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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

last modified: 2015-03-30 21:24:29 by Contributors


Château de Versailles (Palace of Versailles)

Contents

1. 소개
2. 연혁
2.1. 프랑스 연방 의회
3. 목적
4. 구조
4.1. 거울의 방
4.2. 전쟁의 방
4.3. 평화의 방
4.4. 왕실 성당
4.5. 쁘띠 트리아농 궁
4.6. 그랑 트리아농
4.7.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을
5. 관광

1. 소개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22km 가량 떨어진 베르사유 시에 있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건설한 궁전.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태양왕 루이 14세의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는 대 건축물이다. 건설에는 무려 25,000~36,000명의 인부가 매년 동원되었다.

궁전 건물의 면적보다 더 넓은 정원이 유명하며[1], 별궁으로 대 트리아농 궁과 소 트리아농 궁이 있다.

이에 빡친 합스부르크 왕가는 쇤부른을 지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주된 배경이기도 하다.

2. 연혁

베르사유에 최초로 궁전이 들어선 것은 1624년으로 U자형의 날개건물 구조의 궁성으로 외벽은 회칠만 한 상태였으나 1634년 모서리쪽에 방을 증설하면서 현재의 정면부 파사드의 기초가 되는 붉은색 벽돌과 회색빛 뒤퉁이 벽인 우석과 일정 간격으로 늘어진 조각상으로 된 파사드로 바꿔졌다. 이 때는 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으로 지어진 것이어서 큰 의미는 없었다.

루이 13세 사후 한동안 방치되다가 1651년 루이 14세가 한 번 방문한 이후 1661년 실질적인 권한을 장악하면서 보 르 비콩트를 척도로 삼고, 푸케가 자신의 궁성을 설계한 예술가들인 루이 르 보와 샤를 르 브룅, 앙드레 르 노트르를 시용해 각각 건축, 실내 설비, 정원 정비 들을 맡기면서 1665년까지 베르사유 궁성의 확장공사를 시작해, 궁성 남쪽에 궁성의 파사드와 비슷한 건물 몇 체를 신축했고, 옛날 궁성의 손님맞이 뜰을 대리석 포장을 했다.

이후 1668년 르 보의 개축 계획을 실행해 1670년까지 양측면에 아파트먼트인 두 로이(Du Roi), 드 라 라헨느(De La Reine)라는 두 채의 날개건물을 증개축해 대리석 외피로 된 파사드로 바뀌었고, 정원쪽도 마찬가지로 양면에 새로 증축된 날개건물과 연결되는 두개의 날개건물을 증축했고, 양측면과 마찬가지로 대리석 외피로 된 파사드로 되었다. 이때 나중에 거울의 방이 들어설 부분이 발코니로 양쪽의 날개건물과 연결되었다.

이후 1677년 루이 14세는 베르사유를 왕궁으로 삼겠다는 결정을 했고, 죽은 루이 르 보를 대신해 쥘 아르두앵 망사르를 베르사유 궁전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해 베르사유 궁전의 다음 증축을 계획하게 했다. 그리고 1682년, 루이 14세파리에서 베르사유 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계속해서 대대적인 건설을 하여 1686년 후면측 발코니를 개축해 거울의 방을 완성했고, 동쪽 측면측에서 새로 aile du midi라는 새로운 날개건물을 신축, 다시 궁전 남쪽으로 대마구간(Grande écurie)와 작은 마구간(Petite écurie)가 완공, 궁전과 두 마구간 사이에 aile des ministres라는 l자형의 건물 두 체를 신축했다.

뒤이어 aile des ministres와 aile du midi 사이에 정사각형에 중정이 있는 Gande commun이 세워졌고, 다시 서쪽 측면에 북쪽 날개(Aile Du Nord)라는 새로운 날개건물이 신축되어 베르사유 궁전의 전체모습은 지금의 ㅠ형의 구조가 완성되면서 화려한 궁전으로 거듭났다. 또한 귀족들의 권력을 누르고 절대왕정을 확립하려는 루이 14세의 의도에 따라 대귀족들은 강제로 베르사유로 거처를 옮겼으며, 베르사유 시에는 귀족들의 저택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후로 프랑스 앙시앵 레짐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1710년 북쪽 날개에 왕실 성당인 생루이 성당이 신축되면서 봉헌되었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하고 증손자 루이 15세가 왕위에 올랐다. 루이 14세의 조카 를레앙 공 필리프 2세가 섭정을 했기 때문에 오를레앙 가의 저택인 파리팔레 루아얄이 중심이 되고 루이 15세는 튈르리 궁에 거처했다. 1722년, 성인이 되자 루이 15세도 베르사유로 옮겨와서 다시 베르사유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고, 몇몇 방을 제외하고, 기존의 바로크 양식의 인테리어 대신 로코코 양식의 인테리어 리모델링 되었고, 1770년 다시 북쪽 날개 끝으로 왕식 극장이 신축되었다.

1789년, 루이 16세 때 일어난 프랑스 혁명으로 왕가가 민중의 압력에 밀려 거처를 파리로 옮겨오면서 베르사유는 방치되었고 이후 루이 18세나 샤를 10세를 비롯한 부르봉 왕조의 국왕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루이 나폴레옹 같은 황제들도 여기에 머물지 않아 궁전으로서의 기능이 정지했고, 오를레앙 왕가의 루이 필리프에 의해 박물관으로 개장되었다.

그러다가 보불전쟁이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나면서 빌헬름 1세가 이곳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황제로 즉위한 흑역사(…)가 있다. 이후 1919년에 똑같은 거울의 방에서 1차 세계대전 종전 강화회의가 열려 베르사이유 체제가 형성됐다.

현재는 박물관 겸 관광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오디오 서비스가 지원되고 있다. 성우 정재헌씨와 서혜정씨가 녹음했는데 그 연기 솜씨가 매우 절륜하다.(...)

2.1. 프랑스 연방 의회


프랑스 연방 의회(Congrès du Parlement français)

프랑스의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들은 서로 다른 궁궐을 의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상원은 셈부르크 궁전에서 의정활동을 진행하며 하원은 르봉 궁전에서 회의를 진행한다. 하지만 각기 나뉘어서 활동하는 상원과 하원이 함께 모여서 논의해야할 일이 있는데 바로 헌법개정에 관한 부분이다. 양원의 모임을 프랑스 연방 의회라고 부르며 베르사유 궁전에서 모이게 된다.

물론 헌법을 개정하는일이 크게 많지는 않으니 관광객들의 관광에 크게 방해가 되지는 않을 듯.

3. 목적

루이 14세가 이렇게 거대한 궁전을 건설한 목적은 다름아닌 절대왕정의 확립이었다. 실제로 베르사유 궁전이 세워지기 전인 1661년 9월 5일 재무장관이었던 니콜라 푸케를 체포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체포되기 전 푸케는 믈룅 근처에 자신의 궁정인 보 르 비콩트를 완공한 기념으로 왕을 비롯한 6천명을 초대해 자신의 부를 과시하다가 걸국 그의 부를 횡령으로 여긴 루이 14세의 눈밖에 나 모든 재산이 몰수당하고, 그자신 또한 종신감금형을 선고받았다. 일단 베르사유는 푸케의 궁전이었던 보 르 비꽁뜨(Vaux le vicomte)를 척도로 삼았고, 설계자들 또한 보 르 비꽁뜨를 설계했던 사람들이었다.

베르사유의 건설은 일종의 라고 할 수 있는데, 오래된 도시인 파리는 여러 세력의 입김이 닿고 있었으며 부르주아, 대귀족들의 영향력이 강했다. 하지만 베르사유는 완전한 신도시라 왕실 이외에는 어떤 지역 권력이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당대의 랜드마크였다고 볼 수 있다. 거대한 건축물로 왕의 부(富)를 과시하고 왕의 권위를 높이는 한편, 귀족들을 베르사유에 집합시켜서 왕 앞에 줄서기를 하도록 강요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업적을 널리 선전하기 위해서 민간인들의 베르사유 출입을 크게 통제하지 않았고[2][3], 심지어 당시에 이미 가이드북(…)을 친히 제작하여 민간인들이 베르사유를 구경하고[4] 왕의 권력과 위엄에 감복하도록 했다.


4. 구조

4.1. 거울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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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진 방으로 전체길이 73m, 나비 10.4m, 높이 13m로 정원을 향하여 17개의 창문이 있으며, 반대편 벽에는 17개의 거울이 배열되어 있으며 궁전 중앙 본관의 2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으며 북쪽으로 전쟁의 방 남쪽으로 평화의 방이 자리잡고 있으며 왕족의 결혼식, 외국사신의 접견 등을 행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장이 되었고 실제로 앞서 언급한 대로 이곳에서 불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국왕인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다.
압도적인 거대함 보다는 거울 중심의 화려한 장식이 볼거리임으로 꼭 밝은 날씨에 찾아가도록 하자.
이 거울의 방을 본따서 만든 건물들이 꽤 많다. 파리 중심에 있는 오페라 가르니에 건물이나 스페인 마드리드 왕궁 역시 이 거울의 방을 모방해 만든 방이 있다. 하지만 역시 모방작들은 원작을 따라가지 못하는지 비교해보면 베르사유궁의 거울의 방이 제일 화려하고 웅장하다.

4.2. 전쟁의 방



거울의 방 북쪽에 위치한 방으로 대리석과 황금으로 치장된 방으로 한쪽 벽면에는 루이 14세를 신격화한 화려한 조각상이 황금으로 된 장식과 함께 놓여 있다.

4.3. 평화의 방

4.4. 왕실 성당


1710년 생루이 성당으로 축조되었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곳에서 루이 15세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결혼식을 올렸고, 매일 아침 미사에 참석했다. 총 2층으로 구성되었다. 1층은 궁전을 방문하는 관리와 귀족의 자리였고, 2층은 왕족들의 자리였다.

4.5. 쁘띠 트리아농 궁

베르사유 궁전 북서쪽에 위치한 별궁으로 루이 15세마담 드 퐁파두르를 위해서 별궁으로 18세기 중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세워졌다. 당대에 프랑스에서 가장 명성이 자자했던 왕실 건축가 앙주 자크 가브리엘이 설계를 맡았고 공사는 1762년 시작되었지만 정작 완공된 것이 마담 퐁파두르가 죽은 이후인 1768년애 끝이 났기 때문에 궁전은 루이 15세의 마지막 애첩 뒤바리 부인의 차지가 되었다. 이후에도 궁전은 왕비나 왕의 애첩들에게 주어졌으며 이 별궁에서 즐겨 머무르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나폴레옹의 두 번째 황후였던 마리 루이즈 등이 대표적이다.

궁전은 로코코 양식에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변해가는 18세기의 건축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총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매우 간결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내부는 궁전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지만 기본적으로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방 일부가 공개되고 있으며 장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희귀한 가구와 아름다운 장식품, 그림 등을 볼 수 있다.

4.6. 그랑 트리아농

베르사유 궁전 북서쪽 소운하 근처에 위치한 별궁으로 루이 14세때 그의 애인인 매트농 부인을 위해 지어진 것으로 베르사유 궁전과 마찬가지로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유명한 왕실 건축가 망사르가 설계를 맡았다. 공사는 1687년 시작되어 1688년에야 끝이 났다. 단층 건물로 완공된 그랑 트리아농은 아름다운 분홍빛 대리석 외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대리석 트리아농’이란 별칭으로도 불렸고 방마다 기다란 창문이 나있으며 기둥의 끝 부분은 섬세한 조각으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내부 또한 매우 화려하며 조각상, 그림, 가구 등을 비롯한 다양한 왕실 장식품 및 예술품 등을 볼 수 있으며 건물 주변에는 잘 정돈된 정원이 있다.

베르사유 궁전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기 일시적으로 방치되었으나 나폴레옹 시기에 다시 사용되었다. 현재는 베르사유를 찾는 관광객들의 주요 방문지 중 하나가 되었으며 종종 국빈들을 맞이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한다. 1979년 베르사유 궁전 지구에 포함되어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4.7.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을


베르사유 궁전 지역 내부에 위치한 작은 시골 촌락 형식의 별궁으로 이러한 촌락이 베르사유 궁전에 세워진 이유는 18세기에 귀족들 사이에 유행한 시골 생활을 체험에서 비롯되었고 당시 왕비였던 마리 앙투안네트 또한 이러한 유행에 심취되어 이러한 촌락을 베르사유 궁전 내에서 1783년 조성했던 것이다. 촌락은 커다란 호수를 기점으로 총 10여채의 농가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전보다 소박하지만 아기자기하고 예쁜 왕비의 집을 비롯하여 시골의 전형적인 물레방아와 그밖에 다양한 농가 시설, 단층집, 마리 앙투아네트 농장이라 불리는 소규모의 밭 등을 볼 수 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곳에서 재미삼아 낚시, 소젖 짜기, 농작물 재배와 같은 시골 농사일을 경험 했다. 현재는 유적의 보호를 위하여 건물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으며 밖에서만 관람이 가능하다.


5. 관광

파리 관광시 하루 정도가 베르사유 관광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 뮌헨 관광시 하루 정도가 관광으로 채워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 별도의 교통수단을 고려할 수 있는 부자가 아닌 이상 RER을 타는 것이 일반적. RER은 도시교통망이 아니라 광역교통망이므로 일반 패스를 가지고 있더라도 별도의 표가 필요하다. 대신 RER 매표소에서 유레일 패스를 제시하고 RER 승차권을 요구하면 날짜를 하루 까고 표를 받을 수 있으니 현명하게 이용하도록 하자.

루브르, 르세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바글바글댄다. 역시 리 뮤지엄 패스를 이용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 아침 일찍 이동하여 개장 시간에 맞춰 가는 것이 좋다. 또한 베르사유 궁 내부는 사람이든 물가든 당황스러울 수준이기 때문에 빵 혹은 샌드위치류를 도시락으로 싸가는 것을 추천.[5] 보통 궁전 내부를 구경하고 나와 정원으로 나오면 딱 점심시간이 된다. 멋 모르고 관람 도중 출구로 나오지 않도록 주의. 재입장시 다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일찍 도착하지 못해 대기 중인 사람이 많은 경우 정원을 먼저 구경하고 궁 내부를 나중에 보는 것도 좋다. 길게 늘어선 줄은 모두 궁 내부 관람 대기 줄이다. 보통 궁 내부를 먼저 보고 다들 정원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반대 순서로 돌면 사람을 피해 한적하게 관람이 가능하다. 정원은 궁전 들어갈 때와 달리 표가 없어도 되고 짐 검사도 하지 않기 때문에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들어갈 수 있다.

베르사유 궁전 관람은 짐 검사 때문에 궁전에 들어가는것도 오래 걸리지만 표 사는데도 꽤 오래 걸린다. 그래서 팁을 주면 표 파는 창구 왼쪽 방에 티켓을 파는 기계가 있는데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그걸 잘 모르거나 티켓 창구를 이용하는걸 선호해서 티켓 파는 기계쪽은 한산하다. 일단 표 사기 위해 기다리는 줄은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티켓 기계쪽을 살펴보자. 어지간하면 10분도 안되서 표를 살 수 있다. 이런것도 귀찮으면 그냥 인터넷 예매를 하고 표를 인쇄해 가자.

일반적인 경우 쁘띠 트리아농과 그랑 트리아농은 안 가는 경우가 많다. 좀 더 적극적으로 베르사유를 감상하려는 경우에나 포함되는 코스. 그도 그럴 것이 이곳까지 오려면 베르사유 내부의 이동 셔틀을 이용하거나 3km 가까이 되는 거리를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며, 때때로 특별 전시가 있기도 하다.

사족으로, 정원 내부에 심각하게 이 많다. 그만큼 꽃과 식물이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관광객에게는 꽤나 공포스러울 수 있다. 특히나 아이스크림이나 단맛이 나는 식품을 가진 경우 벌이 떼지어서 몰려드므로 조심하는 것이 좋다. 은 뚜껑을 닫아도 병 입구로 벌들이 다닥다닥 붙는다... 더불어 고양이도 많다. 고양이에 환장하는 분들에겐 천국이다. 하지만 붙임성은 없으니 무시한다고 슬퍼말자.

분수가 꽤 많은 것으로도 유명한데, 세느강과 거리가 떨어져 있고 높이도 더 높기 때문에 분수쇼를 하기 위해 물을 멀리서 길러와야 한다. 지금이야 기계를 쓰지만 예전엔 인력만으로 이걸 유지하는 것도 벅차서 왕의 행차때에나 겨우 쓸 수 있었다 한다.

여담으로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는데[6], 프랑스 귀족들은 정원에서 아무데서나 똥을 쌌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얘기를 가이드들도 사실인양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7] 베르사유 궁전이 궁전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을때는 화장실이 충분히 구비되어 있었지만 앙시앵 레짐이 무너지고 베르사유궁이 박물관이 되면서 리모델링 끝에 전시관을 늘리기 위해서 없어진 것이다. (베르사유궁의 설계도면을 봐도 화장실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흔히 알려진 이야기는 후에 귀족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기 위해서 창조된 이야기이다. 물론 당시 위생상태가 시궁창이였던 것은 사실이긴 하다. [8]

참고로 26세 이하의 학생은 국적 불문하고 유학생비자만 보여주면 일부 코스는 무료 관람가능하다. 유학생이나 교환학생은 관람시 비자 반드시 가져가서 보여줄 것. 국제 학생증도 가능하다. 이것은 파리 내 박물관이라면 대부분 통용되니 관람료 지불전에 비자나 국제학생증을 보여주고 무료관람 가능하냐고 반드시 물어봐라. 아님 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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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실제로 가보면 위 사진에서 보이는 궁전 건물 자체는 루브르보다 작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 [2] 정장만 입으면 입장을 허락하여, 베르사유 궁 정문 밖에는 당시 정장의 필수품인 스몰 소드를 대여해주는 가게들이 생길 정도였다고.
  • [3] 왕은 우리의 아버지신데 아버지네 집에 가는게 뭐 어떰? 이라는 논리였다고 한다.
  • [4] 민간인 자랑용(...)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구획과 실생활을 위한 소소한 공간이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이외에도 선전 목적으로 공개한것은 많아 왕실의 일요일 만찬은 누구나 구경할수 있었는데, 루이 14세가 달걀을 먹는 모습이 최고의 인기였다고 한다. 또 왕비의 출산 장면까지도 공개되었다.
  • [5] 궁 안에 있는 레스토랑은 꽤 비싼 편이지만 궁 밖 정원에 있는 레스토랑은 그리 비싼편은 아니다. 파리 물가와 비교해보면 비슷한 수준.
  • [6] 화장실이 있다. 궁전 정문 기준으로 궁전방향으로 왼쪽 건물 중앙부에 화장실이 있다.
  • [7] 사람들이 하도 길거리에 똥을 많이 싸서 하이힐이 개발되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 [8] 베르사유궁은 프랑스 왕정 역사상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궁전인데 그 이전에 지어진 더 오래된 궁에도 화장실은 다 있었다. 궁전 중 가장 마지막에 지어진 건물에 화장실이 없다는건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말도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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