다고 한다.
  • [32] 정확히는 2만 9천 6백명. 홈쇼핑인가? 같은 신라의 자료를 인용한 김유신 열전에는 1만의 목을 베었다고 썼다. 김유신 열전부터도 과장이 심하다고 김부식부터 깠던 것을 고려하면, 본기의 과장이 의심되는 부분.
  • [33] 초기 일본 학자들은 백제가 워낙 몰렸기 때문에 동성왕이 남조에 사기친 것이라는 주장까지 존재했다. 현재 국내 학자들 중에서 공식적으로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 [34] 위로=고구려설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수륙합동작전을 예로 들수도 있지만, 수륙양동은 상당히 위험한 작전이어서 유리한 입장의 고구려가 일부러 도박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박이 가능하다.
  • [35] 이에 대해서 고구려와의 전투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남조 측의 지지와 지원을 얻기 위해서 굳이 '위'를 강조했다고 본다.
  • [36] 이 시기 고구려는 말 그대로 전성기였기 때문에 남북조가 서로 끌어들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해석이 엇갈리는데, 위로=고구려설 입장에서는 그래서 고구려 디스하려고가 되고, 위로=북위의 입장에서는 고구려 깬 것으로는 남조에 대해서 자랑거리가 못된다는 반박이 나온다.
  • [37] 이 시기가 바로 당태종-당고종으로 대표되는 당나라의 전성기로서, 비단 당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강력한 전성기 중 하나이다.
  • [38] 사실 이 점은 백제 안의 여러 세력들이 제대로 단결하지 못해서 중요한 순간마다 백제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왔으나 사비성 함락 시기에는 예외였다. 왜냐하면 나.당 연합군이 지방의 세력들은 무시하고 사비성만 집중 공격했는데 이런 전술은 일본에서나 통할 전술이지 위에서 말한 대로 독자성 강한 백제의 지방 세력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아서 사비성의 방어 문제(웅진성과 달리 방어에는 용이하지 않았다.)와 보급 문제가 겹쳐서 오히려 나.당 연합군이 포위되는 결과를 불러들였고 의자왕은 이를 이용해 지방군을 전부 동원해 나.당 연합군을 궤멸시키려는 치명적인 작전을 구사한다. 다만 이 작전은 예식진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그 계획은 복신과 도침, 그리고 부여풍의 백제부흥운동으로 이어진다.
  • [39] 일본이 갑자기 국호를 바꾸고 수도를 새로 짓고 율령을 만들고 한것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이루진게 아니다.
  • [40] 왕의 정예군을 모았다는 시각도 있으니 판단은 제각기 알아서 할 것.
  • [41] 반면 중국기록만 있을 경우에는 거리낌없이 취했다. 피후의 문제로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기록된 당나라 기록을 취한 결과 연개소문은 삼국사기에 천개소문으로 등장한다.
  • [42] 백제 부흥 운동 과정에서 마지막 결전이 이루어진 곳은 백강이며, 역시 기벌포가 언급되고 있으므로 백강=금강이라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다. 다만 '백강'이라는 이름이 다소 혼란스럽게 사용되어 동진강과 금강 사이에서 왔다갔다했다는 견해는 있다.
  • [43] 지명이 가진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보수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외국의 사례만 봐도 런던(London)은 고대 로마 시기의 론디니움(Londinium)에서 파생되었으며, 중동 지역의 많은 오래된 도시들의 지명이 옛날 지명을 그대로 따서 쓰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반도 중부의 고구려 지명들은 오히려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썼을 가능성이 많다. 이러한 이유로 지명을 가지고 고대 언어를 연구하는 것에 회의감을 나타내는 학자들이 많다.
  • [44] 왕인이 백제 사람인지 중국인인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 [45] 무령왕릉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대부분 도굴됐다.;
  • [46] 하지만 삼국 중 백제의 국력을 가장 높게 보았던 다산선생의 평가 -지리적 조건에 기반한-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워낙 땅이 땅이다 보니 비옥하면서도 광활한 경작지가 별로 없었고, 신라 역시 경상도 일대 만을 점유하고 있던 시절에는 낙동강 중상류의 분지 및 하류의 김해평야를 제외하고는 산투성이였으니...
  • [47] 정확하게는 동성왕 시기이다. 동성왕은 제주도까지 정벌했다는 학설이 존재할 정도로 남부지역의 정리에 성공한다. 무령왕 시기의 중흥은 이런 바탕속에서 가능했다. 중국으로 치자면 남북조 시대가 되면서 장강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은 황하 유역으로 그외에는 오랑캐 취급받았다. 춘추전국시대의 오, 월, 초가 괜히 촌놈 소리 들은 것이 아니다. 물론 계속 조용했던건 아니고 동명왕 이후에도 자잘한 충돌이 있었다.
  • [48] '선진 문물 줄 테니 군사를 빌려다오' 하는 식. 특히나 왜와 이런 거래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 [49] 물론 긍정적으로 보는 학자도 있겠지만, 공주대학교의 정재윤 교수와 이남석 교수 등 현재 국내에서 백제사 연구를 주도한다고 할 수 있는 학자들은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 [50] 보통 1호를 5인으로 계산하므로 멸망당시 백제의 인구는 대략 380만, 고구려는 350만([email protected]) 정도로 추산된다.그러나 학자들이 추산하길 조선초의 인구가 적게잡으면 600만 많이 잡아도 1000만이 넘지 않는거 보면 이기록은 너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왜냐하면 이 기록대로 하자면 벌써 7세기에 그 좁은 한반도에 인구가 800-1000만이나 되었다는 것.그말은 700년동안이나 한반도의 농업생산력이 전혀 늘지 않았다는 소리나 똑같다.그리고 그당시 중국과 일본의 인구밀도를 생각해 보아도 우리나라만 비정상적으로 인구밀도가 중국이나 일본보다 3배나 높았다는것도 말이안된다.
  • [51] 이런 설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시기정도 되면 낙랑이고 부여고 다 망한 이후라는 것이지만...
  • [52] 참고지만 한민족이 세운 국가는 보통 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때가 꽤 적은 편이다. 전부는 아니지만예를들면 세종대왕같이 매우 좋게 서술된 왕도 있다 보통 고서에 서술이 아주 안 좋은 왕이 그런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왕이다
  • [53] 기록에서는 1000척이라고 하지만 1000척은 과장이고 실제로는 400척이라고 한다.
  • [54] 시대와 총인구의 차이를 감안해보면 훗날 임진왜란과 비견될 수도 있을 정도의 대병력이라고 볼 수 있다.
  • [55] 요즘엔 아예 백제와 전라도를 옄어서 지역드립을 치기도 한다.
  • [56] 여담이지만 경상도 내에서 경상남도를 보고 가야놈이라고 하고 경상북도 보고 신라놈이라고 나눠서 서로 지역 드립치기도 한다.특히 김해쪽 경우 건국설화까지 얽혀있다 보니 더 가야색이 짙다.다만 이 드립 경우 백제 드립 만큼 심하지는 않다.
  • [57] 그 증거로,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의 금마, 왕궁 근처에는 백제 시대의 유적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다. 왕궁(王宮)은 아예 지명이 백제가 있던 시절에 이 지역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다.
  • [58] 근데 또 이거 가지고 또 트집잡아서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사람들이 있다.고만해 미친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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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12-06 13: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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