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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last modified: 2015-04-11 16:19:50 by Contributors

"2000년 전,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나는 로마 시민입니다(라틴어: Civis romanus sum)’였습니다. 오늘날, 자유 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단연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일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잘 모르거나 또는 모르면서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Let them come to Berlin) 공산주의가 미래의 흐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 공산주의자와 함께 나아갈 수 있다고 유럽과 일부 지역에서 말합니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

심지어 공산주의는 나쁜 제도이지만 경제 발전의 기회를 준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 그들 보고 베를린으로 오라 합시다.

민주주의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 완벽하지도 않지만, 우리는 결코 국민을 가두려고 또는 국민이 우리로부터 떠나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벽을 싼 적은 없었습니다. 미국 국민은 비록 옆에는 없었지만 지난 18년의 역사를 여러분과 함께 한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대서양 건너 수만리 떨어져 있는, 여러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민을 대신하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8년 간 포위 당하고도 서베를린처럼 희망과 결의가 활기 있게 살아있는 도시는 아직 없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이야말로 공산주의의 좌절을 전세계에 보여주는 가장 명백하고 확실한 증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시장님 말씀처럼 가족을 뿔뿔이 흩어 놓고, 남편과 아내, 형제와 자매를 갈라 놓고, 함께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떼어 놓는 것은 역사와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모든 자유민은, 그 사람이 어디에 살건 간에 그 사람은 베를린의 시민입니다. 고로, 자유민으로서, 전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이 말을 자랑스럽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Ich bin ein Berliner)!"

- 1963년 6월 26일 당시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연설 중에서.



"General Secretary Gorbachev, if you seek peace, if you seek prosperity for the Soviet Union and Eastern Europe, if you seek liberalization: Come here to this gate! Mr. Gorbachev, Open this gate! Mr. Gorbachev, Tear down this wall!"
"고르바초프 서기장! 평화를 원한다면, 소련동유럽의 번영을 원한다면, 자유화를 원한다면, 이 문으로 오시오!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문을 여시오! 미스터 고르바초프, 이 장벽을 허무시오!"

- 1987년 6월 12일,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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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을 쌓고 있는 모습이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독의 경찰과, 미소를 짓고 있는 동독 국경수비대원이 미묘하게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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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반대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동독 국경수비대 부사관들의 모습. 그 와중에 금발 부사관 잘생겼다. 인민의 원빈


냉전 시대의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


Contents

1. 개요
2. 왜 생겼는가?
2.1. 독일과 베를린의 특이한 상황
2.2. "자유진영의 섬"
3. 베를린 장벽 이전
4. 분할되는 베를린 - 베를린 장벽의 구조
5. 각종 탈출 시도
6. 붕괴와 그 이후

1. 개요

1961년 독일민주공화국이 만들었고 1989년 붕괴하여 통일독일을 이루게 되는 원인을 만든, 베를린 한가운데에 떡하니 존재했었 장벽, 시설물의 통칭. 다만 이 문서의 명칭은 주로 서방 세계에서 통용되던 것이었고, 동유럽 등 공산권 국가들에서는 '반파시스트 방벽(Antifaschistischer Schutzwall)'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장벽을 처음 세울 때는 소련도 동독도 좀 곤란하기는 했다. 원래 소련과 동독 당국자들의 기대는 위대한 공산주의의 기치 아래 발전하는 동베를린의 폭풍간지를 보고 서베를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동베를린으로 우루루 몰려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시궁창이라 오히려 동독 주민들이 서독으로 끝없이 이주하는 모양새가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장벽 건립을 지시한 동독 초대 서기장 발터 울브리히트도 공식 석상에서는 보란 듯이 자랑스러운 투로 연설했지만, 사석에서는 "이건 우리가 이념 경쟁에서 털렸음을 우리 스스로 인정하는 실책인데..."라고 푸념했다고 한다. 동독 외의 다른 동유럽 국가에서도 반응은 마찬가지였는데, 헝가리 인민 공화국 서기장이였던, 카다르 야노시는 '장벽 건립으로 공산주의 운동 전체의 명예가 훼손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도 장벽을 "흉물스러운 물건"이라고 평하면서도 동독의 인력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인정했다. 합중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도 베를린에 날아와서 한 유명한 'Ich bin ein Berliner' 연설에서 베를린 장벽을 디스했다.[1]

통일된 이후로 조각조각나서 여기저기로 팔리기도 했다. 이걸 벽째로 사서 소장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역시 덕국.... 덧붙여 지금도 장벽의 파편을 카드에 담아 팔고있기도 하다. 베를린에서 장벽의 잔해랍시고 돌덩이를 팔고 앉아있는 경우도 있는데이것이 자본주의다!! 가짜일 가능성이 높으니 낚이지 말자.

2. 왜 생겼는가?


베를린 장벽의 탄생의 원인은 제 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얄타 회담에 의해서 연합국 4국 -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서 전범국이였던 독일[2]이 분할되기로 결정이 되었다. 4개국이므로 각 나라가 1/4에 해당하는 영토를 가지게 되었으나 사실 소련의 몫이 약간 더 컸다. 문제는 동쪽의 소련 구역 내에 독일의 상징인 수도 베를린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베를린은 예외로하여 같이 분할하기로 했다는 점이다.

결국 연합국 4국은 독일 전역을 4분할 함과 동시에 베를린도 똑같이 4분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대로 영국+미국+프랑스 점령지역으로 구성된 서독과 소련 점령지역으로 구성된 동독으로 나뉘게 되고, 베를린도 동베를린은 동독령, 서베를린은 서독령이 되게 되었다. 서베를린은 소련군 점령 지역에 섬처럼 떨어져 버렸으며, 훗날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는 원인이이 되었다.

© historicair 23:55, 11 September 2007 (UTC) (cc-by-sa-3.0) from


결국 바다나 산, 도로등을 통해 단절된 것이 아닌 이념으로 단절된 이 땅을 사람들은 '육지의 섬'이라 불렀다. 서베를린이 서독의 월경지가 된 것이다.[3]

왜 하필 베를린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면, 베를린은 거의 5 ~ 6세기 넘게 독일의 수도 역할을 하던 도시라서 그 상징성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동독의 지배자인 소련은 물론이고 서독을 통치하게 된 연합군들도 베를린을 포기하지 못하였고 이에 그냥 나눠버리는 선에서 합의를 보게 된 것이다. 한국 사정에 알맞은 비유를 들자면 광복 직후 한반도가 38선을 기준으로 분할될 때 수도 서울까지 이등분되어, 북서울은 소련이, 남서울은 미국과 UN군이 통치하게 되었다고 보면 된다(…). 아니면 신탁통치 안건이 논의되던 때처럼 북서울은 소련이, 남서울은 미국, 영국, 중화민국이 나눠먹든가.[4]

2.1. 독일과 베를린의 특이한 상황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하여 상호간 교류가 전혀 없는 한국과는 달리, 동서독은 첨예하게 대치는 하고있긴 한데 상호간의 교류가 활발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좋게 말한거고, 실상은 우리한테 이익되는 쪽으로만 교류하기다.[5]

이러한 배경에는 사실, 같은 분단이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그 근본적인 상황 자체가 서로 달랐기에 가능했다고 봐야한다. 이는 기존의 '지배국'의 입장으로서 나름대로의 탄탄한 이념/정치적 체계를 갖추고 있어서[6] 전후 스타트가 좋았던 유럽과 달리, 아시아 국가들 대부분은 '식민지'로서 지내왔고 이에 따라 종전 이후 자신들을 통제해줄 지배 세력이 없어진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유입된 냉전의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서로 복잡하게 얽힐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사실 유럽도 한 때 1947년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 그리고 1948년의 '베를린 위기'를 통해 긴장 속까지 갔었지만, 당시 유럽은 이제 막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지라 다시 한번 서로 싸울 여력도 생각도 없어서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자극하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결국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의 분단 국가들의 경우 이러한 상호간의 큰 전쟁이 없었고 이에 분단 과정에서 서로를 향한 혁명과 전쟁을 동반한 피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또한 더불어 베트남, 한국 등 다른 공산-자본 분단 국가들은 보통 해당 국가의 주체 국민들이 이념, 민족 등에 따라 '자의적으로' 나뉘어진 분단인 반면, 독일의 경우는 자의적으로 나뉘어진 것이 아니라 승전 세력인 연합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타의적으로' 나뉘어진 분단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양 국가의 거주민들이 서로를 싫어해서 나뉘어진게 아니라 그냥 외부의 간섭으로 찢어졌을 뿐이니 구태여 서로를 죽일듯이 미워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던 것.

그리고 보통 분단 직후 양측의 수준이 비슷했던 다른 분단국가들과는 달리 독일은 양국의 수준이 크게 차이가 났다. 서독은 마셜 플랜 등에 의해서 경제적 우위에 있었고, 상대적으로 동독은 경제적으로 쪼달리는게 사실이었다. 뭐 사실은 미국의 쇼미더머니의 영향이지만, 서독은 저 돈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데, 일례로 서독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려면 비행기 타고 가던가 기차타고 가던가[7] 동독에 깔린 도로를 이용해 가야 하는데 당연히 동독은 서독인들이 자신들의 도로를 이용하는것에 대한 막대한 통행료를 부과했으나, 서독은 이 통행료를 내는데 전혀 인색함이 없었다.[8]

저러한 돈지랄의 영역을 보여주는게 바로 서독의 정책이었는데, 동독사람이 서독으로 건너올 때마다 정착지원금도 꼬박꼬박 주고 연금도 꼬박꼬박 지급해줬다. 당연히 동독 입장에서는 배알이 꼴려야 정상이겠지만, 실제로 동독은 매우 냉정하게 판단을 했다.

"서독은 돈지랄해서 연금제도 같은게 잘 되어있네? 그러면 비노동인력을 서독으로 보내면 우리는 사회부담이 경감되잖아? 그럼 나이 든 사람들을 서독에 보내서 그 사람들은 보장 더 잘 받아서 좋고, 우리도 부양할 늙은이 입을 줄여서 다른 인민들에게 더 투자할 수 있는 좋은 상황을 만들어야지."

실제로 저러한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65세 이상 노인에 대해서는 동독이 서독 방문 허가도 잘 내주고 그랬다. 이 외에도 중증 장애인 등 동독 사회에서 전적으로 '나오는 것은 없고 그저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서독 방문 허가에 혜택을 주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한참 일할 나이의 사람들에게는 서독 방문이 허용되지 않았다. 목적은 언제까지나 '비생산연령층을 줄여서 생산연령층의 부양 부담을 덜어주는 것'에 있었기 때문. 하지만 자유란 달콤해서, 많은 사람들이 서독으로 향해 발길을 향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래저래 제약이 많은 동독사회에서 서독으로 가는 방법은 몇가지 뿐이었다.

2.2. "자유진영의 섬"

첫번째로 동-서독간 국경, 이른바 철의 장막을 넘는 방법이 있었다.

...말이 좋아 철의 장막이지, 이 동네를 쉽게 설명하자면 '휴전선이 절반만 있구나' 하면 된다. 거의 정신병적으로 남한을 적화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한반도 북방의 혹달린 어떤 미치광이 독재자가 지배하는 땅과 대치하는지라 말 그대로 요새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휴전선과는 달리 서독측 국경지역은 공산측이 자기네 사람들 통과는 막아도 서방 쪽에 대놓고 사보타주를 하거나 하지는 않아서[9] 좀 자유분방해서 감시초소 몇개 있고 사람이 먹고사는데 필요한건 다 있는데,[10] 동독측 국경지역은 민간인 통제구역도 있고 지뢰밭도 있고, 철조망도 있고 무장경비대도 돌아다니는, 말 그대로 비무장지대와 동급은 못되고[11] 마이너 버전인 그런 지역. 종종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오는 용자들도 있긴 한데, 그건 한국에서 군사분계선 넘는거보다 조금 쉬운 수준.[12] 동서독 국경 항목을 보면 당시 동독측 군사분계선의 경비 상태 그림이 있으니 참고하시라.

두번째로 해외여행을 통해 망명 비스무리한 형식으로 가는 방법이 있었다. 가장 많이 애용된 루트는 인근 중립국인 오스트리아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오스트리아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연다는 소문이 들리자 같은 공산권 국가 간에는 여행과 체류가 비교적 쉬웠던 점을 이용하여 첫 날부터 7,000명이 체코슬로바키아를 경유하여 오스트리아 국경지대를 넘어 서독으로 넘어갔다. 충공깽. 2번째 탈출에는 무려 2만명의 동독주민들이 넘어갔다. 동독 군사관계자들은 이 소식을 3일후에 듣고 나서야 체코슬로바키아의 국경 경비를 강화하자고 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 관계자는 동독 군사 관계자들을 씹어버리고 국경을 그냥 방치해 버렸다. 다만 이는 상기했듯 동독측이 여행 허가를 잘 안내주기 때문에 정말 돈 많고 빽 있는게 아니면 불가능.

마지막 세번째는 바로 베를린. 자유 진영의 섬이라고도 불린 곳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물론 위험부담이야 있지만, 첫번째 방법처럼 민간인 통제구역을 몇킬로미터[13]씩 넘나드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모험이다. 그래서 실제로 많이 행해졌고, 또 성공률이 높은 방법이었다.

기구로도 동독에서 서독으로 빠져나온 가족이 있었으며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장벽 자체를 이런저런 방법을 통해 돌파한 탈출자들도 물론 존재한다. '탈출 시도' 항목을 참조하시길.

문제는, 저렇게 튀는 인력들이 말 그대로 동독에 크나큰 타격을 입히기 딱 좋다는 점이었다. 공부 좀 한 엘리트 계층 유망주가 튀는건 그나마 내상이 덜한 정도, 지속적으로 노동인력이 사라지게 되면 말 그대로 계획경제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더군다나 주로 튀는 인력이 청년계층이다 보니 군사력에도 영향을 주게 되는건 당연지사. 이러니 정권유지가 될 수 없다. 애시당초 일 할 사람이 남아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나온 답안은 간단했다. 서베를린을 틀어막는다!!!(…)

3. 베를린 장벽 이전

베를린 장벽 이전에도 서베를린과 동베를린간의 엄격한 지역구별이 존재했다.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다름아닌 군사작전문제다. 말 그대로 서로간의 영역이 겹치면 그대로 밤쾅이니, 골목길 하나까지 철저하게 다 나눠먹어놨다. 심지어는 란덴부르크 문 앞 광장까지도 어떻게 나눌 것인지 면밀하게 명시했을 정도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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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이지만, 이런 지역구분 때문에 재미있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서베를린은 영국군/프랑스군/미군 관할지역으로 나뉘고, 이에 따라 경고 표지판이 살짝 바뀐다는 점이다. 란덴부르크 문 앞 지역은 영국군 지역이었고, 첩보물의 배경으로 많이 쓰인 체크 포인트 찰리 앞 지역은 미군 지역이었는데, 양측의 경고문이 이렇게 달랐다.

"YOU ARE NOW LEAVING BRITISH SECTOR"
"YOU ARE LEAVING THE AMERICAN SECTOR"

... 국가명 말고도 뭔가 미묘하게 다른 점이 있다.[15] 당연히 출입시 검문을 하는것도 서독군이 아닌 영국/미국/프랑스군. 서독 국경경비대는 그저 보조(…)에 불과했다. 국제적으로는 서베를린은 서독 영토가 아닌 미, 영, 불 군대의 점령지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론 행정업무는 서독측에서 맡긴 했고, 시장은 선출했지만.[16]

실제로 서독 본토와 서베를린을 잇는 항공 노선은 서독 항공사가 취항할 수 없었다. 동독이 서독 항공기의 영공통과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1954. 10. 23.의 파리의정서(Pariser Protokoll)에서 수정된 1952년의 독일조약(Deutschlandvertrag)이 연방공화국 정부, 즉 서독의 연방정부가 베를린 지역에 대해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독 본토에서 서베를린으로 비행기타고 가야할때 영/미/프 항공사 항공편을 이용해야 했다.

그리하여 서독연방의회(Bundestag)의 베를린 지역구 의원은 베를린 시민의 직접선거로 뽑히지 않고 베를린 지방의회에서 간선으로 선출되었고, 연방의회에서 베를린 지역구 의원은 표결권 조차 가지지 못했다. 또한 서독의 헌법이었던 기본법(Grundgesetz)도 베를린에서는 상당 부분 그 효력이 제한되었으며, 심지어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조차도 베를린에서는 그 효력이 제한될 정도였다.[17]

4. 분할되는 베를린 - 베를린 장벽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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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베를린 장벽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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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의 전반적인 구조

장벽은 1961년에 처음 축조한 뒤에도 서너 차례 계속 개량되었다. 높이 3.6m의 콘크리트 장벽이 106km 가량 뻗어 있었고, 나머지 49km는 철조망이 세 겹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1980년대의 최종 개량형 장벽은 맨 윗동에 둥그런 구조물이 추가되어, 탈출자들이 잡고 넘어가기 힘들게 만들었다. 철조망도 윗쪽을 죄다 뾰족한 철침처럼 만들어서, 움켜잡았다가는 손에 구멍이 숭숭 나도록 설계했다.

장벽 자체가 동서베를린 시계나 서베를린과 동독의 경계선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장벽은 그 선에서 몇 발짝 동독 쪽으로 움푹 들어간 형태였다. 그래서 간혹 장벽을 개보수 하거나 새로 축조하러 경비대원과 근로자들이 장벽을 넘어오기도 했다. 물론 이런 작업 때는 항상 다른 경비대가 따라붙어 감시했고, 작업 전에 우선 진짜 경계선을 따라 자신들을 둘러쌀 임시 바리케이드를 가설해야 했다.

장벽 바로 뒷편의 동베를린/동독 영토에는 폭이 약 60 ~ 70m 되는 무인지대가 설정되어 있었고, 국경경비대 등 군 관계자나 사전에 출입이 허락된 장벽 시설 관리자, 건설자 혹은 수선공만 검문을 받고 들어갈 수 있었다. 무인지대 내에는 감시탑 302개, 20개의 감시벙커, 127km에 이르는 전기감지장치, (감지장치에 달라붙으면 경보가 울린다) 124km의 순찰통로, 105km의 차량 방어용 도랑이 설치되어 있었다. 장벽 감시병은 1200명에 달했고 야간에는 30m 간격으로 설치해둔 서치라이트를 켜두었고 무인지대에는 반드시 지뢰가 1평당 30 ~ 50개정도 깔려있어 탈출을 막았고 지뢰 설치 지역마다 조명탄 인계철선이 늘어져 있어 인계철선이 당겨지면 조명탄이 튀어 올라가 그 주위를 밝히게 했다.

그 외에도 무인지대에는 반경 20 ~ 30m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수평으로 건너맨 외줄에 을 연결시킨 군견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풀숲에 탈주자의 모습이 가려질 까봐 죄다 제초제를 뿌려서 식물 생장을 막아버렸다. 강이나 호수가 있어서 장벽 축조가 불가능한 경우에도 물속에 가시철망이 촘촘하게 달린 철제 바리케이드를 쫙 깔아놓았고, 모터보트를 타고 수시로 드나들며 감시했다.

이래도 탈출이 가능하냐??고 하면... 시도가 많았다.

5. 각종 탈출 시도

그럼에도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1989년 가을까지 약 5000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장벽 돌파 방법도 웬만한 스파이 영화 뺨칠 정도로 가지각색이었는데, 몇 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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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의 탈출자인 사진속 주인공은 '한스 콘라드 슈만(Hans Conrad Schumann)' 이란 사람인데, 그는 동독경찰 부사관으로 근무 도중 서독측 군인이 "Komm rüber!" (이쪽으로 넘어와!) 라고 외친 소리에 홧김에!! 넘어갔다. 결국 서독 경찰에 체포 된 이후 서독에 정착하게 되었다. 사진이 상당히 극적으로 촬영 되었는데다, 최초의 탈출자가 군인(정확하게는 당시 신분은 경찰 이였으나, 우리나라의 전경 쯤 되는 KVP(Kasernierte Volkspolizei)라는 무장경찰 소속이였다.)이라는 점에서 자유의 상징으로 사용 되었다.

  • 초기 장벽은 벽돌을 여러 장 쌓아올려 르타르로 고정한 형태였고, 이 점을 노려 대형 버스나 트럭, 심지어 전차 같이 육중한 차량을 몰고 벽을 들이받아 돌파하는 식으로 탈출한 사례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동서베를린 사이의 도로 흔적이 남은 구간에서는 경비가 삼엄해졌고, 장벽도 벽돌보다 훨씬 견고한 콘크리트 벽체로 개량되었다.

  • 점령군 병력 이동을 위해 장벽 사이사이에 설치한 몇 안 되는 문소를 돌파해 탈출한 이들도 있다. 차단봉 밑을 지나가기 위해 보닛이며 유리창을 싹 뜯어버린 차를 몰고 목숨을 건 예운전을 해서 서베를린에 도착한다는 계획이었는데, 두 차례 성공했다.

  • 소련군 장교복을 직접 만들어서 네 명이 탈출한 사례도 있다. 세 남성들은 장교 행세를 하면서 유창한 러시아어로 검문소 헌병들을 물먹였으며, 옷을 만들어 준 나머지 한 여성은 자동차 렁크에 숨어서 무사히 서베를린으로 탈출.

  • 차량을 이용한 탈출 사례가 늘자 군용이고 민수용이고 가리지 않고 철저한 검문검색이 행해졌는데, 2인승 초소형 경차의 경우 이렇다할 적재공간이 없기 때문에 비교적 느슨한 수색만을 받고 통과하고는 했다. 이에 착안해 차대를 최대한 쥐어짜 한 사람이 가까스로 숨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개조된 차량 한 대가 탈출용으로 이용된 사례가 있는데, 수 차례에 걸쳐 성공적으로 월경에 이용되었으나 한 노인을 탈출시키던 시도 중 검문과정에서 기침을 참지 못해 차가 요동치게 되었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국경경비대에 의해 발각되며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인적이 드문 한밤 중에 장벽과 가까운 편인 고층 건물에서 밧줄에 옭아맨 무거운 추를 장벽 너머에 던져놓고, 줄에 매어놓은 리프트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 탈출한 사례도 있었다. 유격? 이 때문에 장벽과 가까이 있거나 무인지대에 있던 건물들은 가능한한 철거 혹은 폭파되었고, 장벽의 높이도 계속 높아지게 됐다.

  • 대형 트럭에 싣고 다니는 커다란 드럼케이블의 나무통 속을 이용해 통 하나 당 네 명씩 들어가 탈출한 사례도 있다. 하지만 세 번째 탈출 시도 때 수상하게 여긴 경비병이 나무판자를 뜯어내 탈출 기도자를 찾아내면서 덜미가 잡혔다.

  • 장벽 밑에 땅굴을 파고 탈출한 사례도 상당 수 있다. 서베를린과 가까운 동독의 어느 가정집에서는 화장실 변기를 뜯어내고 저수조를 우회해 장벽 너머 145m 떨어진 서베를린의 빵집까지 땅굴을 팠고, 이 땅굴로 59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서베를린의 대학생들이 주축이 된 탈출 협조단도 지질학과 학생까지 동원해 정교한 땅굴을 파내려갔고, 동베를린에 심어둔 비선 조직과 연계해 탈출자들을 서베를린으로 인솔했다. 다만 이 방법도 훗날 꼬리가 밟혀서, 탈출을 위해 땅굴을 파내려가다가 동독 경비대에 덜미를 잡힌 이들도 많았다. 발견된 땅굴에도 탈출 시도가 불가능하도록 스탄수류탄 세례(...)가 퍼부어졌고, 이후 모두 메워졌다. 급기야 이것 때문에 동독 정부는 지하에 터널을 파서 순찰을 했다.

  • 소련기 도장을 한 초소형 항공기를 이용한 월경시도도 있었다. 발각은 되었으나 경비대가 격추를 망설이던 사이 무사히 월경.

  • 이외로 대형 공업기계류에 숨어서 탈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물론 검문소 병력들도 이런 대형 기계류는 가능한 선에서 뜯어보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나 이중공간을 만들어 경비병들의 눈을 속이고 무사 탈출했다고.

  • 승용차에 철판을 덧댄 자작 장갑차를 몰고 검문소를 강행돌파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쪽은 결국 윈드실드쪽 방탄판을 관통한 총알에 의해 운전자가 사망하면서 실패.

  • 서독 출신의 남자가 동독에 사는 자신의 여자 친구를 탈출시키기 위해 좋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매번 동독과 서독을 오갈 때 학자 마냥 항상 큰 가방에 책을 가득 넣고 다녔다. 동독 경비원들은 이것을 보고 매번 수상히 여겨 그가 국경을 오갈 때마다 철저하게 검문했지만, 항상 가방 안에는 책만 잔뜩 있었기 때문에 매번 보내줄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경비원들이 그를 기억하고 '또 저 양반이네...'하는 식으로 그를 그냥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동독을 방문하고 서독으로 갈 때도 동독 경비원들은 조사를 대충 하고 그냥 보내주었는데, 그 때 그 서독출신 남자의 가방속에는 책이 아닌 자신의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온갖 신묘한 재주로 탈출에 성공한 이들 이상으로 실패한 이들도 많았다. 총 136명의 희생자가 생겼는데, 이 수치는 탈출 시도자, 경비원, 오인 사격의 희생자 등을 포함한다. 심지어 분단 말기에는 장벽 위에 매달려서 탈출하려는 사람에게 동독 국경수비대가 총을 난사(...)해서 장벽 위에 죽은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는데(...) 이게 동독 구역인지 서독 구역인지 애매해서 사체 수습도 못 한채 한동안 방치되었던 끔찍한 사건도 있었다.


  • 최후의 희생자는 '크리스 귀프로이(Chris Gueffroy)'로 스무살의 나이(1968년생)에 1989년 2월 6일 베를린 장벽을 넘다가 총에 맞았다. 장벽이 무너지기 불과 9달 전이었다. 묘비명은 "Opfer der Honecker Diktatur"(호네커 독재의 희생자) 같이 넘던 친구는 살아남아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9월 풀려났다. 그를 쏜 책임자 한명은 나중에 2년형을 선고받았고, 다른 이들은 "명령을 피할 수 없었다"라는 이유로 15년형 판결을 받았다.


6. 붕괴와 그 이후

1989년 에리히 호네커의 실각을 전후로 동독 사람들은 언론자유화, 여행개방을 주제로 매주마다 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동독 지도부는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불간섭 정책은 확고했고, 그 쪽도 그 쪽대로 급한상황이었던지라 결국, 시위대를 달래기 위해 여행자유화 정책을 1989년 11월 9일 오후 6시 58분경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다.

물론 일종의 회유책으로 나온 정책이었으니만큼 일단 동서독 국경을 통한 입출국 허용및 행정 절차 간소화, 여권발급기간 단축등이 발표되었으나 실제론 여권발급기간 단축 이외엔 별로 달라졌다고 할만한게 없었다.

그런데 당시 기자회견장에서 어떤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국경 개방이 시행되느냐"라는 질문을 했고, 휴가 후 복귀하자마자 회견을 해야 했기 때문에 당 지도부에서 결정한 정책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했던 동베를린 SED 총서기 귄터 샤보프스키가 아무 생각없이 지연 없이 즉시(Sofort, unverzüglich.)[18]라고 대답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독일측 기자들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걸 알아챘기 때문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독일어가 서툴렀던 저 이탈리아 기자가 회견 직후 이 여행자유화 조치를 베를린 장벽 붕괴로 착각하고 본국에 급전을 보내는 (동독 입장에서) 세계구급 오보를 냈다. 이자식, 고맙다 이 소식은 미국을 건너 그날 밤 서독 텔레비전에까지 퍼져나가 순식간에 수많은 동서독인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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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양쪽 시민들은 공구를 가지고 와서 장벽을 부수기 시작했고(빨리 벽을 부수기 위해 오함마, 드릴 심지어 불도저크레인까지 양쪽에서 끌고 나왔다!), 이에 대해 제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당연히 동독 국경경비대원들과 세관원들도 처음에는 막아 보려고 했지만, 통제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인파가 계속 밀려와서 상황 통제는 불가능에 가까웠고 뭣보다 서기도 당지도부의 결정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마당이니 국경경비대원들도 상부에서 어떠한 지시도 받지 못했던 상황인지라 결국 그냥 멍 때리고 지켜볼 뿐이었다. 장벽 해체 소식을 듣게 된 서방의 여러 예술인들도 베를린으로 와서 특별 콘서트를 여는 등, 연말까지 축제 분위기가 계속 되었다.

다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는 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는데, 당시 영국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프랑스 대통령이었던 프랑수아 미테랑 같은 인사들은 장벽 붕괴가 곧 독일 통일의 시발점이고 이는 유럽 세계의 균형을 위협하게 될 것이라고 대놓고 디스하기도 했다. 독일이 통일되면 다시 강대국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에게 큰 위협이 될 것이란 두려움은 만성적인 것이었고, 실제로 당시엔 그럴만도 했다(...) 한두번 당해봐야지 독일 내에서도 아직 통일에 대한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장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상황이 너무 갑작스럽다고 느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우려와 상관 없이 장벽의 해체는 계속되었고, 1990년 10월 통일이 공식 선언된 이후에도 계속 장벽과 제반 시설물에 대한 철거, 끊어진 도로와 철도의 복구가 계속되었다. 이 작업을 위해 3년 동안 1억 마르크의 예산과 400여 명의 해체전문가가 투입되었고, 철거 과정에서 제거된 흙과 시멘트만 해도 무려 75만톤에 달했다. 흠좀무.

장벽 제거, 통일 논의와 더불어 그 동안 베를린을 분할 관리해온 미군영국군, 프랑스군, 소련군(이후 러시아군)도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 중반에는 시의 경계 업무를 독일 측에 완전히 인계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오보 때문에 나라가 쪼개졌는데 여기서는 오보 덕분에 통일이 됐다

2000년대에 가서는 기존 장벽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깔끔하게 없어졌는데, 다만 일부 구간에는 분단 당시의 상황을 후대들에게 재교육하기 위해 그대로 남겨놓은 곳도 있다. 대표적인 구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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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 (East Side Gallery)
    프리드리히스하인-크로이츠베르크 지구의 뮬렌슈트라세에 있는 장벽 존치 공간으로, 약 1.3km 구간의 장벽이 보존되어 있다. 갤러리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분단 시절 자주 낙서와 그래피티 대상이 되었던 장벽을 여러 현대미술가들의 캔버스로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2013년 3월 일부분이 헐리고 말았다. 아래를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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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러의 지형 (Topographie des Terrors)
    크로이츠베르크 지구의 니더키르히너슈트라세에 있는 존치 공간인데, 예전에 나치 친위대 산하의 악명높은 비밀경찰 조직이었던 게슈타포 본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통일 후 이들이 벌여놓았던 참상과 잔악함을 후손들에게 교육시키기 위해 박물관이 조성되었고, 본부 바로 옆에 있었던 약 80m 가량의 장벽도 허물지 않고 남겨두어 전시 공간으로 쓰고 있다. 가장 포토존과 거리가 먼 곳이다.

  • 체크포인트 찰리와 포츠담 광장 사잇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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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당시 체크포인트 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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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체크포인트 찰리의 모습
검문소를 철거하고 광장을 현대적인 재건축하기 위해 이 구간도 원래 헐릴 예정이었지만, 분단 시대 가장 유명했던 장소이기도 했으니[19] 역사 유산으로 남겨놓자는 여론을 받아들여 존치시키고 있다. 현재 검문소 앞에는 냉전당시 군인 복장을 하고 있는 연기자들이 있는데 2유로 정도를 주면 같이 사진을 찍어준다.

  • 포츠담 광장
    위 세 군데처럼 큰 규모로 보존되어 있지는 않으며, 서너 개의 장벽 구조물을 장벽이 있던 자리를 따라 세워놓은 정도이다. 거의 관광객용 포토존 급. 진지하게 장벽을 구경하고 싶다면 이쪽은 피하자. 어차피 포토존 아닌 곳을 찾기 힘들지만(...)

이외에 철거된 구간들에서 장벽이 서 있던 곳을 표시하기 위해 도로에 박아놓은 표석이나 기념비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철거 후 남은 잔해 장벽들은 전세계에 보내져 전시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우리은행의 자금 지원으로 서울 청계2가 사거리의 장교빌딩과 한화빌딩 맞은편에 조성된 '베를린 광장'에서 볼 수 있다. 장벽 전체는 아니지만, 거기서 떼어낸 파편 두 개도 국립중앙도서관에 상주하는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경기도 의정부시 평화 통일 공원에도 장벽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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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베를린 장벽. 장벽 왼쪽의 가로등은 베를린에서 쓰이고 있는 것이고, 베를린의 상징인 곰 조각이 같이 전시되고 있다)

2009년 11월 9일에는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베를린에서 대대적인 기념 행사가 열렸는데,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부터 약 1000여 개의 스티로폼 장벽들로 도미노를 쌓고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 월경을 허가한 바로 그 시각에 밀어서 넘어뜨리는 퍼포먼스가 열렸다. 이 행사는 ZDF 같은 방송국들에서 실황으로 중계되었다. 영상

동시에 아직도 분단 상황에 놓여 있는 한국 예술인들을 초청해 장벽과 분단을 주제로 한 예술품을 전시하는 행사[20]도 열렸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때문에 요르단강 서안 지구에 축조된 장벽의 철폐를 요구하는 평화운동가들의 집회도 개최되었다. 인터넷 상에서도 장벽 철폐 = 규제 철폐라는 은유로 중국 같이 인터넷 접속을 제한하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넷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장벽 해체 이후 남은 몇몇 조각들은 관광객들이나 수집가들을 상대로 판매한다는 모양. 월드 인 컨플릭트 한정판에도 장벽 조각이 들어 있다.# 가끔 몇몇 사기꾼들은 여행객들을 상대로 의미없는 돌덩이를 '베를린 장벽 조각'이라고 파는 경우가 종종 있는 모양이다. 일부 기념품점에서 5~10유로로 작은 돌조각을 살 수 있다. 베를린 장벽 그림의 엽서의 일부로 플라스틱 구에 들어있는데 매우 그럴듯하다...

2013년 3월 27일 이스트사이드에 남은 장벽이 새벽에 기습적인 철거로 무너졌다. 고급 아파트먼트 단지를 위한 도로를 내고자 이뤄진 것인데 장본인인 건설업체 대표는 도로공사가 끝나면 복원하겠다고 하여 욕먹고 있다.

영화배우 김꽃비가 베를린 체류 중 ARD 타게스샤우의 베를린장벽 철거 25주년 관련 보도에 출연했다. 지나가던 아시안 관광객 1인으로(..) 2014.11.9 Tagesschau 뉴스 영상(3분 12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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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자유세계와 공산진영간의 가장 큰 문제가 뭔지 모르겠다는 자, 공산주의가 미래의 물결이라는 자, 공산주의와 협조해나갈 수 있다는 자, 공산주의가 적어도 경제적 진전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자는 베를린에 와보라. 자유에도 문제가 많고 민주주의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는 벽을 세워 사람을 가두어야 할 필요까지는 없다."
  • [2] 당시 오스트리아 역시 독일에 합병된 상태였으나, 합병이 강제적으로 진행된 점을 감안하여서 전범국으로 몰리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도 마찬가지로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나 영세중립국을 조건으로 하여 1955년에 통일되었다.
  • [3] 그런데 그 서베를린에도 작은 월경지들이 또 딸려 있어서 문제였다(...). 서독 '본토'와 서베를린 사이를 오가기도 힘든데, 서베를린 '본토'와 서베를린의 월경지들을 오가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자세한 건 월경지 항목 참고.
  • [4] 사실 서울 전체를 놓고 보면 자유 진영인 남한 영내에 속하지만 베를린 전체를 놓고 보면 공산 진영인 동독 영내에 속하므로, 오히려 북한 영내에 있는 평양이나 개성이 분단 전까지 수도였다는 가정 하에, 자유 진영에 속하는 남평양·남개성, 공산 진영에 속하는 북평양·북개성으로 나뉜다는 비유가 베를린 분단의 상황에 더 잘 들어맞는다.
  • [5] 그것을 쉽게 보여주는 예가 동독과 서독의 축구 경기다. 스포츠 강국인 동독이 서독보다 못했던 몇 안 되는 종목이 바로 축구. 그래서 동서독 축구대표팀의 친선경기는 분단 역사상 전혀 없었다. 유일한 대결이 월드컵 본선에서 맞붙은 것. 이 땐 동독이 이겼다. 청소년대표나 올림픽대표는 몇 차례 만난 적은 있긴 있다.
  • [6] 일례로 유럽의 경우 1차 세계대전보다 한참 전의 사람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사회주의 세력의 확장을 억누르기 위해 이들의 요구 조건인 '사회보장제도'를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뜻에서(?) 한발 앞서 만들어 놓을 정도였으나, 같은 시각 아시아 국가들은 아직 개인 정치 이념 같은건 꿈도 못꾸는 대부분이 전제왕조 국가였다.
  • [7] 다만 서독 정부에서 서베를린 주민들의 교통비를 일정부분 부담해서 현지인들에겐 큰 부담은 아니였다.
  • [8] 그러나 개인단위로 다닌다고 하면 엄청난 부담을 져야 했다.
  • [9] 물론 적군파 지원 등의 내부 사보타주는 했지만 북한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자기들 좀 수틀린다고 침투요원을 보내서 국경 마을을 때려 부순다던가, 병영을 폭파한다던가 하는 짓은 없었다. 상기한대로 또 다시 전쟁이 생기는것을 서로 원치 않았기 때문.
  • [10] 이 때문에 막장사건이 좀 많이 생기기도 했다. 국경 인근 마을에서 술먹고 주정부리다가 국경선 넘어서 동독 국경 경비대에 체포돼서 벌금형이나 징역형 크리 먹는다거나, 소가 도망쳐서 동독의 자유(…)를 만끽하다 명을 달리한다거나.
  • [11] 참고로 대한민국 휴전선의 군사 밀집도는 세계 최고로 좀더 쉽게 말하면 마지노선 1/3 길이의 전선에 마지노선과 비슷한 수의 군대가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마지노선에 비해 요새화는 좀 덜 되어 있는데(다만 북한 쪽은 요새화는 잘 돼 있다. 넘어가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한 목적도 겸해서) 앞으로는 인구 급감 때문에 요새화가 진전될 가능성이 있다.
  • [12] 실제로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 동독 국경경비대는 최소 2인 1조 근무를 원칙으로 했다. 누구 한명 튀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한국은 이마저도 혹시나 그 둘이 서로 맘이 맞을까봐 3인 1조 근무가 기본이다(...).
  • [13] 일반적으로 동독측 철의 장막 지역에서 민간인 통제구역은 8km 정도였다(한국의 민통선은 저것보다 훨씬 작다). 당연히 이 구간에서 국경경비대에 적발되면 즉결처분 당할 수도 있다. 애시당초 국경선 20km 안쪽 지역에는 사는 사람이 없다. 한국에 비유하자면 김포-일산-파주-연천-철원 등지에 있는 사람이 몽땅 소개되고, 출입하려 할 때마다 신분조사에 별도의 증명서류를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 [14] 실제로 서독 의회 건물 바로 뒤에 경계선이 놓여있었고(…), 히틀러의 야심작이던 포츠담 광장도 정확히 절반으로 나뉘어졌다. 지못미.
  • [15] 국가명 자체엔 U.S.A 같은 정식명이 아니라면 the를 안쓰므로 저것은 sector를 수식하는 것이다.
  • [16] 대표적으로 독일 총리인 빌리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 출신이다.
  • [17] 이에 관해서는 K. Hesse, Grundzüge des Verfassungsrechts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20. Aufl. 1995, Rdnrn. 93f.을 참조할 것.
  • [18] 원래는 그 다음날인 11월 10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기간상으로는 어느정도 맞게 설명한 것. 영상의 약 40초 부분에서 나온다
  • [19] 제 2차 베를린 위기 당시 소련군 과 미군의 탱크가 서로 대치한 곳 이기도 하다.
  • [20] 이 때의 영향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베를린 장벽에 "조국은 하나"라고 한글로 써 놓은 것이 찍힌 사진이 존재한다. 이것이 진짜 재독교포가 한 것인지, 아니면 조작인지 추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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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modified 2015-04-11 16: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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